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파주군 기독교상조회 금촌공원묘지에는 소슬한 바람이 일렁이고 있었다.
5월의 맑은 하늘아래 주위는 물속처럼 고요했다. 무수한 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공원묘지 위로 5월의 햇살이 가득히 쏟아져 내려 흐르고 있었다.
아! 5월의 햇살.
그 햇살 속으로 물통을 들고 내려가는 김영환씨의 양 어깨가 가냘프게 흔들리고 있었다. '기러기 가족'이라고 노란 스티카를 붙인 자신의 개인택시를 몰고 역삼동에서 잠수교를 지나올 때만해도 그의 어깨는 그렇게 늘어져 보이지 않았었다.
바람때문인가.
아니었다. 동행한 기자를 따돌린 그는 울고 있었다. 키가 크고 알맞게 균형이 잡힌 그의 큰 두 눈엔 어느새 그렁그렁한 눈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여보, 나 왔어"
김영환씨는 물통을 내려놓고 김집사의 묘 앞에서 두 손을 모았다.
김영환씨의 머리위로 햇살이 강물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소낙비보다도 더 세찬 물줄기들이 하늘 끝에서부터 퍼부어 내리는 느낌이었다.
강물! 그렇다.
삶은 그대로 강물이었다. 어차피 살아있는 것은 다 강물이기 마련이었다. 죽음을 향해서, 그 피안의 세계로 흘러가는.
화분에 물주기를 끝내고 무덤 앞에 앉아 촛점없이 남쪽하늘을 바라보던 김영환씨는 이윽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춥지는 않겠지. 내일와서 다시 새 꽃을 갈아 줄게'
차는 오던 길을 넘어 다시 서울로 향했다. 공원묘지를 떠나오며 김영환씨는 김천순 집사의 토막글 하나를 소개해 주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사랑을 받아보지도 못하고 주어보지도 못한 사람입니다. 고아가 불쌍한 것은 부모의 사랑을 못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없는 사랑, 계산하지않는 사랑입니다...."
김영환씨가 이끄는 '기러기 가족'의 출발은 1969년으로 거슬러오른다.
한서교통의 버스기사였던 김영환씨가 어느날 버스종점에 도착해 보니 여섯살 된 아이가 울고 있었다. 외할아버지가 자기만 버스에 태우고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고의적으로 버린 아이라고 판단을 내린 김씨는 자기가 거처하는 움막으로 데리고 가 생활을 시작했다. 그때 김씨는 할 일 없이 노는 주변의 청소년들을 위해 '자동차 정비 무료 양성소'를 열고 있을 무렵이었다.
한 아이를 데려오자 소문은 꼬리를 물고 번져 여섯명의 아이로 늘어났다.
"아이는 가정에서 키워야 합니다. 보호자의 그늘 아래에서 따사롭게 성장해야 해요."
김영환씨의 지론은 그러했다. 남들은 왜 고아원에 보내지 않고 고생하느냐고 했지만 굳이 다른 이유를 들추지 않더라도 그들이 나이가 차 고아원을 나오게 되면 보호자가 지켜주지 않는 상황에서 장래가 몹시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고집은 김영환씨가 성장해 오는 과정 속에서 어느 짭은 시기에 체험한 식견이기도 하였다. 다시말해서 그런 생각이 형성된 배경에는 한 때 고아원 생활을 좀 해 보았고 또 고아나 다름없이 성장한 그의 인생여력이 바닥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김영환씨의 고향은 서울시 중구 회현동 2가 15번지. 그는 종로구에 있는 방산국민학교를 다니다가 6.25를 맞았다. 그때가 11살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일제시대 때 한국사람과 교제해서 김영환씨를 낳아 외할머니에게 맡기곤 해방이 되자 '리버스'라는 미국인하고 살았다. '리버스'는 미국 초대 대사관 건축과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5년후에 6.25가 터지면서 어머니와는 연락이 두절되고 말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미국으로 떠나버린 것이다.
그해 6월 27일 서울 오장동에서, 누님이 '뺑코'(미군)하고 산다는 이유로 외삼촌이 인민군들에 의해 총살을 당하면서 동시에 김영환씨는 의지할 곳을 잃고 말았다. 한마디로 떠돌이 신세가 되버린 것이다. 밥을 얻어먹으며 밑바닥 음지에서 구두닦이, 신문팔이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다가 17세가 되던 1957년 5월 5일 해병대 69기로 지원해 군복무를 마치고 1960년에 제대했다.
