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세력의 권력장악 고집이 국가 혼란하게 해
나라의 권력을 차지하려 각 집단세력이 싸우는 것은 인류의 오랜 역사이지만 오늘날에는 선거제도가 있어서 국민이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으면서까지 세력투쟁에 참여할 필요는 없어야 정상이다. 그런데도 한국사회가 계속해서 혼란과 시련을 겪고 있는 것은 정상적인 선거를 통해서는 집권할 수 없는 세력이 한사코 나라를 접수하여 그들의 취향대로 나라를 지배하고자 하는 데에 있다. 그들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것은 기질상 근면성실과는 거리가 있어 자유경쟁을 통한 신분개척이 어려운 특성상 권력을 얻어 利權을 독점한 뒤 능력에 따른 자유경쟁을 봉쇄하려는 의도일 뿐이다.
知彼知己여야 百戰百勝이나 우파는 좌파를 모르고 좌파는 우파를 알았다
지피지기여야 백전백승인데 대한민국이 그들의 정체를 모르고 있을 동안에 그들은 자신들과 대한민국의 정체를 잘 알면서 이에 맞게 수십 년 투쟁노선을 정해 대한민국을 잠식해 왔다. 대한민국의 가치는 자유민주와 시장경제라는 當爲 외에도 우리 민족이 수천 년 이 땅에 있어야 했던 이유와 함께 한다.
대한민국의 위기는 좌파니 우파니 하는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국민과 다른 정체성을 가진 세력이 그들의 뜻대로 이 나라를 바꾸고 있는 것이다. 경제정책 문제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성향에 맞지 않는 각종 문화제도에 의한 지배는 어느 사이 우리 국민의 행복도를 떨어뜨리고 우리 국가의 동력을 약화하고 있다.
오랑캐의 특징 좌파에 승계
6·25 때만 해도 우리는 그들을 오랑캐라 불렀다. 하지만 그들은 은근히 이 말을 우리나라에서 사라지게 했다. 그들의 정체를 나타내는 특징은 여러 면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들은 우방인 美日과의 관계를 멀리하고 중국에 예속되고자 하고 있다. 본래 두만강 유역 등을 중심으로 중국의 치하에서 살던 소수민족이었으니 당연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어찌해서라도 우리 국민이 일본과 척을 지고 살도록 칠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일본을 향한 증오심을 부추기고 있다. 재벌개혁이라는 것도 일제시대와의 연속성 상에서 일어난 우리 자본체계를 붕괴시키려는 목적뿐이다.
그들은 중국과 가까이 하고자 하나 저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한글만을 우리 국어로 하려 한다. 김대중 때에는 그 전까지 당당히 漢字로 써 있던 중국 내 大韓民國大使館의 문패를 한글로 바꾸고 노무현 때는 한글만을 국어로 하는 국어기본법을 못 박고 열린 우리당은 국회 명패를 한글로 했다. 세종의 여진족 병합 이전에는 우리 역사에 포함되지 않았던 그들이니 우리가 이천 년 써왔던 漢字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우리 글이 아닌 것이다.
그들이 검인정체제하에서 사실상 내용을 통일시켜 보급하고자 하는 역사교과서에서도 그들은 스스로 정체성을 알고 있음이 드러난다. 그들은 중고대사를 대폭 축소했는데 고구려와 발해시대에는 하층계급인 말갈족으로 있었고 고려시대에도 국경 밖의 여진족으로 있었던 그들이니 우리의 중고대사는 그들의 역사가 아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에는 총력대응했으나 초등학교 한자교육은 직접 반대하지 못하여 탄핵으로 중지시키는 좌파
박근혜 정부의 교육정책에는 두 가지 중요한 것이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초등학교 한자교육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야당이 총력전으로 정치이슈화한 바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초등학교 한자교육은 일부단체와 언론에만 맡기고 정치권은 일언반구 한 마디도 없었다. 이것은 초등학교 한자교육이 여진 오랑캐에 뿌리를 두고 있는 그들로서는 치명적인 것이 되어 반대하고자 하나 국민여론상으로 볼 때 도저히 정치적으로 불리하여 아무 말 못하고 냉가슴을 앓다가 결국 탄핵이라는 방법 말고는 이 정책의 중단을 위한 방법이 없었던 것이었다.
