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사람이 무너지니 하늘과 땅도 무너지고 5
오직 죽이겠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다가간 사람들이 부딪치니 금강 포구는 인세가 아니라 지옥을 보는 것만 같았다. 처음 거리가 벌어져 있을 때 맞부딪쳤던 고수들은 어느새 뒷전으로 밀리고 하수들의 칼부림이 이어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인 사람에겐 눈이 있으나 병장기에 눈이 없는 탓이었다. 삼사 장의 검기와 강기들이 난무하다보면 원하지 않아도 같은 편을 베고 죽이는 일이 비일비재해지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공포가 흥분까지 곁들이게 되면 오직 자신 말고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극한의 상황에 처할 수도 있었다.
하수들과 젊은이들이 전장을 지배하자 안 그래도 좁은 지역에 자리한 사천무림련이 점차 강변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시신들이 넘쳐나고 피는 빗물에 쓸려 강으로 흘러들었다. 그때 현상자가 소리쳤다.
“밀어붙여라.”
그냥 밀리지 말라는 말이 아니었다. 이미 약속되었던 의미 깊은 소리였다. 그 순간 한동안 뒤로 밀렸던 사대문파의 고수들이 앞으로 나아가고 젊은이들과 정명단 사람들이 급히 뒤로 빠졌다.
콰콰콰콰콰콰쾅!
대여섯 자 혹은 병기 그 자체가 난무하다가 갑작스럽게 수 장을 뻗는 검기들 수십 줄기가 사천무림련 진영의 선두에서 동시에 백의인들에게로 뻗어나갔다.
청성이 먼저 밀어붙이니 아미의 웅후한 장력과 날카로운 계도가 뒤를 이었다. 운가의 고수들이 천둥벼락이 치는 듯한 기세로 상대를 압도하여 밀어버리자 당가의 암기가 사방으로 빗발쳤다.
갑작스럽게 전술이 변화하여 백의인들의 비명소리가 높아가고 진영이 흐트러지자 계속해서 독려하던 대고소리가 일시에 변했다.
두둥! 두둥! 두두둥! 두둥! 두둥! 두두둥!
대고 소리의 변화에 따라 백의인들이 썰물처럼 물러났다. 그 사이에 사천무림련이 복잡하게 뒤엉켰던 진영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젊은 사람들이 원독에 찬 눈빛으로 백의인들을 노려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함께 무기를 내뻗었던 이들이 안보인 탓이었다. 그 결과 사천무림련이 구축한 반원진은 처음의 삼분지 이 크기로 줄어들었다.
당가의 암기가 미치지 않는 오십 장 밖에서 새로이 진영을 정비하던 백의인들의 수자 역시 적잖게 줄어들었다. 두 진영 사이에 널브러져 있는 백의인들의 수자가 압도적으로 많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숨을 고르는 듯 대고 소리가 조금 줄어든 채로 느리게 울려 퍼졌다. 그때였다. 사천무림련의 뒤쪽에서 한 대의 화살이 외롭게 날아올랐다. 칠십여 장을 날아간 화살은 백의인들의 중앙에 떨어져 내렸다.
겨우 한 대의 화살이니 누가 거기에 겁을 집어먹을까. 그러나 잠시 후 바닥에 꽂힌 화살의 시괄 뒤쪽에서 시뻘건 가루들이 연기처럼 뿜어져 나와 삽시간에 방원 사여 장을 물들였다. 많은 백의인들이 그 가루들을 뒤집어썼다.
“끄으으으으윽!”
가루를 조금이라도 뒤집어 쓴 백의인들은 하나같이 목을 붙잡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독이다. 물러나라.”
백의인들이 일시에 화살로부터 사방으로 물러섰다. 그리고 화살 주변에 나뒹굴면서 거품을 물고 눈을 까뒤집고 결국 피를 토해내는 삼십여 명을 손도 써보지 못하고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때 사천무림련의 반원진 앞쪽으로 녹의 초로인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바로 당유연이었다. 그가 소리쳤다.
