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주 과제] 레인보우 연애담 - 심혜진

[여름바람]

어제 수업에 못 가서 아쉽네요.

오후에 남편한테 상가집에 가자는 연락을 받고 살짝 고민을 했지요.

다음학교를 기약하며 눈물을 머금고...ㅠㅜ 상가집 다녀왔습니다.

친구 인터뷰는 무려 4시간 걸렸고요..

애초에 녹취 풀 자신이 없어서 노트북을 가져갔어요.

A4 9장 나오더라고요.

기사처럼 안 쓰고 친구가 말을 거는 방식으로...

친구가 변해온 과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싶어서 쭉 적어봤어요.

길이 길어졌네요.

그래도 후딱 읽으실 거라 믿으며..

다음학교에서 또 뵈었으면 좋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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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까지 찾아왔구나. 무슨 대단한 이야기를 듣겠다고.(웃음) 여기까지 오게 해서 미안해. 하지만 편하게 이야기하려면 아무래도 집이 좋겠다고 생각했어.

내 나이 마흔 하나. 매달 월급 받아 궁색하지도, 넘치지도 않게 강아지랑 둘이 그냥저냥 살고 있지. 남들 보기에 평범하지 않은 게 하나 있다면, 내가 ‘이반’(동성애자들이 스스로를 지칭하는 말)이라는 거? 너도 이 이야기가 궁금하다고 했지? 별다를 건 없지만 이야기해 줄게.

어떤 동성애자는 자기 정체성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다던데, 나는 그러지 않았어. 자연스러웠다고 할까. 초등학교 2학년 때 친했던 여자애가 있는데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어. 좋아했던 사람이 떠나는 것처럼 마음이 안 좋더라고. 동성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낀 건 이때가 처음이었어. 초등학교 5학년 때도 기억나는 여자 친구가 있는데, 좋아했다는 감정 이외에 다른 기억은 없어.

음... 그러고 보니, (손으로 눈과 이마를 가리며) 내가 중학교 때부터 여자애들을 많이 좋아했구나.(웃음) 나는 조용한 모범생이었어. 마음에 맞는 친구 몇 명하고만 친하게 지냈지. 중학교 2학년 때, 약간 날라리처럼 보이는 아이가 있었어. 처음 봤을 때에도 눈에 확 띄었지만, 같이 놀면서 더 좋아진 것 같아. 당시에 편지 주고받는 거 유행이었잖아. 편지에 좋아한다고 써서 그 친구한테 보냈어. 그냥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아. 이후로 몇 번 편지를 주고받다가 서로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어. 이때까진 이렇다 할 연애는 시작하지 않았지.

고등학교 때 천리안인가, 피시통신을 시작했어. 채팅도 하고 번개도 많이 했지. 대구에 사는 여자애를 몇 번 만났는데, 나한테 좋아한다는 표현을 하더라. 다른 사람한테 고백을 받은 건 처음이었어. ‘이 감정이 뭐지? 어떻게 대응해야 하지?’ 고민하다가 그냥 “나도 너 좋아”라고 말했어. 두세 달 정도 잘 지냈어. 스킨십도 조금씩 하면서. 그런데 이 친구가 다른 남자를 만나더니 연락을 끊은 거야. 많이 힘들더라고. 혼자 감당하기 힘들어 학교 친구들한테 이야기를 했지. “나 여자애한테 차였어.” 지금 생각하면 아찔해. 내가 참 운이 좋았던 것 같아. 이때 친구들이 나를 안 받아주었다면 동성을 좋아하는 게 나쁜 거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 거부도 안 당했고, 소문도 안 났어. 정말 다행이지.

