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
오랜만에 장을 봐 왔다. 장 보러갈때는 어쨌거나 저쨌거나 늘 준수와 함께 였었는데, 양 손 가득 혼자서 장을 봐 오는 기분도 뭐 그다지 나쁘진 않네. 장 보러 간다는 은혜의 짤막한 문자 하나에 회사에 있는 준수는 바로 전화를 했다. 너, 제발 쓸데 없는 거 사지마. 전화해서 첫마디가 그거였다. 기분이 나빠져서는 쓸데 없는건지 있는건지 아저씨가 어떻게 알아요! 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집에 몇 개씩 있는 고무장갑은 또 살 필요 없잖아. 타이르듯이 말하는 준수의 목소리에 은혜도 따라 웃었다.
뭐, 이거 담고 저거 담고 하다보면 집에 있는 건지 없는 건지 까먹어 몇 개씩 주워 들곤 했다. 그럴 때마다 준수는 면박을 줬다. 넌 고무장갑이 있는 지도 없는 지도 잊어버려? 그 땐 정말 잊어버려서 그런건데, 그 때부터 장 보러 간다고만 하면 고무장갑 타령을 한다. 은근히 치사한 구석이 있는 아저씨라니까. 전화기 너머 야 김준수! 하고 꽤나 친근하게 준수를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고서 준수는 이따가 보자며 전화를 황급히 끊었다. 전화 끊고 나서, 또 한 참을 멍하게 서있었다. 누구지? 싶은 마음에.
으윽, 양 손 가득 봉지를 들고서 천천히 걸어오는데 아파트 건물 앞 부터가 소란스러웠다. 왜 저러지? 싶어 고개를 갸웃갸웃 거리면, 저마다 교복을 차려 입은 여고생들이나 여대생들 같았다. 뭐라도 찍나? 주변을 둘러보는데 왠 모자를 푹 눌러 쓰고 마스크를 쓴 남자가 아파트 건물에서 나왔다. 그러자 꺅, 좋아서 나자빠지는 여자들. 남자는 빠르게 검은색 벤 위에 올라탔고 그 벤을 쫓아가는 여대생 무리들에, 은혜는 입을 떡 벌렸다.
“ 갑자기 왠 난리예요? ”
못 말리겠단 표정으로 고갤 절레절레 내 저으며 돌아서는 경비 아저씨에게 물었다.
“ 아가씨도 정윤호라고 아는 감? ”
“ 정윤호요? 알죠, 당연히. ”
“ 오늘 새벽에 여기로 이사왔거든. 어떻게 알고 벌써부터 저 난리여. 이거 주민들 민원 들어오면 복잡한디, 왜 하필 여기로 이사왔는지 원. ”
경비 아저씨는 골치 아프단 표정으로 쯧쯧 거리더니 이내 경비실 안으로 들어갔다. 잠깐, 방금 남자가 정윤호라고? 은혜는 생각했다. TV만 틀면 요새는 입 아프게 정윤호에 대한 이야기를 떠들었다. 모델 정윤호, 배우 정윤호. 영화가 몇 백만을 넘었다는 둥, 드라마가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는 둥. 정윤호가 나오는 드라마를 한 번 본적이 있다. 재벌 2세로 나오는데, 솔직히 연기력은 모르겠으나 키가 크고 잘생겨서 확 눈에 들어오긴 했었다. 그 사람이 우리 아파트에 이사를 오다니. 기뻐해야하는 건가. 은혜는 고갤 갸웃거리고는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오늘의 메뉴는 김치참치찌개! 집에 돌아와서 맛있게 먹어 줄 준수의 표정에 은혜는 기분이 좋아졌다.
저도 모르게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데. 막 담뱃불을 붙인 담배를 입에 물고서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얼굴도 잘 모르는 이웃이겠거니, 하고 대소롭지 않게 생각한 채 돌아서려는데. 잠깐, 어디서 많이 봤는데? 물끄러미 남자를 쳐다보는 은혜. 그리고, 그런 은혜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되려 도전적이라면 도전적인 눈빛으로 쳐다보는 남자. 둘의 시선이 마주치고, 은혜는 놀라서 봉지를 떨어뜨렸다. 봉지에 있는 과일들과 포장한 채소들이 뒹굴어 떨어져 나왔다.
