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삼십육검(南海三十六劍)4권-홍파
차례
第十九章 미망(迷妄)
第二十章 떨어지는 꽃잎
第二十一章 죽음을 부르는 밤
第二十二章 숨은 힘이 드러났을 때
第二十三章 굽이치는 강(江)
第二十四章 검의 운명
第十九章 미망(迷妄)
1
화문은 어느 날처럼 출부복령산에 정신을 잃었다가 늦은 아
침이 되어서야 깨어났다.
지겹게 반복되는 일상(日常).
이제는 면역이 됐는지 출부복령산에 당했다가 깨어나도 전
처럼 두통에 시달리지는 않는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빛도 똑같다. 한심하다는 표정. 양광
(陽光)을 쏘인 다음 어기적거리며 창기를 만나러 가는 것도
반복되는 생활 중 하나다.
가규는 죽고 없다.
가규가 이런 생활을 한 것은 불과 칠 일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 다음 그는 자살을 했든 피살을 당했든…… 어쨌든 죽
었다.
만약 그가 화문처럼 오래 살아있었다면 계속 이런 생활을
했을까? 지겹고 따분하지 않았을까? 그랬을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하다. 가규는 워낙 주색잡기를 좋아
했으니까. 똑같은 일이라도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하는 것은 차이가 나지 않겠는가.
화문은 경주부에 들어온 지 보름을 넘기고 있다.
가규가 죽은 것보다 배는 오래 산 셈이다.
칠 일 간은 가규가 움직였던 흔적을 쫓아 움직일 수 있었지
만 칠 일이 지나자 독자적인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간밤에 들어갔던 도전방은 도곤들 중에서도 가장 성미 더럽
고 돈 없는 작자들만 모인다는 곳이다. 장소의 위치도 경주부
외곽 후미진 곳이었고, 가옥도 냄새나고 더러웠다. 조금이라
도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곳은 들락거리지 않으리라.
화문이 투벅투벅 걸어서 취채와 만나기로 약속했던 오두막
에 이르렀을 때, 화문은 급히 몸을 숨겨야만 했다.
일방적으로 도살당하는 여인들.
화문은 뛰쳐나갈 수 없었다. 키는 보통이지만 몸집은 자신
만큼이나 비대해서 굴러다니는 돼지처럼 보이는 인간이 여유
있게 활시위를 메기며 한 명, 한 명 죽여 나갔다.
지난밤에 자신과 도박을 했던-전낭을 훔쳐간- 도곤들은 벌
써 이승을 하직한 상태였다. 취채가 죽인 것은 아니다. 엎어
진 그들의 등뒤로 뭉툭한 화살이 삐죽 솟아 나온 것으로 보아
뚱뚱한 돼지가 화살을 쏴서 죽인 것이리라.
'드디어……'
화문이 올 것이 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가규는 이들에게 죽었으리라. 가규뿐만이 아니라 해남도에
들어왔던 무장들은 이들에게 죽었다. 그럴 만 했다. 뚱뚱한
돼지가 쏘아대는 화살은 감히 꿈틀거리지도 못할 만큼 날카롭
고 강맹했다.
화문이 뛰어나간다면?
돼지는 화살을 날리리라.
두어 개 정도는 피하거나 막을 수 있다. 하지만 돼지가 있
는 곳까지 다다르려면 적어도 화살 열 대 정도는 피해야 한
다. 더군다나 돼지 같은 궁술의 명인은 연속적으로 시위를 당
겨낼 수 있으니 정작 몇 대나 피해야 할 지는 움직여 봐야 안
다.
쉬익! 퍼억!
화살 한 대가 낯익은 여인의 등을 꿰어버렸다.
'취채……'
취채를 끝으로 모두 죽었다.
사내들은 움직이는 사람이 없자, 총총히 자리를 떠나갔다.
세상에는 왕왕 믿어지지 않는 기적이 벌어진다.
지금이 그렇다. 취채의 목숨이 끊어지지 않고 가는 숨을 쉬
고 있다는 것이 그렇다.
화문은 취채의 복부에 틀어박힌 화살을 뽑아내지 않았다.
지금 당장 치료를 할 수 없는 바에는 출혈이라도 막아야 한
다. 화살을 뽑아낼 경우, 겉잡을 수 없이 쏟아지는 피분수를
감당할 수 없을 바에는.
화문은 금창약(金瘡藥)을 꺼내 침으로 으깬 다음, 취채의
배와 등에 붙여주었다.
다행이 출혈은 심하지 않았지만, 내장이 어느 정도나 손상
되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화문은 취채를 안아 올렸다.
취채의 목숨이 붙어있는 것은 기적이 아니다.
돼지는 일부러 숨 한 가닥을 남겨놓았다.
그런 사실을 파악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취채
를 안고 산길을 타는 순간부터 예상외로 많은 사람을 만났다.
나무꾼, 사냥꾼, 동네 청년, 계집과 밀희(密戱)를 즐기는 사
내까지.
그들은 뛰어난 변장술을 지녔지만 결코 변장으로 숨기지 못
하는 점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 손바닥에 박힌 굳은 살, 자신
도 모르게 드러나는 날카로운 눈매, 나른한 듯 하면서도 절도
가 베인 몸놀림.
군인이다!
화문은 확신했다. 그러자 머릿속에 퍼뜩 스쳐 가는 인물이
있었다.
적궁랑(赤弓狼) 팽훈(彭薰).
중언 대륙이 넓다지만 이름난 맹장의 위명은 날개를 달고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 가는 법이다.
관충 장군 휘하에 홍암 장군이 있듯이, 기사청(寄査淸) 장
군 휘하에는 두 명의 국궁(國弓)이 있다. 적궁랑 팽훈과 일시
사(一矢邪) 문공(文珙). 그들은 삼백 보 떨어진 곳에서 시위
를 당겨 갓끈을 맞힌다.
군인이며, 군인으로서는 비정상적으로 뚱뚱한 몸, 그리고
백발백중의 궁술이라면 적궁랑 팽훈이다.
그가 왜 해남도에 와있단 말인가.
관직은 버렸단 말인가?
나라가 건국되고 난 다음에는 뛰어난 맹장들의 위명을 더
이상 듣지 못했다. 원과 대치하고 있는 국경부근이나 남만 국
경 부근이 아니면 큰 전투가 벌어지지 않는 까닭이다.
적궁랑 팽훈의 소식도 듣지 못했다. 그런데 최남단 해남도
에서 팽훈이라고 짐작되는 사람을 보게 될 줄이야.
낯선 사내들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미행하는 듯 했다.
창기들을 죽일 때처럼 활을 쏘지도 않았고, 앞을 가로막으
며 말을 걸어오지도 않았다. 그저 가고 싶은대로 가라고 길을
열어주는 인상이었다.
화문은 한 가지 사실을 추측했다.
이들은 자신의 목적지를 알고 싶은 것이다.
사실 자신은 해남도에 들어온 이후, 비가에서 거의 움직이
지 않았다. 우화를 찾기 위해 여족인들의 마을을 들쑤신 것이
고작. 이들 입장에서 보면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내린 듯 갑자
기 나타난 이방인 일 수도 있다.
해남도에 들어온 지 두 달이나 지났으니 종적을 캐내기도
힘들었을 것이고……
'우화는 아니다. 우화라면 내 존재를 모를 까닭이 없지. 해
남파? 해남파도 내 존재를 눈치채고 있을 텐데…… 관부다!'
화문은 조급해졌다.
이 사실을 빨리 적엽명에게 알려줘야 한다.
낯선 사내들은 여러 방면으로 자신의 종적을 추적할 것이
고, 어쩌면 지금 당장이라도 화살을 날려 올 수 있다.
취채의 생명도 촌각을 다투고 있다. 한시라도 빨리 치료를
하지 않으면 생명을 장담할 수 없다.
정체를 알아낸답시고 미적거리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화문은 결정을 내렸다.
울적한 마음을 아는지 아침부터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한 빗
줄기가 소나기로 변해 등줄기를 두들기고 있다.
투두둑! 투둑……!
세찬 빗줄기는 육신을 때리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때리는
게다. 내일조차 기약할 수 없는 암울한 현실을 퉁소가락처럼
풀어내고 있는 게다. 중원을 질타하려던 영웅심은 웬말인가?
아무리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지만 하룻밤 사
이에 인생이 극과 극을 치달릴 줄이야.
화문은 살쾡이처럼 눈을 부릅뜨고 어둠 속을 노려보았다.
장대처럼 쏟아지는 빗줄기 때문에 적을 보기가 쉽지 않았
다. 그러나 덕분에 몸을 은신하기는 용이했다. 월도(月刀)를
움켜잡고 어둠 한 구석에 의연히 서 있지만 관도에서 그가 있
는 곳을 보기란 쉽지 않았다. 한 가지를 잃고 한 가지를 얻은
셈이다. 과연 신은 어느 편인가.
두두두두……!
육중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적어도 이십 마리 이상 되
는 말들이 질퍽한 땅바닥을 힘차게 걷어차는 소리. 그 가운데
마차의 묵중한 수레바퀴 소리도 들렸다.
'팔두마차(八頭馬車)! 놈!'
등줄기를 스치고 내리꽂히는 한기에 움츠러들었던 솜털이
팽팽하게 곤두섰다.
