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라 시인>>
<<박미라 시인의 양력>>
*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남.
* 1996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당선
* 시집 : 『서 있는 바람을 만나고 싶다』, 『붉은 편지가 도착했다』, 『안개 부족』, 『우리 집에 왜 왔니?』,
『이것은 어떤 감옥의 평면도이다』, 『울음을 불러내어 밤새 놀았다』.
*수필집 : 『그리운 것은 곁에 있다』.
* 세종우수도서선정(2015년)
* 문화예술진흥기금, 충남문화재단 기금, 아르코문학창작기금 받음.
* 대전일보 학상, 충남시인협회상, 서귀포 문학상 수상.
* 現)나사렛대학교 평생교육원출강
<<박미라 시인의 시>>
돌과 새의 행간/박미라
그가 쓸개에서 꺼낸 붉은 돌 하나를 보여 준다
어둠속에서 태어난 작은 돌은
뱉어낸 지 오래인 객혈처럼 조금 적막하다
이 일을 정말 그가 계획했을까
제 몸을 조금씩 돌로 만들어, 잘게 부수어,
은근 슬쩍 지워지고 싶었을까
불붙지 않는 마그마를 품은 채 너무 오래 걸었다
분별없이 떨구는 눈물처럼
한 방울 담즙 따위로 무게를 덜어내는
지상의 나날들은 참혹하거나 지루하여
잔뜩 웅크린 채 돌의 시절을 부르고 있는
그의 기억이 맞는다면
노을 빛깔의 날개가 돋을 것이다
죽은 새처럼 보이는 저 돌을 힘껏 던지면
던지는 쪽으로 날지 않고
허공을 맴돌다 아무도 모르는 어떤 별로 돌아갈 것 같은데
사라진 쓸개에 대하여 발설치 않을 것을 혼자 다짐하며
문 앞에서 돌아본 병상 위에
붉은 새 한 마리가 깃털이 빠진 자리를 더듬고 있다
금강석처럼 반짝이는 부리를 가진 미기록 맹금류였다
검은 피 한 잔/박미라
감기약을 달인다
바짝 마른 약재를 불과 불꽃의 경계에 올려놓고
물의 비등점을 자꾸만 밀어낸다
끓는 물처럼 버글거리는 머리를 흔들며
달여서 만든 것들의 이름을 외워본다
진액.진심.진정.진국.
풋것일 때의 향기를 그대로 풍기는
저들도 오래 왔을 것이다
초록이거나 붉은 혹은 노랑이었을지도 모르는 것들의
고혈을 쥐어짠다
죽음 속에 싸 두었던 검은 피 한 잔
그 구구한 기록을 훔친다
감싸쥔 잔 속에서 잔물결이 인다
바람과 햇살의 뼈마디들이 한데 섞여 흔들리고 있다
목숨의 절정을 함께 견딘 것들끼리
딱딱하게 굳은 어깨를 툭툭 친다
몸 섞어 부비는 것으로 묵은 안부를 끝낸다
손바닥이 따듯해진다
바람 잦아들고 햇살 고요하다
열에 들떠 바작바작 타 들어가는 입술을 약 그릇에 댄다
뜨거움으로 뜨거움을 짚어가는
검은 피, 한 잔의 경건한 의식이다
조각보 연대기/박미라
이것은 어떤 감옥의 평면도이다
꽃이었다가 물이었다가 타오르거나 가라앉는
모서리들의 힘으로 간혹 눈부시다
빈틈없이 맞물린 도형들 사이를 비집어
붉은 모란 한 송이를 꽂는다
향기 없는 꽃인 걸 잠깐씩 잊으며
노랑 옆에 초록을 두는 진부한 속임수
스물이, 마흔이, 노랑빨강파랑이,
저 눈부신 것들이 꾸려가는 감옥의 나날들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반복이 문득 끊기는 귀퉁이
모란은 자라서 가시나무가 되고
감추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갇혔다는 걸 알 때쯤
이 평면도의 출입구는 봉쇄될 것이다
도대체! 조각보 한 장에 다 들어가는 일생이라니
짖지 않는 개/박미라
낯선 행성에 불시착한 목숨처럼
목소리를 양식 삼아 연명하듯 짖지 않는 개
잠꼬대 속에서 꺼내는 외마디가 아니었다면
저 개의 실어증을 까마득 몰랐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 사랑을 앓는 증상은
모두 다르겠지만
십년이 넘도록 고쳐지지 않는 저 개의 실어증은
어쩌면 스스로 작정한 형벌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주 잊지는 않으려는 말이 있는 듯
비명처럼, 울음처럼, 잠꼬대를 한다
버린 적도 없고 버려진 적도 없는 이별 앞에서
스스로 제 말을 삼키고
짖지 않는 개 한 마리 십년째 내 집에 머문다
믿지 않겠지만,
들리지 않는 저 개의 비명이
내 입에서 튀어나오기도 한다
위패(位牌)/박미라
당신의 주소를 새로 장만했다