“적도의 수장은 들으라. 나 사천무림련의 호법이며 당가의 가주 당유연이다. 지금껏 양민들의 피해를 우려하여 독의 사용을 자제하여 왔다. 그러나 공멸할 지경에 이른 지금 내가 무엇을 주저할 것인가? 이대로 끝장을 보자 하면 결국 그쪽도 우리 쪽도 모두 죽는 수밖에 없으니 오늘의 싸움은 이것으로 접고 승부를 내는 것은 다음으로 미루기를 원하노라. 어찌할 것인가?”
충분히 전달될 만큼 우렁차고 느린 음성이었다. 그러나 백라천궁에서는 당장 답변이 돌아오지 않았다. 당유연은 오호궁을 든 백영담의 행동을 주시하며 손을 허공으로 치켜 올렸다.
순간 반원진을 그리고 있던 사천무림련 사람들이 당유연이 서 있는 중앙을 비우고 좌우로 물러섰다. 바로 그 뒤쪽에 오십여 명의 궁수들이 전방을 겨냥하고 일제히 시위를 당긴 채 서있었다.
그때서야 백무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찌하라는 말인가?”
당유연이 소리쳤다.
“나는 독가의 지존. 어찌 독을 사용하여 승리를 취하는 것을 두려워하겠는가마는 지금 이 자리, 이 시간만은 쓰기를 주저하노라. 그대들은 본가의 화살이 미치지 않는 이백 장 밖으로 물러서라. 그리하면 우리는 독전을 쓰지 않고 이곳을 떠나겠다. 그러나 우리가 모두 승선하기 전에 이백 장 안으로 들어온다면 독전을 날려도 좋다는 것으로 간주하겠다.”
백무극은 주변을 살폈다. 우측의 전나무 숲, 좌측은 산이며 뒤쪽은 식골령으로 향하는 길이라, 아무리 봐도 지형 상 넓게 퍼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백무극은 어금니를 꽉 물고 고개를 끄덕이고서 소리쳤다.
“받아들이겠다.”
그 한 마디가 울려 퍼지는 순간 백의인들이 일제히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들이 이백 장을 물러서자 사천무림련 측에서 백여 명의 사람들이 뛰어나와 청의와 녹의 그리고 도복과 가사를 입은 시신들을 거두어들였다.
삼백십여 구의 시신들이 짐짝이 되어 배에 실리고 사대문파 사람들이 승선했다. 배가 선착장에서 물러나고 새로운 배가 닿기를 몇 차례 반복하자 강변에 마지막까지 남은 이들은 당가의 녹의궁수들뿐이었다.
녹의궁수들은 활에 화살을 걸어둔 채로 뒷걸음질하여 마지막 남은 배에 몸을 실었다. 그들마저 선착장을 떠났다.
그 순간 백의인들이 서서히 움직여 선착장 쪽으로 다가갔다.
백무극과 천기신사 그리고 내전과 외문의 문주들이 선착장까지 내려와 떠나가는 배들을 바라보았다. 이동침상에 몸을 맡긴 백무강까지 백무극의 옆에 이르렀다.
백무강이 이를 악다물고 말했다.
“그 한 놈 때문에 쓸데없이 희생이 컸습니다.”
그때 백영담이 뒤쪽에서 다가와 말했다.
“사상자가 구백이 넘습니다.”
백무극은 눈살을 찌푸리며 칠십 장 거리로 멀어진 마지막 배를 바라보았다.
“희생이 큰 것은 이미 지나간 일. 하지만 우리에게는 당장 저들을 끝장 낼 수단이 있지 않습니까? 영담! 신호전을 날려라.”
백영담은 왼손을 뒤로 뻗어 화살들을 더듬었다. 그리고 신호전을 꺼내어 시위에 걸었다. 불을 붙이고 심지가 타들어가는 것을 보다가 목을 꺾고 시위를 당겨 하늘을 향해 신호전을 날렸다. 근 백여 장을 솟구쳐 오른 화살이 허공에서 붉은 빛으로 토하면서 서서히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여도사 반정은 사형 음도 곽서음의 듣기 싫은 웃음소리를 뒤로 하고 몰래 산을 내려왔다. 어차피 할 일이 끝났으니 없다고 야단맞을 일은 아니었다.