세상에 거칠 것이 없다는 듯 질주하는 거대한 마차.
타고있는 자가 누군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범상치 않은
자인 것만은 틀림없다. 적이지만 다시없는 궁술(弓術)의 명인
(名人)이다. 그 자는 화살 한 대에 노노가 창기 한 명씩을 꼬
치 꿰듯이 꿰어버렸다.
거리는 오백 보.
솜씨는 인정한다. 하지만 사내도 아닌 여자를 그토록 무참
히 도륙할 수 있단 말인가!
'비열한 놈! 죽인닷!'
그는 월도(月刀)를 움켜잡았다.
길이가 여섯 자 네 치, 날의 길이만 두 자 여덟 치. 무게는
세 근 열네 냥(兩)이다. 아직까지 한 번도 실망을 주지 않은
병기로 머리든 어깨든 다리든 닿는 족족 으깨버린다.
두두두두……!
일단의 무리가 우렁찬 말발굽을 흘리며 다가왔다.
마차 앞에 다섯 필, 뒤에 다섯 필, 좌우에도 다섯 필이 달
린다. 그리고 그 위에는 한결같이 몸이 가벼워 보이는 자들이
예리한 눈빛을 발산하고 있다.
모두 낯선 사람들이다.
이들은 어디서 나타난 인간들인가. 말을 타는 자세나 사용
하는 무공으로 보아서는 관원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남파 무
인들도 아닌 것 같다. 우화대는 더더욱 아니다. 한인이 있으
니.
한인이 있다? 묘한 현상이다. 여족인이 대접을 받지 못하는
해남도인데 이들은 여족인, 한인 할 것 없이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있다.
두두두두……!
한 명이 지나갔다. 다른 네 명이 그 뒤를 바짝 따라 지나갔
다. 그리고 바로 이어 여덟 마리 준마가 이끄는 거대한 마차
가 다가왔다.
"타앗!"
화문은 어둠을 뒤흔드는 고함을 터트리며 앞으로 뛰쳐나갔
다.
"적!"
누군가 고함을 터트렸다. 행동은 고함소리보다 더 빨랐다.
팔두마차를 중심으로 좌우에서 달리던 열 명의 기마인이 창검
을 뽑아들고 앞을 가로막았다.
일사불란했다. 열 필의 말이 공격대형을 짜는 것도 신속했
고, 기습을 당했으면서도 전혀 당황하지 않는 모습이 보통은
넘는다.
역시 이들은 무공을 익힌 자들이다. 그것도 전쟁(戰爭)을
통해 삶과 죽음을 배운 자들이다. 이들이 마상에서 창검을 다
루는 모습은 낯설지 않다. 자신이 말을 타고 마상전투를 벌인
다면 꼭 이들과 같은 모습이지 않은가.
무림인과 군인들은 무공이 다르다.
무림인은 무도(武道)를 추구하기 위해 검을 익히지만 군인
은 적을 죽이기 위해 무공을 배운다. 그런 관념의 차이는 무
공의 형태로 이어진다. 무인은 무예(武藝)로 시작하는 반면,
군인은 무술(武術)로 시작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비켯!"
대갈을 터트린 화문은 월도를 머리 위로 크게 선회시킨 다
음 옆구리에 질러오는 창 허리를 잘라냈다. 동시에 몸을 틀며
좌측에서 쳐오는 일검을 막았다.
능수 능란하게 전개된 초식, 좌고일휘(左顧一揮).
"어림없어!"
눈매가 날카롭고 하관이 좁아 성정이 폭급해 보이는 무인이
일갈을 터트렸다.
'낯익다.'
두 번째로 느낌이 다가왔다. 분명히 처음 보는 사람이다.
그는 쌍검을 사용하고 있는데 무공도 낯설었다. 그런데도 낯
익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혈향(血香)이 진동하는 전쟁터에
서 적장과 일기토(一騎 )를 벌이고 있는 느낌……
차앙! 차앙……!
월도가 유성(流星)처럼 하늘에서 땅으로 흐르는 청룡등약세
(靑龍騰躍勢), 봄철에 강이 구름을 걷는 형상으로 전면 우상
에서 후면 좌하로 갈라치는 춘강소운세(春江掃雲勢)……
마상월도(馬上月刀)의 정수가 줄줄이 풀려 나왔다.
화문은 마차 곁으로 바짝 다가섰고, 무인 다섯 명은 단 일
합에 길을 터주고 말았다.
'사지(死地)……'
"타앗!"
두 발을 모아 껑충 뛰어올라 이기각(二起脚)으로 한 놈을
걷어찼다. 그리고 안장을 디딤돌 삼아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막앗!"
말을 모는 마부(馬夫)가 둘. 그들도 무인이었다. 무공이 얼
마나 깊은 지는 알 수 없으되, 허리에 찬 검을 뽑아드는 솜씨
가 예사롭지 않다. 게다가 앉은자리에서 도약하여 월도와 마
주쳐 오는 신법이 가볍기 그지없다.
가을 산이 바람을 타고 공중을 난다. 추산어풍세(秋山御風
勢)!
아래에서 위로 쳐 올린 월도가 무인 한 명을 가르고 지나
또 다른 무인이 전개한 검까지 밀쳐냈다.
"타앗!"
세 번째 고함이 터지며, 위에서 아래로 내리친 월도가 마차
문을 갈라버렸다.
일순, 향긋한 향내음이 물씬 풍겨 나왔다.
술 냄새였다. 종류는 알 수 없으나 극히 귀한 술인 듯 냄새
가 청아하고 극히 맑았다.
지독한 놈!
술을 마시고 있었단 말인가. 무공도 모르는 여자를 개미 죽
이듯이 밟아 죽이면서 향긋한 술을 마시고 있었단 말이지.
갈라진 마차문이 떨어져 나가면서 안의 정경이 드러났다.
남녀 한 쌍이다. 그들은 방금 전까지 육욕의 향연을 벌였던
듯 진한 살 내음을 풍겨냈다.
사내가 당황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화문이 반격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하다. 또한 무
인 열 다섯 명이 좌우로 호위하고 있는데, 그 틈이 벌어질 줄
은 꿈에서도 생각하지 않은 듯 하다.
뚱뚱한 몸, 두툼한 입술, 썩은 돼지간처럼 거무스름한 얼
굴, 약간은 혼탁한 듯 하면서도 잔인한 눈빛.
그는 황급히 줏어입던 옷을 던져버리고 검을 집어갔다. 날
렵한 몸은 아니다. 주육(酒肉)에 몰입하지만 않았어도 창기들
을 죽였던 뛰어난 궁술을 선보일 수 있으련만. 그랬다면 마차
가까이 다가오는 것도 어려웠을지 모르지.
파앗!
추산어풍세와 춘강소운세에 이은 자전수광세(紫電收光勢).
자전(紫電)이란 자줏빛 광채같이 날이 선 명도(名刀)을 말
한다. 자전수광세는 명도가 자줏빛 광채를 모으는 모습으로
마상월도의 마지막을 의미한다.
양손으로 사용하던 월도에서 왼손을 놓았을 때, 월도의 자
루가 등 뒤 왼쪽 어깨너머로 삐죽이 보이고, 용구(龍口:칼등)
가 반대로 꺾여 지면을 향했다.
자전수광세는 막힘 없이 풀려 나왔다.
"끄륵!"
뚱뚱한 사내는 머리끝에서 몸통까지 기다란 혈선(血線)을
그리며 무너졌다.
쉬릭……!
그는 신속하게 몸을 물려 주인 잃은 말의 안장 위로 돌아왔
다.
"끼럇!"
히히힝……!
말은 급박하게 잡아당기는 말고삐에 힘찬 울음으로 응답했
다. 그리고 쏜살같이 어둠 속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막아서지 못했다. 가로막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순식간에 휘둘러지는 월도가 가공할 기세로 무인들이 탄 말의
다리를 배어낸 다음에는 더더욱 가까이 다가올 생각을 하지
못했다.
피우웅……!
공기를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날카로운 파공음(破空音)이 등
뒤에서 흘러나왔다.
'활!'
순간적인 느낌이었다.
'궁술의 달인이 또 있다!'
화문은 위기를 느꼈다.
무장들은 속칭 동개활이라고 일컫는 단궁(短弓)을 사용한
다. 말을 타고 달리면서 쏘는 기사(騎射)용이어야 하기 때문
이다. 화살도 동개살이라고 부르는 대우전(大羽箭), 과녁에
박히는 형태가 아니라 맞춰 떨구는 형태다. 당연히 대우전에
는 끝이 막혀있는 박두를 사용한다.
정체모를 사람들이 날린 화살은 군인들이나 사용하는 대우
전이다. 그러나 백발백중의 기사(騎射)를 자랑하고, 비록 박
두일망정 엄청난 신력이 담겨있어 과녁을 꼬치처럼 꿰뚫어버
린다.
창기들은 뭉툭한 나뭇가지에 몸이 관통 당하는 고통을 받으
면서 죽었다.
퍼억! 히히힝……!
힘차게 달리던 말이 처절한 울음을 토하며 나뒹굴었다.
화살은 정확했다. 말의 항문(肛門)을 파고든 대우전은 단숨
에 광풍의 내장까지 훑어버렸다.
두두두두……!
무인 십여 명이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달려왔다. 그러나 그
들이 본 것은 약간의 숨이 남아 헐떡이고 있는 말뿐이었다.
