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일(요일) |
장소 |
교통편 |
시간 |
내용 |
식사 |
01.13(토) |
부산 |
KE1402 |
07:00 |
김해국제공항 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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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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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0 |
인천국제공항도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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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0 |
인천국제공항 K카운터 앞 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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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H065 |
11:45 |
인천국제공항 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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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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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5 |
Kota Kinabalu 공항 도착 (이후, 현지시간) |
중식 : 기내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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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
18:30 |
공항 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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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 |
Mesilau Resort 도착/석식/취침 |
석식 : 현지식 |
01.14(일) |
코타 |
도보 |
07:00 |
기상/조식/보험가입, 포타 및 산악가이드 배정 |
조식 : 산장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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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50 |
입산신고 후 등반 시작(짐은 산장에 맡김) |
중식 : 도시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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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2 |
Laban Rata Resthouse 도착/석식 |
석식 : 산장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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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5 |
Gunting Lagadan Hut 도착/취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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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5(월) |
코타 |
도보 |
02:00 |
기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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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50 |
등반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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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8 |
정상(Low's Peak) 도착/일출 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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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0 |
하산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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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50 |
Gunting Lagadan Hut 도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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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5 |
Laban Rata Resthouse 도착/조식 |
조식 : 산장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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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0 |
Laban Rata Resthouse 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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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0 |
Timpohon Gate 도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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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
12:55 |
Timpohon Gate 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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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0 |
점심 |
중식 : 중국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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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5 |
Mesilau Resort 도착/맡긴 짐 찾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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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 |
Shangri-La 호텔 도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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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0 |
석식 |
석식 : 한정식 |
01.16(화) |
코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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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0 |
기상/조식 |
조식 : 호텔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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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
08:30 |
hangri-La Hotel 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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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40 |
선착장 도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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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트 |
08:52 |
선착장 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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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0 |
Safi Island 도착/해수욕/생선 바베큐 |
중식 : 바베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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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5 |
Safi Island 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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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5 |
