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二十一章 죽음을 부르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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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관영 무인들은 여모봉 구석구석을 이 잡듯이 뒤졌다.
우화를 죽인 이상 필연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행동이었
다.
살인만은 가급적 자제했다. 우화대원이 확실하다고 여겨지
는 여족인을 만나도 산에 있는 이유만 그럴듯하게 대면 모른
척하고 지나쳤다.
해남파는 사태가 확산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석가주는 부지런히 효민(涍民), 지민(池民)), 존민(尊民),
미민(美民), 새민(璽民)의 노인들을 만나러 다녔고, 범가주는
만일의 사태가 벌어질 경우 관졸들이 사전에 차단한다는 약속
을 받아왔다.
실제로 관졸들은 병기에 기름칠을 한 채 길목 요소요소를
점거했다. 전처럼 나태하거나 길가는 사람들을 희롱하는 모습
은 찾아볼 수 없었다.
관졸들도 우화가 죽었다는 말에 바짝 긴장한 것이다.
관(官)도 해남파와 마찬가지로 여족인에게는 주요 공격대상
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요즘 들어 해남도는 남녀노소(男女老少), 한인, 여족인 가
릴 것 없이 모두들 초긴장한 모습으로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어느 곳에서 화약이 터질 지는 아무도 몰랐다.
적엽명은 여족인들이 난데없이 무더기로 몰려드는 통에 난
감했다.
여족인들은 그를 만나러 온 것이 아니다. 수귀 탄을 만나러
왔다.
적엽명은 그 중 허리에 검을 차고 있는 여족인 열 명을 대
청에 들였고, 그들과 탄이 주고받는 말을 조용히 경청했다.
"아버님이 운명하셨습니다."
"들었다."
"탕님도 운명하셨습니다."
"탕까지 죽었는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산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산으로 들어간다고? 어디로? 어디로 간단 말인가? 여모봉
은 해남파 무인들로 득실거리고 있어. 갈 데가 어디 있단 말
인가."
"여모봉은 우리의 산입니다. 죽더라도 우리의 산으로 가야
합니다. 조상들의 얼이 숨쉬는 산입니다. 우화님의 복수는 하
지 않을 생각입니까? 우리 모두 떨치고 일어서기를 바라고 있
습니다."
"복수? 후후후! 여족인이 언제 복수를 한 적이 있던가? 복
수를 할 힘이나 있었던가?"
입이 무거워 하루종일 몇 마디 하지 않는 탄이지만 오늘은
무척 말이 많았다.
"겁쟁이."
누군가가 도발적인 말을 꺼냈다.
"우리는 언제든지 죽을 마음이 되어 있소. 동족들이 보는
앞에서 갈기갈기 찢겨 죽으면 그 누구라도 울분을 참지 못할
것이오. 우리가 시작하겠소. 우리들의 죽음을 밑거름 삼아 자
존을 일구어 주시오."
다른 한 사람이 의기에 가득찬 소리를 토해냈다.
"죽음……"
탄은 넋빠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해남파는 호랑이다. 여족인은 토끼에 불과하다. 토끼 몇십
마리가 울분에 가득 차서 장렬히 덤벼든다고 해봤자 호랑이의
콧수염조차 건드리지 못하리라.
탄은 대력검을 익혔다는 이들 열 명이 삼십육검이라 부르는
해남무인 한 명보다 약해 보였다.
약한 것은 상관없다. 이들은 죽음을 생각하고 있으니까. 편
안한 죽음이 아니라 될 수 있는 한 처참하게 죽기를 바라고
있다. 여족인들의 마음에 불을 지필 정도로.
우화의 죽음, 그리고 눈앞에서 처참하게 죽어가는 동족. 그
정도면 반란이 일어나고도 남으리라.
달리 선택의 여지도 없다.
우화가 죽음으로써 이들은 구심점을 잃어버렸으니까. 가만
히 있으면 한 사람, 두 사람 떨어져 나가 결국은 지금까지 쌓
아올렸던 저항선(抵抗線)마저 무너져 버릴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으리라.
"헤헤! 이야기 도중에 잠시 실례……"
황함사귀가 중간에 끼여들었다.
그가 끼여들자 대력십검은 인상을 찡그렸다.
사귀도 못마땅한 것이다. 그들은 사귀처럼 능력있는 사람들
이 우화대를 돕지 않았다는 데 불만을 가지고 있다.
"내가 한민이라면…… 가장 먼저 그대들부터 죽일 거야.
암, 당연히 그래야지."
"나도 같은 생각. 해남파는 오래 전부터 낙화라는 계획을
가지고 있어. 각 마을에서 힘 좀 쓰고, 성격이 과격하다 싶은
사람은 반란 초기에 죽게 될 거야. 아니, 말을 바꾸지. 실종
될 거야. 소리소문 없이 제거될 테니까."
황유귀도 끼여들었다.
여족제일의 귀를 가지고 있다는 황유귀다. 여족 제일의 꾀
주머니라는 황함사귀다. 아무리 사귀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는
대력십검이지만 이들 두 사람이 하는 말은 허투루 들을 수 없
었다.
"우리들은 그렇게 약하지……"
황함사귀는 발끈하는 무인을 제지하고 적엽명을 가리켰다.
