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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七十回 殺三兄楚平王即位 劫齊魯晉昭公尋盟
제70회: 세 형을 죽이고 초평왕이 즉위하고, 제나라와 노나라를 겁박하여 진소공이 회맹을 하다
話說,周景王十二年,楚靈王既滅陳蔡,又遷許、胡、沈、道、房、申六小國於荊山之地,百姓流離,道路嗟怨。靈王自謂天下可唾手而得,日夜宴息於章華之臺,欲遣使至周,求其九鼎,以為楚國之鎮。右尹鄭丹曰:「今齊晉尚強,吳越未服,周雖畏楚,恐諸侯有後言也。」靈王憤然曰:「寡人幾忘之。前會申之時,赦徐子之罪,同於伐吳,徐旋附吳,不為盡力。今寡人先伐徐,次及吳,自江以東,皆為楚屬,則天下已定其半矣。」乃使薳罷同蔡洧奉世子祿居守,大閱車馬,東行狩於州來,次於潁水之尾。使司馬督率車三百乘伐徐,圍其城。
한편, 주경왕 12년(기원전 533년)에 초영왕은 이미 진(陳)나라와 채(蔡)나라를 멸하고, 또 허(許), 호(胡), 심(沈), 도(道), 방(房), 신(申) 등의 여섯 나라를 형산(荊山)의 땅으로 옮기니, 백성들은 정처 없이 떠돌고 길거리에는 원망하는 소리로 가득 차게 되었다. 초영왕은 천하를 손에 침뱉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밤낮으로 장화대에서 잔치를 열고, 주나라에 사자를 보내어 구정(九鼎)을 요구하며 초나라의 진(鎭)으로 삼으려고 했다. 우윤 정단(鄭丹)이 말하기를, “지금 제나라와 진(晉)나라는 아직 세력이 강하고 오나라와 월나라는 아직 우리에게 복종하지 않고 있습니다. 주나라가 비록 초나라를 두려워하지만, 제후들의 뒷말이 있을 것이 걱정입니다.” 하니, 초영왕이 벌컥 성을 내며 말하기를, “과인이 거의 잊고 있었다. 전날에 신 땅에서 회맹을 할 때 서(徐)나라 군주의 죄를 용서하여 함께 오나라를 정벌하려고 했는데, 서나라가 돌아서서 오나라에 붙어 초나라를 위해서는 힘써 노력하지 않았다. 지금 과인이 서나라를 먼저 정벌하고 다음에 오나라를 쳐서 장강 동쪽 땅을 모두 초나라에 속하게 하겠다. 그렇게 되면 천하의 반은 평정될 것이다.” 했다. 이에 원파와 채유로 하여금 세자 록(祿)을 보좌하여 도읍을 지키게 하고, 자기는 전차와 말을 사열하여 동쪽으로 가 주래(州來)에서 사냥하며, 영수(穎水)의 끝에 주둔했다. 사마 독(司馬督)을 시켜 3백 대의 전차를 거느리고 서나라를 공격하여 그 도성을 포위했다.
靈王大軍屯於乾谿,以為聲援。時周景王之十五年,楚靈王之十一年也。冬月,值大雪,積深三尺有餘。怎見得?有詩為證:「彤雲蔽天風怒號,飛來雪片如鵝毛。忽然群峰失青色,等閒平地生銀濤。千樹寒巢僵鳥雀,紅爐不煖重裘薄。比際從軍更可憐,鐵衣冰凝愁難著。」靈王問左右:「向有秦國所獻『復陶裘』,『翠羽被』,可取來服之。」左右將裘被呈上。靈王服裘加被,頭帶皮冠,足穿豹舄,執紫絲鞭,出帳前看雪。有右尹鄭丹來見,靈王去冠被,舍鞭,與之立而語。靈王曰:「寒甚!」
초영왕이 대군을 건계(乾溪)에 주둔시켜 사마 독을 성원했다. 그때가 주경왕 15년으로 초영왕 11년이었다. 겨울에 마침 큰 눈이 내려서 쌓인 깊이가 석 자가 넘었다. 어찌 아느냐고? 시가 있어 증명하기를, “붉은 노을이 하늘을 덮고 바람은 성내어 울부짖는데, 새털 같은 눈송이가 흩날리는구나! 갑자기 온 산봉우리가 푸른색을 잃고, 예사로운 평지에 은빛 파도를 일으키는구나. 수많은 나뭇가지 찬 둥지에 새들은 얼어 죽고, 붉은 화로 따뜻하지 않아 껴입은 갖옷도 얇구나. 그때 싸움터의 군사들은 더욱 가련하고, 철갑옷도 얼어붙으니 입기도 어렵구나.” 했다. 초영왕이 좌우에 묻기를, “지난날 진(秦)나라에서 바친 복도구(復陶裘 ; 깃털 외투)와 취우피(翠羽被 ; 비취새털 외투)를 가져와 입어야겠다.” 하니, 좌우에서 갖옷과 외투를 가져와 바쳤다. 초영왕은 갖옷과 외투를 입고 머리에는 가죽 관을 쓰고 발에는 표석(豹舃 ; 표범 가죽 신발)을 신었다. 자주색 실로 꼰 채찍을 손에 들고 장막 밖으로 나와 눈을 구경했다. 우윤 정단이 가까이 다가오자 영왕이 모자와 외투를 벗고 손에 든 채찍을 놓고 정단과 함께 서서 말하기를, “몹시 추운 날씨다.” 했다.
鄭丹對曰:「王重裘豹舄,身居虎帳,猶且苦寒,況軍士單褐露踝,頂兜穿甲,執兵於風雪之中,其苦何如?王何不返駕國都,召回伐徐之師﹔俟來春天氣和暖,再圖征進,豈不兩便?」靈王曰:「卿言甚善!然吾自用兵以來,所向必克,司馬旦晚必有捷音矣。」鄭丹對曰:「徐與陳蔡不同。陳蔡近楚,久在宇下,而徐在楚東北三千餘里,又附吳為重。王貪伐徐之功,使三軍久頓於外,受勞凍之苦,萬一國有內變,軍士離心,竊為王危之。」靈王笑曰:「穿封戍在陳,棄疾在蔡,伍舉與太子居守,是三楚也。寡人又何慮哉?」
정단이 대답하기를, “왕께서는 갖옷을 입고 표범 가죽 신발을 신었으며 호랑이 가죽 장막에 머물고 계시는데도 오히려 춥다고 하십니다. 하물며 홑적삼을 입고 발꿈치를 드러낸 채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은 군사들이 바람과 눈 속에 무기를 잡고 있으니 그 고통이 어떻겠습니까? 왕께서는 어찌하여 서나라 정벌군을 회군하여 국도로 돌아가신 후에 봄이 되어 따뜻할 때를 기다려 다시 정벌군을 내시면 대왕과 군사들도 편치 않겠습니까?” 하니, 초영왕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아주 옳소. 그러나 과인이 군사를 이끌고 이르는 곳마다 반드시 이겼소. 사마 독이 조만간에 승전보를 보낼 것이오.” 했다. 정단이 대답하기를, “서나라와 진채(陳蔡)는 같지 않습니다. 진나라와 채나라는 우리 초나라와 가까이 있어 오랫동안 우리의 보호 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나라는 초나라 동북 3천여 리에 있고 또한 오나라와 더 가까이 지내고 있습니다. 왕께서 공을 탐하여 서나라를 정벌하신 결과 삼군이 오랫동안 나라밖에 주둔하여 피로와 추위에 고통받고 있습니다. 만일 나라 안에서 변란이 일어나면 군사들의 마음이 떠날 것이니 대왕을 위하여 위태롭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초영왕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천봉수는 진나라에 있고, 공자 기질은 채나라에 있으며, 오거와 태자 록은 도성에 지키고 있으니 이것은 세 초나라라고 할 수 있는데 과인이 무엇을 걱정하겠소?” 했다.
言未畢,左史倚相趨過王前,靈王指謂鄭丹曰:「此博物之士也。凡《三墳》、《五典》、《八索》、《九邱》,無不通曉,子革其善視之。」鄭丹對曰:「王之言過矣。昔周穆王乘八駿之馬,周行天下,祭公謀父作《祈招》之詩,以諫止王心,穆王聞諫返國,得免於禍。臣曾以此詩問倚相,相不知也。本朝之事,尚然不知,安能及遠乎?」靈王曰:「《祈招》之詩如何?能為寡人誦之否?」鄭丹對曰:「臣能誦之。詩曰:『祈招之愔愔,式昭德音。思我王度,式如玉,式如金。形民之力,而無醉飽之心。』」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좌사(左史) 의상(倚相)이 초영왕의 앞을 빨리 지나갔다. 초영왕이 손가락으로 의상을 가리키면서 정단에게 말하기를, “저 사람은 모르는 것이 없는 선비다. 무릇 <삼분(三墳 ; 고대 三皇의 서적)> <오전(五典 ; 五帝의 책)> <팔색(八索 ; 八卦에 관한 책)> <구구(九邱 ; 九州의 기록)> 등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자혁(子革 ; 정단의 자)도 그를 눈여겨보시오.” 하니, 정단이 대답하기를, “대왕의 말은 잘못되었습니다. 옛날 주목왕(周穆王)이 팔준마(八駿馬)가 끄는 수레를 타고 천하를 돌아다니자 제공(祭公) 모보(謀父)가 《기초(祁招)》라는 시를 지어 간했습니다. 목왕이 간하는 말을 듣고 왕성으로 돌아가 화를 면했습니다. 신이 이미 ‘기초(祈招)’라는 시에 대해 의상에게 물어봤으나 그는 알지 못했습니다. 주나라의 일도 모르는데 어찌 먼 옛날 일을 알겠습니까?” 했다. 초영왕이 말하기를, “‘기초’라는 시의 내용은 어떠하오? 나를 위해 한 번 낭송할 수 있겠소?” 하니, 정단이 대답하기를, “신이 능히 외울 수 있습니다. 시에 이르기를, ‘기초의 군사는 평안하고 화평하니, 이는 천자의 큰 덕이라. 왕이 우리를 생각하니, 옥과 같이 금과 같이 생각하도다. 백성들의 노고를 헤아리니, 취하여 배부른 마음이 없도다.’” 했다.
