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인도 등 신흥국의 성장으로 글로벌 산업지형이 크게 변하고 있다. 철강, 조선, 석유화학 등 주요 산업의 중심이 신흥국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으며 자동차에서도 중국은 2009년부터 세계 최대의 생산국으로 올라섰다. 전자제품에서 중국은 세계 생산 30%, 소비 20%의 거대 생산 및 소비시장으로 성장했고 반도체 부문에서도 파운드리 업체를 중심으로 빠른 성장세를 보이는 등 고부가가치 산업의 경우에도 가속도가 붙고 있다.
신흥시장으로 산업판 이동은 더 가속될 것이다. 중국과 인도 등 신흥국 기업들은 자본력을 바탕으로 선진국 기업들을 인수합병하면서 기술과 브랜드, 심지어는 유통망까지 일거에 흡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또한 신흥국들은 기술역량을 강화하고 선진국과의 격차를 빠르게 좁히기 위해 정부 주도로 산업클러스터 구축과 인재 확보 등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중국의 경우 2009년 한해 해외로 나간 유학생이 22만, 한해 귀국한 유학생도 10만 명에 이르는 것에서 보는 것처럼 글로벌 네트워크와 지식을 겸비한 인재 풀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또한 미래 신성장 산업이라고 할 수 있는 전기자동차, 신재생 에너지, 바이오나 나노기술 응용산업 등에서 신흥국은 선진국과 거의 동일한 선 상에서 출발하고 있다. 막대한 자본력과 광대한 시장을 등에 업고 거센 도전을 펼치고 있다.
한국이 선진국과 후발 신흥국 사이에 낀 넛크래커 위기라는 말이 나온지 여러 해가 지났지만 한국경제의 위상은 그동안 더 높아져 왔다. 넛크래커의 경고가 기우가 아니었나 할 정도다. 그러나 최근에 올수록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의 압력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고 가깝게 밀려오고 있다. 한국의 넛크래커 위기는 이제부터일지 모른다.
< 목 차 >
Ⅰ. 주요 산업별 산업 판도의 변화
Ⅱ. 향후 산업 판도 변화의 가속 요인
Ⅲ. 넛크래커 위기는 이제부터?
올해는 어느 때보다 세계 경제에서 중국 등 신흥국들의 부상이 실감 있게 다가온 한 해였다. GDP 규모 면에서 중국이 일본을 추월하기 시작했고, 국제적인 발언권과 영향력 면에서도 중국은 미국의 위상을 위협하며 다른 나라들을 압도하는 모습이다. 서울 G20을 통한 IMF 쿼터의 조정이 선진국에서 신흥국으로의 파워 이동을 웅변하고 있다.
중국과 인도를 비롯한 신흥국은 글로벌 산업 지형에서도 큰 지각 변동을 일으키고 있다. 중국은 일반 저가 제품뿐 아니라 높은 수준의 연구개발이 필요한 하이테크 제품에 대한 영향력을 높여가고 있다. 우주항공, 컴퓨터, 의약, 과학 기기 등 제품들에 대한 수출량을 살펴보면, 2000년 중국은 미국의 1/4 수준이었지만, 2005년을 지나면서 미국을 추월하였고 이제는 그 격차를 더 벌리고 있다. 2008년 기준으로 이들 품목에서의 전세계 수출 중 중국제품의 비중이 1/5을 차지하고 있다. 자체 완성이건 가공 조립이건 이들 하이테크 제품 다섯개 중 하나는 중국을 거친다는 이야기다.
인도는 아직 제조업이 약한 편이다. GDP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16~17%에 머무르고 있다. 그러나 인도도 제조업에 대한 투자와 육성에 적극 나서고 있다. 인도는 2005년 100% 외국인 직접 투자가 허용되는 ‘경제특구법’을 제정하고, 2006년부터 경제특구에 투자한 기업들에게 감세 혜택과 통관 서비스를 제공하는 등 적극적으로 투자 유치에 나서고 있다. 2006년 이전 19개에 불과하던 경제특구가 2010년 상반기에는 750개에 이르고 있다. 인도 상공부와 인도 중앙은행의 자료에 따르면, 투자 금액도 신생 특구에 집중하여 2009년 말 기준으로 1조 3,450억 루피로, 2006년 이전 경제특구의 10배 가량이나 되었다. 또한 경제특구에서의 수출은 2005년까지 인도 수출액의 5% 미만이었지만, 2007년 10%를 넘었고, 2009년에는 전체의 26%를 차지할 정도로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Global Insight는 2020년경 인도가 독일과 일본을 추월하고, 2030년에는 중국과 미국에 이어 세계 3위의 경제 대국으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신흥 시장 전문가인 라비 라마무티(Ravi Ramamurti)는 지난 18세기 중국과 인도가 전세계 산업 생산량의 33%와 25%를 차지했던 경험을 환기시키며, 향후 이들 시장의 잠재력을 강조하고 있다.