막상 제대를 하고 다시 사회에 복귀하고 보니 어디 한군데 피붙이도 없이 홀로 던져진 기분이었다. 처절한 외로움으로 한동안 방황하다가 마음을 가다듬고 뚝섬에서 1년동안 정비기술을 배우면서 62년에 면허증을 취득, 운전대를 잡았다. 그리고 이듬해는 1종 면허증을 취득해 버스를 운행하기 시작했다. 뚝섬에서 효자동을 왕래하는 2번 마이크로 버스였다. 운전기사로서 비록 풍족한 월급은 아니었지만 평소에 검약정신을 몸에 익힌 그는 아름아름 모은 돈으로 음식과 옷가지를 사들고 종로3가에 있는 고아원(지금의 피카디리 극장 자리)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였다. 69년엔 세검정 소재 청운양로원에 80만원을 기증하기도 하였다. 당시 버스 한대 값이 110만원, 집 한채가 50여만원 할 때였다. 부모 형제가 없는 서러움 때문이었다.
어쨌든 고아들만 보면 옛날 생각이 떠오르곤 해서 도무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눈만보면 척 압니다. 저 아이가 얼마나 배가 고프다는걸 말입니다. 사흘,나흘 굶으면 눈이 뒤집힐 지경입니다. 그래서 고아들에게 배고픈 설움만이라도 물려주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거죠."
출발은 그러했다. 그리고 배고픔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 김영환씨는 먼저 한 가정을 생각했다. 고아들끼리 한 가족을 이루어, 흩어지지 않고 외롭지 않은 기러기같은 단란한 가정을.
'기러기 가족'을 이루긴 했지만 가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기거할 방 한 칸 없이 빈 몸 뿐이었다.
때문에' 기러기 가족'은 표류하는 배나 마찬가지였다. 어디 한군데 정착할라치면 도시계획에 밀리고 또 밀려 붕붕 떠다니는 도리밖에 없었다. 뚝섬 노고산기슭의 천막생활도 그렇고 봉원사 부근의 막사생활도 그랬다. 주변의 버려진 땅을 일구워 채소라도 부쳐먹을까 싶으면 수확도 하기전에 쫒겨났다. 그처럼 밀리고 떠다니다가 닻을 내린곳이 강남구 도곡동의 허허 벌판이었다.
1973년 4월이었다. 지금은 진달래아파트가 들어선 그곳에 비닐하우스로 움막을 짓고 자칭 기러기떼의 큰 기러기 김영환씨는 고아 11명과 함께 날아와 새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운전을 하면서 밥하고 빨래하고, 고아를 입적시키고 학교에 보내랴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그래서 눈물도 많이 흘렸다. 새볔 별을 머리에 이고 퇴근하는 길에 콩나물을 사왔는데 오는 길에 콩나물 대가리가 다 부서져 그것을 일일이 주워담으면서 속이 상한 일도 여러번이었다.
그러던 1974년 어느날, '기러기 가족'은 뜻하지않은 손님을 맞게 된다. 웬 처녀 한 분이 비누를 사 가지고 기러기 움막집을 찾아온 것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친구집에 놀러갔다가 고아 아이들을 보고, 게다가 총각 운전기사가 혼자 고아들을 데리고 산다고 하니까 무언가 도움을 줄 일이 없을까 하고 한번 방문해 본 것이라고 했다.
김천순양.
그녀가 묻는대로 '기러기 가족'의 애로점을 이야기해 주면서 김영환씨는 그녀가 목사의 딸이자 대전보육대학을 졸업한, 남부러울게 없는 집안의 딸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한다. 첫 방문이후 그저 일주일에 한번씩 와서 밥과 빨래를 해 주고 아이들 목욕 뿐 아니라 공부까지 가르쳐 주어서 고마운 정도로만 알고 지냈다. 그런 생활이 몇년 지속되었다.
그러나 김천순씨의 집에서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서 문제는 심각해졌다. 김천순씨의 부모가 기러기집에 드니들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린 것이다.
"남을 위해서 살라고 설교를 하시면서 왜 저의 뜻을 반대하십니까?"
김천순씨는 오히려 아버지에게 그렇게 항의를 했다. 주위에서 대학을 나온 여자가 하필 고아들하고 살려고 하느냐는 충고에도 김천순씨는 흔들리지 않았다.
