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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심사 능력 쌓기 >
회원님들 안녕하셨어요.
15회 카페문학상 응모 작품 심사를 의뢰합니다.
25일까지 김홍은 메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 7월 25일 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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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회 카페문학상 작품/ 주제 - 달
1. 해와 달/
장독대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항아리에 물을 뿌렸다.흩어지는 물 분자 사이로 무지개가 뜬다.항아리마다 행주로 문지르며 송홧가루를 닦아내니 검붉은 항아리 본연의 색이 난다.어머니는 할머니 대를 이어 항아리를 정갈하게 관리하셨다. 3대째 어머니의 항아리를 물려받은 나는 농막에 들릴 때마다 행주로 훔쳐내고 온다.할머니께서 일본으로 유학 가신 아버지를 위해 늘 정화수를 올려놓고 기도하셨던 곳도 장독대 위에 놓여있던 항아리였다고 했다.사기로 만든 사발 속에 달이 떴고,할머니는 달을 보며 위안을 얻었다고 했다.할머니와 어머니께서는 항아리가 비면물을 채워 지나가는 구름을 담기도 하시고 바람에 업혀온 단풍잎 배를 띄우기도 하셨다.
몇 년 전,뉴질랜드로 가족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그곳에서 보았던 낮달이 신비스러워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뉴질랜드는 우리나라와 시차가 고작3시간이니 적응하기 힘들지는 않았다.아침은 가볍게 먹는 편이라 근처 퍼그 베이커에 들러 커피와 빵을 주문해서 먹었다.빙하가 녹아 흐르는 다트 강을 따라 세워진 산봉우리가 신비스러웠다.우리는 소나무 숲이 우거진 마운트어 스파이어링 국립공원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해와 달이 함께 떠 있었다.그곳에서 들은 가이드의 해설이 인상적이라서 농막 간장 항아리에 잠긴 달을 보면 늘 뉴질랜드의 하늘이 생각났다.가이드는 낮달이 보이는 이유는 하늘의 광도보다 달의 광도가 더 크기 때문이라고 했다.태양 가까운 하늘의 광도는 달의 광도보다 높으므로 여기 달이 있다면 태양 빛을 차단하지 않으면 달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낮달은 신기하게도 하얀빛을 띠었는데 이유는 낮에 태양 빛이 푸른색이 산란하여 푸른색으로 빛나는 색유리와 같은 공기층을 뚫고 달빛이 우리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라고 했다.달이 공전하면서 생기는 현상이 바로 달의 모양이 달라지는 것이고 초승달에서 반달로 반달에서 보름달로 다시 초승달이 되는 것이 이 공전 때문이라고 설명해 매우 흥미로웠다.또 달은 밤에는 노란색으로 보이고 밝은 낮에는 태양과 달의 거리가 가까워 잘 보이지 않거나 흰색으로 보인다고 했다.파이어링 국립공원에서 태양과 함께 떠 있는 낮달 때문에 달에 관한 공부는 많이 했지만,달에 대한 신비했던 어린 시절이 공기 중에 흩어지는 것처럼 아쉬웠다.
할머니께서 지금까지 살아계시고 함께 여행하면서 낮달을 보셨다면 어떤 표정을 지으셨을까.할머니는 정화수 사발에 보름달이 뜨면 할머니 소원이 성취되실 거라 믿으셨다.기도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니 몸속 기를 모아 발원할 때 정성이 하늘에 닿아 이루어지는 게 아닐까.장독대 위에 있는 항아리를 목욕시키니 소래기 위에 물이 동그랗게 고였다.밤이었다면 우리 집 항아리 위에 서른 개의 보름달이 뜨고 내 마음속에 달을 품으니 달 풍년이 들었을 게다.
어릴 때 과학이 발달하기 전까지는 달 속에 토끼가 방아를 찧는다고 생각했었다.정월 대보름날이 되면 더 가까이 달을 보며 소원을 기도하기 위해 동산으로 올라갔던 적도 있다.야근하고 퇴근하는 길에 달은 등불이 되어 집으로 안내했고 창문으로 드나드는 달빛에 가슴 설렜던 청춘이 있었다.
2. 달을보며/
나는 밤하늘을 좋아한다. 밤하늘 중에서도 달빛이 교교히 흐르고 별이 총총히 빛나는 초여름 밤을 더 좋아한다. 달빛 속에 숨어 으밀아밀 나누는 청춘남녀의 속삭임 소리를 발그레 바라보고, 개구쟁이 악동들의 참외 서리에 빙긋이 미소만 띠는 은은한 달밤의 밤하늘을 좋아한다.
