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14) - 2023 .10. 31(화) |
서울대교구 25개 성지 중 지난 번 11차 때 15곳을 다녀왔다. 남은 10곳을 이번에 간다. 11차 때 15곳이라 하더라도 상당수는 터만 남은 곳이기에 15곳이 가능했지만 이번은 한국순교자 103위 시성터를 제외하고는 단시간에 순례할 성지는 없다. 거기다 삼성산 성지는 서울역에서 왕복 2시간 정도를 가야 한단다. 따라서 남은 10곳 성지를 이번에 다 마치기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안내자 신 모세 형제는 서울역에 8시까지만 도착하면 전체 순례가 가능하다고 하여 일단 따르기로 하였다.
삼성산 성지 - 삼성산(三聖山)에 삼성(三聖)이 잠들다 |
삼성산 성지의 주소지는 서울시 관악구 신림동 산54-14. 도로명 주소로는 서울시 관악구 호암로 454-16. 이 성지를 관할하는 삼성동 성당은 여기서 떨어진 관악구 호암로 545번지에 따로 있다. 따라서 삼성산 성지 안에 삼성동 성당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삼성산 성지의 내력
삼성산 성지는 1839년 기해박해 시 새남터에서 순교한 프랑스 선교사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세 분의 순교 성인이 묻힌 곳이다. 보다 임밀하게 말하면 세 성인이 1843년 여기에 묻혔다가 1901년 명동성당으로 유해를 옮겨 가기까지 58년 간 묻혔던 곳이다. 유해를 옮겨갔음에도 성지의 의미는 퇴색하지 않고 지금도 많은 교우들이 이 성지를 찾는다.
한국천주교회는 선교사의 도움 없이 교우들이 스스로 신앙을 받아들여 싹을 틔운 특이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사제의 사목이 없는 교회는 더 이상의 발전도 유지도 어려운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당시 북경 교구에 선교사의 파견을 강력이 요청하였다. 이 결과 그 첫 결실이 중국인 주문모 신부의 입국이었다. 주문모 신부가 1895년에 들어와서 서울 북촌지역 가회동 성당을 중심으로 왕성한 사목을 하다가 6년 만인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했다. 주문모 신부의 순교 이후 조선 교회는 조직도 목자도 없는 양떼였다.
이런 상태로 30년 간 이어지다가 1831년에 우리나라 교회는 중국 북경 교구에서 독립해 조선 교구로 설정이 되고, 드디어 1836년에 프랑스 선교사 모방 신부가, 1837년에 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주교가 입국함으로써 조선의 교우들은 한 세대 만에 목자를 맞이하게 되었다.
신자들의 복음의 갈증을 풀어주기 위해 이들 세 성직자는 불철주야 사목활동을 했다. 박해 중에는 외국 선교사를 찾기에 혈안이라 얼굴을 내놓을 수 없었기에 상복(喪服)으로 얼굴을 가리고 각 지방에 흩어져 있는 교우들을 찾아 밤낮으로 험한 산길을 걸으며 복음 전파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불과 1년 사이에 신자 수가 9천 명으로 늘어났다.
특히 모방 신부는 내국인 사제 양성을 위해 소년 김대건(안드레아), 최양업(토마스), 최방제(프란치스코)를 선발하여 페낭 신학교에 유학을 조선천주교회에 큰 업적을 세웠다.
그러나 선교사의 활동이 활발하고 교우들이 늘어날수록 박해는 가중되었다. 더욱이 외국인 선교사의 입국이 사실로 드러나자 조정에서는 이들을 체포하기 위한 신자들에 대한 탄압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교우들의 희생이 늘어나자 보다 못한 앵베르 주교는 수원의 한 교우집에 피신하던 중 모방, 샤스탕 두 신부를 불러 중국으로 피신할 것을 권하였다. 하지만 피신 자체도 어려운 상황에 부딪치자 결국 앵베르 주교는 화(禍)가 여러 교우들에게 미칠 것을 염려해 스스로 잡히는 몸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러면서 두 신부에게도 자헌치명(自獻致命), 곧 스스로 관헌에 나아가 순교하기를 권했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일어난 것이 !939년 기해박해였다. 세 신부는 결국 새남터에서 망나니의 칼끝에 순교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 때 앵베르 주교의 나이 43세,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35세로 동갑이었다.