Ⅰ. 주요 산업별 산업 판도의 변화
이제까지는 선진국이 새로운 기술과 산업을 만들면, 후발 국가들은 선진국을 따라가면서 자국의 산업 성장과 경쟁력 강화를 추진하는 모습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막강한 자금력과 인재들을 가진 거대 신흥국들이 빠른 속도로 성장함에 따라 산업 주도권의 변화 패턴이 과거와 달라질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이하에서는 철강, 조선, 자동차, 반도체 등 우리나라의 주요 제조업종을 중심으로 선진국과 신흥국간 산업 주도권 변화 흐름을 살펴본다.
1. 철강 : 중국과 인도로 주도권 이동 중
철강 산업의 주도권은 중국과 인도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중국은 1996년 이미 세계 1위의 생산국으로 등극했다. 19세기 중엽까지 철강 생산은 영국이 주도했다. 20세기 중반까지는 미국이, 이후 1990년대까지는 일본이 세계 최대의 철강 강국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1990년 4위에 머물던 중국은 자국의 경제 성장과 함께 철강 수요가 빠르게 늘어나면서 생산을 급속히 확대하여 왔다. 인도 역시 자국 내의 철강 수요와 풍부한 철광석을 기반으로 2000년부터 생산 10위권에 진입하였고 현재는 5위권의 국가로 부상했다. 그 위로는 중국, 일본, 미국, 러시아 등만이 있을 뿐이다. 철강 산업 전문가들은 2015~2030년 사이 중국과 인도가 세계 철강의 주도권을 더욱 확실하게 장악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중국과 인도는 기술과 설비 경쟁력이 다소 부족할 뿐 경제 성장 잠재력이 높고, 철광석과 석탄 자원이 비교적 풍부하여 철강 산업이 급성장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하지만 철강 산업에 있어 변수는 남아 있다. 2006년 합병한 아르셀로-미탈을 필두로 일본의 신일철, JFE, 포스코, 상해보강 등 5개 기업의 시장 점유율은 모두 합해 20%도 안 된다. 1위 아르셀로-미탈의 조강 능력이 연산 1.2억 톤이며 2위권 기업들의 3~4배 수준이다. 반면, 주요 원료를 공급하는 철광석 상위 3사와 원료탄 부문 상위 5사의 시장 점유율은 각각 78%와 66%이다. 주요 수요 부문인 자동차의 상위 5개 기업 점유율은 51%에 달한다. 제철 부문의 교섭력이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의미다. 따라서 인수합병 등 대형 짝짓기를 통해 덩치를 키우는 현상이 가속될 가능성이 높다. 주요 기업들의 합종연횡이 어디를 중심으로 펼쳐지느냐에 따라 주도권 전개의 향배가 판가름 날 것으로 보인다.
