기독교윤리실천운동은
성경의 원리를 실생활에 적용하며
가능한 한 정직하게 살며 그러한 삶의
근거 위에서 사회와 국가에 대하여
빛과 소금의 역할을 수행하려는
기독교인들의 운동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힘
정직한 시민
올곧은 삶을 소망하며 2
한국교회와 선교단체에 바란다 3
마음을 얻는 선교 8
제주도 자전거 여행 12
추천책 <무럐한 기독교>17
옥탑방 통신 18
회계보고 19
660-600 진주시 진주우체국 사서함 9호 전화 (055) 747-1484, 010-3999-7896
660-992 진주시 평거동 205-4 원정스카이팰리스 6층 카페 cafe.daum.net/jingiyun
진주기윤실 소식 제47호 발행인/백종국. 한영수 편집/이신복 발행일/2007. 10.8
올곧은 삶을 소망하며
한영수 / 공동대표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어느덧 지리한 장마와 무더운 여름이 걷히고 열매로 들판을 채우는 가을로 접어들었습니다. 이 가을에 우리에 대한 오래 참으심과 너그러우신 은총을 새기며 겸허함으로 감사를 올립니다. 넉넉한 마음으로 주위의 힘든 이웃들을 살피며 주님의 사랑을 나누는 가을이길 기원합니다.
지난여름엔 청주 대청호에 있는 청소년수련관에서 전국기윤실 실행위원수련회가 있었습니다. 여러 지역에서 참여한 기윤실 가족들과 함께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유익한 나눔을 가졌습니다.
내년부터는 전체 회원을 대상으로 하는 여름수련회를 가질 예정인데, 많은 회원 가족이 교제하며 유익을 얻을 수 있길 바랍니다.
이번 달에는 여러 모임과 사업이 진행될 계획입니다. 우선 10월 11일에는 두세 단체와 함께 교회개혁 토론회를 개최할 계획인데, 주위 교우와 함께 참여해주시길 부탁합니다. 말경에는 광주, 부산, 울산 기윤실 초청 간담회도 마련할 계획입니다.
이와 함께 지난해에 이어 경남청소년유해환경감시단 활동으로 미니오락기 실태조사를 시작해야 합니다. 다음 세대의 밝은 미래를 위해 감시단 활동에 참여할 회원은 사무실로 신청해주시길 기다리겠습니다.
어느새 올해도 세 달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지나온 날들을 돌이켜 보며 남은 날들을 알차게 보낼 수 있도록 마음자세를 가다듬어야 하겠습니다. 점점 이 땅의 소산물은 너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소홀히 여기지만, 인간의 생산물은 유행에 따라 가치 있게 대하고 아낌없이 투자하는 세태를 보게 됩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 기윤실 회원은 깨어있는 가운데 절제하며 분별력 있는 생활을 gi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올곧은 삶을 살면서 믿음의 은혜와 복된 소망을 체험하는 소중한 나날이 있길 간구합니다.
“아프가니스탄 인질사태를 돌아보며 한국교회와 선교단체에 바란다”
백종국 / 공동대표
최근 아프카니스탄의 탈레반에게 피랍되었다가 돌아온 우리 형제 자매들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아파오는 내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피랍 직후 언론매체를 통해 본 출국 전 그들의 화사한 얼굴 빛과 귀국 기자회견장에서의 그들의 상심하고 죄송한 표정은 너무나도 차이가 나 있었다. 대표격인 유경수씨는 “조국과 국민에게 큰 빚을 졌다”고 말하면서 깊이 허리를 숙였다.