이들의 시신은 군문효수형(軍門梟首刑)을 당한 터라 새남터 모래밭에 버려져 있었는데 몇 명의 교우가 시신을 몰래 가져가려다가 실패한다. 그후 20여일이 지난 뒤 7-8명의 교우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다시 찾아와서 감시의 눈을 피해 유해를 거두는 데 성공하였다. 그들은 유해를 큰 궤에 넣어 노고산(老姑山, 현 노고산 성지)에 임시로 매장했다.
4년 뒤 노고산에 이장했던 교우 중 하나인 박 바오로는 더 안전한 곳으로 모시기 위해 가문의 선산인 관악산 줄기 삼성산에 유해를 이장했다. 그리고 그는 이 사실을 아들인 박순집에게 알려 주고 그 자신도 일가들과 함께 1868년 3월 병인박해의 와중에서 절두산에서 순교했다.
뒷날 신앙의 자유를 얻은 이후 박순집은 이 묘소를 증언하여 1901년 유해를 명동 성당 지하묘소로 옮기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1866년 3월 새남터에서 순교한 베르뇌 주교를 비롯해 브르트니에르, 볼리외, 도리 신부 등의 시신을 찾아내어 용산 왜고개(현 왜고개 성지)에 이장을 하기도 했다.
박순집의 가문은 박해기간 16명의 순교자를 배출했고, 박순집의 막내딸 박 사베리오(1872-1966)는 16세 때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에 들어가 우리나라 최초의 수녀가 되었으며 박순집 자신도 자신은 1911년 6월 27일 82세를 일기로 선종하기까지 인천 교회의 창설에 여생을 바쳤다. 현재 박순집 일가를 기념하기 위한 비가 절두산 순교 기념관 정원에 세워져 있어 순례자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성지 조성 과정
삼성산에 묻혀 있던 세 성직자의 유해는 1901년 박순집의 증언으로 명동성당으로 옮겼고 1925년 7월 25일 시복되었다.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난 1970년 5월 오기선 신부에 의해 무덤이 확인되어 김수환 추기경, 노기남 대주교, 박순집 베드로의 후손들이 참석한 가운데 축성식을 가지게 되었다.
1981년 9월에는 서울대교구 신림동 본당 교우들에 의해 구상 시인의 헌시와 비문이 새겨진 현재의 묘비석이 세워졌다. 1984년에는 한국 천주교 2백주년을 기해 세 성직자가 시성의 영광에 오른다. 이를 기념해 사적지 부근의 땅 1만 6천여 평을 매입하였다. 1989년 명동성당에서 성인 유해를 일부 옮겨와 안치하고 축성식을 가졌다.
1992년에는 신림동(현 서원동) 본당에서 분리, 삼성산 본당이 신설되어 성지를 관리하고 있다. 삼성산 본당은 성지 녹화사업을 추진하고 매주일 성지에서 순례객들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2001년 12월에는 성지 입구에 건립된 삼성산 성령수녀회 본원과 청소년 수련관 및 피정의 집 축복식을 가졌다. 2001년 11월 성지에 설치된 성모상이 훼손되는 사건이 발생해 다음해 3월에 새로운 성모상을 봉헌했고, 2012년 10월 12일에는 삼성산 본당 설립 2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성지에 표지석을 설치하고 축복식을 거행했다.
삼성산(三聖山)이라는 명칭은 신라 때의 명승 원효(元曉), 의상(義湘), 윤필(尹弼) 등 3명이 절을 지어 수도한 곳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는데 지금도 이 산에 이들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삼막사라는 절이 있다. 1901년 천주교의 세 순교 성인의 유해가 발굴되면서 명실공히 삼성산(三聖山)이라는 이름의 지위를 손색없이 갖추게 되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의 섭리가 아닐까 한다.