2. 석유/화학 : 자원 보유국과 거대 시장 보유국, 양대 체제로
석유정제의 경우 여전히 세계 시장의 수위는 셸, 엑슨모빌, BP, 셰브론 등 선진국 기업들이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자국 내 수요를 기반으로 중국의 시노펙, 페트로차이나, 브라질의 페트로브라스, 인도의 인디안오일, 릴라이언스 등의 기업들이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시노펙 만해도 2004년 매출액이 글로벌 상위 3개 기업의 1/4 수준이었지만, 불과 5년 뒤 2/3 수준으로 격차를 줄였다. 브라질의 페트로브라스 등 다른 신흥국 기업들도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석유정제 기업들이 지역 시장과 자본력을 기반으로 하여 규모를 확대하고 경쟁력을 확보한 점을 감안할 때, 신흥국 기업들이 시장 수위로 올라설 것이라는 예상은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기술 혁신의 여지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석유정제를 포함한 에너지 산업에서의 신흥국 시장의 영향력은 현재 선진국의 위세를 충분히 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BP나 엑슨모빌 등 선두권 기업들 대부분이 태양광 등 신재생에너지 등 새로운 성장 분야를 찾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도 현재 사업이 주도권이 신흥국 기업들에게로 넘어간 이후를 대비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세계 석유화학 산업은 다우, BASF, 리온델바젤, 미쯔비시화학 등 선진국 기업들이 주도해 왔다. 석유화학 부문은 앞으로 수요 시장과 자원보유 국가들이라는 양대 축을 중심으로 재편될 가능성이 높다. 원료 확보와 소비 시장에 대한 접근성이 경쟁력의 주요 원천으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주목할 흐름은 자원 확보의 축이다. 2010년 현재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하는 중동 국가들의 석유화학 제품 생산능력(에틸렌 기준)은 2,400만 톤 규모이다. 3,600만 톤의 동북아, 3,250만 톤의 북미, 2,700만 톤의 유럽 지역 다음으로 많은 양이다. 2000년 630만 톤 규모에 불과했던 것이 10년 새 4배 가까이 확충되었다. 단순히 원유를 생산해서 판매하는 것에 그쳤던 산업 구조가 정제 및 제품에 이르기까지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Tecnon 자료에 따르면, 2015년에는 3,300만 톤으로 북미와 유럽을 추월할 것이며 2030년경에는 이들의 2배 수준으로 생산능력이 높아질 전망이다. 결국, 석유화학 산업에서는 막강한 거대 시장을 배경으로 지닌 중국, 인도 등의 수요시장에 인접해 있는 기업과 사업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하고 있는 중동 기업들의 향후 행보가 산업내 경쟁 흐름을 좌우하게 될 전망이다.
3. 의약 : 선진국 주도 구조에 변화의 조짐
의약, 정밀화학 등 지식 집약형 산업의 경우, 아직까지는 선진국이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당분간 이러한 구도는 지속될 전망이다. 의약의 경우만 해도 화이자, 존슨앤존슨, GSK, 로쉬, 아벤티스, 노바티스, 머크 등 선진국 기업들이 서로 순위 다툼을 하고 있어, 신흥국 기업들이 끼어들 틈이 그리 많지 않은 상황이다. 시장 자체가 미국, 유럽 등 선진국 중심으로 형성된 데다, 신제품 개발에 대한 특허와 허가 등 규제가 엄격해 ‘그들만의 리그’로 이어지고 있다. 규제가 덜한 신흥국 시장은 오히려 중소 후발 기업들의 주 공략 시장으로 자리매김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변화의 싹은 자라고 있다. 중국과 인도가 바이오 및 의약 분야에의 투자에 속도를 붙이고 있는 것이다. 인도의 란박시(Ranbaxy)나 닥터레디스랩(Dr. Reddys’ Lab)과 같은 기업들은 이미 세계 시장에서 입지를 다져가고 있는 모습이다. 인도는 이미 합성의약품의 복제가 활성화되어 ‘세계의 제네릭 공장’으로 자리잡았다. 중국은 2009년 ‘바이오산업 발전촉진정책’을 통해 의약 분야를 위시한 바이오산업을 첨단기술 지주 산업으로 육성할 계획을 표명하였다. 각국의 경제 성장과 함께 의료 및 의약에 대한 수요가 급증할 것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신흥국 역시 과거 선진국처럼 자국 의약 산업의 대규모 발전이 수반될 것으로 예상된다.