45일 동안 온 국민들은 하루속히 인질의 몸에서 풀려나기를 소원하였고, 교회마다 마치 감금된 베드로를 풀어달라고 초대교회 성도들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간절히 기도하였던 것처럼, 눈물로 기도하였었다. 그래서 풍전등화 같은 죽음의 위기를 모면하고 살아 돌아왔기에 안타까워했던 사람들 모두 기뻐해야 했었다. 그러나 귀환자들은 기자회견장에서 고개를 숙이고 울먹이고 있고, 그동안 쉬쉬하고 있던 한국의 언론들은 그들이 풀려나자마자 “한국정부가 테러집단과 원칙 없는 협상을 함으로써 인질범들인 탈레반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다“고 노무현 정권을 비난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런 상황은 우리를 당황하게 하며, ‘한국교회는 선교를 제대로 하고 있는가?’, ‘우리의 선교방향과 전략은 성경에 기초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한다.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에 따르면, 지난해 말 현재 외국으로 파송된 선교사는 228개국에 16,616명이라고 한다. 미국 다음으로 세계에서 2위의 규모이다. 수적으로 보면 선교대국이나 다름없지만, 정작 선교의 지침이 될 만한 선교신학, 선교정책, 및 선교전략은 잘 정립되어 있지 못하며, 선교기관들끼리의 협조관계도 잘 구축되어 있지 않아 왔다. 이것은 아프간사태의 예에서 명백하게 보여 진다. 왜냐하면 독립적인 단기 선교팀인 샘물교회의 의료봉사자들이 인질로 억류가 되자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한국정부가 한국기독교인의 아프간 선교 금지를 인질범들과 약속함으로써 현지에서 선교토양을 어렵게 구축한 백여 명의 선교사들이 철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아프간이라는 같은 선교지에서 선교전략없이 서로 독립적으로 무관하게 선교를 한 결과이다.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는 데 있어, 선교전략의 부재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선교를 사실상 방해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우리가 우리의 선교 현실을 정확히 알려고 좀더 일찍 노력만 했더라도 한국교회가 세상의 지탄을 받지 않고 성도들의 순수한 열정을 올바른 방향으로 쏟아부을 수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사실, 작년에 우리의 선교 전략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었다. 그것은 작년에 매스컴을 떠들썩했던 아프가니스탄 평화축제의 사건이다. 작년 여름에 1000여명 가까운 아프가니스탄 평화축제 참가자들이 테러위험과 이슬람종교 지도자들의 항의로 인한 아프칸 정부의 출국요구로 집회를 포기하고 철수하였었다. 그런 상황을 경험하면서 한국교회와 선교단체는 서로 힘을 합하여 선교에 대한 체계적이고도 지혜로운 접근방법에 대해 논의를 시작했었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서 주님께서 선교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고 계신지 깨닫고, 성경에 기초한 선교정책과 선교전략을 개발하여야 한다.
마태복음 10장을 보면, 주님께서 열두 명의 제자를 파송하시면서 명령하셨다. 첫째,,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는 말씀은 선교대상자를 명확하게 구분하라는 명령으로서, 분위기에 이끌려서 목적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선교하는 것을 경계하신 것이다.
둘째,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웠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는 명령은 우리가 선교하는 목적은 영혼 구원에 있다는 것과 우리의 사역과 봉사는 그 방편이며, 선교에는 대가를 바라면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셋째,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는 말씀은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물질 공세를 마다하지 않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복음의 능력을 자세히 전해주기보다 전도팀마다 물질을 일시적으로 공여하는 것은 별 소득도 없고 그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생명을 전해주는 것 자체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결신자에게는 이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것이므로 그들은 복음을 전해준 사람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신다.
넷째,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는 분부는 선교에 우호적인 사람들을 찾아서 그들을 선교거점으로 활용하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선교할 때 유대인들의 회당을 중심으로 선교에 나섰고, 선교가 반대에 부딪히면 결신자의 집을 근거지로 하여 선교하였던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다섯째,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는 부탁은 우리가 선교의 혈기를 가지고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끝까지 개종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말고 조용히 물러 나와 주님께서 예비하신 다른 사람에게로 가라는 말씀이다.
여섯째,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는 말씀은 선교 핍박을 예상하라는 말씀이다. 이전에 중국의 윈형제의 전도행전인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는 책 내용에서 선교사 훈련과정 중에 ‘2,3층에서 뛰어내려 도망하기’가 있음을 보고 반대 세력이 많은 곳에서의 선교사역에서 당하는 핍박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사도바울도 핍박을 피하여 광주리를 타고 성 바깥으로 도망간 적이 있다.