이제 당신은 내 허락 없이 아무 데도 못 간다
최신 유행의 글씨체를 배워 문패를 적는다
당신의 취향을 참고해서 하얀 집으로 결정했다
당신이 달력 귀퉁이에 기르던 새 한 마리도 데려왔다
그 새, 어디가 아픈가 조금 작아진 듯하다
당신의 목소리를 흉내 내서
—새야, 불러본다
들은 척도 않는 새 옆에서 혼잣말을 지껄인다
—문짝이 넓어서 답답하진 않을 거야
심심한 척, 무릎도 한번 굽혔다 펴 본다
하얀 집의 등기는 내 앞으로 해둔다
지금부터는 내가 보호자이다
당신을 새 집에 가두고,
기르던 새 한 마리 동거인으로 밀어 넣고
나는 내 집으로 간다
하늘이 어둑하다
뫼비우스의 띠/박미라
어머니를 낳을 수 없어서 딸을 낳았습니다
어머니가 되고 싶어서 딸을 낳았습니다
아침마다 머리를 빗겨주시는
떡갈나무 그늘을 옮겨다 주시는
어머니와 어머니 사이에서 나는
고아처럼 서럽습니다
딸을 낳으려다 나를 낳고 말았습니다
나한테 미안해서 울 뻔했습니다
이만하면 충분히 비겁합니다
안개 부족/박미라
백내장을 앓는 어머니 모시고 병원에 간다
그녀는 오래전부터 안개의 부족이었다
눈동자에 찍힌 안개의 紋章 아니어도 증거는 있다
새벽부터 밤중까지 쉬지 않고 돌아다니지만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안개 위를 떠다니는 것이 틀림없다
마른 논바닥처럼 먼지 풀썩이는 상심 따위도
그녀에게 기대면 금방 촉촉하게 젖어든다
사물의 경계가 지워진 짙은 안개 속에서도
매일 똑같은 자리에 밥상을 차리고 반듯하게 신발 벗어놓고
가족들의 귀가를 기다리는 그녀를
다른 부족이라고 의심해 본 적이 없다
몸속 어딘가에 안개의 늪을 품은 채
날마다 조금씩 지워지는 그녀
지워진 것들이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닌 줄 알지만
세상의 모든 모서리를 지우고 싶은 그녀
누군가가 재빨리 끼워 넣은 눈물쯤은 모른 척 넘기면서
흐린 수채화처럼 점점 더 아득해지는 그녀
나도 모르게 그녀의 안개 속으로 스며들어서
젖은 발자국 위에 엎드리고 싶은 아침
손때 묻은 햇살 한 줌 수줍게 꺼내 보이며
배시시 웃는 그녀
슬픔의 변천사/박미라
개양귀비 꽃을 보러갔다
아편이 되지도 못하는 씨방을 감싸고
꽃은 뜨거운 핏빛이다
한사코 핀다는 것은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비명인 줄 아니까
저 빨강을 고요히 바라보기로 한다
맵고 짜고 질긴 것들을 탐방하며
나를 탕진하던 날들을
개양귀비 꽃잎에 구구히 빗댄다
길가의 간판을 밤새도록 읽으며 베꼈던 이름들
개양귀비개다래개미지옥개살구개밥바라기그리고개새끼
저것들을 부르다 놓쳐버린 길들이 뒤엉켜
밤마다 가위에 눌리는데
울기 좋은 곳도, 울기 좋은 때도,
남들이 모두 차지했으므로
나는 그냥 팥죽솥처럼 끓기로 한다
마침내 슬픔이 따듯해졌다
울음을 불러내어 밤새 놀았다/박미라
한사코 뿌리친 것들이 아득해질까봐
천천히 걷는 봄밤이다
늙은 담벼락을 끝끝내 놓지 않는 담쟁이넝쿨 곁에서
오래 머뭇대는 봄밤이다
천 번을 계획하고 만 번을 망설인 월담(越-)을
해치우기 좋은 봄밤이다
이번 생에 꼭 한번뿐일 월담을 저지르다가 오도가도 못할 만큼 몸이 상해도
서럽지 않을 봄밤이다
아직 다 피지도 않은 복사꽃 냄새를 한주먹 얻어다가 함부로 낭비해도
죄가 되지 않을 것 같은 봄밤이다
바오밥나무 그림자에게 다녀왔다/박미라
그림자조차 비만인 삶이 있다
걷고 걷고 걸어도
닿을 수 없는 길을
걷고 걷고 걷다가
숨어들기 넉넉한 그림자를 만났지만
빈손을 주머니에 감춘 채
까무룩 잠든 시늉이나 하다가
거미로, 나비로, 바위자고새로,
칡넝쿨로, 지칭개로,
강물로, 는개비로, 돌풍으로,
어쩔 수 없으면 사람으로,
또 무엇 무엇으로 거듭된 생을
다 실토해도
저 침묵의 길 위에 이파리 하나 보탤 수 없겠지만
그래도 발설하지는 마, 천 년쯤 혼자 알고 있어,
세상이 다 아는 비의(悲意)를 간곡히 전하면서
발목 튼실하고 가시 촘촘한 엉겅퀴로 다시 오겠다고
그런 줄이나 알고 있으라고
저린 발 주무르는
몸집 큰 슬픔이 나란하다
낮달/박미라
수천 수만 번의 담금질을 견디면서
기어이 이름을 얻어야 하는가
까무룩한 정신 위로 체념이 엎드릴 때 마침내
옥양목 빛깔의 낮달 하나 내 몸에 떠오른다
어둠은 어디쯤에 머무르더냐
똑같은 담금질을 겪어내고도
너는 징이 되고 나는 낫이 되는구나
그래, 너는 거기서 천 년쯤 울어라