4. 조선 : 한국에서 중국으로 이동 중, 부가가치별 제품 생산 양극화
조선 산업은 현재 한국에서 중국으로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다. 2차 세계대전까지는 미국이, 이후 50년대까지는 영국을 중심으로 한 유럽이, 그리고 60년대부터 90년대 중반까지는 일본이 산업을 주도했다. 90년대 중반 이후 조선 산업의 주도권은 한국 기업들에게 넘어왔다. 세계 10대 조선 기업에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 등 한국 기업들이 7개나 포진할 정도였다. 주목할 것은 나머지 세 기업이 모두 중국 기업들이라는 점이다. 중국 기업들은 2000년대부터 자국의 선박 수요를 바탕으로 급격히 성장하고 있다. 조선시장 조사기관인 Lloyd의 자료에 따르면, 2008년에는 수주 점유율 33%로 43%의 한국에 이어 2위로 부상하며, 14%의 일본을 가볍게 제쳤다. 2010년에는 수주잔량 기준으로 근소한 차이이긴 하지만, 중국이 한국을 따돌리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과거 한국과 최근 중국의 성장은 정부의 육성과 개입이 주효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국은 1980년대까지는 정부의 적극적 육성을 통해 기반을 닦고 1990년대 이후 시장 경쟁을 중심으로 싼 값에 수주를 따내면서 기업들이 성장하였다. 중국은 현재 정부가 영업이나 설계까지 배분하는 등 아직까지는 정부 주도의 성장을 추구하는 모습이다. 정책지원 속에서 가격 및 기술 경쟁력을 갖추게 되면 우리나라 조선산업에 대한 위협이 현실화 될 가능성이 크다.
조선 산업에서 군함, 크루즈, 아이스탱커, 드릴쉽 등 고부가가치 선박은 주로 일본 등 선진국이 차지하여 왔고 신흥 강국인 중국은 중소형 선박에 집중해 왔으나, 최근에는 탱커나 대형 컨테이너, LNG선 등으로 진출 분야를 급속히 확대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은 초대형 블록 공법, 수중 접합 공법, 탠덤 침수 공법 등 기술 혁신을 통해 중국의 추격을 뿌리치고, 일본과의 기술 격차를 줄이는 노력으로 중국의 도전에 대응하고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중국이 외형 성장뿐 아니라 축적한 경험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혁신 기술 분야에서까지 강국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인다.
5. 자동차 : 신흥국 약진 현상 뚜렷
자동차 산업은 선진국 기업들이 주도하는 가운데 중국 등 신흥국의 약진이 시작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과거 독일에서 미국의 디트로이트로, 다시 일본으로 옮겨간 산업의 축이 이제는 중국으로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다. 도요타, 폭스바겐, 지엠, 포드, 다임러크라이슬러, 혼다 등 기존 전통 기업들이 서로 각축전을 벌이는 동안 중국의 제일기차, 상하이차 등이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중국은 2009년 1,300만 대 이상을 기록하며 이미 최대 자동차 생산국으로 올라섰다. 2000년만 해도 미국, 일본, 독일, 한국 등에 뒤졌지만, 불과 10년도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내로라 하는 자동차 강국들을 모두 제친 것이다. 물론 브랜드나 기술력 측면에서는 중국이 아직까지 BMW, 아우디, 렉서스 등 선진국 기업들의 아성을 무너뜨릴 만큼 위협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생산에 이어 최대 소비 시장까지 중국이 차지한 이상, 앞으로 전개될 자동차 산업의 모습은 중국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브라질과 인도의 경우도 선진국들의 입지가 약해지는 틈을 활용해 꾸준히 생산 점유율을 높이고 있어 신흥국 진영의 도약에 힘을 보태고 있다.