새벽 5시 본당을 출발하여 신경주역에 도착. KTX열차 05시 48분 정시 출발. 어쩌면 출발시간이 이렇게 정확한지 경이롭다. 제 시간 지키기가 선진국의 척도라면 분명 우리는 신진국이다.
정확한 도착 시간에 마중 나와 준 친구 신 모세도 물론 선진국민이다. 그는 이번에도 그냥 오지 않고 고맙게도 자신의 솜씨를 발휘하여 빵까지 구워서 아침 식사를 대용하게 하다니 감사 그 자체다. 오늘의 순례 순서는 처음 계획대로라면 남쪽에 멀리 뚝 떨어진 삼성산 성지를 순례하고 다시 서소문 성지에 가서 남쪽으로 내려오기로 했으나, 어차피 남쪽에 내려온 이상 이 지역의 당고개, 왜고개, 새남터 등을 거쳐 나중에 서소문 성지로 가기로 했다.
성지 가는 길
삼성산 성지 가는 길은 멀었다. 지하철을 환승하고 걷기보다는 버스가 편하다고 하여 버스를 타고 약 1시간 넘게 갔다. 하기야 서울 사람들은 출퇴근 시간 1시간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다. 대부분의 직장인이 서울 근교 위성도시에서 출퇴근을 하기에 이 정도 걸리는 시간은 당연하게 여긴다.
9시가 조금 지나 도착하니 서울 중심지에서 버스로 1시간 거리에 이런 찻길도 없는 산림 지역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한적한 숲길이 이어진다. 성급한 나무는 벌써 잎을 떨구고 홀로 서 있다.
성지 표지석이 있는 입구를 조금 더 오르면 또 하나의 성지 표지석이 있다. 2012년 삼성산 본당 설립 20주년 기념 때 세운 것이다. 뒷면에는 “성지는 교우들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발전한다”는 구절이 적혀 있다. 교우들이 많이 찾는 성지를 만들자는 좋은 뜻으로 해석하지만 사람을 모으는 것을 최대의 자산으로 여기는 오늘날의 세태를 반영하는 말이기도 하다. 표지석 옆에는 삼성산 성지 여러 부속 기관 안내 표지판이 서 있다.
삼성산 청소년 수련원을 기준으로 오른쪽과 왼쪽 두 길이 갈라져 있다. 오른쪽 길을 택하여 올라갔다. 약 10분 올랐을까 여러 개의 입간판이 서로 자신을 먼저 보라는 듯 다투며 함께 서 있다. 두 개는 삼성산 성지의 내력을 담은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성지 둘레길에 대한 안내이다. 관악구 행정구청에서 세운 안내문 제목에 ‘서울의 쉼표 - 당신이 마음이 쉬어가는 곳’이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는다. 우리 생활에 마침표도 중요하지만 쉼표 역시 필요하다
다음으로는 서울대교구에서 세운 성지 안내 표지판이 나타나는데 전제 24개 성지 가운데 마지막 24번째가 삼성산 성지였다.
순교성인 묘소
순례길 안내 표지판이 서 있는 곳에 세분 순교자의 묘소가 성모상 앞에 자리하고 있다. 순교 성인의 이름과 약력이 검은 석판에 각각 새겨져 있다.
성모상 아래에는 앵베르 주교의 “마리아 지극히 정결하신 성모여 내 마음과 몸을 조찰케 하시고 나를 도우사 사욕을 이기어 모든 죄를 멀리 떠나게 하소서.”라는 말이 번역되어 있다.