선착장 도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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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
13:26 |
Shangri-La 호텔 도착/샤워 후 호텔 출발/시내 관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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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0 |
Latex 상품매장에서 석식 |
석식 : 한정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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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
해안에서 맥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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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 |
Kota Kinabalu 공항 도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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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9(수) |
코타 |
MH064 |
00:55 |
Kota Kinabalu 공항 출발 |
조식 : 기내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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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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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13 |
인천국제공항 도착(이후, 한국 시간) |
중식 : 공항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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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1401 |
13:30 |
인천국제공항 출발(濃霧로 항공기 운항 중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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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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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0 |
김해국제공항 도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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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산행 구간 및 소요 시간
2007.01.14(일)
08:50 Mesilau Gate(해발 1,926M) 출발
09:30 1.0KM 지점/Schima Shelter
10:20 2.0KM 지점
10:45 2.5KM 지점/Nepenthes Shelter
10:58 3.0KM 지점/출렁다리
11:19 3.5KM 지점
11:25 Tikalod Shelter
12:26 Lompoyou Shelter/점심
12:45 출발
12:50 5.0KM 지점
13:28 Magnolia Shelter
13:53 5.5KM 지점(산행기점이 Timpohon Gate일 경우 4.0KM 지점/갈림길(9시 방향과 3시 방향)/9시 방향은 Timpohon Gate로 가는 방향/3시 방향은 정상으로 가는 방향/해발 2,745M)
14:21 4.5KM 지점(이하, 산행 기점이 Timpohon Gate일 경우의 거리)(해발 2,898M)
14:40 Villosa Shelter
14:46 5.0KM 지점(해발 3,001M)
15:05 Paka Shelter
15:20 5.5KM 지점(해발 3,137M)
15:48 Waras Hut(간이 숙박시설)
15:52 Laban Rata Resthouse(해발 3,272M)/석식
17:25 출발
17:35 6.0KM 지점(해발 3,323M)/Gunting Lagadan Hut 숙박/취침
2007.01.15(월)
02:50 등반시작
03:45 6.5KM 지점
04:05 7.0KM 지점
04:08 Sayat-Sayat Check Point(해발 3,668M)
04:20 7.5KM 지점
05:01 8.0KM 지점
05:45 8.5KM 지점
06:08 키나발루 산 정상 Low's Peak(4,095.2M)
06:20 하산 시작
07:20 Sayat-Sayat Check Point(해발 3,668M)
07:27 7.0KM 지점
08:50 Gunting Lagadan Hut 도착/짐 꾸린 후 Laban Rata Resthouse로 이동/조식
09:30 Laban Rata Resthouse 출발
10:00 5.0KM 지점(해발 3,001M)
10:05 Villosa Shelter
10:13 4.5KM 지점(해발 2,898M)
10:29 4.0KM 지점(해발 2,745M)
10:50 3.5KM 지점(해발 2,634M)
10:58 Mempening Shelter
11:09 3.0KM 지점(해발 2,455M)
11:19 2.5KM 지점(해발2,350M)
11:25 Lowii Shelter
11:31 2.0KM 지점(해발 2,252M)
11:47 Ubah Shelter
11:59 출발
12:06 1.0KM 지점(해발 2,039M)
12:07 Kandis Shelter
12:10 출발
12:21 0.5KM 지점(해발 1,935M)
12:30 Timpohon Gate 도착(해발 1,866M)/산행 종료
3. 등산기
2007.01.13(토)
내가 말레이시아 키나발루 산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지난해 가을인가 확실치가 않다. TV를 틀고 볼 만한 프로를 찾는데 KBS로 기억한다. 한국의 한 젊은 여성 탈렌트가 말레이시아에 거주하는 한국인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키나발루를 등정하는 모습을 방영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 나는 중국을 통해 백두산에 다녀 온 직후이었다. 백두산에서 나는 고산(高山)이 주는 장대함과 묵직함에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매력을 느꼈었다. 국내에서는 결코 맛보지 못하는 것이다. 해외의 고산 등정을 생각 중이었는데 마침 TV에서 본 것이 키나발루이었다. 4,100M의 높이가 동남아에서 최고봉이라 하였다. 무엇보다도 높이가 나에게는 고만고만한 것이었고, TV에 등장하는 탈렌트는 평소에 등산을 즐기고 있는 것 같지가 않는데, 숨이 차고 힘들어 하면서도 정상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오르는 것이 무엇보다도 내 나이에 비추어 불 때 나에게는 별 무리가 없는 상대가 될 것으로 판단하기에 족하였다. 그때부터 인터넷을 뒤져 키나발루를 찾았다. 마침 내가 참여하여 백두대간 종주를 섭외하는 산악회에서 키나발루 등정 계획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선착으로 신청을 하였다.
이렇게 키나발루 등정을 결정하였지만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는 키나발루 등정에서 두 가지의 목적을 설정하였다. 하나는 이틀에 걸치는 험한 산행을 할 수 있는 체력을 확인하는 것이다. 지난 4년 간 나는 주말마다 낙동정맥을 단독 종주하여 완주하였고 지금은 격주로 백두대간을 종주하고 있다.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하여 한 번도 결석하지 않고 있다. 지리산과 덕유산 구간은 하루에 완주하여 나는 나 자신에 대해 경이로움을 느꼈다. 그렇다면 내 체력은 고산 등정을 할 수 있는가 궁금하였던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내 육신이 고소(高所)에 대해 생리적으로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시험하는 것이다. 고산 등정을 한 사람들의 경험담을 들어보면 고소증은 체력이 아니라 타고난 체질이 결정적으로 작용하는 것 같았다. 이 두 목적이 달성되면 나는 백두대간을 완주하고 해외의 고산 등정과 트레킹에 나설 생각이다.
대한민국은 엄동설한(嚴冬雪寒)의 겨울이 한창이고, 말레이시아는 상하(常夏)의 열대 지역이다. 평지(平地)만 갔다가 온다면 간단하지만 평상복에다 등산복과 등산장비를 챙겨야 한다. 등산복과 등산장비도 여름과 겨울, 밤과 낮, 청천(晴天)과 우천(雨天)에 대비해야 한다. 이중 삼중으로 신경이 쓰인다. 바퀴 달린 여행용 트렁크에 한국을 떠날 동안 입는 옷, 현지에 도착하여 입는 옷, 등산 첫날에 입는 옷, 등산 둘째 날에 입는 옷, 등산을 마치고 하산하여 입는 옷, 바다에 가서 입는 옷, 귀국하여 귀가할 때까지 입는 옷을 구분하여 꾸렸다. 고산에서는 눈이 쌓여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아이젠과 스패츠도 넣었다. 비가 매일 온다 하기에 우의와 우산을 준비했다. 정상에서는 바람이 세고 춥다 하기에 다운자켓(우모방한복), 윈드자켓, 방한모자, 바라클라바도 챙겼다. 밤에 정상을 향해 출발한다기에 헤드랜턴도 챙겼다. 해수욕을 한다기에 샌들, 반바지, 고글도 준비했다. 물을 갈면 배탈이 나고 소화 불량이 된다 하여 소화제, 높은 산에 오르면서 순간적으로 탈진하는 수가 있다 하여 우황청심환, 가벼운 상처가 날 수도 있다 하여 밴드와 연고, 감기에 걸리거나 몸살을 할지도 모른다 하여 아스피린과 타이레놀, 관절 통증을 완화한다 하여 셀레브랙스, 고소증을 완화한다 하여 혈관 확장제로 비아그라, 고혈압이 염려된다 하여 혈압 강하제와 심장약(救心)과 청심환 …. 30L의 등산 배낭에도 짐을 쌌다. 짐을 꾸렸다 풀었다 하기를 여러 번 반복하다가 자정이 조금 지나서 결단을 내리고 잠을 청하였다. 이 나이에 고산 등정을 무사하게 할 수 있을까 마냥 불안하기만 하였다.