하지만 자동차 부품의 경우는 예외적이라 할 수 있다. 보쉬, 컨티넨털, 존슨컨트롤즈, 덴소, 델파이 등 선진국 기업들이 여전히 득세하는 가운데, 아직까지 신흥국 기업들이 눈에 띄지 않는 상황이다. 신흥국 자동차 기업들이 부품에서부터 조립까지 자기완결적 구조를 형성하여 선진국 기업들과 경쟁을 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6. 반도체/전기전자 : 신흥국으로 이동 중, 가치사슬 분업형 혼재
반도체 산업의 경우 현재까지는 인텔, 삼성전자, 도시바 등의 기업들이 장악하고 있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중국 등 신흥국에 주도권이 넘어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2010년 현재, 인텔이 15%, 삼성전자가 그 절반 수준, 도시바가 다시 삼성전자의 절반 수준으로 상위 3개 기업의 점유율이 30%가 채 되지 못한다. 메모리 부문은 주도권이 미국,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넘어 와 있다. 메모리 분야에서는 삼성전자와 하이닉스가 수위를 다투고 있다. 비메모리 분야는 상황이 좀 다르다. 설계와 디자인 등 고도의 기술이 요하는 고부가가치 영역은 인텔 등 선진국 기업들이 단단히 지키고 있다. 대만의 TSMC라는 파운드리에서 제조의 상당 부분을 맡는다. 관련 기업간 글로벌 수직통합 방식의 협업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중국이 전세계 반도체의 41%를 소비한다는 점, 1990년대부터 일관되게 추진되고 있는 반도체 산업 육성 정책 등을 고려한다면 그 영향력이 높아질 것은 분명하다. 특히 반도체 설계 디자인을 받아 위탁 생산하는 파운드리 기업들의 성장이 놀랍다. 대만의 TSMC, UMC 등이 수위를 차지하는 가운데, 중국의 SMIC와 HH-NEC가 5위권에 진입해 있다. 중국 전자 제품 제조업과 동반하여 성장한 것이다. 중국이 외형적 성장에 비해 아직은 기술 수준이 낮지만 향후 격차를 좁힐 수 있는 여지는 충분하다. 왜냐하면 인텔이나 NEC 등 비메모리 기업들과 TSMC와 같은 파운드리 기업들이 합작의 형태로 중국에 진출해 있고 하이닉스 등 메모리 기업들도 이미 진출해 있거나 진출을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이를 통한 중국의 기술력 제고 가능성도 높다 하겠다. 인도 또한 내수 시장의 폭발적 성장과 함께 ‘Made in India, Made for India’를 내세우는 등 정책적으로 자국산을 장려하고 있어 반도체 산업에서의 새로운 거점으로 도약할 가능성도 있다. 특히 인도는 소프트웨어 설계 및 응용기술이 뛰어나 반도체와 같은 하이테크 기업들의 R&D 기지화가 진행되고 있기도 하다.
반도체는 자본도 자본이지만 높은 수준의 설계 및 제조 기술력이 필요한 산업이다. 자본이 아무리 풍부하더라도 함부로 뛰어들 수 있는 사업이 아니었기에 지금까지는 신흥국들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사례를 찾기 힘들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중국, 인도 등 신흥국 기업들의 급부상으로 말미암아 산업구도 상황이 달라질 가능성이 높다.
전기/전자 산업에서의 제품 생산은 이미 신흥국이 주도권을 장악한 상태이다. 선진국은 설계와 디자인, 연구개발, 마케팅 등에 집중하는 형국이다. 가치사슬 상의 역할 분담이 지역별로 나누어진 것이다. 기업간 상호의존성도 높아졌다. 제품 수명주기가 짧아지고, 부가가치가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나 컨텐츠 쪽으로 이동하자 경쟁과 임금 등의 환경이 달라진 것이 주요 원인이었다. 이에 따라 전자 기업들은 글로벌 차원의 생산 거점 네트워크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생산은 중국이었다. 시장조사기관인 Reed의 자료에 따르면, 중국의 전자 제품 생산은 2000년만 해도 전세계의 6%에 불과했지만, 이후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면서 2005년에는 16%를 넘어섰고, 2010년에는 30%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시장으로서 중국의 점유율 또한 가파르게 높아지고 있다. 2000년 5%였던 것이 2005년 15%, 2010년에는 세계 전자 제품 소비의 20%를 차지할 전망이다. 이와 함께 하이얼, 레노버, 하이센스 등 중국 토종 기업들의 성장 또한 주목할 만하다. 선진국 기업들이 주도하고 있는 핵심 부품이나 모듈, 소프트웨어 등의 영역까지 신흥국 기업들이 세력을 확장시키는 것은 이제 시간 문제라 할 수 있다.
