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야구는 축제다. 다른 학생 야구부와 다른 점이다. 학부모들도 '내 아이'가 잘하기보다 야구를 통해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며 즐거워하는 걸 더 원한다(사진=스포츠춘추 홍진혁 기자)
6일 경기도 남양주시 리틀야구장에선 제7회 다산기 전국리틀야구대회 결승전이 열렸다. 70개 팀이 참가한 가운데 치열한 예선을 뚫고 결승까지 오른 팀은 남양주시 리틀야구단과 창단 인천 남동구 리틀야구단이었다.
남양주시 리틀야구단은 ‘리틀야구계의 SK’로 불릴 정도로 최강팀이었다. 2003년 창단 이후 전국대회 우승 28회, 준우승 13회를 기록했다. 전해 다산기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던 남양주시는 등록선수가 80명에 가까울 만큼 두터운 선수층을 자랑했다.
반면 인천 남동구 리틀야구단은 신흥 강팀이었다. 창단은 2008년으로 다소 늦었지만, 올해 스카이라인기와 구리시장기에서 3위, 도미노피자기에 준우승을 차지하는 등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뤘다. 선수는 30명으로 남양주시에 절반도 되지 않지만, 선수들의 열정만은 대단했다.
경기 전, 예상은 남양주시의 압도적 우세였다. 남동구의 타력이 뛰어나지만, 남양주시의 타력이 더 뛰어나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남양주시 5번 타자 김성훈(호평중 1)의 존재감이 뚜렷했다. 올 시즌 홈런 5개를 기록 중이던 김성훈은 스카이라인기에서 MVP로 뽑힐 만큼 실력이 출중했다. 리틀야구 관계자들이 입을 모아 “초리틀급 선수”라고 칭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남동구 이건복 감독도 “현실적으로 남양주시 리틀야구단을 이길 팀은 없다. 결승까지 오른 것만으로도 아이들이 자랑스럽다”며 경기 결과보단 과정에 집중할 생각임을 밝혔다.
예상대로였다. 남양주시는 1회 말 3점을 내며 앞서나갔다. 공격의 선봉장은 김성훈이었다. 김성훈은 남동구 선발 한교우의 가운데 속구를 받아쳐 2점 홈런을 터트렸다. 이때만 해도 김성훈의 홈런에 크게 집중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3회 말 다시 김성훈이 2점 홈런을 터트리자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리틀야구에선 보기 드문 연타석 홈런이 나왔기 때문이다. 김성훈의 연타석 홈런으로 3회까지 남양주시는 남동구에 6대 1로 앞서나갔다.
하지만, 남동구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4회 초 남양주시 투수진이 흔들리는 사이 대거 5점을 내며 동점에 성공했다. 4회 말 남양주시가 1점을 뽑아내며 다시 7대 6으로 앞섰으나 리틀야구에서 1점 차 리드는 살얼음판과 같았다. 언제 역전될지 몰랐다.
5회 말 남양주시는 사력을 다해 점수 차를 벌리려 노력했다. 그러나 현실은 엄혹했다. 포수를 보던 4번 타자 박용욱이 타구에 맞아 교체되며 타선의 중량감이 한결 떨어진 것이다. 남양주시 코칭스태프는 타석에 들어서는 김성훈에 큰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연타석 홈런을 쳤던 김성훈에게 다시 무언가를 바라는 건 무리인 듯 보였다. 이유가 있었다.
성인과 달리 리틀야구 선수들은 4회 이후 체력이 급속히 떨어지게 마련이다. 집중력도 마찬가지다. 가뜩이나 김성훈은 3루수를 맡았다가 4회부터 마운드에 오른 상태였다. 3연타석 홈런은 고사하고, 과연 안타나 칠 수 있을까 우려되는 상황에서.
기적이 연출됐다. 김성훈이 좌측 담장을 넘기는 대형 솔로홈런을 터트린 것이었다. 1, 3회 홈런에 이어 5회에도 홈런을 치며 김성훈은 대회 첫 3연타석 홈런의 주인공이 됐다. 김성훈의 홈런 3방으로 남양주시는 남동구를 9대 6으로 꺾고 우승컵을 안는 데 성공했다.
경기가 끝나고 연맹은 과거의 기록지를 모두 뒤졌다. 김성훈의 3연타석 홈런이 한국리틀야구 사상 첫 3연타석 홈런일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결국, 연맹이 밝힌 최종 결과는.
“한국 리틀야구 사상 첫 공식 3연타석 홈런이 맞습니다”였다.
연맹 신현석 전무는 “과거 3연타석 홈런이 한차례 있었다는 보고를 받고 이전 기록지를 모두 확인했다”며 “확인 결과 당시 홈런은 3연타석 홈런이 아닌 3연타수 홈런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고 말했다.
