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60-169
문을 열다
큰 사랑, 큰 고통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정열은 저승처럼 억센 것, 그 열기는 불의 열기,
더할 나위 없이 격렬한 불길이랍니다.
아가 8.6
사람이란 여인에게서 난 몸,
수명은 짧고 혼란만 가득합니다.
욥 14,1
하느님이 아담과 하와를 지으신 이래, 변화를 위하여 모든 인간이 겪어온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두 통로는 큰 사랑과 큰 고통 이다. 이 통로는 만인에게 고루 주어졌고 그동안 세계 모든 종교의 놀이마당이 되어왔다. 오직 사랑과 고통만이 에고가 만든 방어벽들을 무너뜨리고, 이원적 사유의 틀을 부수고, 우리를 '신비' 앞에 열어놓을 수 있게 해준다. 내 경험으로는, 두려움에 바탕을 둔 삶에서 사랑에 바탕을 둔 삶으로 옮아갈 수 있게 하는 신비스러운 화학작용에 이 두 통로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다. 어째서 그런지는 아무도 정확하게 모른다. 우리는 단지, 아무리 좋은 말과 정통신학이라 해도 인간의 말로는 그것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알 뿐이다. 십자가에 달린 상태로 사랑을 뿜어내는 한 인간 의 모습이 그리스도인에게는 구원을 형상화한 아이콘이라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살면서 사랑과 고통을 겪는다. 의심할 나위 없이 그것들은 성경, 교회, 사목자, 성사 또는 신학자 등 그 어떤 것보다 훌륭한 영적 교사다. 하느님께서 거룩한 진리를 모든 이가 깨칠 수 있게 하신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 아닌가? 우리가 믿는 대로 하느님의 사랑이 그렇게 완벽하고 모든 것을 이긴다면, 사랑과 고통이 그러하듯이 하느님의 사랑은 평등하고 보편적으로 모든 사람을 하느님께 이끌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크로 폴리스에서 바오로가 아테네 시민들에게 말하고자 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이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찾게 하려는 것입니다. 더듬거리다가 그분을 찾아낼 수도 있습니다. 사실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사도 17.27-28 이것이야말로 오늘 우리 시대에 절실히 필요한 신학적 선언이다.
사랑은 우리가 갈망하는 것이면서 우리는 사랑을 위하여 창조되었다. 실은 하느님께로부터 나온 우리 자신이 곧 사랑이다. 내가 보기에 고통은 우리의 그러한 필요와 욕망과 정체성에 마음을 열게 하는 것 같다. 사랑과 고통은 머리 공간과 가슴 공간을, 어느 쪽이 먼저든 간에, 열고서 깊고 넓은 친교로 들어가게 하는 현관이다. 위대한 영적 스승들은 사랑과 고통으로 우리를 곧장 안내한다. 그리로 가지 않고서는 아무도 인생의 본질을 알 수 없다. 머리로 궁리해서 알려고 하지만 생각만으로는 결코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당신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마르 12,30 사랑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사랑이 아닐 것이다. 이것이 사랑이 일하는 방식이고, 왜 사랑하면 통제를 포기하게 되는가 하는 이유다. 곧 사랑은 자기 통제의 포기라는 고통으로 이끄는 것이다.
큰 사랑과 큰 고통 안에 있을 때 바야흐로 에고의 통제를 포기하고 삶의 옹근 마당에 자신을 열어놓을 가능성이 훨씬 커진다. 솔직히 말해 이제 선택할 것들이 별로 많지 않아서 그만큼 끌려 다니게 된 것이다. 큰 사랑은 기꺼이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아무 것도 뒤에 감추지 않게 해준다.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진다는 느낌은 동떨어져 있다는 고독감과 두려움을 얼마 동안 극복할 수 있게 한다. 누군가와 하나 되었다는 느낌이 주는 황홀함은 나를 지켜주던 울타리를 걷고 비록 잠시 동안이지만 새로운 행복감에 젖어 모든 사물을 보게 한다. 전 세계 모든 언어의 사랑 노래들이 바로 이 황홀한 경험을, 마치 그것 말고는 노래할 것이 따로 없다는 듯 노래하고 있다.