일곱째,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중략)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선교에 임하는 우리의 마음가짐과 선교를 통하여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우쳐 주신다.
주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것처럼 선교 열정을 가진 한국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신다. 선교는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하면서 아무 장소나 아무 때나 스스로 위험에 노출되면서 지혜롭지 않게 행하는 것이 아니다. 선교를 효과적이고도 효율적으로 잘하기 위해서는 영혼 구원의 목적을 가지고 선교대상자를 명확하게 선정하며, 반대자들의 핍박을 예상하고 대처방안을 준비하며, 선교지마다 그에 따른 선교전략을 가져야 한다.
이번 아프간사태를 계기로 한국교회들과 선교단체들은 서로 마음과 힘을 합하여 선교협조 체제, 선교강령, 선교지에 따른 선교방법, 선교자원의 훈련, 선교지원을 위한 단기선교 수준 및 역할 등에 대하여 심도 깊은 토의와 정책수립을 시도하기를 바란다. 그럼으로써 한국교회는 잃어버렸던 신뢰를 회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마음을 얻는 선교
섬김과 나눔으로 세계를 품어야
양세진 / 기윤실 사무총장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6:8)
2007년 8월 28일. 아프간에 단기 의료봉사를 떠난 샘물봉사단이 2007년 7월 19일 탈레반에 의해 피랍된 지 41일 만에 모든 피랍자들을 석방하기로 한국 정부와 합의했다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서 공식 발표가 되었다.
이번 사건은 한국교회의 선교와 봉사에 대한 그리고 다원화되고 복잡하며 역동적인 현대사회 속에서의 교회의 존재방식에 대한 많은 도전과 성찰을 안겨주었다.
한국교회의 선교와 봉사 사역 전반에 대한 진지한 숙고와 고민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전제 아래, 선교의 공공성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보고자 한다.
샘물교회 의료봉사단이 탈레반에 피랍된 이후 교회는 언론에 발표하기를 ‘아프간에 간 의료봉사단은 선교가 아니라 봉사를 목적으로 갔다’고 하였다. 아마도 샘물교회 교인들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의 많은 성도들은 이러한 수사학적 표현에 대해 의문을 심지어는 불만을 가졌을 것이다. 필자 역시 처음에는 왜 선교가 아니라 봉사라고 굳이 강조하였을까, 분명 단기 선교사역으로 간 것이 분명한데 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추후 이러한 교회의 언어적 표현이 탈레반에 피랍되어 있는 봉사단원들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 불가피한 전략적 선택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선교’와 ‘봉사’라는 개념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이해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갖게 하였다.
우리는 흔히 닭과 알의 관계를 비교하면서, 무엇이 우선하는지를 놓고 논쟁을 벌이곤 한다. 닭이 먼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닭이 먼저 있어야 알을 낳을 수 있기 때문에 닭의 우선성을 강조하며, 알이 먼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알이 먼저 있어야 거기에서 병아리가 나오고 닭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알의 우선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우리가 닭과 알의 관계를 통해서 얻어야 할 메시지는 무엇이 우선하는가가 아니라 닭과 알은 다른 한 쪽을 배제하고는 설명될 수 없는 상호의존적인 관계임을 깨닫는 것이다. 어떻게 닭이 알과 무관하게 존재할 수 있으며, 알은 닭과 무관하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 ? 그런 점에서 선교와 봉사의 관계를 무엇이 더 중요하고 우선하느냐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제한적으로 해석할 우려가 있다. 선교와 봉사의 관계를 이해할 때 중요한 것은 무엇이 우선하느냐의 물음이 아니라 이 양자는 상호의존적인 관계 속에서 가치를 창출하고 시너지를 낼 수 있다는 통전적인 관점을 갖는 것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보면 복음주의 교회와 에큐메니칼 교회는 동일하게 하나님의 선교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그것이 지시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다르게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복잡하고 다원적이고 역동적인 현대 사회 속에서 선교와 봉사를 말할 때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두 가지 중 어느 하나의 우선성을 고집하는 것이 별 유익이 없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선교와 봉사는 상호의존적인 맥락속에서만 그 가치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오히려 우리에게 더 근본적인 의문을 가져다 준 것은 동일하게 아프간에 봉사를 하러 갔는데 누구는 포로로 피랍되고, 누구는 협상의 중재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는가 이다.