암습을 가해 자신들의 상관을 죽여버린 화문은 그림자도 보
이지 않았다.
툭! 투툭……!
우중충하던 하늘이 기어이 빗방울을 떨구기 시작한다.
"차라리 잘 됐어. 당신이 장군이란 사실을 알고 난 다음부
터 난…… 몹시 괴로웠거든."
간신히 정신을 차린 취채가 힘겹게 말했다.
"내가 너를 잘못 봤군. 너는 잡초야. 요조숙녀가 아니란 말
야. 그럼 기운을 내야지. 이까짓 것 하면서 툴툴 털고 일어나
야지."
"여자한테 너무 심한 것 아냐?"
취채는 말을 하면서 씩 웃었다. 본인은 죽음을 대수롭게 생
각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이고 싶었겠지만 화문이 보기에는 처
량하기만 했다.
"아냐. 정말 심한 말을 해 볼까? 너 죽으면 어떻게 할지 알
아? 이대로 버리고 갈 거야. 들짐승들이 뜯어먹고, 벌레가 파
먹도록 이대로 두고 갈 거란 말야."
"그래도 괜찮아."
"괜찮겠지. 넌 인간쓰레기니까. 이 남자 저 남자를 전전하
는 게 고작이었지. 도대체 몇 놈하고나 자봤어? 스물? 백? 이
백? 그런 여자니까 벌레처럼 짓밟혀 죽어도 괜찮겠지."
"패주고 싶다."
"그래. 패. 자, 가자."
화문은 눈물을 그렁거리고 있는 취채를 안아 올렸다.
"비가보로 가자. 죽더라도 거기 가서 죽어. 묻어줄 수나 있
게. 알았어?"
"비…… 가보……"
"그래, 비가보."
"안 돼. 쫓아와."
"쫓아오는 게 아냐. 나만 믿고 정신 똑바로 차려. 비가보에
도착할 때까지만 기운 내. 그럼 살아날 수 있어. 그런 다음
일어나서 패달란 말야. 실컷."
취채는 화문의 목을 끌어안았다.
마음껏 안지도 못했다. 그녀의 배에 틀어박힌 화살이 마음
껏 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가자."
화문은 난생 처음이라 싶을 만큼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두두두두두……!
지루한 추격전.
어느 집 마구간에 매여져 있던 말을 훔쳐낸 화문은 온 힘을
다해 채찍질을 해댔다.
낯선 사내들은 곧 그의 종적을 잡아냈다.
화문이 질주하는 뒤로 낯선 사내 다섯 명이 뒤따르고 있다.
이제는 암암리에 미행하는 것이 아니라 공공연하게 드러내놓
고 쫓아온다.
화문은 그런 점을 바랬다.
그는 세 가지 효과를 기대하고 적궁랑 팽훈이라고 짐작되는
자를 죽였다.
팽훈이 죽은 이상 그들은 반드시 양자택일(兩者擇一)을 해
야 한다.
화문을 죽일 것이냐, 아니면 뒤를 쫓을 것이냐.
뒤를 쫓을 것이란 점은 팽훈을 죽인 순간 알아냈다. 팽훈과
버금가는 궁술의 달인. 그 자는 말의 궁둥이가 아니라 자신의
심장을 향해 화살을 쏘아댈 수도 있었다.
목숨을 건 도박은 화문이 이겼다.
쫓는 방법도 달라진다. 지금까지는 미행을 했지만 이제부터
는 공공연하게 뒤쫓아오리라. 실제로 그렇지만.
취채가 문제다. 화문이 취채를 포기한다면 그들도 이 방법
을 사용하지 않겠지만, 화문이 취채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그
들은 적극적으로 뒤를 쫓는다.
'급한가? 빨리 너의 동료가 있는 곳으로 가라. 중간에서 머
뭇거리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도 좋겠지만 화문도 좋다. 길에서 시간을 잡아
먹지 않아도 되니까.
또 하나는 벌써 알았다. 앞에서 뒤에서 여섯 필의 말이 질
주하고 있건만 지나가는 사람들은 관심도 갖지 않는다. 자신
이야 불쌍한 도곤쯤으로 소문난 터이니 그렇다고 하지만 뒤에
서 쫓아오는 인물들은? 그들도 안면이 있는 게다.
해남도 사람들이다. 그러면서 군인…… 도대체 누구란 말인
가.
나머지 하나는 몇 명이나 추격전에 가담했느냐 하는 것.
이것은 짐작도 못하겠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자세히 관찰할
틈이 없기 때문에 군인인지 아닌지 판가름을 할 수 없다. 어
느 정도는 파악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이들은 좀처럼 잡지 못하겠다는 시늉을 하고 있다.
화문으로 하여금 전력으로 질주하게끔 유도하는 것이리라.
그러다가 어느 한 순간, 화문을 놓쳤다는 듯 억울한, 당황
한 행동을 할 게다. 그것은 화문이 이들을 따돌리기 위해 조
그마한 술수를 부리는 것에서부터 시작되겠지만.
2
"열네 살이었나 봐. 답답해서 숨을 쉴 수가 없더라구. 그래
서 눈을 떴지."
취채는 넋 나간 듯 중얼거렸다.
열이 너무 심하다. 금창약을 발랐지만 피가 새어나오는 것
을 완전히 막지 못했다. 상처에서는 벌써…… 썩는 냄새가 풍
기기 시작한다.
"뭔가 묵직한 게 짓누르고 있는 거야. 내가 꿈틀거리자 두
툼한 손으로 입을 막았어. 나는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쳤지
만…… 그 날, 굉장히 아팠어. 지금보다 더 아팠던 것 같아."
화문은 취채가 말하도록 내버려두었다.
말을 하면 할수록 기운이 소진되겠지만 아무 소리도 하지
않는 것은 숨이 넘어간 것 같아 불안했다.
"아버지였어. 계부(繼父). 그 날부터 나는 그 자의 노예가
됐어. 밭일을 할 때도, 빨래를 하다가도…… 나는 혼자 있는
것이 무서웠어. 그래서 마을 아줌마들하고 모여서 일하면……
쿨룩! 되게 맞았어."
취채는 피를 토해냈다.
피가 역류하고 있다. 고통은 더욱 심할 게다. 이 때가 가장
위험하다. 본인 스스로 살아날 수 없다고 단정해 버리면 생명
의 불꽃은 급속도로 타버린다.
취채는 지나온 과거를 화문에게 들려준 다음에야 눈을 감을
수 있다는 듯이 꺼져가는 정신을 강인한 의지로 붙들어 맸다.
"더 웃긴 건 뭔지 알아? 엄마야. 내가 아이를 갖자 집안 망
칠 년이라면서 무지하게 두들겨 패더라구. 잘못했다고 빌고
빌었는데 불쏘시개로 지져대서…… 유산했어."
배에 난 흉터가 그거였구나. 인두로 지진 듯한 상처가 보기
흉해서 사연이 많은 여인이라는 것은 알았는데. 하기는 창기
쳐놓고 사연 없는 여자가 어디 있을까.
"나는 그게…… 쿨룩! 내가 잘못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질투였어. 계부를 나눠 가졌다는 질투…… 계부는 엄마보다
나를 더 좋아했거든."
화문은 이를 악물고 달렸다.
두두두두……! 두두두두두……!
말이 거품을 흘리기 시작한다. 위험하다. 이럴 때는 쉬어야
한다. 하지만 잠시라도 쉴 틈이 없다. 말이 조금만 더 힘을
내주기를 바랄 뿐. 저기 멀리…… 백사구가 보이고 있지 않은
가.
"어느 날, 집에 돌아오니 엄마 얼굴이 만신창이가 된 거야.
그 자식이 두들겨 팬 거지. 그 자식이 그러더라구. 엄마 쫓아
내고 같이 살자구. 나는 그 날, 집을 나왔어. 엄마가 울더라.
그 자식 시신을 부여잡고 말야."
그래. 그런 한(恨)으로 조금만 더 기운 내는 거야.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했던가. 한이란 무
서운 힘이지. 취채. 힘을 내라.
"어떻게 어떻게 해남도까지 흘러왔는데 이미 내 몸은 엉망
으로 변해 있었어. 푸훗! 그렇지 않으면 이런 촌구석까지 기
어들어 왔겠어? 사람도 세 명이나 죽였고, 아이도 둘이나 유
산했어. 하나는 낳았는데…… 어디 있는 지 몰라. 핏덩이를
버려버렸거든."
취채는 정신이 가물거리는지 귓속말에 가까운 작은 소리를
웅얼거렸다. 그러다가는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리고는 다시
말을 잇곤 했다.
"그 아이가 보고 싶다. 살아있다면 일곱 살인가 되었을 텐
데……"
"찾아줄게."
화문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사정이 급박했다.
비가보는 다와 가는데 뒤따르는 인간들을 어떻게 따돌린단
말인가. 더욱이 지금 취채의 상태는……
'편하게 보내주는 것이 나을지도.'
한 순간 머리를 스쳐 가는 생각이었다.
화문이 비가보로 달려가는 것은 적엽명을 믿었기 때문이었
다.
적엽명은 탁월한 의술을 지녔다.