얼마 후에 채팅으로 동갑내기 남자애를 만났어. 한 달 정도 만나다 헤어졌는데, ‘나는 여자든 남자든 마음이 통하면 사귈 수 있구나.’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더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자부품 만드는 공장에 들어갔어. 선배 권유로 노동조합 활동을 시작했지. 아, 이 이야기는 하기 힘든데. 공장 직원이 천 명이 넘는데, 그 중에 조합원은 100명 정도 밖에 안 돼. 그러니 윗사람들의 탄압이 얼마나 심하겠냐? 대신 같이 노조활동 하는 사람들끼리는 끈끈할 수밖에 없어. 일 끝나고 술 마시고, 노조 이야기도 하면서 많이 친해졌어.

여기서 한 언니를 알게 됐어. 나를 잘 챙겨줬어. 어느 날, 잠을 자는데 아빠가 술을 마시고 또 난리를 치는 거야. 조금 있다가 일하러 나가야 하는데 잠을 못 자니 괴롭잖아. 그날은 도저히 못 참겠더라고. 옷만 대충 걸치고 집을 나왔어. 그리고 그 언니네 집으로 갔지. 언니는 혼자 살고 있었거든.

언니도 황당했겠지. 그래도 활동하는 후배가 집을 나왔으니 어쩌겠어. 그냥 같이 살기로 했지. 어느 날 언니랑 술을 마시다가 내가 키스를 해도 되는지 물어봤어. 자연스럽게 키스를 했고, 그날부터 급속히 친해졌는데, 언니는 우리가 사귀는 건 아니라고 하는거야. 5년 동안 같이 살면서 쭉 그랬어. 연인은 아닌데 스킨십은 하는 사이? 난 그 언니 마음이 지금도 이해가 안 가. 인정하는 게 그렇게 어렵나? 섭섭하고 가슴이 아파.

26살 때 크게 다툰 뒤 그 집을 나왔어. 단칸방을 얻어서 혼자 살기 시작했고, 그 언니는 남자를 만나서 결혼을 했지. 나는 그 즈음 여성주의 공부하는 시민단체 사람들을 만났어. 이 사람들과는 말이 잘 통하더라. 모임 자체가 너무 편안한 거야. 나를 ‘남자같다’거나 ‘왜 옷을 그렇게 입느냐’고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었어. 그 모임에는 레즈비언도 있었어. 관계를 부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참 좋았지.

한채윤 씨 알지? 성소수자 차별반대운동하는 사람 말이야. 27살 쯤, 그 사람이 운영하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여섯 살 어린 친구를 만났어. 당시 나는 사진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었어. 친했던 동아리 언니한테 애인을 소개하고, 동아리 모임에도 같이 나갔지. 교대근무를 하다 보니 만날 시간이 부족했거든. 애인도 만나고, 동아리활동도 하고, 그럴 셈이었지.

그런데 어느 날, 그 언니가 술자리에서 사람들한테 “쟤네 둘이 사귀는 사이”라고 말해버린 거야. 그때만 해도 아웃팅(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신의 성적 경향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란 말도 몰랐고,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어. 언니는 나랑 애인을 위한 말했고, 나도 진심이라 생각했어. 기분은 나빴지만 그냥 넘어갔지. 하지만 그날 이후 나는 굉장히 불편한 이야기들을 들어야 했어.

“여자끼리 사귀면 결혼도 못 하는데 어쩌려고 그러느냐.”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여자애 꼬셔서 뭐하는 거냐.” 이런 말들을 하더라고. 사귀면 무조건 결혼을 해야 하나? 결혼을 전제로 연애하는 사람도 있고 안 그런 사람도 많잖아? 그래서 “그건 이후 문제다.”라고 말했지. 점점 모임에 나가는 게 불편해지기 시작했어. 결국 동아리활동에서 멀어졌고, 나중엔 애인과도 헤어졌어. 그 무렵 노조 활동도 정리하고 여성주의 모임에 좀 더 적극적으로 함께 하게 되었어.