"여기 좋은 사람이 있어. 적엽명. 안전하게 비무를 해 볼
수 있는 상대지. 해보겠나? 자네들 모두 한꺼번에 말야. 만약
옷자락이라도 베어낼 수 있다면 적극적으로 자네들 머리가 되
어주지. 어때? 열 명이니까 한 번 해볼 만 하지 않나?"
대력십검은 누구 한 사람 입을 열지 못했다.
그들은 적엽명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다. 전가주
와의 싸움을 직접 목격하지 않았는가. 그만한 검이라면……
상대가 안 된다. 그들은 서로를 쳐다보았지만 누구의 눈에도
투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수귀. 네가 우화의 장자라니…… 좋아. 놀라는 것은 나중
으로 미루고…… 우화가 너를 떼어놓은 것은 언젠가 이런 일
이 벌어질 줄 알았기 때문이겠지. 내 생각에는 이 사람들을
데리고 백사구로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
"……?"
모두들 의아한 표정을 떠올렸다.
백사구라면 비가가 등지고 있는 산이다.
높고 험하지 않으며 아기자기한 풍광이 계집아이 속살처럼
부드럽게 느껴지는 산.
은거하여 산세를 벗삼아 지내기는 좋은 산이다. 하지만 우
화대원들이 숨어서 기회를 엿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산이다.
해남파 무인들이 일거에 들이닥친다면 빠져나갈 구멍도 없는
산이다.
"애석하지만 이번 우화의 죽음은…… 황유귀의 몫일세."
황유귀가 어깨를 움찔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황함사귀는 하고 싶은 말을 이어갔다.
"황유귀는 존족 노인의 후인일세. 이번 일은 노인들이 나서
야 될 일이야."
"타협을 하자는 말입니까? 우화의 죽음을 놓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우화가 살해당했는데 콩고물이나 얻어
먹고 나가떨어지라는 소리요!"
대력십검은 흥분했다.
"그게 최선이야. 해남파는 피를 원하지 않고 있어. 우화대
가 극성을 부려도 여모봉을 치지 않은 게 좋은 증거지. 이번
일은 한광, 그 자가 공명심에 사로잡혀 저지른 일에 불과해."
"한인들의 똥구멍이나 빨아먹는 자 같으니."
"닥�!"
황함사귀가 노성을 질렀다.
그는 여간해서는 노성을 지르지 않는다. 아니 늘 입가에 매
달고 다니는 잔웃음을 지우지 않는다.. 이는 극도로 분노하고
있다는 말과도 상통한다.
"동족들을 다 죽여야 속 시원한가! 누구를 죽일 셈이야! 부
모형제를 꼬드겨서 시퍼런 검날 앞에 들이밀어? 이런, 호로망
탱이 같은 자식들! 그래, 너희들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해
봐! 사십 년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어. 그 때 나는 똑똑히 봤
어. 피가 내를 이루고, 시체가 산처럼 쌓이는 것을. 마음대로
해! 그래, 또 한 번 죽어보자고!"
황함사귀는 자리를 떨치고 일어섰다.
황유귀를 옷소매를 잡았지만 찬바람 나게 뿌리치고 대청을
나가버렸다.
적엽명도 일어섰다.
이 자리는 그가 개입할 자리가 아니다.
일이 어떻게 진행되든 탄과 대력십검이 알아서 할 게다. 알
아서.
"산으로 들어간다고?"
"이제는 내가 우화다. 너희들 외에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할
거야. 나는 이 세상에서 사라질 테니까. 모든 우화들이 그랬
듯이……"
"굳이 그럴 필요가……"
"아버님의 유훈이다. 복수는 못해 드릴 망정 유훈은 지켜야
지."
"유훈?"
"우화가 바로 아버님이야. 흑월 탕이 내 동생이고."
"친동생?"
"친동생."
"네게 동생이 있다는 소리는……?"
"어렸을 적에 중원으로 건너갔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해남
파의 검을 꺾을 수 있어야 말이지. 다른 자들은 몰라도 남해
삼십육검, 그들은 해남파의 전부야. 그들을 꺾을 힘이 필요했
어."
"……"
"동생은 살수비기를 남겼다. 이제 여족인들은 살수비기로
무장할 거야. 앞으로 십 년 후. 그것으로 부족하다면 이십 년
후, 동생의 살수비기로 무장한 살수들이 해남파를 치기 시작
할거다. 그 때가 되면 양상이 많이 달라지겠지."
탄은 웃었다.
늘 무뚝뚝하게 경직되어 있던 얼굴. 그런 얼굴에 머문 미소
는 어울리지 않았다.
"등하불명(燈下不明)이라고 했다. 어쩌면 백사구가 더 안전
할 지도 모르지."
"이해해주니 고맙다."
"……"
적엽명과 탄은 손을 마주 잡았다.
"갈게."
"그래."
탄은 대력십검과 대력십검이 데려온 서른 한 명의 아이들,
그리고 여모봉에서 운 좋게 살아남은 이십여 명의 우화대원을
이끌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어린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 큼지막한 보따리를
등에 짊어졌다.
올 겨울까지 지낼 수 있는 양식과 의복, 기타 필요한 물품
들이다.
