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헌이 청와대로부터 연락을 받은 것은 9월 초순께 였다. 우병규 정무 제1수석비서관이 전화로 알려왔다. 이상주 수석 비서관(교육문화 담당)이 찾는다는 것이 였다. 박영길을 만나 청와대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있던 이호헌은 이제나 저제나 부름을 기다리고 있었던 터라 즉각 달려갔다. 이수정 비서관의 안내로 이상주를 만났다. 그는 이호헌을 보자 10년 지기를 만나기나 한 듯 반색을 하며 손을 잡았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이 수석이 박영길 감독을 만나 야구계 실정을 파악하고 난 직후 우병규 정무 제1수석 비서관이 나를 추천 했다는 것이다. 'KBS서 야구해설을 맡고 있는 이호헌일 만나보면 무얼 어떻게 할지 좀더 구체적인 윤곽이 잡힐 것'이라고 해서 나를 불렀다고 했다." -------------------------------------------------------------------------------- 이호헌, 청와대 우병규 추천으로 출범 작업 이호헌과 우병규는 마산상고 동기동창으로 막역한 친구 사이 였다. 이 때만 해도 이호헌은 80년 10월 군부의 숙정작업에 휘말려 대한야구협회 사무국장 직을 내놓은 뒤 할 일 없이 놀고 있었다. KBS야구해설을 맡고 있었지만 야구가 매일 벌어지는 것도 아니어서 야구해설은 소일거리에 불과 했다. 누구보다 이호헌의 처지를 잘 알고 있던 우병규가 친구인 그를 추천한 것은 야구에 관한 자문도 필요했지만 일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기 위한 배려에서 였다. "이 수석을 만났더니 박영길을 만난 것 하며 축구계 인사를 만난 것 등을 보고하듯 들려준 뒤 '속이 확 풀릴만한 얘기를 못들어 답답해서 한번 만나 보고 싶었다'고 했다. 특히 축구 쪽 얘기를 많이 들려줬다. 축구 쪽에선 축구장 시설 자금으로 1백39억원을 정부 쪽에서 지원해 주길 원하고 있다. 이런 막대한 돈을 들여 프로축구를 탄생시키기엔 여력이 없다고 했다. 한 마디로 말해 돈 안들이고 프로야구를 탄생시킬 수 있는 길이 없겠느냐는 거였다." -------------------------------------------------------------------------------- 정부의 자금지원 없이 프로 창단 한다 큰 소리 방법은 있었다. 76년 재미 실업가 홍윤희가 짠 직업야구창단 계획서를 원용하면 못할 것도 없었다. 프로야구가 출범하는데 가장 시급한 문제는 지방 구장의 야간 조명시설이 였다. 홍윤희는 이 비용으로 1개 구장에 5억원씩 30억원을 잡아놓고 있었다. 문제는 이 자금의 염출이 였다. 그 방법만 찾아내면 정부의 자금 지원 없이 프로야구를 탄생시킬 수 있다고 길이 있다고 봤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정부 쪽에서 재정 지원을 해준다면 그 보다 더 좋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체적으로 해결할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건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잘하면 돈 한 푼 안들이고 프로야구를 탄생시킬 수 있을 것 같다." 이호헌의 말에 이 수석은 깜짝 놀라며 "그런 방법이 있느냐?"며 반색을 했다. 이호헌은 "있지요. 있습니다. 1주일 안으로 마스터 플랜을 만들어 갖고 오겠습니다." 라고 응수 했다. 이 말은 들은 이상주는 "좋습니다. 꼭 부탁합니다. 우리 손으로 프로야구를 탄생시켜 봅시다." 라고 말하며 이호헌의 손을 덥석 잡고 흔들어 댔다. 청와대를 나선 이호헌은 대한야구협회 전무이사를 맡았다가 80년 10월 군부의 입김으로 같은 처지가 된 이용일(한국야구위원회 초대 사무총장)을 만났다. 