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회 수주문학상 수상작] |
-대상- |
한 권의 책 |
이 경 희 |
첫 페이지를 열면 |
당신의 중심이 일제히 긴장하는 게 보여요 |
단서들은 지우고 싶을 거예요 |
제 눈에 찔리는 것보다 무서운 가시란 없으니까요 |
문장은 자꾸 숨고 싶어요 그 때 |
짐짓 당신은 지워지는 척 흐릿하게 보일 거예요 |
힌트가 늘 충분하지 않은 것처럼 |
지향으로만 찾아 내야 하는 숙제같은 거예요 |
그 순간에 조금은 캄캄해 질 여름 폭우같은 거 부디 잘 견뎌 주세요 |
지나고 나서야 개요는 보이는 법이니까요 |
마지막 장을 남겨둔 채 천둥 속으로 |
당신을 덮으면서 나는 숨이 차 올라요 그럴 때 잠시 멀리 있을 게요 |
빗속에 서서 잠시만 당신의 활자를 더 맞을 게요 |
거리란 적당한 시력을 위해 늘 필요한 일이니까요 |
각자의 행간에서 굳이 되돌아 오는 길을 물을 필요는 없어요 |
해답이 같이 있는 퀴즈는 조금 싱겁지 않을까요 |
그러니 각기 다른 열 개의 문장으로, |
간절한 한 개의 이유를 풀고 싶을 때는, |
한사코 끝까지 기대해 주세요, 당신과 나의 열렬한 |
오픈 북 |
-우수상- |
바늘 끝에서 피는 꽃 |
이 사 랑 |
청석골의 단골 수선집 늙은 재봉틀 한 대 |
아마, 지구 한 바퀴쯤은 돌고도 남았지 |
네 식구 먹여 살리고 아들 딸 대학까지 보내고 |
세상의 상처란 상처는 모조리 꿰매는 만능 재봉틀 |
실직으로 떨어진 단추를 달아주고 이별로 찢어진 가슴과 술에 멱살 잡힌 셔츠를 |
감쪽같이 성형한다 |
장롱 깊숙이 개켜둔 좀먹은 내 관념도 새롭게 뜯어 고치는 재봉틀 |
작은 것들은 가슴을 덧대어 늘리고 |
막힌 곳은 물꼬 트듯 터주고 불어난 것들 돌려 막으며 |
무지개실로 한 땀 한 땀 땀구슬을 꿰어 서러움까지 깁고 있다 |
무더운 여름 낡은 그림자를 감싸 안고 찌르륵 찌르륵 |
희망은 촘촘 재생 시키고 구겨진 자존심은 반듯하게 세워 돌려준다 |
일감이 쌓일수록 신나는 재봉틀 오늘도 허밍허밍 즐겁다 |
별별 조각난 별들을 모아 퀼트 하는 밤 |
바늘 끝에서 노란 달맞이꽃들이 환하게 피어났다 |
-우수상- |
무화과 나무 |
강 영 숙 |
하늘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그 나무의 열매, 한 그루 세월을 붙들고 있다 내안에서 자라난 그 나무 붉은 피 흐르지 않는다 |
손바닥 마구 흔들던 잎들 하늘을 뒤덮는다 아이와 나는 막든 바람 홀연히 빠져나가고 가지마다 싱싱한 눈물 울멍울멍, |
꽉 채운 동그라미를 무화과꽃이라 부른다 |
혈색이 창백한 혈액 종양내과 복도, 웃음잃은 사람들 차례대로 호명을 기다린다 오래전, 소아병동에서 노란 위액을 토해내던 |
차트번호 1137440 어린아이가 스물 다섯 청년이 되었다 혈관 불뚝거리는 팔뚝엔 채혈 바늘 마음대로 들락거린다 |
매연에 질식된 공기와 소통하는 국채보상공원 길을 걷는다 달구벌 대종이 소리를 가둔 채, 제야의 종소리를 준비하고 있다 |
잎들 뜯긴 나무들 서로를 세차게 껴안는다 봄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나는 희디흰 핏방울 뚝뚝 떨구는 감옥, 무화과꽃이다 |
-우수상- |
미라 |
강 정 숙 |
발굴자들은 그녀가 |
임산부였다는 사실에 더 집중했다 |
유난히 통통한 복부 때문이다 |