"대학을 나오고 배우면 뭐하나요. 고아들에겐 한 가정에서의 사랑이 더 중요합니다. 내가 선택해서 가는 길, 하나님빽으로, 믿음으로 사는 거예요."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생활, 그런 관계가 지속되다가 1980년 11월 9일, 김영환씨와 김천순씨는 끝내 결혼식을 올렸다. 정작 뜻이 그러하다면 기러기집에 와서 기러기엄마가 돼도 좋다고 김영환씨가 응답을 내린 것이다. 3년간 반대를 해오던 부모도 승복하고 난 후였다.
그러나 막상 기러기집에 눌러살면서 아이들이 커 갈수록 생활은 어려워지기만했다. 김영환씨가 개인택시 영업으로 벌어들이는 수입만으로는 턱없는 일이었다. 13식구의 생계가 점점 막막해졌다. 자연히 먹는 것도 변변찮을 수밖에 없었다. 라면과 김치 하나로 끼니를 때우는 날이 많아졌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늘 "주는 사람이 되라"고 입버릇처럼 아이들에게 가르쳐온 김영환씨의 고집을 꺽을 엄두가 안나서 그런 기대는 아예 단념해버린지 오래였다.
궁리끝에 친정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친정에서 쌀과 김치, 고추장 등 부식을 가져다 아이들을 먹였다. 기러기집을 드나드는 친정 어머니의 발길이 빈번해지면서 아현감리교회에서도 도움의 손길이 뻗치기 시작했다.
아뭏든 아무런 대가없이 남에게 도움을 받는다는건 썩 기분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어떤 날은 친정식구들에게 눈치가 보이는 것같은 자격지심에서 몰래 쌀을 퍼 온 적도 있었다. 화장품은 고사하고 어쩌다 옷 사입으라고 돈을 주면 먼저 시장으로 나가 그 돈으로 식량과 반찬거리부터 해결하고 볼 일이었다.
"사랑을 주면 됩니다. 끊임없이 사랑을 주면 다 내 앞으로 오게 되요."
김천순씨는 늘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사랑때문인가. 거역하는 법없이 착하고 온순하기만 한 아이들이 학교에서도 모범적이라고 하니, 김천순씨 역시 15년을 같이 살아오면서 아이들에게 손찌검 한번 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기자가 역삼동의 기러기집을 찾아갔을 때 집안은 별 변화가 없는 듯이 보였다. 딸 수영(5세)이와 아들 수민(3세)이는 마루에서 말을 타며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엄마가 하늘나라에 가서 때가 되면 돌아온다는 어른들의 위안으로 두 아기는 엄마와의 이별을 쉽게 단정해버리고 있는 것같았다. 그것은 어쩌면 '체념'인지도 몰랐다. 그렇게 체념을 강요해야했던 '기러기 가족'과 주위 사람들의 아픔을 가늠해 보면서 김영환씨를 따라 안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을 두 줄로 가로지른 빨래줄에 두 아이의 기저귀와 옷가지가 주루룩 널려있고 기러기 엄마의 사진이며 성경 등 쓰던 용품들이 언제나처럼 자연스럽게 놓여 있었다. 흡사 김천순씨는 잠시 시장보러 나간 듯한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기러기 엄마의 숨결이 살아있고 체취가 구석구석에서 배어나는 느낌이었다.
"기러기처럼 보금자리를 뜰 때마다 라면을 끓여먹으며 고생하던 생각을 하면 너무 가엾습니다. 이 집은 살아있는 집입니다. 기러기 엄마는 항상 여기 있습니다."
죽음은 깨이지 않는 영원한 잠이라고 했던가. 김영환씨의 말처럼 기러기 엄마는 이 힘겨운 생활에서 잠시 떠나 어느 평안한 땅에 잠들어 있는 환상에 사로잡혔다. 잠이 깨이면 7명의 고아와 어린 두 자녀와 남편이 가다리고 있는 기러기 집으로 금방 달려올 사람처럼.
김천순씨가 영동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한 것은 작년 5월이었다. 병명은 요도결석증이라고 했다. 내과에서 치료를 받던중 몸무게가 12kg이나 줄어 한약을 지어먹기도 했다.