그도 박영길로부터 정부의 스포츠 프로화 추진 작업을 들은 터라 야구의 프로화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대한야구협회서 밀려난 뒤 이용일과 나는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했다. 할 일이 없던 처지라 만나면 잡담을 나누다 영화관을 찾아가 시간을 보내는 것이 대부분이 였다. 이용일은 야구 선수 출신에다 서울대 상대를 나온 탓으로 야구 행정에 관한 한 뛰어난 머리를 지니고 있었다. 프로야구 창단 작업에 그를 도외시할 수 없어 끌어들였다." -------------------------------------------------------------------------------- 20일만에 프로야구창립계획서 만들어 청와대 제출 이용일에게 프로야구 창단 마스터 플랜은 식은 죽 먹기 였다. 앞에서도 말했듯 우선 76년 홍윤희가 짠 '직업야구창단계획서'를 토대로 새로운 프로야구 창단 청사진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 날부터 이호헌과 이용일은 머리를 맞대고 앉았다. 20여 일간 홍윤희의 '직업야구창단계획서'를 뜯어 맞춘 끝에 18쪽짜리 '프로야구창립계획서'를 만들어 냈다. 이 계획서는 76년부터 대학 실업 선수들을 출신 고교 별로 묶어 모교 야구의 전통과 기량을 겨루게 한 '야구대제전'이 대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에 착안, 여기에다 프로화의 바탕을 두고 계획을 전개해 나간 것이었다. 이용일은 야구가 국내 최고의 인기 스포츠로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모교애 30%, 향토애 70%로 분석하고 있었다. 때문에 프로야구가 흥행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향토애 즉 지역 감정을 적극적으로 자극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프랜 차이즈(연고지)제를 도입키로 했다. 지역 감정이 곧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이고 거기서 애국심도 싹 터 정치적으로나 사회적 분규로 발전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졌다. -------------------------------------------------------------------------------- 종업원 3만명 이상 대기업 참여를 전제로 연고제 추진 프로야구 참여 기업은 종업원이 3만명 이상인 재무구조가 견실한 대기업을 우선으로 하고 연고지는 그 기업 총수가 태어난 고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지역 연고와 기업 연고가 함께 묶어져야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 였다. 지방 구장의 조명시설도 문제될 것이 없었다. 연고 구단에 떠 넘기면 쉽게 해결될 문제 였다. 그에 따른 문제점만 정부 차원서 해결해 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봤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프로야구 창단 움직임이 청와대 11인 수석들에 의해 거론되기 이전부터 경남고 11회 졸업생들 사이에서 싹이 텄다는 점이다. 그들 속에는 청와대 수석 비서관 가운데 한명인 이학봉 민정수석비서관도 끼어 있어 눈 길을 끈다. "야구대제전 때면 이학봉씨와 장태영씨(작고. 전 대한야구협회 부회장) 및 박종환씨(전 한국야구위원회 총장)가 모교를 돕기 위해 발벗고 나섰다. 79년부터 이들은 만나기만 하면 '우리 프로야구 만들자'며 두서없이 의견을 내놓곤 했다. 특히 80년 5월 광주민주화항쟁이 일어난 뒤엔 이학봉씨가 민심을 야구쪽으로 돌리기 위해 방법을 찾고 있었다. 아마 이 때 이학봉씨 머리 속엔 프로야구에 관한 어떤 구도가 자리잡기 시작한 것 같다. " 박영길의 설명이다. 