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가섭과 걸식
佛告大迦葉(불고대가섭)하시되 汝行詣維摩詰問疾(여행예유마힐문질)하라 迦葉(가섭)이 白佛言(백불언)하되 世尊(세존)이시여 我不堪任詣彼問疾(아불감임예피문질)이니다 所以者何(소이자하)오 憶念(억념)하니
我昔(아석)에 於貧里而行乞(어빈이이행걸)이러니 時(시)에 維摩詰(유마힐)이 來謂我言(래위아언)하되
唯大迦葉(유대가섭)이여 有慈悲心(유자비심)하되 而不能普(이불능보)하야 捨豪富(사호부)하고
從貧乞(종빈걸)가 迦葉(가섭)이여 住平等法(주평등법)하야 應次行乞食(응차행걸식)이며
爲不食故(위불식고)하시되 應行乞食(응행걸식)이며 爲壞和合相故(위괴화합상고)로 應取團食(응취박식)이며
爲不受故(위불수고)로 應受彼食(응수피식)이며 以空聚想(이공취상)으로 入於聚落(입어취락)하며
所見色(소견색)은 與盲等(여맹등)하고 所聞聲(소문성)은 與響等(여향등)하며 所齅香(소후향)은
與風等(여풍등)하고 所食味(소식미)는 不分別(불분별)하며 受諸觸(수제촉)하되 如智證(여지증)하고
知諸法(지제법)을 如幻相(여환상)하야 無自性(무자성)하고 無他性(무타성)이니 本自不然(본자불연)하고
今則無滅(금즉무멸)이니다 迦葉(가섭)이여 若能不捨八邪法(약능불사팔사법)하고 入八解脫(입팔해탈)하며
以邪相(이사상)으로 入正法(입정법)하며 以一食(이일식)으로 施一切(시일체)하며 供養諸佛(공양제불)과
及衆賢聖然後(급중현성연후)에 可食(가식)이니 如是食者(여시식자)는 非有煩惱(비유번뇌)며
非離煩惱(비리번뇌)며 非入定意(비입정의)며 非起定意(비기정의)며 非住世間(비주세간)이며
非住涅槃(비주열반)이라 其有施者(기유시자)는 無大福(무대복)ㆍ無小福(무소복)하며
不爲益(불위익)하고 不爲損(불위손)이니 是爲正入佛道(시위정입불도)요 不依聲聞(불의성문)이니다
迦葉(가섭)이여 若如是食(약여시식)이라야 不爲空食人之施也(불위공식인지시야)니라
時我世尊(시아세존)이시여 聞說是語(문설시어)하고 得未曾有(득미증유)하야 卽於一切菩薩(즉어일체보살)에
深起敬心(심기경심)하고 復作是念(부작시념)하되 斯有家名(사유가명)의 辯才智慧(변재지혜)가
乃能如是(내능여시)어니 其誰不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기수불발아뇩다나삼먁삼보리심)
이리요 我從是來(아종시래)로 不復勸人以聲聞辟支佛行(부불부권인이성문벽지불행)하나이다
是故(시고)로 不任詣彼問疾(불임예피문질)이니다
가섭과 걸식의 문제 입니다. 역시 중도적 걸식입니다. 中道적 乞食.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기로 가섭존자는 늘 가난한 집에 복 지어주기 위해서,
가난한 집만 다녔다 하는 그런 이야기가 있지요?
佛告大迦葉(불고대가섭)하시되, 부처님이 가섭에게 고하사되
汝行詣維摩詰問疾(여행예유마힐문질)하라. 그대가 유마힐에게 가서 문병하라.
迦葉(가섭)이 白佛言(백불언)하사되 世尊(세존)이시여
我不堪任詣彼問疾(아불감임예피문질)이니다.
저도 또한 그 분에게 가서 문병할 수가 없습니다.
所以者何(소이자하)오? 왜냐하면
憶念(억념)하니 我昔(아석)에, 기억하건대 옛날에
於貧里而行乞(어빈이이행걸)이러니, 가난한 동네에서 걸식을 하고 있었는데
時(시)에 維摩詰(유마힐)이 來謂我言(래위아언)하되,
그 때에 유마힐이 저에게 와서 말하기를
唯大迦葉(유대가섭)이여, 여보시오 대가섭이여
有慈悲心(유자비심)하되, 자비심이 있으되
而不能普(이불능보)하야, 능히 넓지를 못해서
捨豪富(사호부)하고, 부잣집은 다 버려 버리고
從貧乞(종빈걸)가? 가난한 집만 쫓아가서 걸식을 하는가?
迦葉(가섭)이여 住平等法(주평등법)하야, 가섭이여, 평등법에 머물러서
應次行乞食(응차행걸식)이며, 次 제에 應 해서, 순서대로 걸식을 행하라.
이것이 가섭존자가 가난한 집만 다녔다고 하는 그런 근거가 이런데 있습니다.
사실 가섭존자는 자비심으로 자기 딴에는 생각한다고,
복 지어주려고 가난한 집만 다녔지요. 하지만 유마거사가 보기에는
그것도 아니다 이 겁니다. 부자라고 해봐야 며칠 간다고...