무림의 무인들이나 전쟁에 임하는 무장들도 약간의 의술은
지니고 있지만, 그래서 웬만한 병쯤은 의원을 찾지 않고 손수
약전을 처방하여 다려 먹지만 취채와 같이 이승과 저승을 오
락가락 하는 사람은 어떻게 할 방도가 없다.
의원들도 마찬가지다.
기껏해야 조금 더 좋은 금창약을 발라주는 것하고, 자상(刺
傷)에 좋은 약을 다려주는 것이 고작이리라.
적엽명은 다르다.
전투가 끝난 다음 전장을 둘러보는 것은 차마 못할 짓이다.
창에 목이 관통 당하고도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병사, 차라리
빨리 죽여달라고 애원하는 병사, 팔 다리가 잘리고도 잘린 줄
을 모르는 병사……
적엽명은 중상자들만 골라서 치료해 주었다.
장군이 저런 일을…… 부하들을 사랑한다는 표시도 적당히
해야지…… 하면서 좋지 않은 눈으로 보는 무장들이 많았다.
무장들뿐만이 아니라 병졸들도 그랬다. 그들은 적엽명이 손대
는 것보다 빨리 의원이나 데려와 주기를 바랬다.
적엽명의 의술은 탁월했다.
그도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있지만, 많은 병사들을 죽음에서
구해냈다. 살아도 전신 마비가 분명한 병사를 살려내면서 '살
아라.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 타락하지 말고, 좌절하
지 말고, 죽은 동료들의 몫까지 훌륭하게 살아라.'라고 한 말
은 유명한 말이 되었다.
나중에야 알았다. 의술을 해남도로 유배된 어의(御醫) 황역
(黃轢)에게 배웠다는 사실을.
황역은 침 하나라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다
는 신의(神醫)다. 만약 정쟁(政爭)에 간여하지 않고 의원 본
연의 길만 걸었다면 그의 이름은 한결 빛났으리라.
그러나 그런 적엽명도 목숨이 경각에 달린 취채는 구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 가망이 없다. 십중팔구는 운명하는 모습만
지켜보게 될 것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너른 초원, 이 곳에
서……
"……"
취채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는다.
화문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 화급히 취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물을 떨어트렸다.
맑디맑은 이슬 한 조각이 그녀의 눈에서 새어나와 관자놀이
를 거쳐 머리칼 속으로 스며들었다.
"이제 다 왔어. 이제……"
그 때였다.
히히힝……!
줄기차게 질주하던 말이 머리를 흔드는가 싶더니 풀썩 무릎
을 꿇고 엎어졌다.
쉬익!
화문은 취채를 안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말을 타고 싸울 적에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경우다. 적장을 잡으려면 먼저 말을 쏘라는 말이 있다. 적은
말 다리를 베어버리거나 창으로 말 배를 쑤셔대기가 일쑤다.
자칫 방심하면 말과 함께 꼬꾸라지게 된다. 그 때는 천하장사
라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벌떼같이 달려든 적병들이 난도질
을 해댈 테니까.
화문은 땅에 착지하는 순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치달렸다.
말은 이미 틀렸다.
아까부터 입에 거품이 새어나왔다. 그래도 비가보까지는 달
려줄 줄 알았건만.
"틀렸어. 버리고 가."
취채가 아미(蛾眉)를 찡그리며 말했다.
"한 번만 더 그딴 소리하면 내 손으로 목뼈를 분질러 버리
겠어."
"쳇! 성질머리하고는."
두두두두두……!
낯선 사내들은 당황한 듯 하다.
그들의 말도 지치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들은 화문처럼
무겁지도 않았고, 취채라는 여인을 안고 있지도 않다.
이 너른 벌판에서 말이 쓰러져 버린다니.
그들은 화문을 뒤쫓는 도리밖에 없다. 화문의 뒤에 누가 있
는 지 궁금하지만 지금 상황으로는 잡아죽이는 것 외에 달리
선택할 길이 없다. 화문이 적당히 속임수를 쓴다면 넘어가 주
는 척이라도 할 텐데 이곳처럼 너른 벌판에서는 그런 속임수
에 넘어가 주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화문은 걸음을 멈췄다.
이제 늦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누가 봐도……
"싸움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
"응."
"취채."
"응?"
"사랑한다."
"……"
"사랑한단 말야!"
"들…… 었어."
"빌어먹을!"
화문은 취채를 풀밭에 뉘였다.
"아냐, 아냐."
"……?"
"일으켜 세워 줘."
"그냥……"
"싸우는 모습을 보고 싶어. 앉아서…… 앉아서……"
화문은 그 말이 마치 취채의 유언처럼 들려 눈물이 왈칵 솟
구쳤다.
처음이다. 자신에게 아직까지 이런 감정이 남아있었다니.
내일 모레면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제 겨우 딸 벌밖에 되
지 않은 여인에게 사랑을 말하다니.
취채를 일으켜 앉혔다.
그녀는 무척 고통스러운지 한 손으로는 복부를 뚫은 화살
을, 한 손으로는 땅을 짚고 식은땀을 흘려냈다.
그녀의 안색은 이미 백지장이다. 입술도 파란 물감을 칠해
놓은 듯 하다. 살아있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화문은 월도를 들고 무섭게 달려오는 다섯 필의 말을 향해
돌아섰다.
바위를 단숨에 잘라버린다. 좌고일휘!
파앗!
제일 앞서 달려오던 자는 창을 내질러 왔다. 그러나 왼쪽에
서 오른 쪽으로 쳐올린 월도에 가로막혀 버렸다. 그 때는 이
미 말의 오른쪽 다리가 잘라진 후였다.
히히힝!
말이 처절한 비명을 토해내며 풀썩 꼬꾸라졌다.
천군만마(千軍萬馬)를 갈라 친다. 춘강소운세!
파앗!
허공에 들린 월도가 '쉬링'소리를 내며 우상에서 좌하로 내
리쳤다.
땅에 떨어진 사내가 놀란 얼굴로 쳐다보지만……
퍼억!
사내의 얼굴은 잘 익은 꽈리처럼 붉은 피를 쏟아내며 갈라
졌다.
그러나 화문도 무사하지 못했다.
낯선 사내들은 이미 죽이기로 작정했는지 쏟아내는 살공(殺
功)이 매섭기 그지없었다.
우측으로 달려온 사내가 화문의 허벅지에 장창을 찔러 넣었
다. 그는 미처 창을 뽑을 시간을 잡지 못하자, 창자루를 놓아
버린 채 다섯 자 가량을 지나갔다.
또 한 사내가 스쳐 지나며 검을 찔러 넣었다. 이번에는 왼
쪽 어깨다. 그 사내 역시 검을 뽑을 시간이 없었다.
달리는 말 위에서 무공을 전개하는 것은 이래서 힘들다. 월
도나 검처럼 베어버리는 병기는 위력이 아주 강하지만 창같이
찌르는 병기는 병기를 놓아버려야 하는 경우가 왕왕 생긴다.
달려나가는 말이 시간을 주지 않는 게 원인이다. 또한 사람
의 몸은 아주 특이해서 정확히 일직선으로 찌르지 않으면 뽑
아내는 데 힘이 배로 든다.
하늘에서 땅으로 유성처럼 내리 꽂힌다. 청룡등약세!
월도가 다시 춤을 추웠다. 허벅지에 기다란 창이 꽂혀 흔들
거리고 어깨에 박힌 검도 감당하지 못할 충격을 전달한다. 하
지만 월도가 춤을 추자는 데 누가 앞을 가로막으랴.
퍼억!
"아악!"
처음으로 비명이 터져나왔다.
네 번째로 달려든 사내는 말의 목을 비스듬히 가르며 지나
간 월도에 다리가 잘려 버렸다.
"아악! 아아악……!"
사내는 처참하게 비명을 질렀다.
한쪽 다리가 잘라지면서 그는 굴러 떨어졌어야 한다. 허나
다른 한쪽 발이 등자( 子)에서 빠지지 않았다. 그의 남은 한
쪽 발목은 마른 나뭇가지 부러지듯이 꺾어져 버렸고, 그는 말
이 달리는 대로 질질 끌려갔다.
다섯 번째 사내는 다가오지 않았다.
그는 삼 장 간격을 두고 빙빙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다른
사내들도 마찬가지다. 놓쳐버린 창과 검 대신에 다른 병장기
를 꺼내들고 삼재(三才) 방향을 고수하며 빙빙 돈다.
기운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게다.
지금 화문은 상처 입은 곰과 다를 바 없다.
그 누구라도 화문의 거대한 몸을 보면 기가 질리게 되어있
다. 더군다나 어깨와 허벅지에서 피가 줄줄 흐르는 데도 그는
꼼짝하지 않고 눈을 부라리고 있다. 언제든지 월도를 날릴 준
비를 하고서.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한 사람은 화문이다. 화문보다 더 불
리한 사람은 취채다. 지금이야 괜찮지만 조금만 더 시간이 흐
른다면 화문은 급한 성질이 폭발하고 말 게다.
화문은 한 걸음 앞으로 내딛었다.
그러자 두 사내가 그 만큼 말을 물렸고, 다른 한 사내는 그
만큼 가까이 다가왔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접전을 피하면서 출혈이 과다해지기를
기다리는 게다.
'도대체 어떤 놈들인가!'
화문은 사내들의 정체가 더욱 궁금해졌다.