달은 모든 것을 품어주고 받아준다. 아낙네의 푸념을 받아주고 뭇사람의 소원도 들어준다. 달은 힘들고 외로울 때 의지하고 안기고 싶은 엄마의 품속같이 포근하다. 달은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사람끼리 또 그리운 연인끼리 소통하는 우주의 우체통이다. 온갖 사연을 품에 안고 넉넉하고 부드러운 미소만으로 위안을 주고 계시를 주는 만인의 어머니며 상담자이기도 하다.
초가지붕 위 박꽃이 새하얗게 물들이고 달빛이 유난히 밝았던 여름밤으로 기억된다. 집 바로 위 일명 뒷동산으로 나를 데리고 간 아버지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없이 밤하늘만 바라보셨다. 옆에서 별을 헤아리던 나도 아버지의 숙연함에 조용해지고 풀벌레 우는 소리만이 시골 밤의 적막을 깨뜨리고 있었다.
6.25 동란 때, 열일곱 살 혈혈단신으로 월남하시어 어머님 고향에 데릴사위로 정착하신 아버지는 친구가 없었다. 술을 전혀 못하시고 서분서분하지도 못한 성격이셨기에 동네 사랑방에서도 잘 어울리지 못하신 것 같다. 자연스럽게 밤이 되면 장남인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고 공부도 틈틈이 봐주셨다. 또 당신 혼자서도 뒷산에 오르는 걸 즐기셨던 여느 아버지와는 사뭇 다른 아버지셨다.
“○○아 너는 저 달에 뭐가 보이니?” 아버지가 긴 침묵을 깨뜨리셨다. “아부지는 저 달을 보면 아부지의 고향이 생각나고 엄마가 또 아부지가 보인단다. 그래서 저 달을 보면서 니 할아부지 할머니한테 안부를 전하고 대화를 나눈단다. 너도 인사드리거라.” 난 그날 밤 처음으로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달을 보며 할아버지 할머니께 인사를 올렸다. “큰손자 ○○이에유. 저한테두 친할아버지 할머니가 있는게 자랑스럽네유. 빨리 보고 싶어유. 아버지도 통일이 되면 열일 제쳐 두고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찾아뵙자고 그랬어유.” 인사를 올리고 다른 애들처럼 할아버지 할머니 심부름을 하고 사탕도 받아먹으면 좋겠다고 아버지께 말했더니 통일만 되면 통일만 되면을 되뇌셨다.
그때 난 아버지의 눈물을 보았다. 나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그러셨는지 한참 동안 나를 안아주셨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언제부턴가 아버지에게는 달이 곧 고향이고 아버지요 엄마가 아니었을까? 아마 아버지는 꿈에라도 보고 싶은 부모님에게 연락은 커녕 서로 생사조차 알 수 없는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을 달을 보며 삭이셨을 게다. 달을 보며 하루빨리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을게다. 고향을 떠나오고 숱한 일을 겪으면서 하고 싶은 수많은 말들을 달을 보며 수없이 되뇌었을 아버지의 품에 안겨 나는 숨을 죽일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 어머님 잘 계시는지요. 저는 난리통에 어려움을 겪긴 했어도 요행히 목숨을 부지하여 가정까지 꾸렸습니다. 전쟁만 끝나면 목숨만 붙어있으면 고향으로 아버지 엄마 곁으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그게 잘 안되는구만요. 제가 월남한 이후로 가장 잘한 일이고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제 아들을 직접 안겨드리려고 했었는데...야속하게도 오늘 밤 이렇게 달을 보며 손주가 인사를 드리게 됐네요. 아버님 어머님도 이 아들이 얼마나 보고 싶을까요. 또 손주를 얼마나 보고 싶을까요. 나중에 좋은 날이 올 때까지 꼭 살아계시고 건강하세요.’ 아버지는 달을 보며 이북에 계신 부모님께 이런 편지를 쓰시지 않았을까.
달을 바라보며 설움을 삼키고 소원을 빌고 위로를 받던 아버지를 따라 나 또한 달을 보며 슬픔을 이겨내고 어려움을 견뎌왔다. 우리 육 남매를 삭풍이 휘몰아치는 허허벌판에 내려놓고 떠났을 때 슬픔 못지않게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사무쳤다. 허나 너무나도 부모님이 보고 싶은 아버지가 달 속의 할아버지 할머니를 만나러 그렇게 일찍 떠난 것이라고 생각하며 슬픔을 참고 원망을 접었다. 집안의 중요한 일이 있거나 판단이 어려울 때는 달 속의 아버님께 여쭤보고 의논했다. 저 높은 하늘에서 아버지가 다 보고 계시니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말자고 동생들에게 당부하고 나 또한 마음을 다잡았다.
