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품만 있다면 민간인도 얼마든지 조립할 수 있는 극단 간이소총!! 품질은 사실상 사제총, 안전성과 정밀도는 타협할 수 있는 최악의 저질급 소총!! 나치 독일의 최후 발악!! 독일 총기 개발사의 수치이자 치욕!!
대략 이 정도로 요약이 가능한 소총이 바로 독일의 국민 돌격소총이다. 이 소총은 본인이 보기에도 참으로 눈물겨울 정도로 극악 단순한 소총으로 비록 대우정밀 등 방위산업체에서 근무한 적이 없지만 양손에 조립 도구와 부품만 있다면 간단하게 프라모델 조립하듯 1정을 제조할 수 있을 정도의 소총이다( 이 정도면 뭐 할 말 다했다 ) 어쩌다가 당시 세계 최강의 공업국가이자 시계의 강국 스위스 못지 않은 장인 정신을 가진 독일에서 이런 어이없는 사제총( 社製銃 이 아닌 私製銃 )을 만들었냐? 퍼싱의 전쟁영화 이야기를 꾸준히 방문했던 분들은 대충 원인을 알 것이다. 1944년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소련의 바그라티온 작전이 연이어 성공을 거두면서 독일군은 참담한 패전의 도미노 현상과 더불어 심각한 무기 부족 현상에 처하게 된다. 이것이 단순한 무기 부족 현상이라면 참으로 다행이겠지만( 공장에서 신규 생산된 것들을 최대한 신속하게 보충하면 되니 ) 당시 독일의 무기 생산 능력은 이러한 손실을 보충할 수 있는 수준에 한참 못미친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니나 다를까 연일 연합군의 공습으로 공장이 가동 중지되는 일이 잦아지고 동서 양측의 전선을 동시에 유지하고 있으니 공장의 근로자들이 노동시간을 초과하고 기계들이 쉴새없이 풀가동되어도 그 생산량이 전선에서의 요구량과 손실량을 보충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당시 독일군에게는 이 상황이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고 결국 가장 민감하게 이 문제를 받아들인 제국 군수상 알베르트 슈페어( Albert Speer )는 전차나 항공기, 야포 등의 중화기는 어쩔 수 없다치더라도 최소한 군의 가장 기본적인 화기인 보병 병기의 부족만큼은 어떻게든 해소해 보기위한 특단의 조치를 취하게 되니 바로 1944년 4월, 보병 병기 특별위원회 설치가 그것이다. 전선에서 올라오는 일선 병사 및 장교들의 고충을 받아들여 신설한 이 위원회의 목적은 바로 한정된 자원과 생산 능력으로 독일군 및 무장 친위대의 부족한 총기 부족분을 보충할 정도로 생산성이 높고 튼튼하며 정밀도가 높은 신형 총기를 개발( 너무 독일적인 목적이 아닌지? )함과 동시에 제식소총인 Kar-98K와 StG 44 소총, MG 42 기관총 등의 기존 총기들의 생산량을 늘리며 여기에 당시 엉망진창 난장판 그 자체였던 독일의 신형 총기 개발 체계를 제대로 정리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또 무슨 소리인가? 하니 자세히 들어보시길. 당시 독일의 총기 개발은 군의 요구로 방산업체에서 개발하는 것 외에도 총기 선정에서 탈락한 업체들의 로비로( 예나 지금이나 전쟁 특수로 인한 무기 생산으로 막대한 이익을 챙기려는 업체들이 많은 것은 여전하다 ) 개발된 총기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총기들( 후자 )이 채용이 되지 않을 경우 사실상 안그래도 부족한 돈과 자원, 시간만 낭비한다는 것이었다( 당장 전선의 상황이 엉망인데 기존의 총기들의 생산량을 높일 생각은 안하고 어떻게든 자사의 총기를 채용시키려는 딴짓만 해대는 셈이다 ) 이러니 제국 군수상을 맡고 있는 알베르트 슈페어의 입장에서는 속이 뒤집어질 노릇이 된 것이다. "지금 전선의 상황을 저들이 알고나 있는 것인가? 일선의 병사들은 한 정의 총이 아쉬울 판인데 어떻게든 생산량을 늘려볼 생각은 안하고 엉뚱한 짓만 저지르다니..." 슈페어가 보병 병기 위원회를 설립한 것은 이러한 폐단을 근절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고 실제 이 위원회가 설립된 이후 그야말로 난장판 그 자체였던 독일의 신형 총기 개발은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다. 신규 개발이 시작될 모든 총기들이 우선적으로 위원회의 검토를 받은 후 슈페어의 승인이 떨어져야만 개발을 시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안정 상태가 오래가지를 못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바로 점차적으로 전선이 독일 본토로 다가오는 가운데 드디어 나치당에서 국민 돌격대( Volksturm )를 창설한 것이다.
