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주장은 1980년대부터 있어온 이야기고 서양에서는 20세기 초에 나온 말이다. 20세기 초중반 일본 학자들은 무신론이 아니라 철학이라고 주장한다. 즉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 철학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불교에는 영혼이 없다고 한다. 이 철지난 이야기를 최근 정병조라는 정년퇴직한 노교수가 유투브에서 떠드는 것을 보고 웃었다. 한국불교의 한심한 현실이다. 불교가 무신론인데 왜 중놈들은 불상을 모시고 새벽기도 사시예불 저녁기도에 철야정진(밤샘기도)를 하는가? 우상숭배 아닌가? 이율배반의 세계이며 자가당착이다. 부조리의 극치다. 무식한 중생을 제도하는 방편이라고 개소리 하는 놈들도 수두룩이다. ㅎㅎ
석가모니의 십이연기를 잘못 이해하면 무신론이다. 특히 용수의 중론은 바로 무신론이다. 용수의 중론과 반야부 경전만 공부한 사람은 무신론적 입장에 서게된다. 또 대승기신론과 조사선은 심(心) 일원론이니 모든 것의 실체가 마음이고 그 마음만 정화하면 부처가 된다고 한다. 무신론이다. 신은 필요 없다. 필자가 조계종 중놈들 욕하는 이유가 모든 게 마음이라면 영혼이고 극락이고 어디에 있나? 지금 여기서 마음만 정화하면 극락 아닌가? 그럼 죽기전 마음을 정화한 사람을 왜 천도시키는가? 영혼도 극락도 없는데 무슨 극락왕생인가? 그리고 보이지도 않는데 무슨 극락왕생인가?
석가모니는 윤회를 인정했다. 그럼 영혼을 인정한거다. 그는 무명을 없애면 목사(Moksa해방 엉터리 번역인 해탈로도 번역)를 이룬다고 보았다. 즉 생사윤회의 고통에서 해방된다는 것이다. 우파니샤드에서는 아트만(진아)의 자각 혹은 아트만과 브라흐만의 결합(범아일여)를 해방(Moksa)으로 본다. 여기서 해방의 과정인 12연기(무명 행 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는 외부세계를 감각지각으로 복사한 인간 정신이 마음에서 우주를 만들고 그 가상세계인 우주가 인간 영혼을 지배하며 생사윤회를 한다고 보았고 이 과정의 근본이자 출발이 무명이다. 무명(無明)에서 無가 사라지니 明(밝음)이다. 12연기가 만든 가상세계가 생사윤회를 하게 하고 고통을 주는 것이니 이것을 자각하면 곧 생사윤회에서 해방(Moksa)이 이루어진다고 한 것이다. 국내외 어느 학자도 이런 사실을 밝힌 자가 없다. 참 한심하다. 인간의 의식(마음)이 언어가 만든 가상세계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 중론과 반야부 경전들이다. 즉 공(空 零영)이다. 모든 것이 가명(假名)이고 해서 空(영)이라고 중론에서 밝히고 있다. 중론의 핵심은 가명(假名)에 있다. 가명이니 공인 것이다. 가명은 곧 가상세계를 말하고 이 가상세계는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해서 반야사상가들은 이 가상세계가 언어로 이루어져있고, 언어가 만든 가명(가상세계)을 부수면 곧 열반 해탈이라고 본 것이다. 인과응보를 비롯한 모든 사유와 사유실체들은 다 공에 지나지 않다고 정의한다. 그리고 이것이 큰 패착이다.
『모든 인연으로 생기는 법을 나는 곧 무(無)라고 하고 또한 가명(假名)이라고 하며 중도의 뜻 이라고 하느니라.
