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모든 거 다 잊고, 뒤돌아보지 말고 가요.’
그녀가 그곳을 이런저런 이유로 떠나올 때 정수경에게서 받은 문자였다. 그 문자는 이상한 힘을 갖고 있었다. 특별한 감정을 일으키는 말도 아니었고, 슬픔을 다독거리는 말도 아니었다. 그러나 섣불리 타인의 감정을 위로하려 애쓴 피상적인 문장이 아니었다. 마음속으로 깊이 들어와 자신에게 들려주는 문장이었다. 그 문장은 한동안 뭉클거리는 상처를 단단하게 조이며 딱지를 얹어 놓았다.
물론 그녀의 가슴에는 한 푼의 미련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 줄 알았다. 떠나자고 결정한 이후로 줄곧 그렇게 생각해 왔다. 자신의 속을 뒤집어서 탈탈 털어낸들 아무런 미련도 후회도 남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정수경의 문자를 들여다보면서 마음 한편은 아직 버리지 못한 후회로 아물지 못하고 있음을 알았다.
같이 근무하다 보면 첫인상과는 달리 실망하기도 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을 터놓게 되는 사람도 있다. 함께 근무할 때는 즐겁게 지내다가도 떠나면 끝인 사람도 있고, 함께 있을 때 보다 더 오래도록 교류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녀는 특히 쉽게 곁을 주는 성격이 아니라 처음엔 주로 서먹하다가도 나중에 정이 들고, 정이 들면 떠난 후에 더욱 가까워지는 편이다. 수경은 힘들 때 그녀를 바라봐주었고, 떠나고 나서도 줄곧 지켜봐 주었다.
핸드폰을 열 때마다 문득 그 문자를 다시금 확인하며 입속으로 되뇌는 그녀를 발견하곤 했다.
‘깨끗이 잊고, 뒤돌아보지 말고.’
깨끗이 잊는 건, 뒤돌아보지 말아야 한다는 전제로부터 비롯된다. 그래. 뒤돌아보지 말자. 최후의 결기처럼 마음을 다잡았다. 비로소 푸석푸석하게 정리되지 않은 감정의 부스러기가 말끔히 씻겨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야말로 뒤돌아보지 않으리란 결심이 섰다.
다시 그날로 돌아가서 비서실장 앞에 선다고 해도 그녀의 결정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단칼에 거절하여 그의 심기를 더욱 돋울 필요는 없었다. 그녀가 판단하는 것을 지혜롭게 설명할 수도 있었다. 그것이 천성인 것은 어쩔 것인가. 안 되는 건 처음부터 안 되는 것이다. 우물쭈물 망설이거나, 되는 방향으로 검토하겠다며 뻔한 임기응변에 능하지 못한 것이 오늘의 사단을 만들어 왔다는 건 누구보다 그녀가 잘 안다. 결국은 자기 명령에 놀아나 줄 꼭두각시 간부를 양성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다.
민선이 무엇 하라고 민선인가. 구민이었던 한 사람이 구민을 대표해서 구정을 이끌어가라는 자리이지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자리가 아니다. 구민의 마음으로 구민의 뜻을 대변하는 4년짜리 구청장이 아닌가. 길어야 두세 번 더 한다고 해도 그 자린 내려올 자리지 천만년 앉을 자리가 아니다. 결국엔 구민의 자리로 돌아갈 생각은 왜 하지 않는가. 그런 구청장을 보필하는 자리가 비서실장의 자리다. 권력의 그늘에서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고 달콤한 세월을 보내는 비서실장의 느물느물한 웃음이 역겨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더욱이 그녀의 손으로 올린 구립어린이집 원장 자리에 그 표독한 한 원장을 앉힐 수는 없었다. 권력 앞에 아양을 떨며 쉽게 무릎 꿇는 사람일수록 약자에겐 모질게 구는 법이다. 아이들의 밥그릇에 올려질 신선한 고기와 선생님들에게 돌아갈 수당을 쥐어짜서 그의 호주머니로 고스란히 들어갈 것을 생각하면 소름이 돋았다. 비서실장의 권력이 호랑이 등이라도 되는 양 담당 부서장인 그녀 앞에서조차 안하무인인 한 원장은 악마였다. 그런 한 원장에게 천사들을 바칠 수는 없었다. 그녀가 안 하면 그만이지 자기가 어쩔 것인가. 죽어도 못하겠다는 그녀에게 그는 일장 연설 끝에 자기 분을 이기지 못하겠는지 문을 탕 닫고 나가버렸다.
“최 씨 앉은 자리엔 풀도 안 난다는 말이 딱 맞네. 부서장이란 자가 저렇게 말이 안 통해서야. 그래서 여자는 집에서 국으로 설거지나 시켜야지. 저 정도의 뱃심밖에 안 되는 자에게 과장이 가당키나 한 자리야? 승진은 자기가 잘나서 한 줄 알아? 어디 구청장이 하는 일에 토를 달아 토를 달기는 어이가 없네. 그러고 그 자리에 온전히 앉아있을 수 있을 거 같아? 최 과장이 싫으면 하지 마. 딴 데 가서 알아보면 되니까.”
비서실장을 따라 나가려고 문을 여는 그녀의 팔을 정수경 팀장이 잡았다. 직원들은 속이 시원한 표정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다가올 폭풍에 대해 걱정의 눈길을 보냈다. 그녀는 직원들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눈짓을 보내며 자리에 앉았다. 마지막으로 내뱉은 비서실장의 말이 무엇을 말하는지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다. 곧 다가올 인사에서 어떤 조치를 하겠다는 엄포겠지만 그것이 두렵지는 않다. 어디든 가라면 가서 할 일만 하면 되는 것이다. 자기 입맛에 맞는 누군가를 데려다 이 자리에 앉히고 말겠지. 그러면 원장의 자리는 한 원장에게 돌아가겠지. 구립어린이집의 앞날은 어찌할 것인가. 불 보듯 뻔한 앞날을 생각하면 마음이 답답했다. 국비를 따내서 어린이집이 지어지는 과정을 보며 마음이 뿌듯했는데, 지금까지의 노력이 모두 헛짓이 되고 말았다. 혼자 쓴웃음을 짓고 있는데 정수경이 저녁에 한잔하자고 카톡을 보내왔다.