우리의 문화성향 바꾸기 위해 도로명주소 강요하는 좌파
지금 우리 국민 다수가 갸우뚱하고 있는 도로명 주소 강요정책도 좌파정권에서 비롯되었다. 이미 주소의 전산화로 길 찾기에 전혀 불편이 없는데도 그들은 전통 漢字地名을 되도록 말살하려는 목적으로 강행했다. 배오개길 마른내길 참빛내길… 기존의 주소 이름보다 발음이 편하지 않다. 또한 조선시대 야인으로 벌판을 횃불 들고 오갔던 그들은 定住民 방식이라는 地番住所에서 遊牧民 방식이라는 도로명 주소로 우리의 문화를 바꾸어 그들의 세력 확장의 바탕을 삼고자 했다. 이재명 시장의 성남 등에서 도로명 주소 홍보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노무현 정부 때는 우리 고유의 넓이 단위인 평수도 쓰지 못하게 하는 탄압이 있었다. 제곱미터라는 긴 발음을 일상화하라는 강요는 우리 민족에게 익숙한 언어체계와는 이질적이다.
조선족을 북한인처럼 인식하여 살인마도 적극 변호
우리 국경 밖 벌판에 애착이 있던 그들이니 그들의 대표주자인 문재인 씨가 중국 조선족에 깊은 동질감을 가진 나머지 1996년 열한 명의 대한민국 국민 등을 잔인하게 살해한 페스카마호의 조선족 살인마들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극력 변호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당시 중국과의 교류가 시작되자 국내 좌파세력은 공산주의 국가 내의 동포인 조선족을 북한 사람을 만난 듯이 우호적으로 보았다. 중국 조선족은 자신들을 중국인으로 인식한다는 사실이 알려진 건 그 이후였다.
좌파 오랑캐는 고대 북방의 우리민족 뿌리와는 다르다
좌파오랑캐설을 말하며 그들의 뿌리가 북방이라고 하면 桓檀古記를 비롯 우리의 북방 고대사자료를 살리고자 하는 재야사학계의 주장과는 어울리지 않게 보인다. 실제로 해당 학계는 대체로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이를 理解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지역만을 보는 것보다 높은 관점을 가져야한다.
고구려부터 우리 민족의 역사를 생각해보아도 고구려의 지배층은 광개토대왕비 등에서 보듯 漢字를 쓰는 東亞문명족이었다. 발해 또한 漢字를 쓰는 민족의 나라이다. 고구려와 발해가 멸망하고 많은 遺民들이 南下했다. 그리하여 통일신라 이후 다시 고려를 세울 수 있었다.
문명민족의 南下는 중세 이후 東亞에 공통현상
중세 이후 문명을 가진 민족들이 남하하는 것은 동아시아의 공통된 현상이다. 중국에서도 漢나라 시대까지는 만리장성이 훨씬 북쪽에 있었으나 이후 북방 비한자문화권 민족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그들의 약탈을 피해 기존의 문명민족이 남쪽으로 피난하곤 하여 남북조시대 이후는 양자강 남쪽이 경제의 중심지가 되었다.
발해 이후 만주지역은 遼나라와 金나라 등 비한자문화권 國家가 세워졌다. 이들 民族國家가 망하거나 통제력이 약하면 酋長(추장)이 다스리는 원시적 野人 사회가 되었는데 이들은 근세 조선건국을 전후로 한반도와 많은 교류를 했다.
조선의 건국에 여진족은 많은 기여를 하였다. 이성계가 여진족이라는 설도 있으나 전주지방에서 함경도 지역으로 망명을 가서 그곳의 여진족을 다스려 왔다는 기록을 믿어도 다를 것은 없다. 여하튼 이성계의 전기에 나오는 퉁지란 등을 비롯해 여진족이 조선건국에 기여한 것은 분명하다.
조선건국에 기여하고도 귀족대접 받지 못한 여진족의 恨
세종은 이 공로를 잊지 않고 사대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여진족을 통합하였다. 이로 인해 조선시대 초기에는 고려시대와는 달리 북방 접경지역과의 큰 분쟁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평화가 찾아오자 무력에 강한 족속들의 필요가 없어졌다. 그들은 세금면제 이외에는 혜택이 없었다. 중국의 원나라와 청나라에서 몽고족과 만주족이 백성으로부터 정해진 상납을 받는 등 최고귀족계급으로서 많은 혜택을 누린 것에 비교할 때 형편없는 대우를 받았다.
결국 정착하여 생산에 종사하기에 서툰 그들은 유랑하며 천민이 되었다. 천민은 세금을 내지 않았으며 부역에서 면제되었는데 이것은 천민을 불쌍히 여겨 배려한 것이 아니다. '세금을 안내도 되는 배려를 받은 집단'이 천민으로 전락한 것이다. 조선은 건국에 기여한 그들을 토사구팽한 것이었다.