나는 여기서 옆구리 쥐어박는 어둠을 벨 것이다
행여 우리가 다음 생에 다시 한 번 살을 대고 만나도
여전히 나는, 낮게 웃는 낮달을 벼리고 있을 게다
향기나는 살점/박미라
가리비 조개의 살점을 삼킨다
처음 먹어보는 이 살점의 향기가 익숙하다
나는 내 기억을 믿는다
향기 나는 살점이라니,
꼭 한 번 그걸 허락한 적이 있었다
죽음의 순간에도 그러할 수 있다면
오래도록 향기로울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때 나는 어떤 왕국의 神이었다
백성이 단 한 명뿐이던 한 개의 신전으로 이루어진 나라
바람도 냇물도 경정을 외우고
모든 것이 오직 하나씩뿐이라 더욱 간절하던 나라
지금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전설이 된 나라
유리창 밖으로 갈매기 한 마리 솟구친다
술잔을 탁, 치는 목쉰 소리,
저 먼 티벳의 天葬에서 내 살점을 뜯어먹던 새 한 마리
전생의 내 몸을 데리고 여기 까지 와있다
그때, 내 살점에서도 혹 향기가 났는지 묻지 못한다
저 살점들의 떨림으로 술상이 흔들린다
참 오래된 눈물을 본다
소리/박미라
나무 책상 하나를 구했다
대패 자국이 선명하다
대패가 지나갈 때마다 풀려 나왔을 소리들이 들린다
숲에서 들었던 소리들이 아니다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그렇게 흘러가 는 소리들이 아니다
나무는 흘러가는 것들을 그냥 버려두고
제 몸 속 소리만 품어 키운 것이다
소리도 오래되면 곰삭아서
말갛게 걸러진 소리를 갖는다
새파란 대팻날 앞에서 조근조근 말할 수 있고
제 소리 담아 둘 옹이를 만들 줄도 안다
살점 저미는 소리를 고요하게 만들 줄도 알로
저며진 살점 속에 향기로 바꾼 소리를 쟁여 둘 줄도안다
저렇게 자세 반듯한 책상이 될 줄도 아는
오래된 소리
이제는 곰삭아 아무렇지도 않게 제 몸 내보이는
나무의 해탈을 본다
숱한 직립의 소리들 쪽으로 몸을 돌리는
목쉰 소리 하나
어떤 눈부심에 대하여/박미라
정육점 앞을 지나다가 물끄러미 본다
한 뼘도 안되는 작은칼로 돼지를 다루는 저 사내
참외를 깎듯 껍질을 벗기고 비계를 도려낸다
망설임 없이 살점을 헤집고 뼈를 발라낸다.
평생의 업보를 덜어내고도
여전히 검붉은 속살, 환청처럼 부르르 떤다.
풀입을 쓰다듬듯 스치는 손길 아래에서
속수무책으로 놓여 있던 차가운 주검은
순식간에 신선한 상품이 된다
방금 까지 제 몸뚱이였던 것들의 새 이름을 돌아보며
세상 쪽으로 내몰린 갈비뼈가
앙상한 허공을 찌르고 있다.
버려진 넥타이처럼 굼실대는 길을 따라
저 신선한 상품은 제 살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길은, 돌아가는 것들에게 언제나 너그럽다,
세상의 모든 길은 고향에서 비롯되는 까닭이다.
고향은 제 피붙이를 아무렇게나 버려두지 않는다.
풀 한 포기 바람 한 점까지도 뼈에 새긴다.
풀잎 하나에 칼날을 지우며,
바람의 살을 발라낸다.
목숨의 집 한 채가 고요히 허물어진다.
나는, 칼 든 부처의 얼굴을 밟으며 돌아선다.
붉은 편지가 도착했다/박미라
코피를 쏟았다
검붉은 꽃잎이 수북이 쌓인다
꽃잎으로 위장한 편지
핏빛 선명한 이 흘림체의 편지를
나는 읽어낼 수 없다
행간도 없이 써 내려간 숨막히는 밀서를
천천히 짚어간다
꽃잎 뭉개지는 비릿한 냄새 온 몸에 스멀댄다
기억의 냄새만으로도
노을이 타오르고 맨드라미 자지러지는 저녁을
맨발의 내가 엎어지며 간다
이 편지의 수취인은 내가 아니다
녹슨 우체통 속에서 늙어가는
뜯지 않은 편지를
먼지 자욱한 세상의 뒤쪽으로 반송한다
젖은 꽃잎을 떼어 빈 봉투에 부친다
어딘가의 주소를 적는다
여기는 백만 년 후의 무덤이라고 쓴다
집 잃은 아이처럼 헤매는 비린내를 거두어 담는다
붉은 글자들을 손바닥으로 쓸어 담는다
받는 이의 주소를 적는다
몸이 쓴 편지를 읽을 줄 아는 마음에게 라고 쓴다
백만년 전에도 마음이었던 그대
여기, 지워진 행간을 동봉한다
풍경/박미라
내 안에는 술이 흐르는 개울이 있다
먹물처럼 번지는 술 향기 속에 앉아 있으면
개울가 가시나무에 걸린 것들이 말을 걸어온다
너무 빨리 가는 시계이거나
두드려도 소리나지 않는 종이거나
시퍼렇게 날선 칼도 있다
심장이 주먹질을 해대거나 말거나
소리나지 않은 제 몸을 한사코 두드리는 저 종.
