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39장 강해 (욥을 우직한 들짐승과 우직한 군마에 비교하여 설명하심)
욥39:1-30- 산 염소가 1)새끼 치는 때를 네가 아느냐? 암사슴이 2)새끼 낳는 것을 네가 본 적이 있느냐? 2. 그것이 몇 달 만에 만삭되는지 아느냐? 그 낳을 때를 아느냐? 1)산 염소는 평균 145~160일이 임산 기간입니다. 2)암사슴은 6개월~7개월이 만삭되는 기간이라고 합니다.
3. 그것들은 몸을 구푸리고 새끼를 낳으니 그 괴로움이 지나가고 4. 그 새끼는 강하여져서 빈 들에서 크다가 나간 후에는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느니라.
5. 누가 들 나귀를 놓아 자유롭게 하였느냐? 누가 빠른 나귀의 매인 것을 풀었느냐? 6. 내가 들을 그것의 집으로, 소금 땅을 그것이 사는 처소로 삼았느니라.
7. 들 나귀는 성읍에서 지껄이는 소리를 비웃나니 나귀 치는 사람이 지르는 소리는 그것에게 들리지 아니하며 8. 초장 언덕으로 두루 다니며 여러 가지 푸른 풀을 찾느니라.
9. 들소가 어찌 기꺼이 너를 위하여 일하겠으며 네 외양간에 머물겠느냐? 10. 네가 능히 줄로 매어 들소가 이랑을 갈게 하겠느냐? 그것이 어찌 골짜기에서 너를 따라 써레를 끌겠느냐?
11. 그것이 힘이 세다고 네가 그것을 의지하겠느냐? 네 수고를 그것에게 맡기겠느냐? 12. 그것이 네 곡식을 집으로 실어 오며 네 타작마당에 곡식 모으기를 그것에게 의탁하겠느냐?
13. 타조는 즐거이 날개를 치나 학의 깃털과 날개 같겠느냐? 14. 그것이 알을 땅에 버려두어 흙에서 더워지게 하고 15. 발에 깨어질 것이나 들짐승에게 밟힐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16. 그 새끼에게 모질게 대함이 제 새끼가 아닌 것처럼 하며 그 고생한 것이 헛되게 될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나니 17. 이는 하나님이 지혜를 베풀지 아니하셨고 총명을 주지 아니함이라.
18. 그러나 그것이 몸을 떨쳐 뛰어갈 때에는 말과 그 위에 탄 자를 우습게 여기느니라.
19. 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네가 입혔느냐? 20. 네가 그것으로 메뚜기처럼 뛰게 하였느냐? 그 위엄스러운 콧소리가 두려우니라. 21. 그것이 골짜기에서 발굽질하고 힘 있음을 기뻐하며 앞으로 나아가서 군사들을 맞되
22. 두려움을 모르고 겁내지 아니하며 칼을 대할지라도 물러나지 아니하니 23. 그의 머리 위에서는 화살통과 빛나는 창과 투창이 번쩍이며 24. 땅을 삼킬 듯이 맹렬히 성내며 나팔 소리에 머물러서지 아니하고 25. 나팔 소리가 날 때마다 힝힝 울며 멀리서 싸움 냄새를 맡고 지휘관들의 호령과 외치는 소리를 듣느니라.
26. 매가 떠올라서 날개를 펼쳐 남쪽으로 향하는 것이 어찌 네 지혜로 말미암음이냐? 27. 독수리가 공중에 떠서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 어찌 네 명령을 따름이냐?
28. 그것이 낭떠러지에 집을 지으며 뾰족한 바위 끝이나 험준한 데 살며 29. 거기서 먹이를 살피나니 그 눈이 멀리 봄이며 30. 그 새끼들도 피를 빠나니 시체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있느니라.-
욥39:1-4- 산 염소가 새끼 치는 때를 네가 아느냐? 암사슴이 새끼 낳는 것을 네가 본 적이 있느냐? 2. 그것이 몇 달 만에 만삭되는지 아느냐? 그 낳을 때를 아느냐?
