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4:16-21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18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19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20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 21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서로 받으며 살 때 누리는 하나님의 나라
기독교는 종교 행위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는 생명으로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죽어서 가는 장소적 천당의 개념 이전에 지금 현재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통치의 개념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의 통치를 생명으로 받지 못하면 죽어서도 천당에 가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진리와 은혜와 생명으로 다스려줄 때 내 삶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데, 그 특징이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와 평강과 희락은 일차적으로는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내적 상태를 의미하지만, 본문의 문맥에서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특히 교회 안에서 믿음이 연약한 지체와의 사이에서 나타나는 바른 관계와 그로 인한 화평과 기쁨입니다. 혼자 자기 내면에서 맛보는 의와 평강과 희락을 넘어 대상이 있고, 그 대상과 함께 맛보고 누리는 바른 관계와 그로 인한 평화와 기쁨의 상태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교회의 지체, 혹은 다른 사람과 함께 누리는 하나님 나라의 특징인 의와 평강과 희락이 있는지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6부터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는 말은, 우리가 선하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들이 사람들의 비방 거리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가령 음식은 모두가 깨끗하므로 먹어도 된다는 사람은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으면서 그런 자신의 행동이 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우상에게 바친 고기와 음식은 부정해서 먹으면 안 된다는 사람도 먹지 않는 자신이 선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이란 이름으로 각자 선을 추구하고 행하는데, 이 둘이 서로 충돌하면서 비방 거리가 된다면 그 선은 도대체 어떤 선일까요?
그래서 17절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니라.” 우리가 지금 성령 안에 있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다면 먹고 마시는 문제로 누가 선인지 서로 싸우지 말고, 함께 의와 평강과 희락을 만들어가고 맛보고 누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선은 먹고 마시는 문제를 놓고 누가 옳으며 그른지를 따지고 싸우지 않습니다. 서로 의견이 달라도 먹는 문제, 마시는 문제가 본질에 속하지 않음을 알고, 함께 의를 이루는 자리로 가기 위해 서로 양보하고 배려함으로 화평을 만들어내고 그 결과 함께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선입니다.
어떻습니까? 자신이 선이라고 생각하고 믿음과 신앙의 성숙과 자유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다른 사람을 위해 자제하고 양보하고 절제해서 함께 누리는 의와 평강과 희락을 맛본 적이 있습니까? 함께 누리는 의와 평강과 희락의 하나님 나라는 자신의 선함과 지식을 고집할 때 맛볼 수 없습니다. 지체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자유와 지식을 절제와 희생으로 내려놓을 수 있을 때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는 하나님의 나라가 나와 상대방과 공동체 가운데 허락됩니다. 그렇게 형제를 위해 나의 자유와 지식과 믿음을 절제하고 양보하고 포기하면, 그것은 곧 그 지체와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되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기뻐하고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는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18절이죠.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반대는 무엇입니까? 내 지식과 자유와 믿음을 칼과 무기로 휘두르는 것입니다. “왜 성경 안 읽어, 왜 기도 안 해, 왜 주일을 안 지켜, 왜 봉사 안 해, 왜 전도 안 해, 왜 이것을 못 먹어, 왜 그날을 아직도 지키고 있어”라고 자신이 믿음이라 생각하고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칼로 휘두르면, 그 칼에 정신을 차리는 사람보다 맞고 피 흘리는 자가 더 많습니다. 그것은 형제를 섬기는 것이 아니며, 그 형제를 위해 피 흘리신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소원하고 그리스도를 높이기를 원한다면 나의 지식과 자유를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휘두르지 않고 그 칼을 내려놓고 조용히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아름답고 성숙한 믿음입니다.
19-21을 보십시오. 어떻게 연결됩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우리에게는 우상은 없으며,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이 다 깨끗하다는 신앙의 지식이 있고, 그 성숙한 지식으로 마음대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식과 자유를 형제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화평과 덕을 세우는 일을 위해 절제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사업, 곧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통해 시작하신 교회 안에서 주의 백성들이 생명으로 자라는 일이 무너집니다. 나의 지식과 믿음과 자유를 사용하는데 형제에게 거리낌이 되고 형제를 걸려 넘어지게 할 수 있다면 그 자유를 사용하지 않고 절제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과 자유를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합니까?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써야 합니다. 자유는 절제함으로 나타나야 하고, 믿음의 지식과 성숙은 섬김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습니다. 그때 함께 평강을 누리는 화평의 열매가 맺히고 덕이 세워집니다.
덕을 세운다는 말은 집을 뜻하는 ‘오이코스’라는 단어와 ‘세우다’를 뜻하는 ‘도마’라는 말이 합쳐진 합성어 ‘오이코도메’입니다. 집을 세운다는 뜻입니다.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즐거움이 얼마나 큽니까? 그러나 그 즐거움을 형제를 위해 포기할 수 있을 때, 성령 안에서 함께 아름다운 하나님의 집인 교회로 세워지는 의와 평강과 희락을 맛볼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 집을 잘 짓고 있습니까?
