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밑그림 다 그렸으면 제 것 좀 봐주세요."
"...괜찮은 것 같은데."
"으음. 그래요? 난 영 맘에 안 드는데."
화실에 앉아 스케치를 만지작거리던 손을 잠시 멈췄다.
"구도가 식상하지 않아요?"
캔버스에 밑그림을 그리다 말고 어느새 쫄쫄쫄 내 뒤로 다가온 홍빈의 원성에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그렇게 가까이 온 건지 몸이 닿을 세라 티 나지 않게 살짝 몸을 틀어 피했다.
"...형 것 좀 봐봐요."
지우개를 북북 놀리던 홍빈이 제 의자를 드드득- 내 뒤로 끌어왔다.
"...별거 없어."
"으으음..."
손에는 아직 연필과 스케치북을 쥔 홍빈이 내 등에 바짝 붙어 앉았다. 움찔- 몸을 앞으로 숙였는데 홍빈이 뒤에서 끌어안듯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따라왔다.
흐음- 목 울대를 울리며 내 그림을 감상하는 와중에 청바지에 감싸인 길쭉한 다리가 허벅지를 양 쪽으로 감싸듯 슬쩍 밀착됐다. 이런 제에...기랄.
"대박. 형 진짜 대박이다."
뒤에서 슬슬 풍겨오는 상큼한 코롱 향기에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목뒤에 소름처럼 신경이 오소소- 곤두선다. 그런데 그게 꼭 결벽증 때문만이 아니란 게 함정.
아직 구성단계일 뿐인 내 스케치북을 슬쩍 들여다보더니 한숨을 푹 쉬며 내 어깨에 턱을 걸친다. 순간 상체가 내 등에 밀착돼 어깨가 움찔하려는 걸 간신히 멈췄다.
"형은 어디서 이런 아이디어가 나요? 부러워 진짜. 연륜의 차이인가?"
"...이게 진짜."
"하핫. 장난요."
떨어져선 웃으면서 덥다고 셔츠를 팔랑팔랑 대는데 풀어진 단추 사이로 눈이 슬몃슬몃 내려가려는 것을 무시하고는 애써 평정심을 유지했다.
9월 됐다고 에어컨을 바로 꺼버리는 게 어디 있냐며 창문을 열겠다고 일어나는 훤칠한 뒷모습에 눈이 갔다. 하얀 폴로 셔츠에 감싸인 조각처럼 잘 빚어진 단단한 어깨와 군더더기 없는 허리. 땀을 말리겠다고 쭈욱- 끌어올린 셔츠 밑으로 모양 좋은 치골이 드러났다.
천하의 김원식이 목 매달고 사귈 만하네. 창가로 걸어가는 청바지 밑의 길쭉한 다리를 감상하듯 침을 꿀꺽 삼켰다. 안되겠다.
"...나 화장실 좀!"
갑자기 지른 소리에 창문을 열다 말고 깜짝 놀란 이홍빈을 제쳐두고 이젤을 박차고 나와 복도를 내달렸다.
적어도 일주일에 두세 번 가량 반 강제로 맺던 원식과의 섹스가 끊긴지 어느덧 2개월.
웬 발정 난 개처럼 몸이 주체할 수 없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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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발열 上
"형!"
"미안. 재환아. 바빠."
"형 또! 진짜!! 나 화내요!"
본의 아니게 재환을 다시 피하게 됐다.
초가을이 되며 선선해진다 싶더니 갑자기 늦더위 여름이 훅 끼쳐왔다. 특히 냉방시설에 문제가 있는 강의실에 앉아 있다 보면 땀으로 흠뻑 젖기 일쑤였다. 뒤늦게 찾아온 더위와 함께 식욕까지 달아났는지 밥도 먹기가 싫었다. 대신 다른 것이 고개를 비죽- 들었다.
육욕.
한달 쯤 전 그것을 처음 알아차리게 해준 계기는 내 기숙사를 찾아 온 이재환이었다.
"형 또 어디 가는데요?"
"화실."
"또요? 거기 냉방시설 잘 된다고 피신하는 거죠? 홍빈이랑 둘이! 치사하게!"
"...알았으면 미대생들의 휴식을 방해하지 말고 꺼져라, 음대생."