아악. 나지막히 외치며 얼른 자세를 굽혀 주워드는 은혜. 그리고, 남자는 그런 은혜를 내려다보다가 저도 따라 앉아 봉지에 다시 담아주었다. 혹여나 먼지가 묻었을까, 호- 불어주기도 하면서. 주저 앉은 남자와 은혜의 시선이 마주쳤다.
“ ...정..윤호네. ”
은혜의 반응에 담배를 물고 있는 윤호는 픽, 웃어보였다. 정윤호 아니예요? 도 아니고. 떨떠름한 얼굴로 정윤호네. 라니. 하지만 윤호의 웃음은 둘째 치고, 당장 저를 괴롭게 하는 담배 연기에 은혜는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은혜의 얼굴을 힐끗 본 윤호는 별 다른 말 없이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왼 손가락 중지와 검지 사이에 꼈다.
“ 응. 정윤호 맞아. ”
마지막 사과 하나를 봉지에 마저 담으면서, 윤호는 여유롭게 대답했다. 가라앉은 머리는 단정하게 느껴졌다. 드라마에서나 영화에서는 뭐 그렇게 쭈뼛쭈뼛 세우고 난리를 쳐놨는지. TV에서는 되게 날카롭게 보였는데, 또 실제로 보니까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은혜는 얼른 봉지를 들고 일어섰다. 윤호도 그런 은혜를 따라 일어섰다. 당황스러운지 입을 꾹 다물고 비밀번호를 누르려는 은혜.
“ 이사왔어, 새벽에. ”
007 첩보작전을 방불케했다.
우리 초면 아닌가. 은혜는 윤호를 돌아보았다. 어느덧 담배를 다시 입에 문 채로 피식, 하는 웃음과 함께 은혜를 보고 있는 윤호. 은혜는 얼른 돌아섰다. 이상한 남자다. 아니, 이상한 연예인이다. 아무리 얼굴이 어려보인다지만 초면인 옆집 사람에게 반말이나 찍찍 해대는 꼴이라니.
“ 같이 사는 사람은 나와서 확인하던데. 아침에 말 안했어? ”
준수가 알았는 지는 몰랐다. 아침에 별 다른 말 없이 아침을 챙겨 먹고 나갔었는데. 하긴, 그 소란에 김준수가 잠에 안 깼을 리가 없다. 비밀번호를 누르던 은혜는 잠시 손을 멈췄다. 지금 이 남자, 준수와 자신의 관계를 무어라고 생각할까. ‘같이 사는 사람’. 뭔가 많은 뜻이 담겨 있는 것 같아 은혜는 괜히 어쩔 줄 몰랐다. 비밀번호를 누르지 않고 멍청히 서 있는 은혜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윤호. 윤호가 본 은혜는 어린 얼굴이다. 교복 입혀놓으면 영락없는 고등학생 같은.
“ 몇 달 안 지낼꺼야. 시끄러울 일은 없어. ”
사실 윤호의 목소리는 들리질 않는다. 괜히 부끄러워서 은혜는 얼른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섰다. 멍하게 닫혀진 문을 바라보는 윤호의 입술을 비집고 허, 하는 낮은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못 볼거라도 본 표정으로 정윤호네. 라고 말하지를 않나, 먼저 말을 걸었는데 다 무시하고 집 안으로 들어가버리질 않나. 어젯밤에 나왔던 남자는 되게 순해보이던데. 부부인가? 애인인가. 남매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닮은 부분이 하나도 없으니까 패스.
윤호는 잠시 닫혀진 문을 바라보다간 이내 피식, 웃고선 복도형으로 된 아파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깐 그렇게 시끄럽게 모여있다니, 분장을 한 윤호 매니저를 보고 좋다고 따라나서는 꼴이라니. 아무리 얼굴 다 가렸다고 하지만, 그렇게들 모르나. 윤호는 새롭게 담배를 하나 꺼내 다시 입에 물고는 라이터로 담뱃불을 붙였다. 그러던 윤호의 시선이 문득 다시 닫혀진 문으로 향했다.