오늘날까지도 그 원한이 풀리지 않았기에 한반도에는 갈등이 끊이지 않는다. 여진족 후예의 입장에서는 중국의 원나라와 청나라처럼 사대부 계층을 누르고 비한자 문화권 민족문화가 다스리는 새로운 조선을 다시 세우고 싶을 것이다.
大韓民國이 아닌 新朝鮮의 건국 이미 진행되고 있어
현재 사실상 새로운 조선을 세우는 움직임은 상당히 진척되어 있다. 세종대왕은 <漢陽五百年歌>의 역대 국왕 서술에서만 보아도 그저 평온한 집권기를 보낸 보통군주였다. 그러나 현재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주로 숭앙됨은 물론 대한민국까지 포함하는 개국군주와 같이 추앙을 받고 있다. 한국내의 적지 않은 영혼은 고종의 대한제국에서 이승만의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국가보다는 세종대왕 때부터 이어지는 국가를 새로 건설하는 데 많은 미련을 두고 있다. 미국의 워싱턴시와 마찬가지로 한국을 조선시대의 연장으로 만드는 목적으로 세종시를 건립하고 광화문 이순신 장군상 뒤에 부자연스럽게 세종대왕상을 덧붙이거나 하는 것이다.
좌파 오랑캐 紀元說을 뒷받침하는 공통특징 정리
그러면 현재의 좌파의 기원이 왜 세종 때 병합한 兀良哈(올량합=>오랑캐) 등의 여진족으로 추정되는 것인가. 물론 간간이 산발적으로 좌파세력이 그들을 우호적으로 부르는 것을 보아왔다. 필자의 대학시절 한 운동권 친구는 학교시기에도 ‘여진족 등이 한국인’이라는 발언을 했고 이후 그가 한 유력 진보 시사 잡지의 편집장을 하였을 때도 정부의 ‘對美편향외교’를 비판하면서 조선 광해군이 (여진족의 국가인)청나라에 가까워지려는 양다리 외교를 하였음을 본받아 중국에 가까워지는 외교를 하라고 주장하였다. 기타 오래된 좌파의 민족의식고취 관련 책에서는 유달리 우리 민족은 몽고족이라고 단정하는 것을 보아도 좌파의 원류는 조선시대까지 우리 국가사회의 주류를 차지하지 못했던 비한자 문화권 북방인 계열임을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 좌파의 현재에도 나타나는 특징을 살피면 역시 중세이후 북방인의 성향을 잘 보여준다.
1. 불빛을 들고 돌아다니기를 좋아한다 – 본래 북방의 넓은 지역을 다니며 살아왔던 그들이니 벌판을 횃불을 들고 오가는 것은 거의 일상사가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성향이 오늘날까지 전수되어 그들은 기회만 오면 촛불시위를 하러 거리에 나옴은 물론 할 수만 있으면 횃불로 밤하늘을 덮으며 시위하기를 원한다. 설령 나라가 탈 없이 운영되어 아무리 살기 좋은 평화세상이 와도 그들은 이러한 행사를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2. 꽹가리 등을 치며 요란하게 놀기를 좋아한다 – 조선에 편입된 후 평화시대가 오자 마땅히 할 일이 없던 그들은 유랑극단 등의 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실제로 좌파단체에서 마당놀이와 路祭 등 야외에서의 행사문화가 발달한 것을 볼 수 있다.
3. 親中이면서 한글전용 지향 – 그들은 세종의 한글반포와 함께 조선에 편입했다. 그러므로 漢字만을 쓰던 이천 년의 한반도 역사는 그들의 역사가 아니다. 편입되기 전 북방에서의 그들의 문화도 漢字文化가 아니었으니 그들이 漢字를 ‘우리 글’로 여기지 않음은 당연하다. 게다가 그들이 한반도 내에서 세력을 강화하려면 기존문화의 열세를 극복하여야 하므로 二千年의 漢字文化를 폐하고 한반도의 모든 사람이 새로이 동일한 조건에서 ‘재출발’ 하여야 유리하다. 따라서 그들은 우리나라를 漢字를 사용 않는 국가로 만들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한다.
