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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추억, 나의 노래
글 : 이상현
도시의 창문도 모두 잠든 어둠이 짙게 내린밤, 마음도 울적하여
옛 노래와 함께 기억 속에서 지난날 나의 모습을 들여다 본다.
항상 반복되는 일상의 넋두리 속에서 음악마저 없다면 정서적으로
얼마나 삭막할까?
음악은 개인적 취향에 따라 느끼는 감정이 다르기는 하겠지만
내가 즐겨 부르는 노래 속에는 사랑과 시가 있고 기쁨과 슬픔이
있으며 아름다움과 정겨움이 담겨져 노래와 함께 울고 웃었던
지난 세월들이 내 가슴에 차곡차곡 쌓여 살아 숨쉰다.
나는 매주 월요일밤 열시에 어김없이 KBS 텔레비젼 '가요무대'
프로를 즐겨 찾는다. 그시절 그 노래가 내 인생의 어느 시점
이었던가를 되돌아보고 추억을 회상하는 값진 시간을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내가 유행가를 알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중반 국민학교(현,초등교)
3학년쯤 되었을 게다. 당시 시골에는 전기불도 없었고 문화시설이란
상상도 못하던 때에 우리 옆집 석주네 외삼촌이 노래가 나오는 축음기
를 구해와 동네가 온통 떠들썩했다. 처음보는 물건이라 희한하기도
했으며 도깨비 요술단지마냥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둥근판 위에
바늘이 긋고 지나가면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흘러나온다.
어떤 할머니는 저 조그만 상자 안에 사람이 어떻게 들어가느냐고
해서 한동안 방안이 웃음바다가 되기도 했다. 저녁이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동네 사람이 모두 모여 방안이 꽉 차고 바깥 마루까지 발
들여놓을 틈도 없다. 노랫소리가 축 처질 때면 손잡이를 빙빙 돌리면
노래가 금방 되살아 나오기도 한다.
그 때 내가 처음 들어본 노래가 전선야곡, 귀국선, 목포의 눈물,
황성옛터, 애수의 소야곡 등 인것같다. 며칠을 개근 하였더니 내가
금방 따라 부를 정도였으니 어릴 적부터 노래에 소질이 있었던 것
만큼은 틀림없다. 그렇게 해서 알게 된 노래가 중, 고등학교에서도
공부는 제쳐두고 노래에 미쳐 있었다. 틈만 생기면 가수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혼자 뒷동산에 올라 발성연습부터 시작하여 어디서 알았는지
가장 나쁜 컨디션 상태에서 노래를 할 수 있도록 소금물로 목을 적셔
가며 연습을 했는데 언제나 변함없이 연습용 노래는 Danny boy,
아, 목동아 이다. 고음처리 부분을 무사히 넘기면 그 날의
노래 컨디션을 가눔할 수 있었다.
팝송으로는 폴앙카의 Diana, 톰죤스의 Green Green grass of home
후랭크시나트라의 My way, 정도는 어렵지 않게 소화해 내었다.
노래책도 있지만 악보를 전해주는 학교 밴드부에 있는 친구 역할도 컷다.
그때 나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노래는 한상일의 웨딩드레스를 포함하여
안다성의 바닷가에서, 사랑이 메아리칠때, 문정숙의 나는 가야지,
정원의 무작정 걷고싶어, 등이다.
만 21세 되던 해 군대 입영영장을 받고 일 년 동안은 농사일을 도왔는데
말만 농사일이지 농촌 청년 계몽단체인 4H (Head, Heart, Hands, Health)
클럽에 참여 하였지만 그저 놀기에 바빴고 충주시와 중원군 여름캠프
노래자랑에서 최희준의 '엄처시하'로 1등을 차지해 동량면 대미 국민학교
운동장을 가득 메운 대원과 인근 주민들의 환호성을 받기도 했다. 이어서
대소원에서 충북일보사 주최 군민 위안 잔치에서 남상규의 '추풍령'을
멋지게 불러 당시 노래 잘하기로 소문난 6척 장신의 이름난 주먹 박ㅇㅇ에
이어 2등을 차지한 적이 있다. 심사석에도 주먹의 우상이 끼어 있었고
사전에 나에게 기권을 강요하던터라 2등도 다행스러웠다.
당시만 해도 늘씬한 키에 인물도 미남(?)인데다 쥐어짜듯 부르는 나의
노래는 처녀들의 가슴을 풀었다 조였다 정말 대단한 인기였다.
라디오에서 신곡이 흘러 나오면 한 두 번만 들어봐도 소화할 수있는 실력
이기도 했다.