새벽 04시에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을 설쳤다.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집을 나선 것이 05시 20분. 김해 국내공항의 집합장소에 도착한 것은 06시 10분 전이었다. 일행은 모두가 12명이었다. 세 쌍의 부부와 싱글로 여성 셋과 남성 셋 도합 12명이었다. 그 중 6명은 낙동산악회 김정호 회장님을 비롯하여 사전에 동행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1쌍의 부부와 여성 셋은 출국장에서 만나고 나서야 동행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싱글로 가는 여성 세 분은 서로 가깝게 지내는 친구인 듯 언니야 동생아 하는 사이였다. 그 중에 한 여성과는 작년 여름에 중국을 통한 백두산 등정(登頂)을 같이 하였기에 구면(舊面)이다. 그때 그녀는 대학에 다니는 딸을 데리고 왔었다. 공항에서 그녀를 보고서야 키나발루 등정에 동행하는 것을 알았다. 반가워하면서 그녀와 나는 서로 다가가 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친근한 듯이 이번에는 왜 딸을 데려오지 않았느냐고 말을 붙였다. 낙동산악회 박봉숙 총무가 보이지 않았다. 회장님에 의하면 회사 사정으로 오지 못한다.
집을 나설 때 나는 바지를 두 벌이나 껴입었다. 속에는 하계 등산 바지, 겉에는 동계 등산 바지이다. 상의도 안에는 반소매 티셔츠, 겉에는 긴소매 티셔츠에다 다운자켓(우모 방한복)을 입었다. 말레이시아에 가는 비행 도중에 옷을 갈아입는 부산을 떨지 않고서도 겉 바지, 우모 방한복, 긴소매 티셔츠를 기내(機內)에서 간단하게 벗으면서 바로 말레이시아에 입국하기로 한 것이다.
김해공항은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출국하는 승객의 편의를 위해 매일 이른 아침과 저녁에 한 편씩 인천국제공항으로 직행하는 항공편을 운용하고 있다. 정각 07시의 정해진 시각에 이륙한 비행기는 정각 08시에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출국장의 K카운터에서 말레이시아 항공사에 짐을 부치고 출국수속을 하였다. 탑승 대기 시간 동안에 공항 면세구역에서 양주 한 병과 육포(肉脯)를 샀다.
나에게는 창가 좌석이 배정되었다. 옆 좌석에는 백두산 같이 등정한 여성 동지가 자리하였다. 그녀에게 창가 자리를 양보하였다. 그녀는 비좁다 하여 거절하였다. 그녀는 자리를 잡자 비행기에 비치된 이어폰을 귀에 꼽고 담요를 펴서 무릎을 덮었다. 자연스런 행동이 해외여행에 익숙한 모습이었다. 나는 탑승하면서 집어 온 일간신문을 정독하기 시작했다.
사진 2. 출국장에서 탑승을 기다리며 (촬영 : 전은순)
키나발루 산은 코타키나발루 시내에서 약 83KM 떨어져 위치한다. 코타키나발루 시는 말레이시아 령 보르네오의 사바 주(州)의 주도(州都)이다. 11시 45분에 비행기가 이륙하였다. 팔에 찬 등산용 시계에서 방위를 보니 기체는 이륙 후부터 계속 남남서 방향을 유지하여 비행하였다. 기창(機窓)을 통해 내려다보이는 것이 처음에는 육지이었다. 나의 조국 대한민국인 것이다. 대한민국을 벗어나자 망망대해였다. 기내식으로 점심을 때운 후 바로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는지 잠에서 깨어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한 동안 망망대해가 계속되다가 육지가 시야에 들어 왔다. 코타키나발루가 있는 보르네오인가 보다 하였다. 이상하게도 산에 나무가 없고 황폐한 모습이었다. 시계를 보니 도착 예정 시각(현지 시간으로 15시 40분이다. 말레이시아는 대한민국 보다 표준시가 1시간 늦다. 즉, 한국에서 오후 5시는 말레이시아에서는 오후 4시이다)까지는 아직 멀었다. 필리핀이었던 것이다. 다시 망망대해가 계속되다가 온통 짙은 구름이 시야를 채웠다. 드디어 보르네오 상공에 들어서자 기창을 통해 보이는 광경은 온통 녹색이었다. 울울창창한 숲이었다. 여기 저기 구름이 짙게 깔려 있었다. 혹시나 키나발루 산이 보일까 싶어 계속 지켜보았다. 승무원에게 물었다. 코타키나발루 시는 지금 비가 내리고 있고 짙은 구름에 가려 산이 보일 리가 없다 하면서 웃었다.
사진 3. 착륙 직전의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코타키나발루 (촬영 : 김정호)
코타키나발루가 가깝다고 생각될 즈음에 나는 겉옷을 벗기로 하였다. 옆 좌석의 그녀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녀가 깰까 봐 좁은 공간에서 소리를 죽이면서 조심조심 등산화를 벗고 겉 바지를 내렸다. 속 팬티는 그대로 입고 있었지만 하체가 잠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서둘러 당초부터 입고 있었던 속바지를 다시 입고 등산화를 신었다. 그리고 긴소매 티셔츠도 벗었다. 그녀가 깨어나서 내 모습을 보고 어떻게 변신(變身)한 것인지 놀래 물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농담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잠에서 깬 그녀는 내 바뀐 복장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였다. 말하자면 나에게 무관심한 것이었다. 이렇게 나는 코타키나발루에 입성(入城)하였다.
