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별 아파트의 화양연화
이병연
“엄마. 김치냉장고 놓을 자리가 없었지?”
모자가 외출에서 돌아와 장남이 물었다.
“안방 옆에 대피 공간 길이를 따져봐야겠어. 거기밖에 놀 곳이 없던데?”
1310호 며느리가 답했다. 아니 이젠 이 집 안주인이다. 1987년도에 시집와서 시부모와 함께 살아서 그런지 동네 사람들이 다 1310호 며느리라 불러서 나도 늘 그렇게 불러왔는데 이제 시부모도 돌아가시고 안주인이 되었는데도 아직 동네 할머니들은 1310호 며느리라 부른다.
지난해엔 아파트 재건축을 한다고 현수막이 붙고 마을회관에 사무실도 차리고 아파트자치회장을 재건축추진위원장으로 삼아 일이 시작되었다. 회의가 잦아지고 이집 저집 재개발을 위한 동의서와 서류를 제출하고, 정말 5년 뒤에 입주할 수 있다는 이야기로 아파트가 술렁거렸다. 주민들 전화 통화 50%는 아파트 재건축 이야기다. 재건축 소문이 퍼져서 그런지 떨어졌던 내 몸값도 올랐다. 금리 인상으로 시행사가 보류를 요청하는 통에 잠시 멈추고 있지만 언젠가는 재건축 할 터이니 시한부 선고를 받은 거나 마찬가지다. 수도관이 막혀 뱀처럼 내 몸을 휘감아 버린 급조한 수도관, 잘려져 여기저기 늘어진 선들, 모과나무 껍질 벗겨지듯 떨어져 나간 외벽 페인트는 나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다. 낡아 버린 내 몸뚱이를 내가 잘 알기에 서러울 것도 슬프지도 않았다. 그런데 1310호가 이사 간다고 하여 깜짝 놀랐다. 1310호는 아직 나를 떠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도통 이사에 신경 쓰는 가족이 아니었다. 가장은 가장대로 바쁘고 며느리도 퇴직하고 알바를 한다고 바쁘게 움직였기에 이사 가려니 생각지도 못했다.
1986년에 내가 양주에 아파트 1호로 건축되었다. 도락산 아래 7개 동의 아파트가 그림처럼 예쁘게 들어섰다. 나는 그중 아파트 입구에서 가장 가깝고 그나마 평수가 넓은 첫 번째 동이다. 내 나이 40세가 가까워지는 동안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이사를 왔다가 떠났다. 보통 약삭빠른 사람들은 아이들을 키우다 떠났고, 사업이 잘되거나 안되어 떠난 사람들도 있고 나이가 들어서 죽음을 맞이하여 떠난 분들도 있다. 주변에 새 아파트가 하나둘 생길 때마다 서너 집이 이사 갔다. 그래도 분양 당시부터 입주해 남아 있는 가족들이 아직은 서너 집 된다. 1310호 역시 분양 시 입주한 가족이다.
87년 11월로 기억된다. 1310호 총각이 결혼한다고 동네가 떠들썩하니 축하 분위기였다. 버스를 임차해서 결혼식에 다녀온 동네 사람들은 젓가락보다도 마른 빼빼한 신부를 보고 신랑 인물이 더 낫다고 수군댔다. 이어지는 대화는 집집이 같은 이야기였다. 시부모, 시동생 둘에 시누이까지 어찌 시집살이를 견딜지 걱정인지 흉인지 떠들었다. 나도 며느리가 어찌 시집살이를 헤쳐 나갈지 궁금해 유독 눈여겨봤다. 당시만 해도 아파트라고 하지만 분양 당시 어려운 일을 함께 겪어서인지 이웃 간 따뜻한 정이 넘쳐났다. 옥수수를 쪄서 아래 윗집 나눠 먹기도 하고 명절 때는 송편과 떡국을 들고 아래윗집 대문을 두들기는 것이 별로 이상하지 않았다. 아주머니들이 통로 입구에 죽 걸터앉아서 고구마 줄기도 까고 마늘도 까면서 쉴 새 없이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통로 입구는 정자나무 그늘 못지않게 사람들을 불러 모았고 나는 자연스레 마을이 돌아가는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알게 되었다.
1986년 입주 당시 수도가 개통되지 못한 채 입주한 아파트 주민들은 양주군청으로 몰려가 항의 집회를 했다. ‘데모’가 뭔지 모르는 할머니부터 젊은 아낙까지 의정부에 있던 양주군청 앞에 모여 상수도를 연결하라고 시위하니 고지대주민을 위한 급수차가 배정되어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집집이 커다란 고무대야, 양동이, 주전자를 들고 줄지어 물을 받아 갔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계단식이라 물양동이를 들고 3,4층을 오르내리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출렁거리는 물과 땀으로 범벅이 되어도 한 양동이라도 더 받아 가려고 쉴 새 없이 계단을 오르내렸다. 특히 대가족인 1310호는 가장 늦게까지 물을 퍼 날랐다. 다행히 아수라장 시기는 짧았다.
새색시는 새벽 5시에 일어나 얌전하게 아침 밥상을 차리고 버스 타고 의정부로 나가 북부역(가능역)에서 전철로 갈아타서 신설동까지 출근했다. 아직도 동네 사람들은 은근히 1310호에 관심이 많았다. 식구도 많은데 큰아들을 분가시키지 않는 이유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고 며느리가 잘하는지 시어머니한테 은근히 떠봤다.