구름 속에서 보름달이 슬며시 얼굴을 내민다. 빙그레 웃는 얼굴이 나의 어릴 적 우등상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모습과 같이 자애롭다. 마음속 대화를 나누어본다. 아버지! 보고 싶습니다. 우리 육 남매 모두 자수성가해서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아버지께서 보실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버지 손주들이 얼마나 듬직할까요. 이번에 아버지 장손이 아들을 낳았어요. 아버지 증손자 말이에요.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그 증손자를 품에 안고 육 남매와 사위 며느리 손주들을 대동하여 아버지의 고향으로 금의환향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부디 꿈에서라도 온 자손과 함께하는 아버님을 뵐 수 있기를 빌고 또 빌어봅니다. 보름달이 더욱더 환해지고 발개진다.
3. 늘 내 곁에 있어 주는 너/
『달 달 무슨 달 쟁반같이 둥근 달
어디 어디 떴-나 남산 위에 떴-지』
어릴 적 즐겨 부르던 동요이다. 이 동요를 떠올리면 나는 어김없이 유년 시절로 되돌아간다. 달 밝은 밤이면 동네 중앙에 아이들이 모여 놀이하던 어릴 적 생각이 난다. 놀이시설도 볼거리도 없었던 제주도 어느 바닷가 조그만 동네. 휘영청 밝은 달이 동네 어귀를 비추면 누구랄 것도 없이 모두 동네 중심지로 모인다. 어린 동생들부터 중고생 언니, 오빠들까지 모여 달님과 벗하며 밤놀이를 즐겼다. 작은 운동회도 하고, 숨바꼭질에, 한데 뒤엉켜 말타기도 하면서 밤이 깊도록 놀았던 유년 시절이 있다. 그때의 달은 아이들에게 더없이 고마운 벗과 같은 존재였다.
젊은 시절의 나는 무척이나 소심하고 외로움을 타는 성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등학교 때 타지에 나와 공부를 하면서 맘을 터놓을 상대가 부족했다. 언니, 형부와 함께 지내고는 있었지만 늘 육아에 일에 시달리는 언니, 일에 시달리는 형부께 내 속마음을 털어놓기란 쉽지가 않았다. 당시 나는 옥상 장독대가 있는 개인 주택에 살았다. 옥상은 그 어떤 곳보다도 달과 가까이할 수 있는 곳이었다. 달은 말이 없다. 그러나, 늘 편안함을 준다. 하루 일과가 버겁거나 힘겨울 때, 때론 하루 일과를 잘 해냈을 때, 나는 대화 상대가 필요했다. 그럴 때면 옥상에 올라가 달과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를 마치고 나면 하루의 피곤함을 모두 씻을 수 있었다. 그리고 큰 위로를 받기도 했다.
성인이 되어서의 달은 ‘소원빌기’의 달이다. 종갓집 맏며느리인 나는 딸 둘을 낳고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병원에도 다녀보고 아들 낳는 비법이 적힌 책을 읽으면서 여러 방법을 시도하고 있는 와중이었다. 그때 같이 근무하던 후배 동료가 “선생님, 조금 있으면 정월 대보름이라서, 달의 기운이 좋은 때이니 달 보고 소원을 빌어보세요~!”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정말이지 온 동네를 비추고도 남을 정도로 크고 밝은 달을 보며 소원을 빌었다. “저, 꼭 아들 낳도록 해주세요~”하고 간절하게 빌었다. 밝은 기운이 나를 감싸주며 좋은 기운을 주는 듯했다. 이번은 아들을 꼭 낳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결과는 정말 ‘아들’이었다. 달의 좋은 정기를 받은 것이었다.