필요한 것은 그때그때 비가에서 조달해 주기로 하여 당장
필요한 것만 챙긴 것이 이 정도였다.
이제부터 이들은 백시구에 둥지를 틀 것이다.
그 누구도 백사구에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으리라. 폭풍의
핵인 비가가 코앞에 있으니까.
"나는……"
몇 걸음 걷던 탄이 뒤돌아서며 말했다.
"너에게 거리감을 가지고 있었다. 너는 한인이니까. 사과한
다."
적엽명은 웃었다.
청천수와 화화부인은 나와보지 않았다. 아무래도 평생동안
당연하게 생각해 왔던 고정관념을 고치는 것이 쉽지 않으리
라. 여족인이 한인과 똑 같은 사람이라는 여족인들의 주장을
받아들이기가.
"그동안 신세 많았습니다."
외팔이 중년인이 아내 추와 함께 인사를 했다.
그의 등에도 커다란 봇짐이 매여 있었다.
"그래요. 잘 가세요."
적엽명은 흔쾌히 인사를 받았다.
해남파로 말하자면 통령 위치에 있는 제삼구휼조장.
그는 이번 여모봉 참사에서 살아남은 두 명의 조장 중 한
명이었다. 적엽명에게 우화라고 자칭했던 제일구휼조장은 우
화대원들의 모든 활동을 중지시키기 위해서 산을 내려온 덕분
에 화를 면했고, 그는 비가에 머문 덕분에 화를 면했다. 잘린
팔이 완전히 아물면 산으로 들어가려고 했건만.
그가 탄을 따라가는 것은 당연하리라.
"리아는 오는 대로 바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네."
중년부인은 수줍게 웃었다.
제일구휼조장이 다가왔다.
"탄을 통해서 알아봐 달라고 했던 일…… 이제는 알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상상외로 거대한 조직인 것만은 틀
림없습니다. 우화대에도 그들에게 동조하는 자들이 있으니.
우화대의 결속력보다 더 강하게 결속된 자들입니다."
"됐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우화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이게 마지막입니다. 미미하기
짝이 없지만 이것으로 만족해 주시길."
죽은 사람에게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적엽명은 제일구휼조장의 손도 잡아주었다.
"그리고 호평평야에서 말했던 신분문제……"
적엽명의 표정이 굳어졌다.
"비가주의 아들이 틀림없습니다. 릉릉이…… 아니, 어머니
께서 비가주와 합환(合歡)하는 날, 제가 있었어요. 사실 은자
좀 훔치러 들어왔었는데."
제일구휼조장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우르르 몰려들었던 사람들이 일시에 빠져나가자 비가는 텅
빈 듯 했다.
제일구휼조장이 마지막으로 한 말은 의미가 없다. 이제는
출신 때문에 좌절할 필요가 없다. 여족인이면 어떻고 한족이
면 어떠랴. 비가보의 둘째 자식인 것을.
적엽명은 한백을 안아 일으킨 다음 약을 먹였다.
황유귀가 한백을 태우고 부실 듯이 대문을 밀칠 적만 해도
한백은 죽은목숨과 다름없었다.
상처가 너무 중했다. 왼쪽 갈비뼈 밑으로 파고든 화살은 어
린아이 주먹만한 구멍을 뚫어놓았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욱
심한 것은 화살에 묻은 독이다.
절음독(絶飮毒).
중원 산간지방에는 사월에서 유월 사이에 노란색의 꽃망울
터트리는 꽃이 있다. 일반적으로 산괴불주머니라고 부르는 꽃
이다. 꽃이 무척 예쁘고 생명력이 강해서 초여름에 들어설 무
렵이면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일부러 정
원에 심어놓기도 한다.
무리를 지어 피면 노란 비단이 펼쳐진 듯한 꽃.
의원들이 약재로 사용하기도 한다. 진통이나 타박상에는 아
주 그만이다. 허나 간과하지 말이야 할 것은 이 꽃에 강력한
독이 있다는 점이다.
복용을 하면 즉시 복통을 일으키며 심하면 즉사하기도 한
다.
절음독은 산괴불주머니에서 채취한 독에 홍점사(紅點蛇)의
독을 배합해서 만든다.
주로 남만의 미개인들이 사냥을 할 때 화살촉에 묻힌다는
독.
독상이 너무 강력해서 적엽명조차 유배되어온 적객 황역에
게 사람을 보내 해독처방을 알아와야 했다.
황유귀가 황역에게 다녀오는 동안 적엽명은 한백의 머리맡
을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상처를 치료하고, 독이 번지는 것
을 막기 위해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처방을 동원했다.
다행스럽게도 한백은 목숨을 구했다.
허나 그가 원하는 생활…… 병사들을 이끌고 들판을 질주하
는 생활은 이제 기억 속에서나 떠올려야 할 것이다.
"탄이 갔다구요?"
한백은 힘들게 말했다.
"다행이지. 우화가 내 벗이라고 생각해봐. 얼마나 멋진 일
인가."
"지금은 한 사람이라도 아쉬울 때인데……"
"그런 걱정하지 말고 몸조리나 잘해."
"후후! 관장군님을 뵐 면목이 없어졌군요."
"죽지는 않았지 않나. 산 것으로 보답한 거야."
"쿨룩! 쿨룩……!"