대한민국과 말레이시아 간에는 무비자 협정이 체결되어 있다. 간단히 입국수속을 마치고 공항 대기실로 나오자 말레이시아에 머무는 동안 우리를 안내하는 가이드가 영접하였다. 순수한 한국 청년이다. 키가 훤칠하였다. 인천 출신이었다. 본명은 뒤에 알려주겠다고 하면서 같이 지내는 동안에 자신을 차두리로 불러 달라 하였다. 그러고 보니 까까머리에다가 얼굴 모습이 영판 대한민국 대표 축구선수 그 차두리를 빼어 닮았다. 말레이시아를 출국하면서 출국장에 들어가기 직전의 작별인사에서 비로소 그는 자신의 본명을 밝혀주었다. 아주 쾌활한 청년이었다.
공항 대합실에서 미화(美貨) 100불을 꺼내어 말레이시아 화폐로 환전하였다. 한국에서 미화 500불을 가지고 갔다. 화폐는 단위가 링기트로 미화 1불은 약 3.3 링기트이었다. 공항 건물 밖을 나서자 열기(熱氣)가 확 밀려 왔다. 28℃이었다. 얼굴에 땀이 맺히기 시작한다. 짐작은 하였지만 아침에 추운 겨울의 한냉한 공기를 마시면서 떠나 갑자기 들여 쉬는 열대의 열기가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거리는 온통 비에 젖어 있었다. 조금 전에 한 줄기 하고 지금 그친 상태라 하였다. 대기하는 버스를 타고 움직이는데 비가 차창을 때리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첫날을 키나발루 산록(山麓)에 위치하는 메실라우 산장에서 묵기로 되어 있었다. 공항에서 차로 2시간 정도 걸린다 한다. 버스는 팀폰 국립공원 입구로 가서 봉고차로 바꾸어 탔다. 거리는 차분한 모습이었다. 차가 많았지만 차들이 모두 얌전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교통경찰이 보이지 않았다(우리가 말레이시아에 머물 동안 경찰을 본 적이 없다). 사회가 안정되어 있고 질서가 정연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가이드에 의하면 휘발유가 리터당 우리 돈으로 500원 정도라 한다.
말레이시아는 연방 국가로 말레이시아 반도와 남지나해 건너 보르네오 섬에 위치한 사바 주와 사라왁 주로 구성되어 있다. 말레이시아에는 석유가 난다. 인구는 약 2천만. 이에 비해 국토가 약 33만KM2로 넓고 지하자원이 풍부하다. 전기는 240 볼트에다 교류 50 사이클이다. 인구의 57%는 말레이인이다. 나머지 대부분은 중국 화교가 차지하고 그밖에 인도인과 원주민으로 구성된다. 국민소득은 1인당 연간 7천불 정도이다. 정치 권력은 말레이인이, 경제 권력은 중국 화교가 장악하고 있다. 말레이시아인의 주된 종교는 이슬람교이다. 여타 종교에 대해서도 관대하여 종교의 자유가 잘 보장되어 있다. 한국인이 우리나라에서 신앙생활이 쉽지 않은 여호와의 증인과 모르몬교를 여기서는 어려움이 없이 전도 활동을 할 정도라 한다.
말레이시아에서는 말레이어, 중국어, 영어가 통용되고 있다. 말레이시아는 영국의 식민지였다. 우리보다는 10여년 늦게 독립하였다. 거리의 간판은 알파벳과 한자가 섞여 있다. 조금 이상한 단어들이 보였다. 이곳에 머물 동안 확인된 것을 들면 BAS, RESTORAN, AKUARIUM, MARIN, MUZIUM…. 영어로 치면 철자가 틀린 것 같은데 뜻은 분명히 영어의 BUS, RESTAURANT, AQUARIUM, MARINE, MUSEUM…이다. 외국어를 자국어로 흡수한 것이다. 말하자면 외래어이다. 자신의 언어는 있지만 자신의 글자를 가지지 못하고 알파벳을 차용(借用)하여 외래어를 자신의 발음에 맞추어 표기하는 결과로 나타난 현상이다. 문득 나는 현재 지구상에서 자신의 말을 자신의 글로 나타내는 민족이 몇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는 우리말을 우리 문자로 나타내는 민족이라는 자긍심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메실라우 산장으로 가는 도중에 비는 오다가 그치다가를 반복하였다. 고도가 점점 높아져 밖의 기온이 점점 내려가는 듯 차창에 김이 서렸다. 나는 연신 손가락으로 창을 닦으면서 밖의 풍경을 보았다. 산은 온통 울창한 숲으로 덮여 있다. 길은 숲 속으로 이어지고, 숲에 야생 바나나가 계속하여 나타났다. 야자수도 보였다. 바나나 나무가 흔하다는 일행 중 누군가의 말에 차두리 군이 퀴즈를 내었다. 바나나, 망고, 오렌지의 세 과일 중 나무에서 열리지 않는 것을 묻는 것이었다. 차군은 정답을 맞히면 상을 주겠다고 사전에 약속을 하였다. 나를 제외하고 모두가 틀렸다. 말레이시아를 떠날 때까지 그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고도가 계속 올라갔다. 차가 모퉁이를 돌자 계곡 건너 맞은편에 구름 속에서 높은 산이 갑자기 불쑥 나타났다. 우리는 키나발루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키나발루는 이 산의 뒤에 가려 한참 멀리 있다. 방금 본 산이 너무 높아서 오판(誤判)한 것이다. 조금을 더 전진하자 골프장이 보였다. 문득 주치의의 말이 생각났다. 부산등산교실 8기의 교육 과정에서 등산 의학의 강사로부터 고소 증세를 완화하는 데 비아그라가 좋다는 말을 들은 바가 있다. 출국하기 전에 그를 만났다. 그는 과거에 키나발루 산록에서 키나발루를 바라보면서 골프를 자주 쳤지만 지금은 허리도 팔꿈치도 예전 같지가 않아 골프를 쉬고 있다는 것과 나이 들어 골프를 치기 시작한 친구들이 “늦게 배운 도둑 시간 가는 줄 모르듯이” 너무 자주 골프를 치는 바람에 거의 모두가 예외 없이 허리와 팔꿈치가 불편하다 하면서, 노리(老羸)에 해외의 고산을 등정하거나 트레킹을 하여 고소증을 경험한 사람들이 귀국 후 후유증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은 점을 들어 나이에 비해 높은 산을 오르는 것이 무리라 하였다. 나더러 자제를 거듭 강조하였다. 비아그라를 처방 받고 나오면서 기분이 우울하였다.