아들은 자라고 자라 고3이 되었다. 이번 추석에도 어김없이 크고 둥근 달이 떴다. 우리 가족은 모두 아파트 베란다에 메달려 달을 향해 기도했다. 아들이 이번 수능을 잘 봐서 본인이 원하는 대학에 무사히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말이다, 그리고 무심히 지내다가도 달이 보이면, 어스름한 달이라도 달빛이 비치면, 고개 들어 마음을 다해 소원을 빌었다. 달은 이번에도 우리들의 소원을 들어줬다. 아들이 무난하게 수능을 잘 치르고, 본인이 원하는 대학에 합격한 것이다. 그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가을이면 한가위가 있다. 1년 중 가장 큰 달이다. 시골에서는 달맞이를 한다. 달맞이를 할 때면 어김없이 가슴 속에 담고 있던 소원을 달을 향해 빌게 된다. 가족과 지인들의 건강과 행복, 인류 평화 등... 달을 향해 간절하게 빌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달도 나를 향해 방긋 웃어주는 듯하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무언가 정성을 다해 기도할 때, 바라보면서 기도할 수 있는 달이 있다는 것이 말이다. 기도는 매사 정성을 다하게 하며, 생활 전반에 걸쳐 긍정적인 삶을 살게 한다. 온 정성을 다해 기도하게 함으로써 우리네 인생살이도 정성을 다하는 삶으로 인도하는 것 같다. 우리 어머니의 삶도 그러했으리. 뭍으로 유학 보내고 냇가에 세워 둔 어린아이 같은 막내딸을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하시던 우리 어머니. 당신에게도 달은 ‘정성’ 그 자체였으리.
지금도 바쁘고 힘든 일상을 벗어나고 싶을 때면 달을 보곤 한다. 가끔씩 영롱하게 비워주는 달빛을 대하면 예전처럼 위로를 선물 받는다. 묵묵하지만 늘 내 곁에 있어 주는 ‘달’은 내 삶에 있어서 친구처럼 느껴진다.
내일은 비가 오려는지 달무리가 졌다. 보름을 앞둔 달이 오늘도 어김없이 베란다 너머로 나를 보며 웃고 있다.
4. 달을 보고 /
나는 어린 시절 갓 깨우친 국문으로 야간 수필 수업을 마치고 나오다 초저녁 반달을 보았다. 지난해 여름밤, 오토바이 소리와 고함 소리에 잠이 깨어 나왔을 때도 똑같은 회색빛 하늘에 뜬 둥근달을 보았었다. 어두컴컴한 하늘에서 흐린 빛으로 세상을 밝히려고 무던히도 힘이 들어 보이는 달이었다. 흐린 달이지만 둥근달이어서 무슨 보름인가해서 달력을 보고 나오니 달은 벌써 자취를 감추었다. 요란한 고함소리에 잠이 깬 건너편 치킨 집 앞을 보니 젊은 남녀가 뒤엉켜 밀고 당기며 정적을 깨운 밤이었다. 시간이 새벽3시반이 넘어가는데 배려 없는 젊은 학생들 흥청임에 문을 닫고 들어왔다. 천장을 보고 누우니 잠은 안 오고 젊었던 나의 옛 시절 속으로 푹 빠져보았다.
내가 젊은이들 또래였을 때는 시집 장가를 가서 가장이 되었을 나인데 지금은 공부하는 학생들이다보니 철이 덜든 것 같다. 나도 저 나이 때 다들, 시집을 갔는데 가라는 시집은 안가고 친구와 중석광에서 지남철로 철 고르는 일을 하며 철없이 놀았던 기억이 난다. 일이 끝나면 개울 바위 돌에 모여 앉아서 준호친구가 치는 기타 소리에 반해서 해지는 줄도 모르고 놀았었다. 친구와 나는 어둠이 내린 밤에 월악산에서 떠오르는 보석처럼 빛나는 별과 달을 머리위에 이고 느름내 산모퉁이를 돌아서 걸었다. 갈래 머리 나는 친구와 둘이 조개 소 벼락 소 개울을 건널 때는 물결에 일렁이는 달과 별을 손잡고 우리는 노래도 불렀었다. 이렇게 1년 넘게 같이 다니며 준호가 작사 작곡한 허무한 꿈이란 노래와 이미자 노래를 많이도 불렀었다. 그러다 이 친구도 시집을 가게 되었다. 혼자 남은 나는 산길이 무서워서 못 다니겠어서 주막거리에 사는 내 친구 월이 집에서 같이 지내게 되었다. 한두 달 지내다보니 주변에 남자 광부들이 너무 많고 술들을 먹어서 무서운 마음에 하던 일이 아깝지만 그만두었다. 엄마 집에서 일을 좀 도와주다가 충주에서 장사하는 동생 집에 가서있게 되었다. 그때 마침 올케가 임신을 해서 친정에 가서 있을 때었다.