언젠가 충주극장에 쇼 단이 왔을 때 마포종점, 쌍고동 우는항구,를 작곡한
쇼단장인 송운선 작곡가를 그가 묵고있는 충주여관으로 직접 찾아가 떼를
써서 노래 테스트도 받은 후 " 자네, 노래실력이 대단하네. 희망이 있어!" 하며
서울 주소지를 주며 찾아 오라는 언질도 받았으나 봄철을 맞은 시골 보릿고개
에 어떻게 돈을 준비하겠는가? 결국은 서울 가는 것을 포기해야만 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1967년 구정을 사흘 앞둔 2월 6일 군대입영 전날 동리에서 막걸리 파티로
송별회를 열어 주었다. 군대 갈 때에는 동리에서 의례적으로 송별회를
열어 주는 것이 관례였다. 육 이오 전쟁 때부터 군대에 가면 살아오기
힘들기 때문에 동리 기금으로 송별회를 해주었는데 내가 군대 입영할 때
까지도 그 관례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 날 따라 지금은 충주호 수몰
지구가 되었지만 나를 그토록 좋아했던 동량면 하천리에 살고있던 ㅇㅇㅇ
아가씨도 친구 몇명을 데리고 그 먼길을 달려 왔으며 다른 지역의 학교동창
친구들도 찾아왔다. 그러나 그날 만큼은 한동네 어릴적 친구들이 우선이었다.
타지역에서 온 친구들은 간단하게 접대하여 돌려 보내고 동네 소꼽
친구들과 밤새도록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노래하며 날밤을 새웠다.
문화가 없던 시절이었던 만큼 구경거리만 생기면 동네 아줌마들도 극성스러울
정도로 모여드는 시절이기도했다.
이튼날 오후 충주 사범학교 운동장에 집결하여 땅거미가 질 무렵 군용열차에
몸을 싣고 열차가 우리동네 앞을 지나갈 때 나는 창밖으로 상체를 내밀고
어머니가 계신 곳을 향하여 모자를 흔들며 "어머니" 하며 목청껏 외쳤다.
어머니도 내 모습을 보았는지 손을 흔들며 쓰러질 듯 기차 지나는 방향으로
뛰어 오시는 모습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고 눈에 선하다.
훈련소 시절부터 나는 오락시간만 되면 싫던 좋던 간에 앞에 나가 노래를
부르는 것은 기본이 되어 버렸다. 주로 불렀던 노래는 오기택의 등대지기,
진송남의 덕수궁 돌담길, 정원의 미워하지 않으리, 등을 번갈아 가며 불렀다.
논산 훈련소에서 6주 훈련을 마치고 대구 동촌에 있는 제2육군병원 군의학교
에서 위생병(간호병)교육을 받을 때에도 나의 노래는 계속 이어졌다.
일과 교육을 시작할 때 시간이 조금 남으면 여지없이 나를 불러 노래를 시켰다.
죽도록 하기싫을 때도 있었지만 군에서 어떻게 명령을 거부하겠는가? 환자를
다루는 의무병이라 그런지 시간이 많아 훈련병이지만 어느정도 자유가 보장
되어 토요일엔 외출 외박도 가능했고 돈이 많이 들어가긴 해도 훈련은 할만
했다. 어느날 중사 계급장을 단 훈련조교가 느닷없이 나를 부른다.
"이상현 이병, 자네 운이 지독히도 없네! 일주일만 일찍 왔더라도 팔자가
피었을 텐데," 하며 아쉬움을 표한다. 알고보니 일주일전에 '육군 군예대' 에서
노래 잘하는 사병 1명과 사회자 1명을 선발하여 육군 문선대로 데리고 갔다는데
노래실력이 나보다 훨씬 뒤진다는 것이다. 나중 제대후에 알고보니 노래는
몰라도 사회자는 코미디언 '배일집'이란걸 알았다.
그 때 만약 군예대에 내가 차출되었다면 경험과 경력을 쌓아 '송운선' 작곡가를
찾아갔으면 내 인생도 달라졌을지 모른다. 배일집도 군대에서 기능을 쌓아
코미디언으로 성공한 케이스가 아닌가?
대구 군의학교에서 교육을 수료하고 전방 후송병원에 배치되어 위생병으로
근무하며 마음의 안정을 찾아갈 무렵, 군대 오기전 나를 그렇게 좋아했던 동량면
그 아가씨한테 편지가 왔다. 반가운 마음에 급히 뜯어보니 놀랍게도 가을에
시집을 간다는 것이다.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없지만 평생을 같이할
사람은 아니다 라는 것이다. 부모님의 반대가 거센데다 노래 잘하는 사람은
팔자가 드세어 마누라 고생만 시킨다나? 너무도 큰 충격이었다. 한동안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 곧바로 정신을 차린 후 많은 생각을 했다. 그 때부터 가수가
되겠다는 꿈은 아예 접어버렸다. 답장도 하기 싫었고 또 하지도 않았다.
