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宗 12년
〈무술〉 12년(1058) 봄 2월 신해. 도병마사(都兵馬使)가 아뢰기를,
“양계(兩界)의 철(鐵)의 공납은 옛날부터 병기(兵器)에 충당하였는데, 근래 흥왕사(興王寺)를 짓는 데 또 철을 더 바치게 하니 백성들이 그 노고를 견디지 못합니다. 청하건대 염주(鹽州)·해주(海州)·안주(安州)의 3주가 정유년(1057)·무술년(1058) 2년 동안 군기용(軍器用)으로 바친 철을 덜어서 흥왕사의 용도에 오로지 쓰게 하여 〈백성의〉 노고와 폐단을 풀어 주십시오.”
라고 하니, 이를 받아들였다. 식자들이 말하기를,
“『당사(唐史)』에 이르기를, ‘여러 절이 시가지에 가득하여도 위망(危亡)의 화를 구하지 못하고, 승려들이 길에 차 있어도 어떻게 근왕(勤王)의 군대에 이익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국가의 이 모든 것이 어찌 큰 잘못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였다.
무오. 내사사인 지동궁시독사(內史舍人 知東宮侍讀事) 최상(崔尙)이 아뢰기를,
“어제 거란(契丹)의 사신 왕종량(王宗亮)을 전송하려고 밤에 금교역(金郊驛)에 도착하였는데, 왕종량이 줄지어 선 횃불을 보고 말하기를, ‘교외까지 전송하여 술을 먹으니 이 때문에 밤을 범하였고, 저 횃불을 가진 종들의 홑옷이 대단히 민망하니 이후에는 마땅히 이른 아침에 출발할 것입니다. 일찍이 듣건대 귀국의 조정에서는 사신을 접견할 때에 밤이 되도록 술을 권한다 하더니, 이번에 예악(禮樂)을 보니 모두 우리[中華]와 같아서 탄복하고 칭찬할 뿐입니다. 그런데 세 번 왕부(王府)에 나아갔는데 잔치에 반드시 등불을 켰습니다. 우리나라의 법에는 다만 혼인날 밤에만 화촉을 쓰는 것을 허락하고, 신하들이 손님을 접대할 때에는 비록 밤이 늦어도 촛불을 켜지 아니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 또한 생각하건대 임금이란 밝은 것을 향하여 다스리는 것이니, 마땅히 대낮에 빈객을 접견해야 하겠습니다. 하물며 등촉 또한 백성의 고혈로 비용이 너무 많으면 검소한 덕이 손상될까 두렵습니다. 옛날 진경중(陳敬仲)이 제(齊) 환공(桓公)의 술을 대접받을 때 환공이 불을 켜고 계속하자는 명령을 사양하여 말하기를, ‘신하는 낮을 택하고 밤을 택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간청하건대 지금부터 잔치의 예식은 다만 낮을 택하도록 하고, 송별[辭貴]의 예식은 마땅히 조회할 때를 이용하십시오.”
라고 하니, 이를 받아들였다.
신유. 거란(契丹)에서 검교상서우복야(檢校尙書右僕射) 소희(蕭禧)를 보내 태황태후(太皇太后)의 부음을 보고하였다. 왕이 현관(玄冠)과 소복으로 그를 맞이하였다.
여름 4월 임자. 지진이 일어났다.
병진. 동여진(東女眞)의 유원장군(柔遠將軍) 다로(多老) 등이 와서 양마(良馬)를 바쳤다.
5월 경진. 동여진(東女眞)의 귀덕장군(歸德將軍) 상곤(霜昆) 등 33인이 와서 양마(良馬)를 바치니, 의복과 기명(器皿)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무자.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가서 해린(海麟)을 국사(國師)로, 난원(爛圓)을 왕사(王師)로 책봉하였다.
임진. 제서를 내려 이르기를,
“때는 농번기인데 비가 제때에 내리지 않으니, 아마 원망스런 옥사가 있어 천재지변이 이르게 된 것이다.”
라고 하고, 드디어 가벼운 죄수들을 석방하였다.
6월 임인. 거란(契丹)에서 좌령군위상장군(左領軍衛上將軍) 소간(蕭偘)을 파견하여 태후의 유물을 전달하였다.
무신.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에서 아뢰기를,
“삼가 제서(制書)를 살펴보니 ‘태사감후(太史監候) 이신황(李神貺)이 풍(風)·운(雲)·수(水)·한(旱)의 징후를 관찰함에 틀림이 없으니, 고과 성적에 구애됨이 없이 8품으로 발탁하여 제수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이신황(李神貺)은 세계(世系)를 알지 못하고, 처음 조정의 반열에 들어왔을 때 두 번이나 논박을 당하였으며, 또 기후를 관찰함이 곧 그의 직책인데 벼슬을 뛰어넘어 제수하는 것이 옳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제서를 내려 이르기를,
“기술에 정통함이 이신황 같은 자가 없으므로 앞의 제서에 의거함이 가하다.”
라고 하였다.
계축. 동여진(東女眞)의 정조(正朝) 분대(分大) 등 23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니, 물품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갑인. 왕이 건덕전(乾德殿)에서 보살계(菩薩戒)를 받았다.