▲성 범 라우렌시오 앵베르(Imbert) 주교(1796∼1839)
한국 이름은 범세형(范世亨),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이며 주교로는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인 브뤼기에르 주교가 입국도 못한 채 병사하자 제2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837년 5월 주교 품을 받았으며 같은 해 말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다. 그의 입국으로 조선 교구는 그보다 앞서 입국한 나 모방, 정 샤스탕 두 신부와 더불어 교구 설정 6년, 교회 설립 53년 만에 비로소 선교 체제를 갖추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자신의 거처가 알려지게 되자 교우들에게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스스로 포졸들에게 잡히는 몸이 되었다. 나, 정 두 신부에게도 인편으로 자수할 것을 권유하여 다같이 1839년 9월 2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았다. 이 때 그의 나이는 43세였으며 조선에 입국한 지 불과 2년 만이었다.
▲성 나 베드로 모방(Maubant) 신부(1804∼1839)
한국 이름은 나 백다록(羅伯多祿), 서양인으로는 최초로 조선에 입국하여 순교한 신부로 1836년 1월 입국하여 서울 정하상의 집에 머물며 제2대 교구장인 범 주교를 도와 경기 충청 등 지방까지 선교하였다. 그는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 마음을 두고 1836년 2월에 최양업을, 3월에는 최방제를, 7월에는 김대건을 서울로 불러 직접 라틴어를 가르치고 성직자가 되는 데 필요한 덕행을 쌓게 하다가, 때마침 귀국하는 중국인 유방제 신부와 함께 이들을 비밀리에 마카오로 유학 보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고 성직자가 3명이나 입국한 사실이 당국에 알려지게 되자 범 주교에 이어 자수하였다. 1839년 9월, 홍주에서 정 샤스탕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어 모진 형벌을 받은 끝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는 35세, 한국에 입국한 지 3년 9개월 만이었다.
▲성 정 야고보 샤스탕(Chastan) 신부(1804∼1839)
한국 이름은 정 아각백(鄭牙各伯), 두 번째로 조선에 입국한 서양인 선교사이다. 1827년 1월 파리외방전교회 사제가 된 정 샤스탕 신부는 1836년 12월 조선 입국에 성공하여 곧 한국말을 배우는 한편 나 신부와 함께 각 지방에 퍼져 있는 교우들을 찾아 성사를 거행하였다. 당시의 서양인 성직자들은 상제 옷으로 변장하고 험한 산길을 헤매야 했고, 소금에 절인 야채 따위로 주린 배를 채워야 했으며, 밤새도록 고해성사를 주고 미사를 드린 다음 날 새벽에는 또 다른 마을로 길을 재촉해야만 했다.
그들은 이러한 고난을 감수해 가며 오직 복음 전파에만 힘썼던 것이다. 1839년에 일어난 기해박해는 이 땅을 수많은 천주교인들의 피로 물들였고 정 신부도 범 주교, 나 신부와 함께 그 해 9월 새남터에서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되었다. 그의 나이는 35세, 이 땅에 들어온 지 2년 9개월 만이었다.
순교성인의 묘비
걸음을 옮기니 순교자의 묘비가 나타난다. 1981년 9월에 세운 신림동 본당 교우들에 의해 세워진 현재의 비석이다. 세 분 각각이 아닌 하나로 합한 비이며 십자가의 색이 붉은 선혈로 나타나 있다. 앞에는 세 분의 얼굴이 새겨져 있고 뒤에는 대형 십자고상이 서 있다.
묘비 아래쪽에는 “님들의 피로서 증거한 복음과 함께 님들의 자취도 이 땅에 영원하오리라”는 구상의 헌시가 기록되어 있다.
야외 제대
멀리서 보면 마치 우물 집 같은데 성지에 성당이 따로 없고 보니 동절기를 제외하고는 이 야외제대에서 미사가 거행된다. 미사 시간을 보니 매주 주일미사는 오후 2시에 있고, 월례 미사는 매월 21일 11시에 순례객들을 대상으로 열리고 있다. 다수가 참여하는 듯 탁자식 야외 의자가 족히 100개는 되어 보인다.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길은 숲 속에 나있다. 바위에 조각한 십사처가 알맞은 간격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각 처 앞에는 여러 명이 기도를 바치도록 널찍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드물게 보는 것이다.
