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지: 우에스기 겐신은 무기에 붙어있는 식신에 따라 1차지가 바뀌어집니다. 일단 첫무기에는 아마 봉황이 붙어있을것이고 가다보면 십자가 모양, 늑대모양, 毘자가 새기어진 문양이 있습니다. 일단 봉황같은 경우는 겐신 바로 앞으로 직선방향으로 날아가 적에게 데미지를 입히며 어떤 차지든 모아서 칠수있으며 모으면 모을수록 데미지가 상승하며 십자가 모양은 폭탄처럼 앞으로 가다가 터지게 됩니다. 늑대모양같은경우는 케릭터 주위를 한바퀴 맴돌며 毘자는 사람모양의 초록 빛이(비사문천으로 추측) 나가게 됩니다 ;ㅁ; 좌나 우로 패턴을 바꾸다가 사라집니다; 데미지가 약하죠
2차지: 띄우고 점프해서 적을 가격후 적의 추락으로 인한 충격파 발생시 적을 자신의 몸을 한바퀴 돌려 날려버리는(?) 차지입니다 ;ㅁ; 많은 적이 맞으면 충격파가 각 추락 적에게서 발생하기 때문에(타 1차지 막타쯤에서 충격파 발생하는 케릭터들도 마찬가지지만) 범위가 넓어져 보다 많은 적에게 데미지를 줄수 있습니다
3차지: 위로 올리면서 베는것인데요; 첫타 몇방치고 마지막 베기에서 띄우고 날있는 방향으로 하지 않고 적을 날려버립니다.
4차지: 전방향 차지입니다. 여기에 속성이 다들어 갈시에 무기의 속성이 겐신의 득의속성(동아)라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게되죠; 많은 분들이 식신이 좋다고 하시던데; 왜 좋은지...;; 정말 궁금합니다; 저는 4차지가 더 좋습니다 ;ㅁ;... 5무기의 능력치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지만 자주 애용한다죠 ^^
나가오 다메카케(長尾爲景)의 막내아들로, 형 하루카케와는 부모와 자식정도의 연령차이가 있었던 겐신은, 린센지(林泉寺)에 맡겨져, 수행에 힘썼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후 가독을 물려 받은, 형 · 나가오 하루카케가 병약하고 영국의 혼란을 일으켜, 가신들에게 추대되어 마침내 1548년에 형 하루카케를 은퇴시키고 12월 말일 카스가야마성(春日山城)으로 들어가 가문을 이어 받았다.
그 후 아버지 대부터의 염원인 에치고 통일을 완수하고, 에치젠(越中)에 진출해, 잇코 잇키들과 싸웠다. 키타 시나노의 호족들이 다케다 신겐에 의해 쫓아져 오자, 이들을 비호하고, 카와나카지마에서 5번에 걸치는 대격투를 펼쳤다. 그 중에서도 1561년의 제4번째는 신겐과 켄신의 일대일 대결의 일화가 남을 정도로 격전이 되었다(물론, 현재는 일대일 대결이 없었다고 하는 설이 유력). 관동 관령 · 우에스기 노리마사가 호조 우지야스에 쫓겨 의지해 오자 이것을 역시 비호, 관동에 몇 번이나 출진한다. 그 중에서도 1661년의 원정 때에는 호조가의 본거지인 오다와라성에 까지 육박해 들어가 켄신 스스로가 일부러 성에서도 훤히 보이는 위치에까지 가서 도발해도 철저히 농성전술을 취하는 우지야스에게 어쩔 수 없어 퇴각하고는, 쓰루오카 하치만궁(鶴岡八幡宮)에서 관동관령 취임의식을 거행하고 이후 우에스기씨라 칭하게 되었다.