그 이후엔 노래도 하기 싫어졌고 삶의 가치관도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차라리 공병대에서 벽돌 쌓는 기술을 배우던가 운전병과를 받아 수송부에서
차체 밑에 들어가 기계를 조이는 기술을 습득하면 제대후 사회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하는 현실에 대한 애착이 싹트기 시작했다. 환자를 접하는 핀세트와
주사기는 나에겐 아무 의미가 없었다. 고생하며 높은 산을 정복하고 정상에
오른 감회와 어려움 없이 정상에 올라 느끼는 감회는 하늘과 땅 차이일 것이라
생각하니 편한 군대생활이 지겹기조차 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사고 전환의 계기를 만들어준 그 아가씨야말로 나의 앞길을
열어준 구세주다. 결혼식에 참석은 못해도 결혼을 축하한다는 편지라도
띄우겠다는 마음은 먹었지만 결국 편지도 보내지 못했다.
그러나 가수의 꿈은 접었지만 노래에 대한 애정은 식지않았다. 9월에 두번째 휴가를
얻어 학창시절 한동안 기차 통학을 했던 주덕역에 내려보니 그때와 변함없이 철길
양쪽 길가에는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피어 바람에 한들대고 있었다.
♬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 있는 길
향기로운 가을길을 걸어갑니다.
기다리는 마음이 초조하여라
단풍같은 마음으로 노래합니다,
길어진 한숨이 이슬에 맺혀서
찬바람 미워도 꽃 속에 숨었네.
코스모스 한들한들 ~~~
'김상희'의 코스모스 길을 흥얼거려 보기도하고
'나훈아'의 고향역을 주먹을 마이크라 생각하고 크게 불러도 본다.
♪ 코스모스 피어있는 정든 고향역
이쁜이 곱분이 모두 나와 반겨주겠지
달려라 고향열차 설레는 가슴안고
눈 감아도 떠오르는 그리운 나의 고향역
1971년 1월 군에서 제대를 하고나니 오직 취업 한가지 생각뿐이다.
집에서 지체할 시간도 없이 청주 외삼촌 댁에 기거하면서 내덕동에 있는
연초제조창에 취업하는 것이 1차 목표였는데 엉뚱하게 서울 영등포에 있는
오비맥주(주)에서 먼저 소식이 왔다. 청주보다도 서울이 오히려 다행스럽긴 했다.
당시 오비의 임금체계가 무척 높아 사윗감을 보지 않아도 오비맥주 굴뚝만 봐도
딸을 준다고할 때다.
1972년 11월25일 입사 1년만에 같은 직장에 다니던 지금의 아내와 열애 끝에
사내 결혼을 했다. 영등포 경원 예식장에서 주례는 박한상 국회의원 이었고
결혼행진곡은 피아노를 대신하여 당시 인기 절정이었던 경희대학교 음악부에
재학중이던 '김훈과 트리퍼스' 멤버가 맡았다. 나를두고 아리랑, 모래성, 정주고
내가우네,를 부른 클럽이라면 알만할 게다. 같은 멤버인 트럼본 주자가
나의 처남 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노래 솜씨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고음과 저음 처리가 능숙했고 감정도
풍부하고 목소리도 맑고 깨끗해서 송창식의 고래사냥, 이장희의 그 건너, 이종용의
너, 최백호의 영일만 친구, 등 레퍼토리가 다양했다.
80년도 중반 정확히 7월1일 광주에 오비맥주(주)제3 공장이 건축될 당시 나는
혼자 광주공장에 차출되어 전보발령이났다. 즉시 계장으로 진급되었지만
주위에서 축하해줄 사람도 없었다.
서울집이 정리가 덜되어 가족을 멀리하고 혼자서 운암동 주공2단지 사택에 여장을
풀고 부담없이 먹고 마시며 즐기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직장 자체가 술공장이고 또한 공장이 건설중에 있어 술자리 기회가 무척 많아
하루도 뜸할 날이 없을 정도였다. 당시에는 스탠드바가 왜 그리 많았는지 전자
오르간이 주종을 이뤄 나에겐 물고기가 제물을 만난거와 다름없었다. 충장로의
'루불스텐드바'는 내집 드나들 듯 했고 그 때 많이 불렀던 노래가 일편단심
민들레야, 창밖의 여자, 기쁜 우리 사랑은, 해후, 등이다.
