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와 공주이야기
교육학과 200900112
김일지
이번 에세이를 쓸 때 주제로 어떤 것을 잡아야 하나 한참 생각해보았다. 교수님께서 추천해주신 ‘한국의 근대와 공주사람들’에 관한 글을 읽다 보니 공주와 철도의 연관성에 대해 조사해 보면 어떨까 싶었다.
나의 집은 군산이다. 공주대학교에 입학하고 난 후 집에 가기 위해 교통편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군산으로 가는 직통시외버스가 없었다. 그래서 다른 방편으로 철도를 찾아보았는데 공주역이 없었다. 당연히 있을 줄 알았던 철도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내가 이용할 수 있는 교통수단은 시외버스 하나로 한정되었다. 그 뒤로 집에 갈 때 대전이나 서천으로 가서 갈아타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여튼 공주에서 대학을 다니게 된 뒤로 '왜 그 흔한 기차역이 없을까?' 라는 의문을 지니고 있었다. 공주에 철도 부설이 되지 않은 이유를 생각하며 답사는 공산성에서부터 시작했다. 혹시 철도가 부설되지 못한 지리적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며 공주의 지리를 내려다보기 위해 공산성에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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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성으로 올라가는 길에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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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성에서 내려다 본 금강의 모습.
공주는 과거 백제의 왕도였다. 백제의 개로왕은 고구려군이 침략해 오자 동생 문주를 신라로 보내 구원군을 얻어 오게 하였으나 구원병이 도착하기 전에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전사하였다. 이에 문주왕은 웅진으로 천도하게 되었다. 문주왕이 웅진으로 천도한 이유는 웅진의 지리적 요건을 들 수 있다. 웅진은 우선 북쪽으로 차령 산맥이 가로 질러 있어 북쪽의 고구려군을 방어하는데 유리하였고 금강이 동북쪽으로 둘러싸고 있어 천연적인 2차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또 동쪽으로는 계룡산이 있어 외적의 침입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였다. 금강의 수로를 이용해 서해로 나가 중국과 통교할 수 있었고 남쪽으로 현재의 우금치를 넘으면 부여를 지나 드넓은 호남평야가 자리하고 있어 교통과 경제의 이점도 갖추고 있었다.
▲ 공주는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지형이다.
또한 공주는 조선시대에 충청감영이 있던 도시였다. 이로써 공주는 충남의 중심도시라는 명성을 근대시기까지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근세에 들어와서 경부선(부설시기 1899~1905), 호남선(1910~1914), 장항선이 공주를 비껴 지나감으로써 공주는 개발의 기회를 상실하였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공주의 유생들이 철도 부설을 반대하여 철도를 우회하였다고 하지만 이는 근거가 없다.
공주에 철도가 부설되지 않은 이유는 다음과 같다. 1899년 경부선 노선을 어디로 설정할 것인가를 논의할 때(1905년 전체 노선 개통), 전의-공주-논산-은진-금산-영동으로 이어지는 코스가 고려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위의 코스는 최종 결정단계에서 경제적 및 군사적인 이유(1904년 러일전쟁 대비)로 폐기되고 말았다. 호남선 노선도 마찬가지로 일제의 국가적 이익에 따라 결정된 것이었다. 1900년대 말 호남선을 부설할 때(1914년 전체 노선 개통), 일본은, 천안-공주-논산으로 이어지는 직선 코스를 선택하지 않고, 기존의 경부철도 노선을 그대로 활용하는 방침을 채택하였는데, 이것도 유생들의 반대 때문이 아니라, 비용과 시간을 절감하기 위해서였다. 철도 노선을 결정할 때 일제가 중요하게 고려한 사항은, 철도가 지나는 지역의 ‘호구 조희(稠晞)’, ‘전야(田野) 광협’, ‘물화 다소’, ‘교통 번한(繁閑)’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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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강점기 충남 행정의 중심이었던 공주시가지(도청소재지가 대전으로 옮겨가기 전)