때문에 박영길은 광주민주화운동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모였던 11인 수석 비서관회의서 프로야구 탄생 작업이 구체적으로 논의됐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프로야구창립계획서가 만들어진 것은 8월 하순께였다. 지체 없이 청와대에 전해졌다. 청와대서 만나자는 연락이 올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20여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이상하다 싶어 우병규 수석에게 '어떻게 돼가는 판이냐?' 고 독촉을 했더니 그 쪽에서 오히려 역정을 냈다. '왜, 계획서는 안 보내느냐?'는 것이었다. 훗 날 안 사실이지만 이 계획서는 한 비서관이 받아 책상 서랍에 처박아 둬 우 수석이나 이상주 수석을 애타게 만들었다"(이호헌) 뒤 늦게 프로야구창립계획서를 받아 본 이상주는 "그래, 이 거야!" 하며 무릎을 쳤다. 매우 흡족한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로야구창립계획서를 받아 들기 전까지만 해도 이상주는 프로야구를 어떤 형태로 출범시켜야 할지 막막한 상태였다. 그는 우리 프로야구도 미국의 경우처럼 지역 연고제가 되어야 성공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러나 프로야구 팀 수를 몇 개로 할지? 지역 연고는 어떻게 나눌지? 뚜렸한 복안은 없었다. 또 프로야구가 정착하기 위해선 자금력의 뒷받침도 무시할 수 없었다. 한 팀이 한 해 8억원을 쓴다고 봤다. 이 돈의 염출도 문제 였다. 대기업이 참여하면 어느 정도 해소되겠지만 어떤 방법으로 그들을 끌어 들일 지 막막했다. 하지만 프로야구창립계획서엔 이런 궁굼증을 말끔히 해소시킬 방안이 담겨져 있었다. -------------------------------------------------------------------------------- 고교출신 별로 선수 선발, 흥행 고려 6개 팀으로 확정 특히 정부의 지원금 1원 한 푼 없어도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내용이 마음을 끌었다. 정부는 정책적으로 지원만 해주면 된다고 했다. 어려울 것이 없었다. 야간조명시설에 대한 자금은 5개 구단(서울 제외)서 2년 거치 3년 분할 상환할 수 있도록 융자해줄 수 있고 야구장 입장세(20%) 또한 프로야구가 정착할 때(5년간)까지 유보할 수 있었다. 프로 선수의 징집 문제도 아마 선수와 동일하게 혜택을 받게 할 수 있었다. 프로야구창립계획서는 서울, 부산 및 경남, 대구 및 경북, 광주 및 전남 북, 대전 및 충남 북, 인천 및 경기 강원지역을 한 연고지로 묶어 6개 팀을 만드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대학 및 실업 선수들을 고교 별로 분류하면 수급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선수들의 대우가 문제였다. -------------------------------------------------------------------------------- 특급선수 4천4백만원 지급, 실업선수 10년치 봉급에 해당 81년 당시만 해도 국가대표급 선수들이 실업 팀에서 받는 월급은 보너스까지 합쳐 연간 4백80만~5백만원 수준이 였다. 프로선수라면 이 보다는 높은 연봉을 받아야 했다. 또 하나 실업 선수들은 정년까지 직장이 보장되지만 프로 선수들에겐 이런 보장이 없었으므로 실업 선수가 10년 동안 벌 수 있는 돈을 1년에 벌 수 있도록 뒷받침해줄 필요가 있었다. "선수에 대한 대우는 한국화장품서 활동하고 있는 김봉연(현 해태 코치)을 모델 케이스로 삼았다. 그가 실업 팀서 받는 봉급은 보너스까지 합쳐 연간 4백80만원 선이 였다. 그러니까 연간 5백만원 이상을 받게 해주면 불만이 없을 것으로 봤다."(이용일) 이를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안이 선수의 능력에 따라 받을 수 있도록 특급에서 F급까지 7등급으로 분류했다. D급을 기준으로 삼았다. 계약금 5백만원에 연봉은 6백만원으로 책정했다. 