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그들은 예수를 만나자 "모두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8.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가까운 여러 고을로 가자. 거기에서도 내가 말씀을 선포해야 하겠다.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
39. 예수께서 온 갈릴리와 여러 회당을 두루 찾아가셔서 말씀을 전하고, 귀신들을 내쫓으셨다.(막1:37-39)
37 and when they found him, they said, “Everyone is looking for you.”
38 But Jesus answered, “We must go on to the other villages around here. I have to preach in them also, because that is why I came.”
39 So he traveled all over Galilee, preaching in the synagogues and driving out demons.
37. 그들은 예수를 만나자 "모두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7 and when they found him, they said, “Everyone is looking for you.”
*말씀과의 만남
아인슈타인의 E=mc²라는 공식은 사람들의 상식을 깼습니다.
공식이 말하는 것은 “에너지=물질”이라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서로 악수를 하면 따스한 체온이 손을 통해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그 따스함이 물질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의 무게를 저울로 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에너지가 물질이고 물질이 에너지라는 말입니다.
무슨 설화 같은 소리냐고 할 지 모릅니다.
이 말을 어떻게 이해시켜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 공식대로 일정의 물질이 순식간에 에너지로 바뀐 적이 있습니다.
일본 땅에서였습니다.
그러자 일본이 무조건 항복했습니다.
그것이 원자폭탄이었습니다.
말이란 단순히 의사소통 방식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씀은 곧 사건입니다.
3.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니, 빛이 생겼다.(창1:3)
6.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물 한가운데 창공이 생겨, 물과 물 사이가 갈라져라" 하셨다.
7. 하나님이 이처럼 창공을 만드시고서, 물을 창공 아래에 있는 물과 창공 위에 있는 물로 나누시니, 그대로 되었다.(창1:6,7)
9.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하늘 아래에 있는 물은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은 드러나거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창1:9)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말씀하신 대로 현실이 되었습니다.
빛이 생겼습니다.
하늘과 땅도 생겼습니다.
바다도 생겼습니다.
천지 만물이 그렇게 생겨난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성경의 증언을 설화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세상이 생겨났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역사 현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000년 전 주님도 바다를 향해 명령하신 것입니다.
39. 예수께서 깨어나셔서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더러 "고요하고, 잠잠해져라" 하고 말씀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고요해졌다.(막4:39)
그 일이 창세 때만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한 안식일에 가버나움 마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 안식일에도 사람들은 그러려니 했습니다.
랍비들이 말씀을 전하던 그 강대상에 예수님이 서셨을 때도 그런 생각이었습니다.
주님의 가르치심 앞에서 귀신이 튀어 나간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창세 때의 그 말씀을 보게 된 것입니다.
27.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이게 어찌된 일이냐?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다! 그가 악한 귀신들에게 명하시니, 그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면서 서로 물었다.(막1:27)
같은 날 오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베드로의 장모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자리에서 병이 낫더니 예수님을 시중들었습니다.
* 사람들의 필요
요즈음의 교회를 보십시오.
사람을 모이게 하려고 이 프로그램 저 프로그램 돌리지만 사람들이 꿈쩍을 하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몰랐지만 이제 약발이 다 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특별한 프로그램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예배 순서 중에 말씀을 맡으셨을 뿐입니다.
그 순서를 맡으셨을 뿐이었는데 그날 저녁 가버나움의 모든 사람이 예수님께 모여들었습니다.
현대 교회에서도 다른 것 말고 바로 그 말씀의 프로그램을 돌리면 될텐데.......
주님은 다만 말씀의 능력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22. 사람들은 그의 가르치심에 놀랐다.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막1:22)
귀신 들린 사람 병든 사람 다 모여들었습니다.
당시에 가버나움 사람들에게 바쁜 일이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모내기고 결혼식이고 다 뒤로 미룬 것입니다.
만약에 그런 일이 우리 거창 마을에서 일어났다고 생각해 봅시다.
베드로의 장모님 집 앞에서 밤을 꼴딱 셌을 것입니다.
이렇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가버나움에는 농부도 살고, 목수도 살고, 전기공, 수도 기술자 코메디언....... 다양한 사람들이 다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하신 일이 그 모든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켰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직 말씀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오해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말입니다.
정말 마을이 완전히 뒤집어졌던 것입니다.
이제 새날이 밝기도 전입니다.
또 다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번에는 이웃 마을에 사는 귀신 들린 외삼촌, 나병 걸린 조카, 사위들까지 서둘러서 모시고 온 것입니다.