퇴근 후 정수경과 함께 호프집으로 갔다. 그녀는 기분이 좋을 때는 고기를 앞에 놓고 소주를 마시고, 속이 타는 일이 있을 때는 먹태를 앞에 놓고 호프를 마셔왔다. 정수경은 그녀가 어디로 가자는 말을 안 해도 벌써 호프집 2층 계단을 앞서 올라가고 있었다.
그녀는 500을 먼저 시켜 갑갑한 속부터 달래며 중얼거렸다.
“그야말로 죽 쒀서 개 준다더니. 비서실장 좋은 일만 했군.”
“잊어버리세요. 누가 알아요. 생각보다 잘할지도 모르잖아요.”
정수경이 먹태와 함께 호프를 추가 주문하며 웃었다.
“수경아. 넌 웃음이 나오냐. 난 울고 싶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하나를 보면 열을 모르나. 지금까지 해 먹은 한 원장 작태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냐고?”
“성자 언니, 그럼 어쩌겠수. 웃어야지. 난 눈물이 아까워서 그러우.”
“그래. 넌 웃어라. 난 울란다.”
말이 떨어지자 정말 눈물이 났다. 정수경이 건넨 휴지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설거지나 하라고? 설거지를 모욕해도 유분수지. 설거지가 얼마나 숭고한 건지 알기나 하고 나불대라고 해. 평생 제 배나 채 울 줄 만 알지. 지가 설거지 한번 해 봤어. 쥐뿔도 모르는 게 어디서 굴러와서. 뭐 과장이 가당키나 하냐고? 이 개새끼를….”
“성자 언니, 성자의 마음으로 다 용서하세요. 죄 없는 개는 거기다 왜 붙여요.”
“그래. 그건 내가 잘못했어. 수경아. 내가 떠나면 너는 어쩔래? 그 김 비선지 대머린지 하라는 대로 할래?”
“그럼 어째요. 언니처럼 앞에서 막아주는 과장님이 오면 좋겠지만…. 그럴 리 없고. 내 코가 석 자니 그만둘 수도 없고.”
“그만둘 수도 없다. 그래. 가던 길 두고 예서 말 수야 없지. 그래. 돌아가지 않을 거야.”
그녀가 눈빛을 빛내자 또 올 것이 왔다는 듯 정수경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고 기자님. 요즘 받아쓰기 실력이 많이 늘었던데요?”
“최 과장. 요즘 심기가 불편한가 봐. 아침 댓바람부터 사람 불러놓고 꼬는 걸 보니.”
고 기자는 커피 한 모금을 마시다 말고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물었다.
“고 기자님. 내가 원래 꿈이 기자였거든요. 그래서 처음에 고 기자님 기사를 보면서 무척 좋아했었죠. 고발 기자라 불리던 그때가 생각나네요. 미래 구 공무원의 적이었을 때도 난 혼자 응원했었지요.”
“또 허깨비 타령이네. 누구 얘긴지. 아, 옛날이여.”
고 기자는 창안으로 스며드는 밝은 햇살 안으로 내민 얼굴 아래 손깍지를 끼며 말했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세상을 보는 눈이 더 밝아져야 하는데, 명확한 걸 보고도 왜 점점 못 본 척하게 되는 걸까요?”
그녀는 고 기자의 파리한 낯빛에 스쳐 가는 고통을 읽으며 물었다. 아마도 그는 현실에 무척 피로를 느끼는 것 같았다. 한창때의 날카롭던 펜이 무뎌가는 자신에게 회의를 느끼고 있으리라. 그는 낮은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더 늙어봐. 노안 오면 돋보기 써야잖아. 돋보기로 보니 세상을 두루두루 못 보는 거야. 글자 하나, 단어 하나는 잘 보는데 멀리 내다볼 수가 있나. 어디 그뿐이야? 백내장 걸리면 사물이 흐릿하게 보이지. 거기다 눈앞에는 날파리만 꼬이는데. 밝아지긴 뭐가 밝아져.”
“역시. 고 기자님. 비판 정신이 죽지 않았네. 싸라 있네. 싸라 있어. 맞아요. 돋보기 쓰면 자기 표만 보이겠죠. 거기다 백내장이면 뭐가 날파린지 꽃잎인지 분간 안 되고요.”
“나도 이런 촌구석에서 지방지나 전전하며 기레기가 될 줄 몰랐지. 부정부패의 현장을 기습해서 마이크 들이밀고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게 꿈이었는데.”
“아직 늦지 않았어요. 더 늦기 전에 기자 정신 한번 살려봐요.”
“아. 최 과장. 왜 이래.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그리고 나 믿지 마.”
“난 믿지 말라는 사람이 더 믿음이 가더라고요. 앞에서 믿어달라는 놈들이 꼭 뒷통수 때리고 다니잖아요.”
“알았어. 못 말리겠네. 정말. 뭔데 그래. 내부고발이라도 하려고?”
“내가 이 자리를 더 못 지킬 거 같아요. 자리 때문이 아니라, 아이들 때문에 가만히 물러나면 안 될 거 같아요. 지금 구립어린이집 개원 준비 중이잖아요. 그런데 그 자리에 한 원장을 앉히라고 김 비서가 내 자리까지 들먹거리면서 협박을 했어요.”
“아, 그 한마음 어린이집 한 원장?”