양 손 가득 봉지를 들고서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생글생글 웃으면서 내리던, 이상한.. 여자.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잘 따돌렸다는 매니저의 문자를 확인 하고 윤호는 곧 있을 촬영 때문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어쩌다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영 적성과는 맞지 않는 게 분명하다. 잠이라도 좀 자둬야지, 싶어 윤호는 도어락 비밀번호를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한 숨 자고 일어났더니 어느덧 저녁 시간이 가까웠다. 부랴부랴 일어나 머리를 하나로 높게 올려 묶고서는 냉장고를 정리하고 저녁 준비에 한창이었다. 밑반찬도 새로 몇 가지 하고, 찌개도 끓이고. 그러다 보니 한 시간이 금방 갔고 시계바늘은 8시를 가르켰다. 준수의 퇴근 시간은 들쭉 날쭉이다. 어쩔 땐 오후 3시에 들어오기도 하고, 또 어쩔 땐 밤 12시가 넘어서. 아예 들어오지 못할 때도 있다. 그래도, 오늘은 일찍 들어온다고 했으니까.
늘 준비하던 저녁 식사였는데 오늘은 나란히 수저를 놓으면서 괜히 기분이 이상했다. 출근한 남편을 기다리는 여자 같아서. 괜히 설레기도 하고, 이런 제가 한심스럽게 느껴지기도 하고. 조금은 퍼석하게 느껴지는 얼굴을 두 손으로 몇 번 쓰다듬고는 은혜는 소파에 앉아 준수가 오기를 기다렸다.
10분, 20분. 다행히 은혜가 좋아하는 버라이어티 프로가 재방송을 하고 있는 중이라 지루함은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시간을 확인하고 나서야 조금씩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오늘도 늦으려나. 아닌데, 일찍 온다고 했는데. 은혜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시간을 보고서는 결국 핸드폰 플립을 열었다. 전화도, 문자도 한통 없는 핸드폰. 준수의 번호를 꾹꾹 누르는 은혜의 손길이 제법 익숙했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무미건조한 통화 연결음이 울렸다. 그리고 얼마 안되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여보세요? 평소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잔뜩 업이 된 듯한 준수의 목소리. 그리고 시끄러운 소리들. 준수는 여보세요, 라고 말은 하긴 했지만 주위의 다른 것을 신경 쓰고 있는 듯 했다. 결국 먼저 은혜가 입을 열었다.
“ 아저씨? ”
- 어, 은혜야.
“ 오늘, 일찍 온다고 해서 저녁 같이 먹으려고 기다리는 중인데. 늦어요? ”
- ..아아! 미안 미안, 지금 후배 녀석 하나 때문에 밖에 나와 있어.
은혜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 밖에 어디요? ”
바보 같이, 또 어린 애처럼. 제법 많은 생각을 하고 내뱉은 말인데 전화기 속 너머 준수는 듣고 있기나 한 건지. 영 대답이 없다.
- 야 김준수!! 너 내 말 듣고 있긴 한 거야?!!
- 은혜야, 미안한데 조금 있다가 다시 전화할게.
은혜가 무어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허망한 표정으로 끊겨진 핸드폰 액정을 쳐다보던 은혜는 낮은 한숨과 함께 플립을 닫았다. 시끌벅적한 소리와 여자의 목소리. 그리고 끊겨진 전화. 은혜는 플립을 닫은 핸드폰을 소파 저 멀리 던져버렸다. 그러다 결국, 다시 손을 뻗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다시 전화한댔으니까, 언제 전화할지 모르는 일이니까. 시간이 많이 지나고 있는 시간을 바라보며 은혜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 찌개, 내가 엄청 성의를 들여서 만든 거니까 저건 꼭 먹고 자야되 김준수.
번화한 술집. 벌써 몇 시간 째 혼자 술에 취해 울고 불고 난리를 치는 혜진과 그 옆에 앉아 말 없이 그런 혜진을 지켜보기만 하는 준수. 급하게 은혜와의 통화를 끊고 나서, 또 한번 술을 따르려는 혜진의 술잔을 준수가 빼앗았다.