독일도 드디어 갈데까지 가버렸다! 청년들을 군에 징집하는 것으로 모자라 이제 나이든 노인과 소년들까지 동원한 이른바 "국민 돌격대"를 창설한 것!! 판저 파우스트를 든 이들의 모습은 사뭇 용맹한 게르만족 전사라기 하기에 너무나도 처량해 보인다.
이것은 참으로 국가의 운명이 다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우리로 치면 '의병'정도가 되겠지만 문제는 우리의 '의병'은 국민들이 분연히 일어난 것이지만 국민 돌격대는 나치당에서 나이든 시민들을 징집한 것이 차이라 해야겠다. 그래, 다 좋다. 아무튼 이런 식으로라도 막대한 병력 손실을 본 독일군의 부족한 방어지역을 보충할 수 있다면 그게 어디겠는가? 문제는 모자라는 물자로 인해 구멍 뚫린 C급 군복이나 철모를 완전하게 지급해 주지는 못하더라도 이들이 들고 싸울 총이 없었던 것이라 하겠다. 세상 어느 나라 군대가 병력을 충원해 놓고 지급해줄 총이 없어서 우왕좌왕하겠냐만은( 뭐, 옆동네 일본은 미군이 본토에 상륙하면 센코쿠지다이처럼 죽창 만들어서 집단 돌격하자고 했으니 패스~ ) 당시 독일이 그러했다. 당연히 나치당으로서는 우선 Gew88( 아무리 그래도 이 총을 지급할 생각을 )이나 Gew98과 같은 제1차 세계대전의 유물들을 지급하기 시작했지만 이 정도로는 택도 없었고 결국 이들이 쓸 총기를 별도로 개발해야 했지만 이 때 슈페어가 반대를 한 것이다.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국민 돌격대를 위한 총을 개발하자고요? 제 정신으로 하는 소리입니까? 제가 보기에도 전장에 내보내기가 참으로 염려되는 이들을 위한 총기를 개발해 생산하게 되면 일선의 병사들이 사용할 총은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공장의 모든 라인을 총가동해도 일선에서 요구하는 총기의 양을 보충하고 있지 못하는 것을 알고나 있는 것입니까?" 정말 당시 정신이 똑바로 박힌 이들이라면 이 안건이 얼마나 황당할 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비교적 간편하게 생산할 수 있는 Kar-98K조차 월 30만정 생산이 최대였던 것을 감안한다면 StG 44나 G43, MG 42와 같은 총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슈페어의 반대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고 히틀러 총통조차 처음에는 슈페어의 손을 들어줬다. 여기에 슈페어는 현재의 총기 생산률을 보다 향상시켜 독일군과 무장 친위대의 총기 부족을 해소하고 이 총기들을 국민 돌격대에게도 지급할 수 있다는 확고한 제안을 한다. 그러나 시간은 슈페어의 편이 아니었으니... 워낙 전황이 다급하다 보니 한정된 자원과 생산 라인으로는 더 이상의 생산률을 높일 수가 없게된 것이다. 여기에 방산업체들이 더 이상 슈페어의 위원회를 통해 자신들의 총기를 채용시킬 수 없게 되자 나치당의 관구장에게 로비를 펼쳐 멋대로 총을 생산하려 하기에 이르렀다. 아니? 관구장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이것을 설명하자면 우리나라의 각 정당들이 각 도와 시별로 지구당을 가지듯 나치 역시 하나의 정당인만큼 각 관구( Gau )의 관구장들이 있었고 이들은 자신의 관구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문제는 관구장들 입장에서는 당 수뇌부로부터 "빨리 당신의 관구 내 국민 돌격대원들을 무장시키시오!"라고 닥달해대는 것을 견뎌내기가 어려웠다는 점이고 이 때문에 해당 관구내 방산업체들이 관구장들에게 로비를 펼친 것이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자 슈페어로서도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게 되었다. 하지만 국민 돌격대 전용 소총( 이른바 국민 돌격소총, Volks Gewehr )의 개발 자체를 완전히 봉쇄할 수 없게 되자 슈페어는 차선책을 내놓게 된다. 그것은 각 관구내의 방산업체가 설계한 총기들이 무더기로 채택되는 것이 아닌 가급적이면 한 종류의 총으로 통일시켜 독일군과 무장 친위대가 필요로 하는 총기의 생산에 차질을 빚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 발생한다. 독일인이자 탁월한 건축가로서 활동했던 슈페어답지 않은 요구조건이 나온 것이다.
