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장소 : 무등산 <의재미술관>
일 시 : 2024.03.28(목)
참 가 : 강공수 김상문 김영부 나종만 양수랑 윤상윤 윤정남 이용환 장휘부 정원길 등 10명
불 참 : 김재일(신병) 박남용(백내장 수술) 등 2명
회 비 : 90,000원(10명 중 9명만 음식 주문)
식 대 : 74,000원(김치찌개 2, 애오박찌개 6, 파전 1 등)
금일 잔액 : 16,000원
이월 잔액 : 699,000원
총 잔 액 : 715,000원
시내버스를 타고 가서 증심사 정류장에서 내리는데 나 혼자 내리게 되었다. 나 혼자 내린다는 것은, 비가 오니까 산행을 오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버스에서 내려서도 보이는 사람은 한 두 명일뿐이었다.
부곡정에도 세 사람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어서 도착한 회원이 7명(강공수 김영부 나종만 양수랑 윤상윤 윤정남 이용환 등)이 10시 20분쯤 산행을 시작하였다. 올라가면서 지난 3월 26일 고인이 된 박호영에 대해서 이야기 하였다. 그의 사인과 근황을 강공수와 나종만으로부터 들었다. 너무나 허무하게 사라져 버린 그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 하면서 우리들의 삶의 덧없음을 다시 한 번 되세기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은 차분하게 <의재미술관>에서 작품 구경으로 우리들의 삭막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아름다운 정서로 정화(淨化)해 보자고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의재미술관은 65세 이상은 무료여서 그냥 입장할 수 있었다.
지금은 [기획전] 계산(谿山) 장찬홍(張贊洪, 1944~)의 : “계곡의 물소리를 듣다.” (전시기간2024.03.05.~06.02)를 전시하고 있었다. 장흥 출생인 그는 1964년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의 문하에 입문하여 그림을 시작하였는데, 올해로 60년, 스무 살 청년에 시작 한 그림이 환갑을 맞은 셈이다. 다리가 불편했던 장찬홍은 무등산 자락 스승의 춘설헌(春雪軒) 근처에 기거하며 그림을 배웠다. ‘계곡의 물소리를 듣는다.’는 <청계재(聽溪齋)>에서이다. 그는 의재 선생님과 함께 했던 시절이 최고로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말하곤 한다. 맑고 진실 된 그의 성품을 알아본 스승이 써 준 ‘계산청진(谿山淸眞)’ 네 글자를 마음에 새기며 스승이 가신 몇 십 년 이후 까지도 무등산을 지켰다. 장찬홍의 산수는 고향인 장흥 <억불산>에서 시작하여 그가 살았던 무등산의 <서석대> <입석대>를 거쳐 제주도와 설악산, 금강산 등 전국 곳곳에 이르렀으며, 명승을 담아내는 화가가 그만은 아님에도 그의 그림이 특별하게 보이는 것은 장애가 있는 힘든 상황에서도 국토 곳곳을 찾아가는 열정이 더해졌기 때문일 것이라는 것이 평자들이 말하는 그의 모습이다.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1891년~1977년, 본관은 양천, 진도 출생) 선생과 나는 직접적인 접촉이나 안면은 없었다.
다만 내가 광주사범학교 1학년(1958년 4월) 봄 소풍을 <증심사>로 갔을 때, 처음 의재선생을 볼 수 있었다. 증심사 서재(西齋, 대웅전 서쪽에 있는 집)는 당시 초가집이었는데, 거기에 한복 중우 적삼을 입은 한 노인(老人, 6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이 기거하고 있는 것을 목도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분이 의재(毅齋) 선생 이었다. 초라해 보이는 그 노인이 한국화의 대가이며, 삼애사상(三愛思想, 愛天·愛地·愛人)을 실천하는 위대한 사상가로써,
석아(石啞) 최원순(崔元淳, 1891~1936, 광주출신, 1919년 일본에서 2·8독립선언을 주도한 민족독립운동가, 언론인, 동아일보에 <횡설수설> 집필한 독립운동가)과
오방(五放) 최흥종(崔興琮, 1880~1966,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며 20대까지 장터의 싸움꾼으로 깡패 짓, 양림교회 유진 밸 선교사의 도움으로 기독교에 귀의, 나병 퇴치운동에 평생을 바침, 광주 소태동 나협회와 여수 애양원과 고흥 소록도 나병원을 창설한 사회운동가이며 기독교 목사)과
사회운동에 앞장선 분이었다.
석아 최원순(崔元淳)이 무등산 증심사 계곡에 석아정(石啞亭)을 짓고 살다가 죽은 후, 오방 최흥종(崔興琮)에게 주니 오방정(五放亭)이 되었고, 또 이곳을 의재(毅齋)에게 주니 그곳이 지금의 춘설헌(春雪軒)이 된 것이다.
의재(毅齋) 선생은 1946년에는 무등산의 차밭을 사들여 <삼애다원>을 설립하여 춘설차를 생산하고, <삼애학원>이라는 광주국민고등학교를 설립한 후 이듬해 <광주농업고등기술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여 가난한 청소년들에게 농사기술과 학업을 할 수 있도록 사회사업에도 열정을 쏟은 분이다. 또한 한국화 분야에서는 그분만의 지평을 확보한 위해한 화가로서 활동하였고, 만년에는 광주(光州)의 무등 산록의 산골짜기에 묻혀 자연을 벗 삼아 차(茶)를 가꾸며 보내신 분이었다.