메실라우 산장에 도착한 것은 오후 07시 30분이었다. 주위는 이미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본관 건물에서 방을 배정 받고 각자 숙소로 갔다. 세 쌍의 부부와 따로 우리 싱글 여섯 명에게는 같은 건물이 배정되었다. 숙소는 본관에서 떨어져 숲 속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방갈로식의 산장이었다. 비는 멎었다. 등산 배낭을 지고 무거운 여행 가방을 힘들게 끌면서 숙소를 찾아 가는 데 10여분은 족히 걸렸다. 동행한 한 남자 분과 2층의 트윈 방에 들었다.
사진 6. 저녁에 도착한 메실라우 산장 (촬영 : 김정호)
짐을 방으로 옮기자 간단하게 세면을 하고 바로 식당으로 갔다. 식당은 조금 전에 방을 배정 받았던 본관에 있었다. 메뉴는 해물 샤브샤브이었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모듬 냄비이다. 6명씩 조를 이루어 하나의 솥에서 끓는 육수에 야채, 생선, 고기를 넣으면서 익는 대로 건져 먹고 계속해서 야채, 생선, 고기를 넣었다. 고기는 닭고기뿐이었다. 볶음면(?)이 나왔다. 볶음면은 향미(香味)가 입에 맞지 않았다. 볶음밥 같은 것도 나왔다. 쌀알이 긴 것이 찰기가 없어 젓가락으로 집는 것은 물론이고 스푼으로도 퍼먹기가 쉽지 않았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이 한국에 원조한 구호양곡(救護糧穀) 중에 이런 쌀이 배급되었다. 안남미(安南米)이었다. 찰기가 없어 날리는데다가 맛도 없었다. 못 먹겠다고 투정을 부리는 나를 어머니가 야단치셨던 기억이 생생하다. 마침 여성 동지들이 한국에서 손수 담은 김치를 풀었다. 볶음면과 볶음밥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이 김치 때문이었다.
일행 중 평소에 알고 지내는 남자 한 분이 인천국제공항 면세점에서 가져온 양주를 꺼냈다. 언제 이를 짐에서 풀어 가져올 생각을 하였는지 그의 순발력을 높이 평가하였다. 내가 가져온 것은 하산 후의 자축 파티에서 마시기로 하려고 숙소에 두고 왔다고 변명하면서 마개를 열었다. 주로 남자 여섯이 잔을 돌리면서 마셨다. 서 너 잔은 남았을까 잔 돌림이 멈추면서 그 이상 술을 마시지 않게 되자 남자 종업원이 남은 양주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았다. 그에게 술이 남아 있는 병을 주었다. 그는 몇 번이고 “탱큐”를 하였다.
키나발루는 말레이시아 국립공원이면서 유네스코에 등록된 세계자연유산이다. 전 세계로부터 많은 관광객이 온다. 종교에 따라서는 금기(禁忌)된 육류가 있다. 유태교도와 이슬람교도는 돼지를 먹지 않는다. 힌두교도는 소는 물론이고 우유를 취하지 않는다. 닭고기는 어느 종교에서도 금기하지 않는 식품이다. 그리고 이슬람교는 술을 못 마시게 한다. 그래서 말레이시아에서는 음주문화를 비롯하여 밤의 문화가 수용되지 않는다. 식탁에 닭고기만 있고 종업원이 우리가 남긴 양주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이슬람교 문화와 관계가 있음을 알 때 비로소 이해가 간다.