衆因緣生法을 我說卽是無요 亦爲是假名이요 亦是中道義니라. <中論 관사제품 > 』
용수는 가명(假名)을 중도로 본 것이다. 언어로 만든 가상세계가 우리가 사는 국가 사회 벼슬 제도 등등이다. 인간사회는 언어가 구성한 가상세계를 구현하고 살고 있다. 즉 가상세계가 현실세계를 지배한다. 이 가상세계를 가명(假名)이라고 이름한다. 가명(假名)이니 곧 無가되고 空이 되는 것이다. 모든 인연법은 모두 가명(假名)이니 무이자 공이다. 현실세계가 헛된 가명(假名)이고 공이라서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가 가명(假名)이란 것을 자각하면서 살면 이것이 중도라는 것이다. 현실에 집착하지 않고 모든 것이 무나 공이라서 현실을 포기 하지 않는 자세다. 가명(假名)=가상세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임을 중도라고 본 것이다.
한국의 성철스님과 중국학자들은 이 중도를 중용과 동일시 하여 해석했다. 즉 저울질 권(權)이다. 저울추가 중심을 잡는 것은 무게에 따라 달라진다. 이것이 중용이고 중도라고 본 것이다. 유교에서는 이를 권도(權道)라고 한다.
불교학자 김성철은 이렇게 이 대목과 중론을 해석한다.
『 언어와 분별의 문제점을 언어와 분별에 의해 지적함으로써 언어와 분별의 세계에서 벗어나게 한다. 마치 두 개의 나무토막을 비비면 불이 발생하여 비비던 나무토막을 모두 태워 버리듯이……. 』
이 인간은 말장난을 친다. 중론을 지맘대로 곡해한다. 중론의 지적은 인간이 왜 현실세계와 논리에 집착하는가를 파악하고 논파하는 것이다. 논리의 세계가 곧 진리라는 것이 동서철학의 공통점이다. 언어와 분별이라는 해석은 조사선(노자)의 입장이다. 그는 불교학 박사답게 잠재적으로 조사선에 세뇌된채 중론을 해석한다. 언어와 분별의 문제를 지적한 것은 노자의 道可道非常道와 무명(無名)이다. 언어와 분별을 벗어난 세계는 道可道非常道이다. 조사선의 무자화두다. 중론의 지적은 空과 현실세계의 양극단에서 가명(假名)을 잡는 것이 중도라는 뜻이다. 그 어떤 논증도 이율배반에 빠진다는 것이다. 현실세계는 가명이며 가명은 곧 공이다.
김성철은 나무 두개를 비벼 불을 일으켜 모든 것을 태우는 것을 용수의 중론이라고 시를 쓴다. 열반은 고통의 불을 훅불어서 끈다는뜻이다. 거기에 촛점을 맞춘다. 결국 말장난이다. 언어 사유가 만든 가상세계가 중생세계라는 것은 고등수행자는 누구나 아는 것이다. 그 가상세계가 언어분별이니 언어분별을 없애면 없어진다는 것 자체가 순환논리다. 해서 말장난이다. 용수 역시 동일한 말장난을 한다. 경허가 이렇게 하여 돈오대각을 했다. 그런데 까르마(번뇌습기)가 소멸되지 않아 고통스러워 하다가 객사하였다. 명상이나 참선을 하면 생각이나 느낌으로는 언어분별의 세계가 소멸된다고 확신한다. 허나 자기기만이다. 컴퓨터는 가상세계다. 내가 내컴퓨터 없앤다고 인터넷이 사라지는가? 내 모든 정보는 여러 포탈의 데이터베이스에 들어가 있다. 동일한 것이 까르마(업)다. 내가 내 기억을 지워도 내가 행한 모든 일들은 데이터 베이스에 저장되어 복과 벌을 받는 기준점이 된다. 모든 포털에서 로그한 내정보의 삭제가 우선 되어야 까르마(업)가 소멸된다. 그 후에 내가 만든 가상세계를 없애야 무명이 사라진다. 해서 석가모니는 팔정도를 제시하였고 무엇보다 계율을 중시하였다. 반야사상가와 조사선 명상가들은 계율 알기를 똥으로 안다. 계율을 지켜야 까르마 소멸의 길을 갈 수 있다. 그것고 금생이 아니라 무수무변한 삶을 반복하여야 한다. 성급한 돈오주의자들이 언어분별만 소멸하면 만사 끝 성불이라고 사기를 친다. 그리고 불교를 혹세무민의 종교로 만들었다.
