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 수소 경제 이론이라는 것이 사람들에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릅니다.
곧 고갈될 석유 에너지를 대체한 에너지로서 무한하며 또한 공유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한정된 석유에너지로 말미암아 그것 때문에 전쟁 또는 국가와 국가간의 분열과 다툼이 많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무한한 수소 에너지가 대체 에너지로 보급되면 누구나, 어떠한 사람들이나 공유가 가능하기에 그러한 분쟁이 없어진다는 것이죠.
석유에너지의 대체 연료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수소 경제 이론은 돈에 매어있는 사람들로 인한 분쟁이 종식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무엇인가에 매여본 적이 있습니까?
오늘 설교의 제목도 ‘매임’에 대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매이다’라는 것은 국어사전상에서 ‘남에게 딸려있거나 종속 또는 의무 관계에 처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매임이 결과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종속관계로 표현할 수가 있습니다.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 무엇인가에 매여본적 있습니까?
물론이겠지요.
그렇다면 무엇에 매여있습니까?
여러분들을 보면 매여있는 연결 고리들로 인하여 너무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그것들로 인하여 너무 지쳐있고 힘들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길은 아닌 듯합니다.
어짜피 인생이 무엇인가에 매여서 살아가게 된다면 우리는 바울의 매임을 통하여 한 단계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매임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무엇에 매인 사람입니까?
1. 세상의 가치에 매인바 된 바울
바울은 다소 사람입니다.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22장 3절에 의하면,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라고 말을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다소 사람이며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유대인의 최고의 사람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빌립보서 3장 8절을 보면, 바울은 자신의 그런 배움에 대하여 배설물로 여긴다고 합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출신에 매이고 학벌에 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배설물로 여겼을까요?
‘다소’라는 곳은 상업도시입니다.
또한 다소에서 태어났음과 동시에 자신이 로마인 중에 로마인이라는 말을 합니다.
바울이 로마에서 태어나고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대 로마제국이 세계를 재패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할 때, 로마의 시민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자존심이고 자랑입니다.
바울이 가지고 있는 로마 시민권은 대로마 제국이 지배하는 그 넓은 지역의 어느 곳에서나 힘이 작용하게 만드는 권세이며 신분보장과 특권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러한 특권은 당시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던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뿐 입니까?
그런데 바울은 그러한 특권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현재로 이야기 한다면 세계 최고의 학문이 하버드에서 공부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도 배설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인생에 있어서 모두가 얻고 싶어 하는 그 모든 것을 다 얻어 봤는데 왜 그것을 배설물, 똥으로 여겼을까요?
바울이 정말 그것을 배설물로 여겼던 것일까요?
그것들로 인하여 매여있는 자신의 삶이 배설물로 여긴 것은 아닐까요?
그것들이 바울 자신이 진리를 깨닫기 위하여 나아가는데 방해요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지식이 예수를 알아가는데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배운 가말리엘의 최고의 학문, 그리고 로마인이라는 우월주의, 그리고 다소 출신이라는 자신이 보아 온 것에 대한 자랑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데 방해가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열심을 가지되, 잘못된 열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이 배워 온 십자가에 달린 것마다 저주 받았는데 어떻게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느냐는 생각 아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죽이고 잡아들이는데, 앞장을 섰던 것입니다.(22: 19)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도 바울의 회고에 의하면 그의 죽음도 당연하게 생각했었습니다.(행 22: 20)
그의 이러한 삶의 비뚤어진 이유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에 매이고 삶의 배경에 매이고, 경험에만 매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또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이려고 다메섹을 향하여 갈 때, 강한 빛으로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는 주님의 음성은 그의 매임에 생각의 눈과 마음의 눈과 경험에 눈을 뜨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보는 눈으로 매이도록 합니다.
그리하여 그 부름 가운데 그는 예수께 매인 자가 됩니다.
사울은 ‘큰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주님의 부름 앞에서 자신의 이름을 ‘작은 자’라는 대조적인 이름을 가지게 됩니다.
‘사울’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적 표현이고 ‘바울’이라는 이름은 헬라적 표현을 내세우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바울이 예수를 만난 시점부터 그의 이름을 바울이라고 표현합니다.