靈王曰:「此詩何解?」鄭丹對曰:「愔愔者,安和之貌。言祈父所掌甲兵,享安和之福,用能昭我王之德音,比於玉之堅,金之重。所以然者,由我王能恤民力,適可而止,去其醉飽過盈之心故也。」靈王知其諷己,默然無言。良久,曰:「卿且退,容寡人思之。」是夜,靈王意欲班師。忽諜報:「司馬督屢敗徐師,遂圍徐。」靈王曰:「徐可滅也。」遂留乾谿。自冬踰春,日逐射獵為樂,方役百姓築臺建宮,不思返國。時蔡大夫歸生之子朝吳,臣事蔡公棄疾,日夜謀復蔡國,與其宰觀從商議。
초영왕이 말하기를, “시의 뜻은 어떻게 되오?” 하니, 정단이 대답하기를, “음음(愔愔)이란 말은 기보가 거느린 군사들이 평안하고 화평스러운 복을 누리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왕의 덕음(德音)을 능히 빛낼 수 있음은 옥과 같이 견고하고 금과 같이 귀중함을 비유합니다. 그래서 왕은 능히 백성들의 고생을 돌봐주고 할 수 있을 때 멈춰야 합니다. 술에 취하고 포식하여 지나치게 욕심을 채우려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했다. 초영왕은 자기를 풍자하는 것을 알고 묵묵히 말이 없었다. 한참 후에 말하기를, “경은 물러가시오. 과인이 생각해 보겠오.” 했다. 그날 밤 초영왕은 군사를 회군하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보고하기를, “사마 독께서 서나라 군사들을 여러 번 이기고 마침내 서나라 도성을 포위했습니다.” 하니, 초영왕이 말하기를, “서나라는 멸할 수 있겠구나.” 하고 마침내 건계에 머물렀다. 겨울에서 봄까지 초영왕은 날마다 사냥을 낙으로 삼고, 바야흐로 백성을 부려 높은 집과 궁궐을 지으면서 영도(郢都)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때 채나라 대부 귀생(歸生)의 아들 조오(朝吳)는 채공으로 임명된 공자 기질을 모시면서 밤낮으로 채나라를 회복시킬 궁리를 하며, 그 가신 관종(觀從)과 상의했다.
觀從曰:「楚王黷兵遠出,久而不返,內虛外怨,此天亡之日也。失此機會,蔡不可復封矣。」朝吳曰:「欲復蔡,計將安出?」觀從曰:「逆虔之立,三公子心皆不服,獨力不及耳。誠假以蔡公子之命,召子干子晳,如此恁般,楚可得也。得楚,則逆虔之巢穴已毀,不死何為?及嗣王之世,蔡必復矣。」朝吳從其謀,使觀從假傳蔡公之命,召子干於晉,召子晳於鄭,言:「蔡公願以陳蔡之師,納二公子於楚,以拒逆虔。」子干子晳大喜,齊至蔡郊,來會棄疾。觀從先歸報朝吳。朝吳出郊謂二公子曰:「蔡公實未有命,然可劫而取也。」子干子晳有懼色。
관종이 말하기를, “초영왕이 군사를 함부로 동원하여 멀리 나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나라 안은 비어 있고 나라 밖은 원성이 높습니다. 지금은 하늘이 초나라를 망치려는 때입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채나라는 결코 봉국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하니, 조오가 말하기를, “채나라를 회복시키려면 어떤 계책을 써야 하겠소?” 했다. 관종이 말하기를, “반역자 웅건이 왕이 된 것을 세 공자들은 마음속으로 모두 불복하지만, 혼자 힘으로 어쩔 수가 없을 뿐입니다. 만일 채공 거질의 명이라고 꾸며서 외국에 망명하고 있는 자간(子干)과 자석(子晳) 두 사람을 이곳으로 불러들여 이러저러하게 하면, 초나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초나라를 얻으면 반역자 웅건은 둥지를 잃게 되니 죽지 않고 어찌하겠습니까? 뒤를 이은 초왕은 채나라를 틀림없이 회복시킬 것입니다.” 했다. 조오가 그 계책에 따라 관종을 시켜 채공의 명을 가장하여 진(晉)나라와 정나라에 망명하고 있던 자간과 자석을 불러오게 했다. 관종이 두 사람에게 말하기를, “채공이 진채 두 나라의 군사를 이용하여 두 공자를 초나라에 모셔 반역자 웅건을 몰아내려고 합니다.” 하니, 자간과 자석이 크게 기뻐하며 채나라의 교외에 같은 시간에 도착하여 함께 기질을 만나려고 했다. 관종은 먼저 돌아와 조오에게 보고하니, 조오가 교외로 나가 두 공자에게 말하기를, “채공은 사실 명령을 내린 게 아닙니다. 그러나 두 분께서 채공을 위협하면 그를 설득할 수 있습니다.” 했다. 자간과 자석이 조오의 말을 듣더니 얼굴에 두려운 기색을 띠었다.
朝吳曰:「王佚遊不返,國虛無備,而蔡洧念殺父之仇,以有事為幸。鬥成然為郊尹,與蔡公相善,蔡公舉事,必為內應。穿封戍雖封於陳,其意不親附王,若蔡公召之,必來。以陳蔡之眾,襲空虛之楚,如探囊取物,公子勿慮不成也。」這幾句話,說透利害,子干子晳方纔放心,曰:「願終聽教。」朝吳請盟,乃刑牲歃血,誓為先君郟敖報仇。口中說誓,雖則如此,誓書上卻把蔡公裝首,言欲與子干子晳共襲逆虔。掘地為坎,用牲加書於上而埋之。事畢,遂以家眾導子干子晳襲入蔡城。蔡公方朝餐,猝見二公子到,出自意外,大驚,欲起避。
조오가 말하기를, “초영왕이 마음대로 즐기느라 돌아오지 않으니, 나라가 비어 무방비 상태가 되었습니다. 또한 채유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일이 생기는 것을 다행으로 여길 것입니다. 투성연은 교윤(郊尹)이 되어 채공과 사이가 가까우니, 채공이 거사를 하게 되면 틀림없이 내응이 될 것입니다. 천봉수가 비록 진공에 봉해졌지만, 그의 마음은 초왕을 성심으로 받들지 않고 있어, 만약 채공이 부르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진채 두 나라의 군사를 동원하여 텅 빈 초나라 도성을 기습한다면 그것은 마치 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공자께서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하여, 이렇게 몇 마디 말로 이해를 설득하니 자간과 자석이 비로소 마음을 놓으면서 말하기를, “원컨대 끝까지 가르침에 따르겠소.” 했다. 조오가 두 사람과 같이 맹세하기를 청해 희생을 잡아 삽혈을 한 후에 선군 겹오의 원수를 갚겠다고 맹세했다. 말로는 비록 이렇게 맹세했으나 문서에는 채공의 주도하에 자간, 자석과 함께 반역자 웅건을 습격한다고 썼다. 땅을 파서 구덩이를 만들어 희생과 함께 묻었다. 맹세의 의식이 끝나자 조오는 즉시 집안사람들을 이끌고 자간과 자석을 인도하여 채성으로 들어갔다. 채공은 바야흐로 아침밥을 먹다가 갑자기 두 공자가 뜻밖에 들이닥치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 일어나 피하려고 했다.
朝吳隨至,直前執蔡公之袂曰:「事已至此,公將何往?」子干子晳抱蔡公大哭,言:「逆虔無道,弒兄殺姪,又放逐我等,我二人此來,欲借汝兵力,報兄之仇,事成,當以王位屬子。」棄疾倉皇無計,答曰:「且請從容商議。」朝吳曰:「二公子餒矣,有餐且共食。」子干子晳食訖,朝吳使速行。遂宣言於眾曰:「蔡公實召二公子,同舉大事,已盟於郊,遣二公子先行入楚矣。」棄疾止之曰:「勿誣我!」朝吳曰:「郊外坎牲載書,豈無有見之者?公勿諱,但速速成軍,共取富貴,乃為上策。」
조오가 뒤를 따라와서 채공의 앞을 가로막으며 소매를 붙잡고 말하기를, “일이 이미 여기까지 이르렀는데 공자께서는 어디로 가려고 하십니까?” 했다. 자간과 자석이 채공을 껴안으며 큰 소리로 울면서 말하기를, “반역자 웅건이 무도하여 형과 조카를 죽이고, 우리를 나라 밖으로 쫓아냈다. 우리 두 사람이 여기에 온 목적은 너의 병력을 빌려 형의 원수를 갚고, 일이 성사되면 마땅히 너를 왕위에 앉히기 위해서다.” 하니, 기질이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계책이 없이 대답하기를, “잠깐 조용히 상의해 봅시다.” 했다. 조오가 말하기를, “두 공자님은 배가 고플 것이니 준비된 식사를 함께 하시지요?” 하니, 자간과 자석이 식사를 마쳤다. 조오는 자간과 자석을 빨리 초나라로 떠나게 하고, 자기는 여러 사람 앞에서 공공연히 외치기를, “사실은 채공이 두 공자를 불러서 함께 거사를 하자고 교외에서 이미 맹세를 했습니다. 그리고 두 공자를 먼저 초나라로 보냈습니다.” 하니, 기질이 조오의 말을 막으며 말하기를, “나를 모함하지 말라!” 했다. 조오가 말하기를, “교외에서 구덩이를 파고 희생과 함께 맹세문을 묻어놨는데 어찌 그것을 본 사람이 없다 하겠습니까? 공께서는 피하려고 하지만 마시고, 빨리 군사를 이끌고 함께 부귀를 취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했다.
