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격동 속에서 왕건은 어떻게 통일대업을 이룩하였나
김갑동(원광대 교수)
고려 태조가 남쪽을 정벌한 것은 토지를 욕심내서인가,
반역을 토벌하여 해서인가.
오직 반역을 토벌하려 했기에 한 번 싸워 후백제 수천리의 강역을 항복시킨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고려 태조의 위덕일지라도 응당 이와 같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땅을 얻고 나서 원흉을 용서하였으니 인의로 시작하고 이익으로 끝낸 것이라. 어찌 심히 애석하지 않은가.
고려 태조가 후백제의 신검을 토벌하고도 그를 살려준 것에 대해 조선 후기 유학자인 유계가 평한 기록이다. 여기서 유계는 아버지 견훤을 배반한 신검을 혹평하는 한편 그런 신검을 토벌하였기에 왕건이 쉽게 승리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역사의 주인이 된 것은 이 때문만이 아니었다. 신라 말의 난세에 나타나 궁예와 견훤을 제치고 통일 대업을 이룩한 것은 그만한 노력과 자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객관적 시각에서 왕건이 어떻게 후삼국을 통일했는가 분석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우리 민족의 바람직한 지도자상을 생각하고 앞으로 민족의 재통일을 이룩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라 하겠다.
궁예. 견훤. 왕건의 출현과 ‘후삼국 시대’의 성립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하대로 접어들면서 통치제제가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김양상이 혜공왕을 죽이고 선덕왕으로 즉위하여 하대가 시작된 이후 김경신과 김주원의 왕위 다툼은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의 반란으로 이어졌다. 흥덕왕이 죽은 뒤에는 상대등 김균정과 시중 김명이 후계자 자리를 둘러싸고 싸움을 벌였다. 이 싸움에서 패배한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은 청해진 대사 장보고의 힘을 빌어 민애왕을 내쫓고 왕이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 귀족이나 사원은 불법적으로 백성들의 토지를 탈점하였다. 권력이나 문서위조, 고리대 등의 방법으로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았던 것이다. 그러자 토지를 잃은 농민들이 유민화되면서 정부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889년(신라 진성여왕 3) 조세독촉을 계기로 농민봉기가 전개되었다. 이 농민봉기는 삽시간에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이 틈을 타 지방의 세력가(호족)들은 농민들을 규합하여 중앙정부에 대항하였다. 그러다가 종국에는 이른바 후삼국시대가 연출되었다. 견훤이 세운 후백제와 궁예가 세운 태봉, 그리고 종래의 신라가 각축전을 벌이게 되었던 것이다.
궁예는 신라의 왕실 출신으로 전한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나면서부터 이빨이 있었고 태어나는 날 지붕위에 상서롭지 못한 광채가 있었다. 그래서 왕은 사신을 보내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계집종이 구출하여 도망하였다. 10여 세가 되자 세달사(지금 영월의 흥고사지로 추정)라는 절에 들어가 살았는데, 까마귀가 떨어뜨린 나뭇가지가 주발 위에 ‘왕’자 모양을 그렸다. 이에 그는 자부심을 품고 속세로 나왔다고 한다.
그는 891년에 죽주(경기도 죽산)의 양길 휘하에서 활약하였다. 그는 그 곳을 기반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원주, 강릉을 거쳐 철원, 금화 등지를 장악하는 대세력으로 발전하였다. 급기야는 양길까지도 격파하고 태봉을 건국하였다.
궁예는 집권 초기에는 사졸들과 침식을 같이하는 등 바람직한 지도자상을 보이기도 했다. 또 한편으로는 불교에 심취하여 자신을 미륵불이라 칭하고 아들들에게는 신광보살, 청광보살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기도 했다. 이른바 미륵신앙을 이용한 전제정치를 지향한 것이다.
그러나 종교를 이용한 정치는 한계가 있었고, 세월이 갈수록 궁예는 의심이 많고 포악한 성격을 드러내었다. 많은 신하들을 죽인 것은 물론 자기 부인까지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으며, 신라에 대한 극심한 적대의식으로 신라를 멸도라고 부르고 신라에서 오는 자는 모두 죽였다. 이러한 파행적이고 흉폭한 행동은 더 이상 그를 왕좌에 앉아 있지 못하게 하였다. 결국 궁예는 왕위에서 쫓겨나고 왕건이 추대되었다.
