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꽃구경 -대구문학지에 제출.190808-28쪽.hwp
<아동문학 분과-동화>
꽃구경
박경선
여름 속에 사는 나무들이 온통 푸른 잎새 팔랑팔랑, 넓은 하늘에 흘러가는 양떼들은 하얗게 뭉게뭉게! 아, 싱싱하고 풍성한 방학에 이야기 할머니가 여행을 떠났어요. 제주도 올레길 둘레길도 척척, 오름도 척척 앞장 서 오르며 신나게 다녔어요.
“아빠, 저 할머니, 우리보다 더 잘 걸어요. 머리도 새하얀데 허리도 꼿꼿하고.”
할머니가 뒤돌아보니 저네 아빠 손에 매달려 걷는 꼬맹이가 아빠한테 몸을 기울여 속삭이고 있었어요. 대 여섯 살쯤 되었을까? 서울 사는 손녀만한 계집아이가 단발머리를 나풀대며 속닥이는 모습이 여간 귀엽지 않았어요.
“그러게, 저 할머니가 우리보다 더 기운이 펄펄 하셔!”
꼬맹이의 아빠 말에 할머니가 돌아서서 기다렸다가 넌지시 말했어요.
“행복하고 단란한 가족 소풍! 보기 좋네요.”
그말에, 꼬맹이 엄마도 할머니를 칭찬했어요.
“어쩜. 그렇게 정정하세요?”
할머니는 하얀 머리카락이 자랑스러웠어요.
※ ※
이야기 할머니는 신나게 놀고 와 유치원으로 갔어요. 늘 이야기를 들려줄 때 앉던 의자를 찾아 구석자리에 앉는데 유치원 선생님이 다가와 속삭였어요.
“이야기 선생님, 이제 65세가 되셨네요. 65세는 더 이상 일할 수 없어요. 나라 근로법이 그래요.”
“어이쿠, 근로법이 그렇군요!”
할머니는 오래도록 이야기해주러 다녔던 병설유치원을 차분히 걸어 나왔어요. 나오는 길에 학교도서관에 들러 책을 빌리려 했어요. 하루 한 권씩 꼭꼭 빌려 읽던 책이었지요.
“이야기 선생님, 이젠 직원이 아니라서 책을 빌려 드릴 수 없네요. 도서관 규약이 그래요.”
“어이쿠, 규약이 그렇군요!”
할머니는 가장 좋아하는 책 읽기도 금지 당한 65세가 부끄러워 어디 숨고만 싶었어요. 쫓겨나는 뒷모습을 누가 볼세라 허겁지겁 걸었어요. 길게 늘어서 있는 회화나무 가로수 길을 하염없이 하염없이……
‘부끄러운 65세, 쓸모없는 65세! 나라법이 정한 65세라니!’
할머니는 더운 여름 거리를 지척지척 걸으며 고려장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갔어요. 나무꾼이 나무를 져다 나르는 나무 지게가 나타났어요. ‘아이구 머니나!’ 젊은이의 지게 위에는 늙은 할머니가 타고 있었어요. 그 뒤로 하연 도포를 입은 할아버지가 우리 소리꾼의 목소리로 노래를 철철 흘리며 갔어요.
<어머니, 꽃구경 가요. 제 등에 업혀 꽃구경 가요.
세상이 온통 꽃핀 봄날, 어머니는 좋아라고 아들 등에 없혔네.
마을을 지나고 산길을 지나고 산자락에 휘감겨 숲길이 짙어지자
‘아이구 머니나’
어머니는 그만 말을 잃더니 꽃구경, 봄구경, 눈감아 버리더니
한 웅큼씩 한 웅큼씩, 솔잎을 따서, 가는 길 뒤에다 뿌리며 가네.
“어머니, 지금 뭐하신데요. 아, 솔잎은 뿌려서 뭐하신데요.”>
소리꾼 할아버지는 노래를 철철 흘리며 가고, 뒤 따르던 할머니는 눈물을 철철 흘리며 갔어요. 할머니의 눈물이 아스팔트 바닥에 떨어져 뭉개어진 화화나무 꽃가루 위에 철철 뿌려졌어요. 바람이 불어오자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말라가던 꽃가루들이 할머니 앞으로 휘날려왔어요. 머리에도, 어깨에도 눈 속으로도! 할머니는 눈앞에, 가슴으로 몰려오는 꽃가루를 받아 바람에 풀풀 흘리며 걸었어요.