공주는 경부·호남철도가 부설되어 조치원, 대전, 논산 등의 성장이 가속화되면서, 상업중심지로서의 기능은 물론이고 행정중심지로서의 기능도 점차 상실해가기 시작하였다. 철도의 개통 이후 대전의 도시세가 커지자 1932년 총독부는 충남도청을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하였다. (2006년 충남도청은 홍성(홍북면) 예산(삽교면) 일대로 이전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도청이전과 관련된 단서를 찾기 위해 공산성에서 발길을 돌려 친구와 자전거를 타고 충남 역사박물관으로 향했다. 지리도 모르는 채로 무작정 발걸음 닿는 대로 찾아 나선 덕에 더운 날 땀 삐질삐질 흘리며 한참을 헤맸다. 한참을 물어물어 하다가 어느 인심 좋으신 할머니가 따라오라고 하셔서 찾아갈 수 있었다. 박물관을 둘러보다가 도청이전 당시의 대전 시내 모형과 관련유물을 살펴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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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으로 이전된 충남도청 건물의 모형이다.(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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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도청이전 관계 서류철(1932)과 대전으로 이전한 충남도청의 낙성식 기념 술잔(1932)
1932년 10월 충남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옮겨진 것도 결국은 철도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철도 때문에, 공주는 ‘지는 달’이 되었고, 천안, 조치원, 대전 및 논산은 ‘뜨는 해’가 되었던 것이었다. 1904년 현재 대전 시가지, 즉 본정통(本町通, 현재의 元洞)과 춘일정통(春日町通, 현재의 宣化洞) 등에 거주하던 일본인은 겨우 188명에 불과했으나, 1910년에는 3,891명, 그리고 1932년 도청이 대전으로 옮겨지는 시기에는 무려 8,254(조선인 25,481명)명에 달하였다. 하지만, 공주의 일본인 숫자는 1915년 1,560명(조선인 4,624명)이었으나, 1932년에는 1,342명(9,448명)으로 오히려 줄어드는 경향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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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시대의 대전역이다.
충남도청의 이전과정에서 공주시민들은 도청이전 반대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는 실패로 돌아갔다. 도청이전 반대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공주유지들은 ‘도청이전 대가의 지불’ 등 후속조처를 기대하면서 관망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그러나 총독부가 별다른 조처를 취하지 않자, 공주유지들은 ‘시민대회’를 새롭게 조직하는 등 본격적인 보상물 요구운동을 전개하였다. 1932년 7월 10일 저녁 8시 공주읍사무소 앞뜰에서 개최된 공주시민회 총회는 그동안 공주지역 유지집단이 요구한 ‘보상물’이 대체로 어떤 종류의 것들이었는가를 정리된 형태로 보여준다. 시민회 대표들은 그간 총독부와의 접촉을 통해서, ‘도 및 총독부 예산으로 처리해 주어야 할 보상요구 13가지’, ‘(본국정부) 국비로 시설해 주어야 할 보상요구 7가지’를 제시하였으나, 제대로 답변을 듣지 못했다고 보고한 후, ‘당장 해결해야 할 보상요구 3가지’를 결의하고, 위 대회를 폐회하였다.
당시, 공주지역 유지들이 ‘도 및 총독부 예산으로 해결해 줄 것’을 요구한 사항은, 5년제 농업학교 설치 / 공주 - 유구 - 온양간 도로 개수 / 공주 - 예산간 도로 중 웅진 도강장(渡江場)을 폐지하고, 연미산을 돌아 신관리로 연결하는 도로 개설 / 공주 - 예산간 도로 중 동천진에 교량 가설 / 공주시장을 읍 경영으로 해결해 줄 것(연수익 약 1,000원) / 산성공원 내 도로 개설(경비 6,000원) / 공주신사(公州神社) 직통 참배 도로 개설(경비 1,000원) / 백제박물관 지방비로 설치 / 읍채 8만원과 학교조합비 1,000원을 국비로 부담 / 시내 하수구 및 교량 신축(경비 10만원) / 공주∼조치원간 승합차 경영을 철도국 직영으로 할 것 / 우편국 옆에 도로 신설 / 기공식만 가진 금강대교 건설의 촉진 등이었다.