화평과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라고 했는데, ‘힘쓴다’는 말은 ‘추구한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집으로 아름답게 세워가는 일을 우리의 목적으로 삼고 추구하면서 살라는 의미입니다. 그 목적이 있다면 우리는 늘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하신 믿음과 지식과 자유를 가지고 어떻게 형제, 자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내가 가진 것으로 어떻게 교회를 섬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13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자유를 사랑으로 종노릇 하는 데 사용하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과 지식과 자유는 언제나 사랑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보고 싶었어” 하면서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애틋하게 쳐다보는 것입니까?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자신의 지식과 자유와 믿음을 자기를 위하여 사용하지 않고 나보다 연약한 형제와 지체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고, 필요하면 그 지식과 자유를 절제하고 양보하고 손해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자를 정죄하거나 비판하지 않고 그의 의견과 생각을 존중하며 나아가 그 사람의 유익을 위해 나의 지식과 자유와 믿음을 포기하면서 그 사람의 종노릇 할 수 있을 때 그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로마서 12:9-11을 다시 확인할까요?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우리는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는 것을 너무 쉽게 기도와 전도와 봉사와 같은 종교적인 형태를 띤 외적인 행위를 생각하지만, 형제를 위해 나의 믿음과 지식과 자유를 절제하고 포기하며, 거짓 없는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는 것이 곧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는 일입니다. 형제 사랑과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는 일은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리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열심히 종교적인 행위를 했다고 해도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납니다. 14:15을 다시 보십시오. “만약 음식으로 말미암아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사랑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은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는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결과가 아니라, 형제를 실족하게 하고 넘어지게 하고 망하게 하는 정반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결국, 저와 여러분이 성령 안에서 허락되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는 하나님의 나라를 함께 누리고 맛보기 위해서는 무엇을 하든지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하는데 형제를 넘어지고 망하게 하며, 하나님의 집이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너지는 결과가 나타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장로교회가 1887년 9월 27일에 언더우드 선교사의 사랑방에서 시작된 정동 장로교회, 지금의 새문안교회입니다. 두 번째 장로교회는 6년 후인 1893년에 사무엘 무어 선교사가 세운 곤당골 교회입니다. 16명의 교인으로 시작한 이 교회는 첫해에 43명이 모일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대부분 양반으로 구성된 이 교회에 이름도 없고 성만 박 씨라고 알려진 백정이 나와서 세례를 받고 ‘성춘’이라는 이름을 얻는 일이 생깁니다. 그러자 곤당골 교회가 난리가 났습니다. 어떻게 양반과 백정이 같이 예배를 드릴 수 있냐고 하면서 예배당 앞쪽에 따로 양반의 자리를 마련해달라고 요구했고, 사무엘 무어 선교사는 예수 안에 차별이 있을 수 없다고 이들의 요구를 거절합니다. 그러자, 양반들이 곤당골 교회를 나가 자신들만 모이는 교회를 따로 개척했는데 홍문동 교회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곤당골 교회는 성장하고 홍문동 교회는 위축되자 1898년에 두 교회는 다시 합치고, 1905년 8월에 예배당을 인사동으로 옮기는데 지금의 승동교회입니다. 1911년에 장로 투표를 했는데 백정 출신의 박성춘이 양반들을 제치고 장로가 됩니다. 그러자 또 양반들이 반발하여 따로 교회를 세웠는데 지금의 안동교회입니다.
정반대의 교회도 있습니다. ‘기억자 교회’로 잘 알려진 금산교회는 전라도 지역에서 선교하던 최의덕 선교사(L.B.Tate)가 김제의 거부 조덕삼을 만나 전도하면서 시작된 교회입니다. 조덕삼은 자기 집에서 머슴살이하던 이자익을 전도하여 함께 신앙생활을 하다가, 1905년 함께 세례를 받고 함께 집사가 되고 영수가 됩니다. 1907년 처음으로 장로를 뽑을 때, 사람들은 당연히 조덕삼씨가 될 줄 알았습니다. 조덕삼은 김제의 최고 갑부였고, 교회를 지을 땅을 헌물 하였고, 교회 재정의 대부분을 담당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동네 많은 사람이 조덕삼의 소작농이었고 나이도 조덕삼이 이자익보다 15살 많았습니다. 그런데 투표결과 조덕삼은 떨어지고, 이자익이 장로로 피택이 되었습니다. 모두 당황하여 술렁거리기 시작할 때 조덕삼이 일어나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 금산교회는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여 이자익 장로를 잘 받들고 더욱 교회를 잘 섬기겠습니다.”
그냥 인사치레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2년 뒤, 1909년 장로가 된 조덕삼은 1910년 이자익을 평양신학교에 보내고 6년 동안 모든 학자금과 생활비 일체를 지원하면서 그를 협력했습니다. 그리고 이자익이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자, 그를 김제 금산교회의 목회자로 청빙 하는 데 가장 앞장서서 지지하여 그와 함께 교회를 섬기는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주인과 머슴으로 시작되었지만. 서로를 받아 나중에는 목사와 장로로서 함께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웠던 이 스토리는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반면에 양반이라는 신분을 하나님의 집 세우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고집하다가 성령 안에서 함께 맛보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는 하나님의 나라를 놓쳐버린 홍문동교회와 안동교회의 이야기는 얼마나 덕스럽지 못하고 추한 이야기입니까? 이들의 잘못이 오늘 우리에게 또 다른 모습으로 재현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랑으로 하지 않는 지식과 믿음과 자유의 발휘는 모두 그렇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화평의 일을 하고 덕을 세우기 위해서 힘쓰라고 했습니다. 덕을 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는 하나님의 집으로 함께 세워져 가기 위해서는 서로 기다려주어야 하고 받아주어야 하며, 서로 손해 보고 양보하고 서로를 위해 나의 권리와 지식과 자유를 절제하고 희생하면서 섬기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를 그렇게 받아주고 계시며 기다려주고 계심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를 받고 기다리기 위해서 하나님은 늘 손해 보십니다. 늘 당신의 권리를 우리를 위해 내려놓고 양보하십니다. 그렇게 우리 안에 성령의 통치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가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유가 없는데도 그렇게 하십니다. 사랑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 할 때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허락되는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경험되고 나누어진다고 하십니다. 그런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박홍섭목사 / 한우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