朝吳乃復號於市曰:「楚王無道,滅我蔡國,今蔡公許復封我,汝等皆蔡百姓,豈忍宗祀淪亡?可共隨蔡公趕上二公子,一同入楚。」蔡人聞呼,一時俱集,各執器械,集於蔡公之門。朝吳曰:「人心已齊,公宜急撫而用之,不然有變!」棄疾曰:「汝迫我上虎背耶?計將安出?」朝吳曰:「二公子尚在郊,宜急與之合,悉起蔡眾。吾往說陳公,帥師從公。」棄疾從之。子干子晳率其眾與蔡公合。朝吳使觀從星夜至陳,欲見陳公。路中遇陳人夏齧,(乃夏徵舒之玄孫,與觀從平素相識。)告以復蔡之意。
조오가 다시 거리에서 외치기를, “초영왕이 무도하여 우리 채나라를 멸하였소. 오늘 채공이 채나라를 다시 세워 주겠다고 허락했소. 그대들은 모두 채나라 백성들인데 어찌 채나라 종사가 망하여 없어진 것을 차마 볼 수 있단 말이오? 채공과 두 공자를 따라 함께 초나라의 도성으로 쳐들어갑시다.” 하니, 채나라 백성들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삽시간에 무기를 들고 채공의 집 앞에 모였다. 조오가 말하기를, “사람들의 마음이 이미 한곳으로 모였으니 공께서는 마땅히 위무하여 그들을 써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변란을 당하게 됩니다.” 하니, 기질이 말하기를, “너는 나를 호랑이 등에 태우려고 하는구나! 계책이 무엇인가?” 했다. 조오가 말하기를, “두 공자는 아직 성 밖 교외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마땅히 빨리 그들과 힘을 합하고, 채나라 백성들을 모두 일으켜야 합니다. 저는 진공 천봉수에게 가서 그를 설득하여 군사를 이끌고 공을 따르게 하겠습니다.” 하니, 기질이 조오의 말을 따랐다. 자간과 자석은 거느린 무리들을 채공이 거느린 군사와 합쳤다. 조오는 관종을 시켜 급히 진나라에 가서 진공 천봉수를 만나도록 했다. 관종이 길을 가던 도중에 진나라 사람 하설(夏齧)을 만났다. (그는 곧 하징서(夏徵舒)의 현손(玄孫)이었는데 평소에 관종과 친교가 있었다.) 관종이 하설에게 채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고 한다는 뜻을 말했다.
夏齧曰:「吾在陳公門下用事,亦思為復陳之計,今陳公病已不起,子不必往見。子先歸蔡,吾當率陳人為一隊。」觀從回報蔡公。朝吳又作書密致蔡洧,使為內應。蔡公以家臣須務牟為先鋒,史猈副之,使觀從為嚮導,率精甲先行。恰好陳夏齧亦起陳眾來到。夏齧曰:「穿封戍已死,吾以大義曉諭陳人,特來助義。」蔡公大喜,使朝吳率蔡人為右軍,夏齧率陳人為左軍,曰:「掩襲之事,不可遲也!」乃星夜望郢都進發。蔡洧聞蔡公兵到,先遣心腹出城送款。鬥成然迎蔡公於郊外。令尹薳罷方欲斂兵設守。
하설이 말하기를, “나는 진공(陳公)의 문하에서 일을 보고 있지만, 나 역시 진(陳)나라를 다시 세우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 진공 천봉수는 병이 들어 일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대는 가 봐야 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대가 먼저 채나라로 돌아가 기다리면 내가 마땅히 진나라 백성들을 거느리고 한 부대가 되겠습니다.” 하니, 관종이 돌아와 채공에게 보고했다. 조오가 다시 편지를 한 통 써서 채유에게 보내어 초나라 도성 안에서 호응하라고 했다. 채공 기질은 그의 가신 수무모(須務牟)를 선봉으로 삼고, 사패(史猈)를 부장으로 삼았으며, 관종을 향도로 하여 초나라의 정예병들을 거느리고 먼저 가게 했다. 그때 마침 하설이 진나라 백성들을 모아 도착했다. 하설이 말하기를, “천봉수가 이미 죽어 제가 대의를 밝혀 진나라 백성들을 설득하여 공자님의 의거를 도우러 특별히 왔습니다.” 하니, 채공이 크게 기뻐하며, 조오는 채나라 백성들을 거느리고 우군이 되게 하고, 하설은 진(陳)나라 백성들을 거느리고 좌군이 되게 하며, 말하기를, “엄습이란 지체하면 안 된다.” 하고, 즉시 밤낮으로 영도(郢都)를 향하여 진격했다. 채유는 채공의 군사들이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심복을 성 밖으로 보내어 맞이했다. 교윤 투성연(鬥成然)도 교외에서 채공을 맞이했다. 영윤 원파가 군사를 모아 영도를 지키려고 했다.
蔡洧開門以納蔡師,須務牟先入,呼曰:「蔡公攻殺楚王於乾谿,大軍已臨城矣!」國人惡靈王無道,皆願蔡公為王,無肯拒敵者。薳罷欲奉世子祿出奔,須務牟兵已圍王宮,薳罷不能入,回家自刎而死。哀哉!胡曾先生有詩云:「漫誇私黨能扶主,誰料強都已釀奸。若遇郟敖泉壤下,一般惡死有何顏?」蔡公大兵隨後俱到,攻入王宮,遇世子祿及公子罷敵,皆殺之。蔡公掃除王宮,欲奉子干為王﹔子干辭。蔡公曰:「長幼不可廢也。」子干乃即位,以子晳為令尹,蔡公為司馬。
채유가 성문을 열어 채나라 군사들을 들어오게 하자, 수무모가 성안으로 먼저 들어와 소리치기를, “채공이 건계에서 초영왕을 공격하여 죽이고, 그의 대군은 이미 성 밖에 당도했다.” 하니, 나라 사람들이 평소에 초영왕의 무도함을 미워하여 모두 채공이 초왕이 되기를 바랐으며, 아무도 채공에게 저항하지 않았다. 원파는 세자 록을 모시고 성 밖으로 달아나려고 왕궁으로 달려갔으나, 그때는 수무모가 이끄는 병사들이 이미 왕궁을 포위하고 있었기 때문에 원파는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 스스로 칼로 목을 찔러죽었다. 슬픈 일이라고 호증 선생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당을 지어 능히 주군을 섬긴다고 자랑하더니, 누가 알았으랴 초나라 도성 안에 이미 내통자가 있었네. 만약에 원파가 겹오를 지하에서 만난다면, 다 같이 비명에 죽었으니 어찌 얼굴을 대하겠는가?” 했다. 채공의 대군이 모두 도착하여 왕궁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채공은 세자 록과 공자 파(罷)를 붙잡아 모두 죽이고, 왕궁을 깨끗이 청소하고 자간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하였다. 자간이 사양하자 채공이 말하기를, “장유의 순서는 어길 수 없습니다.” 하여, 자간이 이에 초왕의 자리에 올랐다. 자석은 영윤이 되고, 채공은 사마가 되었다.
朝吳私謂蔡公曰:「公首倡義舉,奈何以王位讓人耶?」蔡公曰:「靈王猶在乾谿,國未定也,且越二兄而自立,人將議我。」朝吳已會其意,乃獻謀曰:「王卒暴露已久,必然思歸,若遣人以利害招之,必然奔潰。大軍繼之,王可擒也。」蔡公以為然。乃使觀從往乾谿,告其眾曰:「蔡公已入楚,殺王二子,奉子干為王矣。今新王有令:『先歸者復其田里,後歸者劓之,有相從者,罪及三族,或以飲食餽獻,罪亦如之。』」軍士聞之,一時散其大半。靈王尚醉臥於乾谿之臺,鄭丹慌忙入報。靈王聞二子被殺,自床上投身於地,放聲大哭。
조오가 채공에게 조용히 말하기를, “공께서 거사에 앞장섰는데 어찌하여 왕위를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셨습니까?” 하니, 채공이 말하기를, “초영왕이 아직 건계에 살아 있고 나라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소. 거기다가 내가 두 형을 제치고 왕의 자리에 앉는다면 백성들이 나를 나무랄 것이오.” 했다. 조오가 채공의 뜻을 알아듣고 즉시 계책을 드려 말하기를, “왕을 따라 출전한 군졸들이 싸움터에서 고생한 지 오래되어 틀림없이 집으로 돌아오고 싶어 할 것입니다. 만약 사람을 보내 이해를 말하고 부른다면 반드시 군사들이 흩어져 달아날 것입니다. 그후에 대군을 이끌고 출전하면 초영왕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하니, 채공이 옳다고 생각하여, 관종을 시켜 건계로 가서, 초나라 병사들에게 말하기를, “채공이 이미 초나라 도성에 들어가 두 왕자를 죽이고 자간을 왕으로 모셨다. 지금 새 왕이 명령을 내려 전하는데, 먼저 돌아온 자에게는 그 전답을 모두 돌려주겠으나, 나중에 돌아온 자는 코를 베겠다. 반역자 웅건을 계속 따르는 자는 그 죄를 삼족에게 묻겠다. 혹시 반역자 웅건과 일당에게 음식을 주는 자는 똑같은 죄를 묻겠다.” 했다. 군사들은 그 말을 듣고 일시에 태반이 흩어졌다. 초영왕은 아직 건계의 왕궁에 취해 누워 있었는데, 정단이 황망히 들어와 보고하였다. 초영왕은 두 아들이 살해당했다는 말을 듣고 침상에서 바닥으로 몸을 던지며 목 놓아 울었다.