7. 일반기계 : 선진국 주도, 부가가치 양극화
일반기계 산업은 앞선 산업들과는 다른 양상이다. 독일, 미국, 일본 등이 세계 시장을 오랜 동안 주도하고 있다. 아직 신흥국과의 격차가 좁혀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세계 일반기계 수출 시장은 독일이 17%, 미국이 13%, 일본이 10% 내외를 차지하는 3강 구도가 특징이다. 독일이나 일본은 일반기계 산업이 전 산업 흑자의 40%~60%를 차지할 정도로 기계 산업에서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한국은 2% 대 중반을 차지하는 수준이다. 한편, 중국이 범용 기계 중심으로 약진하고 있어 향후 귀추가 주목된다. 중국은 2000년대 초반 전세계 기계 수출의 4% 미만을 차지했지만, 현재는 2배 이상 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과정은 기계 산업의 부가가치가 기계 제조에서 설계나 서비스로 이동하고 있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고부가가치 기계와 서비스 부문은 선진국 중심으로 주도권이 형성된 가운데, 범용 기계를 바탕으로 한 중국의 급성장으로 인해 제조 부문의 부가가치는 더 낮아진 것으로 보인다. 향후 일부 고부가가치 기계류만 선진국이 보유하고, 다른 영역들은 중국 등 신흥국으로 몰릴 가능성이 높다.
Ⅱ. 향후 산업 판도 변화의 가속 요인
현재까지는 선진국은 기술 및 지식 집약형 혹은 고부가가치 사업 영역에서 강점을 보이고 있고, 신흥국은 노동집약형 영역을 주도하고 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의약, 자동차, 반도체 등 선진국 주도의 산업에도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향후 신흥국의 경쟁력 격차 해소 노력이 가시화 될 경우 이러한 산업에서도 현재의 양분 체제가 빠르게 흔들리면서 신흥국으로의 산업 쏠림 현상이 가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하에서는 산업 판도 변화를 촉진하는 주요 배경에 대하여 짚어본다.
1. 기술·브랜드 확보를 위한 신흥국 기업의 선진 기업 인수합병
우선, 신흥국 기업들은 자본력을 바탕으로 선진국 기업들을 인수합병하면서 기술과 브랜드, 심지어는 유통망까지 일거에 흡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중국과 인도를 중심으로 하는 신흥국들이 글로벌 인수합병 시장의 큰 손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금융시장조사기관인 딜로직(Dealogic)의 자료에 따르면, 올 들어 신흥국 기업들이 주도하는 인수합병 규모가 그 동안 수위를 차지했던 유럽을 제친 것으로 나타났다. 신흥국 기업들의 인수합병 규모는 올 3/4분기까지 5,757억 달러(약 670조 원)로 전년 동기 대비 3분의 2 이상 증가하였다. 같은 기간 유럽 주도의 인수합병은 5,502억 달러였다. 올 들어 신흥국들의 비중이 30%로 상승하여 유럽의 29%를 능가한 것이다.
유럽경제연구센터(ZEW)의 자료에 따르면, 중국은 2009년 2분기부터 1년 동안 외국 기업과 275 건의 인수합병 거래를 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최소 수백 만 달러를 넘는 대형 거래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중국 기업들의 인수합병이 과거 석유, 철광석, 석탄 등 원자재 산업에 치중했지만, 최근에는 기술과 브랜드 측면에도 손을 뻗고 있다. 중국 지리자동차가 스웨덴의 자동차 기업인 볼보를 인수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BYD가 일본 오기하라 자동차 금형 공장을 매수한 것이나, 선테크파워가 일본 최대 태양광 패널 기업인 MSK를 인수한 것도 좋은 예가 될 수 있겠다.
2006년 인도의 철강 기업 미탈이 당시 2위인 프랑스의 아르셀로를 인수하면서 세계 최대 제철 기업으로 등극하였다. 인도의 또 다른 철강 기업인 타타스틸은 영국과 네덜란드 기업들의 합작사인 코러스 그룹을 120억 달러에 인수하였다. 한편, 타타대우상용차의 가장 큰 주인인 인도의 타타 그룹은 재규어, 래드로버를 인수하면서 기술과 브랜드 모두를 한꺼번에 장악하는 행보를 보였다.