* 여론과 상식
그런 일이 일어났으니 가버나움 마을에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은 없었습니다.
귀신 들리고 병든 사람을 데리고 앞자리를 차지하려 했습니다.
또 그 때에 제자들도 바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생각이 당연하다고 여겼습니다.
제자들은 소명의식을 가지고 그 일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예수님께 모셔가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디에 숨으셨다는 말입니까!
그 때 예수님은 다른 생각을 가지시고 사람들이 모르는 곳에 계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예수님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렇게 홀로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겨우 찾아냈습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제자들은 주님께 외친 것입니다.
"모두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
“Everyone is looking for you.”
그들은 예수님께 이 말씀을 드리면서 이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몰려들 줄 생각도 못 하셨나요!
왜 우리를 이 고생시키셨나요!’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은 당시 가버나움의 여론과 상식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탈북자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건너서 몇 개 국의 국경을 넘어 이 땅에 온 것입니다.
그 녀는 북에서 남으로 가면 안기부에서 고문당해 죽는다는 교육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남에 와보니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집을 받고 정착금을 받았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대접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감사한 마음에 최선을 다해서 봉사하겠다고 결심한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첫 직장을 출근했습니다.
그가 하는 일은 정말 쉬운 일입니다.
벨트를 통해 부속품이 자신 앞에 오면 그것을 기계의 틀 안에 자리 잡아 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복잡한 일은 기계가 자동으로 처리했습니다.
사람은 그것이 불량인지 확인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점심시간이 되면 회사에서 밥도 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생각하지 못할 만큼 많은 돈을 받는 것입니다.
북에서는 여자의 몸으로 돌덩이를 지고 날라야 했는데 말입니다.
점심은 도시락으로 싸간 옥수수밥으로 배를 채워야 했습니다.
그것조차 챙기지 못하고 굶으며 일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생각을 하다 보니 미안해서 쉬는 시간에는 빗자루를 찾아들고 공장 바닥을 쓸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니면 걸레로 닦고.......
그러자 옆 사람이 핀잔을 주는 것입니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녀는 옆 사람들이 공연히 자신을 시기하나보다 생각했습니다.
보란 듯이 더 열심히 빗자루질을 한 것입니다.
옆 사람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데 시비야!
그 녀에게 그 열심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나중에는 사장님이 그 녀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차근차근 그 녀에게 설명했습니다.
여기 이 제품들은 대단히 정밀한 것들입니다.
먼지 하나가 기계에 들어가도 오작동을 하는 것입니다.
먼지를 내면 안 됩니다.
청소하지 마세요.
이 여인은 악의적으로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아주 상식적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것은 당연히 칭찬받을 일 아닙니까!
그런데 그 녀는 남보다 더 열심히 일한 덕에 회사에서 잘릴 뻔했습니다.
당시 가버나움의 모든 사람들이 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을에서 숨넘어가는 사람들을 예수님께 모조리 데리고 왔습니다.
제자들도 바로 그 생각을 했습니다.
병 고치러 예수님께 데려가는 일입니다.
열심히 이 마을 사람들을 돕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씀을 하시며 행동하신 것입니다.
가까운 여러 고을로 가자.
We must go on to the other villages around here.
영어 성경을 그대로 번역하자면 우리는 다른 마을들로(to the other villages) 가야 하신다는(must go on) 것입니다.
다른 마을로 갈 수도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가야만 한다(must go on)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신음 소리를 뒤로 남기고 그 자리를 떠나신 것입니다.
* 부정되는 상식들
그런데 예수님과 마을 사람들은 왜 이렇게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인가?
사람들은 예수님을 원하는 데 예수님을 왜 그들을 떠나시는가?
사람들은 성경의 말씀과 내 생각이 일치됨을 느끼면 할렐루야를 외칩니다.
사람들은 주로 이렇게 엉뚱한 주소지에서 은혜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지만 우리 세상 사람들은 세상나라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두 나라는 서로 완전히 다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수없이 많은 경우 하나님께 부인되는 것입니다.
엉뚱한 은혜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왜 하나님에 의해 이렇게 부인되는가?
첫째. 그들은 그리스도의 의미를 곡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이 오히려 그리스도를 곡해하는 원인이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귀신을 몰아내실수록 주님이 더 퇴마사가 되는 것입니다.
더 확실하게!