그것들을 안아보던 버릇대로 비틀대며 다가서면
진솔 무명 필을 자르듯 가슴을 긋는 시퍼런 칼.
넘어지는 등짝을 받아 안는 가시나무
이 나무가 너무 자라서 밖으로 가지를 뻗으면 어쩌나
우듬지 순을 잘라낸다
저 개울에는 붉은 포도주가 흐르고
칼을 위하여, 가시나무를 위하여
밥을 먹는다 술을 먹는다 나이를 먹는다
마지막으로
내 밖의 가시나무, 네 생각을 먹는다
네 생각은 언제나 너무 무거워
가시나무 뿌리를 찍는가
어디서 생나무 부러지는 소리 들린다
술이 흐르는 개울에서는
돌에도 칼에도 싹이 돋아서
자를수록 무성한 가시나무를 베고 또 베고
길, 나를 따라 가는/박미라
지압을 받는다
짚어가는 자리마다 우두둑 세월의 마디가 꺾이고
소리가 되지 못하는 신음 흩어진다
바람이 드나들던 길을 따라
유유히 스며드는 통증
시멘트 담장처럼 굳어버린 어깨를 타고 등짝으로 간다
죽기만 남은 칡넝쿨
온몸을 휘감는다 조여든다
한 번도 읽은 적 없는 족보를 뒤적인다
거기 적흰 내 이름이 낯설다
한때 나는
허공 속의 새였거나, 새의 길이었거나, 길 위의 먼지였거나,
내 안에 머물던 바람들 길을 잃고
구석으로 몰린다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물줄기를 찾는다
잠시 구름이 머물렀던 자리에
찢어진 족보가 뒹군다
저 칡넝쿨, 내 몸의 모든 물기를 마실 거라고 적혀 있다
깔깔깔 웃음 터진다 얼마나 좋아 물기 없는 내 몸.
다시는 눈물 흐르지 않겠네
어떤 칼날에 베어도 피 흐르지 않겠네
이대로 바스락바스락 말라서 문득 한 줌의 먼지가 되겠제
저 칡넝쿨
내가 돌아갈 길이었다
맨드라미꽃에 대하여/박미라
맨드라미 마른 꽃대를 건드리며
바람이 분다
푸른 정맥류의 흔적이
물증처럼 굳어 있는 그녀의 종아리
살아, 먼 곳을 그리워 한 죄
끊어진 강줄기처럼 토막 나있다
기억은 병을 깊어가게 할 뿐이라고
온 몸 잡아 흔드는 바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우수수 살비듬 일어난다
자신의 죽음을 깃발처럼 꽂아둔
저 끔찍한 기다림을 위하여
낡은 편지봉투를 흔들며 묵은 꽃씨를 찾는다
시간에 뜯겨 깡마른 손바닥 위로
주르르 쏟아지는 오랜 불면의 기록들
깊은 계곡을 건너 듯
손금을 따라 흘러내린다
천 번의 바람만 번의 햇살이 스쳐간 흔적을
낱낱이 기억하며 반짝이는
꽃의 눈동자들
잠깐, 지난 여름을 추억하는 사이 한 생애가 흘러
지워진 것들 위로 태양이 돌고
싹이 나고, 잎이 나고,
핏빛 주단 위에 촘촘히 적어 가는
또 한 번의 생애를
오늘을 꽃이라고 읽는다
사랑한다/박미라
무덤을 연다
줄기뿐인 식물처럼 가지런한 뼈마디
백 년만의 햇살을 알아보는 妖氣로운 이빨
그녀의 왼쪽에 축축하게 발효된 빈 棺이 있다
한사람의 이름이 머물던 거처
그녀가 이승에 다녀갔다는 물증이다
더 오래 기다리지 못한 까닭에 대하여
지금은 없는 자의 거처에 대하여
스스로에게 설명하고 변명한 백 년이었다
무너져 내린 턱뼈가 그걸 증명한다
정요하게 펼쳐둔 줄기는
빈 棺의 임자를 위한 비밀 지도이다
돈을 새김이 선명한 암호문이다
한 번도 고쳐 쓴 적 없지만
백년을 하루같이 읽또 읽어
더러는 지워지고 더러는 삭아내려
깊이를 감춘 강물처럼 고요하다
문득, 반짝이는 무엇을 본 듯하다
혹 그녀의 눈물은 아닐는지 생각다가
혼자 웃는다
破墓 의 끝자리
꽃 필 날짜 아득한 각시붓꽃 새싹이 흔들리고 있다
病, 혹은 기억에게/박미라
오래된 사원이다
받들어 모신 발걸음마다 무겁고 뜨거워서
모서리 둥글게 닳아버린 돌계단
휘청거리는 묵언정진을 마음으로 짚으며 올라간다
온 몸으로 버티는 단단한 기억들.