9월부터 미술 스튜디오도 에어컨을 껐다고는 굳이 말해주지 않았다. 널 피하는 게 아니라 더위를 피하는 거라 생각하는 게 여러모로 편할 테니.
팔을 꾹 붙잡은 재환의 손을 탁- 걷어내고 스튜디오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까까지 재환의 문자로 덜덜덜 떨어대던 주머니 속의 휴대폰이 평소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손으로 만지작거렸더니 제법 날카로운 눈으로 그걸 짚어내고서는 눈을 반짝인다.
"...요즘은 안 오죠, 그 녀석 연락?"
"누구?"
"김원식."
"...안 와."
재환이 묘하게 승리감에 젖은 표정을 지었다.
두 달 전 레스토랑 후로 원식의 연락이 뚝 끊겼다. 어쨌든 끊으려 했던 관계였으니 심적으로 힘들 준비는 되어 있었는데 문제는 전혀 준비돼지 않은 몸이었다.
일주일에 두세 번씩 몸을 탐하던 녀석이 사라지자 되려 내 몸이 이상해졌다는 것.
뒤늦게 사춘기가 왔는지 차마 말로 설명하기 힘든 해괴망측한 꿈을 꾸고 흠뻑 젖어 깨는 것도 모자라 정신을 차려보면 지나가는 남자를 눈으로 훑고 있었다. 게이일까. 아니겠지. 아따 자식 팔뚝 한 번...뭐 이런 식으로 임자 있을 법한 남정네를 훑고 나면 되려 내 기분이 더러웠다. 결정적으로 결벽증으로 누가 건드리는 것도 싫은 내 몸이 남의 손길을 기다리는 꺼림칙한 모순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오히려 누군가의 손이 닿아오면 할딱할딱 숨이 찼다.
"너... 그게 무슨 꼴이야?"
그것을 알아차리게 된 계기는 한 달 전. 금욕생활과 함께 식욕을 잃은 듯한 나에게 밥을 해주겠다며 찾아온 재환이 녀석이었다.
키 180이 샤방샤방 꽃 에이프런을 메고 있는 징그러운 꼴을 타박할 세도 없이 녀석이 형 왔어요오- 라며 눈매를 휘며 앵겼다. 꼬리를 살랑댈 기세로 한 손에는 국그릇, 한 손에는 국자를 들고 나를 얼싸안으며.
"형 밥 해줄려구요! 요즘 다시 덥다구 또 밥 잘 안 먹쬬-"
된장냄새를 풍기는 그 전혀 섹시하지 않은 행동에 평소처럼 놈을 쳐내기는커녕. 하마터면 과제와 금욕으로 지칠 대로 지친 몸이 그대로 품을 파고들고 폭삭 앵길 뻔 했다.
그랬다면 녀석이 아마 놀라 까무러쳤을 테지.
"...너, 너, 너너너 떨어져-"
"예쁜 짓 하는데 쓰담쓰담은 못 해줄 망정!"
"이.. 미..친..."
제법 단단한 품에 양 팔로 날 가득 끌어안은 녀석이 몸무게로 밀어오는 탓에 쿵-하고 뒷머리가 닫힌 현관문에 부딪혔다. 문짝에 잔뜩 눌린 몸이 아파야 했는데 오히려 쾌락에 찼다.
"으..아얏.."
그대로 녀석의 무거운 부비작거림을 받아냈다. 무릎이 다리 사이를 파고드는 것에 끙끙거리는 소리가 샜다. 형 냄새 좋다-라고 낮게 중울거린 녀석이 덩치 큰 골든 리트리버 마냥 내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자 나도 모르게 입에서 더운 숨이 터졌다. 맞닿은 피부에 순간 허리가 움찔하며 녀석의 다리에 비비적거릴 뻔 한 것에 내가 더 놀랐다.
너무 오랜만이라 그래. 결벽증으로 소문난 차학연이 원식 이후로 이렇게 완벽하게 다른 사람의 품에 안기는 건 너무 오랜만이라.
"너..으...그으...마안..."
"...하아..형."