똑같은 섬김과 나눔, 봉사를 수행했음에도 왜 적신월사는 탈레반의 협상 파트너로 존중을 받고 한국의 봉사단은 피랍되고 고통을 당해야만 하는지에 대해서 근본적인 성찰과 반성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면서 과연 다원화되고, 역동적이고 복잡한 현대사회 속에서 복음은 과연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물음을 던지게 되었다. 오늘 우리가 물어야 할 물음은 ‘복음이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복음은 이 세계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가, 존재하고 있는가에 대한 존재방식을 물음으로서만 복음의 진정한 의미를 해명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의 기쁜 소식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혹은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인 복음은 분명 오늘날 교회 공동체와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존재하고 있다. 지역사회를 향한 교회의 봉사 사역과 일상생활 속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해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밝히 드러나 보이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의 현존을 그들이 날마다 관계 맺고 있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해서 밖에는 느낄 수 없다.
선교와 봉사의 진정성을 추구한다면, 우리의 사역을 통해 밝히 드러나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세상의 마음을 얻어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던져야 할 보다 근본적인 물음은 우리는 과연 어떻게 그들의 마음을 얻을 것인가? 심지어는 테러집단이라 불리는 탈레반의 마음까지도 얻을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언론보도를 통해서 많이 알려져 있듯이, 적신월사는 이슬람권의 적십자사이다. 우리 정부와 탈레반과 인질 석방 합의에는 적신월사가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우리 정부와 탈레반의 대면접촉 장소도 가즈니주의 적신월사 건물에서 이뤄졌다. 적신월사는 이슬람권의 적십자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적신월은 지난 1929년 국제적인 공인을 얻게 되면서 현재 33개 나라가 사용하고 있다. 적신월사는 이라크와 팔레스타인 등지에서 각종 구호활동을 펼치며 이슬람권에서 신망이 두텁다.
적신월사의 기본적인 활동 방향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다. 간호 봉사를 위해 갔음에도 불구하고 이슬람권의 사람들이 불편해 한다는 이유로 초승달을 상징으로 바꾼 이유는 바로 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함이었다. 탈레반이 적신월사의 역사적 뿌리가 그리고 정신적 가치가 기독교임을 왜 모르겠는가? 그러나 탈레반의 마음을 얻은 적신월사의 선교와 봉사, 섬김과 나눔은 한국교회에 회피할 수 없는 강렬한 메시지를 던져주었다고 생각한다.
이제 우리는 마음을 얻는 선교와 봉사, 섬김과 나눔으로 세계를 품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되겠다는 결단과 헌신 그리고 보다 정교하고 디테일한 선교와 봉사가 유기적으로 통합된 사역 전략을 수립해 나가는데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물론 상황과 맥락에 따라 선교와 봉사 중 무엇이 더 중요한 가에 대한 강조점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기준으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언제 선교를 강조하고, 혹은 언제 봉사를 강조할 것인가의 차원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진정으로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를 묻는 것이다.
2007년 여름 한국교회에 쏟아진 비난은 아프간에 간 샘물봉사단 때문이 아니다. 고통이란 귀 먹은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메가폰이라고 강조한 C.S.루이스의 말처럼 우리를 압도했던 이 여름의 지극한 고통은 하나님의 선교가 어떠한 방식으로 수행되어야 하는지를 말해준 하나님의 메가폰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럼 하나님의 강렬한 메시지를 들은 우리들은 이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
제주도 자전거 여행
정은실 / 실행위원
배안에서의 잠은 자는 둥 마는 둥이었습니다. 잠시 가벼운 잠을 자고 일출을 보려고 일찍 일어났는데, 흐린 날씨로 배에서 내리기까지 장엄한 광경은 없었습니다. 하긴 진주에서 지리산을 보는 것도 쉽지 않고, 제주에서 한라산을 제대로 보는 것이 쉽지 않으니, 배에서 일출을 맞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기는 합니다. 약간의 아쉬움은 뒤로 하고 이제 배에서 내려 본격 장정에 들어가야 합니다.
