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작품, 당선작품 문제 있다
1. 이런 수상작품
모 지방에서 주관하는 문학상이 있는데 금년에 9회째다. 그런데 그 수상작을 보니 기가 막힌다. 작품을 보고 상을 주는지 사람을 보고 상을 주는지 속사정은 잘 모르겠으나 명색이 아동문학단체에서 주는 상인데, 수상작의 꼴이 말이 아니기에 한마디 한다.
혹 그쪽에서 나에게 네가 뭔데 남의 잔치에 끼어들어 되지도 않은 시비를 하느냐고 삿대질을 한다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수상작이라면 널리 알려지게 마련이어서 여러 사람이 관심을 가지고 보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싫든 좋든 간에 상을 주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수상작’이라는 이유로 작품에 대한 평가는 어쩔 수 없이 받게 마련이다. 상의 무게가 대단한 것이 못 되어 상이 대외적으로 크게 평가를 받지 못한다손 치더라도 수상작이 좋으면 상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질 수 있고 상의 무게도 높여주는 공헌을 하게 된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작품의 질 문제에 걸려 주는 쪽도 받는 쪽도 무시만 당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
누구가 빈 하늘 / 해를 띄울까 //
산너머 물건너 / 새벽 까치가 //
하늘가지 산봉우리 / 둥지 달았지 //
누구가 어둔 밤 / 달을 띄울까 //
산너머 물노을 / 수줍은 누나 //
징검다리 개울물 /비쳐본 게지 //
징검다리 개울물 /비쳐본 게지 //
(‘해와 달’ 전문)
모름지기 시든 동시(동요)든 읽어서 감동이나 감흥이란 게 있어야 한다. 영국의 어느 평론가는 말하기를 ‘한 편의 시가 우리의 마음속에 불러일으키는 감정이 그 시의 좋고 나쁨을 정하는 절대의 테스트는 되지 않는다할지라도 그래도 역시 그것이 최초의 테스트임은 확실하다’ 고 했다.
그런데 이 동요는 표현이 미숙한 것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1연에서
‘누구가 빈 하늘’이라 했는데 ‘누구가’란 말은 처음 들어본다.
‘누가 빈 하늘’이 바르다고 본다. 아니면 ‘누군가가’
4연에서도 마찬가지이고
3연과 5연에서
하늘가지 산봉우리 / 둥지 달았지 // (3연) 산너머 물노을 / 수줍은 누나 // (5연)
유추가 억지여서 난해 아닌 난해가 되어 버렸다.
그나마 동요가 갖는 아기자기한 맛도 없어 동요 치고는 수준 이하다.
수상작 중의 하나인 다음 작품도 마찬가지이다.
아이야 / 돌섬에 / 가 보렴 //
너희들 끼리끼리 / 다 모여 놀더라 //
크고 작은 / 키 / 똑 같은 / 또래 //
바위가 아니더라 / 너희들의 물장구 //
뿐인가 / 우르르 물 따라 / 달려가고 / 돌아오는 //
저것이 어찌 바위 / 너희들이 시원한 / 여름날 /그 기운이던 걸 //
(‘바닷가 돌섬’ 전문)
이 작품은 제목과 내용이 각각이다. 그리고 무엇을 표현하려 했으며 또 무엇을 표현했는지 도무지 요령부득이다. 덜 익은 상태에서 쓰다 보니 그런가. 미몽혼미형의 동시(?)이다.
아이들이 이 동시를 보면 뭐라고 할까? 동시란 본래 이런가 보다, 내가 머리가 나빠 이해하지 못하는가 보다, 고 할 것이다. 이래서 동시문학만 애꿎게 욕먹는다.
제발 작품 제대로 쓰고, 제대로 보고, 제대로 상 주자. 이러다간 좋은 동시를 쓰는 사람들까지 도매금으로 넘겨져 망신당하겠다.
문학상은 좋은 작품으로써 가치와 무게를 지녀야 한다. 상의 연륜이나 상금 액수, 상의 명칭 따위로 결정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좋지 않은 작품 뽑아 상주고 비웃음 사는 일이 없도록 하자. 상 타기 위해 상 받기 위해 문학하는 것이 아니다. 하기야 상 받으려고 내심 기를 쓰는 이들도 많이 있긴 하지만. 좋은 작품에 상을 주는 좀 엄격한 문학상이 되었으면 한다. 마땅한 작품이 없으면 거르기도 하면서.
2. 이런 당선작품
어머니가 살던 동네 / 토담집 지붕 위에서 / 지금은 전설이 되어버린 /하얀 박꽃. // 어머니라고 불러 보랴 / 수줍은 눈매 노을에 물들 때 / 고향집 초가지붕 위에서 /초록별 묻어오던 옛 이야기처럼 /하얀 박꽃이 줄지어 핀다 .// 밤새 가꾼 매무새 / 예쁜 얼굴로 / 뒷뜰에 내려와 / 햇살과 놀고 // 밤이면 토담 위에 서서 /초롱한 눈망울만 초록별과 속삭이고 // 지금은 잊혀진 고향 마을 / 전설처럼 고운 박꽃이 핀다 . // 어느덧 흰 머리 어머니 / 타향의 아랫목에 / 곱게 늙은 박꽃 / 주름살이 하얗게 웃는다 .//
(‘박꽃’ 전문)
위의 작품은 모 월간지 신인작품상으로 당선된 작품이다. 심사평을 보자.
동시 이전에 시로서의 1차적 성공을 뜻하는 것이다. 동시라고 해서 시 이전의 수준, 시의 가치 이하일 수는 없음을 강조해 둔다. (중략)
박꽃은 나무랄데 없는 상당한 수준의 동시다. 다만 이 분은 앞으로 시대적으로 퇴색된, 너무 낡은 언어의 표현은 하지 않도록 주의했으면 한다.
내가 보기엔 시로서의 1차적 성공이 아니라 시로서도 1차적으로 실패한 작품이다. 나무랄 데 없는 상당한 수준의 동시가 아니라 나무랄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닌 수준 이하의 비동시다. 그 까닭은 시의 짜임새가 전체적으로 산만한데다, 이미지 통일이 되어 있지 않고, 시 문장도 제대로 정리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의 특수성에 비추어 볼 때 비동시라는 것이다. 어른의 회고적 감정유로에 어른인 작자 자신의 사적인 감정 세계의 표출만 있을 뿐, 그 어디에도 아이들의 감정세계와 가까운 것은 없다. 즉 동시로서 아이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요소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기껏해야 몇 개의 상투적인 시어로 예쁜 얼굴, 햇살과 놀고, 초롱한 눈망울. 초록별과 속삭이고, 로 동시처럼 보이게만 했을 뿐이다.
이런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았으니 이 당선작을 본 동시인 지망생들이 앞으로 어떤 식으로 작품을 쓸 것이란 건 불은 보듯 뻔하다.
어른의 개인적인 감정세계를 몇 마디 유치한 아이 말로 나타내면 수준 높은 동시가 되고, 아이들의 감정세계를 진솔하게 표현하면 수준 낮은 동시가 되는가?
앞으로 신인 추천 작품이나 당선작은 최소한 동시란 무엇인가를 알고, 동시는 왜 쓰는가를 생각해 본 흔적이라도 있는 작품에 대해 엄선해서 당선시키거나 추천을 해야 할 것이다.
(2007. 9.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