중국이란 국가의 非常한 규모와 영향력으로 볼 때 친중 행보를 걷는 것은 곧 중국의 소수민족과 크게 다르지 않은 국가사회를 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나라를 중국에 완전 병합시키려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런 경우 지배층의 특권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희망은 중국의 영향권에 있되 漢字를 쓰지 않고 ‘독자적인 글자’인 한글만을 쓰는 것으로 중국과 구분되는 나라가 되고 싶어 한다.
그러나 단지 문자를 다르게 쓴다고 독립이 보장되지 않음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티벳과 위구르 등은 漢字를 쓰지 않지만 중국에 철저히 속해있는 것이다. 독립국가의 문화요건은 인접국가와 문자 등이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인류가 이룬 현재의 최상급 문명을 수용할 수 있는 수준이 되는가에 있다. 아프리카의 마사이 족 등 여러 원시문명공동체가 스스로 국가체제를 이루지는 못하는 것을 볼 때 고급 학문표기가 불가능한 한글문화로 한정된 공동체는 점차 민족 집단으로 변화될 것이고 구성원은 大處로 나가 出世하려면 반드시 외부의 문화를 배워야 하는 형편이 된다. 중국의 조선족이 자체 문화는 한글전용을 하면서 중국사회의 주류에 끼려면 반드시 타문화인 중국어를 배워야 하는 것처럼 좌파지배사회의 한국은 앞으로도 국가지도층은 外國文化習得者에 한정될 것이다.
4. 反日反美 - 좌파의 반일과 반미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이것은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한다. 본래 한반도 북부의 대륙접경지역에서 지내온 그들이었으니 한반도의 다른 집단들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대륙과의 교류가 원활하고 기질에 맞다. 그러므로 다른 한국인들이 미국이나 일본과의 교류가 제한되어 한반도에 묶여 살게 된다면 그들로서는 ‘넓은 세상’과의 교류에 있어서 우위를 점하게 되고 한반도 지배층의 지위를 얻고 유지하기에 유리할 것이다. 그러므로 할 수 있는 한 일본과 미국에 對한 좋지 않은 인식을 한국인 全般에 보급하여 교류를 제한하려는 것이다.
5. 古代史의 대폭축소 - 좌파가 사실상 내용을 통일시켜 보급하고자 하는 역사교과서를 보면 전체의 채 三分의 一이 되기도 일제시대의 ‘참상’ 이야기가 나온다. 북한의 역사교과서와 마찬가지로 중고대사를 대폭 축소한 것은 조선시대에 우리 민족에 편입한 그들에게는 그 이전의 역사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조선시대도 기대하던 상류계층의 지위를 얻지 못하고 천민으로 전락한 시기였으니 그다지 자세히 서술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일제시대에 들어와서 대폭적으로 상세한 서술을 하는 것은 명목상으로는 나라를 빼앗긴 痛恨의 시기이지만 실상 오백 년간 그들을 ‘억눌러’온 조선 양반주류가 패망하였으니 그들로서는 숨통이 트이는 것이었다. 게다가 ‘당신들이 권력을 잡아서 나라가 망했으니 책임지라’는 의미도 많이 담을 수 있었다. 마치 중국에서도 만주족의 청나라가 근대에 서양세력에 패망한 것을 漢族 측이 ‘우리가 나라를 다스렸다면 그렇지 않았을 텐데’ 하는 것과도 비슷한 것이다.
한편 문학에서 1920년 일제의 문화정책 하에서 한글전용 문학을 육성함으로써 그들은 일찍이 한반도의 문화를 주도할 기반을 얻게 되는데 이는 다음에 다루기로 한다,
6. 성실근면과는 거리 - 본래 벌판을 ‘자유로이’ 다니며 생산보다는 약탈에 비중을 두었던 민족이니 만큼 그들은 어느 한 생산적인 일에 성실하고 근면하게 몰두하기는 어렵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자유 시장경제를 혐오하고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내걸어 계획경제하에서 혜택을 보려 하지만 가장 선호되는 것은 경제체제와는 관계없이 자신들이 국가의 지원을 받는 계층으로 자리 잡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들은 비록 적성이나 능력이 확신되지 않아도 문화예술 혹은 정치 분야로 가려 한다. 보수적인 사람은 대개 우선 일반적인 일에 종사하려 하다 도저히 자신의 재능과 열정이 그저 안주할 수 없을 경우에 문화예술계를 지망하지만 그들은 적성을 살피기 이전에 문화예술 관련 직종으로 생업을 삼으려 한다. 문제가 되었던 합성누드화 전시 사건을 보면 좌파측에서 예술인의 문턱이 얼마나 낮은가를 실감한다. 컴퓨터를 잘 다룬다면 누구나 한 번쯤 해보았을 ‘포토샵 짜깁기’만 가지고도 좌파사회에서는 예술인이라 칭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른바 문화계 블랙리스트의 사건화와 같이, 이제까지 국가지원금을 주다가 새로이 덜 주거나 안주는 것이 무슨 큰 탄압이며 범죄로 인식하는 그들의 사고방식은, 자아실현적인 창작의 자유를 가지는 자들이 그 대신 감수해야 할 경제적 불안정도 거부하고 저들의 예술 활동을 무슨 확실한 생활보장이 되어야 하는 직업으로만 여기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좌파 빨갱이 공산주의자 등 용어의 부정확성
우리 사회에 약간의 구실만 생겨도 수개월을 계속되고 하는 촛불시위. 그곳의 참가자들에게 좌파 빨갱이 공산주의자 등의 표현을 하면 그들은 화를 낸다. 시대착오적인 색깔론이라는 것이다.