제주 여객 터미널에 내려 인사를 나누고 제주항 오른쪽으로 나가야 합니다. 한림 대정 방향으로 가려면 오른쪽 해안을 따라가야 합니다. 용머리 해안을 거치고 용연을 지나서 공항 뒤로 이어진 해안도로에 접어들어야 합니다. 해안도로에 들어서려는데, 입구에 있는 자전거 대여점에 kt 직원인 그 분이 자전거를 대여하려고 있었습니다. 자전거를 고르고 서류를 작성하고, 두 아가씨들도 자전거를 빌리려 서 있었습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이 아가씨들은 오다가 중도에서 포기했나봅니다. 기어변속을 이해해야 하는데, 그걸 모르고 오르막을 오르면 금방 퍼지게 마련이죠. 그렇게 200여 킬로를 달리기는 힘듭니다. 제주를 도로만 따라서 한 바퀴 일주하면 200여 킬로미터 정도 된다고 합니다. 물론 저의 일정은 여기서 벗어나는 것이지만.
해안도로를 따라 여행하는 것도 색다릅니다. 몇 번의 여행에서도 해안도로를 잠시 접어들기는 했지만, 따라간 적은 거의 없습니다. 자전거를 타니 여유롭게 해안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보고 싶은 걸 보고 지체하고 싶은 만큼 지체하면서. 결코 차 보다 느리지 않습니다. 속도로 차를 따라잡을 수는 없지만, 같은 3박 4일 일정이라면 차가 가는 코스대로 얼마든지 그대로 갈 수 있습니다. 엔진이 조금은 고달프겠죠!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다
완전히 정비된 애월 해안도로로 가려고 합니다. 이호해수욕장을 스치듯이 지나서 애월로 접어들었습니다. 이전엔 애월을 큰 도로를 따라 지나갔는데, 그것도 반대편에서 돌아오는 길에 지났지만, 이번엔 처음부터 이곳으로 들어섰습니다. 해안도로를 따라 이어지는 해안선은 이국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겨줍니다. 굽어지는 곳곳마다 잔디를 조성해서 섭지코지에 간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줍니다. 해안절벽 끝에 세워진 집도 아름다운 풍광을 만들어줍니다.
애월을 지나면 곽지가 나옵니다. 제주의 바다가 어디인들 예쁘지 않은 곳이 있을까요? 애월부터 곽지, 협제까지의 바다색도 장난이 아닙니다. 바다만 보고 지나가도 제주에 온 곳이 후회되지 않습니다. 곽지해수욕장과 바다는 눈으로만 보고 지나가고, 협제로 달립니다. 바다를 보며 달리니 지루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흰색, 때로는 연녹색, 때로는 파랑색 색색의 빛깔은 바다에 빠지도록 만듭니다.
협제엔 몇 번 갔습니다. 갈 때마다 그 바다가 좋았습니다. 보통 협제는 한림공원에 가면서 잠시 들르는 곳처럼 여겨지지만, 저에겐 그렇지 않습니다. 한림공원은 가지 않아도 협제의 바다엔 가겠습니다. 한림공원은 물론 몇 번 들어가기도 했지만, 투어의 한 코스일 따름입니다. 한림공원도 좋습니다. 볼거리들이 가득하지요. 그 안엔 협제 쌍룡굴도 있고, 분재, 다양한 수석들, 나무들, 꽃들 두어 시간은 볼거리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몇 번 갔었고, 비슷한 곳들이 여러 곳이라 이번엔 가지 않았습니다.
이번 여행의 특징 중 하나가 여러 번 갔던 곳은 과감하게(?) 생략하는 겁니다. 별 아쉬움도 없이. 게다가 유명 관광명소들을 생략했으니 관람료는 전혀 들지 않았지요. 보통 이름난 곳은 7,000원의 관람료가 들어갑니다. 제주 전체를 돌아보면, 관람료가 대단합니다. 하지만 이번엔 이전과는 다른 여행을 하고 싶었습니다.