‘국비로서 시설해 줄 것’을 요구한 사항은, 철도의 부설, 의학전문학교 신설, 고등농림학교 또는 고등상업학교 설치, 관립사범학교 설치, 공병대의 주둔, 전매지국의 설치, 국립공원 설치 등이었으며, 또 ‘당장 해결해 줄 것’을 요구한 사항은 중선철도(영월∼조치원∼공주∼장항간 철도)의 건설, 관립 사범학교 설치, 궁민구제자금의 융통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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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청이전의 보상물로 지어진 금강교가 한국전쟁당시에 폭파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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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전쟁 때 폭파된 금강철교(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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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전쟁 이후 다시 지어진 금강철교
위에 언급된 요구들은, 공주 유지들이 지역발전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한 거의 모든 요구들을 총망라한 것이라 보여진다. 위의 요구들 가운데 총독부에 의해 부분적으로나마 수용된 요구는, 1933년의 금강교 가설, 1933년의 농업학교 개교, 1938년 사범학교 설립, 그리고 재판소, 잠종시험소 등 각종 부속기관의 대전 이전이 잠시 동안 보류된 것 뿐이었다. 공주지역의 유지집단은 위의 시민대회 이외에 충남도평의회나 ‘상공업자대회’를 통해서 꾸준히 보상물 요구운동을 전개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공주시지 역사편 참조)
그런데 2006년에 호남고속철도 계획이 발표되었다. 호남고속철도는 서울특별시에서 전라남도 목포시까지 연결되는 고속철도로 2006년 착공하여 2017년까지 완료된다. 정부는 호남고속철도 정차역이 부족하고 정차역 간 거리가 경부고속철도에 비해 너무 길어 이용률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지적에 따라 공주, 정읍역을 추가하였다. 이에 따라 호남고속철도 정차역이 오송~공주~익산~정읍~광주~목포 6개로 늘어났다. 공주에 철도가 부설되면 타지역에서 온 공주대의 학생들도 교통편이 편리해질 것이다. 물론 나의 경우에는 공주에서 익산으로 가서 군산으로 연결되는 장항선을 탈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졸업하고도 몇 년 뒤에나 철도가 완공되기에 조금 아쉬운 맘이 없지 않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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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포토에세이의 마지막 사진인 집으로 가는 길에 찍은 장항선이다.
조사를 하면서 느낀 거지만 만약 일제시대 때 대전 대신 공주에 철도가 부설되었다면 공주는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든지 거꾸로 생각해보면 그 이면에는 장점과 단점이 모두 있는 법이다. 철도의 부설 대신 공주는 여러 가지 보상물들을 얻을 수 있었다. 그 보상물들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아마 교육적인 혜택이 아니었나싶다. 공주에는 공주교육대학교, 공주대학교 등 학교가 많다. 그래서 공주는 교육도시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도시가 발달하기 위해서는 편리한 교통, 넓은 소비시장, 풍부한 공업용수, 축적된 자본과 기술 등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모든 조건이 충족되어도 교육여건이 제대로 구비되어 있지 않으면 완전한 도시 발달이 힘들다. 이러한 공주의 강점을 잘 살린 발전전략을 강구한다면 과거의 위상을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마지막으로, 이번 답사에서는 철도의 미부설로 인해 공주가 받은 영향을 조사해 보고 싶었는데 마땅히 찍을 사진이 없어서 여기저기 헤맸던 것이 아쉽다. 하지만 여기저기 헤맴으로써 신관동에서 벗어나 공주 이곳저곳을 가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다음번에는 아직 가보지 못한 공주의 다른 곳을 찾아 헤매 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