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곡큰스님 일화 <끝> 연재를 마치고
“정진만 하거래이…공부바께 할끼 없능기라”
얼마 전 조계사에서 조계종 제14대 종정 예하의 추대식이 있었다. 그날따라 비바람이 불고 추웠지만 한쪽에 서서 축하의 예를 올렸다. 경사스러운 날에 비바람이 불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옛말이 있다. 종정 예하의 지도 아래 종단의 앞날이 더욱 더 밝아지리라는 희망을 주는 비바람이 아닌가 싶었다. 때마침 ‘향곡큰스님의 일화’가 거의 끝날 무렵이어서 감회가 더더욱 새로웠다. 14대 종정이 되신 진제(眞際)스님은 향곡큰스님의 법을 이은 법제자여서다. 만약에 큰스님이 살아 계셨다면 종정에 오른 전법제자를 보시고 크게 기뻐하셨을 성싶다. 큰스님은 ‘스승을 뛰어넘는 제자가 나와야 뛰어난 스승이다’라고 늘 말씀하셨다. 그러기에 금강당세계(金剛幢世界)에서 내려다보시고 “니가 내카마 더 낫구나”라고 혼잣말을 하시며 흐뭇해 하셨을 것 같다.
‘향곡큰스님 일화’는 모두 70편으로 2년에 걸쳐 불교신문에 올렸다. 끝난다고 생각하니 왠지 못다 한 말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것처럼 허전하고 가슴 한구석엔 구멍이 뻥 뚫려 있는 듯하다. 원래 글솜씨가 없을뿐더러 글이라고는 써 본적이 없는 터다. 경주의 동리목월문학관에서 수필공부를 시작해 삼 년이 지나면서부터 ‘향곡큰스님 일화’에 대해 쓸 준비를 했다. 막상 시작하고 보니 글쓰기가 만만치 않았다. 뿐만 아니라 잘못 쓰면 큰스님께 누를 끼칠 것 같아 시작부터 매우 조심스러웠다.
누군가 향곡큰스님 일화를 쓰지 않으면 영원히 묻혀버릴 이야기들이다. 큰스님을 옆에서 모신 기간은 삼 년 여에 불과하지만 많은 가르침을 듣고 보아 왔기에 그냥 흘려버리기엔 너무나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여러 번 고심한 끝에 해운정사로 가서 종정 큰스님의 허락을 받았다.
선사들에 관한 어록이나 법어집은 많지만 그분들의 일상을 묶어낸 책은 극히 드물다. 일본 유학 시절, 일본 조동종(曹洞宗) 개산조인 도원(道元) 선사의 제자 회장(懷奘)이 쓴 <정법안장수문기(正法眼藏隨聞記)>를 읽은 적이 있다. 담담하게 쓴 시봉기(侍奉記)를 읽고 만약에 큰스님 일화를 쓰게 된다면 이렇게 쓰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엔 그런 생각이 현실로 다가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처음에 신문연재를 하도록 용기를 준 이는 마음치유학교 교장 혜민 스님이다. 어느 법회 자리에서 인연이 되어 ‘향곡 큰스님 일화’ 중에 초고의 일부분을 메일로 보냈더니 “책으로 내기보다 신문에 먼저 실어 많은 사람들이 읽도록 했으면 좋겠다”는 조언을 보냈다. 다행히도 <불교신문>과 인연이 되어 연재를 시작했다. 정말 뜻하지 않았던 행운이었다고나 할까.
막상 시작해보니 큰스님의 소탈하고 인간적인 일상생활을 어떻게 적어야 할지 늘 고민이었다. 워낙 꾸밈없는 성격이시라 자칫 잘못하면 큰스님의 진솔한 모습이 잘못 전달될 우려가 있어서였다. 그저 본 대로 느낀 대로 꾸밈없이 솔직하게 쓰면 읽는 분들도 감동을 얻으리라는 믿음 하나로 끝까지 밀고 나갔다. 연재를 끝낼 수 있었던 것은 불보살의 가피와 주위 분들의 협조와 격려 덕분이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일화를 쓰는데 도움을 주신 지리산 상무주암의 현기 큰스님, 범어사 금어선원의 인각 큰스님, 통도사 문수원의 수안 큰스님께 먼저 감사의 예를 올린다. 그 외에 월내 묘관음사의 혜원 큰스님, 하양 향림선원의 묘혜 스님을 비롯해 도움을 준 모든 분들께도 감사드린다. 끝으로 기획 연재를 위해 지면을 할애해 준 불교신문 관계자 여러분들께도 인사를 올린다. “법념아, 인자 쓸데없는 글은 고만 쓰고 정진만 하거래이. 공부밖에 할끼 없능기라.” 큰스님의 음성이 들려올 것만 같다.
법념스님 경주 흥륜사
[불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