제1처는 예수님 사형선고 받으심이다. 좌우로 두 사람이 새겨져 있는데 오른쪽이 예수님이고 왼쪽은 선고를 내리는 빌라도인 듯하다. 예수님은 두 손이 묶여져 있는데 조각상의 아래, 옆쪽에는 많은 손들이 새겨져 있다. 어떤 손은 주먹이고 어떤 손은 손가락이며 어떤 손은 손바닥이다. 이는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대한 함성, 비난, 환호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군중의 힘에 의해 총독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명을 찾지 못했음에도 마지못해 사형을 내리는 모습이다. 오늘날의 여론 재판과 다름이 없다. 이처럼 여론이란 것도 진실과는 먼 경우도 많다.
벌써 10시가 지났다. 나가는 시간도 상당할 터이니 첫 순례지부터 늦어지고 있다.
나오는 길
삼성산 성지는 팍팍한 일생에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손쉽게 다가올 수 있는 곳으로 접근성도 좋다. 분주한 서울 역에서 버스로 1시간이면 올 수 있는 곳이다. 천주교 신자이면 성지 순례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순례길로 안성맞춤이다. 무엇보다 복잡한 시설이 없어서 좋다. 미사를 드릴 수 있는 경당 건물 하나 없어 야외미사를 드린다. 이만큼 공간과 여백이 중요한 것이다. 복잡함이 마음을 더욱 복잡하게 하는 것이다.
바깥에 위치한 청소년 수련관에 들렀는데 평일이라 그런지 시간이 일러서 그런지 이곳에 종사하는 듯한 한 사람 이외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다음 코스인 왜고개 성지를 가는데 마을버스를 이용했다. 몇 코스를 타고 가서 내려서 길을 찾는데 좀 헷갈렸다. 용산 우체국을 기준으로 하는데 오는 도중에 지나쳐서 혼선이 있었다. 행인 중 할머니 한 분에게 물으니 운 좋게 교우분이라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경주에서 왔다고 하니 반가와 하면서도 놀랍게 여기셨다. 11시가 조금 지나서 왜고개 성지에 도착.
왜고개 성지 - 10명 순교자가 쉬었다 떠나시다 |
왜고개 성지의 주소는 서울시 용산구 한강대로 40길 46. 천주교 군종교구청과 군종교구 국군 중앙 주교좌 성당과 주소지를 같이 한다.
예부터 왜고개는 한자로 와현(瓦峴) 또는 와서현(瓦署峴)으로 불리던 곳으로, 원래 옛날부터 기와와 벽돌을 구워 공급하던 와서(瓦署)가 있었던 데서 유래한다. 그만큼 양질의 흙이 이곳에서 나왔음을 뜻한다. 명동 성당과 약현 성당을 지을 때도 이곳에서 나는 흙으로 벽돌을 찍어 공급했다고 전해진다
삼성산 성지가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프랑스 선교사, 앵베르, 모방, 샤스탕 세 분의 유해를 50여년간 모신 곳이라고 했듯. 이 왜고개 성지 역시 1866년 병인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베르뇌 주교와 브르트니에르 신부, 볼리외 신부, 도리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 푸르티에 신부, 우세영 알렉시오의 유해와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남종삼 요한 성인과 최형 베드로 성인의 유해를 한동안 모셨던 유서 깊은 성지이다. 이밖에도 왜고개는 1846년 병오박해 때 순교한 한국인 첫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도 잠시 모셔졌다가 박해가 진정된 후 미리내 성지로 이장된 내력도 지니고 있다. 그러니까 왜고개 성지는 모두 10분의 순교자의 유해를 모셨던 곳이다.
삼성산 성지를 있게 한 분이 박 바오로였다면 왜고개 성지를 있게 한 분은 바로 그 아들인 박순집 베드로이다. 아버지 박 바오로는 노고산에 임시 매장된 3성인의 유해를 자신의 선산인 삼성산으로 옮기고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고 자신의 아들에게만 일러주었다. 아들 박순집 베드로는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여 삼성산 성지를 돌보았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위에서와 말한 바와 같이 병인박해시 새남터에서 순교한 순교자 7분과, 서소문 밖 순교자 2분의 유해를 아무도 몰래 이곳 왜고개로 옮겼다.