鄭丹曰:「軍心已離,王宜速返!」靈王拭淚言曰:「人之愛其子,亦如寡人否?」鄭丹曰:「鳥獸猶知愛子,何況人也?」靈王嘆曰:「寡人殺人子多矣!人殺吾子,何足怪!」少頃,哨馬報:「新王遣蔡公為大將,同鬥成然率陳蔡二國之兵,殺奔乾谿來了。」靈王大怒曰:「寡人待成然不薄,安敢叛吾?寧一戰而死,不可束手就縛!」遂拔寨都起,自夏口從漢水而上,至於襄州,欲以襲郢。士卒一路奔逃,靈王自拔劍殺數人,猶不能止,比到訾梁,從者纔百人耳。靈王曰:「事不濟矣!」乃解其冠服,懸於岸柳之上。
정단이 말하기를, “군사들의 마음이 이미 떨어져 나갔으니 대왕께서는 속히 돌아가야 합니다.” 했다. 초영왕이 눈물을 닦으며 말하기를, “다른 사람들도 아들 사랑하기를 나처럼 하는가?” 하니, 정단이 말하기를, “새나 짐승도 새끼를 사랑하는데 하물며 사람이겠습니까?” 했다. 초영왕이 한탄하며 말하기를, “과인이 다른 사람의 자식들을 많이 죽였으니, 다른 사람도 나의 아들을 죽였구나. 어찌 이것이 괴이하겠는가?” 했다. 잠시 후에 정찰 기병이 보고하기를, “새 왕이 채공을 대장으로 삼고, 투성연과 함께 진채(陳蔡) 두 나라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건계로 오고 있습니다.” 했다. 초영왕이 대로하여 말하기를, “과인이 투성연을 박절하게 대접하지 않았거늘 어찌 감히 나를 배신할 수 있단 말인가? 차라리 싸우다가 죽더라도 어찌 가만히 포승줄에 묶일 수 있겠는가?” 하고, 마침내 진영을 거두어 모두 일어났다. 초영왕은 하구(夏口)에서 한수(漢水)를 거슬러 올라가 양주(襄州)에 이르러 영도(郢都)를 기습하려고 했다. 그러나 군졸들이 길에서 도망치자 초영왕이 칼을 뽑아 몇 명을 죽였으나 오히려 군사들의 탈주를 막을 수는 없었다. 초영왕이 자량(訾梁)에 이르렀을 때 그를 따르는 군사들이 겨우 백 명뿐이었다. 초영왕이 말하기를, “일이 틀렸구나!” 하고, 의관을 벗어 언덕의 버드나무에다 걸었다.
鄭丹曰:「王且至近郊,以察國人之向背何如?」靈王曰:「國人皆叛,何待察乎?」鄭丹曰:「若不然,出奔他國,乞師以自救亦可。」靈王曰:「諸侯誰愛我者?吾聞大福不再,徒自取辱。」鄭丹見不從其計,恐自已獲罪,即與倚相私奔歸楚。靈王不見了鄭丹,手足無措,徘徊於釐澤之間,從人盡散,祇剩單身。腹中饑餒,欲往鄉村覓食,又不識路徑。村人也有曉得是楚王的,因聞逃散的軍士傳說,新王法令甚嚴,那個不怕,各遠遠閃開。靈王一連三日,沒有飲食下咽,餓倒在地,不能行動。
정단이 말하기를, “왕께서는 잠시 영도의 근교로 가서 백성들의 인심을 살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초영왕이 말하기를, “백성들이 모두 나에게서 등을 돌렸는데 어찌 살피기를 기다리겠는가?” 했다. 정단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다른 나라로 달아났다가 군사를 빌려 스스로 구하면 될 것입니다,” 하니, 초영왕이 말하기를, “제후들 중에 누가 나를 용납하겠는가? 나는 대복(大福)은 두 번 오지 않는다고 들었다. 헛되이 치욕을 스스로 얻을 뿐이다.” 했다. 정단은 초영왕이 자기의 계책을 따르지 않는 것을 보고, 자신도 죄를 얻을까 두려워서 곧 의상과 함께 몰래 도망쳐 초나라 도성으로 돌아갔다. 초영왕은 정단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이택(釐澤)을 배회하는 사이에 종자들도 모두 흩어져 버리고 다만 혼자만 남게 되었다. 배가 고파서 촌마을로 들어가 음식을 구해 보려고도 했지만 갈 길도 몰랐다. 촌사람들도 그가 초영왕이라는 것을 알고, 도망가는 군사들이 도망가면서 전해 준 말로 새로운 왕의 법령이 엄하다고 했지만,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더라도 모두 멀리 피해 버렸다. 초영왕은 연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해 배가 고파서 땅바닥에 쓰러져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單單祇有兩目睜開,看著路傍,專望一識面之人,經過此地,便是救星。忽遇一人前來,認得是舊時守門之吏,比時喚作涓人,名疇。靈王叫道:「疇,可救我!」涓人疇見是靈王呼喚,只得上前叩頭。靈王曰:「寡人餓三日矣!汝為寡人覓一盂飯,尚延寡人呼吸之命。」疇曰:「百姓皆懼新王之令,臣何從得食?」靈王嘆氣一口,命疇近身而坐,以頭枕其股,且安息片時。疇候靈王睡去,取土塊為枕以代股,遂奔逃去訖。靈王醒來,喚疇不應,摸所枕,乃土塊也。不覺呼天痛哭,有聲無氣。
단지 두 눈을 뜨고 길가를 응시하며 아는 사람이 길을 지나가다가 구해 주기를 바랐다. 갑자기 한 사람이 앞에 오는데, 옛날에 문지기였다가 내시가 된 사람으로 이름이 주(疇)라는 사람이었다. 초영왕이 소리치기를, “주야, 나를 구해다오.” 했다. 내시 주가 자신을 부르는 초영왕을 보고 할 수 없이 그 앞으로 와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영왕이 말하기를, “과인이 3일을 굶었다. 너는 밥 한 그릇을 구해 와서 과인이 연명하도록 도와달라.” 하니, 주가 말하기를, “백성들이 모두 새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는데, 신이 어디에서 밥을 구해 오겠습니까?” 했다. 초영왕이 한숨을 한번 쉬더니 주에게 가까이 다가와 앉으라고 하고, 그의 다리를 베개 삼아 잠시 휴식을 취했다. 주가 초영왕이 잠들기를 기다려서 흙덩이를 제 다리 대신 베개로 받쳐주고 달아나 버렸다. 초영왕이 잠에서 깨어나 주를 불렀으나 아무 대답이 없어 벤 것을 더듬어 보니 흙덩이였다. 자기도 모르게 하늘을 부르며 통곡을 했지만, 소리를 낼 기력도 없었다.
須臾,又有一人乘小車而至,認得靈王聲音,下車視之,果是靈王。乃拜倒在地,問曰:「大王為何到此地位?」靈王流淚滿面,問曰「卿何人也?」其人奏曰:「臣姓申名亥,乃芋尹申無宇之子也。臣父兩次得罪於吾王,王赦不誅。臣父往歲臨終囑臣曰:『吾受王兩次不殺之恩,他日王若有難,汝必捨命相從!』臣牢記在心,不敢有忘。近傳聞郢都已破,子干自立,星夜奔至乾谿,不見吾王,一路追尋到此,不期天遣相逢。今遍地皆蔡公之黨,王不可他適。臣家在棘村,離此不遠,王可暫至臣家,再作商議。」
잠시 후, 한 사람이 작은 수레를 타고 다가와 초영왕의 소리를 알아듣고 수레에서 내려 살펴보니 과연 초영왕이었다. 그 사람이 즉시 땅에서 절을 올린 다음 묻기를, “대왕께서 어찌하여 여기에 계십니까?” 하니, 초영왕이 눈물을 흘리며 되묻기를, “경은 누구인가?” 했다. 그 사람이 아뢰기를, “신은 신해(申亥)인데, 곧 우윤(芋尹 ; 사냥 담당) 신무우(申無宇)의 아들입니다. 신의 부친께서 두 번에 걸쳐 대왕께 죄를 지었으나 대왕께서 용서하여 죽이지 않았습니다. 신의 부친이 지난해 임종할 때 신에게 당부하기를, ‘내가 두 번이나 왕에게 죽이지 않는 은혜를 입었으니 후일에 만일 왕이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되면 너는 반드시 목숨을 걸고 왕을 따라다니며 모시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신이 마음속에 새겨서 감히 잊지 않았습니다. 요즘에 영도(郢都)가 이미 함락되고 자간이 스스로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건계로 달려갔으나 대왕을 뵙지 못하고 그 길로 뒤따라 여기에 이르러 뜻밖에 하늘이 도와 만나게 되었습니다. 지금 온 세상은 모두 채공의 무리들이라, 왕께서는 다른 곳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신의 집이 극촌(棘村)이라 여기서 멀지 않습니다. 왕께서는 잠시 저의 집에 가서 다시 상의하시지요.” 했다.