3. 그것들은 몸을 구푸리고 새끼를 낳으니 그 괴로움이 지나가고 4. 그 새끼는 강하여져서 빈들에서 크다가 나간 후에는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느니라.-
산 염소는 암벽에 사는 야생 염소를 가리키며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절벽이나 돌이 많은 황무지에서 살고 있어서 사람들이 이 산염소를 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일 뿐만 아니라 더욱이 그것의 분만 시기를 안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와 돌보심은 그러한 산 염소에게까지 미치며 들짐승의 종을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세밀하게 돌보심으로 조물주 하나님은 모든 생물에게 생명의 주인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들짐승들을 자꾸 증거하며 질문하시는 이유는 욥의 무지와 교만을 깨닫게 해주시려는 의도이며 실제 욥 자신을 염두에 두고 너는 들짐승보다 나을 것이 없다, 라고 말씀하시는데 네가 만물을 지으시고 경영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그렇게 많이 안다고 주장했는데 너는 네 자신에 대해서라도 제대로 아느냐? 라는 요지입니다.
앞의 욥기 38:39-41-에서는 들짐승들의 식물을 예비하여 먹이시는 하나님을 증거하셨는데 말씀의 순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무지한 짐승의 마음을 가진 교만한 인간들은 하나님의 정하심에 순종하여
1. 하나님의 말씀을 얻어먹고
2. 거듭나서 영의 자유를 얻어야 하며
3. 영감을 받아 온전함을 이루기 위해 생명의 양육을 받고 자라야 하며
4. 생육하고 번성해야 한다, 라는 논지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목적을 위하여 욥이 하나님께 구속을 받아야 하고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쓰임을 받아야만 욥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목적대로 실현되어 욥이 복음의 제사장으로 세워지는 것이지요.
암사슴이 새끼 낳는(낳기까지 돌보시는) 것을 네가 본 적이 있느냐?- 본문의 본 적이 있느냐? 라는 뜻의 (히//솨마르)는 지키다, 보호하다, 관찰하다, 라는 의미이니 암사슴이 잉태하여 해산하기까지 네가 그것을 돌보고 있다가 적당한 시기에 새끼들을 낳게 할 수 있는가? 라고 물으신 말씀입니다.
스스로 유능한 줄로 착각하는 욥에게 인간이 전혀 알 수 없고 할 수도 없는 일들을 하나님께서는 그의 창조의 능력인 무궁한 생명력으로 모든 생명체를 경영하여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욥39:2- 그것이 몇 달 만에 만삭되는지 아느냐? 그 낳을 때를 아느냐?-
직역하면 그것들(산 염소와 암사슴)이 만삭되는 달을 셈할 수 있느냐? 인데 이는 곧 산 염소와 암사슴의 잉태 기간을 가리키는 말이며 만삭되다, 의 기본형 (히//마레)는 채우다, 가득하다, 풍만하다, 완성하다, 란 뜻으로 수태하여 해산하기까지의 기간에 그것들을 관찰하고 보호하여 새끼를 낳도록 욥이 섭리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질문하는 내용입니다.
욥39:3-4- 그것들은 몸을 구푸리고 새끼를 낳으니 그 괴로움이 지나가고 4. 그 새끼는 강하여져서 빈 들에서 크다가 나간 후에는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느니라.-
야생짐승들의 잉태와 해산과 생존방식을 묘사하고 있는데 해산의 고통이 있은 후에 즉 잉태 기간의 고난과 해산의 괴로움 후에 새끼들이 스스로 생존할 수 있게 되면 스스로 독립하는 것을 인간의 지혜로는 도울 수 없으나 하나님이 적절하게 섭리하신다는 뜻입니다.
자칭 탁월한 지혜와 지식을 구비한 사람으로 교만하게 말하며 욥을 찌르도록 보낸 친구들을 현란한 말재주로 제압하고 하나님께 자신의 의로움과 선행을 자랑하며 도전했던 욥이라는 옛사람은 짐승 세계의 이치도 알 수 없고 들짐승들을 보호하며 지킬 수도 없으면서 너무 교만하다는 뜻입니다.
욥39:5-8- 누가 들 나귀를 놓아 자유롭게 하였느냐? 누가 빠른 나귀의 매인 것을 풀었느냐? 6. 내가 들을 그것의 집으로, 소금 땅을 그것이 사는 처소로 삼았느니라.
7. 들 나귀는 성읍에서 지껄이는 소리를 비웃나니 나귀 치는 사람이 지르는 소리는 그것에게 들리지 아니하며 8. 초장 언덕으로 두루 다니며 여러 가지 푸른 풀을 찾느니라.-
자유롭게 하다(히//하파쉬)는 얽매인 것들을 초월한다는 의미로서 야생 당나귀의 본성적인 기질을 잘 묘사하고 있는데(신15:12, 사58:6, 렘34:14) 벳바게 마을의 맞은편 마을인 베다니에 매여있던 나귀와 나귀 새끼를 풀어 주님께 데려오면 주님이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시는 내용을 연상해보게 합니다.