68년 초여름 엄마가 사는 이웃아저씨가 자기 동생을 데리고 왔었다. 엉겁결에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자장면 한 그릇씩 먹고 사진 한 장 찍고 3개월 후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결혼 후 친구와는 서로 소식이 끈긴 뒤 월악산 아래 살 때 골미로 갔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만날 수가 없었다. 그 친구가 만약에 지금도 골미에 산다면 밝은 달 과 별을 보고 살지도 모르겠다. 나는 도시로 나와서는 하늘 한 번 쳐다볼 여유도 없이 살았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세월이 흘러 8학년이 되고서야 늦복으로 별 없는 하늘에 달을 보고 글도 쓴다. 하지만 우리가 보았던 밝고 둥근달도 나처럼 나이가 들었나보다. 어두7컴컴한 밤하늘에서 힘없이 내려다보는 달을 보니 젊었던 시절이 활동사진처럼 지나간다. 내가 어린 시절부터 결혼해서 살아온 세월이 꿈만 같다. 좋은 일 슬픈 일 굽이굽이 지나온 세월이 나의 약이 되고 힘이 되어 늙은 노각으로 변했다. 살다보니 세월이 좋아져서 땅거미만 지면 가로등이 달이 되고 간판불이 별이 되어 밤을 밝혀준다.
내가 시집왔을 때만해도 달을 낮 삼아 남자들은 가을 거지가 끝날 무렵이면 이웃과 “어울림으로 달에 비치는 내 그림자와 키 재기를 하며” 이영도 엮고 새끼도 꼬았었다. 햇볕집으로 엮은 이영이 지붕에 올려지는 날에는 노란 옷을 갈아입고 팥 시루떡이나 팥죽을 끓여 이웃 잔치를 했었다. 그뿐이랴 여자들도 달밤을 낮 삼아 잘라다 나무 가지에 걸어 쌓아둔 수수를 채로 훌 터서 알 뺀 수수껍질대로는 방 쓰는 비도매고 수수 알은 밥도 해먹고 떡도 해먹었었다. 지금 세상은 전등불 밑에서 모든 일을 하지만 60년대만 해도 촌에서는 달보고 별보며 많은 일을 했었다. 우리아이들도 달밤에 공기놀이 비석치기 줄넘기는 고무줄로 했었다,
하지만 그 이전 내가 클 때는 공기놀이 사방치기 줄넘기는 새끼를 여러 겹 꼬아 만든 줄이었다. 노릿 감이란 그릇 깨진 사금 팔이나 거울 깨진 민경 쪼가리와 까마귀 물 곳 나뭇잎으로 소꿉놀이를 했었다. 달밤에는 멍석 깔고 누웠다가도 둥글고 큰 밝은 달을 보면 달 속에 토끼가 보고 싶어서 박 바가지에 물을 담아 깨진 민경쪼가리를 담가서 보기도 했었다. 그러나 바가지 물속에 토끼는 안 보이고 무지개만 본 기억이 아련하다. 지금은 첨단기술 망원경으로 달도보고 별도 보며 관찰하고 연구하며 배우는 세상이니 아이들이 정말로 똑똑하다. 장난감 하나도 기술을 겸비한 첨단의 발명품들이다. 지금은 머리로 사는 세상 앞으로는 어린 꿈나무들이 커서 많은 연구와 기술로 기발한 두뇌가 더 좋은 세상을 키워나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23/5/19
5. 달밤의 단상/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던 달을 바라보며 만사를 잊고 달빛에 젖어본다. 온 세상이 밝고 훈훈한 바람이 분다. 꽃잎의 날갯짓을 보며 마음속에 벅찬 감동이 인다. 행복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있는 것임을 느껴본다.
오랜만에 달을 보니 몇 해 전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아스라이 밀려왔다. 당뇨로 고생하는 딸을 매우 안타까워하시던 어머니는 어느 날 검은색 물병을 들고 오셨다. 그 속에는 오래 묵은 똥바가지를 어렵게 찾아서 씻고 또 씻어 삶은 물이 들어 있었다. 어머니도 믿기지 않지만 병이 나았다는 사람이 있으니 한번 먹어 보라고 하셨다. ‘얼마나 노심초사했으면 이런 수고를 하셨을까’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어머니를 끌어 앉고 서러운 마음에 목 놓아 울었던 기억이 지금도 눈시울을 적신다.
요양원에 계실 때 모시고 와서 한두 달이라도 어머니의 몸과 마음을 보듬어 드리고 싶었다. 어머니의 휠체어를 밀어 드리며 옛날 고향 이야기도 나누고 맛있는 음식도 대접해 드렸으면 했다.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다음에, 나중에”라며 미루셨다. 어머니의 마음은 알고 있지만 서운하다 못해 원망스러웠다. “서울에 언니와 동생이 있으니, 이 어미 걱정은 하지 마라. 몸 아픈 네가 마음 써 주는 건 고맙지만 내 마음이 불편해서 그런다”라며 내 손을 꼭 잡으시고 눈물을 글썽이시던 어머니. 지금도 마음이 아려온다. 사별하고 나서야 어머니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새삼 느끼게 되었다. 언제나 튼튼한 울타리가 되어 주시고, 희망을 주셨던 어머니의 사랑이 어둠을 밝히는 은은한 달빛으로 젖어 든다.
