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州先生前集序
東州翁亦自號觀海道人,萬曆己丑正月十四日生。生六歲,誦旁人所讀書數千字不錯,七歲,解綴文作詩賦,十五而發解,二十一己酉,魁進士試,越四年壬子,由三魁擢第,始爲郞禮、兵二曹,遷修撰,旣而偃蹇十年。壬戌,宣慰日本使。至癸亥改玉,拜校理、持平、應敎。首膺賜暇讀書,薦儒將,旋赴都元帥幕辟。甲子,超序按嶺南。丙寅,在銀臺,越職言事,左授林川守,以時寇逼,兼拜倡義使。入爲副提學者五、大司成者四、吏曹參議者三、大司諫ㆍ承旨者七,而三爲都承旨,參判禮、兵者各一,而吏曹參判、大司憲各三拜,兼同知經筵、成均館事、世子右副賓客、備邊司提調,此其踐履也。
最後丙子,納關東節,西儐黃監軍。其冬,虜騎內突,三日薄都城。上卒起幸江都,翁被朝命,先檢察道梁舟舡,卽日兵鋒塞路,大駕卷入南漢城,則與江都隔絶。翁旣未蒙守禦責,又承命水陸防備專委守臣,無使掣肘,唯日夜東望哽涕,而江都遽至淪沒。翁在舟次,幸而得脫不死,亦不幸而不得死。歸朝責配寧邊府,自得罪以來,徽纆矣、鐫削矣、流逬矣、安置矣、栫棘矣,一絓罔而五律加,而極矣無餘刑矣。唯旁觀者雖非號惻隱仁人與黨親平日素相愛眷眷者,卽無不蹙頞閔然哀之也。
顧翁遭離變會,骨肉俱熸鋒鏑,身且寄寓窮塞,忽忽視陰,決知其無復之耳。世方禍烈焚如,八表橫潰,豺虎沸矣、生類殲矣,奈何以莫保之命,爲無益之悲哉?用是寬中自遣,處順委分,朝晡粥飯以聽主宰而已。
翁少好著述,白首不改業,所撰錄摠四千餘篇,盡於兵燼。今老善忘,慮又不及敝帚,謾不省記。姑掇拾人間所傳及草本流落者,存錄其槪,焦尾棄材,誠無足道也。自壬戌以後爲前稿,其目有《宣慰》、《從軍》、《嶺南》、《嘉林》、《卯酉》、《東游》、《關東》、《關西》等錄,辛酉以前,年遠益罕紀,略收爲別稿,其丁丑以後爲詩稿有別序,雜著合前後爲文稿。嗟乎!人生不自後先,丁此艱難世故,危慮未卜朝暮之期,故粗敍生宦歷任,識諸卷端,以畀幼孫。
時崇禎九年之後三年己卯夏盡之月晦,東州山人書。
동주선생전집 서문〔東州先生前集序〕
동주옹(東州翁)은 또한 관해도인(觀海道人)이라고 자호(自號)하였다. 만력(萬曆) 기축년(1589, 선조22) 정월 14일에 태어났다. 여섯 살에 옆 사람이 읽는 수천 자의 글을 틀리지 않고 외웠다. 일곱 살에 문장을 엮을 줄 알았고, 시부(詩賦)를 지었다. 열다섯 살에 초시에 합격하였다. 스물한 살이 되던 기유년(1609, 광해군1)에 진사시(進士試) 장원을 차지하였다. 4년 뒤 임자년(1612, 광해군4)에 삼장(三場) 장원으로 합격하여 비로소 예조(禮曹)와 병조(兵曹)의 좌랑이 되었고, 수찬(修撰)으로 옮겼다. 그럭저럭 10년을 보내고, 임술년(1622, 광해군14)에 일본 사신을 선위(宣慰)하였다.
계해년(1623, 인조1) 개옥(改玉) 뒤에 교리(校理), 지평(持平), 응교(應敎)에 임명되었다. 가장 먼저 사가독서(賜暇讀書) 명단에 올랐는데,유장(儒將)에 천거되어 곧바로 도원수 막하(幕下)의 종사관이 되었다.갑자년(1624, 인조2)에 서열을 뛰어넘어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병인년(1626, 인조4)에는 승정원(承政院)에서 근무하였는데, 직분에 넘어서는 말을 했다가 좌천되어 임천 군수(林川郡守)에 임명되었다. 이때에 도적이 쳐들어오므로 창의사(倡義使)를 겸임하였다.