녹슨 풍경 소리를 빗겨간 바람이
비늘 벗겨진 목어의 뱃속에 알을 슬고,
실핏줄 선명한 나무기둥 틈새에 푸른 것들이 보인다
곳곳에 적힌 사원의 화두를 읽는 동안
천천히 퇴색하는 단청.
낙엽을 치우듯 굳은 살점들을 헤집고
바람 드나드는 직립의 돌계단을 허문다
불타버린 사원의 주춧돌처럼
적막한 등뼈 위로 바람 분다
반송할 주소가 없는 기억들이 통증의 이빨을 내보인다
이빨을 뽑아낸 자리에 새로운 주소록을 적는다
저장된 주소의 목록을 지우고 기억의 코드를 뽑는다
무너진 계단, 방목된 등뼈들,
지워진 길은 어디로 스며들어
또 다른 화엄 세상을 꿈꾸고 있는가
천년 전의 별에서부터 함께였던
익숙한 통증에게서
마른 풀 냄새가 풍긴다
몸 밖의 불/박미라
낯선 풍경이 새겨진 라이터를 본다
자신의 여정을 증명하는 때 절은 몸뚱이
헐거워진 뚜껑을 열면
깊은 어둠 속에 잠자던 얼굴처럼
화들짝 놀라며 불꽃이 솟구친다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몸 밖의 불.
이미 제 것이 아닌 그것을 다시 거두어들이며
저 혼자 불인 채로 견뎌내는 일
익숙해진 감옥 속에서 이빨 사려 물고
스타트라인의 육상 선수처럼 스스로의 폭발성에 놀라
터질 듯, 터질 듯 출렁거리며
공연히 한 곳만 노려보는 불의 집
억세게 움켜쥐던 손바닥의 습기를 지나
입숙 꽉 다문 기억처럼
태울 수 없는 것들을 지나
달구어 두드리면 제 몸을 버렸다가도
식으면 다시 또 다른 모습의 쇳덩이일 뿐인
변하지 않는 본질을 지나
구겨지고 버려진 목숨들을 황홀한 불꽃으로 돌려보낸
쓰레기장에서처럼
던져지는 것에 익숙한 것은
꽤 오래 세상을 떠돈 다음의 습관이다
거품처럼 잦아든 몸 밖의 불을 안고
작은 파도가 일렁인다
모르는 사이처럼,
헐거워진 뚜껑을 힘주어 닫는다
돌과 새의 행간/박미라
그가 쓸개에서 꺼낸 붉은 돌 하나를 보여준다
어둠 속에서 태어난 작은 돌은
뱉어낸 지 오래인 객혈처럼 조금 적막하다
이 일을 정말 그가 계획했을까
제 몸을 조금씩 돌로 만들어, 잘게 부수어,
은근슬쩍 지워지고 싶었을까
불붙지 않는 마그마를 품은 채 너무 오래 걸었다
분별없이 떨구는 눈물처럼
한 방울 담즙 따위로 무게를 덜어내는
지상의 나날들은 참혹하거나 지루하여
잔뜩 웅크린 채 돌의 시절을 부르고 있는
그의 기억이 맞는다면
노을 빛깔의 날개가 돋을 것이다
죽은 새처럼 보이는 저 돌을 힘껏 던지면
던지는 쪽으로 날지 않고
허공을 맴돌다 아무도 모르는 어떤 별로 돌아갈 것 같은데
사라진 쓸개에 대하여 발설치 않을 것을 혼자 다짐하며
문 앞에서 돌아본 병상 위에
붉은 새 한 마리가 깃털이 빠진 자리를 더듬고 있다
금강석처럼 반짝이는 부리를 가진 미기록 맹금류였다
우리 집에 왜 왔니?/박미라
—예지몽을 꾸었다.
뱀 한 마리가 내 이불을 덮고 천연덕스럽게 누워 있었다.—
등에 담이 들었다
급소를 공격당한 짐승이라니!
낯선 꽃뱀 한 마리 내 등짝에서 놀고 있다
불꽃 모양의 혓바닥에 불꽃 무늬 껍질을 입었다
닿는 것마다 태워버리던 전생을 버리고
뼛속까지 차가운 몸으로 다시 왔지만
불보다 뜨거운 독을 이빨 속에 고스란히 감추고 왔다
곁가지 많은 등뼈를 파고들며 웃는다
차가운 꼬리로 뭐라고 뭐라고 적는다
해독할 수 없는 등짝이 입을 딱딱 벌리며 운다
내가 풀밭이었니? 그러니까 내가 너의 그늘이었니?
아무래도 태울 수 없는 돌무지였니?
입 속을 맴도는 말들이 모래처럼 서걱이는데
열두 길 마음속을 헤집는 차갑고 길고 징그러운 인연
밤은 이미 깊고 불은 꺼졌는데
나란히 앉아서 아홉시 뉴스를 볼 것도 아니면서
손가락 데어가며 불씨를 살릴 것도 아니면서
속이 훤히 비치는 통증의 복면을 뒤집어 쓴 채
차갑게 웃는 뱀 한 마리
우리 집에 왜 왔니?
우리 집에 왜 왔니?