녀석이 내 목에 얼굴을 묻고 정말 강아지처럼 냄새라도 맡으려는 건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만족스런 한숨과 함께 뱉는 것에 목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손이 어버버거리다가 무기력하게 녀석의 셔츠 깃을 붙잡자 녀석의 무릎이 다리 사이를 조금 더 파고 들었다. 움칠- 놀란 아랫도리가 녀석의 아랫배에 맞붙었다. 비비적거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움직여 마찰시키고 싶어 아랫배가 덜덜 떨렸다. 한계야. 한계-
"...너...으..흣...."
"..형..?"
"너....나가!!!"
"어어?! 학연이 형...! 형?!"
영문도 모르고 녀석은 문 밖으로 밀쳐졌다. 실내용 슬리퍼를 신고 앞치마를 메고 국자와 국그릇을 사이 좋게 양 손에 든 채로.
졸지에 형 밥해주겠다고 왔다가 등짝 스매싱을 얻어맞고 쫓겨난 녀석에게 뭐라고 설명해줄 겨를도 없이 문을 잠갔다. 스르르 문을 따라 주저앉아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랫도리가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혀엉, 내 짐 안에 있어요!'
"지...집에 가, 이 새끼야..!!"
'내 지임...!! 내 신바알-'
제발..제발 집에 가. 사라져 얼른.
닫힌 문틈 새로 재환의 원망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국자를 든 손으로 퉁퉁 문을 두들겨오는 소리도.
현관에 가지런히 벗겨진 신발을 내려다보면서도 문을 열어줄 수가 없었다. 녀석을 내쫓은 것으로 마지막 남은 이성을 허비했기에.
그 웃기지도 않은 앞치마며 된장냄새 폴폴 풍기는 티셔츠를 홀딱 벗겨버리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어릴 적엔 유난히 덩치가 작던 녀석. 내가 부둥부둥 안고 돌보고 같이 자라온 친 동생 같은 녀석과 맨 몸으로 뒹굴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지금도 문을 다시 열고 녀석을 침대까지 끌고 가서 팔딱팔딱 원성을 치는 육욕을 달래달라고 하고 싶었다.
창문을 열어 녀석의 신발을 던져주고는 욕실로 들어가서 옷을 입은 채로 탕에 뛰어들었다. 찬물 아래 때수건으로 박박 씻고 나서도 목덜미에 닿았던 숨결이 그대로 나를 간질였다.
소매를 쭉 잡아당기는 느낌에 정신이 퍼뜩 현실로 돌아왔다.
"또 연락하면 말해요."
"말하면 뭐."
"내가 가만 안 있을텡게!!"
우스꽝스러운 사투리에 못 이기고 피식 웃었더니 내 주머니에 담긴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묘한 표정을 짓던 재환도 이내 강아지처럼 샐쭉 따라 웃고는 내 팔목을 쭈욱- 잡아당겼다. 어허, 이 새끼가. 탁 쳐냈더니 이번에는 눈도 깜짝 않고 또 샐쭉.
"횽 오늘 내가 기숙사로 갈게요! 저번에 반찬이 맘에 안 들었던 거죠?! 밥 싫으면 이번엔 라면 끓여줄게요!!"
"아 됐다고 인마!!"
형이 라면이 아닌 널 먹으면 어쩌려고 그러니...
이 놈은 착한데 멍청해서 가끔 내가 게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 탈이다. 재환이 팔뚝을 잡아오는 것에 흠칫 몸이 소스라치듯 예민하게 반응했다. 들킬까 급하게 쳐냈더니 또 표정이 묘하다. 아냐 재환아. 형 결벽증 또 돋은 거 아니고 지금 이상해서 그래. 하루에도 수십 번 발딱발딱 세우는 물건을 정신수양으로 달래기가 힘들어서 그렇단다.
뭐라 해줄 말이 없어 무시하고 걸었더니 웬일로 다시 웃으면서 그런다.
"형 올 때까지 죽치고 앉아 있을 거예요! 라면 봉지 다 뜯어놓고 기다릴 거예요!"
"너...! 꺼져 이 놈아! 내 라면 건들지마! 한 봉지라도 건드리면 너 신고할 거야!"
욕구불만.
웃기게도 원식을 만나기 전엔 남녀경험 완전 무인 처녀였던 주제에, 지금 나는 친동생 같은 녀석도 섹스대상으로 볼 정도로 욕구불만에 시달리고 있는 거였다.
그 날이 원식과 잠자리를 갖지 못한지 딱 2개월 째였다.
"형. 벌써 가요?"
