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화려한 휴가”
영화 <화려한 휴가>를 가족과 함께 보았다. 80년 격동기를 살았던 우리 세대는 <화려한 휴가>라는 말만 들어도 그것이 광주민주화운동임을 알지만, 다음 세대인 아이들은 현대사에 그런 아픔이 있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기에 이번 기회에 민주주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하고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알게 해주고 싶어 함께 영화를 보러 갔다.
1.광주민주화운동의 역사적 고찰
5 18은 전두환의 폭력적 통치를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외치던 시민들을 무참히 살해한 '대학살' 사건이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지게 된 동기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그 당시 부산과 마산에서 박정희의 장기집권에 반대한 데모가 발생한다. 이른바 부마항쟁이다. 김재규는 이제 민심이 박정희에게 떠났다고 판단하고 총을 쏘았다.
그후 전두환이 12월 12일 쿠테타를 일으켰고 당시 참모총장이던 정승화를 체포한다. 그리고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그에 반대하여 일으킨 항쟁이 5. 18이다. 그 당시에는 광주사태라고 불리워졌다. 집권자의 입장에서 보면 동학혁명이 동학난인 것처럼, 그것은 단지 하나의 ‘사태’에 불과한 것이었다. 민중이 정통성 없는 권력에 반대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반대한다고 하여 총으로 죽이는 것은 민주주의를 포기하고 스스로 헌법을 위배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광주 민중 학살은 살인행위이며,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군사정권은 살인집단이라 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은 불합리한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민족성을 가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농민수탈과 관리들의 부정부패에 반대하여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을 민주화 운동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 비록 동학농민운동이 실패로 끝나 집권자에 의해 동학난으로 기재가 되었지만 민주화에 대한 정신마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우리 민족의 민주화 투쟁은 경상도와 전라도, 특히 전라도를 중심으로 많이 일어났다. 전라도가 우리나라의 최대곡창지대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전라도 사람들이, 가장 많이 생산하고 가장 많이 빼앗겼다. 왜놈들도 전라도를 중심으로 식량을 탈취하였고, 조선조도 마찬가지였다. 식량이 가장 많이 생산되는 땅에,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살았던 곳이 바로 전라도였다. 전라도 민중들이 고된 노동으로 식량을 생산해 내면, 서울에서 관리들이 내려와 싹 거두어 가고, 민중들은 굶주려야 했다. 그것이 전라도의 역사였다. 그래서 전라도 사람들의 저항의식 이 다른 지역 사람들에 비해 더욱 깊이 발달하였고, 전라도가 우리 근대사 민주화투쟁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동학농민운동으로 시작된 우리민족의 민주화 투쟁이, 3.1운동을 거치고 419를 거쳐 5.18까지 이어져왔고, 1980년 전라도 광주에서, 그 동안 맺혔던 응어리가 다시 한 번 폭발했다.
박정희가 서거할 당시에는 우리 민중들이 이제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천할 준비가 되어있었기 때문에, 전두환의 등장은 하나의 비극이었다. 전두환은 자신도 박정희가 그랬던 것처럼 민중들의 지지를 받을 것이라고 착각했지만, 전혀 아니었다. 전두환이 집권하려하자, 전두환 일당들이 상상하지 못했던 결렬한 데모가 곳곳에서 일어났고 당황한 전두환은 무조건 잡아 죽이면 되겠지 라는 무식무지한 생각으로 5.18과 같은 엄청난 사건을 저질렀던 것이다. 특히 전라도는, 우리나라가 산업화되던 시기에 개발 소외지역이었다. 박정희가 경상도출신인데다가 전라도출신 김대중이 박정희를 상대로 민주화 투쟁을 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전라도는 계속 개발에서 소외되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중앙정치권을 향한 전라도 사람들의 분노는 더 격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것을 전두환이가 이용했다고 볼 수 있다. 전두환도 경상도 출신이다. 그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같은 경상도 사람들에게서 지지를 받아야만 했다. 만약 5.18이 부산에서 일어났다면 어찌 되었을까? 전두환이 그래도 대통령이 될 수 있었을까? 그 당시 광주사태라 이름붙이고 김대중을 빨갱이로 몰아부쳤으며, 광주사태를 간첩들이 배후조종하는 것이라고 미국의 묵인하에 전 국민을 속였다.