이들은 머리가 반으로 쪼개진 동료나 한쪽 다리가 잘린 채
말에 질질 끌려가는 동료를 보고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
다. 그들의 목표는 화문이었고, 화문은 '맹장 사냥법'에 제대
로 걸려들었다.
싸움을 할 줄 아는 자들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천하의 맹장이라도 어쩔 도리가 없다. 시
간이 흘러 출혈이 과다해지면 신형이 흐트러지게 되고, 그 때
를 기다린 창과 검이 전신을 난자할 게다. 그래서 이런 경우
맹장들은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병기를 들어 목젖을 베어버
리던가, 복부에 깊숙이 꼽아 넣는다. 물론 그 다음은 누군가
에 의해 목이 베어질 것이다.
무림에서는 비겁하다고 매도당할 일이지만 전장에서는 그
누구도 그 따위 소리를 하지 않는다. 적이라면 등뒤에서도 찌
르는 곳이 전장이거늘.
화문은 취채를 돌아보았다. 순간,
"아!"
화문은 저도 모르게 경악성을 토해내고 말았다.
풀밭에 앉혀 놓았는데…… 그 때만 해도 정신이 멀쩡했는
데……
취채는 풀밭에 가로누워 있다. 그녀의 입에서는 진한 선혈
이 흘러내리고, 엎어지면서 화살을 건드렸는지 등뒤로 파고든
화살이 반대로 더욱 길게 빠져나와 있다.
"후후! 후후후후……!"
화문은 눈에 핏발을 세웠다.
이제야 해남도에 들어온 맹장들이 이름 값도 못하고 죽어간
이유를 알 것 같다. 이 놈들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전쟁터에서
생사를 넘나들었던 인간들이 분명하다. 자신의 죽음까지도 우
습게 여기는.
화문은 월도를 땅에 박아 넣었다.
"목을 벨 텐가?"
"당연한 말씀."
"베라."
"사양. 먼저 편한 죽음을."
"월도는 쓰기 불편하다. 검을 던져라."
말위에 타고 있던 사내 중 한 명이 검을 뽑아 화문의 발치
께로 던졌다.
"나를 죽이는 그대들은 누군가?"
"화문 장군, 죽으면 궁금증도 사라져 버릴 것. 편히 가시
오."
화문은 황제가 계시는 북향을 향해 재배를 드렸다. 그리고
노장군이 있는 서북방을 향해 다시 재배를 했다. 마지막으로
적엽명이 있는 남방을 향해 재배를 했다.
그는 검을 집어들고 무릎을 꿇었다.
두두두두……!
까만 점에 불과했던 것이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말이라고 하기에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발굽소리도 마차가
지나가는 듯 우렁찼다.
"화문! 기다렷!"
멀리서 외치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온다.
화문은 고개를 돌렸다.
"치잇!"
누군가 신음성을 토해냈다. 동시에 그는 말을 달려 왔다.
"공격을 금물!"
화문은 냅다 소리치며 자진하려던 검을 휘둘렀다.
하늘하늘 허공을 나는 가을 산, 공중에서 산지사방으로 비
산하는구나. 추산어풍세!
쉬릭! 사각!
사내가 내지른 창은 창대가 잘려버렸다.
화문은 검을 버리고 땅에 박힌 월도를 뽑아들었다. 기마병
(騎馬兵)을 상대하는 데는 검보다 월도가 좋다. 위력도 강하
고, 거리도 적절히 조절할 수 있다.
"으음……!"
세 사내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맹장이 부활하고 있다. 맹장 사냥법은 절대 접전을 벌여서
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러서 있기만 해서도 안 된다. 상대가
기력을 회복하지 못하게끔 시기 적절한 공격을 가미해야 한
다. 쳐들어갔다가는 물러서고, 물러섰다가는 다시 쳐들어가
는. 활이 있다면 기다릴 필요도 없다. 시위 몇 대면 끝나니
까.
이것은 조력자가 없을 경우에나 유효한 방법이다.
단기필두(單騎筆頭)로 적진에 뛰어들어 부상당한 동료를 구
출했다는 무용담(武勇談)은 맹장이 자신의 기력을 완전히 소
진하지 않았을 경우에다 가당하다. 꼭 지금처럼.
두두두두……!
말은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황담색마가 갈기를 휘날리며
무서운 속도로 다가왔다. 마상 위에 앉아있는 사람도 뚜렷이
보인다.
'장군! 적엽명…… 장군……'
화문은 가슴에서 뭉클하고 치솟는 격정을 느꼈다.
"가자!"
세 사내는 마을을 바꿨다.
그들 다섯이서 화문 한 명을 상대하는데도 벅찼는데 적엽명
까지 가세한다면 죽음밖에 돌아올 것이 없다. 그리고 지금은
개죽음을 당할 이유가 없다. 그들 입장에서는 화문을 굳이 죽
일 필요가 없었다. 죽음은 천천히…… 지금은 동조가가 누구
인지를 파악할 때.
말이 떨어지자마자 세 사내는 말머리를 돌려 도주하기 시작
했다.
화문은 하룻밤 새에 두 번의 기적을 만났다.
취채가 즉사하지 않은 것하고 적엽명이 적시에 나타나 준
것.
"생명은?"
"숨은 붙어있는데……"
"……?"
"……"
"무슨 말씀이십니까? 답답합니다! 말씀을 해보세요!"
"하반신을 쓰지 못한다."
"뭐, 뭐라구요!"
"내장도 많이 상했어. 무거운 것도 들지 못하고…… 폐인이
다."
적엽명은 부지런히 손을 놀리면서 말했다.
혈도를 눌러 피를 통하지 못하게 만들고 소도로 조심스럽게
화살대를 잘라냈다. 그리고 단숨에 화살을 뽑아냈다.
검게 변색된 피가 솟구친다.
적엽명의 양손은 금방 검은 피로 물들었다.
적엽명도 잠시도 망설이지 않았다.
취채를 엎어놓고 화살이 들어간 부분의 살점을 소도로 도려
냈다.
취채가 꿈틀거린다. 정신을 잃고 있지만 고통이 뼛골까지
저리게 한 모양이다.
적엽명은 상처 사이로 소도를 들이밀었다. 그리고 뼈를 갉
아내기 시작했다.
사각! 사각……!
넓다란 평원에서 들리는 가는 소리.
화문은 차마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윽고 검게 변색된 뼈를 갉아낸 적엽명은 지혈제를 뿌린
다음 고약(膏藥)을 붙여주었다.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이번에는 배 부분을 치료해야
한다.
인체는 위험하지 않은 곳이 없다. 등 부분은 척추와 연결되
어 있어 위험하지만, 배 부분은 내장과 연결되어 위험하다.
자칫 소도를 한 치만 잘못 움직여도 즉사를 면치 못할 게다.
배 부분의 상처는 등보다 더욱 심했다.
화문은 말을 달리느라 몰랐지만 화살이 꽂힌 배 부분에서는
썩은 진물이 흐르고 있었다.
살점을 도려내고 내장에 부용산(腐龍散)을 뿌리고……
원군(元軍)과 싸우면서 가장 많이 보는 상처가 바로 잘린
상처다. 원군은 폭이 넓은 도를 사용하기 때문에 싸움에 임해
서도 찌르는 수법보다는 베는 수법을 많이 사용한다.
팔이 잘린 자, 다리가 잘린 자…… 복부를 베인 자.
싸움을 겪으면서 내장이 흩어져 나온 시신을 보고도 담담할
정도로 익숙해졌다.
가장 곤란한 것은 복부를 베이고도 죽지 않은 자이다. 내장
이 상하지 않았다면 살릴 방도나 있을 텐데, 도에 맞은 자가
손상되지 않을 리 없다.
그들은 고통만 받다가 죽어갔다.
적엽명은 그들 중 절반을 살려냈다.
건지황(乾地黃), 계지(桂枝:계수나무 잔가지), 독활(毒活:
띠두릅뿌리), 금은화(金銀花:인동꽃), 박수[상수리나무 수
지]……
부용산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약재는 무려 삼십여 가지에
달한다. 하지만 손상된 내장을 치료하는 데는 탁월한 효과를
보인다.
부용산의 효과는 반반.
반은 죽고, 반은 산다.
산 자도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자는 일 할이 채 되지 못한
다.
검은 피만 흐르던 취채의 몸에서 붉은 피가 흐르기 시작했
다.
적엽명은 지혈제를 물에 풀어 발라주고, 웃옷을 벗어 허리
부근을 힘껏 동여맸다.
"휴우!"
적엽명이 깊은 한숨을 불어낸다.
화문은 모든 긴장이 일시에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적엽명이 한숨을 쉬었다. 깊은 한숨을…… 그렇다면…… 취
채는 살아날 가능성이 높다. 세 번째 기적이다. 아아……!
세상에 기적이란 없다. 기적이 일어나려면 반드시 그에 상
응하는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화문은 비가에 돌아온 다음, 적엽명이 때맞춰 나타난 까닭
을 알 수 있었다.
호귀 류가 근심스런 표정으로 서성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
의 옆에는 언젠가 한 번쯤 본적이 있는 창기가 초췌한 모습으
로 서있었다.
취채는 단맛, 쓴맛을 고루 맛보며 살아왔으니 만치 일을 하
는 데도 늘 한 가닥 여분을 남겨두었다.