한백은 심한 기침을 했다.
해독제를 복용하고 난 다음부터 부쩍 심해진 기침이다. 황
역은 독이 빠져나가는 증상이라고 했지만 한번씩 기침을 터트
릴 때마다 몸을 격렬하게 뒤트는 모습은 차마 보고있기 힘들
었다.
"됐습니다. 이제 가서 쉬지지……"
한백은 말을 하다말고 눈썹을 곤두세웠다.
파아아아……!
빗방울 소리에 섞여서 들리는 기이한 음향.
바람소리라고 하기에는 너무 거셌고, 나무가 흔들리는 소리
라고 하기에는 날카로웠다.
"쉬게."
적엽명은 한백을 편안하게 뉘여 주었다.
한백은 다른 소리를 하지 않았다. 지금 적엽명은 한시라도
빨리 이 방을 나가야 한다. 시간이…… 없다.
파아앗……! 크윽! 쿵……!
허공을 쏘아나가는 소리, 비명소리, 결과, 그리고 적막.
날이 어두워져 칠흑같이 깜깜한 밤이 소리 없이 흔들렸다.
푸욱! 커억……!
땅바닥이 꺼지는 소리도 들렸다. 그리고 그런 소리가 들린
다음에는 어김없이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적엽명은 대문이 환히 보이는 위치까지 치달린 다음 멈췄
다.
일 장 앞 바위 뒤에 웅크리고 있는 화문의 큼지막한 몸이
보였다. 그 옆에는 황유귀가, 그리고 그 옆에는 호귀 류의 모
습이 보였다.
"먹히고 있어요."
황함사귀가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인원은?"
"대충 백 명은 넘는 것 같은데……"
황함사귀가 자신 없는 대답을 했다.
워낙 어두운 밤인지라 정확한 인원을 파악할 수 없었으리
라.
인원수만 따진다면 비가에도 적지 않은 사람이 있다. 허나
대부분이 무공을 모르는 창기들이다. 노노가에서 강단있기로
소문난 여자들만 추려왔다고 하지만 강단있는 것과 사람을 죽
이는 것은 전혀 다르다. 더군다나 창기들은 목숨을 걸고 싸워
야 할 의무가 없다.
그렇게 따진다면 백 명 넘는 인원이 급습해 왔다는 것은 절
망적인 상황을 의미한다.
"무공은?"
"헤헤……!"
적엽명은 웃음소리만 듣고도 황함사귀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황함사귀는 힘들게 생각하고 있다. 적의 무공이 예상외로
강하다고 판단한 듯 하다.
황함사귀의 눈은 정확하다.
그는 비록 무공을 모르지만 보고들은 것이 많아서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도 무공의 깊이를 거의 정확하게 짐작해 낸다.
적엽명은 활을 집어들었다.
한 때는 기창(騎槍), 기도(騎刀), 기편(騎鞭), 기검(騎劍),
기사(騎射)의 달인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해남도에 들어와서
는 검만 사용했지만 군대에서는 기사 또한 기사청 장군의 이
궁 못지 않게 알려져 있는 솜씨다.
피웅!
"컥!"
화살 한 대에 적 한 명이 쓰러졌다.
쓰러지는 모습은 어두워서 보이지 않는다. 단지 비명소리만
들렸을 뿐이다.
일행이 은신해 있는 곳에서 대문까지는 이십 장 거리.
적엽명은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이십 장 너머를 볼 수 있
단 말인가. 아니다. 적엽명은 직감으로 활을 쏘아내고 있다.
조그만 기척도 그의 귀는 속이지 못했고, 그곳을 향해 쏜 화
살을 정확히 비명을 만들어냈다.
피웅!
"으악!"
십여 대의 화살이 날아가고, 그만큼의 비명이 터져나왔다.
야밤에 월장(越牆)한 적은 좀처럼 이십 장 거리를 좁혀오지
못했다. 담을 넘은 곳에서 채 오 장도 다가오지 못하고 허덕
였다.
둔중해 보이는 화문의 몸이 비호처럼 움직였다.
월도가 야밤을 갈랐고, 운 좋게 이십 잘 거리를 건네 온 적
은 힘없이 꼬꾸라졌다.
"아아악!"
이번 비명소리는 조금 다르다. 연약하면서도 구슬프다.
여인이 내지른 비명소리.
여인이 토해내는 처절한 비명소리는 한 명에서 두 명으로,
두 명에서 네 명으로…… 급속하게 퍼져갔다.
"무너졌다. 물렷!"
적엽명은 단호한 일갈을 토해내며 다시 화살 한 대를 날렸
다.
호귀가 품에서 상아로 만든 호각(號角)을 꺼내 불어제쳤다.
뿌우! 뿌우……!
어둠이 심하게 요동친다. 십 장 앞에 있던 창기들이 일제히
물러서면서 만들어낸 물결이다.
창기들이 물러서자, 적들은 막힘 없이 지쳐왔다.
적엽명이 쉴새없이 화살을 날렸지만 적은 너무 수가 많았
다.
"아악!"
"어맛! 컥!"
창기들은 속절없이 죽어갔다.
"이야앗!"
호귀가 울분을 참지 못하고 뛰쳐나갔다.