견훤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경상도 상주 가은현(문경군 가은면)에서 아자개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아자개는 원래 농민이었다가 뒤에 장군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인용된 이제가기에서는 견훤을 진흥왕의 후손이라 하였고, 같은 책에 인용된 <고기>에서는 광주의 북쪽마을에서 지렁이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그는 상주출신인가 광주출신인가. <삼국사기가> 대체로 유교사관에 입각한 합리적인 사실만을 기록하였다고 볼 때, 상주태생이라는 설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광주 북촌에서 지렁이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설화는 지금의 전남 ․ 북 지역에 주요 근거지를 두고 있던 견훤이 만들어낸 것일 수 있다. 즉 그가 광주지역의 토착민임을 내세워 그 지역 주민들을 포섭하려는 일종의 정치적 술책이 아니었나 하는 것이다.
견훤은 체격이 장대하고 재주가 비범했다. 그는 농민봉기로 혼란한 시기에 신라의 군인으로 들어가 서남해안 지역을 지키다가 세력을 키워 무진주(광주)를 점령하였다. 나아가 북쪽으로 진출하여 완산주(전주)를 점령하고 드디어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그러던 중 나주지역이 궁예에게 귀부하자 이를 공격, 탈환하기도 하였으며 덕진포에서 궁예휘하의 왕건과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그 후 궁예를 내쫓고 왕건이 고려를 세우자 왕건과 관계를 갖게 되었다.
왕건은 송악(개성) 출신이었다. 그의 선대는 본래 고구려 계통으로서, 남하하여 개성지역에 정착했다고 추정된다. 그리고 서해를 무대로 한 해상무역에서 부를 축적하여 호족이 되었다. 왕건의 증조할아버지가 바다를 건너온 당나라 숙종이라거나, 할아버지 작제건이 서해 용왕의 딸과 결혼했다는 등의 기록은 선대의 해상무역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다가 왕건은 아버지 용건이 896년 궁예에게 귀순함으로써 궁예 휘하에서 활약하게 되었다.
왕건은 궁예 밑에서 양주 등지를 공략하고 이어 청주, 충주, 괴산, 남양 일대를 점령하는 대활약을 보였다. 또한 금성군(나주)을 공략한 후 해군대장군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이후 그는 중앙에 올라와 수상격인 시중 직책에 있기도 했지만, 궁예의 폭정이 심해지자 위험을 피하려 다시 나주에 내려가 전초기지를 수비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다시 철원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홍유, 신승겸, 복지겸, 배한경 등 여러 장수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왕건과 견훤의 힘겨루기
왕건과 견훤은 초반에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견훤은 왕건이 왕으로 즉위하자 사신을 보내 공작 깃으로 만든 부채와 지리산 대나무로 만든 화살을 선물하였다. 또 고려의 영역을 공격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다가 920년(태조 3) 견훤이 신라의 합천, 초계를 공격하자 신라가 고려에 구원을 요청해 왔다. 이에 왕건이 원군을 보내 신라를 도와줌으로써 둘 사이에 틈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본격적인 대결은 태조 8년 조물군(현재 지명 미상) 전투에서 벌어졌다, 이 전투는 그 전 해인 924년 견훤 측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었다. 여기서 장군 애선이 전사하는 등 전세가 고려 측에 불리해지자 이듬해인 925년 왕건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견훤과 싸웠다. 그렇지만 승리를 결정짓지 못하자 화친을 맺고 서로 간에 인질을 교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화친은 다음해에 깨지고 말았다. 전년에 인질로 고려에 온 진호가 병으로 죽자, 견훤은 진호가 살해당했다고 의심하여 왕건 측 인질인 왕신을 죽이고 고려의 영역이었던 공주를 공격하였던 것이다.
927년 왕건이 용주(예천)을 선제공격함으로써 다시 대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군사력 면에서 볼 때 견훤 쪽이 우세하였다. 그리하여 이 해 견훤이 신라에 침입하여 경애왕을 살해할 때 왕건은 이를 구원하려다 죽을 위기를 맞기까지 하였다.