“맞아요. 한마음 어린이집 있는 동네가 좀 어렵잖아요. 그러니 그 동네에서 뭐가 나오겠어요. 엄마들이 모두 바쁘게 살다 보니 애들 맡겨 놓고 신경도 못 쓰죠. 자기 애가 맞고 와도 모른 척하는 거 같더라고요. 보조금 빼먹는 거로는 성이 차겠어요? 한 원장이 도심에 어린이집 지을 돈은 없고, 임대료 싼 그 동네에다 우선 개원을 해놓고 구립어린이집 짓기만 손꼽아 기다린 모양이더라고요. 그 전엔 구청에서 회의 소집을 해도 콧방귀도 안 뀌더니 이젠 제집처럼 드나들잖아요. 거기다 비서실장이랑 저녁에 만나는 걸 봤다는 제보도 있어요.”
“대박사건.”
“아. 고 기자님. 애들처럼 대박사건이 뭐예요. 난 정말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고발하는 거예요. 그런 여자에게 새천년의 미래를 짊어질 아이들을 어떻게 맡겨요.”
“세상이 막 나가도 그러지 말아야 할 사람들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들인데. 더군다나 어린이집 원장은 엄마나 마찬가지잖 아. 그 이쁜 것들을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새천년이고 미래고 다 뜬구름이지. 말세네.”
“아무리 밥 먹자고 하는 일이라지만, 최소한의 직업윤리는 있어야죠. 어린이집 원장이면 원장다워야 하고, 기자는 기자다워야 하고…. 그게 자기 꿈인데, 하고 싶은 일 하는 건데, 왜 못할까요?”
“그래. 하고 싶은 일 하는 건데. 내 꿈이 받아쓰기는 아닌데, 마지막으로 기자 한번 해보자. 나도 이 생활 때려치우고 싶었는데, 한 방 하고 고향에나 내려가야겠어.”
“때려칠 때 때려치더라도 때려줄 놈은 제대로 때려주시고, 치울 건 제대로 치워주시고.”
'과장님. 출근하시면 책상 위 보도자료에 중부 매일 기사 좀 보세요. 후발 취재가 몰려들 텐데 빨리 읽어보셔야 할 거 같아요.'
출근 길, 아파트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있는데 정수경이 보내온 문자였다.
‘고 기자가 벌써 취재를 끝내고 기사를 썼다는 말이군.’
출근 시간대에 밀리는 차량 틈에서 마음이 바빴다. 서둘러 운전해서 사무실에 도착했다. 주차장에 차를 대려는데 정수경이 손짓을 했다. 그녀를 따라가니 쉽게 주차할 수 있도록 자신의 차를 빼주었다. 출근 시간대의 주차난을 짐작하고 판단한 정수경의 재치에 웃음이 나왔다. 창을 내려 정수경에게 엄지 척을 보냈다. 그녀도 엄지 척을 보내며 웃었다. 가볍게 차를 세우고 사무실로 들어가자마자 보도자료를 펼쳤다. 중부 매일부터 찾았다.
-천사의 날개를 꺾는 어린이집 원장에게 돌아갈 미래 구립어린이집, 악마는 누구인가?
‘완벽한 제목이군. 더 볼 것도 없네. 마지막이라더니 기어이 고 기자가 해냈구나.’
그녀는 보도자료를 한쪽으로 치우면서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와 동시에 새천년 뉴스의 함 기자가 들어왔다. 평소 받아쓰기의 첨병 역할을 자처해 온 함 기자는 다급하게 나왔는지 평소의 복장과 다르게 면바지에 티셔츠 바람이었다. 야구 모자 아래 화장기 없는 얼굴이 처음엔 누군지 몰라볼 정도였다.
“과장님. 아침부터 뭐 좋은 일 있어요? 얼굴이 좋네요?”
함 기자는 불편한 심정을 누르면서 인사를 했다.
“함 기자님. 아침 일찍 무슨 일이세요?”
그녀는 함 기자의 운동화에 눈길을 보내면서 눈인사를 했다.
“무슨 일이겠어요. 지금 미래 구가 벌집 통이라 잠을 자게 만들어야 말이죠. 도대체 천사의 날개를 꺾었다는 한마음 어린이집 원장 기사는 뭐예요?”
함 기자는 약간 짜증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게 말이에요. 중부 매일 고 기자님은 그 어려운 걸 어디서 듣고 쏟아냈나 모르겠네요. 기자실에 없어요? 가시면 다 말할 텐데요. 후속 기사 쓰셔야죠.”
“아니. 최 과장님은 담당 업무인데 남의 동네 이야기하듯 태평하시네요.”
“아이고 머리야. 왜 아니래요. 설마설마했지만 그 정도일 줄이야. 보조금 장난이야 완벽하게 서류 정산을 해 왔으니 우리 직원들이 잡아낼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아동 학대라니요. 어린 것들을 쥐어박고, 꼬집고, 아이들을 돌볼 교사들에게 급식 일까지 시키면서 인건비를 빼 먹었다네요. 선생님들은 말 한마디 못하고 그 고초를 다 겼었으니, 내가 정말 부끄러워서 사표라도 쓰고 싶어요.”
그녀는 정말 분하고 기막힌 심정으로 말했다.
“기사 나오는 걸 과장님은 모르셨어요?”
“아니. 제가 쥐새끼도 아니고 무슨 재주로 그걸 압니까? 거기다가 김 비서실장이랑 원장이 그런 사이일 줄이야.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네요.”
그녀는 정말 하늘이라도 무너진 것처럼 얼굴을 감싸며 말했다.
“무슨 말이죠? 설마 비서실장님이랑 그런 사이까진 아니겠죠.”
함 기자가 파리한 입술을 살짝 떨며 중얼거렸다.
“그러게요. 그건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뭐 알 수 있나요? 두고 보면 알 일이죠.”