복부를 가르고 |
몇 겹 표피를 들추자 |
말라붙은 탯줄과 자궁, 외벽엔 |
암반같이 굳어버린 핏물이 보인다 |
가느다란 손으로 배를 감싸고 |
긴 머리카락 뒤틀린 입술이 |
반쯤 벌어져 있는 그녀 |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
아이를 낳을래요 |
머리카락으로 요람을 짜겠어요 |
사백년쯤 걸릴꺼에요 |
물기 없는 여자의 내부가 |
형광등 아래서 환하게 웃고있다 |
수주문학상 심사평 |
예심을 거쳐 본심에 회부된 작품들을 꼼꼼하게 읽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 '무화과 나무'(강영숙), '미라'(강정숙), '바늘 끝에서 피는 |
꽃'(이사랑), '한 권의 책'(이경희)을 두고 대상과 우수작을 선정하기로 했다. |
무화과 나무'는 산문시다. 다른 투고자들의 산문시들과는 달리 읽히는 장점이 있었다. 운율도 도드라졌다. |
그러나 마지막 연에서 긴장을 놓쳐버려 많이 흔들렸다. 앞으로의 가능성을 믿고 우수작으로 선정했다. |
미라'는 발굴된 미라에 대한 섬세한 묘사가 뛰어난 시였다. 미라라는 가볍지 않은 소재에 대한 사유 깊은 시쓰기는 투고한 다른 작품들과 |
함께 신뢰를 가지게 하였다. 하지만 이 시역시 시의 마무리에서 너무 쉽게 마침표를 찍어버렸다 |
시는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을 잃지 않고 전속력으로 달리는 100m 달리기와 같은 것에 유념해 주길 바란다. |
바늘 끝에서 피는 꽃'은 대상작으로도 부족하지 않았다. 투고한 모든 작품에서 오랫동안 시를 써온 저력이 돋보였다. 시에서 익숙함은 |
힘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한다. 독을 다스리는 변화의 힘을 가진다면 앞으로 좋은 작품을 보여줄 것이라 기대한다. |
한 권의 책'은 책읽기에 대한 뛰어난 시다. 시종일관 긴장을 잃지 않고 있다. 시를 끌고가는 힘도 좋다. 변별성을 가진 자기 호흡을 |
호흡을 가졌기에 더욱 신뢰가 갔다. 심사위원들은 이견없이 대상작으로 선정했다. 앞으로 유행하는 시를 따라가는 시인이 아니라 |
자신만의 색깔과 향기를 가진 좋은 시인이 되길 바란다. |
수주문학상에 투고된 작품들을 읽으며 2가지 흐름을 읽었다. 그 중 하나는 시를 지나치게 어렵게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다. |
시를 쓴 당사자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작품들이 많았다. 오랫동안 시를 써온 심사위원을 이해시키지 못하는 시로 어떻게 |
독자들을 이해시킬 지 궁금했다. |
또 하나는 시의 산문화 경향이다. 시와 산문은 다르다. 비록 산문의 옷을 입고 있어도 시는 시여야 한다. 시로 읽혀야 한다. |
읽혀지지 않는 산문을 시라고 하기에는 억지스러운 점이 많았다. |
심사위원들은 위의 2가지 흐름에서 벗어난 시적인 시에 높은 점수를 주었음을 밝힌다. 그래서 비록 |
지금은 부족하지만 가능성이 있는 내일을 가진 예비시인들에게 수상의 영광이 돌아갔다. |
수상자들에게는 축하의 박수를 보낸다. |
심사위원 최문자 정일근 |
첫댓글 관념적으로 쓰여진 대상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