“ 그만. 일어나자 빨리. ”
“ 싫어어!! 지금이 몇신데 벌써 일어나? ”
“ 나 집에 일찍 들어가봐야되. ”
“ 꼭 와이프 있는 사람처럼 말한다아. 재수 없게에. ”
혜진은 술에 취해 조금 풀린 눈을 흘기며, 준수의 손에 들린 잔을 빼앗아 다시 술을 따랐다. 못 말리겠다 정말, 자켓을 챙겨 일어서려던 준수는 결국 다시 의자에 엉덩이를 붙여야만 했다. 선 본 남자와 잘 안된다고 했다. 니가 뭐가 아쉬워서 선을 봐서 남자를 만나냐며 처음엔 제법 열심히 위로를 했지만 혜진은 들을 생각도 없었다. 그저, 선 본 남자와 잘 안됐다고 난리 부르스다. 아니 남자가 얼마나 잘났길래? 준수는 그런 혜진을 보며 픽, 웃고는 제 잔에도 술을 따라 한 모금 마셨다. 목으로 넘어가는 술의 느낌이 쓰다, 준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 야, 나 오늘 여기 있는 술 다 마시고 갈꺼니까 그렇게 알어. ”
“ 누가 너한테 여기 있는 술 다 준대? 적당히 하고 일어나자. ”
“ 싫어어!!! 적당이란 나에겐 없어!!! 최고 아님 바닥이야!! 니가 그랬잖아!! ”
할 말 없게 하는 건, 꼭 누구 닮았다. 준수는 흠흠- 헛기침을 했다. 그런 준수의 모습에 피식, 웃어보이는 혜진. 웃는 모습이 참 싱그럽고 꾸밈 없이 예쁜 여자다.
“ 아아, 귀여워 준수 선배. ”
“ 술 많이 취했다 너. ”
“ 웃기지마. 난 인정할 건 인정하는 여자야. 너 귀여워. ”
“ 그렇게 제발 선배라 했다가 너라 했다가 왔다갔다 거리지마. 헷갈려. ”
“ 뭐가 헷갈려? 내가 선배라 부르든 너라 하든, 니가 나한테 반말하는 건 똑같은데. ”
“ 왜 창민인 꼬박꼬박 심선배면서 나는 김준순데. ”
“ 넌 귀엽잖아. 심 선배는 카리스마가 있고. ”
카리스마는 개뿔.
속으로 생각하며 입을 삐죽이고 있는데 혜진이 툭, 준수의 볼을 쳤다. 너 지금 심선배 욕하고 있지? 혜진의 물음에 준수는 어이없이 웃어버렸다. 근데 이 것이 보자보자 하니까 자꾸만 기어 올라. 스물 여덟. 혜진도 절대 적지 않은 나이이긴 하지만 생각하는 건 아직도 철부지 어린 애 같이 귀엽기만 하다.
그렇게 한 시간을 혜진의 말도 안되는 술주정을 들어주며 앉아 있다가는 이대론 안되겠다 싶어, 싫다는 혜진을 억지로 끌고 술집을 나섰다. 어느덧 깜깜해져버린 밤 하늘. 별 하나 뜨지 않은 깜깜한 서울 하늘. 준수는 혜진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
“ 데려다줄게. 타자. ”
“ 나 멀쩡해. 집에 혼자 갈게. ”
“ 그렇게 마시고 운전하고 가겠다고? ”
“ 택시 타고 갈꺼야. ”
“ 그냥 타, 위험해. ”
“ 김준수. ”
혜진의 손을 이끌다 말고 혜진의 목소리에 준수가 걸음을 멈춰섰다. 돌아보는 준수. 그런 준수를 또렷이 응시하는 혜진.
“ 나 오늘, 무지하게 슬픈 날이야. ”
“ 응. 알아. ”
“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김준수한테 위로 받았어. 더 슬퍼지게. ”
“ ..... ”
“ 지도 아직 못 잊었으면서 누가 누굴 위로를 해. 너도 참, 속 없다. 그치? ”
전혀 악의가 없는 말이라는 것 쯤은, 준수도 안다. 대답 없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준수는 웃어보였다.