달빛 아래 기억을 더듬으니 옛 생각이 하얗게 피어오른다. 머릿속에 새겨 두었던 망각의 시간으로 빠져들었다. 정 두고 떠나온 세월의 그리움은 어린 시절 고향에서 보낸 아련한 기억들로 이어졌다.
어머니가 읍내 오일장에 오시는 날은 학교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장터로 달려가 어머니를 만난다. 아침에 뵈었건만 반가운 마음에 어머니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어머니는 외할머님 댁과 작은 집에 들르시다 보니 늘 장보기가 저물었다. 오늘도 어머니가 장짐을 머리에 이고 읍내에서 집으로 향할 때는 달이 떠 있었다.
달빛 속에 어머니와 함께 밤길을 걸으니 편안하고 행복했다. 고향 집으로 가는 길에는 징검다리가 있었다. 어느새 따라왔는지 개울물 속에 달이 떠 있었다. 개울물을 건너갈 때 물결 위에 달이 웃고 있다. 일렁이는 물결 따라 달이 일그러지더니 물속에 잠겨 버렸다. 달을 건지고 싶다. 물결에 달이 사라졌다. 달은 정겹고 신비롭기만 하다. 내 마음을 사로잡은 달을 두고 가자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도 밤하늘에 떠오르는 달만 보면 왠지 가슴이 멍멍해 진다. 끝없이 그때가 그리워져 달빛 어린 밤길을 걷고 싶어진다.
나는 추석이 되면 보름달을 맞으러 뒷동산 언덕에 올라 달 뜨기를 기다렸다. 달은 가끔 지나는 구름 속에 몸을 숨겼다가 나와 지긋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달님과 눈이 마주치면 어린 시절 어머니와 가족의 바람인 남동생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기도 했었다. 여느 때보다 크고 밝은 보름달이 뜨면 정성드려 큰절을 했다. 소원도 다른 날보다 더 크고 간절했다. 언제나 같은 달인데 추석의 보름달이 뭐가 다를까마는 달의 영험함에 힘입어 언젠가는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을 믿었다.
달은 무한한 생명력이기도 했다. 나도 내일은 좀 더 좋은 날이 올 거라고 하는 기대감으로 기도하면 기분이 좋아졌다.
밝은 달을 한참 들여다보노라면 그 안에 어린 시절이 두둥실 나타난다. 고달프셨던 어머니의 모습과 함께 떠오르는 정겨웠던 친구들과의 추억으로 빠져들었다. 어머니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동네 어귀에 있는 우물로 향했다. 한낮에 일하느라 흘린 땀을 씻었다. 둥근달은 어머니의 물동이에도 떠 있다. 달을 머리에 이고 모퉁이 길을 돌아서 가는 어머니의 뒷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튿날 새벽 장독대 하얀 정화수그릇엔 새벽달이 담겨 있었다. 두 손을 합장하고 간절히 기도하셨다. 마음에 서린 한(恨)의 기도 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삶이 고단하고 괴로울 때, 눈물 속에 불러 보는 따뜻한 이름, 어머니다.
달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영원한 것은 없다. 삶은 짧을수록 더 소중하고 살아 있는 시간이 내 것임을 실감한다. 덧없이 느껴지는 삶, 남은 생을 잘 정리하고 싶어진다. 서럽도록 힘들게 허둥대며 달려온 세월이다. 오늘 밤처럼 휘황찬란한 달빛에 젖어 인생의 종착역을 향해 쉬엄쉬엄 거닐어 본다.
6. 달의 노래/
“달아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정월에 뜨는 저 달은 새 희망을 주는 달
이월에 뜨는 저 달은 동동주를 먹는 달
삼월에 뜨는 달은 처녀 가슴을 태우는 달
사월에 뜨는 달은 석가모니 탄생한 달
달아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오월에 뜨는 저 달은 단오 그네 뛰는 달
유월에 뜨는 저 달은 유두밀떡 먹는 달
칠월에 뜨는 달은 견우직녀가 만나는 달
팔월에 뜨는 달은 강강술월래 뛰는 달
달아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구월에 뜨는 저 달은 풍년가를 부르는 달
시월에 뜨는 저 달은 문풍지를 바르는 달
십일월에 뜨는 달은 동지죽을 먹는 달
십이월에 뜨는 달은 님 그리워 뜨는 달”
달을 보면 아름다운 멜로디가 생각나고 노랫말을 떠올리면 정월 대보름 달을
보면서 뒷동산에 올라가 큰소리로 “달님 공부 잘하게 해 주세요”라고 했던
기억이 떠 오른다. 공부를 잘하면 칭찬받고 가슴에 우등패를 달아줘서 우쭐댈
수 있어서 그런 걸 빌었다. 깡통에 나무토막에 불을 붙여서 막 흔들면 쥐꽁지에
불이 붙은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쥐불놀이라고 한 것 같다.