식사는 천천히 그리고 즐겁게 하였다. 두 시간 정도 걸린 저녁을 마치고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정시(定時)가 지나서인지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찬물로 몸을 대강 씻고 내일의 산행 짐을 꾸린 후에 잠자리에 들었다. 열대라 하지만 고도가 높아서인지 밤에는 약간 서늘하였다. 전기 난풍기가 있었다. 난방은 물론이고 방의 공기도 건조시킬 겸 해서 켜고 잠자리에 들었다. 시트에서 습기와 아울러 곰팡이 내가 났다. 밖에서는 비오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숲 속의 개울물이 흐르는 소리를 착각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였다.
2007.01.14(일)
07시에 기상하였다. 온수가 나와 정식으로 샤워를 하였다. 서둘러 어제 만찬을 하였던 식당으로 갔다. 같은 방갈로에 투숙한 여성 세 분과 동행하였는데 여성들을 따라 지름길로 갈 수 있었다. 처음 방문하는 외지에서 그것도 밤중에 딱 두 번 지나간 길을 어쩌면 빨리도 길과 방향을 익혔는지 여성의 눈썰미에 나는 감탄하였다.
아침 식사는 뷔페식이었다. 빵에 치즈와 딸기 잼을 발라 먹었다. 오렌지 주스가 있었다. 우유는 보이지 않았다. 어제 저녁에 나왔던 볶음면(?)도 볶음밥도 보였다. 안남미로 지은 죽도 있었다. 오늘의 고된 산행을 감안하여 평소에 비해 과식이다 싶을 정도로 배를 채웠다. 산행 중에 먹을 도시락은 이 산장이 제공한다. 도시락은 삶은 계란 하나와 식빵 네 조각과 비닐병에 담긴 생수 500CC이었다. 식빵은 치즈를 끼워 넣은 단순한 것이었다. 한국인에게는 그냥 먹기가 좀 거북하다는 차두리 군의 조언에 따라 딸기 잼을 두 개 챙겼다.
망고, 바나나, 수박, 수박과 비슷한 이름 모를 과일이 식후 디저트로 준비되어 있었다. 망고를 제외하고는 당도가 형편이 없었다. 망고는 한국에서 보다 신선하고 새콤하였다. 말레이시아에 머무는 동안 식후에 나오는 과일은 방금 열거한 것이 전부이었다. 열대이면서 과일의 종류가 매우 빈약하였다. 당도가 낮은 것은 비가 많은데다가 일교차(日較差)가 작은 탓이라 하겠지만 과일의 종류가 빈약한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계(四季)가 분명한 한국에서는 철따라 다양한 종류의 과일이 나온다. 모두 당도가 높다. 깨물 때의 아삭아삭하며 이에 씹히는 감각에 달고 향기로운 얼음골 사과가 유달리 생각났다.
아침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돌아오면서 잠시 길을 잃고 헤매었다. 여성 동지들이 뒤따라 와서야 가까스로 숙소를 찾을 수 있었다. 여자가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는 자신을 말레이시아에서도 경험하고 “오직 여성적인 것만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괴테의 말이 생각나서 혼자서 웃었다. 서두러 짐을 챙겼다. 짐을 두 개로 나누었다. 숙소에 맡길 짐은 여행용 트렁크에 넣었다. 오늘과 내일의 이틀 간 산행에 필요한 짐만 등산 배낭에 꾸렸다.
무거운 짐을 끌고 지고 식당으로 돌아오자 현지인 산행 가이드와 포터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은 산행 가이드가 없으면 입산이 허용되지 않는다. 산행 가이드는 등산인 6명당 1명이 배정된다. 여행용 트렁크는 산장에 맡겼다. 우의 하의, 오늘 밤에 갈아입을 옷, 내일 정상 등반에 필요한 등산복과 장비 일체를 모두 등산 배낭에 넣어 짐을 다시 꾸린 뒤에 포터에게 맡겼다. 처음에는 도시락과 생수병은 큰 요대(腰帶)에 넣어 허리에 차려고 하였다. 그러나 오늘 올라갈 여정과 고도를 생각하여 요대에 넣은 채로 포터에게 넘긴 배낭에 달았다. 합쳐서 약 10kg 정도는 조이 되었다. 짐값은 말레이시아 화폐로 80링키트, 한화로 약 2.4만원이었다. 정해진 요금이었다. 말레이시아 화폐로 지불하였다.
포터는 20대 초반의 순박하게 보이는 청년이었다. 이번 여행 중에 포터를 비롯하여 가는 곳 마다 만나는 봉사원들 모두가 순박하고 성실하였다. 이슬람문화권이 모두 그러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오늘 종일은 물론이고 내일 산행이 끝나고 메실라우 산장에 맡긴 짐을 찾아 버스를 탈 때까지 배낭을 메고 동행하였다. 나 외에도 우리 일행 중 대부분이 짐을 포터에게 맡겼다.