이 모임에서도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1년 동안 엄청 따라다녔어.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출퇴근도 시켜주고, 새벽이나 퇴근 후에 같이 운동하고, 금연을 빌미로 사탕사달라고 조르고. 그 친구가 바빠서 자주 만나진 못했지만 틈틈이 밥도 같이 먹고 이야기도 많이 나눴어. 내가 여러 번 “사귀자”고 말해지만 마음을 안 받아주더라. 애매한 관계가 지속되다가 결국 내가 좀 세게 말했지.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느냐고, 아니다 싶으면 헤어지면 되는 거 아니냐고 말이야. “그래, 만나자.” 이 말을 듣고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이 친구와 연애는 모든 게 자연스러웠어. 둘 다 독립해 살고 있었는데, 월세도 아깝고 굳이 따로 살 이유가 없었지. 동거를 시작했어. 길거리에선 내가 팔짱을 꼈어. 내 스타일이 좀 보이쉬 하잖아. 그 친구는 누가 봐도 딱 ‘여자’라서, 내가 팔짱을 껴야 사람들 눈에 이상해보이지 않을 것 같더라고. 손도 절대로 안 잡았어. 극혐오자들한테 노출되면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

우리 관계를 주위에 공개하지는 못했어. 그러다보니, 이 친구를 좋아하는 남자들한테 연락 오는 걸 막을 수도 없었지. 기분이 좋지는 않았어. 2년 뒤 이 친구가 여동생이랑 함께 살아야 할 처지가 되었고, 어쩔 수 없이 나는 따로 집을 얻어야 했어. 그리고 이 친구도 남자를 만나기 시작했고. 몇 차례 붙잡기도 했어. 집으로 찾아가 같이 빨래를 널면서 울었지.(웃음) 기회를 달라고. 하지만 결국 그 남자와 결혼을 하더군.

나는 이때부터 쭉 불안한 삶을 살아온 것 같아. 예전에는 여러 모임에 나가서 새로운 사람을 만났지만 직장생활을 하며 모임까지 나간다는 게 쉽지 않네.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피곤하기도 하고... 열정도 많이 사라졌지.

가족들은 물론 내 사정을 잘 알고 있지. 20대 중반, 노조 선배와 헤어진 후에 언니들한테 말했어. 처음엔 “미쳤어, 미쳤어~”그러더라. 그래서 “어차피 이해 못 하니까 그냥 받아들여. 언니한테 여자 만나라면 못 만나잖아. 나도 남자 못 만나.”라고 했지. 나중엔 인정을 하더라. 엄마도 “너 동성연애(웃음)하면 안 된다”고 말한 적도 있어. 그런데 서른 중반 넘어가니까, 엄마가 내 여자 친구들을 “자주 놀러와”라면서 무조건 반겨. ‘우리 딸이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 우리집이 이런 쪽으론 좀 열려있지. 언니들이 사별하거나 이혼한 후에 새로 연애를 하는데, 엄마가 이서방, 김서방 하면서 다 받아주더라고.(웃음)

레즈비언으로 살면서 핍박받은 적은 없어. 나를 많이 드러내고 살지 않았고, 여러 사람을 만나는 스타일이 아니어서 그럴 수도 있어. 복장에 대한 이야기는 수시로 듣지. 나를 두고 “남자 같은 애”라고 말하는 걸 들었는데 몹시 불쾌했어. 나는 그냥 입고 싶은 거, 나한테 편한 거 입을 뿐이야. 남자처럼 입는 게 아니란 말이야. 한번 생각해 봐. 내 외모에 립스틱 바르고, 레이스 달린 블라우스 입으면 어울리겠냐? 치마 입고 하이힐 신고 팔자걸음 걸어봐. 웃기지 않을까? 난 내가 좋은 걸 할 뿐이야.

나는 검증된, 소수의 사람에게만 내 정체성을 밝혀왔어. 분위기가 만들어진다면 그냥 편하게 드러내고 싶어. 지금 직장에서도 아무도 몰라. 만일 알려진다면? 글쎄. 벌레취급하지 않을까? 나는 나름대로 대응을 하겠지만 견디기 쉽진 않겠지.