하지만 주님은 그들의 세상의 치유를 보장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은 아닙니다.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유다를 포위했을 때입니다.
1. 시드기야 왕이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과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 제사장을 예레미야에게 보냈을 때에, 주께서 그들에게 전할 말씀을 예레미야에게 주셨다.
2. 그 때에 그들이 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제발 우리가 멸망하지 않도록 주께 간절히 기도하여 주십시오.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이 우리를 포위하여 공격하고 있습니다. 행여 주께서, 예전에 많은 기적을 베푸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기적을 베풀어 주시면, 느부갓네살이 우리에게서 물러갈 것입니다."(렘21:1,2)
적군이 하나님의 성을 포위했으니 기도해야합니다.
기도를 부탁받은 예레미야의 입에서 그의 백성들을 보호하시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대한 것입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10. 나는 복을 내리려고 해서가 아니라, 재앙을 내리려고 이 도성을 마주 보고 있는 것이다. 이 도성은 바빌로니아 왕의 손에 들어갈 것이고, 그는 이 도성을 불질러 버릴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렘21:10)
그 재앙의 중심에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사는 길은 적군에게 항복하는 것이라고 답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생명의 길이며 적군에게 항복하지 않는 것은 죽음의 길입니다.
예수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은 치유하셨지만 그리스도는 세상의 보장의 방식이 아닙니다.
둘째. 기적은 그의 구원을 보증하지도 않습니다.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마7:22,23)
그들은 기적이 그들의 구원을 보장하는 줄로 착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생각을 부인하신 것입니다.
셋째. 탕자의 형은 동생의 비윤리를 고발했습니다.
그의 고발이 과장된 것이 아닙니다.
그 고발을 모두 사실입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삼켜 버린 이 아들이 오니까, 그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31. 아버지가 그에게 말하기를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지 않느냐? 또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 아니냐?
32. 너의 이 아우는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느냐?' 하였다."(눅15:30-32)
형은 윤리적입니다.
그는 그의 부모님께 윤리적 헌신을 실제로 다 한 것입니다.
동생은 온갖 더러운 짓거리들을 골라서 한 사람입니다.
그러다가 도저히 배고픔을 참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집에 돌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형의 윤리 주장을 부인하신 것입니다.
그 놈이 나보다 더 옳다고요!
아버지의 주장은 동생이라는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형의 상식이 깨진 것입니다.
넷째. 종교적 제의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울왕은 전리품 중에 좋은 것들을 챙겨두었습니다.
21. 다만 우리 군인들이 전리품 가운데서 양 떼와 소 떼는 죽이지 않고 길갈로 끌어왔습니다만, 그것은 예언자께서 섬기시는 주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고, 진멸할 짐승들 가운데서 가장 좋은 것으로 골라온 것입니다."
22. 사무엘이 나무랐다. "주께서 어느 것을 더 좋아하시겠습니까?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번제나 화목제를 드리는 것이겠습니까? 잘 들으십시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 따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삼상15:22)
물론 사울은 탐욕 때문에 제사 핑개를 대고 좋은 것을 챙긴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 제의에 대한 깊은 신뢰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생각 자체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사야의 이 말에 당황했을 것입니다.
3. 소를 죽여 제물로 바치는 자는 사람을 쳐죽이는 자와 같다. 양을 잡아 희생제물로 바치는 자는 개의 목을 부러뜨리는 자와 같다. 부어 드리는 제물을 바치는 자는 돼지의 피를 바치는 자와 같다. 분향을 드리는 자는 우상을 찬미하는 자와 같다. "이러한 제사장들은 나의 뜻을 묻지 않고 제 뜻대로 한 자들이다. 오히려 가증한 우상숭배를 즐겼다. 가증한 우상들을 진정으로 좋아하였다.(사66:3)
하나님은 종교 제의가 아닌 인간의 실존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다섯째. 하나님의 포도밭은 정말 불공평했습니다.
포도밭에 일군으로 불려가서 아침 일찍부터 일한 사람이나 늦게 밭에 나와서 일을 하는 둥 마는 둥 했던 사람이나 똑같은 대우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평을 했는데 도리어 주인이 화를 냈습니다.
나도 핀둥핀둥 놀다가 해가 져서 일터에 와서 일하는 시늉이나 할 걸.......
13. 그러자 주인이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나는 그대를 부당하게 대한 것이 아니오. 그대는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14. 그대의 품삯이나 받아 가지고 돌아가시오. 그대에게 주는 것과 꼭 같이 이 마지막 사람에게 주는 것이 내 뜻이오.