호귀와 창기들은 혈육 같은 정을 나누는 사이다. 그런 사람
들이 눈앞에서 죽어 가는데 누가 참을 수 있으랴.
"타앗!"
화문이 일갈을 터트리며 누군지도 모를 그림자와 부딪쳐갔
다.
화문이 도주하며 입은 상처는 아직 아물지도 않은 상태.
그가 거칠게 움직이자 상처가 다시 터져 핏물이 흘러내렸
다. 그러나 그는 그런 점을 알지 못했다. 눈앞에 다가온 적과
마주치기에 급급했으니까.
"물러섯!"
황함사귀에게 간단히 말한 적엽명은 허리춤에 꽂아놓은 쌍
검을 동시에 빼들었다.
조곡노인이 파랑검을 얼마나 예리하게 갈았을까?
이제 시험해 보면 안다.
아직 검명을 정하지 않은 묵검은 얼마나 피를 원하고 있을
까?
이제 곧 알게 된다.
오른손에는 파랑검을, 왼손에는 묵검을 쥔 적엽명은 어둠
속으로 묻혀 들었다.
"물러서라니, 무슨 섭섭한 말씀을."
황함사귀는 적엽명의 뒤를 바짝 따랐다.
그는 어디서 구했는지 철검 한 자루를 손에 든 채 어둠 속
의 적을 맞이했다.
君不見,
黃河之水 天上來 奔流到海 不得回
又不見 高堂明鏡悲白髮
朝如靑絲暮成雪
人生得意須盡歡
莫使金樽 容對月
그대는 보았는가.
하늘에서 내린 황하가 바다로 들어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을.
또 고당 명경 속에 백발이 슬픈 것을.
아침 청사가 밤에는 눈이다.
인생이 득의하면 즐거움이 덧없으니
달을 바라보며 술잔이나 드는 것이 어떠한가.
昔子之去 氣桓
今子之來 身
名 幸姬去何處
倦甲殘兵不成俉
옛날 네가 갈 때에는 기운이 굳세더니
이제 돌아오니 몸이 쓸쓸하구나.
이름난 오추마와 사랑하던 행희는 어디 갔는고
싸움이 끝나니 남은 군사는 행오를 이루지 못하는구나.
밤새도록 이어진 싸움이 동이 틀 무렵에야 끝났다.
적들이 물러간 비가는 그야말로 눈뜨고는 보기 어려울 만큼
시체와 피로 가득했다.
화문은 피로 목욕을 한 듯 온통 시뻘건 색이었다. 웬만한
병장기는 단숨에 동강내 버린다는 월도도 이가 듬성듬성 빠져
있어 주인과 모습을 같이 했다.
황유귀는 시체들 틈에 털썩 주저앉아 있다.
그의 엉덩이 밑으로 빗물에 씻긴 피가 흐르고 있건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너무 지쳤다.
호귀도 상황은 비슷했다.
그가 병기로 사용하는 채대는 가닥가닥 끊겨 여기저기 뒹굴
었다. 그는 채대 대신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청강장검을 들고
있었다.
호귀는 황유귀처럼 앉아있지 않았다.
시신들 틈을 돌아다니면서 부상당한 창기들을 돌보느라 여
념이 없었다. 그리고…… 이미 가망이 없을 만큼 치명적인 부
상을 당한 창기는 눈물을 흘리면서 편히 쉬게 해주었다.
적엽명도 주저앉았다.
간밤에 죽인 숫자가 얼마나 될까?
전장에서나 있을 법한 싸움이 해남도에서 벌어지다니.
적엽명은 고개를 들어 얼굴을 하늘로 돌렸다.
빗방울이 시원하게 쏟아진다.
빗물과 섞여 내를 이루고 있는 핏물. 시신들은 아직도 힘을
가득 주고 검을 잡고 있다. 무엇을 그리도 집착하는지.
그 때였다.
"어른!"
호귀가 비통한 절규를 터트렸다.
'어른?'
적엽명은 심상치 않은 예감에 고개를 돌렸다.
호귀가 껴안고 있는 시신…… 분명히 황함사귀다. 황함사귀
가 죽었다. 그리도 피하라고 했건만.
적엽명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비칠거리며
걸어갔다.
2
여족인들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절대 공경한다.
나이가 한 살만 더 많아도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싫은 소
리를 하더라도 얼굴을 붉히지 않고 순종한다.
사귀는 그런 전통을 깼기에 귀신이란 소리를 들으면서 쫓겨
났다.
황유귀, 호귀. 수귀.
그들은 황함사귀를 대하기가 어려웠다.
황함사귀 스스로 적엽명의 종복을 자처했고, 말을 높였다.
적엽명은 종복처럼 대하며 말을 낮췄다. 삼귀는 적엽명과 평
대한다.
참으로 곤란했다. 더군다나 그는 늘 사십도 안된 나이라고
하지만 할아버지 뻘 되는 노인이 아닌가.
그런 격의를 황함사귀는 몇 마디 말로 간단히 해소해 버렸
다.
"이 놈들아. 네가 이랑 종복이지 네 놈들 종복이냐? 또, 이
제 마흔 밖에 안된 사람을 늙은이 취급할 거야? 그냥 편한대
로 사는 거지 뭐가 그렇게 복잡해."