리틀야구계의 이대호, 김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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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훈은 투수로도 재능이 뛰어나다(사진=스포츠춘추 홍진혁 기자)
한국 리틀야구 출범 40년 만에 3연타석 홈런의 주인공이 된 김성훈은 초교 4학년 때 처음 야구공을 잡았다. 이전까진 야구엔 관심도 없었다.
“원래는 야구를 하지도 않았어요. 육상이나 축구처럼 또래들과 뛰어노는 걸 좋아하는 아이였어요. TV에서 하는 야구중계도 보질 않았고요. 아이 아빠나 저도 성훈이가 야구에 관심을 두는 걸 좋아하지 않았고요.” 김성훈의 어머니 말이다.
김성훈이 야구에 관심을 두지 않은 덴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아버지가 축구계에 종사하기라도 했던 것일까. 반대다. 김성훈의 아버지는 명유격수 출신의 두산 베어스 김민호 수비코치다.
“남편이나 저나 야구선수가 얼마나 힘든 직업인지 잘 알고 있거든요. 아이까지 그 힘든 일에 뛰어드는 걸 원치 않았어요. 성훈이도 아빠가 야구선수 출신이다 보니 야구보단 다른 쪽에 더 관심을 두는 것 같았고요.”
그런 김성훈이 야구를 시작한 건 역설적이게도 아버지 때문이었다.
“성훈이가 초교 4학년 때 남양주로 이사했어요. 그즈음 남편이 남양주 리틀야구단 이성찬 감독님과 친해졌어요. 하루는 감독님이 남편한테 ‘아이를 데리고 야구장에 놀러 오라’고 했나 봐요. 그래 쉬는 날 남편이 성훈이를 데리고 야구장에 갔는데 감독님이 피칭을 시켰던 모양이에요. 생전 야구를 멀리했던 성훈이인데, 그날 피칭을 잘했나 봐요. 감독님이 ”운동 삼아 야구를 시켜보자“고 권유하더라고요. 남편과 저도 취미 정도면 괜찮겠다 싶었죠. 하지만, 지금까지 야구를 계속할 줄은 몰랐어요.”
김성훈의 부모는 지금도 아들의 야구를 즐긴다. ‘극성’과는 거리가 멀다.
김성훈은 지난해에도 홈런 4개를 쳤다. 올해는 3연타석 홈런을 포함해 8홈런을 기록 중이다. 김성훈은 9월이면 리틀야구단을 떠나야 한다. 연맹 규정상 중학교 1학년 9월까지만 리틀야구 선수로 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때가 되면 야구부가 있는 중학교로 전학 가려고 해요.” 김성훈은 이미 9월을 대비해 전학할 중학교를 알아본 상태다.
공부와 야구를 병행하기 때문에 리틀야구 수준을 낮게 보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초교 야구와 연습경기를 벌이면 우리가 늘 이겨요. 한번은 중학교 야구부 1학년들이랑 연습경기를 치렀는데 우리가 22대 3으로 이겼어요.”
김성훈의 말처럼 리틀야구단의 실력은 웬만한 학교 야구부를 능가한다. 누가 시켜서 훈련하는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훈련하는데다 많은 실전경기를 치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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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남동구 리틀야구단은 재미난 이름의 선수가 많다. 사진은 남동구의 정수근, 최동원 선수. 정수근은 3루수와 투수, 최동원은 포수와 투수를 보는 재능이 뛰어난 선수들이다(사진=스포츠춘추 홍진혁 기자)
김성훈은 투수를 하고 싶어한다. KIA 윤석민이 롤모델이다. 올 시즌 다산기 전까지 모든 대회에서 2실점만 기록한 빼어난 투구실력을 선보였다. 그러나 주변에선 타자가 되길 바란다. 지금처럼 ‘초리틀급 타격’이라면 10년 내 한국 프로야구를 주름잡을 대타자로 성장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김성훈도 이를 아는지 “타자로 나선다면 SK 정근우 같은 선수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사실 김성훈이 투수가 되고 싶은 배경엔 아버지 김 코치의 한도 있다.
“아버지가 다른 포지션은 다 경험해보셨는데 투수는 못해 보셨대요.”
지금의 김성훈이라면 투수가 되든, 타자가 되든 훌륭한 선수로 자랄 게 분명하다. 실력만큼이나 야구와 동료를 대하는 자세가 진지하기 때문이다.
한국 프로야구는 성장일로다. 야구 인기에 힘입어 공원과 학교 운동장엔 수많은 야구소년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우리가 프로야구에 집중하는 사이. 한국 야구의 밑바탕인 리틀야구계에선 ‘제2의 김봉연’, ‘제2의 이대호’가 그라운드에서 꿈을 키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