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재 지; |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569 송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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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7년(867)에 도의선사(道義禪師)가 처음으로 세운 절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583년(신라 진평왕 오년(新羅 眞平王 五年))에 터를 잡았고, 867년(경문왕 칠년(景文王 七年))에 도의선사(道義禪師)가 창건(創建)하였고 그뒤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중창(重創)하였다고 한다. 그후 1622년(광해군(光海君) 14년)에 덕림선사(德林禪師)가 중창(重創)했고, 조선(朝鮮) 인조(仁祖)때에 벽암대사(碧岩大師)에 의해 절의 확장공사(擴張工事)가 이루어졌고, 조정(朝庭)에서는 송광사(松廣寺)라는 사호(寺號)를 내려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재(現在) 이 절의 이름을 종남산(終南山) 송광사(松廣寺)라 하는데 종남산(終南山)이란, 도의선사(道義禪師)가 절터를 구하러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이곳에 이르러 땅속에서 풍부(豊富)하게 쏟아져 나오는 영천수(靈泉水)를 발견(發見)하고 여기가 큰 절을 세울 곳이라고 생각하여 더 이상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을 그만두었다는 데에서 유래(由來)되었다 한다. 현재 이곳에 보존(保存)되어 있는 전주부송광사개창지비(全州府松廣寺開創之碑)의 내용(內容)을 보면, 송광사(松廣寺)는 1622년(광해군(光海君) 14년)에 승려(僧侶) 응호(應浩), 승명(勝明), 운정(雲淨), 덕림(德林), 득순(得淳), 홍신(弘信) 등이 보조국사(普照國師)의 뜻을 따라 처음 세운 것이라 한다고 한다. 보조국사(普照國師)는 고려시대(高麗時代) 도승(道僧)으로 조계종(曹溪宗)의 창시자(創始者)이며 호(號)를 목우자(牧牛者)라 하는데, 그가 전주(全州)의 종남산(終南山)을 지나다가 영천(靈泉)이라 부른 우물을 발견(發見)하고 물을 마셔보니 그 맛이 특이(特異)하여 그는 이 물로 인해 이곳이 앞으로 큰 절터가 될 것이라 생각하고 샘 주위(周圍)의 네귀퉁이를 돌로 쌓아둔 뒤 순천(順天)으로가 송광사(松廣寺)를 지었다고 한다. 그 뒤 그는 제자(弟子)들에게 전주(全州) 종남산(終南山)을 지날 때 그곳에 절터를 마련해 두었다는 것과 거기에 반드시 절을 지으면 크게 번창할 것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뜻을 옮기지 못하다가 1622년에 이르러서 전술(前述)한 응호(應浩) 등의 승려(僧侶)들에 의하여 14년(年)의 공사(工事) 끝에 1636년(인조 14년(仁祖 14年))에 완성(完成)을 보게 되었으며, 당시 무주(茂朱) 적상산(赤裳山) 안국사 주지(安國寺 住持)로 있던 벽암대사(碧岩大師)를 개창조(開創祖)로 삼았다고 한다. 이때 절터의 땅은 전술(前述)한 승명(勝明)의 증조부(曾祖父)인 이극룡(李克龍)이 희사했다고 기록(記錄)되어 있다. 건물(建物)이 모두 완성(完成)된 뒤 벽암대사(碧岩大師)를 모시고 50일 동안 화엄법회(華嚴法會)를 열었는데 이때 수천명(數千名)으로부터 시주(施主)를 받았다고 한다. 절의 이름을 보조국사(普照國師)의 뜻을 받들었다는 의미(意味)에서 종남산(終南山) 송광사(松廣寺)라 하였다는 기록(記錄)도 있다. 현재(現在) 송광사(松廣寺)에는 대웅전(大雄殿), 나한전(羅漢殿), 명부전(冥府殿),일주문(一柱門), 금강문(金剛門), 천왕문(天王門), 종루(鐘樓)(범종각(梵鐘閣)), 관음전(觀音殿) 등의 건축물(建築物) 및 개창비(開創碑), 사적비(史蹟碑) 등의 비(碑)가 남아있다. 대웅전(大雄殿)은 송광사(松廣寺)의 본전(本殿)으로서, 석가여래(釋迦如來)를 본존불(本尊佛)로, 좌우(左右)에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와 약사여래(藥師如來)가 안치(安置)되어 있다. 전면5간(前面5間), 측면3간(側面3間)의 팔작(八作)지붕 다포계(多包系)건물로서, 「대웅전(大雄殿), 의창군서(義昌君書)」, 라는 편액(扁額)이 걸려 있다. 의창군(義昌君)은 선조(宣祖)의 8남이며, 광해군(光海君)의 아우로서, 인조(仁祖) 15년(1636)에 세운 송광사개창비(松廣寺開創碑)의 비문(碑文)을 썼다. 아마도 이때에 쓴 것으로 보이며, 이는 대웅전(大雄殿) 건립년대(建立年代)에도 참고(參考)가 된다. 그러나, 「성상즉위구년정사육월초이일기(聖上卽位九年丁巳六月初二日記)」라는 상량문(上樑文)이 있는바, 이는 철종(哲宗) 8년 정사(丁巳)인 것 같다. 건물내(建物內) 서벽(西壁)에는 불탱화(佛幀畵)가 있는데, 「함풍칠년정사십일월초육일(咸豊七年丁巳十一月初六日)」이라 적혀있다. 이는 건물중수년대(建物重修年代)인 철종(哲宗) 8년이다. 불탱화(佛幀畵)는 가로 258㎝, 세로 385㎝이다. 평면(平面)규모는, 앞면의 중앙어간폭(中央御間幅)은 375㎝, 좌우매간폭(左右每間幅)은 345㎝, 총길이 17.55m, 옆면은 중앙간폭(中央間幅)이 315㎝, 앞뒤간폭(間幅) 345㎝, 총너비 10.05m, 주심(柱心)에서 댓돌끝까지는 290㎝이다. 건평(建坪)47.3평, 내부(內部)는 고주(高柱)를 세우고, 간벽(間壁)을 가르고 그 앞에 불단(佛壇)을 짜서 삼존불좌상(三尊佛坐像)을 안치(安置)하였는데, 천정(天井)에 닫집은 짜지 않았다. 좌우형량(左右衡梁)머리에는 용(龍)을 조각하고, 천정중앙(天井中央)의 우물반자에는 오엽(五葉)의 보상화문(寶相華文)을 그리고, 남면(南面)과 양측면(側面)의 빗반자에는 무악상(舞樂像)을 그렸다. 남면중앙(南面中央)에 3면, 그 좌우(左右)에 각 2면, 동서측면(東西側面)에 각 2면씩이다. 남면서측(南面西側)에는, 무용도(舞踊圖)와 횡적도(橫笛圖), 중앙(中央)은 좌로부터 비파(琵琶), 나팔의 취주도(吹奏圖)와 무용도(舞踊圖), 남면동측(南面東側)에는 천도진상도(天桃進上圖)와 장고도(杖鼓圖), 동면(東面)에는 무용도(舞踊圖)와 용고(龍鼓), 서면(西面)에는 무용도(舞踊圖)와 쟁(錚)등 취타도(吹打圖)를 그렸다. 보물 제1243호로 승격지정됨에 따라 1996년5월29일 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