그후 공식적인 박해가 잠잠해진 1876-187년, 박순집은 교회의 밀사 최지혁(요한)과 고종의 유모 박 마르타의 딸 원(元) 수산나 등과 협력하여 드게트 신부(Deguette, 1848~1889, 빅토르), 블랑 신부(Blanc, 白圭三, 1844~1890, 요한) 등을, 제6대 조선대목구장 리델 주교(Ridel, 李福明,1830~1844, 펠릭스), 두세 신부(Doucet, 丁加彌, 1853~1917, 가밀로), 로베르 신부(Robert, 金保祿, 1853~1922, 바오로) 등을 입국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박해가 끝난 후 제7대 조선 교구장 블랑 주교(Blanc, 1844-1890년)는 순교자들의 행적을 조사하였고, 박순집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과 순교자들의 유해가 묻혀 있는 곳 그리고 자기 집안의 순교자들의 행적을 교회법정에서 증언하고 기록으로도 남겼으니 이것이 박순집 증언록인데 총 3권에 153명의 순교자 행적이 기록되어 현재 절두산 순교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처럼 순교자들의 행적 증언과 유해 발굴에 큰 공을 세운 박순집은 1878년에 홍제원(현 홍제동) 장거리 고개 밑에서 살았는데 교회를 위해 자신의 집을 공소로 내놓았고, 1888년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한국에 진출하자 셋째 딸 박황월(朴黃月.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을 수녀회에 입회시켰다. 그래서 박 수녀는 조선인 최초 다섯 명의 수녀 중 한 명으로 그가 95세의 나이로 선종하기까지 어릴 때부터 보고 들은 것을 자세히 기록하여 놓았는데 이 글에는 자기 가족들의 순교행적과 신앙생활, 수도회 역사가 담겨 있어 아버지의 박순집 증언록처럼 교회의 산 기록이 되고 있다.
박순집의 도움으로 1899년 10월 30일 병인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하여 왜고개에 묻혀있던 7명의 유해는 33년 만에 발굴되어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에 잠시 모셨다가 명동 주교좌성당 지하묘지에 안장하였다. 그리고 1909년 5월 28일는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남종삼과 최형의 유해도 43년 만에 발굴되어 역시 명동 성당 지하묘지에 안장되었다.
시복을 앞둔 1924년, 명동 성당 지하묘지가 개봉(開封)되어 유해 일부가 로마와 파리 외방전교회 등으로 분배되었고, 1967년 절두산 순교성지에 순교 기념성당이 건립되면서 명동 성당에 안장되었던 순교 복자들의 유해 대부분이 절두산 기념성당 지하 성해실로 옮겨졌다.
이처럼 왜고개 성지는 모두 10위의 순교자가 묻혔던 곳으로, 그 중 8위가 1984년 5월 6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시성식을 갖고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따라서 왜고개 성지는 이들 순교성인들이 쉬어간 자리이면서 동시에 그들의 삶과 정신을 느끼기에 충분한 곳이다.
군종교구는 2013년 12월 15일 교회사적 의미를 살리고 순례자들이 좀 더 편안하게 순례하며 기도할 수 있도록 성지를 확장하여 새로 단장하고 축복식을 가졌다. 새로 단장된 성지에는 순교자 현양비와 대형 십자가상, 십자가의 길과 기도처 등이 마련되었다.
시내버스를 타고 왜고개 성지에 오니 11시가 넘었다. 성지 입구에는 천주교 군종교구청, 천주교 국군중앙 주교좌 성당, 왜고개 성지 표지판이 가지런히 걸렸다. 안으로 들어가니 먼저 나타나는 붉은 색 대형 벽돌 건물 두 동이 나타나는데 이들이 군종교구청이고 그 안쪽에 약간 검은 색을 띤 건물이 국군중앙 주교좌 성당이다. 그러나 왜고개 성지는 보이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교구청 건물과 성당 뒤편에 왜고개 성지로 가는 문이 쪽문처럼 나 있기 때문이다. 일단 주교좌 성당을 먼저 참배하기로 했다.