그 사람들도 역시 복을 지어야 돼요. 어쩌면 그 사람들이 앞으로
더 가난해질지도 몰라요. 널리 좀 봐야지 당장에 코앞에 것만 보고
그렇 게 판단을 해가지고, 가난한 집 복 지어주려고 가서 걸식을 하다니,
그것이 돼먹지 않은 짓이다 이 겁니다.
爲不食故(위불식고)로, 먹어도 먹지 않음이 되기 때문에
應行乞食(응행걸식)이라. 어디 가서 밥을 빌어서 먹는데
수행하는 사람은
텅 빈 마음으로, 아무리 먹어도 먹는 것이 아닌 자리에 앉아서 밥을 먹어야
그것이 비로소 걸식하는 겁니다.
어디 가서 얻어먹었느니ㆍ안 먹었느니ㆍ가난한 집 복 지어주었느니ㆍ
이런 有爲法(유위법)가지고,
이런 조작 있는 사고가지고 걸식을 한다면 때려치워라 이 겁니다.
爲壞和合相故(위괴화합상고)로, 화합상을 무너뜨리게 되는 까닭으로
應取團食(응취단식)이라.
이것은 덩어리 밥. 밥을 손으로 뭉쳐서 지금도 그렇 게 먹고 있잖아요.
團食을 取 하는... 그 다음에
爲不受故(위불수고)로,
받아도 받지 않음이 돼요.받아도 받지 않음이 되는 까닭에
應受彼食(응수피식)이며, 저 음식을 응당히 받는 것이다.
그 쯤 되어야 받을 자격이 있다 하는 것 입니다.
사실은 주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되, 주는 것이 없이 주는
그런 정도의 차원이 돼야 제대로 주는 것이다.
以空聚想(이공취상)으로 入於聚落(입어취락)하며, 텅 빈 마을과 같은,
텅 빈 마을이라고 하는 그런 생각으로, 말하자면 마을에 들어가야 된다 이 겁니다.
이 마을은 텅 비어 있다 하는 그런 사고로써 마을에 들어가야지
, ‘아, 저기 가면 부자가 있고, 여기 가면 가난한 사람이 있고’ 하는 생각이
꽉 차 있는 그런 자세로써 마을에 들어가서 걸식하면 그것은 맞지 않다 이 겁니다.
所見色(소견색)은 與盲으로 等(여맹등)하고, 본바 사물은, 6경계지요.
여섯 가지 경계를 이야기합니다. 눈 먼 사람하고 똑 같고, 우리는 보는 대로 벗기고ㆍ
집착하고ㆍ분별하고ㆍ좋다ㆍ나쁘다ㆍ거기에 또 욕심까지 내고 그러지 않 습니까?
유마거사의 법문은 그렇 습니다.
우리가 보는 사물은 맹인이 사물을 보는 것하고 똑같애. 그래야 된다 이겁니다.
所聞聲(소문성)은 與響으로 等(여향등)하며,
듣는 소리는 메아리소리 듣는 것하고 똑 같고,
所齅香(소후향)은 與風等(여풍등)하고,
냄새를 맡는 것은 바람이 스치는 것하고 똑 같고,
所食味(소식미)는, 不分別(불분별)하며,
먹는바 맛은, 음식의 맛은 분별하지 아니 하며
受諸觸(수제촉)하되, 如智證(여지증)하고
모든 감촉을 받는 것은 지혜로 깨닫는 듯해야 된다 이 말 입니다.
감촉. 예를 들어서 우리가 차다ㆍ덥다ㆍ뜨겁다 하는 것을 우리가 느낄 때,
그것은 그야말로 지혜로써 어떤 이치를 증득하는 것 하고 같아야 된다.
知諸法(지제법)을 如幻相(여환상)하야,
제법 알기를 幻相. 환영과 같이 알아야 된다.
제법을 환영과 같이 알아서
無自性(무자성)하고
無他性(무타성)이니,
자성도 없고 타성도 없어야 하느니
本自不然(본자불연)하고, 본래 스스로 있는 그대로, 있는 그것도 아니고, 그런 뜻입니다.
今則無滅(금즉무멸)이니다. 지금에 또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없는 것도 아니다.
迦葉(가섭)이여 若能不捨八邪法(약능불사팔사법)하고,
만약 능히 팔사법을 버리지 않고
入八解脫(입팔해탈)하며,
팔해탈에 들어가야 된다. 팔사법을 버리지 않고... 八邪 는 八正道의 반대지요?
그것을 버리지 않고, 그러니까 팔정도를 행해야 되는데, 아닙니다.
사법을 행해야 된다 이 말 입니다.
팔사법을 버리지 아니하고, 그런 상태에서 그대로 팔해탈에 들어가야 된다.
以邪相(이사상)으로 入正法(입정법)하며,
삿된 모습으로서 정법에 들어가며,
이것이 그러니까 우리 보통 불교 상식으로는 전부 반대 입니다.
그래도 사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것이 중도적인 이러한 소견이라야
그것이 제대로 된 소견이라 는 것 입니다.