빵에 대한 맹세/박미라
아제르바이젠에서는 빵을 두고 맹세하는 풍습이 있다는데
신 앞에 무릎 꿇거나 하늘을 부르거나
머뭇머뭇 건네는 목숨쯤은 맹세가 아니라는데
아제르바이젠,
이름도 처음 듣는 낯설고 먼 나라에는
맹세로 부풀린 빵이 있다는데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빵에 키스하기 위하여
밀밭 고랑을 누비는 여자
노랑눈썹솔새 소리를 촘촘히 받아 적고
치마폭 가득 바람의 냄새를 가두는 여자
꾸역꾸역 밀려오는 저녁 속으로 맨발을 슬쩍 밀어넣기도 하면서
자신의 빵 속으로 수천수만의 길을 옮겨 가는 여자
밤마다 빵 속에 감춰둔 밀밭 지도를 남몰래 꺼내보면서
새로운 길을 따라가 보는 여자
밀밭에서 데려온 것들 중 하나가 까르르 웃음 터뜨린 날이면
황금색 껍질의 빵을 내놓는 여자
날마다 똑같은 빵을 굽고 똑같은 맹세를 거듭하지만
내일도 빵을 굽겠다고 맹세하는 여자
자신의 맹세를 확인하듯
천천히 빵을 뜯어먹는 여자
돌처럼 굳은 빵 덩어리를 징검다리 삼아 전생으로 놀러가기도 하는
발효를 끝낸 얼굴이 빵처럼 다정한 여자
아마도 몇 생을 두고 내 이름을 부를
지긋지긋한 여자
세상에는 생각만으로도 가슴 뻐근한 말이 아직 있어서
굳은 식빵 곁에서 입술 깨무는
먼 곳의 여자
도플갱어/박미라
45억 년 넘게 그렇게 계시다니! 무엇을 견주어 달을 말하겠는가 그러나 온갖 원망과 간절을 받아 안는 달빛 너머에는 터지고 패인 분화구 가득하다니
그렇다면 여기도 천지사방에 달이다.
봐라, 달! 저기 또 저기 달이 지나가신다 뛰어가신다 맨발의 달이 절름절름 가신다 마른 정강이를 내보이며 허공에 주먹질을 하며 달이 지나가신다 터진 치맛단을 추스르며 달린다 둥둥 떠 가신다 저기 유채밭에 달 떴다 광화문 네거리에 달 떴다 서귀포 앞바다에 달 떴다 방안에 부엌에 백화점에 달 떴다
어떤 달은 그믐도 아닌데 가슴 푹 파이고 어떤 달은 벙싯벙싯 혼자서 만월이다 견디다 견디다 해를 집어먹는 달도 있지만 뱃속에 만경창파를 들여앉힌 저 달은 도대체 뜨거운 게 없다
분화구라는 말에서 맨 처음 달을 떠올린다면 달그림자를 본 적 없는 청맹과니이다 돌아앉아 하염없는 어머니를 못 보고 지나친 멍텅구리이다
간간이 가랑비 흩뿌려 먼지를 재우고 수시로 생겨나는 분화구를 귀신같이 감출 줄 아는 저이가 달이다
만약 내가 거기 있다면, 45억 년쯤 하룻밤에 달려가실 수 있는 저 달 오늘은 있는 듯 없는 듯 낮달로 떠있다
세상이 환한 까닭 중에 으뜸이다.
모란 서사/박미라
부디,라고 적으면 바람 냄새가 나요
횃댓보에 심어둔 모란 아래 열두 살 단발머리가 나풀거려요
꽃들이 놀랄까봐 깨금발로 걸어요
이제, 나의 꽃들은 아득하고 아득한데
오늘은 부득부득 모란이 올라와요
억지로 열어본 폐가 안쪽에서 저 혼자 붉은 모란이
무너진 담장을 견디는 중인데요
눈부신 것들은 왜 눈물겨울까요
다시는 아무것도 서두르지 마세요
그래요 모란이 있었지요
없는 땅에 뿌리를 내리고
지독한 것들을 깨문 혓바닥이
뚝뚝 떨구던 것은
심장에서 꺼낸 무엇인 듯해서
새빨간 거짓말까지도 그리워 하기로했지요
마음을 에돌아 온 바람 한 점이 문득
이름을 묻는데
눈에 든 꽃잎을 모두 거두어 당신쪽으로 밀어두는
아직은 봄날
꽃이었거나 꽃 같던 이여
부디, 이 서사를 새겨 읽으시기를
흐르는 강물처럼/박미라
-개구리 증후군*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말하지 마라
나의 평정은 몸에서부터 비롯되었으니
무서리 내린 어느 저녁의 별빛이거나
눈빛만 닿아도 불붙는 한여름 땡볕이거나
가슴에 흩뿌리는 빗줄기 보다
더 많은 길 위에서도
나는 나를 사랑했다
오직 목숨으로만 지워지는 경계가 있다면
기꺼이 선정禪定에 들겠다
* 1882년 윌리엄 세지위크(William Thompson Sedgwick)는 자신의 논문을 통해 물 온도를 초당 0.002도씩 올리게 되면 2시간 30분 후에 개구리가 물에 그대로 남아 죽게 된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절정 그리고/박미라
바람 부는 날 산벚꽃 보러 갔다
아직 체온이 남아있을 꽃잎을 밟으며 갔다