그 다음부터 삼귀와 황함사귀는 친구처럼 지내왔다.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삼귀가 아무리 애통해 한다해도 적엽명처럼 애통하
지는 않으리라.
황함사귀는 아버지였다.
그는 인생의 스승이었고, 앞길을 밝혀주는 등불이었다.
황함사귀는 목에서부터 배까지 이어지는 기다란 검상을 입
은 채 절명했다.
"여태까지 전례에 비추어 보면 그들은 이랑을 죽이려 들 겁
니다. 비가는 노출되었고…… 화문, 한백은 부상을 당했고,
염려스러운 사람은 이랑인데…… 비가에는 사람이 얼마 없죠?
일거에 몰아친다면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겠죠. 사실 맞는 생
각이고요."
"황유귀, 비가 주변에 물샐틈없는 노방을 만들어 줘."
"노방을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노방을 조정할 사람이
있어야 돼. 물샐틈없는 노방이라면 적어도 삼십 명은 있어야
하는데……"
황유귀는 말꼬리를 흐렸다.
비가에 그만한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이 목부들
이다. 돈에 팔려온 사람들. 그들은 위험하다 싶으면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리라. 벌서 도망친 사람들도 있다. 강성오가
에서 파견한 목부들, 그들은 싸움이 끝난 다음 날 흔적 없이
사라져버렸다.
"호호호! 삼십 명이면 내가 어떻게 해 볼 수 있어."
호귀가 나서주었다.
그 때 적엽명은 분명히 말했다. 싸움이 벌어지면 뒤로 물러
나 있으라고. 화문이나 한백의 말을 들어보면 전장에서 단련
된 자들 같은데 그런 자들은 싸움하는 법을 알기 때문에 약하
다고 생각되는 자부터 칠 것이라고.
그런데 어쩌자고 싸움판에 끼여들었단 말인가.
"이제 그만 보내드리지."
수귀 탄이 적엽명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그는 백사구에 올라간 지 하루도 안되어서 다시 내려왔다.
비가에 중대한 싸움이 있을 것은 알았지만 아버지의 유훈을
지키는 것도 중요했다. 그래서 백사구에 올라갔지만, 황함사
귀가 죽을 줄은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싸움이 끝난 다음
에 올라가는 것인데.
적엽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례는 여족인의 풍습에 따라 풍장(風葬)으로 지내기로 했
다.
장소는 백사구.
황함사귀는 비가보가 환히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지켜볼 것
이다. 비가보가 얼마나 굳건하게 뿌리를 내리는지. 자신이 종
부한 황담색마가 몇 마리나 훌륭한 망아지를 낳는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적들을 적엽명이 어떻게 제거하는지.
모두 지켜볼 것이다.
적엽명과 사귀가 장사를 지내는 동안 비가에 남아있는 목부
들과 창기들은 시신을 정리했다.
시신은 세 부류로 나뉘어졌다.
한인 한 부류, 여족인 한 부류, 한인인지 여족인인지 구분
이 가지 않는 사람들 한 부류.
적엽명 일행이 비에 흠뻑 젖은 채 비가에 돌아왔을 때는 시
신 정리가 다 끝난 상태였다.
죽은 사람은 모두 예슨 네 명이다.
창기들이 열 일곱 명, 습격해 온 자들이 마흔 일곱 명.
비가에서 검을 들고 싸운 자는 황함사귀까지 다섯 명에 불
과하니 일당십으로 싸운 셈이다. 그 중 노방에 걸려 죽은 자
는 여덟 명이었고 화살에 맞아 죽은 자는 열한 명이었다.
부상당해 도주한 자까지 합하면 근 백여 명이 당했다고 봐
야 한다.
"이들을 알아볼 수 있겠는가?
적엽명의 말투에는 적의가 물씬 풍겨나왔다.
"난 이 사람을 알아. 미족(美族)에서는 이름난 용사야."
호귀가 시신 한 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도 이 사람을 알아요. 집이 민연촌(憫然村)에 있다고 했
어요."
창기 한 명이 호귀에 이어 말했다.
민연촌이라면 새족(璽族)이 운집해 있는 곳이다.
황유귀와 호귀는 계속 아는 얼굴을 찾아냈다. 간밤에는 어
두워서 누군지도 모르고 죽였지만 그 중에는 자신들의 부족들
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황유귀는 존족이다.
호귀는 미족, 수귀는 지족(池族)이다. 이미 죽은 황함사귀
는 새족이다. 아마도 그는 자신들이 부족인 손에 죽었을지도
모른다.
황함사귀가 살아있었다면 그도 아는 얼굴을 골라냈을 텐데.
창기들도 아는 얼굴을 찾아냈다.
여족인들은 대체로 해남도에서는 외도(外道)를 하지 않는
다. 뇌주반도에나 나가면 모를까. 하지만 죽은 자들 중에는
노노가에서 살다시피 한 자도 많았다.
그들의 얼굴은 창기들이 가장 잘 알았다.
"이 사람은 관원이야. 경주지부에서 본 적이 있어."
황유귀가 충격적인 말을 했다.
여족인의 시신점검을 끝내고 한인들 쪽으로 돌아섰을 때였
다. 황유귀는 평민 차림의 한 사람을 가리켰다.