과감하게 생략하는 색다른 여행
협제에서 한림공원을 들르지 않고 바로 대정 방향으로 접어들었습니다. 대정으로 가다 녹차를 재배하는 ‘오설록’을 가려고 합니다. 제주에 있는 차 재배지, 하동이나 보성의 녹차재배는 보았지만, 제주는 조금은 색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정을 향하는데, 배에서 만난 kt 직원인 분을 또 만났습니다. 제가 소개했던 제주 분재원으로 가는 중이라고 합니다. 그곳은 제가 아는 곳이니, 그곳까지 인도해주고, 전 들어가지 않고 바로 오설록으로 향했습니다.
제주분재원은 추천할 만한 곳입니다. 작년에 같이 공부하는 목사님들과 갔었는데, 제법 비싼 입장료가 아깝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의 오랜 노력이 결실로 담긴 흔적이 보여서 더욱 그랬던 것 같습니다. 물론 너무 예쁜 분재들이 많습니다. 전문가적인 식견이 없어 그저 아름다움에만 감탄하지만, 전문가들이 보아도 그리 다르진 않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분재들을 보고 먹었던 점심식사(한식뷔페)는 비싸지도 않고 알찬 먹거리였습니다. 다시 들어가도 그리 아까울 거 없지만, 이번엔 피하기로 한 것, 스쳐지나갑니다.
뜨거운 태양과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열기를 받으며, 오설록에 도착했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좀 다른 분위기였습니다. 제주의 냄새가 무어냐고 한다면 분명히 말하긴 그렇지만, 특유의 색깔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아 제주에도 녹차 밭이 있구나~” 그 이상의 감응은 없었습니다. 전시장 부근에 구릉의 잔디와 쉼터, 깔끔한 전시장, 그 정도입니다. 뭔가를 기대하고 간다면 조금 실망할 수도 있는, 물론 좋은 사람들과 같이 간다면, 좀더 다른 느낌을 가질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건 어디서나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
추사적거지, 추사의 유배시절을 느끼다
이제 다음 향할 곳은 드디어 대정에 있는 ‘추사적거지’입니다. 추사선생께서 제주 유배시절에 머물렀던 곳입니다. 몇 번을 가려했지만 가지 못했던 곳. 바울선생께서는 로마교회를 향해 몇 번을 가려했지만, 막는 것이 있었다고 했는데, 몇 번이나 이곳에 가려했지만, 막는 것(일행들?)이 있어서 가지 못했습니다. 이젠 제 생각대로 추사적거지로 향합니다.
추사적거지는 여러해 전 유홍준 선생(문화재청장)이 쓴 <완당평전>을 읽으면서 제주에 가면 꼭 가보리라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막는 것 때문에, 두 번이나 막혔었습니다. 이제 세 번째 시도에서 이루어집니다. 완당은 추사의 또 다른 호입니다. 추사는 호를 필요에 따라 100여 개나 사용했다고 하니 호의 숫자에서도 대단합니다.
추사 선생은 위리안치의 유배를 당해 탱자로 된 울타리 안에서 살아야 하는 답답한 유배생활이지만, 지식인으로서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라 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갔습니다. 주변의 꼬마들과 일반인들을 모아서 글을 가르치며 교류했으니 그렇지 않습니까?
조선최고의 학자라 할 만한 분이 가장 궁벽한(?) 곳에서-지금이야 교통수단이 발달하고 관광이 활성화되었으니 참 좋은 곳이 제주이지만, 당시엔 목포에서 배편으로 와야 하는데, 보통 어려운 뱃길이 아니었습니다. 추사선생도 유배 길에 오르면서 제주에 가는 길에 모진 고초를 당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학동들을 가르치며 그곳 사람들과 교류했으니 말입니다. 게다가 대정은 제주에서도 산골 벽촌이었습니다. 추사를 만난 대정 사람들은 홍복이었겠지요!