명상가들과 반야사상가와 조사선 및 대승기신론 수행자들은 까르마를 믿지 않는다. 까르마 역시 가상세계에 가명이니 곧 空에 지나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래서 반야사상과 대승기신론은 약 이천년을 불교를 망쳤다.
석가모니 사후 부파불교에서는 부처님이 수겁을 윤회한 최후신(最後身)으로 보았다. 모든 까르마가 끝난 마지막 단계에서 무명을 없앤 것으로 본다. 그럼 윤회하는 영혼은 무엇인가? 부파불교는 보특가라라고 불렀다. 보특가라가 윤회한다고 보았고 후일 유식불교는 아뢰야식으로 불렀다. 즉 식(識)이 윤회한다. 그러자 조사선은 식(識)을 한자뜻 그대로 알음알이로 치환하여 마음에서 알음알이를 없애면 성불한다고 사기를 쳤다. 노자에서 무명(無名)을 도의 기준으로 본다. 언어문자와 알음알이를 없앤 경지다. 중론의 가명(假名)을 노자의 무명에 대응 시킨다. 가명을 없애는 것이 무명(無名)이니 한중일 중국역사에서 무명(無名)도인 혹은 무명(無名)인 등등의 호가 난무하게 된다. 다 도사다. 이들은 가명의 원뜻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
부파불교 뿐 아니라 법화경에서도 최후신이 나온다. 수기품에 최후신을 얻은 다음 부처가 된다고 서술해 놓고 있다. 수행을 통해 최후신을 얻고 나서 부처가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럼 최후신을 얻기 전에는 부처님에게 기도하고 빌어야 한다. 부처가 신이니끼. 해서 등신불의 주제가 되는 소신공양이 법화경에 나온다. 이 소신공양을 받는 존재가 세존이며 곧 바가바트(비슈누신)이다. 대승불교의 세존은 음역으로 박가범이며 바가바드기타의 바가바트이며 남방불교에서는 바가바토라고 부른다. 다 비슈누신이다.
법화경에 속아 소신공양 한다고 손가락을 태운 이가 일타스님이고 그의 제자들이 서울대 출신들이 많았는데 1990년까지 졸업장 없는 방통대를 70년대에 중퇴한 혜국이라는 중놈(현 조계종단 최고승 중 하나)은 자신이 서울대 나왔다고 학력 위조하고 손가락을 소신공양으로 불태웠는데 이들 모두 법화경의 부처가 석가모니라고 착각하여 그 몸(손가락 마디 하나)을 바친 것이다. 법화경에 언급된 소신공양은 고대 종교에서 흔히 보는 인신공양이라는 미신 중 하나를 아름답게 묘사한 것이다.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인신공양은 조선 건국전 고려시대까지 있었던 일이다. 인신공양을 좋아하는 신이 시바신과 깔리여신이고 능엄다라니는 깔리여신과 악마들을 찬양하는 주문이다. 성경의 아브라함도 아들을 죽여 인신공양을 하려고 했다는 기록이 구약성서에 나온다.
화엄경은 베다의 33명 대천신과 수천 수백만의 하위 천신들의 세계를 노래하고 있다. 최후신을 얻기 전에는 천신의 가피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대승불교를 반야경에만 한정하면 무신론이 맞다. 허나 법화경 화엄경 및 여타 경전들은 천신들의 세계를 노래하고 있다. 대승불교는 그래서 신불의 종교인 것이다.
부파불교 만이 무신론에 철학사상이다. 허나 지말분열을 통해 베다의 신과 결합을 시작하였고 그 결과 남방불교에서도 비슈누를 석가모니로 보고(마하고윈다경), 석가모니의 삶을 그린 경전으로 이천년간 믿어온 법화경 역시 비슈누가 석가모니다. 세존은 곧 비슈누를 말한다. 화엄경은 베다의 천신들을 찬양하는 경전이다.
해서 중국에 도입된 후 한중일 삼국에서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등등을 신불로 모시고 복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순수 논리 철학을 대승불교에서 찾으면 대승기신론과 대반야경이다. 기타는 베다의 신이 부처로 들어온 경전들이다. 이 사실이 진리며 팩트다.
2024년 5월 16일 紫霞仙人 遊於世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