"명중률이나 정밀도는 아주 낮아도 상관없소. 아니, 아예 10발 중 1발만 맞아도 상관없소. 다만 값이 저렴하고 단시간내에 대량 생산이 가능하되 튼튼하게만 설계하시오. 대신 일선의 병사들이 요구하는 총기의 수요량은 반드시 채워야 하오" 명중률이나 정밀도가 형편없어도 된다는 것은 참으로 황당할 소리였지만 일단 요구조건이 나오자 총 7개의 총기 제조 회사들이 개발을 시작했고 그 중 하나가 최초의 국민 돌격소총으로 채용되니 바로 P-38과 PPk 등으로 유명한 발터사의 총이었다( 세계 군용 권총 중 상당히 복잡한 것을 개발한 회사에서 가장 투박하고 엉망진창인 사제총을 개발했다는 것이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꼴이다 ) 1944년 12월, 히틀러 총통의 승인으로 제1호 국민 돌격소총( Volks Gewehr Eins, VG-1 )으로 제식 채용된 이 총은 대충 봐도 거의 눈물이 나올 지경이라 할 지경이다. 당장 부품과 용접기만 있으면 아주 늦어야 3시간 정도 걸려 간단하게 수작업으로 조립할 수 있는 총이니 말이다. 거의 사제총이라 해도 무방한 것이다.
VG-1이 얼마나 단순한 총인지를 보여주는 부분. 아래 사진은 노리쇠를 분해한 것으로 이 부품들이 노리쇠의 전부다!! 공이는 가공 자체를 할 것도 없이 그냥 철판을 잘라냈고 장전 손잡이는 단순하게 쇠막대기를 용접했다. 그야말로 용접기와 부품만 있으면 민간인도 어렵지 않게 수작업으로 조립할 수 있는 사제총인 셈이다.
가늠자와 가늠쇠는 너무 단순한 나머지 정말 표적이 될 적병에게 향하는 것만으로도 대박이라는 평가를 내릴 정도로 형편없었고 방아쇠와 '공이'는 가공할 것도 없이 아예 철판을 적당한 형태로 잘라낸 것이었다(
) 장전 손잡이 역시 사용자의 편의성을 완벽하게 무시한 채 그냥 적당한 굵기의 쇠막대를 용접해 놓은 것이었고( BB탄 사용 에어 소프트건도 이것보다는 낫다 ) 웬만해서는 내구성 문제로 쇳덩어리를 깎아 만드는 이른바 "절삭 가공" 부품을 거의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철판 부품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목재 총몸은 목재 절약을 위해 사냥용 엽총이나 사격 대회용 소총을 방불케했고 착검 기능은 아예 없었다( 국민 돌격대가 착검하고 미군과 정면으로 백병전을 벌인다는 상황 자체가 상정되지 않은 셈 ) 급탄 기능은 그나마 Kar-98K보다 나은 구석이 있었으니 바로 G43용 10발들이 탄창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볼트 액션 소총에 굳이 탄창을 쓸 필요가 있느냐? 라는 의견도 있겠지만 당시 독일 입장에서는 그런 것을 따질 여유가 없었다. 발터사의 코미디 못지 않게 더욱 더 박장대소할 일은 바로 총열!! 철공소에서도 쉽게 생산할 수 있고 민간인도 용접기와 부품만 있으면 간단하게 조립할 수 있는 품질의 VG-1이었지만 총열만큼은 도무지 대충 생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문제는 독일군용 총기를 생산하는 발터사 입장에서는 모자랄대로 모자란 총열을 VG-1에 돌릴 수 없었던 것. 그런데 당시 독일에는 기가 막힌 대용품이 있었으니 바로 할 일이 없어진 독일 공군의 폭격기용 기관총에 장착될 예비 총열들이 무려 40만개나 비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기관총 부족에 시달린 공군 야전사단들이 아쉬운대로 폭격기용 기관총을 보병용으로 개조해 사용하는 일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만한 양이 비축되어 있었으니 아쉬운대로 이 총열들을 국민 돌격소총에 유용할 수 있었던 것!! 그 결과 아주 재미있는 희극이 탄생하니 품질이나 스펙으로는 완벽한 사제총 그 자체이면서도 총열만큼은 아주 정밀하면서도 견고한 기관총용 총열이 장착되는 고급스러운 사제총이 채용된 셈이다.