가을 7월 기묘.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에서 아뢰기를,
“삼가 엎드려 제서(制書)에 의거하건대, 경창원(景昌院) 소속의 전시(田柴)를 흥왕사(興王寺)에 이속(移屬)하고, 그 어량(魚梁)·주즙(舟楫)·노비(奴婢)는 모두 관청으로 돌리도록 하였습니다. 무릇 궁원(宮院)에 선왕께서 토지와 백성을 넉넉히 하사하신 까닭은, 그 자손에게 증여하고 만세까지 전하여 생활에 궁핍한 사람들이 없도록 한 것입니다. 지금 그 종실이 더욱 번성하여 만약에 궁원에 각각 하사하려 하여도 오히려 부족할까 두려운데, 하물며 한 궁원의 전시를 회수하여 사찰에 부치시니, 삼보(三寶)를 소중히 여기는 것은 비록 좋은 일이나 나라와 집의 근본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요청하건대 전민·어량·주즙을 전과 같이 돌려주소서.”
라고 하였다. 제서를 내려 이르기를,
“전시(田柴)는 이미 삼보에 바쳐 도로 찾아 들이기는 어려우므로, 마땅히 공전(公田)으로 원래의 액수대로 〈경창원(景昌院)에〉 주고 그 밖의 것은 아뢴 대로 따른다.”
라고 하였다.
경인. 제서(制書)를 내려 이르기를,
“수년 이래 비와 가뭄이 고르지 못하고 재변(灾變)이 자주 나타나니, 이는 모두 형벌이 잘못되어 원망과 분노를 초래한 것이다. 만약 위로 하늘의 꾸지람에 답하고 아래로 백성의 바람을 위로하려면, 마땅히 죄와 형벌을 너그럽게 하고 자신을 반성하며 덕을 닦아야 한다. 개경과 서경의 문무관과 남반 관원, 이속(吏屬)으로 죄를 범하여 강직(降職)되거나 퇴출(退黜)된 자가 있거나, 여러 주(州)·부(府)·군(郡)·진(鎭)의 장리(長吏)와 장교로서 죄를 범하여 파출된 자가 있으면, 담당 관청은 그 경중을 참작하여 종전대로 서용하라. 아첨하고 간사하여 다시 사죄(私罪)를 범한 자는 이 예에서 제외하며, 공사죄의 도형[公徒]과 민사죄의 장형[私杖] 이하는 용서하여라.”
라고 하였다.
8월 을사. 송(宋) 상인 황문경(黃文景)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왕이 탐라(耽羅) 및 영암(靈巖)에서 재목(材木)을 베어 큰 배를 만들어 장차 송(宋)과 통하려고 하니,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에서 아뢰기를,
“국가가 거란[北朝]과 우호를 맺어 변방에 급변이 없고 백성은 삶을 즐기니, 이같이 나라를 보전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지난 경술년(1010)에 거란(契丹)이 문죄서(問罪書)에 이르기를, ‘동으로 여진(女眞)과 결탁하고 서로는 송과 왕래하니, 이는 무엇을 도모하는 것인가’라고 하였습니다. 또 상서(尙書) 유참(柳參)이 사신으로 갔을 때 동경유수(東京留守)가 송[南朝]과 사신을 통한 일을 물었는데, 싫어하고 시기함이 있는 듯하니 만약 이런 일이 누설되면 반드시 틈이 생길 것입니다. 또 탐라는 땅이 척박하고 백성이 빈곤하여, 오직 해산물과 배 타는 것으로 집안을 경영하고 생계를 도모하고 있습니다. 지난 해 가을에는 목재를 베어 바다 건너 사찰을 새로 창건하여 피로가 이미 쌓여 있으므로, 지금 또 이 일로 거듭 괴롭히면 다른 변이 생길까 두렵습니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문물과 예악이 흥행한지 이미 오래며, 상선이 왕래가 끊이지 않아 진귀한 보물들이 날마다 들어오니, 중국(中國)에 대하여서는 실로 도움 받을 것이 없습니다. 만일 거란과 영원히 국교를 끊지 않으려면 송과 사신을 통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라고 하니, 왕이 이를 따랐다.
9월 기사. 초하루 충주목(忠州牧)에서 새로 조성(雕成)한 『황제팔십일난경(黃帝八十一難經)』·『천옥집(川玉集)』·『상한론(傷寒論)』·『본초괄요(本草括要)』·『소아소씨병원(小兒巢氏病源)』·『소아약증병원(小兒藥證病源)』·『일십팔론(一十八論)』·『장중경오장론(張仲卿五臟論)』 등 99판(板)을 바치니, 조서를 내려 비각(秘閣)에 비치하게 하였다.
을해. 거란(契丹)에서 동경회례사(東京回禮使)로 검교좌산기상시(檢校左散騎常侍) 야율연영(耶律延寧)이 왔다.
겨울 11월 경오. 제서(制書)를 내리기를,
“정종(靖宗)의 혼당(魂堂)에 있는 금은 기명(器皿)과 거란[北朝]에서 조제(弔祭) 예물로 보낸 비단으로 대장경(大藏經)을 새로 만들어서 정종의 명복을 빌라.”
라고 하였다.
을유. 동여진(東女眞)의 유원장군(柔遠將軍) 다로(多老) 등 22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12월 정유. 초하루 거란(契丹)이 연주자사(筵州刺史) 곽재귀(郭在貴)를 보내 왕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동여진(東女眞)의 회화장군(懷化將軍) 이동화(尼冬火) 등 26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니, 각각 작위를 높이고 물품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윤12월 병자. 동여진(東女眞)의 영새장군(寧塞將軍) 고도달(古刀達) 등 50인이 와서 준마(駿馬)를 바쳤다.
병신. 그믐 일식(日食)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