내직으로는 부제학(副提學)에 다섯 번, 대사성(大司成)에 네 번,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세 번, 대사간(大司諫)과 승지(承旨)에 일곱 번 임명되었는데, 세 번은 도승지(都承旨)를 맡았다. 예조와 병조의 참판(參判)을 각각 한 번씩 맡았고, 이조 참판과 대사헌(大司憲)에는 각각 세 번씩 임명되었다. 동지경연(同知經筵), 성균관사(成均館事), 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 비변사 제조(備邊司提調)를 겸임하였다. 이상은 맡은 관직의 이력이다. 가장 마지막으로 병자년(1636, 인조14)에 강원도 관찰사의 부절(符節)을 반납하고, 서쪽으로 가서 감군(監軍) 황손무(黃孫茂)를 맞이하였다.
그해 겨울에 오랑캐 기병이 국내로 돌진해 들어와 사흘 만에 도성에까지 이르니 임금께서 끝내 강화도로 가시게 되었다. 동주옹은 조정의 명령을 받아 앞서가서 도로와 다리, 선박 등을 점검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날 적병이 길을 막았으므로 임금께서는 길을 돌려 남한산성으로 들어가셨으니, 강화도와 길이 끊겼다. 동주옹은 이미 강화도 수비의 책임을 맡지 않았고, 게다가 육지와 바다의 방비(防備)를 유수(留守)에게 전적으로 맡기니 간섭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므로 오직 밤낮으로 동쪽을 바라보며 목메어 울기만 했는데, 강화도가 갑자기 함락되고 말았다. 동주옹은 배를 타고 있었으므로 다행히 빠져나와 죽지 않았지만, 또한 불행하게도 죽지 못해 조정으로 돌아와 문책을 받아 영변부(寧邊府)로 유배되었다. 죄를 받고 나서 옥에 갇히고, 관직이 깎이고, 유배되고, 안치(安置)되고, 가시나무 울타리 안에 갇히는 등 한 번 법망(法網)에 걸리자, 다섯 가지 형벌이 더해져 극도에 이르니 더 이상 남은 형벌이 없었다. 옆에서 바라보는 이들은 비록 측은지심(惻隱之心)을 지닌 어진 사람과 평소 서로 정성껏 아껴주던 친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얼굴을 찡그리며 걱정스런 모습으로 애석해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돌아보건대 동주옹은 난리(亂離)의 시대를 만나 두 아들은 전란 속에서 죽고 자신도 궁벽한 변방에서 지내면서 어느덧 늙어가니, 다시 어찌할 수 없음을 분명히 알겠다. 그러나 세상은 바야흐로 불타듯 재앙이 일어 온 세상이 마구 무너지고 있다. 승냥이와 범이 들끓고 백성들이 죽어가니, 어찌 보장할 수 없는 목숨으로 보탬이 될 것도 없는 슬픔을 삼겠는가. 이런 생각으로 마음을 너그럽게 하여 스스로를 달래고, 순리대로 처하고 분수에 맡긴 채 아침저녁으로 끼니를 먹으며 주재자(主宰者)의 명령을 따를 뿐이다.
동주옹은 젊어서부터 글짓기를 좋아하여 머리가 허옇게 세도록 자신의 일을 바꾸지 않았다. 지어 기록해 둔 글이 총 4천여 편인데 전란 속에 모두 불타 없어졌다. 지금은 늙어서 잘 잊고, 생각이 또 보잘것없는 글에까지 미치지도 못하니 기억나지도 않는다. 우선 세상에 전해지는 것과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초본(草本)을 주워 모아 대강의 작품을 수록하였으니, 끝이 그을린 버려진 재목이라 진실로 말할 것이 되지 못한다.
임술년(1622, 광해군14) 이후의 것은 전고(前稿)로 삼았으니, 그 목록은 선위록(宣慰錄), 종군록(從軍錄), 영남록(嶺南錄), 가림록(嘉林錄), 묘유록(卯酉錄), 동유록(東遊錄), 관동록(關東錄), 관서록(關西錄)이다. 신유년(1621, 광해군13) 이전의 글들은 세월이 오래되어 더욱 기록해 놓은 것이 드무니, 대략 거두어서 별고(別稿)를 만들었다. 정축년(1637, 인조15) 이후의 시고(詩稿)에는 별도의 서문(序文)이 있고, 잡저(雜著)는 전후의 작품을 합하여 문고(文稿)라고 하였다.
아아, 사람이 태어나는 시기를 스스로 정할 수 없어서 내가 이토록 어려운 세상을 만나게 되었으니 죽음에 대한 위태로운 생각이 아침저녁을 기약할 수 없다. 그러므로 생애와 관력(官歷)을 대강 서술하여 책 첫머리에 기록하여 어린 손자에게 주노라.
숭정(崇禎) 9년(1636, 인조14)으로부터 3년 뒤인 기묘년(1639, 인조17) 6월 그믐에 동주산인(東州山人)은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