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키스타디움에 취재를 하려고 들어설 때마다 조금은 신비한 느낌을 받습니다. 대개 경기가 열리기 3~4시간 전에 도착하면 텅 빈 운동장엔 적막만이 가득하지만, 마치 수많은 ‘야구의 신’들이 그곳을 지켜주고 내려다보는 듯한 그런 느낌이 들곤 했습니다.
좌측 외야 펜스 뒤에 양키스 명예의 전당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만큼 뉴욕 양키스는 전설과 같은 ‘영웅들의 팀’이었고, 양키스타디움은 ‘메이저리그의 메카’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무려 45번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고 그중에 26번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양키스는 1901년 볼티모어 오리올스라는 이름으로 출범했습니다. 그러나 불과 2년 만에 팀이 파산 지경에 이르자 뉴욕의 프랭크 파렐과 빌 디베리가 구단을 매입해 뉴욕으로 팀을 옮깁니다.
브룩클린 다저스와 뉴욕 자이언츠에 이어 세 번째 뉴욕 팀이 됐는데, 맨하탄의 브로드웨이와 168가에 완전히 나무로 급조된 야구장을 지었습니다. 그 지역이 맨하탄에서는 가장 높은 곳이었기 때문에 처음에 팀의 별명은 ‘하일랜더스(Highlanders)’, 홈구장의 이름은 ‘힐톱 파크(Hilltop Park)’라고 지었습니다.
1903년 4월22일 워싱턴 세네터스에 3-1로 패하면서 뉴욕에 공식 데뷔한 양키스는 다음날 세네터스에게 7-2로 첫 승리를 거뒀습니다.
초창기 양키스는 이렇다할 성적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뉴스거리라고는 1911년 대화제로 자이언츠의 폴로그라운드가 큰 피해를 입자 양키스가 힐톱 파크를 함께 사용하게 해주었고, 2년 후 폴로그라운드가 재건되자 이번에는 자이언츠가 양키스에게 새 구장을 함께 사용하도록 해주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그해 1913년에 ‘양키스’라는 별명이 공식적으로 확정됐습니다.
양키스 역사상, 아니 미국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중요한 날은 1920년 1월3일이었습니다. 양키스는 보스턴 레드삭스에게 12만5000달러의 이적료와 35만달러의 융자를 해주고 조지 허만 ‘베이브’ 루스라는 투수겸 타자를 영입했습니다.
1910년대에 80승 이상을 거둔 해가 단 두 번에 불과했던 양키스였지만 루스의 영향력은 대번 드러났습니다. 1920년 95승을 거둔 양키스는 1921년 팀 사상 첫 AL 챔피언에 올랐습니다. 루스가 양키스에 데뷔한 1920년 폴로그라운드를 찾은 양키스 관중은 128만9422명으로 전년도의 두 배가 넘었습니다.
양키스는 1921년과 1922년 연속으로 월드시리즈에서 뉴욕 자이언츠에 분루를 삼켰는데, 관중 동원에서 루스의 양키스에 계속 열세를 보인 자이언츠는 폴로그라운드를 비워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경기 직전의 양키스타디움
1922년 5월5일 새로운 구장의 건축이 시작됐고, 284일 만에 관중 7만을 수용하는 최초의 3층짜리 관중석을 구비한, 당시로서는 초현대식 야구장이 건립됐습니다. ‘스타디움’이라는 단어가 처음 붙은 야구장인 양키스타디움은 1923년 4월18일 7만4200명의 관중이 운집한 가운데 화려한 시즌 개막 경기를 펼쳤습니다.
상대팀은 당연히(?) 보스턴 레드삭스였고, 루스가 3점 홈런을 터뜨린 양키스가 4-1로 승리를 거뒀습니다. 양키스타디움은 구름 관중을 몰고 다닌 루스 때문에 지을 수 있었다고 해서 ‘루스가 지은 집(The House That Ruth Built)’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는데, 37번의 월드시리즈가 치러지고, 26번이나 ‘챔피언 양키스’를 탄생시킨 전설이 만들어진 구장이 됐습니다.
설명이 필요 없는 베이브 루스뿐 아니라 양키스는 정말 많은 영웅들을 끊임없이 배출했습니다.