“ 나도 미쳤지이. 이렇게 형편 없는 니가 뭐가 좋다고, 그 잘난 남자를 걷어 차니. ”
“ .....? ”
“ 이런 내가 드럽게 한심해서 오늘 술 좀 마셨다. 너랑 같이 마신 게 조금 아이러니지만. ”
“ ......! ”
“ 간다. 내일 보자. ”
긴 생머리를 쓸어 넘기며, 준수를 쳐다보던 혜진은 이내 손을 흔들고 높은 구두 소리를 내며 돌아섰다. 준수는 침을 삼켰다. 목울대가 잠시 일렁였고, 준수는 갑작스레 밀려오는 두통에 눈을 지긋이 감아버렸다.
돌아서는 혜진은 몇 번이고 주저앉을 뻔 했다. 자꾸만 힘이 풀리는 두 다리에 힘을 주고 계속해서 걸었다. 그러다 아주 준수와 멀어졌을 때, 하- 낮은 숨과 함께 주저앉았다.
“ 심장 터지는 줄 알았네. ”
어느새부터 고여있었는 지. 어느덧 젖어버린 눈동자로 깜깜한 서울 하늘을 올려다보는 혜진. 아, 별 하나 없냐. 더 우울해. 혜진은 혼자 그렇게 중얼거렸다. 별 하나 없는 밤 하늘 아래, 내 첫사랑 김준수는, 여전히 반짝반짝 거렸다.
침을 삼켰다. 자꾸만 TV와 시계를 번갈아 보는 은혜의 눈이 말라갔다. 곧 전화한다던 준수에게선 전화가 오질 않았고 집에도 들어오고 있질 않는다. 이미 다 식어버린 찌개와 밥, 반찬들. 덩그러니 놓여져 있는 수저와 젓가락. 은혜는 식탁 위에 예쁘게 차려진 음식들을 보며 눈물이 나올 뻔 한 걸 애써 참고는 여전히 시끄러운 TV 브라운관으로 시선을 돌렸다. 소파에 앉아 두 무릎을 감싸안은 채, 은혜는 어린 애처럼 손톱을 깨물었다. 준수가 싫어하는 행동 중 하나라서 안 하려고 노력하던건데.
그 순간,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리고 현관 앞 주황색 불이 켜졌다. 조금은 노곤한 모습으로 신발을 벗고 들어서는 준수. 소파에 앉아 준수를 쳐다보는 은혜를 보던 준수는, 그제야 미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 기다렸어? ”
“ ..밥 먹었어요? ”
준수의 말엔 대답도 않고 은혜가 물었다. 은혜의 질문에 잠시 당황한 듯 한 준수는 이내 고갤 내저었다. 아니, 안 먹었어. 은혜는 소파에서 일어나 식탁이 있는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앉아요. 짧게 말하고서는 먼저 앉아 수저를 드는 은혜. 찌개의 뚜껑을 열자 다 식은 김치찌개가 보이고 은혜는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은혜를 따라 주방에 들어서는 준수. 은혜는 애써 고개를 푹 떨군 채 젓가락으로 밥을 떠 입에 넣었다. 꼭꼭 씹어먹어야지. 밤 늦게 먹는거니까, 더 꼭꼭.
“ 은혜야. ”
“ ...아저씨도 빨리 먹어요. 데우기 귀찮으니까 그냥 먹자. ”
“ 유은혜. ”
“ ....... ”
“ ..왜 울어. ”
준수는 입고 있는 자켓을 벗을 생각도 없이 물었다. 왜 울어 은혜야. 그리고 그 말에 은혜는 천천히 숟가락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고 잠시 숨을 고르다간 어느덧 눈물이 가득 찬 눈으로 서 있는 준수를 올려다보았다.
“ 일찍 온다며. 밥 같이 먹는다며!! 먼저 먹으라고 전화라도 해주던가. 전화해준다고 했으면서 왜 안 해주는데요 왜! 사람 기다리는 거 생각 안해요? 전화기 붙들고 아무것도 못할 거 생각 못 하냐구요!! ”
“ 은혜야. ”
“ 왜 사람 아무것도 못하게 만들어요. ”
“ .... ”
“ ..왜 자꾸만, 날 그렇게 만들어요. ”
눈물이 볼을 타고 떨어져내렸다. 은혜는 우악스럽게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먹기 귀찮다, 내가 내일 치울테니까 그냥 들어가서 자요. 붉어진 눈시울을 한 채로 은혜가 식탁에서 일어나 준수를 지나칠 때, 준수가 그런 은혜의 손목을 붙잡았다.