乃以乾糒跪進,靈王勉強下咽,稍能起立。申亥扶之上車,至於棘村。靈王平昔住的是章華之臺,崇宮邃室,今日觀看申亥農莊之家,篳門蓬戶,低頭而入,好生淒涼,淚流不止。申亥跪曰:「吾王請寬心。此處幽僻,無行人來往,暫住數日,打聽國中事情,再作進退。」靈王悲不能語。申亥又跪進飲食,靈王祇是啼哭,全不沾唇。亥乃使其親生二女侍寢,以悅靈王之意。王衣不解帶,一夜悲嘆,至五更時分,不聞悲聲。二女啟門報其父曰:「王已自縊於寢所矣。」胡曾先生詠史詩曰:「茫茫衰草沒章華,因笑靈王昔好奢。臺土未乾簫管絕,可憐身死野人家。」
신해가 즉시 말린 밥을 꺼내어 꿇어앉아 바쳤다. 초영왕이 억지로 입어 넣어 삼키니 잠시 후에 일어설 수가 있었다. 신해가 부축하여 수레에 태우고 극촌에 이르렀다. 초영왕은 평소에 장화대의 높은 집 깊은 방에서 살다가 오늘 신해의 농가를 보니 사립문이 달린 누추한 집에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니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져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신해가 무릎을 꿇고 말하기를, “대왕께서는 부디 마음을 넓게 가지십시오. 이곳은 매우 깊고 궁벽한 곳이라 지나가는 행인도 없습니다. 잠시 이곳에 며칠 머물며 나라 안의 사정을 살펴가며 다시 진퇴를 정하시기 바랍니다.” 했다. 초영왕은 슬퍼하며 말을 하지 못했다. 신해가 다시 무릎을 꿇고 음식을 바쳤으나 초영왕은 계속 울기만 할뿐 입에 대지 않았다. 신해가 이에 두 친딸을 불러 시침(侍寢)을 들게 하여 영왕의 마음을 즐겁게 하려고 하였다. 초영왕이 옷을 입은 채 띠도 풀지 않고 밤새도록 슬피 탄식만 하더니 시각이 오경(새벽 4시경)에 이르자 슬퍼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두 딸이 문을 열고 나와 그의 부친에게 고하기를, “왕이 방안에서 이미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습니다.” 했다. 호증 선생의 영사시에 이르기를, “아득히 시든 풀은 장화대에 지고, 옛날 초영왕의 호사스러움이 가소롭구나! 누대의 흙이 마르기도 전에 풍악 소리 그쳤으니, 가련하게도 몸은 시골집에서 죽었구나!” 했다.
申亥聞靈王之死,不勝悲慟,乃親自殯殮,殺其二女以殉葬焉。後人論申亥感靈王之恩,葬之是矣,以二女殉,不亦過乎?有詩嘆曰:「章華霸業已沉淪,二女何辜伴穸窀,堪恨暴君身死後,餘殃猶自及閨人。」時蔡公引著鬥成然、朝吳、夏齧眾將,追靈王於乾谿。半路遇著鄭丹倚相二人,述楚王如此恁般「今侍衛俱散,獨身求死,某不忍見,是以去之。」蔡公曰:「汝今何往?」二人曰:「欲還國中耳。」蔡公曰:「公等且住我軍中,同訪楚王下落,然後同歸可也。」蔡公引大軍尋訪,及於訾梁,並無蹤跡。
신해는 초영왕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친히 시신을 염하고 그의 두 딸을 죽여 순장했다. 뒷사람이 논하기를, 신해가 초영왕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장례를 치러 준 것은 옳지만, 그의 두 딸을 순장시킨 것은 지나치지 아니한가? 하고 한탄하며 시를 지어 이르기를, “장화대에서 패업은 이미 무너졌는데, 두 딸을 무슨 죄로 무덤에 같이 묻었는가? 폭군은 죽어서도 한을 남기니, 재앙이 규방의 여인들에게까지 미쳤구나!” 했다. 그때 채공 기질은 투성연과 조오 및 하설 등의 여러 장수들을 이끌고 초영왕을 쫓아 건계로 가다가, 도중에서 정단과 의상 두 사람을 만났다. 두 사람은 초영왕이 이러저러하다고 전하면서, “지금 시중을 들던 사람들도 모두 흩어지고, 초영왕은 홀로 남아 죽을 지경이라, 우리가 차마 볼 수가 없어 이렇게 떠나게 되었습니다.” 했다. 채공이 말하기를, “그대들은 지금 어디로 가는가?” 하니, 두 사람이 말하기를, “본국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했다. 채공이 말하기를, “두 분은 잠시 내 군중에 머물면서 같이 초왕을 찾아본 후에 나와 함께 돌아갑시다.” 했다. 채공이 대군을 이끌고 자량(訾梁)으로 가 찾았으나, 종적이 없었다.
有村人知是蔡公,以楚王冠服來獻,言:「三日前,於岸柳上得之。」蔡公問曰:「汝知王生死否?」村人曰:「不知。」蔡公收其冠服,重賞之而去。蔡公更欲追尋,朝吳進曰:「楚王去其衣冠,勢窮力敝,多分死於溝渠,不足再究。但子干在位,若發號施令,收拾民心,不可圖矣。」蔡公曰:「然則若何?」朝吳曰:「楚王在外,國人未知下落,乘此人心未定之時,使數十小卒,假稱敗兵,繞城相呼,言:『楚王大兵將到!』再令鬥成然歸報子干,如此如此。子干子晳,皆懦弱無謀之輩,一聞此信,必驚惶自盡。明公徐徐整旅而歸,穩坐寶位,高枕無憂,豈不美哉?」蔡公然之。
어떤 시골 사람이 초왕의 의관을 가져와 채공에게 바치면서 말하기를, “사흘 전에 언덕 버드나무 위에서 발견했습니다.” 했다. 채공이 묻기를, “그대는 초왕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아는가?” 하니, 시골 사람이 말하기를, “모릅니다.” 했다. 채공은 그 의관을 받고 시골 사람에게 중상을 주어 돌려보냈다. 채공이 다시 초영왕을 찾으려고 하자 조오가 나와 말하기를, “초영왕이 의관을 벗어 놓고 간 것은 신세가 궁하고 힘이 다한 듯합니다. 다분히 구렁에 빠져 죽었을 것이니 더 찾을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자간(子干)이 초왕의 자리에서 만약 왕명을 내려 민심을 수습하면 다시는 도모할 수 없습니다.” 하니, 채공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오?” 했다. 조오가 말하기를, “초영왕이 밖에 있어 백성들은 그가 죽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지금 민심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 틈을 타서 병졸 수십 명을 시켜, 공께서 초영왕과의 싸움에서 졌다고 하면서 성 주위를 돌며 외치기를, ‘초왕의 대군이 장차 도착할 것이다!’라고 하십시오. 다시 투성연을 시켜 자간에게 보고하기를 이러저러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자간과 자석은 모두 유약하고 지모가 없는 사람들이라 이 소식을 듣게 되면 반드시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입니다. 그 후에 공께서 천천히 군사들을 정비하여 돌아가면 편안히 보위에 올라 베개를 높이하고 아무 근심이 없을 것이니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 하니. 채공이 옳다고 생각했다.