전낭을 빼앗아간 도곤들을 찾아내서 전낭을 되찾고 그들을
죽이는 것은 가규가 했던 일이다. 그런 만치 그들을 죽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수법도 잔혹해야 한다. 가규가 그랬으니
까.
취채는 창기들 중 한 명은 살인에 가담하지 말고 멀리 떨어
져서 지켜보기만 하라고 지시했다.
화문이 위험해진다면 자신들 역시 위험해지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떠한 일을 당해도 소리치거나 달려들어서는 안 된다. 설
혹 중간에 화문을 만나게 되더라도 말조차 걸어서는 안 된다.
무조건 뛰어라. 마차를 탈 수 있으면 타고, 말을 탈 수 있으
면 집어타라. 비가로 향해라. 뒤도 돌아보지 말고 비가로 달
려라.
취채는 그 길만이 화문을 살릴 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다.
예감은 불행히도 적중했다.
창기들은 죽었고, 취채 본인은 숨이 경각에 달하는 중상을
입었다.
화문을 살리고자 했던 안배가 정작 자신의 목숨을 살리게
될 줄은 본인 역시 몰랐을 게다.
취채는 비가에 도착할 때까지 깨어나지 않았다.
화문이 시신처럼 축 늘어진 취채를 안아들고 침상에 눕혔
다. 취영이 이제는 일가족이나 다름없이 편하게 지내는 중년
부인 추(秋)와 함께 피에 절은 의복을 갈아 입힐 때도 취채는
눈을 뜨지 않았다.
호흡과 맥박이 무척 가늘었다.
죽음의 마수가 그녀의 가녀린 몸뚱이 속으로 파고든 듯 했
다.
취영은 물수건으로 취채의 이마를 닦아준다.
해남도 아낙들에게 생활화 되어버린 간병 방법이었다.
다른 곳은 몰라도 해남도에서는 고열(高熱)을 가장 조심해
야 한다. 특히 몸이 병자가 고열에 시달릴 경우에는 빨리 열
이 가라앉도록 부지런히 물수건을 갈아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고열은 해남도 특유의 살인적인 열기와 손을 잡고
쉽게 병자를 죽여버린다.
화문은 비로소 자신의 몸에 난 상처도 가볍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까지는 아픈 줄도 몰랐는데.
3
황유귀 술은 죽통 두 개를 행낭 속에 찔러 넣고 방을 나섰
다.
그는 태연하게 걸었다.
별빛 한 점 보이지 않는 하늘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야밤에 어딜 가는가?"
번(番)을 서고 있던 황훈(黃熏)이란 자가 물어왔다.
"잠이 오지 않아서요."
"흐흐! 계집이라도 생각나나?"
"그냥 바람이나 쏘이려고……"
"물론 바람을 쐬러 가는 거겠지. 계집 치마를 걷어올리는
바람. 흐흐흐!"
"하하하!"
관졸들의 농지거리를 귓가로 흘리며 관청을 벗어났다.
태연한 걸음걸이, 하지만 황유귀는 나무 긴장하여 등줄기에
식은 땀을 흘려내고 있었다.
걸음을 떼어놓기가 힘들었다.
골목을 돌아서면 불쑥 창검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후미진
곳, 나무 뒤, 지붕 위…… 적이 숨어있을 곳은 많았다.
"후욱!"
황유귀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면서 마음을 가다듬었다.
언젠가 적엽명이 말한 적이 있다.
숨은 내쉬는 숨을 위주로 쉬어야 한다. 갓난아기가 태어나
면 '으앙'하고 울음을 터트려야 산 것으로 간주한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터트리는 울음소리. 분명히 첫 숨
은 내쉬는 숨이다. 반대로 죽을 때는 숨을 거둬들인다. '후
웁'하고…… 세상에 남겼던 모든 흔적을 거둬들이고 싶은 것
일까.
내쉬고 들이마시고, 내쉬고 들이마시고……
하지만 인간은 언제부터인가 들이마시는 숨이 처음인 줄 착
각하며 살고 있다. 운기토납(運氣吐納)을 할 때도 들이쉬는
숨부터 가르치고 있다.
숨을 크게 들이쉬어서 단전으로 이끌어 내리고, 단전에 축
적된 기운을 회음혈(會陰穴)로 밀어 내리며……
토납이란 글자도 토할 토자가 앞에 붙어있는데.
'빌어먹을!'
황유귀는 작게 중얼거렸다.
하필이면 이 때 그런 말이 생각나다니.
그는 내쉬는 숨을 처음으로 하려고 시도해 봤지만 의식을
집중하지 않고서는 곤란했다.
그러나 숨에 대해서 생각하는 동안 그의 마음은 많이 가라
앉았다. 적어도 관청을 나설 때처럼 긴장되지는 않았다.
그는 기장을 구하러 갈 때처럼 복산 쪽으로 방향을 잡고 걸
었다.
경주부를 빠져나오자 관도에는 술 취한 사람조차 보이지 않
는다.
습기를 가득 머금은 바람이 불어온다.
곧 비가 쏟아질 모양이다. 곧이라고는 하지만 비는 내일 오
후쯤부터 내리기 시작할 게다.
황유귀는 행낭을 들썩여 메고 가기 편하게 위치를 바로잡았
지만, 돌멩이가 가득 든 행낭은 자꾸 아래로 쳐져 메기가 불
편했다.
황유귀가 걷는 속도는 무척 느렸다.
그럴 수밖에. 경주부를 벗어난 곳은 사람이 숨어있을 만한
곳이 무척 많았고, 그런 곳을 지나칠 때마다 황유귀는 조심스
럽게 걸음을 떼어놓았으니.
굽이진 산자락이 나타났다.
전에는 마차를 몰고 이곳을 지나쳤다.
죽통을 던진 곳.
황유귀는 품속에서 죽통 한 개를 꺼내 전에 던졌던 바로 그
자리에 던졌다.
그는 허리를 굽히고 신발 끈을 단단히 조여 맸다.
화문이 급습을 받았다. 화문은 비가로 도주했고, 화문과 비
가가 연관된 것을 안 적들은 언제 어디서 누구를 공격할 지
모른다. 분명한 것은 비가를 벗어나 있는 황유귀나 한백 같은
사람이 무척 위험해졌다는 것이다.
그는 계속 복산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황유귀가 어둠 속으로 묻힌 지도 한참이 지난 후, 풀숲이
들썩이더니 검은 그림자가 일어섰다.
한백이다.
그는 황유귀가 던진 죽통을 집어들었다.
적엽명은 급히 돌아오라는 전갈을 보내왔다.
비가가 노출된 이상, 자신들의 존재가 발각된 이상 저 쪽은
반드시 움직일 것이고, 그럴 때를 대비하여 한사람이라도 희
생을 줄이자는 생각이리라.
한백도 동감했다.
적이 늑대라면 이쪽은 사슴이다.
무리 지어있는 사슴은 강하다. 하지만 무리에서 떨어져 나
온 사슴은 뭇 맹수들의 표적이 된다.
한백과 황유귀는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사슴.
그는 서둘러 산자락을 타기 시작했다.
황유귀는 중요한 단서를 잡아냈다.
지난 십 년 동안 경주부에서 진상하는 진상품들이 거의 대
부분 강탈당했다는 것.
도적들이 횡행하는 대륙이니 그럴 수도 있다지만 관졸들이
수송하는 공물을 강탈당한 사건은 그냥 넘길 수 없는 중대사
건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사건을 전담
맡은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닌 기사청 장군이라는 점이다.
천호소(千戶所)가 아닌 군부에서 강탈사건을 담당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놀라기에 앞서 이해가 되지 않는다.
황제의 지지기반이 있는 강남(江南).
군대의 이동조차 조심하는 곳에서 군부에 일개 강탈사건을
위임하다니.
경주자사는 강탈 사건과는 무관하다. 아니 강탈사건 뿐만이
아니라 해남도에서 무장들이 죽은 사건과도 무관할 게다.
한백는 경주자사에 대한 의심을 지워버린 지 오래였다.
황담색마를 건네주면서 관찰한 바, 경주자사는 무장을 죽일
만한 위인이 아니었다. 경주자사 같은 인물은 탐욕이 지나치
지만 공물(供物)을 급습할 만큼 담력이 강하지 못하다.
- 먼저 기강(紀綱)이 바로 서야 한다. 원(元)이 혼란하게
된 것은 기강이 바로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主)는 황음
(荒淫)하여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고, 신하는 권한을 전횡
(專橫)하였다. 주(主)는 위엄으로 복종시킨다거나 은혜로 감
복시키지 못했다. 이로 말미암아 법도(法度)가 서지 않고, 인
심이 흩어져 천하(天下)가 소란해졌다.
- 명사(明史) -
태조가 나라를 세우며 가장 먼저 기강확립을 강조했다. 강
성하던 원이 무너진 것은 한족의 복권(復權) 의지가 아니라
부패가 심하여 안으로부터 곪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황제는 홍무(洪武) 사년(四年)에 칙령을 내렸다.
