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t: 내가 소개하는 남한산성 등
우촌 선배님
요전에 실례했습니다.
점심 제가 대접해드리고.. 잠실엔가 가시는 곳 까지 수행해드렸어야 했는데...
제가 전에 써 두었던 글 두어편 보내 드립니다
남한산성에 관심 있으신 것 같아, 제가 "남사모" 15주년 기념호에 기고했던 글과
제주 서귀포에 얽힌 얘기를 내 나름대로 해석해서 쓴 글,
그리고 2500년전 중국 춘추시대 얘기 한편 등입니다.
언제 남한산성 가실 때 원하신다면, 그리고 미리 연락 주시면 저도 동행해드릴까 생각하는데
선배님 의향은 어떠신지요 ... 그럼 <첨부 파일 참조 >
묵호 이능재 드림
===================================================================================
|
내가 소개하는 남한산성(南漢山城) (墨湖 이능재)
**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즉 “남사모”를 알게 된지 몇 해 안되고, 모임참석도“가뭄에 콩 나듯”해서 잘 모르는 회원도 많은 내가 남한산성을 소개 하다니? 라고 자문해 보면서도 펜을 잡은 것은,
70 여년 전 이곳 광주 땅에 태어나서 60년 전부터 남한산성을 기회 있을 때마다 찾아왔고, 남한산성 안내를 부탁하는 지인들에게 자료 등을 제공하곤 했으므로 이를 정리해서 소개해 본다) **
남한산성에 접근하는 방법은 걸어서 올라가는 방법과 자동차를 타고 가는 방법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등산 겸해서 도보로 오르는 길은 서울 강동구 마천동, 성남시, 하남시, 광주시 등 주변 여러 방향의 주민들이 올라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등산로가 많이 있지만, 성남시 단대동 남한산성입구 유원지 쪽에서 오르는 길이 가장 짧고 쉬운 편이다. (이 길은 필자가 60년 전부터 가장 많이 이용하던 길이다)
자동차로 가는 길은 성남시 방향에서 약진로(旧 雩南路:약 4 Km)를 거쳐 남문 방향으로 가는 방법과, 광주시 광지원에서 동문으로 들어가는 길(약 8 Km)이 있는데, 약진로 방면은 길이 좁고 험한데다가 주말 등 휴일엔 교통체증도 심해서 대형버스로 가려면 광지원 방향으로 우회하는 게 좋다.
남한산성은 백제 시조 온조왕(溫祚王)의 사당 숭열전(崇烈殿), 병자호란 삼학사(三學士) 등의 위패를 모신 현절사(顯節祠) 등 호국유적이 있는 유서 깊은 성이다. 신라 文武王 때(AD672년) 흙으로 토성을 축성한 이래 일장성(日長城), 주장성(晝長城) 등으로 불려왔었는데, 조선시대 광해군13년(1621년)에 돌로 개축하기 시작, 仁祖 4년(1626년)에 준공하여 오늘날의 석성(石城)인 남한산성(南漢山城)이 된 것이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仁祖大王이 45일간 머물며 청나라에 항전하던 곳으로, 이후 이 고을의 수장(首長) 광주유수(廣州留守)는 오늘날의 차관급에 해당하는 당시의 실세가 부임하던 요직이었고, 고을 중심지 남한산성도 번창해 왔었는데, 한일합방 이후 일제(日帝)가 국난수호의 얼이 서려있는 이곳 산성마을을 쇠퇴시키고자 군청을 현재의 경안(京安)으로 옮기고, 그곳 주민들도 천호동 등 다른 지역으로 산개조치를 해서 역사적으로 수난이 겹친 곳이기도 하다.
남한산성의 성곽 길이는 11.76 km, 성곽 높이는 3 ~7.5 m 규모인데, 4개소의 문(門), 16개소의 암문(暗門), 4 개소의 장대(將臺), 5개소의 옹성(甕城), 2개소의 봉화대(烽火臺) 등이 요소요소에 설치되어 있다.