乃遣觀從引小卒百餘人,詐作敗兵,奔回郢都,繞城而走,呼曰:「蔡公兵敗被殺,楚王大兵,隨後便至!」國人信以為實,莫不驚駭。須臾,鬥成然至,所言相同。國人益信,皆上城瞭望。成然奔告子干,言:「楚王甚怒,來討君擅立之罪,欲如蔡般齊慶封故事。君須早自為計,免致受辱,臣亦逃命去矣。」言訖,奔狂而出。子干乃召子晳言之,子晳曰:「此朝吳誤我也。」兄弟相抱而哭。宮外又傳:「楚王兵已入城!」子晳先拔佩劍,刎其喉而死。子干慌迫,亦取劍自剄。宮中大亂,宦官宮女,相驚自殺者,橫於宮掖,號哭之聲不絕。
이에 관종을 시켜 병졸 백여 명을 이끌고 거짓으로 초영왕과의 싸움에서 패하여 영도로 돌아왔다며, 성 주위를 돌며 외치기를, “채공은 싸움에 져서 피살되고 초왕은 대군을 이끌고 우리 뒤를 따라오고 있다.”라고 하게 했다. 성안의 백성들은 그 말을 사실로 알고 모두가 놀랐다. 잠시 후에 투성연이 도착하여 말하는 바도 같았다. 성안의 백성들은 더욱 믿게 되어 모두 성 위에 올라가 멀리 바라보았다. 투성연이 달려가 자간에게 고하기를, “초영왕의 분노가 극에 달해 주군께서 자기 멋대로 초왕의 자리에 앉은 죄를 물어 옛날 채반(蔡般)과 제나라의 경봉(慶封)처럼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주군께서는 빨리 대책을 세워 치욕을 면하기 바랍니다. 신도 목숨을 구해 달아나겠습니다.” 하고, 말이 끝나자 미친 듯이 달려 나갔다. 자간이 자석을 불러 그것을 말하니, 자석이 말하기를, “조오가 우리를 망쳤습니다.” 하고, 두 형제가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궁 밖에서 또 전하기를, “초영왕의 군사들이 이미 성안으로 들어왔다!” 하니, 자석이 먼저 허리에 찬 칼을 빼어 자신의 목을 찔러죽었다. 자간도 황망 중에 역시 칼로 자기의 목을 찔렀다. 궁중에는 큰 난리가 일어나 환관과 궁녀들이 서로 놀라 자살한 자가 궁궐 곁채에 널려 있고 통곡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鬥成然引眾復入,掃除屍首,率百官迎接蔡公。國人不知,尚疑來者是靈王﹔及入城,乃蔡公也,方悟前後報信,皆出蔡公之計。蔡公既入城,即位,改名熊居,是為平王。昔年共王曾禱於神,當璧而拜者為君,至是果驗矣。國人尚未知靈王已死,人情洶洶,嘗中夜訛傳王到,男女皆驚起,開門外探。平王患之,乃密與觀從謀,使於漢水之傍,取死屍加以靈王冠服,從上流放至下流,詐云已得楚王屍首,殯於訾梁,歸報平王。平王使鬥成然往營葬事,謚曰靈王。然後出榜安慰國人,人心始定。後三年,平王復訪求靈王之屍,申亥以葬處告,乃遷葬焉。此是後話。
투성연이 무리를 이끌고 다시 들어와 시체들을 치우고, 백관들을 거느리고 채공을 영접했다. 백성들은 사실을 알지 못하고 아직도 온 사람이 초영왕인 줄 의심하다가, 채공이 성안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비로소 전후 사정을 알고 그것이 모두 채공의 계책임을 알았다. 채공이 도성 안으로 들어와 즉위하고 이름을 웅거(熊居)라고 고쳤다. 이가 초평왕(楚平王)이다. 옛날에 초공왕이 신에게 기도할 때 벽옥이 묻힌 곳 위에서 절을 한 자가 초나라의 왕이 되게 해 달라고 했는데, 이에 이르러 과연 증험이 나타난 것이라 하겠다. 백성들은 아직 초영왕이 죽었는지 모르고 있어서 인심이 흉흉했다. 심지어는 밤중에 초영왕이 왔다고 와전되어 남녀들이 모두 놀라 일어나 문을 열고 밖을 살펴보기도 했다. 초평왕이 이것을 걱정하여 몰래 관종과 모의하여, 한수의 강변에 초영왕의 의관을 한 시체를 상류에서 하류로 띄워 보내고, 거짓으로 초영왕의 시체라 하여 자량에 빈소를 차리고 초평왕에게 돌아와 고했다. 초평왕이 투성연을 시켜, 가서 장례를 치르게 하고, 시호를 영왕(靈王)이라고 했다. 그런 다음 방을 붙여 백성들을 위무하자 비로소 백성들의 마음이 안정되었다. 3년 후, 평왕이 다시 초영왕의 시체를 찾으려고 하자, 신해가 초영왕을 장사지낸 곳을 고하여, 무덤을 옮겨 묻게 했다. 그것은 나중의 일이다.
卻說,司馬督等圍徐,久而無功,懼為靈王所誅,不敢歸,陰與徐通,列營相守。聞靈王兵潰被殺,乃解圍班師。行至豫章,吳公子光,率師要擊,敗之,司馬督與三百乘悉為吳所獲。光乘勝取楚州來之邑。此皆靈王無道之所致也。再說楚平王安集楚眾,以公子之禮,葬子干子晳。錄功用賢,以鬥成然為令尹,陽匄字子瑕,為左尹。念薳掩伯州犁之冤死,乃以犁子郤宛為右尹,掩弟薳射薳越俱為大夫。朝吳、夏齧、蔡洧俱拜下大夫之職。以公子魴敢戰,使為司馬。時伍舉已卒,平王嘉其生前有直諫之美,封其子伍奢於連,號曰連公。奢子尚亦封於棠,為棠宰,號曰棠君。
한편, 사마 독은 서나라를 오랫동안 포위하였으나 아무런 공을 세우지 못했다. 그래서 초영왕에게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서 감히 돌아가지 못하고, 몰래 서나라와 내통하여 영채를 벌여놓고 서로 지키기만 했다. 그러다가 초영왕의 군사들이 붕궤되고 초영왕은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 포위를 풀고 회군했다. 군사들이 예장(豫章)에 이르렀을 때 오나라 공자 광(光)이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하니 패배했다. 사마독과 전차 3백 대의 군사들은 모두 오나라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공자광은 승세를 타고 초나라의 주래(州來)를 점령했다. 이것은 모두 초영왕이 무도하여 일어난 일이었다. 한편, 초평왕은 초나라의 백성들을 안정시켜 불러 모아 자간과 자석을 공자의 예로 장례를 지냈다. 공로를 기록하고 어진 사람을 임용했다. 투성연을 영윤으로 삼고, 자가 자하(子瑕)인 양개(陽匄)를 좌윤으로 삼았다. 또한 원엄(薳掩)과 백주리(伯犨犁)는 억울하게 죽었다고 생각하여, 백주리의 아들 백극완(伯郤宛)을 우윤으로 삼고, 원엄의 동생 원사(薳射)와 원월(薳越)은 모두 대부로 삼았다. 조오와 하설 및 채유는 모두 하대부가 되었다. 또한 공자 방(公子魴)이 전쟁에 용감하다고 하여 사마에 제수되었다. 그때 오거는 이미 죽었으나 초평왕이 그가 생전에 직간하던 미덕을 가상히 생각하여 그의 아들 오사(伍奢)를 연(連)에 봉하고 연공(連公)이라고 불렀다. 오사의 아들 오상(伍尙)도 역시 당(棠)에 봉해져 당재(棠宰)가 되고 당공(棠公)이라고 불렀다.
其他薳啟疆鄭丹等一班舊臣,官職如故。欲官觀從,從言其先人開卜:「願為卜尹。」平王從之。群臣謝恩,朝吳與蔡洧獨不謝,欲辭官而去。平王問之,二人奏曰:「本輔吾王興師襲楚,欲復蔡國,今王大位已定,而蔡之宗祀,未沾血食,臣何面目立於王之朝乎?昔靈王以貪功兼并,致失人心,王反其所為,方能令人心悅服。欲反其所為,莫如復陳蔡之祀。」平王曰:「善。」乃使人訪求陳蔡之後,得陳世子偃師之子名吳,蔡世子有之子名廬,乃命太史擇吉,封吳為陳侯,是為陳惠公,廬為蔡侯,是為蔡平公,歸國奉宗祀。
그밖에 원계강과 정단 등 일반 옛 신하들은 관직에 그대로 있게 했다. 초평왕이 관종에게도 벼슬을 주려고 하자, 그는 자기의 선조들이 점을 치던 사람들이라, “복윤(卜尹)의 자리를 원한다.”고 했다. 평왕이 허락했다. 초나라의 신하들이 초평왕의 은혜에 감사했으나 조오와 채유만은 벼슬도 받지 않고 감사하지도 않으며 떠나려고 했다. 평왕이 그 까닭을 묻자 두 사람이 아뢰기를, “원래 우리가 왕을 도와 군사를 일으켜 초나라를 습격한 것은 채나라를 회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금 대왕의 자리는 이미 안정되었지만 채나라의 종사는 혈식(血食)도 올리지 못하니, 신 등이 무슨 면목으로 대왕의 조정에 서겠습니까? 전날 초영왕이 공을 탐하여 진(陳)나라와 채나라를 병합하였으나, 민심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왕께서는 그 반대의 일을 하셨기 때문에 비로소 민심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초영왕과 반대되는 일에는 진나라와 채나라의 종사를 회복시키는 것 만한 게 없습니다.” 하니, 초평왕이 대답하기를, “좋소.” 하고, 즉시 사람을 시켜 진나라와 채나라 군주들의 후손을 찾게 하여, 진나라 세자 언사(偃師)의 아들 오(吳)와 채나라 세자 유(有)의 아들 여(廬)를 찾았다. 태사에게 명하여 길일을 택하여, 오를 진나라 군주로 삼아 진혜공(陳惠公)이라 하고, 여를 채나라 군주로 삼아 채평공(蔡平公)이라 하여 각기 자기 나라에 돌아가 종사를 받들도록 했다.