기분이 가라앉고 지칠 때면, 내 삶을 후회하기도 해. 나를 떠난 애인들처럼, 나도 남자와 결혼을 한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하다가 금방 고개를 내젓고 말지. 이런 삶에 단련이 되어 가고 있나봐. 나중에 레즈비언 공동체를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 영화 <메종 드 히미코>에 게이 실버타운이 나오잖아. 아직 젊으니까 각자 자유롭게 살다가 나중에 여럿이 공동 출자해서 집 짓고 살면 좋겠어. 돈 많은 레즈비언 독지가가 투자해주면 더 좋겠지.(웃음)

사회복지 공부도 미래의 공동체에 도움이 될까 하는 마음에서 하는 거야. 당분간 공부에만 전념하고 싶어. 혹시 알아? 50대 되어서 좋은 반려자를 만날지. 요즘은 60대도 젊던데! 연애는 좀 쉬지 뭐. 동성애자라고 해서 늘 연애를 할 거라는 편견을 버리라구. 이성애자들도 연애 안 하거나 못하는 사람 많잖아. 똑같은 거지.

그동안 내 삶을 많이 돌보지 못한 것 같아. 얼마 전 담배도 끊었고, 감기 걸리면 병원도 가기 시작했어. 내 주위 사람들은 “너처럼 몸 챙기는 사람 처음 본다”고 말해. 그러면 속으로 ‘네가 혼자 사는 어려움을 알아?’라고 말하지. 나는 오래 살겠다는 게 아니야. 아프면 안 되니까. 아파서 누워있으면 먹고 살 수가 없잖아. 나는 나를 부양해야 하는 사람이라고. 이젠 술만 좀 덜 마시면 되는데. (웃음)

얘기를 하다 보니 잊고 있던 기억들이 생각나고, 잘 몰랐던 걸 알게 되기도 한 것 같아. 어때? 너랑 크게 다르지 않지? 하지만 말이야, 분명히 다른 게 있어. 나는 아직은 나를 드러낼 수 없다는 거. 노출되는 순간 어떤 삶이 다가올지, 생각하면 깜깜하다는 거. 그게 가장 힘든 점이지. 이야기 들어줘서 고마워. 네가 처음이야. 안녕.

[고운]

선생님이 댓글 쓰라고 하시는데 저는 사실 댓글 쓰는 게 어렵거든요. 좋은 코멘트를 하고 싶은 욕심이 있어서- 그래서 잘 안 하게 되는데 1. 여름바람님이 보고 싶어서 2. 이 글이 너무 좋아서 댓글을 남겨봅니다. 저의 학창시절 생각도 나고, 또 친구분이 이야기하는 상황들이 다 생생하게 전해져요. 그리고 말을 건네는 방식으로 얘기하는 게 제일 좋아요. 정말 제 옆에서 제 친구가 이야기 들려주는 기분이에요. 다음학교에서 꼭 만나요. ^_^

[여름바람]

우왕~~~~~~^^ 고마워요~~~ 고운님 반장으로서 고생 많았어요. 필기하기 무척 싫어하는 제가 반장님 믿고 아주 맘 편히, 당당하게, 필기를 안 할 수 있었답니다..^^ 다음학교! 저도 기다리고 있어요^^

[인숭이]

성 정체성을 드러내는 건 언제나 힘든 일인 거 같아요. 저는 바이섹슈얼인데, 읽으면서 과거가 생각나서 좋았어요. 성 정체성으로만 보이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이 잘 드러나서 더 감명깊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에 못봬서 아쉬워요ㅠ 종종 글 올려주세요 !!

[여름바람]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마지막 수업 못 가서 저도 아쉽고.. 화장실 갔다가 뒤 안 닦은 느낌이에요. ^^; 혹시 다음학교 함께 하시면 그때 또 글나눔 하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