"틀림없어. 대화도 나눈 적이 있으니까."
역시 암중의 세력은 늘 곁에 있었다. 그렇기에 잔화가 간살
당해 죽었고, 한백이 사람이 없는 산길만 걸었음에도 습격을
받았다. 당연하다. 늘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면.
비가보에는 이들 세력이 없는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화문이나 한백을 습격할 필요도 없이 곧바로
적엽명을 노렸으리라.
그런 점에서 황함사귀는 철두철미했다.
목부들을 뇌주반도에서 사온 것도 그렇고, 출신을 따져서
광동성(廣東省) 이외의 사람만 고른 것도 그렇다.
황함사귀는 처음 만났을 때 살기가 너무 진해 골치가 아프
다고 말했다. 그때 이미 적엽명이 범상치 않은 일로 찾아왔다
는 사실을 직감한 듯 하다. 꾀가 많은 사람이었으니.
'응?'
무심히 한인들을 쳐다보던 적엽명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는 얼굴이다. 분명하다. 해남파 수련총 무인이다. 팔 년
전, 해남도에서 도주하기 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다. 당시 그
는 해남파에 입문하게 되었다며 좋아했었다.
이들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관부, 우화대, 여족, 해남파가 총 망라된 세력.
습격해오기를 기다렸다.
조금은 힘들더라도 시신을 살펴보면 그들 세력에 대한 단서
를 잡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한백도, 황함사귀도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알아낸 것이 없다.
습격의 결과로 황함사귀와 애꿎은 여인들만 잃었을 뿐이다.
적엽명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성한 사람이 없다.
화문은 상처가 아물지 않은 상태에서 밤새도록 격전을 치른
탓인지 얼굴색마저 창백하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호귀도 크고 작은 상처를 가득했다. 하지만 그는 울먹이는
창기들을 달래면서 죽은 창기들이 시신을 수습하고 있다. 여
유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래도 사정이 제일 좋은 사람은 황유귀였다.
그는 거리를 두고 돌파매질을 한 탓인지 상처가 제일 가벼
웠다.
"술."
적엽명은 황유귀를 불렀다.
"응?"
"힘든 일인데…… 해줄래?"
"후후! 내게 말하지 않으면 욕을 하려고 했지. 알았어. 지
금 가지 뭐. 남아서 특별히 할 일도 없고. 참! 노방을 손질해
야 할 거야. 언제 또 습격해올지 모르니까."
적엽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다. 사귀와는 늘 이렇게 직접 말을 하
지 않아도 마음이 통했다.
황유귀는 짚으로 만든 도롱이만 걸친 채 비가를 나섰다.
적엽명은 오랫동안 그의 뒷모습을 배웅했다.
호귀와 화문도 그의 곁에 서서 멀어져가는 황유귀를 바라보
았다.
어쩌면 이것이 황유귀와 마지막 만남이 될 지도 모른다.
말은 가볍게 했지만 황유귀가 찾아가는 길은 죽음의 길이나
진배없다. 도주한 자들을 찾아가는 길.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
내는 것. 이 길은 적엽명이 걸어야 할 길이다. 화문이나 한백
이 황유귀를 대신했어야 옳다.
적엽명은 또 다른 습격을 대비해 남았다.
너무 충격적인 싸움인지라 방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못하고
있는 화화부인과 취영, 그리고 불구가 된 형과 형수. 병자가
되어버린 취채와 한백. 그들 모두의 목숨이 적엽명에게 달려
있지 않은가. 이제 비가는 공격대상이 되어 버렸으니.
"잘 다녀와."
호귀가 중얼거렸다.
그 음성이 어찌나 쓸쓸한지……
* * *
유소청 장문인의 방문을 받자 퍼뜩 한광이 떠올랐다.
한광이 집무실을 다녀간 후로는 마음이 한시도 편하지 않았
다.
'차는 나중에 마시지. 그대와 혼인하는 날.'
'아버님을 만나서 혼인에 대해 상의를 하겠지? 혼인예물을
준비해야 하는데 무엇이 좋을 지 고민 좀 했어. 그래서 하는
말인데…… 적엽명의 목은 어떨까?'
한광이 남기고 간 말이 가시처럼 틀어박혀 떠나지 않았다.
유소청은 집무실 문이 열릴 적마다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혹시 장문인이 부르는 것은 아닐까? 아버님이 들어오시는
것은 아닐까? 아버님의 전갈을 가진 누군가가……
그런데 장문인이 몸소 집무실을 찾아온 것이다.
"왜 그렇게 놀라니."
"아닙니다."
"허허! 내가 반갑지 않은 손님인가? 그런 줄은 몰랐는데?"
근엄하기만 하던 장문인이 농담을 건네는 것도 심상치 않
다.
유소청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혼인 이야기를 꺼낸다면 단호하게 거절하리라. 그러나 예상
하고 있는 대로 적엽명의 목숨을 담보로 들고 나온다면 어떻
게 해야 하나.
"힘드니?"
"아닙니다."
"딱딱하게 그러지 말고 앉아라. 오늘은 편히 이야기하고 싶
어서 찾아왔어."
유소청은 장문인 옆에 앉았다.
"아이가 한 명 있다고 들었는데?"