육적 자아의 지기 기준에서 옳음이나 선함에 잡혀서 집착하거나 강하게 고집을 세우던 육신의 생각 하나를 버리면 내 주변의 강풍들과 삶의 현장인 바다의 모든 풍랑이 잔잔해지는 것이 진정한 영의 해방이니 참으로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욥과 그 친구들은 제어할 수 없는 들 나귀와 같이 고삐 풀린 들 나귀들이었고 주인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나귀들이었지만 이제부터는 주님께서 저들을 붙잡아 길들이고 집짐승으로 길들여서 유용하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 하나님이 시혜하시는 복음의 능력은 세상과 죄악들과 율법의 저주인 사탄의 결박인 아집의 완악함을 제거해버리고 속 사람을 영광의 자유에 이른 자만 누리는 양심의 자유를 되찾아 누리는 영혼이 되게 해주시는 것이니 이것이 죄와 세상과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나는 진정한 해방입니다.
내가 들(광야)로 그 집을 삼고- 들 나귀와 빠른 나귀가 거주하는 곳을 광야로 정했다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제어를 받지 않으려는 들짐승과 방불한 욥과 그 친구들은 들 짐승과 방불하다는 것입니다.
영이 죽은 옛사람들의 거처는 들짐승이 살아가는 세상이며 선악을 아는 지식으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고 자기가 대단한 사람으로 착각하며 광야의 왕으로 자처하는 모습을 지적하여 교만한 욥이 스스로 자신을 살피도록 들짐승 세계를 창조하여 경영하시는 전능자와 대비하신 것입니다(렘2:24).
소금 땅(히//메레하)- 소금의 땅인 영적 소돔과 애굽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은 소금 기둥으로 굳어버린 인간들을 상징하는데 소금은 좋은 것으로서 세상을 상징하는 바다의 물을 썩지 않도록 보존하여 바다의 생태계를 유지하는 역할을 합니다.
인간들이 육체로 살면서 쓰레기들을 배출하여 바다로 흘려보내면 넓고 큰 바다에서는 바람과 파도를 일으키지만 결국 뭍에서 흘러 내려온 쓰레기들을 정화하여 수분을 증발시켜 비로 땅에 내리게 하심으로 순환시켜서 창공과 땅과 바다의 생태계를 유지(維持)하게 합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세상의 영에 사로잡혀서 세상의 영으로 굳어지면 짠돌이, 짠순이가 되어 롯의 처와 같이 소돔 성에 대한 미련을 끊어내지 못하고 소금 기둥으로 굳어버릴 수가 있으므로 속세의 재물이나 부귀영화 등에 대한 염려와 미련을 과감하게 끊고 초월하는 영적 생명의 능력으로 자라서 세상의 영을 이겨야 합니다.
인간 세상의 물질문명과 문화의 발전은 산업화의 극대화로 인하여 오존층을 파괴하여 하늘도, 열기와 각종 쓰레기와 나무를 함부로 작벌함으로 땅도 황폐시키며 산업 폐기물과 생활용품 폐기물들을 함부로 강과 바다에 투기하여 파괴함으로 스스로 인간들은 자멸을 자초하고 있습니다.
들 나귀는 성읍에서 지껄이는 소리를 비웃나니- (히//하몬)은 성읍 군중들의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 즉 큰 소리로 말함, 떠들썩함, 소요를 일으킴을 의미하는데 욥과 그 친구들이 서로 치고받는 모습은 들 나귀에게서 배울 것이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비웃다(히//사하크)는 업신여기다, 냉소하다, 조소하다, 란 뜻으로 매우 경멸적인 조롱을 의미하니 본문은 들 나귀가 성읍에서 모여 살아가는 많은 군중이 서로가 잘난체 하며 치고받느라고 소란을 피우지만 들 나귀는 인간들과 같이 다투지도 않고 인간들의 교만한 모습을 전혀 관심하지 않고 평화와 자유를 누립니다.
이것은 들 나귀들이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들의 본성으로 살면서 잘난 체하는 인간들에게 예속당하는 삶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이니 들 나귀에게 부여된 자유로운 습성과 야수의 특성 때문인데 들 나귀가 누구의 제어나 다스림도 받기를 싫어하듯 육체가 된 인간들은 목이 곧고 제멋대로, 라는 뜻입니다.