작년 10월 신촌세브란스로 옮기고 나서는 주치의사로부터 위암으로 최종 판단이 내려졌다. 위암이긴해도 겉보기에 병세는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입원해 있으면서도 저녘이면 집에 와서 예배를 드리곤 했으니까. 창성기도원에서 3주일 동안 요양하고 나온 후로는 교회에서 간증을 할 정도로 완전히 건강을 되찾은 줄만 일았다. 신통하게도 위암이 씻은 듯이 나은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성급한 판단은 빗나가고 있었다. 해를 넘긴 금년 1월 1일부터 15일까지 기도원 부흥집회에 참석했던 김천순씨는 과로가 겹치면서 배가 불러지고 다리가 부으며 병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전처럼 호전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뱃속엔 물이 차오르고 그 물을 빼내기 위해 1주일에 한번 정도 배에다 직접 주사기를 꽂고 2천cc쯤 되는 핏물을 빼내고 다시 배에다 항암제를 투입하는 과정을 되풀이 했다. 항암제를 투입하고 나면 며칠동안 그 독한 약의 후유증으로 음식은 거의 먹지 못하고 먹은 소량의 음식물마저 토하고 기진맥진했다. 항암제의 사용으로 머리털은 거의 다 빠져 아예 짧게 깍아버리고 몸은 보기에 안타까울 정도로 메마르게 변해갔다. 더구나 암으로 죽어나가는 환자를 본 이후 그 충격으로 김천순씨는 소생의지를 점점 더 잃어가고 있었다. 죽음은 그대로 공포의 실체였다.
이제 남은 희망이라곤 조용히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삶은 어차피 강물이었고, 강물 저 편으로 흘러가도록 기다려 보는 것뿐이었다. 의학적으로 더이상 해 줄 것이 없는 의사는 들어와서 얼굴만 들여다보고 나갔다. 시간은 끝내 정지되지 않고 강물 저 편의 세상은 눈에 잡힐듯 다가오고 있었다. 마지막 삶을 정리하라는 김지길 목사의 배려였던 듯, 어느날 김천순씨는 독방으로 옮겨졌다.
독방으로 병실을 옮긴 후 김천순씨는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도해 주세요"하고 간절히 부탁했다. 언제나 잔잔한 미소를 지으면서 ... 불편한 몸이면서도 수시로 침대에 엎드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주님! 지금 가기에는 너무나 할 일이 많습니다. 아직도 어린 자식들의 부모노릇,어머니노릇 그리고 계속되어야 할 고아사업....'
세브란스 별관 12층 36호.
김천순씨의 병실은 마치 수도원의 기도실같은 느낌을 주었다. 벽에는 예수님의 초상화가 걸려있고 작은 책상위에는 구약성서와 속회공과, 다락방 책이 기지런히 놓여 있었다. 주일마다 병원 예배실에서 가져다 준 주보도 나란히 벽면에 붙여져 있었다.
'난 죽지 않아요. 하나님이 날 왜 데려가시나요. 날아가는 새도 안 떨어뜨리는 하나님인데.'
김천순 집사는 하나님에 대한 처절한 믿음을 끝까지 저버리지 않았다. 죽는 순간까지 기적적으로 소생할 것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4월 19일 0시 20분.
소녀시절부터 노래를 잘 부르고 신나게 탁구도 잘 쳤던, 5월 하늘처럼 맑고 쾌활한 성격으로 어두움을 밝히던 김천순 집사는 마지막으로 의식을 잃으면서 아무 말없이 눈물만을 보인 채 눈을 감았다.
1974년 어느날, 도곡동 움막집을 찾아와 '기러기 가족'이 된지 햇수로 15년, 기러기집을 떠난지 4개월만에, 아직 자기 혼자 날지 못하는 기러기 떼들을 남겨두고 훌훌 죽음의 길로 날아가버린 것이다.
과거 취재한 글입니다. 이민우 동문의 죽음을 지켜봤는데...정의롭고,인간적이고,약자에 대한 정감이 강하고,최소한의 예의를 존중하고,, 동문의식이 뭔 지를 보여준 사람,이민우 동문의 마지막 눈물처럼,눈물이 앞을 가리는군요.지역의 젊은 별이 사라졌습니다. 강물 저 편의 세상에서 평안히 잠드소서.
첫댓글 ^^~!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 한가한 시간없써 눈니알은하다
과거 취재한 글입니다. 이민우 동문의 죽음을 지켜봤는데...정의롭고,인간적이고,약자에 대한 정감이 강하고,최소한의 예의를 존중하고,, 동문의식이 뭔 지를 보여준 사람,이민우 동문의 마지막 눈물처럼,눈물이 앞을 가리는군요.지역의 젊은 별이 사라졌습니다. 강물 저 편의 세상에서 평안히 잠드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