광주 시민들이 흘린 피는 결코 헛되지 않았다. 아니 동학농민군들이 흘린 피가 결코 헛되지 않았다. 민주화를 향한 끊임 없는 노력이 결국 6.29 선언을 이루어냈고 민주화를 이루어낸 것이다. 1900년대는 어쩌면 피의 역사로 기록될 지 모른다. 세계대전과 한국전쟁과, 보도연맹 사건, 거창 양민학살, 제주도 4.3,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려운 사건들이 일어났다. 그 중에 5.18이 마지막 학살이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민주화된 시대를 살고 있다. 물론 은밀한 의미에서는 민주화가 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아직껏 자본가와 노동자들의 대립이 끊임 없이 일어나고 있고 잔학한 범죄들이 잇따르고 있기에 완전한 의미의 민주화가 달성되지 않았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으나, 최소한 지금은 언론,집회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고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을 우리 손으로 뽑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완전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민주화가 되었다는 것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다. 또한, 앞으로 완전한 의미의 민주화를 달성하기 위해 끊임 없이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것이 민주화를 위해 희생된 광주 시민들과 투사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2.영화<화려한 휴가>
영화 내내 군인들에 의한 시민 폭력이 자행되는 장면이 나온다. 군인들이 오지 않았다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평범함 속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사람들이 총에 맞아 죽고 몽둥이에 맞아 죽어 결혼식 대신 장례식이 치루어졌다. 누구도 개인의 행복을 말살할 권리는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를 적으로부터 수호하여 국민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해주어야할 군인들이 국민들에게 총을 쏘는 말도 되지 않은 상황이 벌어졌다.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많은 장면이 군인들에 의한 시민들의 폭력 내지는 학살에 할애되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실제로 저렇게 하였을까 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말들이 많았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냐?” 그런데 그 당시에 광주에 있었던 사람들은 영화보다 상황은 더 처참했다는 전언한다. 영화 <화려한 휴가>가 그 당시의 비참함을 다 표현해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영화를 보면 끔찍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인데, 그것도 그 당시의 참혹함에는 비할 수 없다고 하니 그 비참함이 얼마 정도였는지 감히 상상이 가지 않는다.
지금도 수 많은 사람들을 죽인 전두환이 살아있다. 대통령 재임시절 수천억을 부정축재하고도 자신의 재산이 29만원 뿐이라고 말하는 뻔뻔함에 기가 막힐 정도이다. 역사에 이름이 남는 길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업적을 기리는 내용이며 하나는 욕을 먹는 일이다. 전두환은 수명을 다하고 죽을수도 있겠지만 역사는 후대에 길이길이 전두환을 욕할 것이다.
영화<화려한 휴가>는 작위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겠지만 아주 잘 된 영화라 생각한다. 최소한 그 날 피흘리며 죽어간 사람들을 다시 영화 속에서 살려내고 후대 사람들에게 그 사람들을 잊지 않도록 하는 효과를 충분히 달성했다고 생각한다. 그 당시의 상황을 잘 몰랐던 성인들에게는 다시한번 그들의 피에 대해 생각해보는 기회를 주었으며, 지금의 자유가 그들의 피에 대한 댓가라는 생각을 갖게하여 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했을 것이며, 영화를 본 다음 세대의 아이들에게 민주주의가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가를 깨닫게 해주어 다시는 그런 역사를 반복시키지 않을 단초를 제공했다고 생각한다.
또한, 시민들을 죽인 군인들은 희생양인지, 아니면 살인자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여지를 남겨두었다.
첫댓글 초등학교 아이들을 데리고 부모가 함께 와서 보는 것을 봤는데 그 아이는 그 영화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 것이며 무엇을 느끼고 갔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영화를 보는 동안 여기 저기서 훌쩍 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편하지 않는 분들과 갔기에 차마 내놓고 울지는 못하고 저 역시도 소리 없는 눈물을 훔쳤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