재환을 따돌리고 화실로 오니 이번에는 또 다른 훤칠한 놈이 내 시야를 괴롭혔다. 이홍빈. 김원식의 애인...이자 오늘따라 유난히 내 뒤에 달라붙어서 내 그림을 본다고 열심인 녀석.
화장실에서 얼굴에 찬물을 한껏 쏟아 붓고 나왔는데도 열기가 쉬이 가라앉질 않았다. 이 상태에서 주위에 건장한 남자가 여럿 있다는 것은 여러모로 괴로운 일이었다. 발정 난 고양이가 된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나도 모르겠으니까.
과제가 급했지만 이대로는 될 것도 안 되겠다 싶어 짐을 바리바리 챙겼다.
"응. 가봐야겠어."
"약속 있어요?"
"아니. 그냥. 피곤하고 배도 고프고."
"어, 나도 배고파요 나도! 같이 가요!"
미치고 팔짝 뛸 노릇.
그 날 레스토랑에서 나에게 과제를 같이 하자고 한 건 빈말이 아니었는지 홍빈은 그 다음 날 강의에서부터 나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형 나 여기 앉아도 돼죠? 하며. 결벽증이라고 소문나 다들 기피하는 나에게.
생각보다 살갑고 서글서글한 아이였다.
평소 같았다면 홍빈이 불편한 이유가 그저 내가 밤 상대를 해주고 있는 남자의 애인이라는 것이었겠지만. 곤욕스러운 이유가 한 가지 더 추가됐다. 재환과 불미스런 사건이 있을뻔한 그 날부터 이상한 곳, 이상한 포인트에서 몸이 달아오른다는 것. 남은 다 더러워- 날 만지지마-였던 내 세상이 괴상하게 뒤틀렸다는 것.
"저녁 같이 먹어요."
"으응?!"
...그리고 내가 이상하리만치 이홍빈에게 더 극성으로 반응한다는 것.
"어. 아냐. 나, 난-"
"왜요?"
"음...아..."
뜸을 들이고 있자 서운한 듯 눈꼬리를 내린다.
"나랑 먹는 거 싫어요? 사주기 싫어서? 내가 사줘도 되는데. 아니면 형 나 불편한가-"
눈썹을 서운하게 일그러뜨리며 망울망울 내려다보는 눈길에 결국 아니라며 고개를 설렁설렁 지었다.
난 이 녀석한테 약하다.
그 원인은 아직 확실치 않았는데 아무래도 원식과 관계를 맺을 때마다 내가 이 녀석한테 죄를 짓는 기분이라 그런가 보다-로 치부했다. 어느새 신나서 짐을 챙기는 녀석을 내 눈이 곰곰이 내려다보고 있길래 황급히 뗐다.
저 몸이 김원식이 만지는 몸. 김원식하고 같이 동거하고 있는. 그러다 보니 생각이 겉잡을 수 없이 흘렀다. 내 몸처럼 탐해주는 걸까. 아니 확실히 나한테 보다는 잘 해주겠지. 할 때마다 피를 본다면 아직까지 무탈하게 사귀고 있을 리가 만무하니까.
"형 그거 줘요. 내가 들게."
멍하니 바라보다가 되려 내가 늦어질 세라 이젤을 접고 창고로 뒤뚱뒤뚱 가져가는데 홍빈이 휙-하고 지나가며 손이 가벼워졌다. 티타늄으로 만들었는지 무식하게 무겁다고 소문난 우리 학교 이젤을 두 개씩이나 한쪽 어깨에 휙- 지고는 창고 쪽으로 사라졌다.
"어? 어...고...마워."
"뭘요. 밥 값."
으쓱하며 씨익- 웃는 얼굴에 또 보조개.
그래 너 잘생겼어어. 진짜 잘생겼다.
마냥 호리호리하다고 생각했는데 헬스를 다닌다던 이 녀석도 만만치 않은 몸이다. 둘이 하면 누가 깔리는 걸까. 이홍빈? 설마 김원식? 아니 날 성욕처리용으로 활용하는 걸로 봐선 은근 둘이 아직일지도. 에이 설마. 그래도 같이 사는데?