사람들이 사랑으로 달려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적어도 얼마 동안은 그 때문에 더 너그러워지고 더 담대해지고 덜 방어적이 되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허니문 사랑은 결코 오래가지 않는다. 거의 모든 종교가 난혼亂婚이나 혼전 성행위를 금기로 삼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런 행위들은 잠정적이긴 하지만 황홀한 경험과 가슴 공간을 상대에게 열어주는 일을 쉽게 타락시키고 심지어 불가능하게 만든다. 상대에게 자기 가슴 공간을 오래 지속적으로 열어놓으려면, 그래서 항구적으로 '사랑하면서' 살고자 한다면, 자연에 바탕을 둔 것이든, 의식意識에 바탕을 둔 것 이든, 하느님에 바탕을 둔 것이든 어느 정도 수준의 신비주의가 필요하다.
큰 고통은 우리를 다른 방식으로 열어준다. 여기서는 우리가 바라지 않는 쪽으로 일이 벌어진다. 실은 그래서 괴로운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마침내 자기방어를 포기하게 되는데, 달리 선택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고통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고 저항하고 화를 내고 흥정해 보지만 상황은 어쩔 수 없이 엄연한 현실이다. 고통은 그릇되고 막다르고 부조리 하고 불의하고 있을 수 없는 것이고 육체적으로 아프고 불편한 것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러기에 어째서 고통에 대하여 바른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그 이유를 우리는 안다. 좀처럼 바뀌지 않는 신호등을 포함하여 날마다 수많은 일이, 우리 심사를 뒤집어 놓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억해 둘 일은 아픔을 다른 것으로 바꿔 놓지 않으며 그것을 주변 사람들이나 다음 세대에 그대로 옮겨주게 된다는 사실이다.
고통은 우리를 두 방향으로 인도할 수 있다. 우리를 비참하게 만들어 닫아걸게 할 수도 있고 반대로 더욱 지혜롭고 자비롭게 만들어 활짝 열게 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후자의 경우는 고통이 우리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었든지 아니면 더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게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통은 우리 뜻을 거슬러, "살아계신 하느님의 손에 떨어지는"히브 10,31 막다른 벼랑으로 몰아갈 수 있다. 우리는 고통이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열어놓게 하는 후자의 길로 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나는 그것이 주님의 기도 중에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구절의 진정한 의미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배운 기도는 고통을 없애달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기도는 이런 것이다. "하느님, 큰 시련이 닥칠 때 저를 붙드시어 스스로 비참해지거나 누구를 원망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저보다 악한 영들을 데리고 돌아올 수 있는 악에서 구해달라는 기도다.
자신의 어두운 그림자와 씨름하기, 자신 안의 갈등과 허물 직면하기, 배척당하고 버림받는 일을 참고 견디기, 날마다 더 낮아지기, 누군가의 핍박 또는 자기 한계 경험하기, 이 모두가 영혼이 꽃피는 더 높은 의식수준으로 들어가게 하는 문이다. 이런 경험들로 '벌거벗은 지금'을 들여다보는 창문이 우리에게 열리는 것이다. 치유가 절실히 요구되는 상태, 눈앞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용납하고 눈물 흘리며 자신의 내적 궁핍과 곤경을 받아들이는 일이 관상의 사람이 되게 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들이다.(바오로가 로마서 7장의 인간의 비참함에서 8장의 영적 절정으로 어떻게 옮겨 가는지를 묵상하라.)