그중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는 수어장대(守禦將臺)는 망루 겸 지휘소로 사용되던 동서남북 4개의 장대(將臺) 가운데 하나로 원래 이름은 서장대(西將臺)였다.
즉 성곽 서쪽에 위치해서 서장대(西將臺)였던 것이다. 그런데 임금이 임시로 머물던 행궁(行宮) 바로 뒷산인 청량산(453 m) 정상에 있고, 임금의 경호실장인 수어사(守禦使)의 지휘부가 있던 곳이므로 수어장대(守禦將臺) 라 한 것이다.
원래 다른 장대(將臺)와 마찬가지로 단층(單層)이었는데, 여주 영능(英陵) 참배 길에 들렀던 영조대왕이 2층으로 개축하게 하고 병자호란 등의 치욕을 잊지 말자는 뜻으로 ‘무망루(無忘樓)’라는 어필(御筆)을 하사해서 걸어놓도록 했으므로 더욱 유명하게 되었다.
근래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되면서 관심이 더욱 높아지고 있는 이곳 남한산성은 구불구불한 성곽을 따라 백년노송(百年老松) 등이 우거진 멋진 산책코스가 다양하다.
비밀통로이던 암문(暗門)을 통해 성 안팎을 드나들며 걸어보는 옛 성의 모습. 수어장대 근처 성첩(城堞) 아래로 내려다보는 한강과 서울 전경, 동문 밖 봄 벚꽃천지, 겨울 눈꽃터널, 행궁 주변 소나무 숲길 등 산성팔경(山城八景)을 골고루 보자면 사시사철 끝없이 가봐야 한다.
남한산성과는 불가분(不可分)의 관계인 병자호란(丙子胡亂,1636~1637)은, 만주 땅에서 일어나 후금(後金)이란 나라를 세운 ‘누루하치’가 인조(仁祖) 5년(1627년)에 쳐들어와 정묘호란(丁卯胡亂)을 일으켜 형제관계를 맺고 돌아 갔었는데,
그 9 년 후 국호를 청(淸)으로 고쳐 황제 자리에 오른 청태종(淸太宗)이 우리나라에게 신하관계를 요구, 그때까지 명(明)나라를 종주국으로 삼던 우리 조정이 이를 거부하자 1636년(丙子年, 인조14년)에 친히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남침해 온 것이 병자호란인 것이다.
청(淸)나라 대군이 폭풍처럼 쳐내려오자 왕자와 비빈, 대신가족 등을 먼저 강화도로 피난시키고 왕과 대신 일행도 따라 가려다가 적군에게 길을 차단 당하여 남한산성으로 피난하게 된 것인데, 음력 12월14일 한겨울에 닥친 일이다.
그런데 남한산성도 포위당하여 구원병도 올수 없고 식량도 떨어져 가는데다가 강화도가 이미 함락되어 왕자 비빈(妃嬪) 등이 포로로 잡혀가자,
최명길(崔鳴吉) 등 주화파(主和派)의 주장에 따라 다음 해인 1월 30일 엄동설한에 임금(仁祖)이 淸 태종이 머물던 한강변 삼전도(三田渡)까지 걸어 내려가서
세 번 무릎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황제에 대한 “삼궤구고(三跪九叩)의 예(禮)”를 하며 항복한 것이다.
당시 청(淸)나라와 화친해서 국가사직의 보존을 주장한 주화파를 매국노라 하면서 죽을 때까지 항전할 것을 주장한 척화파(斥和派) 대표 3명(三學士: 洪翼漢, 尹集, 吳達濟)은 淸의 수도 심양(瀋陽)으로 끌려가 희생을 당했다.
척화파의 수장(首長)으로 지목되던 홍익한은 임지였던 평양에서 잡혀갔고, 젊은 관리이던 윤집, 오달제는 척화파 대표로 끌려갈 것을 자원, 김상헌(金尙憲) 등 많은 척화파 중신들을 대신해서 희생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장원급제 출신으로 20대 후반의 촉망받던 관리이던 오달제(吳達濟)는 부인 남씨(南氏)가 첫아이를 임신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 순절(殉節)을 더욱 애처롭게 생각하고 있다.