이 녀석들은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서로 한번씩 대줘도 이상할 것 없겠다는 영양가 없는 생각으로 머리가 바삐 굴러가려는 찰나 홍빈이 창고에 이젤을 기대어놓고 내 짐까지 챙겨 손에 쥐어준다.
"앗...!"
"왜요."
"아...니. 뭐 먹을래?"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들었는데 손 끝이 스쳤다. 그게 뭐라고 또 귀 끝까지 빨개졌다. 들킬 세라 되려 큰 소리로 물으며 먼저 화실 밖으로 나왔다. 홍빈이 한쪽 어깨에 가방을 걸치고 어깨를 으쓱한다. 고개를 갸웃하며 이상한 듯 나를 바라본다. 그래. 이상하겠지.
난 이상하게 이 녀석이 쑥스럽다. 내가 좋아하는 김원식이 죽고 못 사는 이홍빈이.
"형이 먹고 싶은 거요."
"네가 골라봐."
"그럼... 음...치킨!"
"...치킨...? 그럼 한잔 해야 하나?"
홍빈이 예쁘게 미소 짓는다.
미친 입이 제멋대로 놀고 있어. 미친 입.
"그래요."
지금 상태로 술을 마셔서 뭘 어쩌겠다는 건가.
그렇지만 엎질러진 물이다. 홍빈이 오묘한 표정으로 웃으며 내 어깨를 툭 쳤다.
"오늘 내가 쏠게요, 형."
안돼 안돼 안돼. 머릿속에서 경보가 마구 울렸다.
식은땀이 흘렀다. 단연하건대 이것은 더위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지하철을 타고 시내로 나오는 내내 홍빈은 휴대폰을 뒤적거렸다. 결벽증 때문에 평소엔 대중교통도 잘 사용하지 않는 나로써 만원지하철에 발을 들인 것은 커다란 용기를 필요로 했다. 그걸 잘 아는 재환은 그럴 때마다 날 벽 쪽으로 가둬주고는 가방 등을 잡고 지탱할 수 있게 내게 제 등을 내어주곤 했다. 부담 없이 기댈 수 있도록.
반면 그걸 알리 없는 홍빈은 태연자약하게 한 손으로 손잡이를 붙들고 한 손으로 휴대폰을 휘휘 뒤적거렸다. 손잡이도 벽도 짚지 않고 멀뚱히 지하철 문이 있는 벽 쪽에 서있는 나에게 가끔 시선을 던지며.
"배고파요?"
"...응."
"과제 다음주까지죠? 아아. 언제 다 끝낸다..."
"그러게."
"형 내일도 강의 끝나고 바로 화실 나올 거죠?"
시시껄렁한 대화에 대답해주랴 지하철 벽에 닿을까 신경 쓰랴... 식은땀이 뻘뻘 흘렀다. 다른 곳에 신경을 돌리려 아까부터 진동하는 홍빈의 휴대폰에 턱짓을 했다.
"연락 오는데. 누구야?"
"..응 아니에요. 그냥 친구."
그냥 친구...혹은 집에 안 들어오는 애인 기다리다가 안달이 난 남자친구. 사실 아까 휴대폰 액정이 얼핏 보였다. 두 달간 내 휴대폰에는 한 번도 담기지 않았던 이름. 김원식. 그 이름이 액정에 벌써 다섯 번이나 떠오르고 있었다.
"...급한 일 있어? 가봐도 돼."
슬쩍 떠보며 물어보자 홍빈이 잠시 얼굴을 흐리다가 이내 밝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녜요. 급한 거 아냐."
제길. 그냥 가도 되는데.
...내리고 싶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정거장에서 엄청난 인파가 밀물처럼 몰려들었다. 때아닌 늦더위의 기승으로 땀에 젖은 인간들. 풍겨오는 악취와 밀려드는 인파로 인해 머리가 어지러웠다. 차라리 등을 돌려 지하철 벽을 보고 섰다. 문에 달린 조그만 창으로 휙휙 지나가는 불빛을 보고 있자니 컴컴한 뒤로 홍빈이 휴대폰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비쳤다.
"..."
...난 왜 이 녀석과 친하게 지내는 걸까.