콧노래를 부르며 산기슭을 내려오는 순간 불에 타는 듯한 화끈한 기운이 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기운에 화들짝 놀랐으리라. 철석간담을 지닌 사람이라도 뒤를 돌아보기는 했으리라. 그러나 여도사는 그 기운의 정체를 아는 듯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흐흥! 얌전하던 산룡이 화룡이 되어 강으로 뛰어들었으니 그 뒤는 안 봐도 뻔하지. 아우! 찌뿌듯해. 저 짓거리하겠다고 도대체 얼마나 굶은 거야? 객고나 풀어볼까?”
여도사 반정은 염정어린 미소를 지으며 산을 완전히 내려섰다. 그리고 길 중앙에 서서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어디로 가야 적당한 물건이 있을까? 에, 이쪽은 백라천궁 사람들로 가득할 테고, 이쪽은 계족산 올라가는 길인데---. 백라천궁 사람을 꼬드겨 맛보면 나중에 문제 되려나? 하지만 이리로 가면 사람보기도 힘들 텐데, 어쩌지?”
미간을 찌푸리던 여도사 반정은 고갯길을 올려다보다가 갑자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건장한 남자가 알아서 다가오고 있었다.
사내가 오십여 장 앞까지 다가오자 반정은 안력을 돋워 사내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는 미소가 감돌던 얼굴을 찌푸렸다.
“이런 염병할! 뭐야? 애꾸잖아?”
반정은 낙담하여 입술을 깨물었다. 그 순간 그녀의 눈이 휘둥그렇게 변했다. 그녀는 점차 다가오는 사내의 주변을 살폈다. 보였다. 희끗한 기운들이 사내의 주변을 감돌고 있었다.
“어라! 신기한 녀석일세. 좀 못생겼으면 어때? 얼굴은 옷자락 덮어 두면 될 것이고---, 잘 꼬드기면 좋은 물건이 되겠어.”
반정은 구겼던 얼굴을 펴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사내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잠시 후 반정은 다시 얼굴을 구겼다. 삼십여 장 앞까지 다가온 사내는 등 뒤에 뭔가를 짊어지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업고 있었다.
늘어진 게 송장이군. 아유, 재수 없어. 흥! 그렇다고 저런 물건을 포기할 수는 없지.”
사내가 이십 장 앞으로 다가왔다. 다시 미소를 가장하고 사내를 바라보았다. 반정은 당장 사내를 패죽이고 싶었다. 잠깐 사이에 그녀를 얼마나 괴롭혔는가. 그런데 또 다시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대개 그녀가 한길에 서 있으면 추파는 던지지 않더라도 훔쳐보는 정도는 해야 정상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사내는 그녀를 없는 사람 취급하고 있었다.
반정은 부글부글 끓는 내심을 가라앉히고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염정미공을 일으켰다. 그리고 사내의 앞길을 막았다. 순간 그녀의 은빛 나는 백발이 바람에 펄럭이듯 휘날렸고 그녀의 옷자락이 부풀어 올랐다.
누구도 저항하지 못하리라. 염정미공을 끌어올리는 순간 반정은 향기에 휩싸이고 신비로운 빛을 내뿜는다. 그것이 그녀를 성스럽게 만들고 또 한편으로 요염하게 포장한다. 한 번 눈이라도 마주치면 사내의 이성은 그 즉시 마비되고 마니 취향이 특이하거나 요상한 방법으로 욕구를 푸는 사내가 아니라면 결코 저항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쪽같은 선비도, 목석같은 승려도 염정미공을 일으킨 그녀 앞에서는 개가 되고 말았다.
반정은 빛이 나는 듯한 젖가슴을 가린 듯 드러낸 듯 자랑하며 부드러운 눈빛과 따뜻한 미소로 사내 운청산을 맞이했다. 말은 필요 없었다. 누이처럼 따뜻하게 손짓하고 교태어린 여인처럼 화끈하게 품어주면 그뿐이었다.
이 장 앞에서 멈춰선 운청산이 마침내 그녀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반정은 또 다시 놀랐다. 그 눈에서 그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한 탓이었다.
안달이 났다. 그냥 관심을 보이지 않는 사내였다면, 또 주변에 다른 남자가 있었다면 포기해 버렸겠지만 자신이 알아보는 것을 알아채고 숨어버린 여덟의 인간정령들을 확인한 후라서 포기할 수가 없었다.