- 지금부터 뇌물(賂物)을 받는 자는 엄단에 처한다. 원말
(元末) 정치는 사진자(仕進者)가 권세있는 자에게 뇌물을 바
치고 명작(名爵)을 매수(買收)하는 등 폐단이 극심했다. 아래
로는 주현(州縣)의 부서(簿書)와 같은 소리(小吏)에 이르기까
지 뇌물을 바쳐야만 임용될 수 있었다. 백성에게 피해를 주거
나 죄상을 눈감아 주는 일은 망국의 지름길. 상(上:황제)은
그 폐단을 익히 알고 있는 바, 이런 폐단을 혁파(革罷)하지
못하는 한 선정(善政)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영(令)
을 내린다. - 명실록(明實錄) -
경주자사가 가볍게 받은 뇌물이 실은 대역죄에 버금갈 만큼
중한 과오다.
그렇지만 기강확립에 관한 명이 중원 최남단인 해남도에까
지 뿌리깊게 박히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지 않은가. 해남
도가 아니라 광동성(廣東省)만 하더라도 뇌물이 성행하는 것
을.
관료들은 원대(元代)의 악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은 아직도 뇌물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인다.
하지만 공물을 강탈한 것은 다르다. 특히, 황제에게 올리는
공물을 강탈한다는 것은 어지간한 뱃심으로는 어림도 없다.
경주자사는 그렇게 큰 사람이 아니다.
역적모의를 할 기회가 생기더라도 '글쎄요'하면서 슬그머니
물러나 눈귀를 모두 막고 보신(保身)이나 할 게다.
과연 적사장군이 알아낸 것은 무엇일까? 무장들이 알아낸
것은 무엇이고, 마수광의가 알아낸 것은 무엇일까?
한백은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봤다.
만일 노장군이 자신에게만 이번 밀명을 내렸다면 어떤 행동
을 취했을까? 해남도에 들어와서 제일 먼저 무엇을 알려고 했
을까?
거기서 한백은 중요한 결론을 얻었다.
제일 먼저 들어온 무장은 해남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에 초점을 맞췄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뇌주반도에서 일어난 강탈 사건은 군부에서 손을 대고 있는
만큼 모두들 쉬쉬하지만 눈치도 못 챌 만큼 비밀에 감춰진 정
보는 아니다.
황유귀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단지 기사청 장군이 개입해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뿐이다.
그렇다. 황유귀가 경주부에 들어가서 알아낸 정보 중 가장
중요한 정보는 바로 그것이다.
기사청 장군!
적사장군은 강탈사건에 대해 무엇인가 알아서는 안될 것을
알았던 게다.
노장군이 언질을 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 돈에 관한 일
이라면 역시 강탈 사건밖에 없다.
그 다음 무인들부터 초점이 바뀌었다.
그들은 먼저 들어온 무장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피살당했다
면 누구에게 피살당했는지 그 점에 초점을 맞췄다.
그들은 사태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죽은 것이다.
우화는 아니다.
경주부도 아니다.
그렇다면 남은 곳은 해남파……
해남파와 기사청 장군과의 관계는?
어쨌든 그들은 모습을 드러냈고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잔화는 해남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죽었다. 간살 당한 것처
럼 위장했지만 틀림없이 무장들을 죽인 자와 같은 자의 소행
이리라.
그들은 잔화가 노장군에게 가는 간자(間者)라는 사실을 언
제 알았을까?
잔화가 발각된 이상 자신들의 종적 역시 드러나 있을 터.
두 사람 중 한 사람이라도 살아남아서 적엽명에게 죽통을 전
달해야 한다. 또한 한백은 이번 기회에 그들의 이목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알아볼 심산이었다. 그래서 예전의 행보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게다.
한백은 오두막으로 숨어들었다.
앞은 툭 트인 벌판이다. 산자락을 일군 밭이 있고, 밭 끝
쪽에 농군들이 더위도 피할 겸, 낮잠도 잘 겸 겸사겸사 마련
해 놓은 오두막인 듯 하다.
'보름달을 보기는 틀렸군.'
한백은 어두컴컴한 하늘을 보며 한 여인을 떠올렸다.
그녀는 어둠을 닮았다.
원래는 환한 보름달이었지만 먹장구름에 가려져 빛을 잃어
버렸다.
재미있는 여인이다. 그녀를 보다보면 순하디 순해서 아무
짝에도 쓸모 없을 것 같다는 느낌과 어느 사내가 저런 여인과
살을 맞댈 수 있을까하는 사나운 느낌이 동시에 든다.
어느 쪽이 그녀의 진면목일까.
석두는 사나운 면을 보지 못하고 죽었으리라. 그러나 한백
은 순한 면을 보지 못했다. 그가 본 것은 억척스러움뿐이다.
그런데도 성품이 순할 것 같다는 느낌은…… 그냥 느낌이다.
그녀를 보면 순한 성품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녀는 아름답고 현숙한 아내였으리라. 피곤한 몸을 넉넉하
게 쉴 수 있게끔 아늑한 보금자리를 제공했으리라. 그녀는 거
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요악하리만치 관능적인 몸으로 낮과
는 전혀 다른 밤을 느끼게 해주었으리라.
송지……
한백이 떠올린 여자는 죽은 석두의 첩, 송지였다.
그녀라면 군인의 반려자로 손색없는 여인이 아닌가.
전사(戰死) 소식을 들으면 눈물 한 방울을 흘릴 줄 알고,
꿋꿋이 일어서 살아갈 줄도 알며, 남겨진 자식을 훌륭히 키워
줄 여인.
한백은 송지의 표독한 얼굴이 그리웠다.
그 때였다.
피융!
공기를 찢어발기는 파공음.
파공음 소리와 '위험!'이라고 자각한 것은 거의 동시였다.
한백은 몸을 납작하게 눕혔다.
순간, 그의 몸을 스치고 지난 화살 한 대가 오두막 기둥에
꽉 하고 틀어박혔다.
'공격!'
한백은 누운 자세로 창을 꺼내 조립했다.
이곳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한백은 황유귀가 관청을 나서기 반나절 전부터 산자락에 몸
을 은신하고 기다렸다. 죽통을 회수한 다음에는 아무도 다니
지 않은 산길만 골라서 걸었다. 오두막은 산자락이 끝나는 곳
에 있다. 단언하건대 한백이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만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상대의 이목이 얼마나 넓게 퍼져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
다.
오두막을 벗어나면 사람과 만날 공산이 크다.
그래서 밤을 택해 사람이 인적이 닿지 않는 논둑길이나 산
길, 들판을 걸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적이 급습해 온다?
이래서는 잔화가 죽은 것이 당연하다.
적의 이목은 해남도 전체를 뒤덮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
니다. 아니면 경주지부에 간자가 있거나.
부아악……!
이번에는 공기를 찢는 소리가 조금 전에 비해 둔탁했다.
'불화살! 이 놈들, 이곳 지리를 상세하게 알고 있군. 들판
으로 나가면 죽는다. 이곳에서 버터야 하는데……'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정작 한백은 들판을 향해 치달리기
시작했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불타오르는 오두막에
숨어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 산자락에 달라붙었다가는 어디
에서 날아오는 지 모를 검날에 등짝이 꿰뚫릴 게다. 그러나
들판으로 달려가는 것보다는 덜 위험하다.
적이 말을 가지고 있다면 '맹장 사냥법'이라고 일컬어지는
덫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꼴이 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백 자신이 사지라 생각하는 들판으로
스스로 달려가게 만든 것은 모순되게도 자신이 알고 있는 병
법이었다.
- 법왈(法曰), 고선자치인이불치어인(故善者致人而不致於
人).
적을 내 생각으로 끌어들일 것이지, 적이 생각한 방향으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
적은 한백이 산자락으로 달라붙을 것을 생각하고 있다.
누구보다도 맹장 사냥법을 잘 알고 있는 한백이다. 그런 사
람이 스스로 험지에 들어갈 리가 없다. 산자락으로 달라붙는
다면…… 한백이 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그가 움직이는 행동반
경은 제한되어 있다. 오두막을 중심으로 물샐틈없이 포위한
다음, 몰아치면 끝이다.
생각의 허(虛)를 찌르는 것이 병법.
피융……!
날카로운 파공음이 뒤통수를 간질인다 싶은 순간 한백은 재
주를 넘듯이 땅바닥으로 뒹굴었다.
화살은 어느 방향으로 흘러갔을까?
한백은 신속하게 일어나 다시 뛰기 시작했다.
피융! 피융……!
이번에는 날아오는 소리가 제법 복잡하다.
'제길!'
한백은 투덜거렸다.
불타고 있는 오두막이 사방을 환하게 밝혀주고 있다. 덕분
에 자신은 아주 좋은 과녁이 되었고, 어둠 속에 숨어있는 자
는 이 상황을 여유롭게 즐기는 중이리라.
타악!
본능적으로 휘두른 창이 화살 한 개를 퉁겨냈다. 뒤를 바짝
따라붙는 화살 한 대는 몸을 틀어 피했다. 그러나 그 옆에 따
라붙은 화살을 피하지 못했다.
"크윽!"
한백은 거친 신음을 토하며 풀썩 쓰러졌다.
눈앞이 아찔했다. 왼쪽 갈비뼈 바로 밑을 꿰뚫은 화살은 극
심한 고통을 안겨주었다.
한백은 등으로 손을 돌려 화살대를 잡고 쑥 뽑아냈다.
끈적끈적한 피가 만져진다. 극심한 고통도 치밀어온다.
"이 화살은!"
한백은 아픔을 느낄 틈이 없었다. 놀람은 그만큼 컸다.