“ ..왜..그러는데. ”
“ .... ”
“ ..그러지마. ”
“ .... ”
“ 하루종일 전화기 붙잡고 기다리지도 말고, 밥 안 먹고 이 시간까지 버티지도 말고. ”
“ .... ”
“ ...그러지마라 은혜야. ”
준수는 희미하게 웃어보이며, 어느덧 은혜의 손목이 아닌 손을 쥐고 말했다. 편안한 표정과는 다르게, 단호한 말투로. 그러지마, 은혜야.
....그런 감정, 나한테 갖지마.
은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픽, 힘 없이 웃으며 손을 잡은 준수의 손을 살짝 힘 주어 뿌리쳤다. 조용한 공기. 적막한 거실. 말이 없는 두 사람.
“ ..잘생기질 말던가. ”
“ ... ”
“ ..나쁘다 김준수. ”
“ ... ”
“ ...말 한번 참 밉게 해. ”
그리고 은혜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방 문을 닫고, 은혜는 터져 나오는 눈물을 애써 모른 척 한 채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간절한 얼굴로 그러지 말라고 말하던 김준수와, 그 말에 세상이 무너질 것 같았던 유은혜. 은혜는 침대에 앉아 멍청히 닫혀진 방문을 바라보았다. 방문 너머에 있을 김준수는 무슨 표정을 하고 있을까. 웃고 있을까. 아님, 나와 같이 멍청히 이 닫혀진 방문을 바라보고 있을까.
진작에야 알고 있다. 이 남자에게 내가 들어갈 자리라고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는 거. 하지만, 어느덧 마음 한 구석에서 기대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옆에서 볼 수만 있어도 행복하다는 마음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린 채, 언젠가는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을까 하는 그런 못된 기대.
그 날은, 무척이나 아팠다. 쉽게 상상할 수 없을만큼. 숨 죽여 울다가, 그냥 그렇게 잠이 들어버렸다.
끝 없는 이야기. 여섯번째
오랜..만이죠?ㅎㅎ
첫댓글 오랜만이예요 ~혜진이도 역시 준수를 짝사랑하고있네요 .. 은혜는 어떡해요 너무 몰입해서 읽었는지 저도 눈물이 마구마구 쏟아지네요 . 준수도 서연이잊기 쉽지않을텐데 만만치않은 은혜랑혜진이둘다 준수를 .. 아 그리고 윤호가 모델로 등장하다니 반가워요 ^^ 울어서그런지정신없는코멘이네요 ;: 다음편기다릴께요 ~
엉엉 혜진이도 준수를! 진짜 김준수 인기쟁이 ㅠ_ㅠ.. 하긴 우리준수가 진심 멋있고 귀엽긴해 으컁컁.. 아니그게아니라.. 크큭 윤호등장! 우와 은혜 준수 윤호 삼각관계겟죠? 포스있는 정윤호를 생각하니 두근두근 거리네요 .. 근데 혜진이도 막 마음아픈데.. 혜진이랑 준수, 은혜랑윤호 이렇게 잘되야되는건가 ㅋㅋㅋㅋ? 아니지, 그래도 역시 은혜는 준수죸 ㅋㅋ 혜진이는..음음. 유천이 ㅋㅋㅋ?
혜진이의 첫사랑이군요~ ㅎㅎ 준수 좀 나빴네요~ 은혜가 기다리고 있는데 은혜가 울만했어요.. 읽는 저도 울컥했어요.. 윤호가 등장했네요~~ 은혜랑 이웃이군요~ 윤호가 은혜를 관심있게 보는것 같은 이 느낌~ ㅎㅎ 담편도 기다리고 있을게요~~
혜진이도 은혜도..순애보 인것같아요 한사람만을.... 혜진이가 가슴이 터질것같다 했는데 일부러 그러잖아요 좋아하는 사람앞에서 쿨한척하고 막그러는거 은혜와 준수를 보면 찡해요 진짜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