신흥국 기업들의 이러한 인수합병 움직임은 빠른 시간 내에 기술과 브랜드를 흡수하고 선진 시장 접근을 유리하게 가져가기 위한 포석으로 풀이된다. 즉, 선진국 기업들이 가진 지적 재산권과 신기술을 확보하여 기술 경쟁력을 높이며, 브랜드와 유통 채널을 통해 선진국 시장에 진출하려는 투자인 셈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피인수 기업을 보유한 선진국에게는 위협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자국의 기술이 해외로 유출되는 것은 물론, 생산 거점의 신흥국 이전이 확대되는 것을 크게 우려하는 것이다. 실제 지난 4월 일본 조사기관인 제국데이터뱅크는 17,000개 기업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하였는데, 78%의 응답이 중국이나 인도 등 신흥국에 의한 일본 기업 매수와 제휴가 일본 경제에 위협적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 기술 확보 및 산업 육성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신흥국들은 기술 역량을 강화하고 선진국과의 격차를 빠르게 좁히기 위해, 정부 주도로 산업 클러스터 구축이나 인재 확보 등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인도 IT/소프트웨어 인력의 경쟁력은 익히 검증된 바다. 방갈로르 지역의 소프트웨어 파크는 공인된 산업 클러스터라 할 수 있다. 인도의 IT는 인포시스(Infosys), TCS(TATA Consulting Services) 등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진 서비스 기업들을 배출하고 있다. 이들 기업은 미국, 유럽은 물론, 최근에는 아프리카통신업체를 인수하는 등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다. 또 다른 사례로 중국의 대표적인 IT 산업 클러스터라 할 수 있는 중관촌(中關村)은 제2의 실리콘밸리를 넘볼 정도이다. 개혁 개방 이후 중관촌 지역에 하이테크 산업발전구(高新技術産業開發區)가 설립되면서 지역혁신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 여기에는 현재 북경대, 청화대, 인민대, 북경이공대 등 중국 최고의 대학들이 있다. 또한 중국과학원, 기계과학원을 비롯하여 에릭손, 듀퐁, 벨 등 기업의 연구소도 자리하고 있는데다, 산학 연계형 벤처기업들도 대거 설립되어 명실상부한 첨단 기술 클러스터로 성장하고 있다. 중관촌은 북경, 천진 등을 잇는 환발해 지역 산업 클러스터의 허브 역할도 겸하고 있다.
중국은 또한 ‘천인(千人) 계획’이라는 고급 인재를 유치하는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이미 미국, 유럽 등 해외에서 학위를 하고 때로 창업도 한 고급 인력들을 전폭적인 지원으로 직접 끌어들이고 있다. 이들의 상당 부분은 중국이 취약한 첨단 기술과 금융 부문의 인력들이다. 2009년에는 해외로 나간 유학생이 22만 명이 넘었는데 한해 동안 유학 후 귀국한 유학생도 10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기술 경쟁력에 대한 중국의 앞날을 가늠할 수 있다. 고성장을 하는 중국에서의 기회에다 정부의 환대까지 겹치면서 중국으로 향하는 고급 인재들은 갈수록 증가할 전망이다.
3. 동일 출발선 상의 미래 신성장 산업
미래 신성장 산업이라고 하는 전기자동차, 신재생 에너지, 바이오나 나노 기술 응용 산업 등은 선진국이나 신흥국이 거의 동일한 출발선 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의 비야디(比亞迪)는 2011년부터 미국과 유럽 시장에 자사의 전기차를 판매할 계획이다. 지난 5월 비야디는 중국 시장을 노리는 다임러와 조인트벤처까지 만들어 기술력을 배가하려 하고 있다. 중국은 전기차에 대한 정부의 구매 보조금 지원책의 윤곽이 드러났고, 광동성 등 지역별로 기술 개발 및 전기차 인프라 구축 관련 프로젝트가 활발하게 계획, 추진되는 등 발 빠른 모습이다. 중국은 기술력에서도 선진국과 그리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이는데다 막대한 수요를 등에 업고 있어 향후 전기차 시장을 주도할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신재생에너지 분야에서도 중국이나 인도 기업들의 성장이 눈부시다. 태양광 산업의 경우 불과 3~4년 전만 해도 샤프와 교세라가 일본과 독일 시장의 성장에 힘입어 태양광용 셀 생산을 주도하였다. 하지만 중국의 선텍(Suntech)이 어느 샌가 생산량 수위에 올라섰다. 2009년에는 퍼스트솔라가 미국의 태양광 산업 육성 정책에 힘입어 선텍을 앞질렀다. 과거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등 유럽 시장 중심의 성장에서 미국과 중국이 대규모 발전 시설을 확충하면서 빠르게 주도권을 가져오고 있다. 이제 막 성장 국면에 접어들고 있는 태양광 산업에서의 승자가 누가될 지를 가늠하기는 지금으로서는 어렵다.