※ ※
“끼익!”
달리던 차가 급하게 할머니 앞에 섰어요.
“할머니,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차속으로 끼어 들며 꽃가루나 뿌려대고.”
트럭기사가 트럭을 급하게 세우며 차창 밖으로 냅다 고함을 쳤어요. 할머니 귀에는 그 소리가 노랫가락 속에서 이렇게 노래하는 것처럼 들렸어요.
“어머니, 지금 뭐하신데요. 아, 솔잎은 뿌려서 뭐하신데요.”
그러고 보니 화내는 트럭 기사 얼굴이, 지게 지고 가던 젊은이 얼굴로 겹쳐보였어요.
“그래, 날이 저물다. 너 혼자 돌아갈 때 길 잃을까 걱정되어서.”
“뭐라고요? 이 할머니가 실성하셨네. 늙어서 정신 줄 놓았으면 정신병원에나 가두어야지. 마구 돌아다니게 놔두면 뭐야. 우리같이 벌어먹기 힘든 놈들한테는 뭐. 이렇게 걸그척거리는 게 많아! 퉤퉤! ”
할머니는 트럭 기사가 침 뱉고 사라지자 그래도 정신을 차려 정신병원에 잡혀가기 전에 집으로 돌아왔어요.
‘아, 이 세상에서 65라는 숫자가 가장 부끄럽고 무서운 숫자였다니… .’
할머니는 그래도 버릴 수 없는 65라는 숫자를 가슴에 품고 잠들기 전에 기도를 드렸어요.
‘하느님, 하느님, 하느님 사업에 저를 도구로 써주소서. 자원 봉사자로라도 일할 수 있게.“
※ ※
할머니는 다음날, 성당에 하느님께로 갔어요. 주보에 ‘하반기 자원봉사자 모집’ 광고 난을 살펴 봤어요. ‘가톨릭대학병원 할 일-도서 봉사자. 대상: 만 65세 이하’
‘어이쿠나!’
할머니는 거기서도 65라는 숫자를 읽고 말았어요. 가장 부끄러운 숫자가 거기도 적혀 있다니. 할머니는 평생 책 읽고 글 쓰고 이야기하며 살았어요. 중,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도서실 조무원 근로 장학생으로 일했고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어서는 사서 교사 자격증으로 40년 동안 도서실 일을 맡아 했지요. 누구보다 전문가였는데 가슴에 65라는 숫자를 달면 일할 사람 축에 못 끼인다니…… .
할머니는 성당에서 돌아오는 길에 한적한 시골길로 접어들었어요. 목화밭을 지났어요. 수수밭도 지났어요. 비가 추적추적 내려 옷에 달라붙었어요. 할머니는 비속을 걸으며 또, 고려장 이야기 속, ‘꽃구경’ 노래 가락을 뿌리며 걸었어요.
“어머니, 꽃구경 가요. 제 등에 업혀 꽃구경 가요. 세상이 온통 꽃핀 봄날!”
길 건너편에 자그마한 교회가 보였어요.
‘아, 저기 조그만 교회에도 하느님이 계실까?’
할머니는 조그만 교회에서 조용히 기도하고 싶어서 길을 건넜어요.
“카악!”
할머니 옆에 와서 선 건, 할머니를 산에다 져다버릴 지게가 아니었어요. 오토바이 한 대가 달려오다가 할머니를 피해 빗길에 미끄러지면서 할머니를 떠받아 날려버린 거였어요. 여름 한철, 나무에 달려 파란 손을 흔들어대던 버드나무 잎들이 비에 젖어 길바닥에 누워 있었어요. 어느새 누런 낙엽으로 변해 할머니 몸에 달라붙었어요. 할머니는 벌떡 일어나 달라붙은 잎들을 털어내어 뿌리며 흥얼거렸어요.
“아들아 아들아 내 아들아, 너 혼자 내려갈 일 걱정이구나. 길 잃고 헤맬까 걱정이구나.”
오토바이 사고를 낸 청년이 다급하게 달려와 할머니를 살피는데 할머니가 노래를 흥얼거리며 나뭇잎을 뿌리고 있지 않겠어요?