그녀는 어깨를 내려뜨리며 나가는 함 기자가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기다리는 김 비서실장은 벌써 종적을 감추고, 기자들 몇몇이 인터뷰를 하고 갔다. 그녀는 최대한 놀라는 척하며 자세하게 말해 주었다. 김 비서실장과의 관계는 알 수 없는 일이고, 그동안 담당 부서장으로서 관리 소홀과 예방책을 마련하지 못한 것에 책임과 도리를 다하겠다고 답했다. 북새통 같은 하루를 마무리하고 창가에 서서 뉘엿뉘엿 지는 저녁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제의 하늘과 오늘의 하늘이 다르지 않건만 지금 올려다보는 하늘은 맑고 깨끗했다.
“과장님. 가시죠?”
정수경이 퇴근 시간을 기다려 6시가 되기 무섭게 다가왔다.
“오늘 같은 날 그냥 갈 수 없잖아요? 자축의 의미로 오늘은 오랜만에 고기를 먹어볼까요?”
“어디 한 잔으로 되겠어?”
“오늘이야말로 이 밤이 지새도록 날밤을 까보자고요.”
“아름다운 수경아. 아름답게 말해라. 까보자니?”
“얼마나 아름다워요. 날밤을 깐다는 말이.”
“그래. 까짓거. 날밤을 까던 군밤을 까던 갈 데까지 까보자. 이 마당에 우리가 못 깔 게 뭐 있냐. 대신 오늘은 호프를 마실 거 야. 호프를 마셔야 희망이 생겨. 절망 속에 피어나는 호프여, 나의 호프여.”
“언니. 비서실장도 구속되고, 한 원장도 나자빠졌으니 딴 맘 먹는 거 아니죠?”
“딴 마음을 내가 왜 먹냐? 난 오로지 일편단심만 먹는다.”
“그러니까 일편단심이 뭐냐고요?”
“뭐긴. 마이웨이지. 책임질 건 책임지고. 떠나야지. 어차피 내가 한 짓이라고 세상이 다 아는데. 나 혼자 아닌 것처럼 도리질하고 있을 순 없잖아.”
“아니. 아닌 말로 언니가 언니 욕심 차리려고 그런 거 아니잖아요. 구민을 위해서, 애들 생각해서 한 거잖아요. 온 세상이 다 알아도 언니 손가락질할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내부고발이란 거, 어디 가나 붙어있을 딱지야. 이 조직하고는 맞지 않아. 조직이 나를 내치는 게 아니야. 내가 조직을 걷어차는 거지.”
그녀는 속이 타는지 호프를 마셔댔다. 호프를 마셔야 희망이 생긴다더니 화수분처럼 500을 클리어하는 그녀 옆에서 정수경은 마음이 초조해졌다.
어슴푸레 밝아오는 여명을 느끼며 그녀가 눈을 떴다.
“언니, 속 괜찮아요? 역시 언닌 고기에 소주를 마셔야지. 빈속에 호프만 채워 넣으니까 1차에서 까무라치잖아요. 택시로 모셔오느라 죽는 줄 알았어요. 집에 오니 술은 다 깨고. 아, 그리고 이게 사람 사는 집이에요? 도대체 뭘 먹고 사는 거예요? 냉장고에는 소주랑 물뿐이 없으니. 속이 곯아서 픽픽 쓰러지는 거 아니냐고요.”
“아. 시끄러. 넌 집 놔두고 왜 남의 집에 와서 자고 그래.”
“아니. 기껏 살려놨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격이네. 어여 일어나서 속이나 풀어요. 편의점에서 컵라면 사 왔어요.”
“우와. 그래. 역시 수경이가 최고다 최고.”
그녀는 엄지를 치켜들며 식탁에 앉았다. 매콤한 냄새에 재채기가 나오고, 벌건 국물이 오늘따라 역겨워져서 마실 수가 없었다. 컵라면을 비우지 못하고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언니, 하루 쉴 걸 그랬나 봐요? 안색이 너무 안 좋아 보여요.”
출근하는 택시 안에서 정수경이 말했다.
“아. 그러는 넌 좋은 줄 아니? 화장이 다 떴다.”
“아니. 누구 밤새 모시느라 뜬눈으로 날밤 새운 걸 잊으셨나?”
“왜? 날밤을 까신다더니. 소원성취했네.”
“정말 못 말려. 내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니까.”
정수경이 두 손과 두 발을 들면서 웃었다.
“그래. 웃자. 세상이 무너진 것도 아니고, 우리가 패배한 것도 아니잖아. 오늘이 최고인 것처럼 살자.”
“아. 네. 알겠습니다. 어디 최고 아닌 날 있나요. 최고로 밑바닥을 기다가 최고로 공중까지 뛰어오르다가. 인생이 완전 롤러코스터입니다. 에버랜드 갈 필요가 없지요.”
“그래. 수경인 언니 잘 만난 줄 알아. 최성자 인생을 일 열에서 관람하잖아. 내 인생의 VIP.”
“아이고. 사양하겠습니다. 내한 공연단도 아니고, 최성자 님 인생 일 열 관람이라니.”
택시에서 내리며 정수경이 말했다.
구청 앞에는 취재진으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정수경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의 팔을 잡고 후문으로 끌고 갔다. 출근하는 직원들이 두 사람을 힐끗거리며 지나갔다. 그때 사무실 전화로 걸려온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과장님. 지금 어디세요?”
“왜. 무슨 일이야?”
“빨리 와 보셔야 할 거 같아요. 월하동에서 회장님들이 떼로 몰려와서 있어요.”
“그래. 지금 들어가는 길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내 방으로 잘 모셔.”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에 들어섰다. 월하동 여성 단체장과 부녀회장 등 낯익은 여성회원 얼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회장님들, 아침 일찍부터 고생이 많습니다. 보육과장 최성자입니다.”