친구들과 논두렁길에서 막 돌리다가 집어 던지면 지금의 로켓발사 모습처럼
멋지게 보여서 박수치며 신났다. 그런 동화속에 살던 때가 있었다.
소쩍새 구슬피 울던 밤 멀리 떨어진 물레방앗간을 갔다 오던 밤에 할머니 손을
꼭 잡고 매달려 왔다. 무섭기도 해서 그랬나 보다. 달은 왜 우리를 쫓아오는 지
알 수 없었지만 달을 쳐다보면서 오다 보니 그 먼길을 금방 온 것 같았다.
이태백 시인은 달을 보면서 풍류를 즐겼나 보다. 노래 가사에 빠지지 않는 걸
보면 낭만과 술을 즐기던 모습이 보이는 듯도 하다. 그래서 강물에서 뱃놀이를
하다 강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다 빠져 죽었다는 얘기가 있으니 말이다.
“달 달 무슨 달 쟁반같이 둥근 달 어디어디 떴나 남산위에 떴지”
추석 한가위 보름달도 유난히 크고 예뻤다. 송편과 함께 명절이 오면 마루 끝에
앉아 동생과 다리를 흔들며 이 노래를 불렀다.
달을 찬미하는 노래와 함께 세월은 빠르게 흘러서 달나라에 여행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억만 장자들은 우리네 해외여행 가는 것 보다 쉽게 가는 곳이
달나라 여행이니까.....
도시의 달은 일부러 찾아서 봐야 될 정도로 전깃불에 잠식 됐다. 목을 젖히고서
오랜만에 예쁜 달무리를 보았다. 무지개빛이 있는 아름다운 모습~!
‘비가 오려나~?’
기후변화로 인해서 그건 옛 이야기가 됐다. 지금은 음력
사월이니까 사월에 뜨는 달은 석가모니 탄생한 달이겠지~!
7. 사막의 그믐달/
별이 쏟아진다. 아침 여명에 그믐달이 지평선에 걸려 가느스름하게 빛나고 있다.
이집트 여행 중 백사막에서 1박2일 야영하는 일정이 있었다. 아침 일찍 야영에 필요한 간단한 짐만 챙겨서 호텔을 나섰다.
지프 한 대에 네 명씩 타고 작은 트럭에는 차의 몸보다 더 큰 짐을 싣고 순서대로 출발하였다. 복잡하고 교통체증이 있는 도시를 빠져나와 어느새 열대의 정글 속을 달렸다. 그것도 잠시 차츰 큰 나무들이 시야에서 사라지더니 키 작은 풀들이 보일 뿐이었다. 이름 모를 사막의 입구에 도착한 것 같았다. 43도가 넘는 기온과 땅에서 올라오는 열기는 말할 수 없이 뜨거웠다.
건조한 이집트 날씨는 기온이 아무리 높아도 그늘 속으로 들어가면 시원했다. 이슬람 여인들이 히잡을 쓰듯 우리도 얇은 스카프로 머리를 덮고 얼굴을 감쌌다. 물론 모래바람을 막기 위하여 썬글라스는 필수품이었다. 앞 차와의 안전거리 확보도 넉넉해야 했다. 무작정 따라가다가는 앞 차가 일으키는 모래 흙먼지를 오롯이 뒤차에 앉은 사람들이 뒤집어쓴다. 문명의 이기인 에어컨과 선풍기보다도 그냥 창문을 열어 놓고 달릴 때 일어나는 자연 바람이 제일 시원했다.