以一食(이일식)으로 施一切(시일체)해서,
한 끼의 밥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다 베풀어서
供養諸佛(공양제불)과, 제불과 그리고
及衆賢聖然後(급중현성연후)에, 온갖 어진이ㆍ성인들에게 공양한 연후에
그 때에 비로소 먹을 줄 알아야 한다. 어떻게 한 끼 밥으로써 그런 사람들을
다 공양 할 수 있 겠습니까? 그런 능력이 있어야 된 다 이 겁니다. 내가 한 끼 밥 먹고,
내가 이 몸 건강하게 됨으로 해서, 비로소 시방 제불이 다 건강하고, 시방에 있는
모든 성현들이 다 건강하고, 다 식사를 하는 그런 도리. 그런 도리까지 입각 되어야
비로소 可食(가식)이다. 밥을 얻어먹을 수 있다.
如是食者(여시식자)는, 이와 같이 걸식하는 사람은
非有煩惱(비유번뇌)며, 번뇌가 있는 것도 아니며
非離煩惱(비리번뇌)며, 번뇌를 떠나는 것도 아니다.
“번뇌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하는 것 까지는 좋았지요.
그런데 번뇌를 떠나는 것도 아니다 라고 했습니다.
본래 번뇌는 공한 겁니다. 우리가 이름을 지어서 말하자니 번뇌지요.
非入定意(비입정의)며 非起定意(비기정의)며,定意에.
선정의 뜻에, 딱 고정된 어떤 뜻에 들어가 있는 것도 아니고,
定入 에서 일어난 것도 아니다.
非住世間(비주세간)이며 非住涅槃(비주열반)이라.
세간에 머무는 것도 아니고 열반에 머무는 것도 아니다.
아니 세간에 머물지 않았으면 열반에 있어야 되겠지요?
그런데 열반에 머문 것도 아닙니다.
其有施者(기유시자)는, 그 베푸는 사람. 시주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無大福(무대복)ㆍ無小福(무소복)하며, 하~ 이런 차원으로 베풀 줄 알아야 됩니다.
베푸는 사람들은요. 대복도 없고 소복도 없어.
不爲益(불위익)하고 不爲損(불위손)이니, 시주하는 사람들은 이익 받으려고,
더 많은 이익을 위해서 시주를 하는 겁니다. 이익이 되는 바도 없고 손해되는 바도 없고...
是爲正入佛道(시위정입불도)요, 이것이야 말로 바로 불도에 들어가는 것이고,
不依聲聞(불의성문)이니다. 성문법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함이 있는 것은 전부 성문법이고, 또 세속법입니다.
큰 복도 없고ㆍ작은 복도 없고ㆍ이익 되는 바도 없고ㆍ손해되는 바도 없어요.
그냥 시주 할 뿐입니다.다만 시주 할 뿐입니다.
그리고 가섭도 걸식하면 다만 걸식만 하지
뭘 그렇 게 분별하는 것이 많아? 이런 소리 입니다.
迦葉(가섭)이여 若如是食(약여시식)이라야, 만약 이와 같이 걸식 할 것 같으면
不爲空食人之施也(불위공식인지시야)니라.
사람들이 시주하는 그 음식을 헛되게 먹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시주의 밥을 헛되게 먹는 것이 아니다.
그쯤 돼야 시주 밥을 제대로 받아먹을 자격이 있다.
時我世尊(시아세존)이시여 聞說是語(문설시어)하고 得未曾有(득미증유)하야.
그 때 저는, 세존이시여 이 말씀하신 것을 듣고 미증유를 얻었습니다.
卽於一切菩薩(즉어일체보살)에 深起敬心(심기경심)하고,
일체 보살에게 깊이 공경하는 마음을, 이제 보살이라는 말이 나오네요.
말하자면 거사가 보살로 등장하는 찰라입니다 .
나중에는 전부 계속 보살ㆍ보살ㆍ보살로 나옵니다.
그래서 어느새 거사가 보살로 바꾸어져 있습니다.
復作是念(부작시념)하되, 다시 이러한 생각을 하되
斯有家名(사유가명). 이는
有家名. 속인으로서 진리 있는 사람ㆍ
家名 이 있는 사람. 속인으로서
辯才와 智慧(변재지혜)가 乃能如是(내능여시)어니, 능히 이와 같으니
其誰不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기수불발아뇩다나삼먁삼보리심이)이리요?
그 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지 아니 하리요?
我從是來(아종시래)로, 나는 이로부터 옴으로
不復勸人以聲聞辟支佛行(부불부권인이성문벽지불행)하나이다.
다시는 다른 사람에게 권해서 성문과 벽지불행으로써 행하지 않게 됐다.
권하지 않는다 이 말 입니다. 다시 말해서 소승 행을 권하지 아니 했습니다.
是故(시고)로 不任詣彼問疾(불임예피문질)이니다.
더 이상 그 분에게 나아가서 문병할 엄두가 나질 않습니다.
그래 보살행의 위대함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또 바로 수보리가 나오지요. 수보리의 취식 이라.
이것도 역시 밥을 취하다 하니까 역시
가지다ㆍ먹다ㆍ걸식하다 하는 그런 뜻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