실업 최고의 선수들을 능가하는 대우였다. 그 뿐이 아니다. 특급 선수로 분류될 경우 거금을 손에 쥘 수도 있었다. 특급 선수의 경우 계약금 2천만원에 연봉 2천4백만원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감독의 경우도 A급은 계약금 2천만원에 연봉 1천2백만원. 한마디로 말해 파격적인 대우였으니 야구 선수면 누구나 침을 흘릴만한 했다. 당시만 해도 2천만원은 대단한 금액이었다.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24~28평짜리 아파트 한 채를 충분히 구입할 수 있는 돈이었다. 프로야구에 참여할 기업도 12개 업체로 선정되어 있었다. 모두 국내에선 내노라 하는 대기업들이었다. 그렇다고 무조건 참여시킬 수도 없었다. 재무구조가 제 아무리 튼튼하고 종업원의 수가 3만명을 넘어도 그 기업체의 총수가 연고지 출신이든지 아니면 기업의 연고성이 있어야 했다. 이런 기준 아래 선정된 기업이 서울지역은 MBC(제1안)와 두산그룹(제2안)이었다. 노른자위라 할 서울지역에 MBC가 선정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MBC는 청와대 12인 수석 비서관들이 프로야구 창설을 발의하기 이전인 81년 5월, 창사 20주년을 맞아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프로야구 팀을 창단한다는 구상을 세워 놓고 있었다. 전국적인 조직이 아닌 축구의 '할렐루야' 팀 같이 우수 선수들을 뽑아 1개 팀을 창단해 프로야구의 싹을 틔운다는 구상이었다. -------------------------------------------------------------------------------- MBC 창사 기념 프로 팀 창단 발표 후 기득권 주장 "MBC의 프로야구 창립안이 정부에 보고된 것은 6월초였다. 때문에 MBC는 기득권을 주장하며 연고지로 서울을 고집했다. 어차피 프로야구를 PR하기 위해서는 매스콤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시점이어서 방송사의 참여를 받아 들였다. 그러나 만에 하나, MBC의 불참을 고려해 두산그룹을 후보로 제2안에 포함시켰다. 두산의 박용곤 회장 출생지가 서울이어서 연고권을 인정한 것이다"(이용일) 경기 강원지역은 현대그룹을 제1안에, 한국화장품과 제2안에 올랐다. 현대의 주력 기업체들이 울산에 있었지만 그룹 총수인 정주영 회장의 연고지가 강원도 통천이어서 연고 기업이 됐다. 한국화장품은 기업체나 총수의 연고지가 모두 경기도였다. 총수인 임광정 회장은 개성이 고향이었고 기업체는 부천에 있었다. 충청남북도의 연고 기업으로는 제1안에 동아건설이, 제2안에 한국화약이 선정됐다. 동아의 최원석 회장은 대전이 고향이었고 한국화약의 김승연 회장은 천안이 고향이었다. -------------------------------------------------------------------------------- 현대, 삼성 등 대그룹 재력 바탕 팀 창단 후보 선정 대구와 경북지역도 기업체의 연고성과 총수의 연고에 따라 삼성그룹(제1안)과 코오롱그룹(제2안)이 선정됐다. 삼성그룹 총수인 이병철 회장의 연고지는 경남 의령이어서 부산과 경남지역을 맡아야 했다. 그러나 그룹의 창업 발상지가 대구여서 기업 연고를 우선으로 했다. 그러나 코오롱은 기업보다 총수의 연고를 따랐다. 이동찬 회장의 연고지가 경북 영일이었기 때문이다. 부산 및 경남지역은 총수의 연고에 따라 롯데그룹과 럭키 금성그룹이 선정됐다. 롯데의 신격호 회장은 경남 양산에서 태어났고 럭키금성의 구자경 회장은 경남 진양이 고향이었다. 전남북도 마찬가지였다. 제1안에 삼양사, 제2안에 금호그룹이 올랐다. 삼양사의 김상홍 회장은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선대의 고향이 전북 부안이라는 인연으로, 금호그룹의 박인천 회장은 광주가 고향이었다. 특히 박 회장은 누구보다 애향심이 강해 프로야구를 창설할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프로야구 창단 작업은 뜻대로 풀려나가지 못했다. 