늙은 산벚나무의 껍질이
햇살 아래서 눈물처럼 반짝였다
멀리 떠돌다 돌아온 아픈 손가락이 문고리에 매달리듯
어떤 꽃송이는 가지를 버려두고 옆구리를 열고 나왔다
꽃 피는 것들에게도 제각각의 길이 있는 것이다
굳이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절정의 순간 스스로 빛나는 몸을 확인하지 못했을 테지만
어떤 인연을 모셔 와야
저 전생의 秘書를 다 읽을 수 있을까
잠깐 다녀가는 무정에 대한 속죄인 듯
난분분, 난분분,
지는 것들의 배후가 빛난다
그러나
시작과 끝을 동시에 바라보는 일은
겨울비처럼 조금 서러운 경험이다
깊이에 대하여/박미라
상강 지나 무서리 내린 아침 남쪽으로 길 잡았습니다 그대와의 거리가 아슴아슴 하여 시린 손으로 가슴을 짚어봅니다
작별을 예감하는 그대의 노여움처럼 찬비가 뒤 쫒아옵니다. 오래전 받았던 소식이 붉은 나뭇잎을 사칭하며 발목을 깨물고 손톱 긴 바람이 얼굴을 할큅니다. 어디에도 깃들지 못하는 새의 영혼인 듯 나는 여전히 정처 없습니다
스스로 허물고 돌아선 것들의 안부를 어디다 물어야 하겠습니까? 세상이 천둥이라고 명명한 저 소리가 허물어지는 것들의 비명이었다는 걸 짐작할 뿐입니다
다가서면 살 속 깊이 파고 들 듯 시퍼런 움벼들이 텅 빈 논을 지키고 있습니다 더러 떨어진 낱알이 있는지 깃 검은 새들이 무리지어 다녀갑니다 몸이 텅 비어도 마음에 남는 것들이 있다는 걸 믿기로 합니다 그러나,
깊이 더 깊이 한 생각을 파묻어 보려고 무른 땅을 수소문 합니다
지금 여기는 모과 향기 한결 깊어지는 중이어서 슬픔이 그윽해 지기도 합니다 첫얼음 잡히는 명징한 아침이 오면 탱자나무 울타리에 마음을 널어두겠습니다
붉은 맨드라미 두어 송이 옮겨둔 그대의 창문에 햇빛 어룽이기를 바랍니다
민달팽이 略史/박미라
모란이 피었다고 수런대는 담장 아래
꽃핀 길을 에돌아 온 민달팽이 한 마리
걷다가, 기다가, 졸다가,
꽃핀 것들조차 벽이라고 읽는 기구한 풍경이
와우각상( 蝸牛角上)의 난전을 기웃대는데
한 칸 누옥을 찾아 몰려가는 발자국들로
길은 점점 넓어지고
없는 길을 만들며 흘러가는 저 맨몸은
그늘로 빚었다는데
멀찌감치 뒤쳐졌으니 발길에 차일 걱정은 없겠지만
깃드는 곳마다 집이 되는 목숨이 무거워
해일처럼 솟구치는 멀미에
머리를 짚다가, 침을 뱉다가,
지천으로 꽃핀 유월을 건너간다
술잔을 중심으로/박미라
붉은 포장마차의 시간을 곁눈질 한다
여기서는 노을이 새우젓보다 헐값이다 그러나
노을에 취했다는 건 혼자서도 쑥스러워
모르는 사람처럼 스쳐갈 눈발이나 기다리는데
안주를 시키지 않은 것은 치명적인 실수다
흔들리거나 일그러진 것들에게 술을 권하려면
내장까지 깜박 속일 안주를 곁에 두어야 한다
말하자면 세상에는 없는 이름을 불러본다거나 하는 것이다
펄펄 끓는 국물이 다 식을 때까지 앉아 있다가
특별한 이야기도 없이 돌아서는 것은
울음을 깨물던 이빨이 부러졌거나
더 이상 기다릴 이름이 생각나지 않기 때문이다
마른 백일홍 꽃잎 같은 후회가 잠깐 다녀간다
헤어진다는 것은 그리워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죽음보다 지독한 형벌을 잘도 만든다
어머님 전 상서/박미라
온종일 기웃대는 명지바람 기척에 눈자위 스멀댑니다
어머니, 제발 조용히 해주세요
앵두꽃 피는 소리 못들을 뻔 했습니다
그럼요, 저도 다 짐작 합니다
저 명지 바람에게도 무거운 것들이 있을 테지요
‘엄마가 많이 아프다’
그 말씀도 그만 접으세요
비 오는 줄 알고 내다보다가 햇볕에 엎어질 뻔 했습니다
한나절 내내 빨래를 개는 중입니다
어떻게든 이 빨래를 다 개야 하니까
어머니, 아무 말도 전하려 마시고
다만, 평안하세요
이미 고요가 되셨으므로
*추신 : 시도 때도 없이 창문 좀 두드리지 마세요 잠결에 깜짝 깜짝 놀랍니다
잠깐 울어야겠다/박미라
운주사 와불께옵서는
물먹은 달빛 번지는 저녁이면
옆으로 돌아누우신다는 풍문이 있는데
지극하다는 것은 감당한다는 것이라지만
나란히 누운 지 천년 째인 얼굴이 까마득해도
세상의 사랑처럼 소리 내지 못하고
혓바닥이나 베어 물었을 것이다