90년대 중반에 접어들어 음주문화가 점점 변하면서 스탠드바가 사라지고
여기저기 노래방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지금에 이르렀지만 노래는 역시
마음을 즐겁게 해준다.
회사일도 최선을 다해 대한민국 품질명장도 되었고 대통령 표창도 받았다.
흐르는 세월 어찌 막으랴! 이제 30여년간 정들었던 회사도 정년퇴직 했다.
기계도 사용하지 않으면 녹이 스는 법, 나의 노래도 이제 세월따라
녹이 잔뜩슬어 옛 같지가 않다. 고음도 갈라지며 깨지고 후렛이 생겨 저음도
약해지고 목에서의 바이브레이션은 전혀 듣지 않는다.
하지만, 기본이 어디가랴! 지금도 노래실력은 죽지 않았다. 노래방에 가서
나의 십팔번인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와 박강성의 '문밖에 있는 그대'를
한곡조 뽑으면 기립박수가 나올 정도다.
내삶의 지론이 일에는 미쳐라!인데 그래서 그런지 노래도 한 때 미쳐 봤고
일은 더욱 더, 남보다 빠른 승진에 1994년도에는 대한민국 '품질명장'에
지정되어 영빈관에서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표창도 받아 직장 동료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기도 했다.
이제부터는 칠순을 눈앞에 두고 시와 수필의 세계에 한번 미쳐보려 한다.
정신건강에 글보다 더 좋은 보약이 어디 있겠는가? 실제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것을 실제로 보여주련다.
얼마전 고향 친구로부터 동량면 ㅇㅇ리에 살았던 옛 애인의 소식을 들었다.
반가우면서도 기분이 참 묘하다. 소식에 의하면 몇년전에 남편을 사별하고
어렵게 사는 모양이다.
지금은 충주 대수정다리 복개천 위에서 국밥 장사를 하고 있다는데 만나봐야
하는지 갈등이 생긴다. 그러나 상대방 입장도 고려해봐야 되지 않겠나!
그도 이제 나와 같이 많이 늙었을게다. 마음 같아선 꼭 하번 만나보고 싶다.
어찌보면 아름다운 만남이 아닌가?
같은 실버 세대인데 못 만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많은 생각을 했다. 늙으면 추억을 먹고 산다는데 솔직히 실망이 두려워
영원히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다.
오기택의'충청도 아줌마' 노래로 마음을 풀어본다.
♬ 와도 그만 가도 그만 방랑의 길은 먼데
충청도 아줌마가 한사코 길을 막네.
주안상 차려놓고 마주 앉은 사람아
술이나 따르면서 따르면서
내 설움 내 설움을 엮어나 보자.
ps 지루한 글, 끝까지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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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의 이력서 3막5장 중에서 2막을 소개하여 드렸습니다.
이제 남은 1막5장은 12월 동산문학 겨울호에서
시부분 신인 문학상으로 인사를 드린 후 년말경에 다시
막을열어 마감 하겠습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선배님들께서
반갑게 마중물이 되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남은1막5장은 저의 일터를 소개합니다.
* 저는 이렇게 남의 시선을 의식치 않고 살아 왔습니다.
내공을 쌓는 것도 용기 아닙니까? "감사합니다"
이시인님 자서전같은 장문의글 잘읽었습니다.
어렸을때부터 노래부르기에 소질이 있었고 동네에 축음기가 있어서 옛날노래를 많이 듣게되서라고 볼수는 없지만 노래를잘하게된 동기가 된듯합니다. 한사람은 바늘을 갈고 한사람은 태엽도 감아주는 일을 해야하는 축음기 생각이 납니다. 당시에 노래자랑은 공공연하게 주최측 맘대로 입상자를 선발하던때임을 동감합니다.
훈련소에서 군예대에 뽑혀갔더라면 전문적인 노래꾼이 아니 가수의 꿈을 이룰번 했게습니다만 많이 아쉬웠겠습니다.
당시에 군에갈때 송별식 장면도 저하고 일치하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밤새껏 술상을 두드리며 마시고 부르다가는 친구들끼리 싸움이 벌어지는 일이많았던 당
시의 추억이 새롭습니다.
동량면의 아가씨하고 짝이 되지못한것은 노래를 잘한것 때문이라니 지금생각하면 웃을일이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많이 안타까웠겠습니다.
국밥집을 하고있다는 옛애인을 찾아가 만나보고 싶은 심정이해합니다만
이시인님 우리동산문학에 겨울호 신인문학상 축하드립니다.
강선배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