천주교 군종 교구청
군종교구는 1989년 10월23일에 설립되어 1990년 2월13일에 초대 군종교구장 정명조 아우구스티노 주교가 착좌하였다. 그리고 1992년 12월16일에는 군종교구청이 건립되었다.
국군 중앙 주교좌 성당
국군 중앙 주교좌성당의 시작은 1951년 4월 9일 설립된 육군 중앙성당이었다. 전시 중이라서 육군본부 앞 건물을 빌려 제대와 장궤틀을 설치하고 임시성당으로 사용했다. 전쟁이 끝나고 1육군본부가 서울 환도 직후 가톨릭과 개신교가 함께 사용한 육본교회 시대, 군종센터 시대를 거쳐, 1981년 11월7일 드디어 순교자가 묻힌 왜고개 성지에 천주교만의 교회인 육군 중앙성당이 준공되어 축성식을 거행했다.
2010년 9월15일에 제3대 유수일 하비에르 주교가 착좌하여 국군 중앙 주교좌성당으로 승격되었다. 그리하여 국군 중앙 주교좌성당은 군 사목의 중심지가 되어 군인과 그 가족들의 신앙생활에 기여하고 있다.
1981년 11월7일 지은 현재의 국군 중앙 주교좌성당은 위에서보면 지붕이 8각형 별 모양이며 건물의 평면도 8각형이다. 지붕의 꼭대기에는 로마 시대 투구를 엎어놓은 형상 위에 예수성심상을 배치하여 군대의 특성을 나타내고 군대의 복음화를 지향했다고 한다.
성당의 성전에 가기 위해서는 교구청 건물의 사무실과 성당 사이에 난 계단을 올라야 한다. 계단 앞 성당 벽면의 감실에는 성모님 모자상이 먼저 환영해 주신다.
2층에 성당 출입문이 나란히 둘이 있는데 오른쪽 문이 자비의 문이다. 두 문 사이에 성화 돌아온 탕자가 걸려 있다.
내부 공간은 역시 지붕처럼 다각형이고 제대 앞면에는 청, 백, 적색의 길다란 스테인드글라스가 고상 좌우로 2개씩 있다. 12개의 측면 창문에는 10분 순교자와 두 곳의 순교지를 스테인드글라스화로 형상화했다. 각 순교자 형상화 밑에는 둥근 원 안에 순교자의 약력이 기록되어 있다. 제대의 왼쪽에 성모상이 있다.
성전의 뒷면 ‘자비의 문’ 안쪽에는 자비로운 예수님 상이 있고 벽면 위에는 십자가의 길 14처가 있다.
왜고개 성지
성당을 나와서 바로 옆에 난 왜고개 성지 문을 나서면 왜고개 성지가 나온다. 성지 표지석 아래 지붕을 머리 위에 인 십자고상이 서 있고 이어서 십자가의 길 14처가 일렬로 길게 길옆에 있다.
다음으로는 이곳에서 묻혔던 순교자 10분의 순교자의 상본이 안내 해설판을 필두로 나열 되어 있다. 성인으로 지정되지 않은 프티니콜라 · 푸르티에 신부는 성전 안의 유리화에는 들어있었는데 여기서는 빠졌다. 왜 같은 순교자인데 성인품에 오르지 못했는지 궁금하다. 또 그렇다고 굳이 두 분만 꼭 빼야 하는지 아쉬움이 든다. 상본에 있는 대로 약력을 함께 소개한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1821 08 21 충청도 솔뫼에서 김제준 이냐시오와 고 우슬라의 장남으로 출생
1845 08 17 상해에서 펠레올 주교로부터 사제 수품
1846 09 16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로 순교
서울과 용인에서 사목활동을 시작하였으나 선교사들을 들여오는 활동을 하던 중 체포되어 순교함. 1949년 11월 15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로 선포됨.