시대적인 문제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과연 그들의 主義主張을 살펴보면 사회약자 권익옹호를 우선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어 색깔론적 평가를 하기에는 적합지 않아 보인다.
이제 그보다는 동양사에서 천년을 넘게 정착농경민과 갈등을 빚어온 유목민에서 그들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 옳다고 할 것이다. 이미 우리는 지난 현대사에서 ‘북쪽의 침략자’들을 오랑캐라 지칭하고 있었다.
소수 유목민의 활동력으로 다수 농경민을 지배
유목민의 특징은 북쪽의 거친 환경에서 다진 전투력을 바탕으로 농경지방의 富를 갈취해가는 것이 하나이고 북한을 통하여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농경민보다 현저한 수적 열세를 그들의 왕성한 활동력으로 극복하며 오히려 다수를 지배하곤 하는 것이다.
촛불시위대는 그러한 특징을 재현하여 보여준다. 수개월을 가까이 주말마다 모여 왕성한 활동을 하는 것은 이동성이 강한 유목민기질이 아니면 어려운 일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한국사회에서 그들의 절대수효보다 현저히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시위혁명으로 정치권력을 얻을 수 있는 사회라면 이러한 것이 계속 큰 영향력을 발휘하겠으나 현대는 민주선거제도가 정착되어 활동적인 유목민의 후예나 조용한 농경민의 후예나 같은 한 표로 계산되니 현대사회에서 유목민 후예의 집권은 매우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선거제도하에서는 소수의 집권 불가능하나 ‘漢奸’의 도움으로 집권
사실 지난 시절에도 소수의 유목민은 중국식으로는 漢奸이라 칭하는 농경민 출신의 附逆者를 집권에 필요로 했었다. 현대에 와서는 다른 형태로 이런 결과가 나타나고 있다.
지난 1997년 우리 국민은 여당에 불만이 있어 정권교체를 고려했는데 김대중 후보의 정치적 색깔에 의심이 나서 주저하던 차였다. 그러다 ‘원조보수’ 김종필이 ‘보증’을 해주는 통에 국민은 김대중 후보를 ‘마음 놓고’ 선출했다. 그러나 수년 뒤의 결과는 북한의 핵개발이었다.
그리고 2016년 국민은 여당에 실망스러운 중에 더불어민주당의 노선에도 신뢰감이 덜했으나 역시 ‘보수인사’인 김종인이 ‘보증’해주는 결과로 더불어민주당을 제일당으로 올려주었다. 그러다 수개월 후 엄청난 국가적 혼란을 불러온 것이다.
현재의 좌우진영이 서로 달라도 함께 도와줄 운명의 사람들
이네 세력을 민족적 관점으로 분류할 때 더욱 주목되는 것은 굳이 현재 드러나는 정치세력으로 구분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새누리당의 오세훈 前시장이나 나경원 의원 같은 인물은 본래 그들의 세력권에 속한 자로서 탄생 이전의 생애설계에서는 박원순 시장과 함께 그들
세력의 확장을 위하여 협의했을 가능성이 짙다. 오세훈 前시장이 광화문에 세종상을 세운 것은 조선에 합병된 유목민족인 여진족의 입장강화에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중도사퇴로 박원순 시장의 입성을 도와주었으며 나경원 의원은 서울시장 낙선과 탄핵찬성 등 역시 다른 방식으로 그들 세력의 확장에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뒤의 가장 큰 인물인 이명박 대통령에 관해서는 다음에 다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