자기 자신의 모순과 갈등을 직면하면서 우리는 '이것도 저것도 both-and'의 살아있는 아이콘이 된다. 일단 우리가 자비를 받아들이게 되면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전해주는 일은 거의 저절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받은 것을 흘려보내는 도랑이 된다. 만일 남에게 자비를 구할 필요가 없거나 내 안에 있는 모순과 갈등을 직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한평생 기계처럼 돌아가는 세상에 갇혀 이원론만으로 살게 될 것이다. 내 생각에는, 그것이 바로 '성령을 거스르는 죄'다. 남에게 자비를 구하거나 용서받을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누가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그 사람은 도랑인 자기를 스스로 막고 있는 것이다. 마리아의 노래에서 마리아는 세 차례나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보이신 '자비'를 언급한다. 루카 1.50-55 예수의 모친 동정 마리아가 그처럼 자비 아래서 사셨는데 하물며 우리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큰 사랑은 먼저 가슴 공간을 열고 이어서 머리 공간을 열어줄 가능성이 있다. 큰 고통은 먼저 머리 공간을 열고 이어서 가슴 공간을 열어줄 가능성이 있다. 결국 두 공간이 모두 열려야 한다. 그렇게 열린 사람에게는 비이원적 사유가 별로 어렵지 않다. 제대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거나 고통당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이것 아니면 저것', '전부 아니면 전무'의 사고방식으로 만사를 통제하려 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닫힌 체계가 몸에 익숙하다. 세계를 '마땅한 것과 마땅치 않은 것'으로 나눠놓고 보는 정신으로는 아무 조건 없이, 값도 없이 주는 은총이 오히려 어색하고 불가능해 보인다. 이처럼 은총이 결핍된 그들은 남을 심판하고 강요하면서 감정이입을 하지 못하고 연민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 그들은 실력사회의 감옥에 갇혀 살아간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바르고 마땅해야 한다. 그러나 기억하자. 비록 그들이 우리를 비난하고 심판한다 해도, 그들은 우리가 참고 견뎌주어야 할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마저도 비난과 심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사랑은 온전한 한 필疋이다. 당신이 어느 하나를 어떻게 사랑하느냐가 곧 모든 것을 어떻게 사랑하느냐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명하면서 '처럼'이란 말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두 큰 계명을 연결한다. 우리는 흔히 이 말씀을, 같은 양의 사랑(자기를 사랑하는 '그만큼의'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뜻으로 풀이한다. 그러나 그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같은 원천same Source에서, 같은 사랑same Love 으로 그것도 동시에 자기 자신과 남과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이 사랑, 자비, 용서를 이렇게 이해하지 않는다. 그러나 참된 사랑, 자비, 용서는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당신이 어떻게 사랑love을 하느냐는 곧 당신이 어떻게 사랑Love에 접속되어 있느냐이다.
이원론에 갇힌 마음으로는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거나 그 허물을 용서할 수 없다. 해보라,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곧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에게 복음을 설교만 하고 복음에 순종할 도구를 주지 않음으로써 그들에게 큰 해를 끼치고 있다. 예수가 말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 15,5 '포도나무와 가지'는 하느님과 영혼 사이의 비이원성을 보여주는 신비로운 이미지들 가운데 하나다.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 과 함께 나는 모든 사물과 사람(원수까지도)을 사랑할 수 있다. 나 혼자만으로는 의지력과 지성을 총동원하여도 어려운 때를 만나면 사랑할 수가 없다. 많은 사람이 어떻게든지 자기 힘으로 사랑을 시도해 본다. 그렇게 첫째 계명 없이 둘째 계명을 지키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못한다. 남는 것은 자기한테 실망한 이상주의자뿐이다.(1960년대 젊은 시절의 내가 그랬다.)
끝으로, 큰 사랑과 큰 고통을 이어주는 직선도로가 있다. 만일 당신이 큰 사랑을 한다면 머잖아 큰 고통을 겪을 것이다. 상대를 통제하기를 포기했을 테니까. 우리가 사랑에 성실하라는 말을 듣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래 지속되는 성실한 사랑은 우리를 이끌어 자기 사랑으로 도취된 가지들을 잘라버리게 요한 15,2 하기 때문이다.
큰 사랑과 큰 고통을 겪기 전까지
우리는 생각으로 삶과 죽음을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 안에 '더 큰 근원Larger Source'이 열리면, 전혀
다르게 생각하고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에베 3,19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런즉 예수가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3,34 고 말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런 일이다.
내가 알기로는 사랑이야말로 깨어있음과 살아있음으로
들어가는 문을 안전하게 열어주는 유일한 방편이다.
그렇게 열린 문을, 사랑 때문에 겪는 고통이 계속 열려있게 한다.
큰 사랑과 큰 고통은 우리를 성숙시키는 두 개의 문이다.
용감하게 그 문을 열어두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