눈에 담지 못하는 사랑에게 송구하여
바람의 발자국이나 헤아리고 계셨을 것이다
간밤에는 굴참나무 이파리 하나
눈꺼풀 자리에 묵어갔다고
혼잣말이나 깨물었을 것이다
햇살 펄펄 끓던 한나절
운주사 쪽으로 길을 잡던 손을 놓치고
젖은 적도 없는데 이빨 딱딱 부딪치며
돌이 된 사랑이나 베끼고 있다
원피스의 계절/박미라
센 불에 올린 밥솥처럼 우르르 끓어 넘치는 여자
팔을 접어 바람의 방향을 확인하고
성을 쌓기 시작한다
풀밭에 숨기거나 빗속에 떨구거나 햇볕에 말리던
남루를 걷어 들여 촘촘히 쟁인다
이미 넘쳐서 굳기 시작하는 것들을 경계석으로 쓴다
여러 번 고쳐 그린 도면에는 유랑의 경로가 자세하다
도면대로라면 성의 규모가 대단할 듯하지만
넘치는 것들은 스스로 번식하는 습성을 가졌으므로
부족함 없는 건축이 되리라
달빛을 당겨 권태를 위로하고
먼지 풀썩이는 틈새를 위해 간간히 모아둔 눈물을 붓는다
바벨탑의 기원을 탐내지 마라
떠도는 것들은 죄가 많아서
간신히 심장 근처까지 닿았을 뿐이다
돌아본 적 없는 통 넓은 원피스를 입는다
사후에도 이 성이 발굴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전언傳言을 머릿돌에 새긴다
나의 성곽은 멀리서 바라볼수록 근사하거나 그립다
남한강 당초문/박미라
바람도 없는데 날아온 꽃잎처럼
문양석 한 점 도착 했습니다
가장 겸손한 자세로 허리 접으며
남한강 돌밭을 읽던 발걸음 문득 멈추고
꺾어지기 쉬운 꽃송이를 받쳐 들 듯
한 우주를 들어 올렸겠지요
저 깊은 돌밭의 잠을 깨우게 될까봐
잠깐 숨을 멈추었겠지요
엊그제 귀농한 농부처럼 어설프게 자리 잡은
강물의 살점을 어루만집니다
미안하고 송구하지요
내 집 어디에도 강물 흐르지 않고
구름 쉴 만한 곳 없으니
내 죄의 목록이 또 하나 늘어난 듯하여
가슴 속에 쟁여둔 잔돌 몇 개
슬그머니 꺼내줍니다
저 돌이 기억하는 강물의 근처에나 이를까 싶지만
서로가 겪었던 강물의 깊이로 따진다면
혹여, 벗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소리 없이 흐르는 것들의 깊이는
묻지 않는 게 맞을 테지요
작살나무/박미라
이름표를 달고 있는 나무들 앞을 지나다가
가슴에 묻어둔 피붙이를 만난 듯 몇 번이고 이름 외워본다
작살나무, 작살나무, 라니!
이름까지 작살이라 못 박고 떨고 계신
그대는 누구신가?
기다림이란 저렇게
만나기만 해봐라, 이빨 으드득 깨무는 일이다
너를 박살내기 전에는 죽을 수도 없다고
이승의 한평생을 꼿꼿이 서서 버티는 일이다
닿을 수 없는 거리인 줄 알면서도
끝없이 떠도느라 푸르게 질린 너의 등짝에
온몸으로 콱! 꽂히려는 것이다
당신을 기다립니다
온몸이 작살이 되었으나
그리움 쪽으로는 한 발짝도 떼지 못하는 나무가 있다
피를 찍어 피워 올린 이파리들 다 지고
청보라빛 열매 몇 주저흔처럼 남았다
표고 1300m의 계곡을 버리고 내려온 국립공원 입구에서
다시 한 생이 저문다
먼 바다 어딘가를 끝없이 떠도는 고래 한 마리
그가 작살을 피할 거라는 생각은 편견이다
작살이 꽂히는 순간
평생토록 빚어온 거대한 꽃 한 송이 활짝 피워 올린다
고혈압/박미라
모든 풋것들 그의 발을 거치면 짭짤하게 절여지네
비린 것을 달다고 우기던 욕정도
껍질만 시퍼렇던 어린 열매들도 그 자리에 무릎 끓고
자반이 되어 장아찌가 되네
다녀간 것들 많아 산호초처럼 우거진 소금길을
아무 때나 치마 걷어 내보이네
이봐, 펄펄 끓어, 손까지 끌어다 짚어 보이네
내게 좋은 것이 귀한 것이지 분명하게 절여 둬야 해
물기 많은 것들은 쉽게 상하거나 물크러지거든
눈물 많은 눈자위가 짓무르는 것만 봐도 분명하지
멍들지 마라, 상하지 마라
오늘도 소금 훌훌 뿌리네
너무 절이거나 말린 것들은
나중에는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
모르는 것일까
혹은 거둬야 할 물기 아직도 많이 남았다는 것일까
익숙해진다는 건 사람이 다스릴 수 없는 치명적인 독
붉은 핏줄 터뜨려 엽분의 뿌리를 찾아보지만
무엇으로,
저 맹목의 사랑에 간 맞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