“과장님. 어쩌실 거예요? 아이들이 길거리로 나앉았는데, 목구멍이 포도청인 엄마들이 직장을 안 나갈 수도 없고 이 일을 어떡하냐고요?”
이갑분 여성단체 회장이 팔을 걷어올리며 말했다.
“과장님은 무슨 수가 있을 거 아니에요? 무턱대고 이런 사단을 만든 건 아니겠죠?”
오미자 부녀회장이 이에 질세라 목소리를 높이며, 이 회장의 말을 받았다.
그녀는 예상 못 한 일에 대하여 잠시 난색을 표했다.
“회장님들. 우리 구에서 일어난 이번 일에 대하여 정말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아이들을 당장 맡기셔야 하는 어머니들의 입장을 생각하니 더욱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학대받는 환경에서 자라도록 방치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불편하시더라도 조금만 참아주시면 저희가 어린이집 인수 절차가 빨리 진행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과장님이 애를 길러보지 못해서 뭘 알겠어요. 사실 가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여자라고 앉혀놨으니….”
오미자 부녀회장이 통장 자율회장을 치면서 말을 끊었다.
“아. 네. 제가 면목이 없습니다. 그러잖아도 한마음 어린이집 보육 선생님들도 일자리를 잃은 상황이라서요. 정수경 팀장이 어 제 선생님들께 의견을 물었는데 아이들을 돌봐주고는 싶다고 했어요. 그런데 장소가 문제라서요. 회장님들께 힘을 빌리고 싶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월하동 노인회관의 휴게 공간을 활용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노인회관 담당 부서와 적극적으로 협의해 보겠습니다.”
그녀가 진심 어린 마음으로 고개를 숙였다.
“과장님이 가정사는 잘 모르셔도 아이들을 깊이 사랑하는 마음은 우리도 압니다. 그래서 이런 상황이 된 게 더욱 분했어요. 배신당한 느낌마저 들었구요. 과장님이 대안을 마련하려고 애쓰시리라 믿어요. 우리도 돌아가서 노인회장과 회관 측이랑 잘 상의를 해볼게요.”
오미자 부녀회장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당분간 불편하시더라도 아이들이 좋은 환경에서 바르게 자랄 수 있도록 회장님들이 협조해 주세요.”
그녀는 정수경 팀장을 회의실로 불렀다. 한마음 어린이집에 남아 있는 교사와 긴급 돌봄이 필요한 어린이 현황과 문제점 및 대책을 파악하고, 노인복지과에 구해야 할 협조 사항을 작성하여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그녀는 정 팀장이 나가자마자 노인복지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기찬 노인복지과장은 용의주도한 인물이었다. 그녀보다 2년 입사 아래인 그는 차석이었던 그녀를 제치고 승진할 정도로 승부 욕이 과한 인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이기찬 과장님. 보육 과장 최성자입니다.”
“아. 예. 무슨 일로?”
아쉬울 것 없을 때 특유의 느릿한 목소리 너머로 그의 표정이 보이는 듯했다.
“다른 게 아니라요. 과장님도 보도자료 보고 아시겠지만, 한마음 어린이집이 원장 문제로 폐쇄가 됐잖아요. 그래서 아이들이 요즘 길바닥으로 나앉았네요….”
“아, 한마음 어린이집이요. 원장 문제였어요?”
그녀의 말을 자르며, 그가 빈정거리는 말투로 물었다.
“그게 아니라 어쨌든 아이들을 생각하니 월하동 노인회관의 공간을 좀 활용하면 어떨까 해서요. 과장님이 좀 도와주세요.”
“아휴. 제가 무슨 능력이 있어야지요. 더군다나 어르신들의 휴게 공간을 제 마음대로 할 수야 없지요.”
“과장님 입장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미래 구 전체를 생각해야 하는 시기잖아요. 협조해 주신다면 노인회장님과 회관 측에는 보육과에서 잘 논의를 해볼게요.”
“내 참. 어이가 없네. 최 과장님은 제가 미래 구 전체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구 행정이 무슨 동네 점방도 아니고. 시설을 용도에 맞게 사용해야죠. 노인회관이랑 어린이집이 성격상 맞냐고요? 아닌 말로 아이들이 회관에서 사고라도 나 봐요. 그 책임은 누가 질 거예요? 그러게 처음부터 책임 못 질 일은 시작하질 말아야지요. 여자들은 일을 왜 감정적으로 하나 몰라.”
“아니. 안 되면 안 되는 거지 거기에 왜 여자를 들먹이는 겁니까? 나는 미래 구 보육 과장 최성자입니다. 동네 아줌마가 아니라고요. 과장님은 모든 일을 혼자 결정하시나 보죠? 적어도 검토는 해보고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과장님의 의견은 일단 알겠습니다.”
그녀는 여자에게서도 남자에게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조직에 환멸을 느꼈다. 아무리 사회가 진화해도 여자가 설 자리에는 분명한 선이 그어져 있다. 선을 넘는 건 아예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했다. 조금이라도 능력을 보이면 여자가 그런 생각도 할 줄 알아? 제법이군! 따위의 시선을 보내거나, 얼마나 구워삶았기에 통과됐을까 의혹의 눈길을 보내기 일쑤였다. 끼리끼리 자기들만의 세상을 구축하고, 그 안에서 줄을 서려면 알량한 자존심 따위는 내세우면 안 되는 문화였다. 무작정 실적을 올리고 성과를 내본들 인정받기 어려웠다.
그녀는 정 팀장이 가져온 한마음 어린이집 폐쇄에 따른 월하동 어린이 임시 위탁 방안을 검토하고 구청장실로 들어갔다. 비서실 분위기는 썰렁했지만 김 비서실장이 없어서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청장실에 들어가도 좋다는 비서의 말에 무거운 문을 밀고 들어갔다.