반정은 내심과 달리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봐요. 다쳤군요. 그리고 많이 피곤해 보여요. 이리 오세요. 내가 편히 쉬게 해줄게요. 이리로 오세요.”
그녀의 손짓을 빤히 바라보던 운청산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비켜라.”
반정은 그 차가운 목소리에 놀라며 염정미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당신은 지금 따뜻한 손길이 필요해요. 이리로. 이리로 와요.”
살랑이는 손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숨결에서마저 향기가 뻗어 나오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운청산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비켜라.”
반정의 따뜻한 눈길에 잠깐 동안 독기가 어렸다. 그러나 그녀는 한 번 더 참기로 하고 부드럽게 말했다.
“왜 힘겹게 시신을 업고 있는 거지요? 내가 고이 묻어줄 테니 내려놓고 편히 쉬어요.”
순간 지금껏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던 운청산의 얼굴에 변화가 어렸다. 그러나 반정은 그 반응에 놀라 흠칫 물러섰다.
‘개자식! 내가 이렇게 비참할 정도로 애걸을 하는데 오히려 화를 내? 죽여 버리겠어.’
그녀는 내심과 달리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손끝에는 차가운 한기를 실었다. 그 순간 꿈틀거리던 운청산의 눈이 다시 회색빛으로 바뀌었다.
반정은 한음수(寒陰手)의 공력을 일으킨 손을 뒤에 감춘 채 걸음을 내디뎠다. 순간 그녀가 조금 전 산에서 느꼈던 화룡의 기운보다 더 강렬한 화끈거림이 이마에서 느껴졌다.
‘뭐지?’
생각해 보니 청홍의 빛이 동시에 반짝이는 것 같던 손이 꿈틀댄 것 같기는 했다. 그러나 그 정도 미약한 움직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의문을 느끼면서도 한음수를 내뻗으려던 반정은 문득 미간과 코를 가르고 지나가는 뜨거운 기운에 놀라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것을 만졌다.
“피?”
그 한 마디 말이 반정이 살아생전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평생 단 한 번 남자를 잘못 고른 덕에 다시는 남자를 안을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운청산은 머리가 반으로 쪼개어진 여도사 반정을 보지도 않고 스쳐지나갔다. 이백여 장을 더 걸어 산모퉁이를 도니 금강포구가 한 눈에 들어왔다.
백의의 시신들 수백 구가 줄을 지어 놓은 듯 가지런히 놓여있고 강변 쪽에는 살아 움직이는 백의인들이 강을 따라 구경꾼처럼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멀리 강 중심에는 십여 척의 크고 작은 배들이 줄지어 늘어서서 강을 내려가고 있었다.
운청산은 멀리 떠나가는 배들은 일별한 후에 다시 쳐다보지 않고 오로지 백의인들만 훑어보았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활을 지닌 사람을 찾았다. 있었다. 선착장 위에 서있는 몇 사람들 가운데 먹빛 끈 같은 것을 어깨에 걸친 이가 분명히 있었다.
운청산은 오직 한 사람만을 노려보며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사천무림련 사람들을 실은 배가 벌써 강의 중심에 접어들어 이백여 장 이상을 흘러내려가고 있었다. 바람은 없고 비가 내려 망정이니 그렇지 않았다면 시야에서 사라져버렸으리라.
백무극은 갈증을 느꼈다. 실제로 목이 마르다기보다는 기다리는 것이 보이지 않아 속이 바짝 타는 것이었다.
백무극은 다시 배의 꽁무니를 바라보고는 천기신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 이리 더딘가? 너무 늦으면 심천신문과 오행신문의 준비와 기다림이 헛것이 될 수도 있네.”
천기신사 백진궁이 대답하기에 앞서 백무궁이 힘없이 웃으며 먼저 말했다.
“소군. 너무 속 태우지 마십시오. 지금의 속도라면 가볍게 뛰어도 배를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금 늦어도 성공하기만 하면 무령과 함도 역시 어렵지 않게 일을 해낼 것입니다.”
백무극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얼굴을 펴지 못했다. 그때 천기신사가 편안한 얼굴로 부드럽게 말했다.
“조짐이 보이는군요. 저기 보시지요.”