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내가 후하기 때문에, 그대 눈에 거슬리오?'(마20:13-15)
주님의 생각은 늦게 일터에 와서 제대로 일은 못 했지만 집에 가면 부모님 자녀가 있는 것은 똑 같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 가족들도 먹고 살아야지!
아니면 장애로 인해 누구도 일꾼으로 부르지 않았으니 늦게까지 일자리를 찾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건강한 작자들은 자신은 아침부터 곱빼기로 일했으니 곱빼기로 임금을 달라는 것입니다.
아니면 그 장애인에게는 반만 주라는 것입니다.
그런 더러운 양심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성과급이라는 세상의 상식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여섯째 나는 부자니까 고운 삼베옷을 입고 날마다 잔치를 베풀어도 되는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너는 거지니 우리 집 문 앞에서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 채우는 것이 당연하다는 그 더러운 논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상황을 뒤집어버리신 것입니다.
25. 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되돌아보아라. 살아 있을 때에 너는 온갖 복을 다 누렸지만, 나사로는 온갖 불행을 다 겪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는다.(눅16:25)
등등
* 기도란 무엇인가?
인간들은 그 심보가 이렇게 꼬일 대로 꼬인 존재입니다.
우리들의 일반적인 상식들은 이기심을 똘똘 뭉쳐둔 것들입니다.
그러니 기도를 통한 하나님의 교정하심이 없으시다면 사람은 선을 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도란 다른 나라 의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를 듣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의 상식들을 듣는 작업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도무지 들어본 적이 없는 말씀을 들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씀들입니다.
요즈음에는 차에 네비게이션을 달지 않은 차들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의 지도를 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늘 위에 있는 인공위성에서 정보를 받는 것입니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이것을 통해 방향을 계속 수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란 바로 그런 하나님으로부터의 신앙 방향 수정 작업입니다.
주님은 도무지 기도를 모르는 이들과 함께하실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대화가 통하지를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잘난 세상 상식을 주장해 댔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다른 이웃 마을로 가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귀신을 쫓아내는 퇴마사가 아닙니다.
질병을 고치시는 내과의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학비를 내주니 아버지를 학비 내주는 사람으로 여기면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학비를 못 내주어도 아버지라는 것을 고백하게 해야 합니다.
38.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가까운 여러 고을로 가자. 거기에서도 내가 말씀을 선포해야 하겠다.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
38 But Jesus answered, “We must go on to the other villages around here. I have to preach in them also, because that is why I came.”
이 말씀은 이런 것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땀 흘리며 모여들었구나.
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요구하는 그것을 하러 온 것이 아니다.
딴 일을 하러 왔다.
복음을 전하러 왔다.
그래서 나는 다른 마을로 떠나야겠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경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기록한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원하시는 것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원하는 일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원하시는 일을 너무나 다른 것입니다.
8.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너희의 길은 나의 길과 다르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다.
9. "하늘이 땅보다 높듯이, 나의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다.(사55:8,9)
그래서 정말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성경을 이해했다고 고백하지 않습니다.
이해가 되었을 때에 할렐루야를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해할 수 있는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해하지 못하므로 믿어야 할 책입니다.
가까운 여러 고을로 가자.
We must go on to the other villages around here.
우리가 땀을 흘리며 수고했는데.......
이 불쌍한 사람을 뒤에다 두고.......
이해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주님은 다른 마을로 떠나신 것입니다.
회사 일이 너무 쉬운 것 같아서 남들은 노는 시간에 봉사를 더 한 것입니다.
빗자루를 들고 공장 바닥을 쓴 것입니다.
그랬더니 사장님은 내가 옳다고 여기는 그 봉사를 당장 그만두라는 것입니다.
일하고 욕 얻어먹고.......
* 현실
예수님께서 귀신을 몰아내셨습니다.
이 상황이 증거하는 것이 있습니다.
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 귀신을 내쫓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왔다.(마12:28)
우리는 이 세상 나라를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통해서 그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 나라로 치고 들어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말씀의 능력으로 병을 고치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 때 병고치러 예수님께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겠음을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부모들은 자녀를 위해 희생을 합니다.
학비를 내줍니다.
그런 아버지를 두고 아이들이 저 분은 내 학비를 내주시는 분이라고 여기면 되겠습니까?