대구 부근의 공산 전투에서 왕건은 친히 기병 5천 명을 거느리고 출전하였으나 크게 패하여 후백제군에게 포위되는 위험한 상황에 처하자 개국 1등공신이었던 신승겸이 장군 김락 등과 함께 힘껏 싸워 태조를 피신시키고 전사하였던 것이다. 예종이 지은 도이장가는 이두 장군을 애도하는 노래이며, 현재 대구시 저묘동에 있는 표충사는 신숭겸을 추모하는 사당이다.
그러나 왕건은 그 후 명주(강릉)의 호녹 왕순식으로부터 군사적인 도움을 받는 등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그리하여 태조 929년 12월부터 시작된 고창군(안동) 전투에서는 왕건이 크게 승리하였다. 이 승리는 그 곳의 토착세력인 김선평, 권행, 장길 등의 도움도 크게 작용하였다. 현재 안동시 북문동에 있는 삼태사묘는 이들의 공적을 기리는 사당이다. 이 전투의 승리로 강릉에서 울산에 이르는 11여 성이 고려에 귀부하여 왕건의 세력은 크게 강화되었다. 이와 더불어 이듬해에는 신라의 경순왕이 귀순할 뜻을 알려오기도 하였다.
이후 견훤은 수군을 동원하여 몇 차례의 공격을 가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더욱이 내부의 분열은 견훤 측의 패배를 부채질하였다. 견훤이 넷째 아들인 금강을 사랑하여 왕위를 전하려 하자 그 형 신검. 용검. 양검 등이 난을 일으켜 아버지를 금산사에 유폐시키고 금강을 살해하였던 것이다. 이에 견훤은 나주로 도망하여 왕건에게 귀순하였다. 곧이어 신라의 경순왕도 고려에 귀순함으로써 왕건의 후삼국 통일은 눈앞에 다가오게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신검과의 마지막 결전이었다. 이보다 앞서 왕건은 견훤의 사위로서 승평군(승주)를 지키고 있던 박영규의 내응을 약속받는 한편, 반역한 자식을 죽여 달라는 견훤의 청을 받고 결전에 대비하였다. 결국 왕건은 군사를 출동시켜 경북 선산군 해평면 일대의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신검과 대치하게 되었다. 이 때 왕건은 지형을 살피기 위해 도리사가 있는 산에 올랐는데 이런 연유로 지금 그 산을 ‘태조산’이라 하고 신검과 싸운 들판은 ‘어견평야(견씨를 제압한 들)’ 또는 경상도 말로 ‘어갱이들’이라 부르고 있다.
이 때 고려 측에서는 중앙군은 물론 각 지역에서 온 군사들을 모두 동원하였다.그 병력은 무려 9만 여명에 달하였다. 이 전투에서 신검군은 패배하여 황산군(지금의 논산군 연산면)으로 달아났다. 왕건군은 이들을 추격하여 살육하였다.
이로써 왕건은 왕위에 오른 지 19년 만인 936년 후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게 되었다. 왕건은 승리를 기념하여 연산에 개태사를 세우고, 이 절의 뒷산 이름을 하늘이 도와주었다 하여 천호산으로 바꾸도록 하였다. 견훤 자신도 이 전투에 참가하여 신검을 죽이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오히려 왕건은 신검이 자의로 아비를 배반한 것이 아니며 끝까지 싸우지 않고 항복하였다 하여 살려주었다. 견훤은 이를 분해하다 병이 나서 황산군의 어느 절간에서 쓸쓸히 최후를 맞이하였다. 지금 충남 논산군 연무읍 금곡리에는 견훤묘라고 전하는 무덤이 황량하게 자리잡고 있다.
민심, 승패의 갈림길
그렇다면 왕건이 견훤을 이기고 후삼국을 통일한 요인은 어디에 있는가. 반대로 견훤이 왕건과의 대결에서 패배한 요인은 무엇인가. 양자의 성격이나 정책의 일면을 비교하여 살펴보자.
견훤은 앞서 본 대로 군사력 면에서는 왕건보다 우세하였다. 견훤의 군대는 궁예시대에는 물론이고 왕건이 등극한 후 태조 13년(930)까지 패배한 적이 별로 없었다. 또 외교정책에서도 왕건보다 한발 앞서 있었다. 견훤은 이미 900년(효공왕 4)부터 중국의 오월국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또 925년(태조 8)에는 북중국의 후당에도 사신을 파견하여 활발한 외교활동을 벌였다. 이에 자극을 받은 왕건은 926년에 와서야 후당에 사신을 보내기 시작하였다. 견훤은 경애왕을 살해하여 민심이 떠나게 되자 이러한 외교활동을 이용하여 고려와 화친하고자 하였다.