나귀 치는 사람이(히//누가스) 지르는 소리는 그것에게 들리지 아니하며- 치는 사람은 가까이 끌다, 접근하다, 끌어내다, 라는 뜻의 (히//나가쉬)에서 파생한 용어로서 방목하는 가축을 모는 사람, 압제자, 간역자 등을 가리키는데 잘난 체하는 인간들을 우습게 보며 인간들에게 간섭받는 것을 거부한다는 뜻입니다.
본문에서는 길들어진 집짐승인 나귀와는 달리 들 나귀는 자신을 붙잡아 길들이려는 인간들의 외침을 아예 무시하고 오히려 사람의 접근을 거부한다는 뜻인데 사실은 하나님의 큰 음성 소리를 외면하는 욥과 그 친구들의 길들임을 받지 못한 상태를 빗대신 말씀입니다.
초장 언덕으로 두루 다니며 여러 가지 푸른 풀을 찾느니라.- 들 나귀들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비탈진 산과 들을 두루 헤매며 식물을 찾는 것은 악귀들과 같이 서로 잘난 체하며 치고받는 인간들을 무시하는 들 나귀와 욥과 그 친구들을 대비하신 이유는 지혜있고 지식이 있다고 자긍하는 인간들의 모습은 들 짐승만도 못하다는 뜻입니다.
문명화된 인간들의 긴섭을 무시하고 들판을 유유히 다니며 식물을 찾는 들 나귀의 삶은 창조주의 다스림과 보호를 거부하고 스스로 지혜 있고 지식을 갖추었다고 자긍하는 무지하고 완악한 욥과 그 친구들의 곤고한 삶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말씀입니다.
욥39:9-12- 들소가 어찌 기꺼이 너를 위하여 일하겠으며 네 외양간에 머물겠느냐? 10. 네가 능히 줄로 매어 들소가 이랑을 갈게 하겠느냐? 그것이 어찌 골짜기에서 너를 따라 써레를 끌겠느냐?
11. 그것이 힘이 세다고 네가 그것을 의지하겠느냐? 네 수고를 그것에게 맡기겠느냐? 12. 그것이 네 곡식을 집으로 실어 오며 네 타작마당에 곡식 모으기를 그것에게 의탁하겠느냐?-
들소(히//레엠)-외 뿔 들소, 혹은 무소를 예로 들어서 욥의 강한 아집과 육적인 기질을 지적하려는 말씀입니다. 욥이 자기의 소용대로 들소를 가사나 농사일을 위해서 길들여 사용할 수 없는데 들소가 힘이 세다 한들 인간의 농사일에 써레질을 시키지 못하고 밭일을 시켜서 소출을 얻도록 만들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로 육신에 속한 세력과 강한 기질을 가진 들소 같은 욥과 그 친구를 이대로는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쓸 수가 없다는 논지이니 하나님의 계획과 일들이 인간들이 원하는 대로 성취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강하게 주장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라는 비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욥을 당신의 일꾼으로 삼으려 하지만 그가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의 추수를 위해 영혼들을 그분의 타작마당에 모으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현재와 같이 육신의 세력과 강한 기질로 대항하는 한은 그를 필요대로 부릴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욥과 욥의 친구들이 나름의 지혜와 지식으로 서로 치고받는 모습을 보실 때는 차라리 들짐승들보다도 못하게 너무도 유치하고 어리석으며 헛되어 교만하기만 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려는 비유들입니다.
행9:9:10-19- 그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1.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12.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행26:10-18-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 투표를 하였고
11.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 12.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한과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13. 왕이여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14.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 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15.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16.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17.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욥은 결국 신약시대에 사울이라는 유대교인이 바울이라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한 주님의 종으로 쓰임을 받은 것과 같이 지금까지는 타고난 기질이 강하고 교만하여 무모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께 설득당하여 자신이 어떠한 짐승-인간이었는지를 깨달았으며 자신의 교만과 무모함을 중심으로 회개하니 주님의 받으심이 되었고 주님의 충성스런 종으로 쓰임을 받도록 정해진 그릇이었던 것입니다.
욥39:13-18- 타조는 즐거이 날개를 치나 학의 깃털과 날개 같겠느냐? 14. 그것이 알을 땅에 버려두어 흙에서 더워지게 하고 15. 발에 깨어질 것이나 들짐승에게 밟힐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16. 그 새끼에게 모질게 대함이 제 새끼가 아닌 것처럼 하며 그 고생한 것이 헛되게 될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나니 17. 이는 하나님이 지혜를 베풀지 아니하셨고 총명을 주지 아니함이라.