나는 차양 달린 여름용 등산 모자를 쓰고 긴소매 티셔츠와 하계용 등산 바지를 입었다. 비가 약간 뿌려서 우의를 입으려 하자 김정호 회장님이 큰 비가 내릴 때 입더라도 현재로는 그럴 것까지 없다 하여 우의 상의만 걸치고 우의바지는 배낭에 다시 넣었다. 작은 요대에 카메라?기록지?볼펜?비스켓?초콜릿을 넣고 허리에 찼다. 포터에 맡긴 것과는 별도로 생수병을 가슴에 품었다. 생수병은 우의 상의의 지퍼를 열고 가슴에 품었다. 이렇게 하면 생수병은 요대에 의해 허리가 조아진 우의 안에서 밖으로 빠지지 않았다. 손가락 양말을 낀 양손에 알파인 스틱을 들었다.
비를 맞으며 산행을 할 때는 바지를 타고 빗물이 양말에 베이기 십상이다. 양말에 베인 빗물은 양말을 타고 아래로 스며든다. 이렇게 되면 등산화는 물론이고 양말이 속에서부터 젖어버린다. 이것은 어떤 우의를 입어도 당하는 일이다. 비가 아니라도 아침 이슬이 맺힌 풀숲을 헤치고 산행할 경우에도 이슬이 바지 아래를 통해 양말을 타고 신발 속으로 스며든다. 그 결과로 발이 붙고 발바닥에 물집이 생겨 산행 내내 고통을 받는다.
나는 재작년 여름 새벽에 영축지맥을 종주하기 위해 양산 어곡의 명전 고개에서 출발하여 염수봉, 오룡산, 한피기고개, 시살등, 영취산으로 이어지는 산행을 하면서 이 경험을 쓰라리게 한 적이 있다. 언양의 시외버스 정류장까지 도착하기까지 약 28KM의 거리를 물집이 생긴 발바닥으로 걸었다. 그 후로 궁리를 거듭한 끝에 나만(?)의 비책(秘策)을 찾았다. 먼저 주부들이 음식을 싸거나 보관하는 데 사용하는 투명 비닐 봉투를 막힌 쪽을 잘라 양 쪽이 서로 통하도록 한다. 그리고 바지를 무릎까지 올리고 양말을 신듯이 이것을 다리에 꿰어 한 쪽 끝을 고무줄로 무릎에 고정하고 다른 쪽 끝을 발등까지 내려 등산화를 덮는다. 그리고 바지를 내려 비닐 봉투 전체를 바지 속에 감춘다. 이렇게 하면 빗속 또는 아침 이슬이 맺힌 풀숲 속을 걷는 산행에서 바지를 타고 등산화 속으로 물이 베여 양말이 젖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백두산 산행에서 나는 이 방법을 처음으로 활용하여 재미를 보았다. 비닐 봉투 두 장을 접으면 지갑 속에도 넣을 수 있을 정도로 부피가 작다. 무엇보다도 무게가 전혀 나가지 않는다. 신고 있는 양말 끝을 접어 그 속에 넣어도 겉으로 표가 나지 않는다. 현장에서 비가 오거나 이슬이 맺힌 풀숲을 만나면 즉각 간편하게 대비할 수 있다. 우의 바지를 입지 않는 대신에 내가 이런 준비를 하는 것을 보고 우리 일행 중 몇 몇은 즉석에서 포장용 비닐을 조달하여 나를 모방하였다.
산행 입구는 산장 바로 앞에 있었다. 사전에 신고를 하여서인지 바로 입산 허가의 징표로 흉패(胸牌)를 받았다. 패는 두꺼운 비닐로 된 것으로 크기가 가로 5.5CM, 세로 8.5CM이었다. 전면은 백색 바탕에 흑색 글씨로 로마자의 내 이름이 최상단에, 둘째 줄에 연월일, 셋째 줄에 MA14, 넷째 줄에 (002), 마지막 줄에 ⓐ가 표시되어 있었다. 이면에는 키나발루 산자락에 얕은 구름이 걸린 키나발루의 전경과 산 아래 녹색의 숲을 담은 전경 사진이 인쇄되어 있고, 숲이 있는 부분에 황색으로 “Welcome to Mt. Kinabalu"라고 큰 글자체의 영문이, 그 아래에 백색으로 "Take nothing but photographs. Leave nothing but footprints"라는 문구, 그리고 그 하단 중앙에 “Kinabalu Park World Heritage Site”라는 문구가 네 줄로 나뉘어 적혀 있고, 양쪽에 뜻을 알듯 말듯 기관명을 영문으로 적은 문양(紋樣)이 있었다. 패는 상단에 구멍을 내어 집게를 끼웠고 집게 손잡이에 구멍을 내고 녹색의 구두끈 같은 줄을 끼운 형태이었다. 이 줄을 목에 걸어 패를 가슴에 달고 내일 산행이 종료될 때까지 계속 착용하게 되어 있었다.
직원이 입산신고서에 내 이름과 생년월일과 국적을 기입하고 흉패와 대조하여 본인 여부를 확인한 후에 입산을 허락하였다. 우리 일행만이 아니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청년들이 섞여서 산행을 시작하였다. 아침 8시 50분이었다. 현지 산행 가이드가 선두에 서고 차두리 군이 후미에 섰다.