1925년 5월1일 당시 밀러 허긴스 감독은 21세의 신인 1루수를 워싱턴전에 대타로 기용했는데, 이 선수는 그날부터 2130게임을 한번도 빠지지 않고 뛰게 됩니다. 1939년 불치의 병으로 은퇴할 수밖에 없었던 루 게릭이 바로 그 선수였습니다. 미국 독립기념일에 양키스타디움에서 열린 은퇴식에서 게릭은 팬들의 사랑에 깊은 감사를 표하며 “이 순간 저는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Today, I consider myself the luckiest man on the face of the earth)”라는 말을 남겨 수많은 팬들의 눈시울을 적시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2년의 투병 생활 끝에 사망했습니다.
루스와 게릭이 이끄는 양키스는 천하무적이었습니다. 1927~28년 연속 월드챔피언에 올랐고, 루스는 1927년에 불멸의 기록으로 여겨지던 한 시즌 60홈런을 기록했습니다. 체격이 통통했던 루스를 날씬하게 보이기 위해 만들었다는 양키스의 줄무늬 유니폼(pinstripes)을 입고 뛴 15년 동안 양키스는 7번의 AL 우승과 4번의 월드챔피언에 올랐습니다. 루스는 통산 714개의 홈런에 12번의 홈런왕과 6번의 타점왕을 차지했는데, 여전히 ‘사상 최고의 선수’로 존경받습니다.
1934년 루스가 양키스에서 마지막 시즌을 보내고 있을 때 양키스는 퍼시픽코스트리그 샌프란시스코 실스의 조셉 폴 디마지오라는 선수와 계약을 맺었습니다. 마이너리그를 거쳐 2년후 양키스에 데뷔한 조 디마지오는 1936년부터 4년 연속 월드시리즈를 차지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루스가 은퇴하고 게릭 마저 병으로 쓰러진
조 디마지오
후 디마지오는 양키스의 간판이었습니다. 디마지오가 뛴 13년간 양키스는 11번이나 월드시리즈에 진출해 10번의 우승을 거뒀습니다. 1941년에는 여전히 깨지지 않고 있는 56게임 연속 안타의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같은 해 마지막 4할 타자가 된 테드 윌리암스를 제치고 MVP를 수상한 선수가 디마지오였지요.
마릴린 먼로와 결혼했다가 이혼하면서 큰 화제를 몰고 오기도 했던 디마지오는 ‘젠틀맨’의 대명사로 미국인들의 깊은 사랑을 받다가 지난 99년 85세로 타계했습니다. 매년 생일이면 빠지지 않고 먼로의 무덤에 장미꽃다발을 안겼던 디마지오는 미국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야구 선수였습니다.
디마지오의 뒤를 이은 영웅은 전혀 다른 이미지의 스위치 타자 미키 맨틀입니다. 통산 536홈런을 기록한 맨틀이 뛴 14년간 양키스는 딱 두 번 월드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했습니다.
그 외에도 양키스가 배출한 스타들은 양손으로 도저히 꼽지 못할 정도입니다. 40년대 말부터 60년대 초까지 18년간 포수 마스크를 쓴 요기 베라, 1930년대를 풍미했던 명예의 전당 멤버인 두 투수 레프티 고메스와 레드 러플링, 236승106패로 20세기 최고 승율(69%)을 자랑한 화이티 포드, 그리고 1956년 10월8일 다저스를 상대로 월드시리즈 유일의 퍼펙트게임을 던진 던 라센, 한 시즌 61홈런을 기록한 로저 메리스 등이 줄무늬 유니폼을 입고 활약했습니다.
1964년 월드시리즈에서 세인트루이스에게 패한 뒤 암흑기를 겪었던 양키스는 1973년 조지 스타인브레너가 CBS로부터 팀을 인수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됩니다. 양키스는 1976년 월드시리즈에 복귀했고, 1977년 다저스를 상대로 펼친 월드시리즈에서 새로운 영웅 레지 잭슨이 딱 세 번의 스윙으로 홈런 세 개를 터뜨리며 ‘10월의 사나이(Mr. October)’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양키스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영웅 단 매팅리는 ‘다니 베이스볼’이라는 애칭으로 1995년까지 13년간 활약했지만 한번도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하지 못하는 불운의 사나이가 되기도 했습니다.
1996년 방송 해설자를 거쳐 감독으로 복귀한 조 토레가 이끄는 양키스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를 꺾고 다시 정상에 오른 후 3년 연속 우승을 포함, 5년간 네 번이나 정상에 오르며 새로운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습니다. 최근 11년 연속으로 포스트 시즌에 진출한 양키스는 올시즌도 데릭 지터와 에이로드, 랜디 존슨, 마쓰이 히데키 등의 스타들을 앞세워 또 한번 챔피언 탈환을 노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