붙임성이 좋은 녀석이라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다. 이 녀석은 '원식의 애인', '원식의 친한 형' 식으로 얼굴만 알고 지내던 나와 두 달 만에 급속도로 친해졌다. 친하다 하기엔 아직 뭔가 애매했지만. 어쨌든 녀석은 결벽증에 찬바람 쌩쌩 몰고 다닌다고 소문이 난 내 옆자리를 꿰찼다. 때마침 원식도 연락이 없고 나도 재환이를 피해 다니느라 비어있던 내 옆자리를. 너무 손쉽게 덜커덕.
뭔가 꿍꿍이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 역시 그건 있었다.
사실은 궁금했다.
뭘까. 겉으론 나름 서글서글해 보여도 속은 완전 개차반인 김원식이 왜 이 녀석한테만 유독 사족을 못 쓰는 걸까?
"아으..."
인파에 몰려 벽에 더 찌부러졌다. 한 손으로 벽을 살짝 짚었다. 순간 손바닥으로부터 소름이 쫙-올랐다. 그렇지만 땀에 쩔은 인간들과 부대끼느니 차라리 이게 낫겠지.
"아.. 형. 조금만 돌아 서 볼래요."
"어?"
같이 지내면 나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무 잘 알게 된 것 같아서 문제였지만.
처음엔 얼굴인가? 싶었다. 아니면 몸? 그것도 아니면 성격? 매너. 머리? 집안?
그 어느 것이라도 이상하지 않다. 두 달 가량 알고 지낸 녀석은 가히 완벽했다. 키 커, 잘 생겨, 착해, 인맥 좋고 머리 좋고. 의사 아버지에 변호사 엄마의 빵빵한 집안. 나하고는 비교할 생각부터가 잘못된 거였다. 안돼. 완벽한 패배. 첩실 자리라도 앉혀주는 것에 감지덕지 했어야 했다고 생각하니 더 비참해졌다.
"어..?"
"이럼 됐죠?"
마주보며 생글 웃는 모습에 가슴이 쿵 떨어졌다.
"이거 아직 안 입은 거니까 괜찮죠?"
화실에서 입으려고 가져온 듯한 커다란 셔츠를 내 어깨에 둘러주곤 벽을 등지게 밀어붙인 홍빈이 휴대폰 화면을 꺼 한 손에 쥔 채 양쪽 팔뚝을 벽에 붙여 나를 마주보고 섰다. 지하철 안의 풍경이 완벽하게 차단됐다.
대신 내 앞에는 이홍빈이 가득 찼다.
시원한 코롱 향기. 가까운 거리. 조금만 움직이면 닿을 것 같이 어지럽게 얽힌 다리. 다리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이상한 생각이 들 것 같아 고개를 올리자 생각보다 가까이 있던 홍빈의 코에 툭- 닿았다. 저번처럼.
"으...!"
얼굴로 피가 몰리는 게 느껴져서 황급히 시선을 내렸다. 그랬더니 또 어지럽게 얽힌 다리가 보여서 옆으로 돌렸다. 위에서 풋-하고 웃음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형은 진짜 귀여운 짓 자주 하네요."
"...어?"
"그냥 성격 나쁘고 앙칼진 것 같으면서도 어느새 보면 자기가 한 말에 상대방이 상처 받을 까봐 걱정하고 있고 눈치 보고 있고. 겉은 고양이 같은데 속은 햄스터 같아. 아무리 봐도 형 같지가 않아."
"..."
"방금도 밥 먹기 싫은데 나 기분 상할 까봐 그냥 나오겠다고 하고. 틀려요?"
"어...어음..."
욕인가 칭찬인가. 욕을 가장한 칭찬인 것 같기도 하고 반대인 것 같기도 해서 섣불리 대답하기가 애매했다.
"안 그럴 것 같으면서 사람한테 은근히 질질 끌려 다니는 타입이야. 알아요?"
"..."
"겉만 뾰족뾰족한 완전 순둥이. 연애도 못해보고 아주 질질 끌려 다니겠네. 이용당하기 쉬운 타입이야. 조심해요."
순간 심장이 뱃속으로 떨어지는 것 같아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봤다. 속내를 들킨 것 같아서 시내로 가는 내내 눈도 못 마주치고 손가락만 꼼지락 대다가 또 홍빈의 웃음을 샀다.
녀석은 긴 시간 힘든 기색 하나 없이 신사답게 거리를 지켜 선 채 한 손에 든 휴대폰을 휘적거렸다. 가끔 인파가 더 밀려들어 등을 짓누를 때는 내 옆을 짚고 선 팔에 조금씩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지만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다.