키나발루의 산행 기점(起點)은 두 곳에 있다. 하나는 해발 1,866M의 팀폰 게이트이고 또 하나는 해발 1,926M의 메실라우 게이트이다. 팀폰 게이트는 키나발루의 남쪽에 위치하여 이곳을 통과하는 산행은 정상을 향해 직상(直上)한다. 메실라우 게이트는 팀폰 게이트에서 동쪽으로 약 8KM 떨어져 있다. 최근에 개장된 곳이다. 두 기점에서 산행을 시작하여도 산행 루트는 팀폰 게이트로부터 약 4KM 북쪽 지점에서 합류한다. 따라서 메실라우 루트는 처음에는 정상을 향해 직상하지 않고 이 합류 지점을 향해 비스듬히 측진(側進)한다. 합류 지점까지 거리는 약 5.5KM로서 팀폰 루트에 비해 1.5KM 길고 계곡과 능선을 오르락내리락 한다.
산행을 시작하자마자 울창한 정글 속으로 난 가파른 계단 길을 올라갔다. 길은 비에 젖어 있었다. 처음에는 외국의 다른 청년과 입산 신고를 하였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 일행만의 호젓한 산행을 즐기게 되었다. 길은 정글 속으로 계속 이어졌다.
등산로의 0.5KM마다 메실라우 산행 입구로부터의 이격(離隔) 거리와 함께 해발 고도를 표시한 표지목이 있고, 우리의 팔각정 같은 쉼터가 있었다. 쉼터마다 화장실이 있고 수도꼭지가 보였다. 꼭지를 틀면 마실 물이 펑펑 나왔다. 굳이 음용수를 휴대하지 않아도 되었다. 물은 차고 맛이 있었다. 물이 무슨 맛이 있겠느냐만 고된 산행 중에 그 청량(淸?)한 맛은 가히 일품이었다. 키나발루 산은 화강암을 기반암으로 하고 있다. 부산의 금정산도 그러하다. 석회석이 아니기 때문에 물이 음용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출발 후 40분이 경과하여 기점으로부터 1.0KM 지점에 첫 번째로 쉬마 쉼터가 나타났다. 1.0KM를 통과하는데 40분이나 걸린 것이다.
사진 14. 등산 입구에서 1.0KM 지점의 첫 번째 쉼터 (촬영 : 김정호)
첫 번째 쉼터로부터 20분 정도를 가서야 우리는 능선에 섰다. 능선에 올라서자 울창한 숲으로 덮인 깊은 대협곡과 그 건너 맞은 편 멀리에 전개되는 엄청난 규모의 암장이 우리 앞에 전개되고 있었다. 키나발루는 지표 아래에서 수백만 년에 걸쳐 약한 지표면을 뚫고 위로 상승한 화강암이 빙하에 깎여 형성되었다 한다.
내 생애에 처음 경험하는 웅장한 조망이었다. 높은 고지에서 대협곡과 그 건너편의 암장을 바라보는 경관이 숨이 막힐 정도로 나를 압도하였다. 마침 어젯밤에 내린 비로 암벽을 타고 폭포수가 길게 띠를 이루어 흰 물거품을 내면서 여기 저기 쏟아지고 있었다. 멀어서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산행가이드는 이를 “키나발루의 눈물”이라 하였다. 키나발루란 말레이시아 말로 “죽은 자의 영혼을 위한 안식처”이다. 금방 구름인지 안개인지 조망을 가렸다가 금방 구름이 벗겨지면서 대협곡과 웅장한 암장의 경관이 시야에 뛰어든다. 양쪽으로 깎아지른 능선을 걸으면서 마치 백두대간의 어느 구간을 걷는 것 같은 착각을 하였다.
이따금 가랑비가 뿌렸다. 산행 내내 가랑비는 짬짬이 뿌렸다가 멈추었다 하기를 반복하였다. 어떨 때는 안개비도 내렸다. 폭우를 만나지 않은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오늘 우리의 산행은 복 받았다. 능선에서 계곡으로 내려가 다시 능선으로 오르면 계곡 건너 맞은편에 다시 웅장한 암장의 경관이 펼쳐졌다. 10시 58분 3.0KM 지점을 통과한 직후에 계곡을 만나면서 출렁다리를 건너고 황색(갈색?)의 개울물을 보았다. 메실라우는 말레이시아어로 “황색의 물”이라는 뜻이라 한다. 왜 황색을 띠는지는 모르겠으나 마셔도 된다 하였다. 일행의 어느 누구도 마시려 하지 않았다.
사진 17. 출렁다리를 건너며 1 (촬영 : 전은순)
사진 18. 출렁다리를 건너며 2 (촬영 : 김정호)
사진 19. 황색의 개울물을 바라보며 (촬영 : 신현옥)
사진 20. 메실라우 등산 입구로부터의 이격거리를 나타내는 표지목 (촬영 : 김정호)
첫댓글 산행기를보니 다시한번 올라갔다온 느낌으로 상세히 올렸네요. 등반은 나이에 비레하지않고 꾸준한 산행만이 정상정복의길인것 같습니다, 이제5000m 등반도 무난히 해낼것입니다 . 홧------팅, 등정을 축하드립니다^-^
강용주교수님 멋진 등정 하고 오셨네요~~ 축하드립니다...
교수님의 끈기와 열정을 존경하고 사랑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