아버지에게 돈이 없어서 학비를 못 내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병을 고치고 못 고치는 일은 두 번째 일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에 상관이 없이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도 내가 말씀을 선포해야 하겠다.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
I have to preach in them also, because that is why I came.”
그러니까 열심히 기도를 했는데 암을 치료받지 못하고 죽어도 구원받은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 반대로 기도원에서 암을 치료받았어도 구원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구원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72인의 전도자를 보내셨습니다.
그 때 그들은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귀신들이 그들에게 복종했습니다.
그들은 흥분했습니다.
예수님께 전도 보고를 했습니다.
18.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다.
19. 보아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세력을 누를 권세를 주었으니,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굴복한다고 해서 기뻐하지 말고,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눅10:18-20)
귀신 떨어지는 것을 기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주민등록에 네 이름이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귀신 몰아내고 병 고치고 돌아온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해주셨던 말씀입니다.
이렇게 주님이 주의를 주신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일이 일어나면 정신을 못 차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비슷한 일이 가버나움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다른 마을로 발길을 옮기신 것입니다.
* 간증
그들은 이런 일을 당하면 사람들은 틀림없이 이렇게 말을 했을 것입니다.
아무 양반 저 예수님께 가봐 귀신쯤이야 뚝 떨어지지!
말기암도 문제가 안 되!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간증들을 막으신 것입니다.
34. 그는 온갖 병에 걸린 사람들을 고쳐 주시고, 많은 귀신을 내쫓으셨다. 예수께서는 귀신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막1:34)
귀신뿐 아닙니다.
그 병을 치료받은 사람들에게도 그 주의를 하신 것입니다.
43. 예수께서 단단히 이르시고, 곧 그를 보내셨다.
44.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된 것에 대하여 모세가 명령한 것을 바쳐서, 사람들에게 증거로 삼도록 하여라."(막1:43,44)
현대 교회가 혼돈 하는 것이 있습니다.
기적의 간증과 복음 전도를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축귀와 치유의 간증은 하나님의 말씀과 명확하게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을 떠나가신 이유가 그것입니다.
간증은 복음 전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을 치유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일을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복음 전도를 위해 오신 것입니다.
복음이란 병과 귀신에서 자유하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에서 자유케 되었으며 영생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는 문제와 치유의 문제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이 두 문제를 분리하신 것입니다.
39. 예수께서 온 갈릴리와 여러 회당을 두루 찾아가셔서 말씀을 전하고, 귀신들을 내쫓으셨다.
39 So he traveled all over Galilee, preaching in the synagogues and driving out demons.
*동일한 방식
주님은 다른 사람들을 찾아가신 것입니다.
그 곳에서도 가버나움에서 하셨던 같은 일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곳 사람들은 가버나움 사람들과는 다른 해석을 해야 합니다.
주님은 먼저 다른 프로그램을 찾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 곳에서도 하신 일은 말씀을 전하신 일입니다.
교회는 말씀을 전 하는 곳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세상은 창조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을 통해 다른 세상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죄인이 의인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또 다른 마을에서도 예수님은 귀신을 몰아내셨습니다.
하지만 이 기적 역시 말씀의 가르치심의 사건일 뿐입니다.
27.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이게 어찌된 일이냐?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다! 그가 악한 귀신들에게 명하시니, 그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면서 서로 물었다.(막1:27)
주님은 그 말씀의 능력으로 귀신을 몰아내며 또한 병을 치유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역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모든 치유의 사건이 하나님의 말씀의 사건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9. 그 불법자가 오는 것은 사탄의 작용을 따른 것인데, 그는 온갖 능력과 표징과 거짓 이적을 행하고,
10. 또한 모든 불의한 속임수로 멸망 받을 자들을 속일 것입니다. 그것은, 멸망 받을 자들이 자기를 구원하여 줄 진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살후2:9,10)
악령도 그런 기적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거기에는 귀신이 몰려갈 것입니다.
또 치유가 있습니다.
다시 이릅니다.
치유가 반드시 하나님의 역사라는 보장은 없다는 것입니다.
말세에는 마귀의 장난질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법자의 수단은 능력과 거짓 이적입니다.
말세의 유일한 대안은 결과와 상관없이 그 말씀만을 절대 순종하는 것입니다.
병 고치러 예수님을 찾아갔다가 예수님을 못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다른 마을로 가셔서 복음을 전도하고 계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전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간증은 이해가 쉬운데 말씀은 아닙니다.
말씀은 사람에게 믿음의 대상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