화살대가 와선형(渦旋形)으로 깎인 화살.
한백은 이런 화살을 쓰는 무장을 기억하고 있다.
일시사(一矢邪) 문공(文珙)!
적궁랑 팽훈과 함께 이궁(二弓)이라 불리는 무장.
와선형 화살은 날아가는 동안 회전력을 부여받게 되고, 살
상효과는 상대적으로 커진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화살촉과
화살대 전반부를 맹독(猛毒)에 절여냈다고 한다.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적을 확실하게 죽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어쩐지 무장다운
호쾌한 맛이 나지 않는다. 독을 즐긴다면 음침한 성격의 소유
자는 아닐까? 뛰어난 무장인 것만은 틀림없지만 성격상 서로
비위가 맞지 않을 것 같았던 사람.
한백은 화살을 버리고 몸을 일으킨 다음 어둠 속을 향해 뛰
었다.
불빛의 영향력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어둠 속으로 빨리
스며들면 스며들수록 문공의 화살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화살은 더 이상 날아오지 않았다.
한백이 불빛으로부터 벗어나기까지는 화살 십 여대 정도는
더 쏘아댈 수 있었는데 그는 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두두두두……!
말발굽이 지축을 뒤흔드는 소리.
'나를 사냥하겠다는 말인가? 천천히 즐기겠다 이거지.'
한백은 땅에 바싹 엎드렸다.
옆구리에서 싸한 아픔이 전해져온다. 화살에 꿰뚫렸다면 당
연히 화끈한 아픔이어야 옳다. 뼛골이 울리도록 자르르 저려
와야만 한다. 독이다. 싸한 아픔은 독이 혈관 속으로 파고들
면서 몸을 마비시키는 증세다.
'송지……'
한백은 송지의 얼굴을 또 떠올렸다.
그녀는 비가에 들어온 이후로 웃어본 적이 없다. 웃는 얼굴
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웃음도 잘 어울릴 여인인데. 그 얼
굴에 웃음을 띄워주고 싶었는데.
'제길! 나도 약해졌군. 전에는 적엽명 장군 얼굴이 제일 먼
저 떠올랐는데 송지라니.'
한백은 땅에 귀를 댄 채 움직이지 않았다.
두두두두……!
말발굽 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왔다.
그래도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가만히 있으면 몸이 짓이겨
진다 싶은 느낌이 들 때까지 움직여서는 안 된다.
두두두두……!
말발굽이 머리를 짓이기는 것 같다. 팔일까? 몸일까? 제일
먼저 말발굽이 닿는 부위는 어디일까?
'하나, 둘, 셋, 넷!'
마음속으로 넷을 헤아렸다. 그 시간이면 십 장 거리를 치달
려 올 수 있다.
한백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엇!"
누군가 놀란 외침을 터트렸다.
'다섯!'
말 한 필은 한백을 지나쳐 앞으로 치달리는 중이었다. 두
필은 좌우에, 다른 두 필은 전면에…… 모두 다섯 필이다. 외
침 소리는 전면에서 달려오던 사내가 터트렸다.
파앗!
번개같이 내지른 창이 왼쪽에서 달려가던 기마무인의 옆구
리를 파고들었다. 동시에 공중으로 떠오른 한백의 발길질에
오른 쪽 기마무인이 나가떨어졌다.
빙그르 회전한 한백은 왼쪽 말의 궁둥이를 발판 삼아 재차
허공으로 솟구쳤다.
목표는 코가 닿을 듯 바짝 다가선 전면의 두 무인.
철컹! 촤르륵!
묵중한 쇳소리가 들리며 무엇인가가 한백의 코끝을 스치며
지나갔다. 순간 한백의 창은 그자의 몸통을 정확히 파고들었
다.
"크윽!"
답답한 신음이 터져나왔다.
한백의 그 자의 몸을 발로 차 마상에서 떨어트렸다.
쿵! 철그렁!
마상에서 떨어진 자는 몸집이 컸다. 그는 몸집에 어울리게
묵직한 철추를 사용했다.
방금 전 콧등을 스쳐간 것이 철추(鐵鎚)? 한 치만 더 가까
웠다면 먼저 죽은 것은 자신이리라. 머리통이 으스러진 채.
콧등이 쓰렸다. 철추가 스쳐 지나면서 껍질을 벗겨낸 모양
이다.
한백은 뒤늦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소름이 오싹 끼쳤다.
콧등이 벗겨진 것이 마치 머리통이 으스러진 충격으로 다가왔
다. 허나, 마음속으로 움츠러드는 것과는 달리 그의 몸은 민
활하게 움직였다.
말을 거꾸로 탄 자세.
말은 앞으로 치달려 갈 뿐이다.
한백은 창대를 돌려 나란히 말머리를 같이 하고 있는 자의
머리를 향해 내질렀다.
상대는 몸을 움츠린다.
이것이 바라던 순간!
한백은 순식간에 상대의 몸을 네 번이나 찔렀다.
창은 두 가지 용도로 사용된다.
찌르는 것과 후려치는 것.
후려치는 것은 마상에 있는 적을 떨구는 데 요긴하다. 찌르
는 것은 상대를 죽이기 위함이지만 내지른 창이 빗나갔을 경
우에는 반드시 응징이 뒤따른다는 단점이 있다. 창의 명인은
그런 경우를 염려하지 않는다. 흔히들 일시십창(一時十槍)이
라고 말하는 경지를 터득한 명인이라면.
창 한 자루, 과녁 한 개.
창을 내지른 것은 한 번이지만 과녁에 구멍이 뚫린 것은 열
개네.
누가 일시십창의 빠름을 막을 수 있을까.
한백은 일시십창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일시오창 정도는 된
다고 자부했다.
"크윽!"
술을 담아놓은 가죽부대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피분수를 쏟
아낸 적이 말 위에서 굴러 떨어졌다.
'나를 사냥하겠다고? 이 놈들!'
한백은 자세를 바꿔 앉았다.
한백을 지나쳐 앞으로 치달렸던 무인이 말머리를 돌려 달려
오는 중이었다.
한백은 마주쳐갔다.
기창교전(騎槍交戰)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사양하고 싶은 생
각이 없는 한백이다.
두두두……! 두두두두……!
두 필의 말은 급격하게 거리를 좁혔다.
'편곤(鞭棍)!'
상대가 소지한 병기는 편곤이다.
무장들이 사용하는 편곤은 편(鞭)의 길이가 여섯 자 다섯
치, 고리로 연결된 자편(子鞭)은 한 자 여섯 치다. 모두 여덟
자 한 치의 장병(長兵)으로 자편은 쇠로 만들어 가격하는데
사용한다.
오른 손으로 편곤을 쳐들고 달려오던 자가 자세를 전환한
다. 말고삐를 놓아버리고 양손으로 편을 움켜잡았다. 이제 공
중으로 한 바퀴 휘두른 다음 회전 탄력을 가미하여 후려쳐 오
리라.
한백은 말갈기에 얼굴이 닿을 정도로 납작하게 엎드렸다.
가격점을 줄이려는 행동으로 마상교전을 벌일 때 흔히 쓰는
자세다.
휘르륵……!
말이 서로 빗겨 지나는 순간, 상대는 도리깨질을 하듯이 편
곤을 휘둘러 왔다. 그리고 그 순간, 한백의 창도 상대를 향해
찔러갔다.
퍼억!
잘 익은 감이 터질 때처럼 붉은 핏줄기가 비산했다.
얼굴 한 복판을 찔린 적은 비명소리 한 마디 내지르지 못하
고 나가떨어졌다.
한백은 달리던 말의 기세를 이용하여 내처 달렸다.
이들 중에 화살을 날린 자는 섞여 있지 않다.
일시사 문공은 방심했다. 그 자가 이들 중에 섞여 있었다면
이처럼 손쉽게 끝나지는 않았으리라. 아마도 맹장 사냥법으로
충분하리라 생각했겠지만 천만의 말씀……
피융!
화살이 날라 왔다. 하지만 이미 한백은 어둠 속으로 묻힌
다음이었다.
한백은 얼마 달리지 못해 마상에 축 늘어지고 말았다.
정신을 잃지는 않았다. 현기증이 극심하게 치밀고 세상이
빙빙 돌았지만 그럴수록 그는 눈을 부릅떴다.
정신을 잃으면 죽는다.
적에게 잡혀 죽을 수도 있지만 이대로 마상 위에서 절명할
수도 있다. 그는 있는 힘껏 말고삐를 움켜잡았다. 그 때,
쉬익!
옆에서 무엇인가 불쑥 튀어나왔다.
한백은 창을 내지르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빳빳하게 굳어
지기 시작한 팔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 놈!'
고함을 내지르고 싶었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목 울대까지 치민 고함은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정신도
흐릿해졌다. 눈을 부릅떴지만 상대의 모습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제길! 되게 당했군."
그 자는 무엇이라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서슴없이 말 등에
뛰어올라 고삐를 가로챘다.
'이 놈! 무슨 짓을!'
분노 역시 생각으로 그쳤다.
그는 머리를 말갈기에 푹 파묻고 말았다.
화살과 함께 몸 속으로 파고든 독기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
다 훨씬 지독했다.
첫댓글 묘사가 탁월하네요. 감사
잘 보고 갑니다. 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