박기만 구청장 앞에 이기찬 노인복지과장과 월하 노인회장이 마주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마치 최 과장을 맞이하려고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구청장이 말했다.
“어. 최 과장. 때마침 잘 왔어.”
“네, 구청장님. 말씀처럼 때맞춰 온 거 같네요. 노인복지과장님이랑 노인회장님이 자리에 계시니 함께 앉아서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녀는 이기찬 과장 옆으로 앉으며 말했다.
“아니. 최 과장. 앉을 거 없어. 이미 논의가 끝났어. 월하 노인회관에 체력단련실을 설치하게 됐거든. 아이들 위탁은 어렵다고 회장님이 지금 말씀하셨어. 그러니까 다른 방법 찾아봐. 최 과장 능력 좋잖아.”
박기만 구청장이 그녀의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턱으로 문을 가리켰다. 그녀는 조용히 그 문을 열고 나왔다. 오전 내내 정수경 팀장과 직원들이 만든 업무보고서를 비서실 파쇄기에 밀어 넣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예상보다 빨리 돌아온 최 과장의 얼굴빛을 보고 일이 잘못된 걸 눈치챈 정 팀장이 따라 들어왔다.
“과장님. 왜요? 청장님이 뭐라 그러셔요?”
“정 팀장. 이게 무슨 개 같은 경우냐. 아. 정말 싫다. 벌써 그 이기찬인지 하는 인간이 노인회장이랑 말을 다 맞춰서 구청장이랑 같이 앉아있더라. 아주 재밌어죽겠다고 웃음을 참느라고 환장을 하더라. 야. 정말 그 인간 공무원 맞냐?”
“그렇게 성질만 내지 마시고. 앞뒤 상황을 좀 설명해 주세요.”
“설명은 무슨. 그 인간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데, 뭐 내가 쪽팔린 거까지 듣고 싶냐?”
“아. 이런 인간말종이네. 제 버릇 개 못 준다더니.”
“인간으로 살든 개같이 살든 이 노릇을 어찌하냐. 이 문제를 완전히 내 개인의 문제로 돌리려고 그러는 거 같아. 비서실장의 잘못은 감싸고, 내가 해결하려는 일에는 앞장서서 막고 있으니 도덕적 책임감이나 해결에 대한 의지를 기대하는 건 글렀어.”
“상황이 심각하네요. 뭐 저희도 나름대로 대안을 마련하려고 했는데 어렵겠네요. 과장님. 차라리 잘 됐어요. 정공법으로 나가시죠. 사실은 고모가 시흥에서 어린이집 운영하다가 출산문제로 그만두었는데요. 요즘 심심해하는 것 같더라고요. 워낙에 애들을 좋아해서 꼬시면 넘어올 거예요. 한마음 어린이집 해결해 볼게요.”
“그래? 정말 그렇게 되면 좋겠다. 급하게 해결하는 것보다 아이들의 안전이 우선이지. 어머니들을 설득하고 제대로 된 어린이집 운영을 위해 힘써보자고 하는 편이 오히려 나을 거 같네. 아무리 밥이 우선이라도 자기 자식들 학대받는 어린이집으로 보내고 싶은 엄마는 세상에 없을 테니까.”
그녀는 정수경의 고모 정미나를 만나서 어린이집 현황과 인수 절차를 설명했다. 정미나는 한마음 어린이집을 둘러보더니 시설이 너무 낡아서 보름 정도의 보수 공사 기간이 필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있을 때는 몰랐는데 비어있는 시설을 둘러보니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그녀는 정미나의 섬세한 성격과 아이들을 생각하는 진정성이 느껴져서 믿음이 갔다.
어린이집 어머니들을 찾아가거나 전화 통화를 하면서 진행 상황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했다. 좋은 운영자가 나타나 어린이집 시설을 개보수하여 아이들을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어린이집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어머니들도 더 이상의 방법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녀가 백방으로 노력하면서 성심성의껏 어린이집 정상화를 위해 애쓰는 모습에서 진심을 느꼈다. 지금까지 구청의 공무원들에게서 보아온 행정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다른 방법이 없으니 믿고 맡길 수밖에 없었다.
보름이 지나자 정수경 팀장이 어린이집 개원 소식을 알려 왔다. 어린이집 이름은 윤슬 어린이집이었다.
“윤슬? 무슨 뜻이지?”
“글쎄요. 저도 처음 들어보는 말인데요. 가보면 알겠죠.”
그녀는 월하동으로 가는 차 안에서 떨리는 마음을 누르고 있었다. 마치 처음 학교에 가는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바쁜 시간을 보내느라 중간에 한 번 들러보려 했는데 기회를 놓쳤다. 정수경 팀장 편으로 어린이집 개보수 진행 과정 사진을 보면서 안도했을 뿐이었다.
골목을 돌아서자 파란 건물이 보이고, 노란 글씨로 윤슬 어린이집이라고 쓴 현판이 눈에 들어왔다. 차에서 내리면서 어린이집을 올려다보던 그녀는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본 어린이집 이미지와는 너무나 달랐다. 차를 주차하고 뒤따라오던 정수경도 얼굴 가득 웃음꽃을 피우며 ‘어머나’를 연발하고 있었다. 건물 아래는 파란 바다 물결이 햇빛에 반짝이고, 그 위로 물고기들이 뛰어놀고, 인어공주와 용궁 왕자가 손을 흔들며 아이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창문들은 알록달록 일곱 빛깔 무지개로 곱게 떠올랐다. 낮은 담장에는 즐거운 표정의 아이들이 뛰놀고, 담장을 따라 작은 꽃밭이 펼쳐졌다.
딴 세상에 온 착각을 일으키며 어리둥절하고 있는 그녀에게 정미나 원장이 다가왔다.
“과장님. 오셨어요?”