朝吳蔡洧隨蔡平公歸蔡,夏齧隨陳惠公歸陳。所率陳蔡之眾,各從其主,厚加犒勞。前番靈王擄掠二國重器貨寶,藏於楚庫者,悉給還之。其所遷荊山六小國,悉令還歸故土,秋毫無犯。各國君臣上下,歡聲若雷,如枯木之再榮,朽骨之復活。此周景王十六年事也。髯翁有詩云:「枉竭民脂建二城,留將後主作人情。早知故物仍還主,何苦當時受惡名。」平王長子名建,字子木,乃蔡國鄖陽封人之女所生,時年已長,乃立為世子,使連尹伍奢為太師。有楚人費無極,素事平王,善於貢諛,平王寵之,任為大夫。無極請事世子,乃以為少師。以奮揚為東宮司馬。
조오와 채유가 채평공을 따라 채나라로 돌아가고, 하설은 진혜공을 따라 진나라로 돌아갔다. 초평왕이 진나라와 채나라 백성들을 배불리 먹여 각기 군주를 따라 돌아가게 했다. 전날에 초영왕이 두 나라의 귀중한 그릇과 보물들을 노략질하여 초나라의 창고에 넣어 둔 것도 모두 돌려주었다. 그리고 형산(荊山)으로 이주시킨 작은 여섯 나라의 백성들에게도 모두 옛땅으로 돌아가 살도록 하고 추호도 그들을 범하지 못하게 했다. 각국의 군주와 신하와 백성들이 우레와 같이 환성을 질러 마치 고목에 다시 꽃이 피고 썩은 해골이 다시 살아난 것 같았다. 이때가 주경왕 16년(기원전 529년)의 일이었다. 염옹(髥翁)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헛되이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 두 성을 세우고, 지키라던 장수가 군주가 되어 인정을 베풀었다. 남의 것을 옛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함을 일찍 알았더라면, 어찌 굳이 당시에 악명을 무릅썼겠는가?” 했다. 초평왕의 장자는 이름이 건(建)이고 자는 자목(子木)이라 했다. 곧 채나라 운양(鄖陽) 땅을 다스리던 관리의 딸 소생이었다. 그때 이미 장성하여 그를 세자로 세우고 연윤 오사를 태사(太師)로 삼았다. 초나라 사람 비무극(費無極)이 평소에 평왕을 섬기고 아첨에 능해 초평왕의 총애로 대부가 되었다. 비무극이 태자를 모시고 싶다고 청하자, 초평왕이 그를 태자의 소사(少師)로 삼고, 분양(奮揚)을 동궁사마(東宮司馬)로 삼았다.
平王既即位,四境安謐,頗事聲色之樂。吳取州來,王不能報。無極雖為世子少師,日在平王左右,從於淫樂。世子建惡其諂佞,頗疏遠之。令尹鬥成然恃功專恣,無極譖而殺之,以陽匄為令尹。世子建每言成然之冤,無極心懷畏懼,由是陰與世子建有隙。無極又薦鄢將師於平王,使為右領,亦有寵。這段情節,且暫擱起。話分兩頭。再說,晉自築虒祈宮之後,諸侯窺其志在苟安,皆有貳心。昭公新立,欲修復先人之業,聞齊侯遣晏嬰如楚修聘,亦使人徵朝於齊。齊景公見晉楚多事,亦有意乘間圖伯,欲觀晉昭公之為人,乃裝束如晉,以勇士古冶子從行。
초평왕이 이미 즉위하여 사방 변경이 안정되자 가무와 미색의 즐거움에 빠지기 시작했다. 오나라가 주래(州來)를 빼앗았으나 초평왕은 보복할 수가 없었다. 비무극은 비록 세자 소사가 되었으나 매일 초평왕의 좌우에 있으면서 음탕한 즐거움을 거들었다. 세자 건이 그 아첨을 미워하여 아주 멀리했다. 영윤 투성연이 공을 믿고 방자하게 굴자 비무극이 초평왕에게 참소하여 죽였다. 양개가 영윤이 되었다. 세자 건이 매번 투성연의 억울함을 초평왕에게 말하자, 비무극이 두려운 마음을 품고 이로 말미암아 세자 건과 틈이 생겼다. 비무극이 또 언장사(鄢將師)라는 사람을 초평왕에게 천거하여 우령(右領)으로 삼게 했다. 그도 역시 초평왕의 총애를 받았다. 이러한 정황은 잠깐 밀어두자. 이야기는 두 갈래로 나뉜다. 한편, 진평공(晉平公)이 사기궁(虒祁宮)을 짓고 난 뒤에 중원의 제후들은 진평공의 뜻이 구차한 평안에 있음을 엿보고 모두 다른 뜻을 품게 되었다. 진소공(晉昭公)이 새로 서자 다시 선군의 패업을 이루어 보려고 했다. 그때 제경공이 안영을 초나라에 보내어 수호를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진소공도 역시 사자를 제나라로 보내 사절을 진(晉)나라에도 보내 조회하라고 했다. 제경공은 진(晉)나라와 초나라에 일이 많은 것을 보고 그 틈을 타서 그 역시 패업을 도모하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진(晉昭公)이 어떤 사람인가를 살펴보려고 즉시 행장을 꾸려 진(晉)나라로 길을 떠나면서 용사 고야자(古冶子)를 데리고 갔다.
方渡黃河,其左驂之馬,乃景公所最愛者,即令圉人於從舟取至,繫于船頭,親督圉人飼料。忽大雨驟至,波濤洶湧,舟船將覆。有大黿舒頭於水面,張開巨口,搶向船頭,銜左驂之馬,入於深淵。景公大驚。古冶子在側,言曰:「君勿懼也,臣請為君索之。」乃解衣裸體,拔劍躍於水中,凌波踢浪而去。載沉載浮,順流九里,望之無跡。景公嘆曰:「冶子死矣!」少頃,風浪頓息,但見水面流紅。古冶子左手挽驂馬之尾,右手提血瀝瀝一顆黿頭,浴波而出。景公大駭曰:「真神勇也!先君徒設勇爵,焉有勇士如此哉!。」遂厚賞之。
바야흐로 제경공이 황하를 건너는데, 그 왼쪽 곁말은 제경공이 가장 사랑하는 말이라 마부에게 따르는 배를 끌어오게 하여 그 뱃머리에 말을 묶고 마부가 사료를 주는 것을 감독했다. 그때 갑자기 소나기가 몰아치고 파도가 일어나 배들이 뒤집히려는 순간 커다란 자라의 머리가 수면 위로 나타나더니 커다란 입을 벌리고 뱃머리를 향하여 다가와 왼쪽 곁말을 물고, 깊은 물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제경공이 크게 놀라니, 고야자가 곁에 있다가 말하기를, “주군께서는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신이 주군을 위해 찾아오겠습니다.” 하고, 즉시 옷을 벗고 나체로 칼을 뽑아 물속으로 뛰어 들어가 파도를 타고 풍랑을 헤치며 나아갔다. 가라앉았다 떠오르며 흐름을 타고 9리를 가서 흔적 없이 사라졌다. 제경공이 탄식하기를, “고야자가 죽었구나!” 했다. 조금 지나자 풍랑이 가라앉더니 수면에 붉은 흐름이 보였다. 고야자가 왼손에는 곁말의 꼬리를 잡고 오른손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자라의 머리를 들고, 파도 속에서 나왔다. 경공이 크게 놀라 말하기를, “진실로 귀신과 같은 용사로다. 선군께서 용작(勇爵)이라는 관직을 만들었다고 하더니 어찌 이와 같은 장사가 있겠는가?” 하고, 그에게 많은 상을 내렸다.
既至絳州,見了晉昭公,昭公設宴享之。晉國是荀吳相禮,齊國是晏嬰相禮。酒酣,晉侯曰:「筵中無以為樂,請為君侯投壺賭酒。」景公曰:「善。」左右設壺進矢,齊侯拱手讓晉侯先投。晉侯舉矢在手,荀吳進辭曰:「有酒如淮,有肉如坻。寡君中此,為諸侯師。」晉侯投矢,果中中壺,將餘矢棄擲於地。晉臣皆伏地稱「千歲。」齊侯意殊不懌,舉矢亦效其語曰:「有酒如澠,有肉如陵。寡人中此,與君代興。」撲的投去,恰在中壺,與晉矢相並,齊侯大笑,亦棄餘矢。晏嬰亦伏地呼「千歲!」晉侯勃然變色。
이윽고 제경공 일행이 강주성에 도착하여 진소공을 접견했다. 진소공이 연회를 열었다. 진(晉)나라에서는 순오(荀吳)를 상례(相禮 ; 예절을 돕는 사람)로 삼고, 제나라는 안영을 상례로 삼았다. 술이 얼근해지자 진소공이 말하기를, “술자리에 즐길 놀이가 없으니 항아리에 화살을 던져 넣어, 지는 사람이 벌주를 마시기로 합시다.” 하니, 제경공이 말하기를, “좋습니다.” 했다. 좌우에서 항아리를 놓고 화살을 가져왔다. 제경공이 두 손을 모아 진소공에게 먼저 던지라고 양보했다. 진소공이 화살을 손에 들자 순오가 앞으로 나오며 칭송의 말을 하기를, “술은 회수(淮水)와 같고 고기는 작은 산 같으니 우리 주군께서 여기에 던져 넣으시어 제후들의 스승이 되소서.” 했다. 진소공이 던진 화살이 과연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자 남은 화살을 땅에 던졌다. 진나라 신하들이 모두 땅에 엎드려 ‘천세’라고 칭송했다. 제경공이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도 역시 화살을 집어들며 그 말을 흉내내어, “술은 승수(澠水)와 같고 고기는 큰 언덕 같으니 과인이 그 속에 던져넣어 진나라 군주를 대신하여 패업을 일으키게 하소서.” 하고, 툭 던지니 항아리 속에 쑥 들어가 진소공의 화살과 나란히 꽂혔다. 제경공이 크게 웃으며 역시 나머지 화살을 버렸다. 안영도 땅에 엎드려 ‘천세’라고 외쳤다. 진소공이 벌컥 얼굴색이 변했다.