스스로 큰 자로 여겼던 바울이 선교에 앞장서면서 사울 대신 바울이라는 이름을 쓰게 된 동기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의 매임이 큰 자로서가 아니라 주 앞에 작은 자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약한 것을 자랑하고 작은 것을 자랑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자신의 큰 것에 매였던 사울이 이제는 작은 바울이 되어 예수님을 높이며 자신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겸손을 행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이전에 스스로 큰 자로서 사람을 죽이는 자로 섰다가 예수께 매임을 통하여 스스로 작은 자가 되어 세계 곳곳을 다니며 죽은 자를 일으키고 억눌린 자를 풀어주는 회복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선교를 갔다가 트리니티 대학의 외국 교수님으로부터 식사 대접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식사하면서 저에게 조금 접혀진 지폐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지폐는 위에서 보면 지폐속의 인물이 울고 있고 아래서 보면 그 지폐속의 인물이 웃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바울이 스스로 큰 자에 매여 있을 때, 그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고통에 잠겼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께 매여 작은 자로 섰을 때, 바울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회복되고 바울이 가는 곳 마다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에 매였습니까?
큰 자 입니까? 작은 자 입니까?
사울입니까? 아니면 바울입니까?
여러분이 가는 곳마다 회복이 있다면 여러분은 작은 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가는 곳에 절망과 아픔의 그림자만이 남았다면 여러분의 삶을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주님 앞에 다시 우리의 매임을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사랑에 매인바 된 바울
옥중 서신으로는 골로새서, 에베소서, 빌레몬서, 빌립보서등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빌립보서는 바울이 옥중에서 쓴 글이기에 옥중서신이라고 합니다.
얼마 전 싱가포르에서 베트남의 한 청년이 불법무기 소지죄로 체포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의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합니다.
이유는 베트남에서 하루의 일당은 1달러에 불과한데 싱가포르의 감옥에 있으면 하루 일당이 그보다도 많고 편안하게 보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본래 불법 체류만 하면 추방되지만 그는 싱가포르의 감옥을 가기 위해 무기를 소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수감되어있는 감옥은 이와 다릅니다.
성경의 이곳저곳에서 볼 수 있듯이 쇠사슬에 묶여 있어야 하고 매를 맞아야 하고 또 먹거리나 환경이 오늘날의 상황에 비추어본다면 인권유린에 걸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러한 빌립보 감옥에서 보낸 글에는 감사가 넘치고 기뻐하라고 말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미쳐서 그런 걸까요?
사도행전 26장 24절에 바울을 심문하던 베스도 총독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과연 베스도 총독이 보듯이 바울의 학문이 바울을 미치게 만들었습니까?
그래서 좋지 않은 환경에서 바울은 감사의 기도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의 매임에 대하여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빌립보서에 보니 바울은 자신의 처지보다도 상대에 대한 좋은 소식으로 기뻐하는 모습
을 보게 됩니다.
그 기뻐하는 모습이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요?
1장 8절을 보면,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
이시니라
라고 말을 합니다.
바울의 현실은 힘겨운 삶의 자리에 있지만 빌립보 지방의 사람들을 향한 그 사랑, 인간의 사랑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한 심장으로 그들을 사랑한다고 생각합니다.
‘미안하다 사랑한다’라는 미니시리즈를 봅니까?
교통사고로 심장을 다친 아들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말과 그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심장을 이식 받는 방법 밖에 없다는 말을 엄마가 듣습니다.
그 말을 들은 엄마가 의사에게 무슨 이야기를 합니까?
“내 심장을 떼어주세요. 난 많이 살았지만 저 애만은 살려 주세요” 하며 실신을 합니다.
엄마의 사랑이 그대로 묻어나는 부분입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사랑함은 예수님의 사랑의 이식된 것입니다.
그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자신의 처지는 보이지 않습니다.
단지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을 알지만 그 사랑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바울은 그 예수의 사랑의 매임 되어 자신이 감옥의 쇠사슬에 매여 있는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의 선물’이라는 오 헨리의 소설을 아십니까?
한 가난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유난히도 서로를 사랑하는 부부 델라와 짐은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고민에 빠집니다.