“할머니, 지금 ‘꽃구경!’ 그 노래하시는 거죠? 저도 장사익 그 분 노래 무척 좋아하는데...”
“그래, 날이 저물다. 너 혼자 돌아갈 때 길 잃을까 걱정되어서 말이야.”
청년은, 할머니를 오트바이 뒤에 태워 마을에서 가까운 병원으로 모셔갔어요. 진찰 결과, 할머니는 다친데 한 곳 없이 말짱했어요. 그래도 청년이 할머니의 가족들을 부르라며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래요. 그렇긴 한데, 청년! 내가 깜빡, 정신 줄 놓은 것이 잘못이지. 이렇게 말짱하니 제발 가시게나.”
할머니가 그냥 가라고 애원해도 청년은 나중에 딴말 할 수 있다며 고집을 부럭부럭 부렸어요.
“그래요. 그렇긴 한데. 이런 일에 가족을 부르려니 부끄럽고 민망하구려. 제발 그냥 가시게.”
“아뇨. 사건처리를 확실히 하고 싶습니다.”
서로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데 멀리서 지켜보던 간호사가가 다가와 할머니를 쳐다보았어요.
“그래요 선생님, 맞죠? 저 청계초 3학년 때 제자 정하에요. 기억나세요?”
“그래요. 그렇긴 한데. 아! 정하구나. 가끔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는데. 어릴 때 귀엽던 모습도 그대로 남아있네.”
“헤헤, 선생님도 고운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어요.”
“에끼, 곱다니, 내 나이가 얼만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65세란다.”
그 말에 정하가 펄쩍 뛰며 할머니의 두 손을 맞잡았어요.
“65세가 왜요? 우리 마음속에는 늘 열정 많고 올곧고 엄마 같은 선생님으로 남아 있는걸요. 그리고 아무 쓸모없다는 그 말씀, 진심 아니시죠? 제가 3학년 때 공부도 못하고 쓸모없는 얘 같다고 했을 때 선생님이 저더러 그러셨죠? 세상 모든 문제는 다 자기 안에 있다며 자기가 자기를 인정하고 사랑해주는 만큼 행복한 사람이 된다고요. 살면서 힘 들 때마다 그 말이 얼마나 힘이 되었는데요?”
“그래, 그랬지. 그런데 오늘은 너가 내게 힘내라고 들려주는 말 같아 고맙구나. 그보다 날 보증서서 이 청년을 좀 보내줘.”
그 말에 정하가 청년을 쳐다보고 웃으며 말했어요.
“저, 이 병원 수간호사에요. 제가 선생님 제자로서 가족처럼 보증설 테니 안심하고 가세요.”
그 말에 청년이 꾸벅 절을 하고 잽싸게 병원 문 쪽으로 가다가 되돌아와 할머니께 명함 한 장을 내밀었어요.
“혹시 제 연락처가 필요하시면 이리로.”
할머니는 그 명함을 정하에게 주라고 손짓 했고 정하는 명함을 읽어보더니 활짝 웃었어요.
“어머, 우리 동네, 의료기관에 근무하시네요. 우리 선생님께 일 있으면 곧장 알려드릴게요.”
※ ※
일 년 뒤, 세상이 온통 꽃핀 봄날! 할머니는 실버 합창단에서 발표회를 한다고 정하에게 카톡 초대장을 보냈어요.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나이를 숨길 수 없는 늙은 할머니들이 어릴 적이 그리운 듯 눈물을 흘리며 동요를 불렀어요.
그런데, 노래 한곡이 끝날 때마다 방청석에서 각자의 꽃다발을 높이 흔들어 보이는 한 쌍의 젊은 남녀가 너무 눈에 띄었어요. 게다가 커다란 글씨로 쓴 현수막도 너무 눈에 띄었어요.
<선생님, 우리 결혼 주례를 부탁해요-정하와 준원>
‘아니, 정하와 그 고집쟁이 청년이잖아.’
할머니는 아름다운 한 쌍이 사랑으로 피어낸 꽃구경을 온 것 같았어요. 66세라도 부끄럽지 않았구요. 자신의 늙음을 인정하며 떳떳하고 보람찬 날! 세상에 온통 꽃 핀 꽃구경을 마음껏 즐겼지요. 2019. 8.3. 2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