荀吳謂齊景公曰:「君失言矣!今日辱貺敝邑,正以寡君世主夏盟之故。君曰『代興』,是何言也!」晏嬰代答曰:「盟無常主,惟有德者居焉。昔齊失霸業,晉方代之。若晉有德,誰敢不服?如其無德,吳楚亦將迭進,豈惟敝邑!」羊舌肹曰:「晉已師諸侯矣,安用壺矢?此乃荀伯之失言也!」荀吳自知其誤,嘿然不語。齊臣古治子立於階下,厲聲曰:「日昃君勞,可辭席矣!」齊侯即遜謝而出,次日遂行。羊舌肹曰:「諸侯將有離心,不以威脅之,必失霸業。」晉侯以為然。乃大閱甲兵之數,總計有四千乘,甲士三十萬人。
순오가 제경공에게 말하기를, “군주께서는 실언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나라에 오신 것은 우리 군주께서 대대로 중원의 회맹을 주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군주께서 대신해서 패업을 일으킨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은 무슨 말씀입니까?” 하니, 안영이 대신 대답하기를, “맹주란 항상 한 사람이 주관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덕이 있는 자가 맹주가 될 수 있습니다. 옛날 제나라가 패업을 잃자 진(晉)나라가 바로 대신했습니다. 만약 진나라가 덕이 있다면 누가 감히 불복하겠습니까? 만약 덕이 없으면 오나라나 초나라가 번갈아 나설 것이니 어찌 우리 제나라라고 패업을 대신하지 못하겠습니까?” 했다. 양설힐이 말하기를, “진나라는 이미 제후들을 거느리고 있으니 어찌 항아리와 화살에 대고 패자 운운하십니까? 이것은 순백(荀伯 ; 순오)께서 실언하셨습니다.” 했다. 순오는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제경공을 호위하는 고야자가 계단 아래에서 성낸 목소리로 말하기를, “해도 이미 기울고 주군께서는 피로하시니,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시지요.” 하니, 제경공이 진소공에게 즉시 감사의 말을 올리고 물러나왔다. 다음날 곧 제경공은 제나라로 돌아갔다. 양설힐이 진소공에게 말하기를, “중원의 제후들이 장차 우리를 떠나려는 마음이 있으니 위세로 눌러 놓지 않으면 틀림없이 패업을 잃게 될 것입니다.” 하니, 진소공이 옳다고 생각하고 즉시 크게 군사를 열병하니 전차가 총 4천 대이고 무장병이 30만 명이었다.
羊舌肹曰:「德雖不足,而眾可用也。」於是先遣使如周,請王臣降臨為重,因遍請諸侯,約以秋七月俱集平邱相會。諸侯聞有王臣在會,無敢不赴者。至期,晉昭公留韓起守國,率荀吳、魏舒、羊舌肹、羊舌鮒、籍談、梁丙、張骼、智躒等,盡起四千乘之眾,望濮陽城進發。連絡三十餘營,遍衛地皆晉兵。周卿士劉獻公摯先到。齊、宋、魯、衛、鄭、曹、莒、邾、滕、薛、杞、小邾十二路諸侯畢集,見晉師眾盛,人人皆有懼色。既會,羊舌肹捧盤盂進曰:「先臣趙武,誤從弭兵之約,與楚通好。楚虔無信,自取隕滅。今寡君欲效踐土故事,徼惠於天子,以鎮撫諸夏,請諸君同歃為信!」
양설힐이 말하기를, “비록 덕이 부족하더라도 많은 군사를 부릴 수 있습니다.” 했다. 이에 진소공은 먼저 사자를 주나라에 보내 천자의 신하를 회맹에 참석시켜 달라고 청하고, 제후들에게 사자를 두루 보내어 가을 칠월에 평구(平邱)에서 모두 모이자고 약속했다. 제후들이 천자의 신하가 회합에 온다는 말을 듣고 감히 참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일이 되자 진소공은 한기에게 국도에 머물러 나라를 지키게 하고, 순오, 위서, 양설힐, 양설부(羊舌鮒), 적담(籍談), 양병(梁丙), 장격(張骼), 지력(智躒)등과 함께 전차 4천 대의 군사들을 모두 거느리고 복양성(濮陽城)을 향해 출발했다. 진나라 군사들이 30여 영채를 세워 서로 연결하니 위나라 땅에는 진나라 군사들이 가득했다. 주나라의 경사 유헌공(劉獻公) 지(摯)가 먼저 도착하고, 제(齊), 송(宋), 노(魯), 위(衛), 정(鄭), 조(曹), 거(莒), 주(邾), 등(滕), 설(薛), 기(杞), 소주(小邾) 등 열두 제후들이 모두 모여 진나라 군사들의 성대한 모습을 보고 사람마다 모두 두려운 기색을 띠었다. 드디어 회맹이 열렸다. 양설힐이 희생의 피를 담은 쟁반을 받쳐 들고 제후들 앞으로 걸어 나와 말하기를, “선대의 신하 조무가 지난 미병지회 때 약속을 잘못하여 초나라와 통호를 했으나, 초왕 웅건이 신의를 지키지 않아 스스로 자기의 죽음을 재촉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군께서 선군이신 진문공이 천토에서 회맹하신 일을 본받아 천자가 보내신 대신을 모시고 제후들을 진정하고 위로하고자 합니다. 청컨대 제후들께서는 이 희생의 피를 바르고 신의를 굳게 합시다.” 했다.
諸侯皆俯首曰:「敢不聽命!」惟齊景公不應。羊舌肹曰:「齊侯豈不願盟耶?」景公曰:「諸侯不服,是以尋盟﹔若皆用命,何以盟為?」羊舌肹曰:「踐土之盟,不服者何國?君若不從,寡君惟是甲車四千乘,願請罪於城下。」說猶未畢,壇上鳴鼓,各營俱建起大旆。景公慮其見襲,乃改辭謝曰:「大國既以盟不可廢,寡人敢自外耶?」於是晉侯先歃,齊宋以下相繼。劉摯王臣,不使與盟,但監臨其事而已。邾莒以魯國屢屢侵伐,訴於晉侯。晉侯辭魯昭公於會,執其上卿季孫意如,閉之幕中。
제후들이 모두 고개를 숙이며 말하기를, “감히 명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했다. 그러나 오직 제경공은 응하지 않았다. 양설힐이 말하기를, “제나라 군주께서는 어찌하여 맹세하지 않으십니까?” 하니, 제경공이 말하기를, “제후들이 복종하지 않는다면 맹세를 하겠지만, 만약 모두 명을 따른다면 구태여 맹세할 필요가 있겠소?” 했다. 양설힐이 말하기를, “천토의 회맹에서 복종하지 않았던 나라가 있었던가요? 군주께서 만약 따르지 않겠다면 우리 군주께서 전차 4천 대로 제나라의 도성 아래에서 죄를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단상에서 북이 울리고, 각 진영에서 일제히 대패기(大旆旗)를 일으켜 세웠다. 제경공이 피습을 당할까 염려하여 곧 말을 바꾸어 사과하기를, “대국이 이미 동맹을 하겠다는데 과인이 감히 회맹을 하지 않을 수 있겠소?” 했다. 이에 진소공이 먼저 삽혈을 하고, 이어서 제나라와 송나라 이하 다른 나라 제후들이 그 뒤를 따랐다. 천자가 보낸 유헌공 지는 회맹에 참여하지 않고 다만 임석하여 감독할 뿐이었다. 주(邾)나라와 거(莒)나라 제후는 노나라의 빈번한 침략을 진소공에게 호소하였다. 진소공은 노소공이 회맹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노나라 상경 계손의여(季孫意如)를 붙잡아 막사 안에 가두었다.
子服惠伯私謂荀吳曰:「魯地十倍邾莒,晉若棄之,將改事齊楚,於晉何益?且楚滅陳蔡不救,而復棄兄弟之國乎?」荀吳然其言,以告韓起。起言於晉侯,乃縱意如奔歸。自是諸侯益不直晉,晉不復能主盟矣。史臣有詩嘆云:「侈心效楚築虒祁,列國離心復示威﹔壺矢有靈侯統散,山河如故事全非!」
자가 자복(子腹)인 진나라 대부 혜백(惠伯)이 조용히 순오에게 말하기를, “노나라의 땅은 주나라와 거나라 땅보다 열 배는 큽니다. 진(晉)나라가 만약에 노나라를 버린다면 노나라는 장차 제나라나 초나라를 섬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진나라에 무슨 이득이 되겠습니까? 지난번 초나라가 진나라와 채나라를 멸망시킬 때 우리가 구하지 않아서 제후들의 신망을 잃었는데, 다시 형제의 나라를 버릴 것입니까?” 하니, 순오가 혜백의 말을 옳다고 생각하여, 회맹에서 돌아가 그 뜻을 한기에게 전했다. 한기가 진소공에게 말하여, 즉시 계손여의를 석방하여 돌려보냈다. 이로부터 제후들은 더욱 진(晉)나라가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하였고, 진나라는 다시 회맹을 주관하지 못했다. 사관이 시를 지어 한탄하기를, “사치심에 장화대를 흉내내어 사기궁을 지으니, 제후들의 마음이 떠나 무력으로 복종시키려 했다. 투호(投壺)의 영험으로 제후들이 모두 흩어졌으니, 땅은 여전하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어졌도다!” 했다.
要知後事如何,且看下回分解。
뒷일이 어찌 될지 알고 싶구나. 다음 회를 보면 풀릴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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