서로를 위해 선물을 살 돈이 없기 때문입니다.
남편 짐은 자신의 소중한 시계를 팔아 부인 델라에게 고급 머리빗을 선물합니다.
그러나 부인은 자신의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팔아 남편에게 시곗줄을 선물합니다.
남편이 사온 머리빗은 이미 머리카락을 자른 아내에게 필요가 없게 되고 아내가 사온 시곗줄은 아내를 위해 시계를 판 남편에게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아무것도 필요 없는 것들을 위해서 그러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크리스마스의 선물은 자신의 소중한 시계를 팔아 선물한 남편, 그리고 자신의 소중한 머리카락을 팔아 남편을 위해 시계 줄을 산 아내의 마음인 것입니다.
이 부부는 가난하지만 가장 훌륭한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된다는 이야기 입니다.
바울은 감옥이라는 곳에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을 할 때, 그 안에는 기쁨이 있고 그 안에는 감사가 있는 것입니다.
잃어버렸다고 없다고 비참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말을 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니”라고 합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에 매임되었을 때, 그는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삶의 여러 가지 매인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다가오는 크리스마스를 생각하며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서로를 위해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의 매임되어 서로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가장 행복한 청년부, 축제의 자리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3. 영원의 세계에 매인바 된 바울
디모데 후서 4장 7절 ~ 8절에서 바울은 말을 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바울의 앞에는 죽음이 기다립니다.
그러나 바울은 담대하게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의 끝 날이 다가 오고 있음을 알 때,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기독교 인은 영원의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의 자신의 삶의 가장 큰 위기가 다가올 때, 영원의 세계를 향하여 기도하게 됩니다.
기독교인이 영원의 세계가 아닌 현세적인 삶이 목적이고 그것이 다라면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수능이 목적이고 그것이 다인 고3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인생을 흔들어 놓습니다.
그래서 얼마 전에 수능 점수가 별로 좋지 않자 자살하는 것을 봅니다.
돈이 목적이고 그것이 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돈이 없음으로 인하여 자살합니다.
더구나 요즘 그 돈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사랑하는 자녀들까지 죽이고 자살하는 슬픈 소식들을 접하게 됩니다.
권세를 목적으로 삼다고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볼수 없는 사람은 그 권세에 취해 있다가 그것을 잃으면 자살하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영원한 세계가 그의 안에 있기에 죽음도 매도 고난도 그를 넘어뜨리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자랑하십니까?
무엇이 인생의 목적입니까?
인간사의 끝에 서서 그는 영원의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의 매임은 세상에 있지 않고 영원하신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후서 11장 23~27절에 바울보다 더 아픈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후선 11장 30절에 부득불 자랑하느니 그러한 약함을 자랑한다고 말을 합니다.
바울은 그러한 약함의 자랑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영원에 있습니다.
고린도 후서에서 바울의 적대자들은 바울을 비방하고 어리석게 여기며 자신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고난과 수고를 자랑합니다.
바울의 이러한 약함의 자랑은 그의 삶이 세상에 매이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에게 매여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매여있다면 바울은 어리석은 자이고 바보 같은 짓을 한것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세상에 매여있다면 이미 오래전에 그 고통과 아픔과 수고로 말미암아 탈진하여 주님의 부름의 삶을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아픔과 고난과 역경이 영원을 향한 것이기에 그는 예수로 말미암아 자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에 매여 있습니까?
여러분이 목적하는 바가 예수로 말미암아 계획되어지고 예수께로 말미암아 목표되어진다면 우리는 어떠한 환난과 어려움에서도 그 영원한 매임 때문에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매임 속에 우리는 주를 위하여 나아가는 소명자이자 사역자로 또 주님의 사랑하는 자로 나의 일에서 주님의 일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무엇인가에 매여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어딘가에 매여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어떤 것을 위하여 매여 있습니다.
바울은 주님께 매여 있었습니다.
바울은 영원의 하나님의 자리에 매여 있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위하여 매여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것에, 무엇을 위하여 매이든 그것이 주를 위한 매임이라면 여러분은 탈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영원한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간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을 통하여 영광 받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