18. 그러나 그것이 몸을 떨쳐 뛰어갈 때에는 말과 그 위에 탄 자를 우습게 여기느니라.-
타조의 날개는 크고 웅장하나 학의 날개처럼 우아하고 아름답지는 못하며 알을 품고 새끼를 부화하는 과정에 있어서 애정 어린 관심과 세심하게 돌보는 어미의 본성으로서는 그 가치가 학의 날개에 미치지 못한다는 내용이니 학은 우아하게 비행할 수 있으나 타조는 날지 못하는 날개를 갖고 있습니다.
타조는 덩치도 크고 새 중의 으뜸이나 땅을 초월할 수 없으니 새의 기능이 없으나 학은 날개도 우아하고 새의 기능을 하여 땅을 초월하여 날아오를 수 있으니 욥과 그 친구들은 스스로를 학으로 생각하나 타조와 같이 우직하고 미련하다는 뜻입니다.
욥이 지혜와 지식이 없다고 얕보는 타조는 새끼를 부화시키는 것마저도 오로지 하나님의 섭리에 부탁하고 맡기는데 잘난체만 하는 욥과 그 친구들은 자신들을 학으로 착각하며 모든 일을 조물주께 맡기려 하지 않고 나대고 잘난체만 하려 한다는 지적입니다.
이런 비유는 욥이 모든 과부와 고아들과 가난한 자들을 돌보았다고 자랑하는 말을 지나치게 했기 때문에 네가 과부와 고아와 가난한 자들을 돌본 것은 지혜 없고 매정한 타조가 알을 품고 새끼를 돌보는 것과 같고 하나님의 품에서 돌봄을 받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가르치려는 비유 말씀입니다.
욥39:14- 그것이 알을 땅에 버려두어 흙에서 더워지게 하고- 버리다(히//아자브)는 놓다, 두다, 떠나다, 라는 뜻으로서 은밀한 장소에 알을 숨기지 않고 함부로 방치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인데 타조의 이런 습성은 인간들이 볼 때는 우직하지만 하나님은 믿음이 없는 욥과 그 친구들을 타조보다 못하다고 보시는 것입니다.
타조가 본능적으로 자기 알을 땅의 흙에 버려두어 흙에서 자연의 힘으로 부화시키는 속성이 있다는 것은 자칭 지혜와 지식이 있다고 자긍하는 인간들의 관점으로 본다면 우직하고 미련해 보이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우직하고 미련한 타조는 새끼를 돌보는 모성까지도 하나님께 의지하는 짐승이니 믿고 맡기지 않는 욥보다 훨씬 낫다는 것입니다.
1)흙에서 더워지게 하고- 1)흙 6083 티끌, 흙, 재, 먼지. 새 중에서 가장 덩치가 큰 타조는 땅의 흙에 알을 낳고 태양열로 부화시키고 평생을 티끌/흙을 초월하지 못하며 끝내 티끌에서 일생을 마치나 조물주 하나님은 타조의 생육과 일생 전체를 책임져주십니다.
15. 발에 깨어질 것이나 들짐승에게 밟힐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흙에 낳은 알을 자연의 힘인 태양열에 의지하여 부화시킬 정도로 그 새끼에게 무정하여(히//카솨흐) 강퍅하게 대하고 새끼들을 거칠게 다루는 타조의 습성을 지적하셨습니다.
타조가 다만 타고난 본성에 따라 새끼를 부화하고 돌보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는 피조물의 당연한 삶이며 교만한 욥은 영이 죽은 자로서 과부와 고아와 가난한 이들을 돌본 것을 자랑하나 주님의 영과 마음으로 그들을 돌보게 하신 것인데도 자기 자랑으로 삼는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려는 비유입니다.
자기의 알을 자신이 부화시키지도 못하는 타조의 우매한 삶은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지 않았기 때문인데 욥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주시지 않았을 때 불쌍한 사람들을 자기의 자식과 같이 돌본 것은 다만 인간적인 본능의 사랑인 육체의 일이었으니 회개한 욥이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제 욥이 하나님의 지혜를 얻어 복음의 제사장으로 하나님께 쓰임을 받게 될 때는 진리의 사랑으로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며 다른 짐승들의 어미가 새끼를 사랑하므로 자기를 희생하듯 진실한 사랑을 베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몸을 떨쳐 뛰어갈 때에는(히//마롬 타므리) 말과 그 위에 탄 자를 우습게 여기느니라.- 타조가 달릴 때 꼬리와 깃털을 돛처럼 높이 펼쳐 세우고 사냥꾼이나 다른 추적자로부터 몸을 피하려고 매우 빨리 도망치는 모습인 타조는 시속 70km의 속력으로 달릴 수 있다고 합니다.