유배라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옛날의 유배를 살펴보면, 재밌는 점이 있습니다. 유배지마다 어찌 그리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는지. 물론 지금의 눈으로 그렇습니다. 예전엔 가장 사람들과 접촉이 쉽지 않은 곳을 택해서 보낸 곳이 유배지일 터입니다. 그러다보니 그런 곳마다 절경입니다. 나랏님께서 유배를 보내긴 하지만, 은혜를 베푼 것일까요? 물론 지금의 눈으로 본 것입니다. 얼마 전 서포 김만중 선생이 유배됐던 남해 노도를 지나가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추사적거지에 도착하니 적거지에 어울리지 않는 건물에서 관람료를 받습니다. 500원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적거지는 초가인데, 시멘트로 된 건물에서 관람료를 받으니, 묘한 기분이 듭니다. 적거지에 들어서면 ‘추사 김선생 적거유허비’라는 큼직한 비석이 하나 서 있고, 그 안에 추사 선생이 머물던 공간과, 아이들을 가르치던 공간이 있습니다. 비록 안에 추사 선생도 없고, 가르침 받던 학동들도 없지만, 아이들의 재잘거림과, 선생의 깊은 울림의 공명이 들리는 듯합니다.
선생의 운신을 어렵게 했던 탱자나무 울타리가 지금은 없지만, 탱자나무 울타리도 선생의 생각이나 학문은 막지 못한 것 같습니다. 추사체의 완숙함은 이곳에서 이루어졌다는데, 학자들은 이견이 없습니다. 고난의 세월은 그의 학문이나 필체를 더욱 깊이 있는 세계로 이끌고 간 듯합니다. 물론 그의 최고의 명작인 ‘세한도’도 이곳에서 그려집니다. 완당은 해배되어 고향으로 올라가는 길에 대둔사 초의스님을 만나 그의 유배생활이 그를 돌아볼 수 있는 진정한 기회였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최근 이랜드 노사문제와 아프간봉사단 피랍사건을 계기로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높아져 가고 있는 이때에, 기윤실에서는 회원 필독서로 우리가 가진 종교적 신념에 대해 양보하지 않으면서 타종교와 타인을 배려하고, 예의를 지키는 '신념있는 시민교양'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풀러신학교 총장 리처드 마우의 "무례한 기독교"를 필독서로 선정하여 추천해 드립니다.
기윤실이 무례한 기독교를 넘어 신뢰받는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데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회원 여러분들의 격려와 기도 부탁드립니다.
옥탑방 통신
1. 한국교회개혁 토론회가 열립니다
일시: 2007년 10월 11일 목요일 7시
장소: 진주 칠암교회당 교육부실(지하)
토론주제: 아프가니스탄 봉사단 피랍사태에 대한
‘한국교회 선교에 주어진 새로운 도전’
발제자: 이상화 목사(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사무총장)
사회자: 백종국 교수(진주기윤실 공동대표)
토론자: 정은실 목사(진주기윤실 실행위원), 강순규 국장(진주YMCA)
2. 기윤실 아카데미를 진행합니다
기간: 2007년 11월 6일부터 매주 화요일 4주간
장소: 기윤실 사무실(진주 평거동 원정스카이팰리스 6층)
강의내용
11/6 백종국(경상대 정치학부 교수)‘그리스도인의 정치참여’
11/13 한영수(작은교회 목사)‘현대사회에서의 기독시민의 삶’
11/20 이창원(산업대 경영학과 교수)‘크리스찬 기업가의 사회적 책임’
11/27 박영선(YWCA 사무총장)
“여성결혼이민자의 문화적 차이에 따른 사회적 지지”
* 수강료는 일반인 2만원/ 학생 1만원입니다. 등록 및 문의는 조세인 간사(055-754-1484, 010-3999-7896)에게 10월말까지 해주세요.
3. 청소년유해환경감시단 활동을 함께할 회원들을 모집합니다. 10월 중에 진행할 예정입니다. 사무실로 연락주시면 됩니다.(055-754-1484)
4. 진주기윤실과 만나시려면, 가벼운 걸음으로 카페에 방문해주세요. (카페주소:cafe.daum.net/jingiyun)
회계보고
2007년 9월 회계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