얼굴이 붉어진 것이 들킬 세라 괜히 나도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금욕생활로 인해 아래만 말썽인 줄 알았더니 오늘 보니 위쪽도 꽤 절실했나 보다. 가까운 거리덕에 들릴 것만 같은 심장이 제멋대로 내달렸다. 손에 식은땀이 가득 차서 놓칠 것 같은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로 찔러넣었다.
주머니 속에선 라면 봉지 다 뜯어놨으니 얼른 집에 오라는 재환의 메시지가 쉴 새 없이 울렸다.
--
블링입니다.
한달 동안 안 오다가 왜 갑자기 이틀 안에 두 화냐고 하시면...할 말이 없어요.
전 편이 짧으니까..라고 해둘까요. 사실은 그냥 필 받아서...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짧은 댓글 하나에도 큰 힘 얻고 갑니다.
첫댓글 오모오모 분량....;;;역시 최고십니다ㅜㅠ 점점 재미있어지는것같아요! 관계도 점점 복잡해지고..ㅋㅋ
표지 또 올렸어요 맘에 드실지 모르겠네요ㅎㅎ 확인해주세요~.~
분량 마음에 드시나요+_+? 저번 편이 너무 짧아서 ㅎㅎㅎ 계속 쓰다보니 이렇게 됐네요. 관계 복잡은 제 전문입니다!! 표지 보러 가야겠네요! 콧노래가 절로 나네요~~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3.09.16 18:38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3.09.17 06:35
저 펜대 꺾습니다....ㅠ 이런 멋진글 보고 배우고 느낄수있게 해주셔서 완전 감사합니다!! 다음편 나오길 학수고대 하고있겠습니다!! ㅠ 감사합니다
펜대를 왜 꺾으시나요?! 우리의 펜대는 소중해요.. 일상에 지친 우리의 쉴 공간이 되어주는 걸요;ㅁ; 가끔 안 써질 때 꺾어버리고 싶더라도!! 자 우리 다 함께 펜대를 이어붙여요!!
오모!!!!하루에 두편이나ㅠㅠㅠㅠ완젼기다럇는데 기분너무조아용!!!ㅠㅠ또 빨리담편대려와주세용 기다릴께용!!!!!
으핫 너무 자주 쓰나요??ㅎㅎㅎ 삘 받으면 쓰는 위주라 들쭉날쭉 하네요!! 감사합니닷!
우왕 오늘 1화부터 쭉 보고왔어요!!! 노예계약 보고 볼려고 했는데 너무 궁금해서..ㅋㅋ 다음편 완전 기다릴께요!! 잘보고 갑니당~!!
와 정주행해주셨군요!! 감사합니다! 노예계약도 조만간 올려야 할텐데ㅠㅠ.... 다음 편도 잘 부탁드려요! 오모케에엔님~
옹오오오???.....모지이?뭐지이?대체뭐.....ㅋㅋㅋㅋㅋㅋ ......잘보고갑니다 ㅎ
으하하하핫 모오올까요오오?? ㅎㅎㅎ 오묘하네요 저도 ㅋㅋㅋ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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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기다렸다구요 !! ㅠㅠㅠ 그래도 두편이니... 그나저나 홍빈이까지!! 무슨 꿍꿍인지는 모르겠으나 홍차도 좋아요 ㅎㅎ
으하하 노예계약의 여파인지 홍빈이를 못 믿겠네요 ㅋㅋ 저도 홍차 좋아해요! 다른것도 다 좋아서 탈이죠 ㅎ
이제서야 봤네여 ㅠㅠ 아 홍차 ♡♡ 나쁜원시기는 변하지가 않네요 ㅠㅠ 담편을예측하기가 어려워서 ㅠㅠ 언제 담편이나올까요ㅋㅋㅋ 빨리끝나는거같아요 픽이 아쉽아쉽 ㅜㅜ 담편도 기다릴게여~!!!
나쁜남자는 변함없는게 매력이죠 후후훗... 빨리 끝났나요?+_+ 길게 쓴다고 썼는데 분량을 더 늘려야겠네요 ㅎㅎ 감사해요!
으아아아!! 다음편!!다음편이 시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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