풍력 산업에서는 미국, 덴마크, 스웨덴 등 선진국들과 최근 정부의 지원으로 급부상한 중국, 인도와의 각축전이 벌어지고 있다. 뒤늦게 출발한 중국은 2009년 한 해 동안만 13GW의 신규 풍력 발전 용량을 구축해, 전세계 신규 용량의 34%를 차지하였다. 누적 발전 용량에서는 2009년 기준 25GW 규모로 미국, 독일에 이어 세계 3위권이다. 중국 풍력 발전 시장에서 골드윈드(金風), 화뤠(華銳), 동치(東汽) 등 중국 기업들이 성장하면서, GE, 지멘스, 베스타스와 같은 글로벌 기업들의 입지가 빠르게 축소되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인도의 경우 수즐론, 타타파워 등이 자국 시장은 물론 세계 시장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특히 아시아 1위, 세계 5위권의 풍력 발전 설비 기업인 수즐론은 2006년 벨기에의 풍력발전기용 기어박스 기업인 한센을, 2007년에는 독일의 리파워(REPower)를 인수하는 등 해외 기업들을 적극적으로 인수하면서 핵심 기술을 확보한 것이 성장의 주 요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R&D센터는 유럽의 인수 기업들을 중심으로 운영하고, 생산은 인도 내에서 주로 하고 있다. 이미 수즐론은 풍력발전 관련 핵심 부품들 모두를 자체 생산하고 있으며, 호주, 중국, 유럽, 미국 등지에 지사를 두는 등 글로벌 기업으로의 면모도 갖추고 있다.
바이오나 나노 기술 응용 분야는 본격적인 상업화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없기에 우열을 논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선진국이 심혈을 기울이는 이상으로 신흥국들이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나노 분야의 경우 중국과 인도, 러시아 모두 ‘나노 강국’을 목표로 연구개발 프로젝트와 응용 산업 발굴을 서두르고 있다. 중국은 세계 최초로 나노 기술과 관련한 국가 표준 제정에 나서기도 하였고, 인도와 러시아는 기초 과학 분야의 강점을 최대한 활용하려는 움직임이다. 게다가 러시아는 2007년 45억 달러를 들여 국영 나노기술개발회사(로스나노, Rosnano)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Ⅲ. 넛크래커 위기는 이제부터?
포춘 글로벌 500에 오른 기업들 중 신흥국 기업들이 빠르게 늘고 있다. 중국은 2004년 16개였지만 5년 뒤 46개로 늘었다. 브라질은 3개에서 7개로, 인도는 5개에서 8개로, 러시아는 3개에서 6개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 우리나라 기업들은 11개에서 10개로 줄었다. 단순히 숫자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한국이 선진국과 후발 신흥국 사이에 낀 넛크래커 위기라는 말이 나온 지 벌써 여러 해가 지났다. 그러나 세계 경제에서 한국의 위상은 더 상승했다. G20 주최국으로서 국민적 자부심 또한 높아져 있고, 도저히 따라 가지 못할 것 같았던 일본이 한국 배우기를 공공연히 언급하고 있다. 넛크래커의 경고가 한낱 기우였던 것 아닌가 생각될 정도다. 한국이 선진국 시장을 조금씩 잠식하면서도 우리의 주요 시장을 중국 등 신흥국에게 크게 뺏기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선진국과 후발 신흥국 사이의 시장을 누려온 측면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선진국 시장을 뚫기는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최근에는 IT 산업에서 스마트폰, 클라우딩 컴퓨팅 등의 새로운 흐름에 대응하는 국내 기업들의 준비가 뒤져 불과 수년 전에 비해 입지가 크게 좁아졌다. 전자, 화학, 조선, 자동차 등 신흥국과의 전선에서는 중국의 압력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고 가까이 밀려오고 있다. 인도 등도 여기에 가세하고 있어 우리의 입지가 더욱 좁아지는 느낌이다. 지나간 얘기 같았던 넛크래커의 위기론이 더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한국의 넛크래커 위기는 이제부터가 시작일지 모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