의외의 복병이 숨어 있어 연고 기업 선정을 다시 할 수 밖에 없었다 "프로야구 창립 계획서의 안대로 서울, 인천, 대구, 대전, 부산, 광주에 각각 한 팀씩 6개 팀을 만들기로 하고 곧 연고 기업 물색에 나섰지만 문제가 생겼다. 암암리에 프로야구 팀 창단을 서둘러 오던 MBC의 소식이 KBS 쪽에 흘러 들어가자 이진희 사장과 사이가 원만치 못했던 이원홍 사장이 가만 있을 턱이 없었다. 브레이크를 걸고 나섰다. 그 때문인지 이진희 사장이 프로야구 팀 창단을 보고하고 난 뒤 어느 날 전두환 대통령이 'MBC는 안 하는 게 좋지 않느냐'고 속내를 내비친 일이 있다." 그러나 이상주의 생각은 달랐다. 방송이 참여해야 프로야구를 확산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 일단 MBC를 참여 시킨 뒤 프로야구가 제자리를 잡으면 그 때 가서 포기토록 종용해도 늦지 않다고 봤다. -------------------------------------------------------------------------------- MBC 프로야구 창단 움직임에 KBS서 브레이크 "전두환 대통령이 프로야구 창단 과정에서 속마음을 넌지시 내비쳤던 것은 이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이상주) 프로야구 창단 작업이 무르익어 갈 무렵이었다. 새마을 성금을 기탁한 기업인들이 전두환 대통령의 초청으로 청와대서 저녁 식사를 한 일이 있다. 이 자리에서 축구협회 최순영 회장이 프로축구 활성화를 위해 전 대통령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자 전 대통령은 옆에 있던 선경그룹 최종현 회장에게 "최순영 회장이 할렐루야 팀을 창단했으니 이번엔 선경에서 나무아미타불 팀을 만들면 되겠습니다." 했다. 물론 농담이었다. 전 대통령은 육사에서 축구 선수로 활약한 일이 있다. 그 때문인지 한가한 시간이면 축구 중계 방송을 즐겨 봤다. 하지만 축구의 프로화에 대해선 단 한 마디 지시도 없었다. 전 대통령도 프로축구는 시기상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상주 역시 마찬가지었다. 축구는 우리 국민이면 누구나 좋아하는 스포츠였다. 외국 팀과 경기가 있는 날이면 축구장은 관중들로 만원을 이루기 예사였다. 하지만 고교 축구나 실업 축구는 항상 썰렁하기만 했다. 이에 비해 야구는 정반대였다. 고교야구가 벌어졌다 하면 서울운동장 야구장(현 동대문구장)은 인산인해로 뒤덮여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 프로축구도 출범 서둘자 관중 분산 우려해 반대 "최순영 회장은 프로야구를 창설하는 김에 프로축구도 더불어 창설되길 원했던 것 같다. 하지만 야구와 축구를 동시에 창설할 경우 관중에 실패할 확률이 높다고 봤다. 때문에 야구를 먼저 프로화해 정착시킨 다음 프로축구도 창설할 생각이었다. 처음부터 프로 스포츠로 야구를 선택했던 것은 인기라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었지만 TV중계에도 적합해 매 이닝이 끝날 때 마다 광고를 붙일 수 있어 그에 따른 수입도 고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MBC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지지할 수 밖에 없었다.(이상주)" 이런 사정을 모르는 MBC 쪽에서 기득권을 주장하고 있어 난감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이진희 사장은 MBC가 주체가 되어 프로야구를 창설하는 것은 물론 MBC구단주와 프로야구 총수(커미셔너) 까지 맡겠다고 나섰다. 연고지도 서울 지역을 그것도 단독으로 맡겠다는 것이었다. 프로야구 창설 작업에 참여했던 청와대 수석 비서관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호헌과 이용일은 기가 찰 수 밖에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