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미래도 있지만 오래된 인연도 있다.
이 세상에 태어나 수많은 사람을 만나며 살다가 간다.
그 사람들 속에는 어느 때 오고 갔는지 그 흔적도 남기지 않은 사람도 있지만
아름답고 슬픈 기억들을 너무도 많이 남아 있는 사람도 있다.
나에게는 박기성이라는 사람이 그렇다. 글은 안 쓰여지고, 삶이 지리멸렬할 때
<사람과 산>의 편집장이었던 그가 나에게 <동학농민혁명 백주년>에 즈음하여
동학 연재를 해달라고 해서 연재했고,
그때부터 글이 쓰여져 <동학의 산, 그 산들을 가다.>를 1995년에 펴내고
백여 권의 책을 펴낼 수 있었으니,
그는 나에게 글의 물꼬를 터준 사람이다.
박기성씨가 <산서회> 회장이 되어 강연을 부탁해서
서울 시청에서 강연을 하고 돌아오는 심야 버스 속에서 많은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현세에 사는 사람들도 그렇지만 이미 역사 속에 묻힌 사람들의 인연이
가슴을 애틋하게 하는 사람도 더러는 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중종 때의 학자인 김일손이다. 오래 전에 그가 묻혔다는 천안시 동면에 갔지만 그의 무덤도 찾을 수가 없어 쓸쓸한 마음만 머금고 돌아왔었다.
그 김일손에 관한 글이<사우언행록>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교리 김일손의 자는 계운季雲인데, 참으로 세상에 드문 재질이며 묘당廟堂(조정)의 그릇이다. 소장疏章(상소문)과 차자箚子의 글이 넓디넓은 바다와 같고, 국사를 논의 하고 인물의 시비를 가리는데는 청천백일과 같았는데, 애석하게도 폐주廢主는 어찌 차마 기시棄市(사형시켜 시체를 시중에 버려두는 벌)하였던고,
김계운은 세상에 드문 선비다. 상서롭지 못한 세상을 만나서 화禍를 입고 죽었는데, 다만 그 화의 시말과 그 죽은 뒤의 세설洗雪을 다하지 못한 일을 후생이 상세히 알 수가 없다. 고 평한 <해동야언>에 남지정南止亭이 그 묘를 옮길 때에 지은 만사가 실려 있다.
‘귀신은 아득하고 어두우며, 천도는 진실로 알기 어려워라. 좋아함과 미워함이 사람과 달라서 화禍와 복福을 항상 그릇되게 베풀도다. 유구한 이 우주에 수명의 길고 짧음이 다 같이 없어짐이 슬프도다. 어찌 알랴. 저승의 낙樂이 이승의 제왕帝王과도 바꾸지 않을 것을 딜관자達觀者는 아득히 떠 있는 구름같이 일소一笑에 붙일걸세. 오직 슬픈 것은 세상에 드날릴 사람은 그 나타남이 매양 늦어져 겨우 수백년 만에야 한번 얻어 보는데, 나타났어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지극히 잘 다스려진 세상을 어찌 기약할 수 있으리, 내가 그대와 뜻을 같이하여 세상에 태어났으니 얼마나 다행인 고,(중략)
그대는 지금 하늘 위에 있어서 인간의 사는 양을 내려다 볼 걸세. 솔개가 뜯는 것과 개미가 파먹는 것도 이미 가리지 않았는데, 하물며 여기와 저기를 물으랴, 인간은 스스로 구구區區하게 세시歲時의 제사에 편하게 하기 위함이로다. 목천현木川縣에는, 중간에 굼틀거리는 산이 있으니 뒷날 도지圖誌를 편찬할 때에는 묘墓를 마땅히 기록하고 빠뜨리지 않을 것이로다.” 하였는데, 훗날 어느 당상관이 김일손의 무덤에 대해 “벼슬은 재상이 아니며, 또 근후謹厚하지 못하다.” 하고 지워 버렸으니, 이것이 어찌 성세盛世의 공정을 다한 논의인가, 식자들은 계운에 대해 한스럽게 여겼다.‘
사람이 동 시대에 이 세상에 태어나서 같은 생각을 가지고 더불어 살다가 가는 그것만도 더 없는 인연이리라.
그런데 그 억겁의 인연으로 만나서 살다가 가는 사람들의 마음이 여러 가지 잡다한 생각 때문에 나뉘고 부서지고 사라져 가는 것을 어쩔 수 없이 바라보고 있을 때가 있다. 그 때 느끼는 비애,
그것조차 운명이라고 여기며 기꺼이 감내하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 가능할지 아닐지는 스스로가 짊어지고 살아온 삶의 몫이리라.
창문을 열자 차디찬 바람결에 보이는 불빛 .
지금은 그의 아내 이미례씨와 <여자만>을 운영하는 박기성씨, 오래 오래 건강하고 좋은 글 많이 쓰시길,
2024년 4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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