927년 11월 오월국의 사신이 후백제에 와서 고려와의 화친을 권유하는 편지를 전하자 견훤은 이를 고려에 보냈던 것이다.
이러한 우세에도 불구하고 견훤이 패배한 것은 우선 백성들이 바라는 개혁을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면은 기록이 없어 잘 알 수 없지만 관제의 면에서 볼 때 그는 신라의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였다. 또 다른 요인은 후백제 정권의 내부 분열이었다. 부자나 형제간에 권력을 다투었던 그들의 이기심은 견훤 정권의 몰락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패배 요인은 신라인들의 민심을 얻지 못한 데 있었다, 그는 신라의 군인 출신이었으므로 신라인들을 포섭하기 위해서는 신라의 권위이며 상징인 왕을 등에 업어야 했다. 그런데도 그는 왕건에게 선두를 빼앗길까 염려하여 경애왕을 살해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신라의 신하로서 왕을 죽인 자기모순이며, 반역으로 간주되었다. 신라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의 민심까지도 점차 그를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왕건이 견훤에게 보낸 서신의 내용도 신하로서 왕을 시해했다는 비난이 주된 것이었다.
반면 왕건은 신라에 대해 매우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이 같은 그의 정책은 그의 성격 때문이기도 했지만 궁예에 대한 반동정책이기도 했다. 왕건은 궁예의 극렬한 반신라정책이 결과적으로 화를 자초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처음부터 신라에 대한 유화정책과 협조관계를 유지하였다. 때로는 신라를 구하기 위하여 사지에 뛰어들기까지 하였다.
또 다른 성공 요인으로는 호족들에 대한 정책을 들 수 있다. 왕건은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겸양의 덕을 발휘하여 호족들을 포섭하였다. 또한 지지세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각 지역 호족의 딸들과 결혼을 하기도 하였다. 때문에 그는 29명에 달하는 부인을 거느리게 되었다. 또한 중요한 호족들에게는 자신과 같은 ‘왕’성을 하사하여 가족과 같은 대우를 하였다. 반면에 호족의 자제를 개경에 머물게 하여 유사시 호족들을 견제하는 방책으로 삼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 많은 호족들이 귀순해 왔으며 급기야는 경순왕까지도 나라를 들어 바쳤던 것이다.
한편 왕건은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정책을 강구하였다. 스스로 근검. 절약을 강조하면서 과중한 세금을 감면해 주었다. 궁예 시절에는 수확의 반가량을 수탈해 갔지만 그가 즉위하면서는 수확의 10분의 1만 내도록 하였던 것이다. 흑창이란 기관을 설치하여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기도 했으며 억울하게 남의 노비가 된 자는 모두 풀어주고자 노력하기도 하였다.
그는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여 진정한 민족사적 통일을 이루려는 포부도 가지고 있었다.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을 제2의 수도로 삼아 북진정책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통일신라 때보다 훨씬 넓은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발해를 고구려의 후예국으로 생각하여 발해국에서 망명해 온 세자 대광현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이러한 정책으로 민심을 얻게 된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지도자로서 가져서는 안 될 생각도 일부 있었다. 그것은 그가 죽으면서 남긴 <훈요십조>에서 찾을 수 있다. 10조 중 제8조의 내용을 보면 차현 이남 공주강(현재의 금강)밖의 사람들은 등용하지 말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그 진위여부와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를 떠나 정치적 지도자가 지녀야 할 태도는 아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와 비교해 보면 후삼국기의 역사 상황이 지금의 정치 ․ 사회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치가는 지혜와 덕, 용기 등을 갖추어야겠지만 가장 중요한 일은 진정한 민심의 향방을 아는 것이다. 말로만 ‘민주’. ‘민의’를 내세워서는 안 되고 진정으로 백성들, 국민들을 위한 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해 나가야 한다. 나아가 사심이나 적대의식을 지양하고 같은 민족을 포용함으로써 민족의 재통일에 기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