드디어 사막에 도착했나 보다. 전후좌우 어디를 봐도 곱고 흰 모래와 자연의 바람이 만든 하늘과 맞닿은 모래언덕뿐이었다. 바람이 이리 쓸고 저리 쓸어 멋진 모래조각을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모래 위의 뜨거운 열기는 봄날의 아지랑이보다 더 세게 가물가물 올라가고 있었다. 문득 자동차가 모래 위를 잘 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달리는 차들은 운전기사의 실력에 따라 승객을 위한 곡예가 시작되었다. 사막 위를 빙글빙글 돌아 현기증이 일어났지만 어지럼증 속 세상은 아름다웠다. 자동차도 땀을 흘리며 크렁크렁 높은 모래언덕을 쏜살같이 올라가 봉우리를 따라 달리다 스키를 타듯 계곡으로 빠르게 내려올 때는 심장이 멎을 듯한 짜릿함을 느끼기도 했다. 어느새 비명인 듯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자동차는 다시 줄지어 달려갔다. 사막의 높은 언덕에 나란히 앉아 지평선으로 지는 일몰의 장관을 보았다. ‘어린왕자’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그 사막이 청춘의 가슴처럼 핑크빛으로 불그레하게 물들더니 점점 장년의 왕성한 혈기처럼 활활 불타듯 붉게 빛났다. 노을은 서서히 황금빛으로 변하며 긴꼬리를 남기고 사라져갔다. 하루를 뜨겁게 달구었던 태양은 못다한 열기를 빨갛게 하늘에 길게 남긴 채 지평선 아래로 차츰차츰 몸을 감추어가고 있는 듯했다. 큰 아쉬움을 남기고 가는 노을에 눈물이 핑 돌았다. 일출과 일몰은 언제 보아도 경이롭고 마음을 울컥하게 한다. 순간 딸과 아들의 함박웃음이 노을 속으로 보였다가 사라졌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가슴에 안고 차에 올랐다. 이제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다. 노을 붉은 하늘 속으로 달려갔다. 조금 더 가니 우리가 하룻밤 묵을 텐트가 둥그렇게 설치되어 있었다. 텐트 안쪽으로는 둥글고 넓게 모닥불이 피워져 있고 활활 타는 장작불 위에는 저녁으로 먹을 닭고기가 익어가고 있었다. 모닥불은 밤새도록 조금이나마 우리를 따뜻하게 해줄 것이라고 했다.
해가 지고 나니 추위가 몰려온다. 사막의 낮 기온은 40도가 넘는데 밤 기온은 영하로 내려간다는 것이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겨울 패딩이 준비물인 이유도 알게 되었다. 사막여우가 나타나니 조심하라는 주의를 듣고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바닥에는 두꺼운 카펫이 깔려있고 겨울 담요를 덮었는데도 너무 추워 패딩 코트를 벗을 수가 없었다. 몸을 웅크린 채로 남편과 서로 의지하고 추위를 이기며 잠이 들었다. 옆 텐트의 코골이 소리에 잠이 깨어 밖으로 나갔다. 혹시 사막여우를 볼 수 있을까 했는데 자연이 주는 뜻밖의 더 큰 선물을 받았다.
새벽 어두컴컴한 하늘에서 쏟아질 듯 빛나고 있는 별들을 보며 가슴이 벅찼다. 아니 숨이 멈춰버릴 것 같았다. 멀리 지평선에는 해돋이 노을이 불그스레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그때 아가의 손톱무늬같이 작은 달이 보였다. 그믐달이었다. 노름꾼이 밤을 새우고 새벽녘 화장실에 갈 때 볼 수 있다는 그 그믐달이 지평선에 결려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점점 상아색으로 빛이 바래가는 달은 첫사랑의 고백처럼 가슴 두근두근 감격하게 했다. 사막여우를 만난 것보다 더 크게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남편과 함께 밤새워 이야기하며 아침을 맞았던 신혼의 떨리는 가슴을 되새기게 했다. 빛나던 별들이 차츰 빛을 잃어 갈 때 작은 그믐달도 서서히 은은하게 반짝이며 조금씩 밝아지는 여명에 남은 빛을 이어주는 듯했다. 그믐달은 다시 돌아올 밤을 꿈꾸며 잠드는 것처럼 보였다. 지평선의 달을 볼 수 있는 짧은 순간이 아쉬웠지만 경이롭기까지 했다. 몇 번이고 탄성을 지르며 우리 집 거실에서 마주했던 그믐달을 생각해 보았다. 그 그믐달에도 흥분하여 가슴 뛰던 순간이었는데 이국의 하늘 지평선에 걸려있는 그믐달은 첫사랑의 설레임 그 이상이었다.
지평선도 보기 드문 우리나라에서는 쉽사리 볼 수 없는 풍경이라 오래도록 가슴속에 남아있으리라. 서서히 해가 높이 떠오르고 있다. 지평선에 걸린 하얀 그믐달의 미소는 잊을 수가 없었다. 정말 가슴 벅차게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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