** 忠烈公 오달제(吳達濟:1609-1637)의 詩 : <瀋獄寄內南氏:심양감옥에서 아내 남씨에게 보냄 > 琴瑟因情重 相逢未二朞 / 금슬인정중 상봉미이기 / 정 깊어 금슬 좋았었죠, 만난지 두해도 못되었는데.
今成萬里別 虛負百年期 / 금성만리별 허부백년기 / 지금 만리밖 헤어져있으니, 백년해로기약 허망하구려.
地闊書難寄 山長夢亦遲 / 지활서난기 산장몽역지 / 땅 넓어 편지도 어렵고, 산길 멀어 꿈길도 더디다오.
吾生未可卜 須護腹中兒 / 오생미가복 수호복중아 / 내 목숨 어찌될지 모르니, 뱃속 아이 잘 보호하시오.
삼학사(三學士)가 순국(殉國) 당한 후 그 시신 수습도 허락되지 않아서 오달제의 하인이 公의 허리띠와 주머니 등 유물을 수습해 와서 남씨 부인에게 전했고, 부인은 그 유품을 평생 지니고 있었는데,
公의 손자(吳慶元)가 선산인 용인시 모현면 오산리에 부인의 묘를 쓰고 그 위쪽에 公의 유품인 허리띠와 주머니를 묻은 대낭묘(帶囊墓) 등을 건립하였다.
필자는 2009.7.26. <남사모> 회원 일행과 함께 용인문화원의 초청, 안내를 받아 오달제 선생의 묘 등을 참배했었다.
남한산성에는 또한 남다른 삶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한 책 <이렇게 사는 인생(박재곤 저)> 등에도 소개된 “별난 삶”의 주인공인 전보삼(全寶三) 박사가 사재를 털어서 독립운동가 만해 한용운(萬海韓龍雲:1879~1944) 선생에 관한 모든 자료를 수집,
전시해 놓고 있는 <만해기념관(萬海記念館)>도 있어서, 애국 호국성지로서의 의미를 더해주고 있으며,
요즘 같이 이사를 밥 먹듯 하는 세상에 600년간 남한산성에서 대대로 살아오며 “산성 맛” 을 이어오고 있는 남한산성 600 년 토박이 집 <남문관(대표 이종화)> 등 맛 집도 많아서 이 지역 여행객들에게 즐거움을 더해주고 있다. (墨湖, 120520)
-------------------------------------------------
(蛇足)
1) 역사에서 가정(假定)이란 무의미한 것이라지만, 당시 최명길 등 주화파의 의견이 배척되고 척화파 주장대로 淸나라와 끝까지 항전했다면 어찌되었을까? 생각해 봤다.
우리 선조들도 그 때 살아남지 못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 때 조선이란 나라는 없어지고 지금 쯤 티베트, 내몽고, 연변처럼 중국의 자치주(自治區) 정도로 전락되어 있지나 않을까? 그럼 오늘날의 한국인, 우리들도 태어날 수도 존재할 수도 없었을지 모른다.
당시 결사항전을 주장한 삼학사는 충신으로 받들며 사당에 모셔져 있는데, 국가와 백성들의 백년대계 앞날을 걱정하며 화친을 주장, 왕에게 항복을 권유했던 최명길 등에 대해서는 국치(國恥)를 받아들인 매국노(賣國奴)처럼 취급당하는 현상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이 나라는 예나 지금이나 뒷일은 생각 않고 결사반대 데모하는 사람들만 예우 받는 풍토 같은데, 이는 필자만의 생각일까?
첫댓글 세 번 무릎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황제에 대한 “삼궤구고(三跪九叩)의 예(禮)”를
하며 항복한 아!! 이 치욕의 역사여!! - 이제는 우리 역사에 다시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