켄신은 종종 상경해, 장군에게 알현 했다. 마츠나가(松永) · 미요시(三好)도 켄신이 교토에 있는 동안 만큼은 점잖게 굴고,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義輝)도 자기 의지대로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항상 조정과 막부를 존중하며 관동 관령의 이름으로 관동에 출병했다. 싸우는 모습은 가히 「전국 최강」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카라사와 산성(唐澤山城) 구원전에서는, 혼자서 말을 타고 입성 한 이야기도 남아 있다. 전투 예술가인 우에스기 겐신에 있어 가중 통제는 어렵고 귀찮은 일이었던 것 같은데, 실제로 모반도 가끔 발생했다. 이에 그는 불과 27세의 나이에 다카야마산(高野山)으로의 은퇴를 운운, 이에 너무 놀란 가신단은 결과적으로 더욱 결속해 버리고 마는 계기가 되었다. 켄신은 스스로를 비사문천(毘沙門天)의 화신이라 했고, 「용장 아래 약졸 없다」는 식으로 가신들도 이에 그야말로 잘 싸웠다. 그리고 바다가 없는 다케다에게 소금를 보내 주었다고 하는 일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의(義)」를 전국의 혼탁한 세상에서도 반드시 지킨다고 알려져, 적대 영주로부터도 신뢰되었다.
신겐이 이마가와가를 멸하고 스루가를 취해 삼국 동맹을 깨자, 호조는 우에스기와 동맹을 결성했고, 그러나 이것은 또 우지야스의 죽음에 의해 곧바로 또 깨어졌다. 이에 신겐은 다시 그 호조가와 동맹을 맺고, 상경을 실행에 옮기려 했지만 그 역시 도중에서 사망해 버리고 만것이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켄신은, 젓가락을 떨어뜨리며「아까운 남자를 잃었다」라고 말하며 흐느껴 울었다고 한다.
그 후, 오다군과 접촉하지만 이것을 일축해 버리고, 카스가야마성으로 돌아왔지만, 그 겨울에 갑자기 쓰러지더니 그대로 죽었다. 그리고, 그의 이런 갑작스런 죽음은 후계자 분쟁 · 미타테의 란(御館の亂)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첫댓글그리고 미타테의 난에 대해서 좀 써보자면은.. 우에스기, 호죠, 다케다에 외교에 대한 피해가 좀 있었죠;; 우에스기에게는 양아들이 둘이 있었는데 하나가 가케카쓰이고 둘째는 호조 우지야스의 아들... 포로였으나 양자로 삼은 가케토라입니다. 일단 이 둘을 양아들로서 평등하게 대하였다는 이유로 미타테의 란의 발발 원
인이 됩니다; 정확하게 한다면 카케카쓰와 카케토라가 아버지의 권력을 물려받기 위해 저런건데 카케카쓰에게는 나오에 가네쓰구란 뛰어난 인물이 하나 있었는데 그를 시켜서 다케다의 지원병을 받은것이죠 원래 따지자면 동맹 호죠의 자식인 가케토라를 지지해야 마땅하지만 카케카쓰를 지원해서 호죠에게 불신을 사고
첫댓글 그리고 미타테의 난에 대해서 좀 써보자면은.. 우에스기, 호죠, 다케다에 외교에 대한 피해가 좀 있었죠;; 우에스기에게는 양아들이 둘이 있었는데 하나가 가케카쓰이고 둘째는 호조 우지야스의 아들... 포로였으나 양자로 삼은 가케토라입니다. 일단 이 둘을 양아들로서 평등하게 대하였다는 이유로 미타테의 란의 발발 원
인이 됩니다; 정확하게 한다면 카케카쓰와 카케토라가 아버지의 권력을 물려받기 위해 저런건데 카케카쓰에게는 나오에 가네쓰구란 뛰어난 인물이 하나 있었는데 그를 시켜서 다케다의 지원병을 받은것이죠 원래 따지자면 동맹 호죠의 자식인 가케토라를 지지해야 마땅하지만 카케카쓰를 지원해서 호죠에게 불신을 사고
동시에 동맹관계까지 끊어져 호죠만 있었으면 오와리 세력에게서 조금이라도 더 버틸수 있었으나 이 동맹의 단절로 인해 결국 다케다는 누구의 지원도 받지 못하게 되어 망하게 되고 에치고는 가케카쓰의 지배하로 넘어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