그리고 여기 <의재미술관>의 자리에는 한 때, 1980년대까지만 해도 작은 연못이 있었고, 그 오른쪽에는 삼애장(三愛庄)이라는 여관(旅館)이 있었는데, 그것을 헐고 <의재문화재단>이 2001년에 지금의 <의재(毅齋)미술관>을 지은 것이다.
의재(毅齋)선생은 한국화가(韓國畵家)이며, 일반적인 서예인(書藝人)이 아닌 시(詩)·서(書)·화(畵) 겸전의 서도가(書道家)로서 그 분의 화려한 약력은 너무도 잘 알려져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우리 일행은 약 1시간 동안 <의재미술관>의 전시 작품을 관람하고 하산하였다.
음악정자로 돌아왔지만 비가 너무 많이 오고 있는 데다 의자도 빗물에 젖어 있어서, 점심을 먹을 식당인 <부곡정>으로 내려왔다. 먼저 메뉴를 선정하여 주문해 놓고 식당 문 앞에 있는 식탁에 앉았다. 그리고 다음 주 <십오야 봄나들이>를 갈 때, 부를 최희준의 <하숙생>을 강공수의 불루투스 스피커에서 나오는 곡조에 맞추어 불러 보았다. 젊은 시절에 많이 불러 보았기 때문에 그냥 익숙해 졌다.
음식이 다 준비되었다며 식기 전에 먹으라고 주인이 재촉하였다. 지난 주에 윤정남이 자녀들과 함께 제주도 다녀 왔다면서 천혜향을 하나씩 선물로 나누어 주었다. 점심을 먹고 헤어졌는데, 다음 주 목요일에는 <십오야 봄나들이>, <천리포 수목원> 행에 전원이 참석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저녁 6시에는 전남대학교로 갔다. 전남대학교 인문대학에서 개최하는 <함께하는 인문학>의 첫 강연을 국어국문학과 김대현 교수가 “한문학과 문헌학의 길 위에 서서”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어서 박남용과 함께 재미있게 들었다.
김교수는 보성군 미력면 <도개>마을 출신으로 나의 보성중학교 후배라고 알고 있다. 그는 전남대를 졸업하였고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모교인 전남대 국문학과에서 20여 년 동안 한문학을 강의해 왔다. 그의 연구실에는 전남 광주지역에서 가장 많은 고서적을 보유하고 있으며, 매일 거기에 파뭍여 책과 놀며 연구하는 학자이기도 하다.
전국 모든 대학에 한문학과가 있는데, 우리 전남 광주에는 어느 대학에도 한문학과가 없었다. 한문학과가 설치되어 있어야 한문학을 지도하는 교수도 생기고 한문학을 공부하는 학도들도 많이 배출될 수 있는데, 학자도 없고 학생도 없으니 어떻게 한문학이 발전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내가 현직에 있을 때에는, 광주 전남의 중·고등학교에 필요한 한문교사를 전북대 졸업생을 대려다가 채용하기 까지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전국에서 한문학의 수준이 가장 떨어진 지역이 바로 호남지역이 되고 만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의 중앙이고 석학들이 많은 서울로 가서 한문학 강의를 듣고 한문을 공부하는 인구가 많아야 하고, 한문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어야 한문학 수준이 올라 갈 것인데, 지역적으로 서울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고 서울에 가서 한문학을 공부할 자원도 전국에서 가장 적기 때문에 한문학에 가장 무식한 지역이 우리 호남이 되고 만 것이다. 그래서 고서적이 있어도 그 가치를 알지 못해 고서적이 있으면 그것으로 벽을 바르거나 엿장수에게 엿으로 바꾸어 먹어버리며, 그렇게 엿장수를 통해 나온 고서적들이 다른 지역으로 값싸게 유출되어 버리는 서러운 백성들이 살고 있는 곳이 되고 만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타개할 방법에 대하여 오늘 김대현 교수가 강조한 것은, 우리 지역의 고서적의 유출을 막고, 각 가정에 숨겨져 있는 고서적들을 발굴 보존하고 번역하여 우리 지역의 문화와 문명을 발전시켜 보자는 취지의 강연을 한 것으로 들었다.
첫댓글 한편의 역사서를 읽은것 같네 명석한 두뇌로 다 기억해가면서 풀어가는 글솜씨는 일품이지
역사에 대한 기본 지식이나 견해가 없으면 편향된 글이 되는데 기본 바탕위에서 사실적 관계를 들어 설명해놓으니 읽기쉽고
이해하기도 좋구먼 나는 목우회 산행 글을 읽는 재미로 반드시 찾아 읽네 산에 오르는즐거움을 몰라도 글을 읽어서 그분위기를
상상해는것도 실제 등산하는 재미에 못지않지 애레베스트산을 오르지않더라도 오른 사람의 글을 읽어보면 등산하는거나 마찬가지지
오늘 인문학강의나 의재선생에 대한일화가 생생하게 들리는군 아주 유익한 보고서이었지 ... 고맙지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