천기신사는 배들과는 정 반대쪽인 금사강의 상류를 손으로 가리켰다. 모두가 고개를 비틀었다. 계족산에서부터 금강포구까지 이어지는 산자락이 강에 이르러 고개를 숙이는 지점에 포말이 이는 듯 했다.
“그리고 저길 보시지요.”
천기신사는 다시 정면의 강 한 가운데를 가리켰다. 다른 곳은 별 다른 흐름을 보이지 않는데 유독 강 중앙에만 물결이 일었다. 강의 흐름을 거스르며 삼십 장 이상이나 이어지고 있었다.
백무극은 다시 포말을 응시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이미 아무 것도 없었다. 다만 물결이 조금 더 거세어졌을 따름이었다.
“아!”
강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사람들이 모두 탄성을 내지르고 눈을 부릅떴다. 강을 거슬러 올라가던 물결이 잠시 사라진 것 같더니만 갑자기 굵은 물기둥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순간 포말이 일던 강변 근처에서 또 하나의 물기둥이 치솟아 올랐다. 거의 십여 장 이상 솟구친 두 개의 물기둥이 서로를 향해 넘어졌다. 그리고 뒤엉켰다. 수십 개의 물기둥들이 솟구쳤다가 가라앉더니 물살 두 개가 뒤엉켜 소용돌이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작은 소용돌이였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물살들이 계속 뒤엉키고 파동치자 그 여파가 강 전체로 번지기 시작했다.
“우와!”
백무극과 주변의 인물들뿐만이 아니었다. 강을 따라 무슨 일이 생길지 궁금해 하며 지켜보던 백의인들이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두 개의 물살이 소용돌이를 일으킨 곳은 백여 장이나 위쪽이었는데 어느새 선착장 바로 앞쪽까지 파도가 치더니 이내 선착장 위로 튀어 올랐다.
백무극 등은 분분히 몸을 날려 물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이르렀다. 그러나 한 번 성이 난 물결들은 선착장을 넘어 수천의 백의인들이 늘어선 강변 위쪽까지 솟구쳐 올랐다.
사람들이 모두 경이로운 광경에 넋을 잃은 그때 뒤쪽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소란이 일고 백의인들이 돌아섰다.
“으악!”
다시 비명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백무극 등도 감히 무시할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한 사내가 동료들의 시신을 정리하고 있던 백의인 다섯을 죽이고 시신들을 넘어 다가오고 있었다.
“저-저놈이 어-어떻게?”
놀람이 너무 커서 모두가 얼어붙은 것 같았다. 모두가 죽은 시신을 보았었다. 연인과 함께 화살에 꼬치가 되었던 그 모습을 똑똑히 보았었다.
“손에 사정을 두었더냐?”
백무극이 백영담에게 차갑게 물었다. 백영담은 고개를 저었다. 겨우 삼십 장 앞이었다. 아무리 살살 쏜다 하여도 오호궁이라면 연약한 몸뚱이 두 개를 내버려둘 턱이 없었다.
고개를 젓던 백영담이 갑자기 눈을 부릅떴다. 흘려 넘긴 것이 있었다. 삼십 장 거리에서 쏘았다면 몸뚱이 두 개 정도는 꿰뚫는 정도가 아니라 커다란 구멍을 내고 수십 장 더 날아갔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여인조차 뚫지 못하고 두 사람을 동시에 꿰어 놓았다.
백영담이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려 했다. 그러나 말을 할 틈이 없었다. 천천히 걸어오던 운청산이 그를 보면서 갑자기 속도를 높였고 수 십 명의 백의인들이 삼각파도가 되어 동시에 그를 감싸듯 쇄도해갔다.
비명을 지를 수 있었다면 질렀으리라. 그러나 운경산이 할 수 있는 건 생각을 전하는 것뿐이었다.
‘현산 형! 또 다시 이런 짓을 벌리다니 녀석이 지금 제 정신이오, 아니오?’
운현산이 느끼는 것은 운경산 역시 느낄 수 있는 바, 그 역시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생각을 해야 답을 할 텐데 느껴지는 것이라고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의 색채들뿐이었다.
운현산은 억지로 대답을 짜내었다.