성 뵈르뇌 시므온 신부
1814 05 14 프랑스 출생 르망 교구
1837 05 21 프레시네의 소신학교와 대신학교 졸업. 시제 수품
1854 08 06. 제4대 조선교구장 임명 받음
1866 03 07, 새남터에서 군문효수 순교
1856에 입국한 시므온 주교는 10년 동안 사목하면서 충북 베론에 한국 최초의 신학교와, 서울에 인쇄소 2개 운영하며 한국교회 발전에 큰 공을 세움
성 남종삼 요한
1817 충청도 충주 출생
1838 문과 급제 홍문관 교리 영해군수 및 승지 등 관헌생활
1866 러시아 남하 견제책 건의 돌변한 대원군에 의해 벙인박해 일어남
1866 03 07 서소문밖 네거리에서 참수 순교
1850년대부터 최양업 신부, 뵈르뇌 주교, 남상교 등과 천주가사를 집필함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조선어를 가르치는 등 교육활동에 집중
성 랑페르 브르트니애르 유스토 신부
1838 02 28 프랑스 출생, 다종교구
1864 05 21 파리외방선교회 신학교 졸업, 사제 수품 및 조선 선교사 임명
1865 06 27 조선 입국 베르뇌 주교를 도와 전교 활동
1866. 03 07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
백 신부라는 이름으로 사목활동을 하였으며 정의배 회장의 집에서 조선말을 배우며 40여명의 세례성사와 80여명의 고해성사를 집전함
성 도리 헨리코 신부
1839 09 23 프랑스 출생, 뤼송 교구
1864 05 21 파리외방선교회 신학교 졸업. 사제 수품 및 조선 선교사 임명
1865 05 27 조선 입국 용인 손골에 배속되어 선교
1866 03 07 새남터에서 군문효수 순교
뤼송 교구 입학 후 해외 선교에 대한 강한 간절한 열망으로 외방선교회에 입회하였고 조선에 입국하여 김신부라고 불리며 볼리외 신부 등과 함께 사목활동을 했음
성 볼리외 루도비코 신부
1848 10 08 프랑스 출생, 보르도 교구
1864 05 21 파리외방선교회 신학교 졸업. 사제 수품 및 조선 선교사 임명
1865 05 27 조선 입국 공주지역 배속
1866 03 07 새남터에서 군문효수 순교
한국명은 ‘서몰례’이며 뛰어난 조선어 습득 능력으로 고해성사를 집전함.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파리외방선교회 선교사 중 가장 어린 나이에 순교함
성 최형 베드로
1814 충청도 홍주 출생
1836 모방 신부의 복사로 교회일에 헌신
1845 김대건 신부를 도와 페뢰올 주교와 다블뤼 주교의 입국을 도움
1866 03. 09 서소문밖 형장에서 참수 순교
김대건 최양업과 함께 유학길에 오른 최방제가 동생임. 목수 일을 통해 목주를 제작하고 교회서적을 출판하는 등의 큰 공헌을 함
성 우세영 알렉시오
1845 황해도 출생
1863 정의배 마르코 회장의 인도로 베르뇌 주교에게 세례 받음
1846 09 16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로 순교
18세에 진사시에 합격할 만큼 뛰어난 인재였으며 교리서 번역과 기도문 ‘십이단’ 편찬에 기여함. 병인박해시 체포되어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배교 후 석방되었으나 뉘우치고 다시 용덕을 발휘, 순교함.
김대건 신부와 관련된 것으로 김대건 신부의 유해 성광이 보존되어 있고 기도처에 앞에 김대건 신부의 상이 서 있는데 오른손으로 십자가를 들고 왼손으로는 교우들에게 보내는 편지인 ‘교우들 보아라’는 두루마리를 편지를 들고 있다.
벌써 11시 30분. 서둘러 새남터 성지로 향했다. 새남터는 차를 탈 입장도 아니어서 걸어서 이동했다. 30분 정도 소요하여 도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