몸집은 크나 날지 못함으로 사냥꾼을 피할 때는 땅에서 도망쳐야 하므로 하나님의 사자인 사탄을 피하거나 이기지 못하고 재난을 경험하면서도 자신이 얼마나 무능한지를 알지 못하는 욥의 모습입니다.
자칭 지혜와 지식을 구비한 의인이요 선인인 욥은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굽히려 하지 않고 자기의 의를 강하게 주장하며 성을 내며 힘을 다해 도망치되 나름대로는 자신이 가장 강하고 옳은 길을 달린다고 여기는 우매한 욥을 빗대신 말씀입니다.
욥39:19-25- 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네가 입혔느냐? 20. 네가 그것으로 메뚜기처럼 뛰게 하였느냐? 그 위엄스러운 콧소리가 두려우니라.
21. 그것이 골짜기에서 발굽질하고 힘 있음을 기뻐하며 앞으로 나아가서 군사들을 맞되 22. 두려움을 모르고 겁내지 아니하며 칼을 대할지라도 물러나지 아니하니
23. 그의 머리 위에서는 화살통과 빛나는 창과 투창이 번쩍이며 24. 땅을 삼킬 듯이 맹렬히 성내며 나팔 소리에 머물러서지 아니하고 25. 나팔 소리가 날 때마다 힝힝 울며 멀리서 싸움 냄새를 맡고 지휘관들의 호령과 외치는 소리를 듣느니라.-
본문에서는 전쟁용 군마의 용맹성을 비유로 욥이 마치 군마와 같이 무모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데 성경에서 말은 육체를 상징하며 하나님의 영이 떠난 육체는 군마와 같이 용맹하나 그 용맹의 무모함을 지적하여 하나님께 대항하는 욥의 용맹함이 무모하다는 것을 지적하십니다.
욥이 자신을 대단한 위용을 갖추어 그 무엇이라도 두려운 것이 없는 군마와 같이 용맹한 것은 많은 어둠의 세력인 천사들의 대장인 사탄을 부리시는 왕인 여호와께 무모하게 대항하는 짓으로서 전장에 나간 군마와 방불하다는 것입니다.
전장에서 용맹을 발하는 군마와 같이 무모한 욥의 모습을 지적하신 것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경영을 대항하면서 하나님이 떠난 짐승과 방불한 육체의 무지함과 아집에 따라 욥의 강한 기질을 드러낸 것을 깨닫고 자신의 무지와 강한 아집을 돌이키도록 빛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욥39:26-30- 매가 떠올라서 날개를 펼쳐 남쪽으로 향하는 것이 어찌 네 지혜로 말미암음이냐? 27. 독수리가 공중에 떠서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 어찌 네 명령을 따름이냐?
28. 그것이 낭떠러지에 집을 지으며 뾰족한 바위 끝이나 험준한 데 살며 29. 거기서 먹이를 살피나니 그 눈이 멀리 봄이며 30. 그 새끼들도 피를 빠나니 시체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있느니라.-
매와 독수리의 특성들을 예로 들어서 하나님의 특성을 가르쳐주려는 것인데 날카로운 눈과 높이 날면서 멀리 떨어져 있는 먹이를 보고 신속히 날아가서 공격하거나 높은 곳 절벽이나 바위틈에 집을 짓고 새끼를 쳐서 기를 때 훈련시키는 방법이나 사체(死體)를 찾아다니며 먹어 치우지만 사망의 독에 의한 해를 받지 않는 특성들은 하나님의 신성을 암시합니다.
독수리의 새끼들도 피가 있는 사체를 날로 먹는다는 표현에서 육신의 생명은 사망이요 사망을 삼키는 생명의 능력이 독수리에게 있듯이 하나님의 생명은 영적으로 죽은 자인 욥의 육에 속한 혼 생명을 삼키고 영적 생명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는 전능자임을 계시하십니다.
이와 같이 욥의 육적 자아가 이미 죽은 자이며 무모하게 전능하신 하나님께 대항하는 중임을 가르치려고 전장에서도 두려움을 모르고 무모하게 용감한 군마나 죽은 짐승의 사체(死體)와 피가 있는 날고기를 먹고도 생명을 유지하며 새끼를 낳아 기르는 독수리의 삶을 욥에게 말씀하신 이유는 욥이 전능하신 조물주께 굴복하라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