이듬해 1310호가 첫아들을 낳으면서 직장을 그만두었다. 통로마다 아이들이 하나둘 태어나는 소식도 들려왔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어느새 아파트는 아이 울음소리와 웃음소리로 채워졌다. 노란 유치원 버스가 아파트 입구에 나타나면 통로마다 아이들과 엄마들이 노란 가방을 메고 뛰쳐나왔다. 안 간다고 우는 아이도 있었지만 모두 즐거운 얼굴이었다. 1310호 아들 두 녀석은 성격이 밝았다. 유치원도 1등으로 가고 싶어 했고, 초등학교도 1등으로 갔다. 재미있는 건 이 집 생일 풍경이다. 식구가 가장 많을 때는 여덟 식구였기에 1달에 한 번꼴로 생일 노래가 울려 퍼졌다. 아침 내복 바람에 까치머리를 한 손주들이 생일 촛불을 끄고 케익을 잘랐다. 자다 일어난 꼬맹이들은 생일을 마냥 즐거워하며 둥그런 밥상에서 미역국을 먹었다. 며느리는 아침 6시30분에 출근하는 시아버님을 위해 새벽 4시면 일어나 아침 생일상을 차려 올렸다. 할아버지 생신이든 시동생 생일이든 온 가족의 아침 식사는 6시였다. 즐거운 생일잔치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산업현장에서 셋째 아들을 잃기도 하고 첫 손주는 큰 수술을 두 번이나 하면서 힘든 일을 겪었지만 생일 잔치를 하며 단합대회를 하듯 이상하리만큼 긍정적으로 살았다.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다닐 때까지는 즐거운 일이 많았다. 이 집 저 집에서 아이들 웃음소리도 들렸고, 피아노 딩동거리는 소리도 심심찮게 들려왔다. 아이들은 계단을 후다닥 뛰어 내려갔다가 뛰어 올라왔다. 1동은 유난히 남자아이들이 많아 통로마다 후다닥 쿵쿵 정신없었다. 첫 계단부터 엄마를 부르며 뛰어오르는 통에 몸이 불편하셨던 1210호 할아버지는 좀 조용히 다니라고 있는 기운을 다 써서 말씀하시기도 했다. 대문 여닫는 소리 역시 쾅쾅 소리가 나서 어느 녀석이 집에 왔는지 다 알 정도였다.
“엄마, 나 반장 됐다.”
”엄마, 나 쪼금만 더 놀다 온다“
가방을 현관으로 내던지듯 밀어놓고 도로 뛰어 내려가는 아이들의 발소리가 경쾌했다.
둘째 아이가 유치원 다닐 때 마을 놀이터 옆 마을회관에 마을문고(작은도서관)가 들어섰다.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던 1310호 며느리는 책에 관심을 보이더니 ‘작은도서관지기’가 되었다. 군인 출신 관리소장님과 이장님의 지원으로 200권으로 시작한 작은도서관은 밝은별아파트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1310호 며느리는 갑자기 동네 아이들의 보모 겸 선생님도 되었다. 아이들이 학교 갔다 오면 작은도서관으로 모여들었다. 아예 어떤 엄마들은 맡겨놓고 볼일을 보러 가기도 했다. 관리소장님이 한문 선생님이 되어 20여명의 아이들에게 한자를 가르쳤다. 옛 서당에서 나 들려올 법한 ‘하늘 천 따지’ 천자문을 외는 낭랑한 합창 소리가 놀이터까지 흘러넘쳤다. 1310호 며느리는 아파트 일로 바쁜 관리소장을 대신하여 한문을 가르치다가 아예 한문 선생 자리를 맡고 말았다. 어느 날은 아이들과 줄지어 약수터로 몰려가서 놀고 오기도 하고 도락산도 오르내리며 나무 이름과 풀이름을 알려주기도 하고 그림도 그렸다. 그뿐일까 어느 날은 버스 한 대에 아이들을 태우고 생태학습관, 남산, 박물관 등을 데리고 다녔다. 1310호 며느리가 동네에 나가면 이젠 ‘선생님’이었다. 아이들이 총알처럼 뛰어와 안기는 일도 다반사였지만 엄마들도 발길을 잡았다.
“선생님, 글쎄 우리 애가 한자로 된 부동산 간판을 척척 읽어요.”
“우리 애가 중학교 들어갔는데 한문 시험을 100점 받았어요.”
1310호 며느리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알고 보니 며느리는 누구보다도 환한 미소의 소유자였다.
마을에 활기가 넘쳤다. 아파트 주변의 밭으로, 산으로 ‘전쟁놀이’를 하며 우르르 몰려다니던 아이들은 한문 공부 시간이 되면 파도가 밀려오듯 작은도서관으로 밀려 들어왔다. 학학거리는 숨소리와 아이들의 붉은 볼은 작은도서관을 후끈 달궈 놓았다. 그 열기를 그대로 수업으로 연결하는 노하우는 1310호 며느리의 전매특허 같았다. 반짝거리는 눈망울 속엔 더 놀고 싶은 열망이 가득하지만 이내 아이들의 한자 낭독 소리는 합창처럼 운율을 타고 마을회관을 나와 놀이터로 퍼져나가 마을을 가득 채웠다.
길을 지나는 어른들도 잠시 멈춰 마을회관을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놀이터에서 놀던 꼬맹이들은 도서관 문에 매달려 호기심에 찬 눈초리로 유리창 안을 들여다보다가 가곤 했다.
도락산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만큼이나 상큼했던 아이들의 목소리, 지진이 나듯 우르르 뛰어다니던 그 발소리, 새빨간 미끄럼틀에서 완두콩처럼 또르르 내려오며 고래울음 소리를 내던 아이들, 꿈을 꾸듯 지나간 행복한 날이었다. 내게 다시 오지 않을.
이삿짐을 싸던 며느리가 전화를 받는다.
“집은 안팔구요 재개발되면 다시 돌아오려구요. 그럼요 공기도 맑고, 교통도 좋고, 시장도 가깝고 살기가 얼마나 편한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