“원장님.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어쩜 완전히 달라졌네요. 월하 어린이들의 궁전 같아요.”
“마음에 드세요? 아이들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아팠어요. 이곳이 아이들에게 학대받는 곳이 아니라 사랑받고 꿈을 키우는 아이들의 첫 번째 학교가 될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어요.”
“정말 멋져요. 아이들과 어머니들이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그녀는 정 원장을 따라 들어가며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파란 바닷속 궁전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입구 옆 한쪽 벽에는 커다란 수족관이 걸려 있었다. 시원한 바다풀과 물고기들이 제 세상인 양 뛰놀았다. 아이들의 교실 이름도 강과 바다의 이름을 따왔다. 나이에 따라 강 이름과 바다로 정한 것 같았다. 1층에는 섬진강, 낙동강, 두만강, 2층에는 서해, 동해, 남해, 3층에는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이 있었다. 정원장은 최 과장과 정 팀장을 옥상으로 안내했다. 파란 하늘 아래 작은 원두막과 텃밭이 있었다. 내년 봄에는 채소와 과일 모종을 사다가 심을 것이라고 했다. 상추랑 깻잎이랑 방울토마토랑 오이랑 호박을 많이 심어서 편식하는 아이들에게 채소나 과일에 흥미를 갖게 하고 실컷 먹게 하겠다고 했다.
“원장님. 이 짧은 시간에 이 모든 걸 완벽하게 이루시다니 정말 대단하세요,”
그녀는 기대한 것보다 잘 만들어진 어린이집을 보고 감탄하며 정 원장의 손을 잡았다.
“주어진 시간이 짧아서 아직 손이 덜 간 곳이 있지만 개원하고 차차 채워나가야죠.”
정 원장이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원장님. 그런데 윤슬은 무슨 뜻이에요?”
“윤슬은 순우리말이에요. 왜 물비늘이란 말은 아시죠? 물 위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잔물결이요. 우리 아이들은 바다처럼 넓고 맑은 물결을 품고 있어요. 아이들이 품은 물결 위에 햇빛이나 달빛이 비춰준다면 반짝거리는 물결이 되지만, 구름이 덮어버리면 빛이 나질 않지요. 아이들이 반짝거리는 윤슬이 되도록 어린이집이 힘쓰겠다는 의미로 이름을 지었어요.”
“아. 그렇군요. 윤슬이라는 말에는 그런 의미까지 내포되어 있군요. 정말 원장님의 아이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 담긴 이름이네요. 정말 마음이 든든해요.”
“저는 월하동이 좋아요. 가난하지만 달빛 아래 소박한 사람들이 오순도순 살아가는 따뜻한 동네예요. 이 아이들이 기죽지 않게 마음껏 꿈을 키우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어요.”
“원장님. 정말 고맙습니다. 월하동에서 오래오래 아이들을 위해 힘써주세요.”
“저도 오랜만에 아이들을 만날 걸 생각하니 막 설레고 기분이 좋습니다. 과장님만 믿고 열심히 하겠으니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부탁은요. 어려운 일이든 쉬운 일이든 늘 말씀하세요. 여기 정 팀장에게 편하게 말하면 되겠네요. 저는 원장님을 믿고 응원하겠습니다. 들어가 볼게요. 수고하세요.”
그녀는 돌아가는 차에서 어린이집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자꾸 뒤돌아봤다. 정말 꿈만 같았다. 내심 기일 안에 개원할 수 있을까 하는 조바심이 나서 잠을 못 이루던 날들이었는데 이젠 정말 발 뻗고 자도 될 거 같았다.
“수경 씨. 고모님 정말 대단하시다. 어떻게 다 쓰러져가는 오막살이를 대궐로 변신시키냐고. 비용도 많이 들었을 텐데. 정말 고맙고 미안하고….”
그녀는 지난 수주일 간의 일들을 떠올리며 벅차오르는 기쁨에 목소리가 떨렸다.
“좋은 마음 끝에 좋은 결과가 나타나는 거죠. 고모가 워낙 애들 욕심이 많아요. 그래서 고모가 다둥이 엄마가 되는 바람에 그동안 일을 못 했거든요. 아마 이번 일이 아니었으면 시작 안 했을 거예요. 막내 조카 학교에 들어간 지도 얼마 안 됐고요. 그런데 뉴스에서 한마음 어린이집 원장 얘기가 나오자 분통을 터뜨리며 전화를 하신 거예요. 제가 담당인 걸 아셨으니 오죽 한심한 생각이 드셨을까요? 일 똑바로 안 하냐고 어찌나 호통을 치시던지. 지금까지 상사에게 들은 욕 다 합해도 그만큼은 안 될걸요? 그래서 처음에는 죄송하다고 답하다가 성질을 부렸죠. 그렇게 잘났으면 고모가 한번 와서 수습해 보라고요. 그랬더니 대뜸 내가 못 할 줄 알아? 하고 역정을 내시더니 일이 이렇게 되었죠. 고모가 일을 저지르는 편이거든요. 하하하.”
“와. 정말 다이내믹한 고모와 조카네. 덕분에 나는 누워서 떡 먹고, 누구보다도 우리 애들한테 얼마나 잘된 일이냐. 정말 좋다. 좋아. 내가 고기 사줄게.”
“드디어 고기로구나. 그놈의 먹태 먹느라고 턱이 빠지는 줄 알았는데. 호호호.”
“그래. 이제 미래 구의 미래는 정수경이 짊어져라. 월하동 윤슬 어린이집이 안정화되는 건 멀리서 지켜볼게.”
그녀는 정수경의 손을 지그시 잡으며 말했다.
“정말 그만둘 거예요? 아직 언니가 할 일이 남았어요. 언니 떠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걱정하지 마. 내가 있다고 일어날 일이 안 일어날 일도 아니고, 내가 없다고 해결될 일이 안될 일도 아니고. 다 각자 살아가는 인생 아니겠어? 수경인 뭐든 잘할 거야. 두려워 마.”