‘제 정신이 아닌 것 같다. 그 여인을 그리 쉽게 죽여 버린 것도 그렇고, 손에서 이는 경력의 색채 또한 평소의 청기와 달리 청홍기가 동시에 느껴졌다. 그리고 보아라. 지금 이 상황에서 웃고 있구나.’
모두가 운청산의 얼굴을 주목했다.
그랬다. 운청산이 제 정신일 리가 없었다.
식골령에서 사천의 백의인들을 막아섰을 때는 죽음을 각오하는 비장함과 함께 탈출하고자 하는 욕구가 동시에 느껴졌었다. 그리고 상대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진을 치기도 했다. 적어도 뒷일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조금 전에는 달랐다. 그가 부상 입힌 백무강도 보였고, 그를 죽음의 문턱까지 내몰았던 백무극도 보였다. 그런데 그는 외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한 사람뿐이라는 듯 오직 백영담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백여 명의 백의인들이 오로지 그 한 사람만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순간에는 회색 빛 눈동자에 짜증을 드리우다가 다시 히죽거리고 있었다.
‘당 아가씨의 시신까지 업고 도대체 어쩌려고?’
낙천적인 천성을 지닌 운추산마저도 걱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운청산을 주시했다.
그때였다. 운청산은 외눈을 번득이며 바닥을 훑어보았다. 거기에는 수백 자루의 병장기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백의인들의 도가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칼과 창은 물론 당가의 암기들까지 널려있었다. 반 시진 전만해도 사천무림련과 백라천궁의 수천 무사들이 서로 칼부림을 하고 죽어나자빠졌던 장소인 탓이었다.
운청산은 또 다시 입술을 비틀어 히죽거리고 외눈을 번득여 다가오는 백의인들을 살폈다.
그들과의 거리는 불과 십여 장. 운청산은 다시 한 번 야릇한 미소를 짓고 오히려 앞으로 나가며 세차게 발을 굴렀다.
쾅!
엄청난 굉음과 함께 그를 중심으로 방원 오 장 안에 있던 수십 자루의 병장기들이 진흙들과 함께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그 순간 운청산이 제자리에 휘돌았다. 진흙탕이 나선형으로 튀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와 함께 운청산의 신형도 셋, 넷 종국에 가서는 일곱으로 갈라져 허공을 떠도는 병장기들 사이사이로 파고들며 앞과 좌우로 흩어졌다.
산형들로부터 꼬리처럼 팔랑거리는 당우리의 두 다리를 보며 운현산이 걱정했다.
‘당 아가씨의 시신이 짐이 되고 있다. 이미 진원진기마저 뽑아 공력을 되돌린 상태이니 회룡산형을 펼치면 아홉의 산형들이 떠돌아야 하거늘 일곱 뿐이야. 안 좋군.’
운현산의 걱정과는 달리, 운청산은 회룡산형을 펼친 후 바로 곤륜권장팔절 가운데서도 가장 화려한 초식이라는 천호만격을 연환했다. 순간 벼락같이 뻗어나가는 그의 두 손이 허공을 떠도는 병장기를 후려치고 휘돌렸다.
안 그래도 다가오던 백의인들의 발길을 멈춰 세우게 만들었던 병장기들이었건만 빛살처럼 날아들고 선풍처럼 휘도니 전진은커녕 몰러서기조차 어려웠다.
전좌후의 삼방에서 비명소리가 터지고 피가 튀었다. 운청산이 후려친 도검창에 꿰뚫리고 그가 휘돌린 도검에 목과 팔과 가슴이 베어진 이들이 흙탕물을 튀기며 널브러졌다. 그 순간에도 운청산의 신형들은 삼방을 휘저으며 병장기를 후려치고 휘돌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운청산의 신형들이 하나로 합쳐졌다. 더 이상 다가오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십여 장을 더 물러나서 그와의 거리를 이십 장으로 늘려 잡았다.
운청산은 그의 앞으로 널브러져 있는 백의인들을 힐긋 보고는 또 다시 히죽거렸다. 그리고 손을 뻗어 지금껏 허공을 휘돌고 있는 푸른 수실이 달린 삼척 반의 청강검을 손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는 오직 백영담이 서있는 방향만을 주시하며 검파를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몇 번을 거듭하여 손에 익숙해지자 발 앞에서 푸들거리는 백의인의 배를 밟고 허공으로 솟구쳤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