그렇지만 이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제1호 국민 돌격소총은 나름대로의 문제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제조를 담당한 발터사의 내부 사정이었다. 당시 발터사는 VG-1만을 생산하기가 너무 벅찼고( 무엇보다 독일군용 총기가 우선이니 ) 이 때문에 여러 회사들이 도면( 뭐 도면이라 하기에도 민망할 수준으로 단순하지만 )을 받아 생산을 했지만 독일군을 위한 제대로된 총기들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생산량은 지지부진했고 결국 전쟁이 끝날 때까지 생산된 VG-1은 대략 16,000~20,000정 정도가 고작이라고 한다. 하기사 이런 사제총보다는 제대로된 성능의 군용 소총이 전쟁에 더욱더 필요한 것이겠지만 말이다.
일이 이렇게 되자 나치당의 관구장들은 결국 자신의 관구 내에서 별도의 국민 돌격소총들을 채용해 생산( 물론 독일군용 총기의 생산에는 차질을 빚지 않는 선에서 )했고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생산이 승인된 VG-2, VG-3, VG-4, VG-5 등의 총기들이 모습을 드러냈지만 대부분 2만정 이상을 넘기지는 못했다. 이 중 슈프리베르케사에서 설계한 VG-2나 Kar-98K를 생산한 마우저의 VG-3, VG-5 등은 그야말로 세계적인 총기 제조회사였던 자사의 이미지에 완벽하게 먹칠을 했고 현재 남아있는 국민 돌격소총들은 태평양 전쟁 중후반기에 생산된 38식, 99식 소총처럼 소유주들이 가급적 사격하는 것을 자제하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충고다. 하긴, 영화 촬영해도 프롭건으로 제작하기가 더 쉬운 총이니 차라리 새로 제조하는 것이 더 저렴하겠지만...
하지만 이처럼 모습을 드러낸 국민 돌격소총 중 가장 고성능의 총이 있었으니 바로 구스틀로프사의 총이 그것이다. 이 총은 기존의 국민 돌격소총들이 볼트액션식인데 비해 반자동이라는 점이 이색적인데 이는 사용탄이 7.92mm×57이 아닌 7.92mm×33, 즉 7.92mm K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반동이 적은 돌격소총탄이었으니 반자동 소총으로 쓰기에 적합했고 그 결과 이 총은 국민 돌격대용 소총 중 가장 고급스러운 총이었지만 아쉽게도 1만정 가량 생산이 되고 끝났다( 더욱 재미있는 사실은 이전의 국민 돌격소총들이 워낙 급격하게 부족한 VG-1의 생산으로 인해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채용된 반면 이 총은 워낙 고급스러워 히틀러 총통 본인이 끝까지 채용을 거부했다는 점이다 )
슈프리베르케에서 설계한 VG-2 소총. 본인이 국민 돌격소총 중에서 그나마 설계는 잘했다고 평가하는 소총이다. 사냥용 엽총이나 사격 대회용 소총을 방불케하는 기존의 국민 돌격소총과 달리 그나마 제대로된 군용소총의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이 총 역시 가늠자나 가늠쇠의 조준은 사실상 포기하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기 충분했고 특히 안전성에서 최악이었기 때문에 이 총을 소유한 이들은 가급적이면 사격을 안하고 그냥 전시만 한다고 한다. 이 총 역시 생산성 향상을 위해 주요 부품의 상당수가 철판으로 제조되었고 생산량 역시 16,000정 정도에 불과하다.
가장 럭셔리하면서도 그나마 화력에서는 연합군에 뒤지지 않게해준 구스틀로프 국민 돌격소총. 볼트액션식인 기존의 국민 돌격소총에 비해 반자동이라 상당히 고급스러웠고 이 때문에 이 총은 히틀러 총통마저 승인을 거부한 총이다. 하지만 대전 말기의 혼란 속에 1만정이라는 만만치 않은 양이 생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