“두렵다고 피하지 말고 언제나 정공법. 언니의 말 기억하면서 두고 간 숙제는 제가 풀어볼게요.”
인생의 항해는 바다를 향해 거침없이 흘러왔다. 거친 산비탈을 흐르던 청춘은 중년의 강물을 지나 이제 장년의 바다로 흘러가고 있다. 이제 마지막에 다다라 돛을 내리게 될 날도 머지않았다. 어떻게 돛을 내릴 것인가. 그곳은 어디쯤일까. 그녀가 원하던 모습으로 마지막 항해를 마치고, 고요한 항구에 다다를 수 있을까. 그날에 그녀는 무엇을 생각할까. 손에 쥐어졌던 수많은 기회가 손안에서 빠져나갔을지도 모른다. 그때마다 그녀는 반대로 선택했다. 자의건 타의건 그녀의 선택은 옳다. 지금의 그녀는 그 모든 것에서 왔다. 무엇 하나 헛된 것은 없다.
첫댓글 소설은 픽션이고 픽션은 거짓말, 허구, 없는 일을 지어내는 것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이 글의 소재를 공무원 비리와 어린이집 아동 학대라고 볼 때, 어느 정도 예상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글이 딱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뉴스만 보면 수없이 나오는 이야기를 반복했다고 볼 수 있죠. 그럼에도 이런 소재로 소설을 쓸 때는 뭔가 새로운 이야기를 하거나 독자의 뒤통수를 치거나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플롯을 완벽하게 짜야 되겠죠. 사실상 소설은 플롯이 절반의 일을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플롯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인공의 캐릭터겠지요. 그런 면에서 성자라는 캐릭터는 지나치게 건전한 것 같습니다. 마치 영웅 같기도 합니다. 사실상 소설에서 영웅은 그렇게 매력적인 포인트는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장르 소설에선 영웅이 대세이기는 합니다. 오히려 정수경을 1인칭 화자로 내세워 성자를 관찰하는 구성으로 쓰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리고 플롯을 짤 때, 미스터리, 추리, 반전, 스릴, 궁금증, 호기심, 기타 의 요소 중에 한 가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끌고 간다고 생각하면 플롯이 보다 풍성해지는 것 같습니다. 지난번 새의 지문처럼 이 소설도
플롯이라는게 아직 엉성하죠.
인물이나 이야기를
잘 짜놓고 풀어나가야는데,
저는 일단 쓰고 보는 경향이 있어요.
직접 체험하거나
깊이 느껴본 일 외에는 상상력 부재라 재미있는 스토리를 못만드는 것도 단점이죠.
며칠 두고 고민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강순덕 엉성한 건 아니고요ㆍ좀 밋밋한 것 같습니다ㆍ그리고 윤슬 단어 설명하는 건 좀 어색합니다ㆍ제 느낌이에요ㆍ
@신이비 알겠습니다.
많은 말씀을 들으니
좀 복잡해지네요.
잘 극복해볼게요.
플롯에서 큰 매력이 없어 보입니다. 물론 윤슬님의 문장은 아름답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문봄의 끈끈한 문우의 정으로 ... 늘 합평하시는 이 몇 분만 하시는가 봅니다.^^:: 제가 합평방에 자주 들르는 것이 맞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강선생님 글 잘 읽었습니다. 플롯을 거론하셨는데요.
이 글은 시나리오를 읽는 느낌이 아니, 괄호 내에 배경설정 또는 인물의 심경만 없을 뿐이지 그냥 한 편의 시나리오 입니다. 보시면 글 전부 다가 대화체여요. 플롯이 거론된 이유가 여기에 있겠지요? 대화체가 주를 이루는 소설은 집중력을 떨어뜨리고 인물, 배경의 설명묘사가 거의 안되거든요.
필력은 기본적으로 뒷받침 되시니 대화체를 팍팍 줄여 소설의 맛을 살려내시어요. 한 편의 좋은 소설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아참~ 저도 윤슬 이란 단어 선생님을 알고 나서 찾아보았답니다.^^:: 참 예쁜 단어에요~
조작가님 등장으로
합평방이 활성화되고 있어요.
말을 줄이고 묘사를 늘려라.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이거 공사가 제법 커지겠군요.
감사합니다.
고의적으로 대화체를 쓰는 경우가 아니라면 줄이는 게 좋죠ㆍ공감합니다ㆍ
저도 한 마디.
고발소설이므로 결말에 비리가 드러난 것이 어떻게 처리가 되는지도 설명묘사가 붙으면 좋겠습니다
비서실장만 연류된 것이 아니므로 고발된 후 윗선과 비서실장, 한원장 등의 추후과정이나 내용이 더 들어가야 완성도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화자가 끝까지 자리 고수하면서 싸워나가며 일말의 과정을 기록하는 내용 좋습니다.
포기말고 싸운다면요.
지금까지 내용으론 발만 긁다만 것 처럼
아쉬움이 남습니다
작가님은 문장력이 세련되고 묘사력도 좋으므로 해결과정에 집중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산을 오르다 중도 포기한 느낌)
ㅎㅎ대화체 줄이시구요 저도 걸렸습니다
문장도 내용자체도 고발문학으론 좋습니다
대부분 공무원사회든 힘있는 자들은 요리조리 잘도 빠져나가고 그러다 흐지부지되거든요
잘 읽었습니다
그렇군요.
산을 오르긴 했는데
정상을 밟지 못했네요.
사건의 전모를 밝히고
악마를 제대로 처단해야
직진하는 그녀의 캐릭터가
선명해지겠군요.
감사합니다.
아ㆍ그거였네요ㆍ그래서 뭔가 부족한 느낌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