"서가에서 책을 읽고 있습니다."
"글을……"
"네.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도 좋겠지. 하지만 여족인이, 그것도 계집아이가 글을
익힌다면…… 포기하는 법부터 가르쳐야 할 게다."
글을 익히면 머리가 사고(思考)가 깊어진다. 생각도 많아지
고 사물을 보는 눈도 달라진다. 좋은 일이다. 허나 좋지 못한
경우도 있다. 리아가 그런 경우다.
유소청은 리아에게 글을 가르치면서도 회의(懷疑)를 느끼곤
했다.
글을 익혀서 무엇할 것인가. 머리는 깨쳤으나 빠져나갈 구
멍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면 오히려 불행한 결과만 야기하는
것이 아닐까. 푸대접을 받으면서도 푸대접을 받는지 모르는
사람과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들 중 누가 불행할까. 개선
될 수 있는 일이라면 모르지만 그렇지도 않은데. 결국은 우화
와 같은 행동으로밖에 나타나지 않으리라.
"이것 참…… 아무리 불청객이라 하더라도 차 한 잔 안 주
는구나."
장문인이 화제를 바꿨다.
유소청은 화들짝 놀라 일어서서 황급히 차를 내왔다.
그녀는 집무실에 시녀를 두지 않았다.
언제 그만둘지 모르는 입장에서 시녀의 시중까지 받는 것은
과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적엽명도 시녀가 없지
않은가. 그는 지금도 칼날 위를 걷고 있지 않은가. 헌데 자신
만 편해서야 말이 되는가. 유소청은 요즘 들어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적엽명과 견주어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다.
장문인은 맛있게 차를 들었다.
사실 유소청이 차를 다리는 솜씨는 형편없었다.
어려서부터 무공에만 전념했기 때문에 학문과 무공을 제외
한 일에는 문외한이나 다름없었다. 더군다나 여자가 해야하는
음식 만드는 일, 자수(刺繡), 옷을 만드는 일 같은 것은 더욱
형편없었다.
"조금 진하게 다렸구나."
"배운지가 얼마 되지 않아서……"
"허허허! 배웠느냐?"
유소청은 볼을 붉혔다.
배우려야 배울 사람이 없다. 유가 같으면 배울 사람이라도
있으련만. 유가에는 돌아갈 수 없고, 해남파에는 아예 접촉하
는 사람도 없는 형편이다.
"너를 한 가족으로 맞았으면 하고 오래 전부터 생각했지."
유소청은 손이 달달 떨렸다.
기어이…… 일이 그렇게 되는구나. 아버지는 쉽게 응낙했으
리라. 적엽명과 만나는 것을 수치로 여기시는 분이니. 그것보
다 적엽명과 연관하여 살인을 저지른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혼기가 지나도록 혼인 말씀은 입밖에도 꺼내
지 않던 아버지이셨는데.
유소청은 이를 악물고 말을 꺼냈다.
"저…… 말씀드릴 게 있어요."
"그래? 뭔데? 어서 말해봐."
"저…… 혼인하지 않겠어요."
"응?"
"이미 마음을 준 사람이 있으니…… 마음에 없는 사람과 혼
인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어요."
유소청은 양볼을 발갛게 상기시킨 채, 하지만 당당하게 말
했다.
장문인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다 하라는 뜻이 눈빛에
담겨있었다. 포근한 눈빛이었다. 아버지가 보내주던 눈빛하고
똑 같았다.
유소청도 가만히 있었다. 마음을 독하게 먹고 하고 싶은 말
을 했지만 장문인과 아버지가 이미 결정한 사항을 번복한다는
게 여간 어렵지 않았다.
한참만에야 장문인이 입을 열었다.
"해남오지에서 물러날 뜻도 있겠구나."
"죄송합니다. 제 마음은…… 한시라도 빨리 비가로 돌아가
고 마음뿐이에요. 죄송합니다."
"허허허! 신념이 있으면 되는 거야. 너를 보면 꼭 옛날의
나를 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구나."
"……?"
유소청은 느닷없는 장문인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는 법이다. 기다리다 보면 좋은
소식이 있을 거야."
장문인이 지금 한 말은……
그럼 한광과 혼인하라는 말이 아니었던가.
장문인은 다른 말도 했다.
"허허허! 너를 불렀을 때는 솔직히 적엽명에게서 떼어놓기
위해서였다. 그 점은 부인하지 않으마. 기왕이면 내 자신과
연을 맺었으면 하고 바랬던 것도 사실이고. 물론 적엽명에게
는 잘못이 없다. 지난 죄는 세월이 용서했고, 해남고수들을
많이 죽였지만 모두 정상적인 비무로 이루어진 것이니 탓할
수 없지. 그렇다고 적엽명과 편한 관계가 될 수는 없지 않겠
니?"
"예."
"그래서 너를 불러들였다만…… 지금 비가는 폭풍의 핵이
야."
폭풍의 핵? 폭풍의 핵이라면 핵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
게 말하기에는 너무 심하지 않은가. 해남 무인들이 그를 가만
히 내버려두었으면 절대 먼저 검을 뽑았을 적엽명이 아니다.
"돌아가고 싶니?"
"예……?"
"허허! 비가로 돌아가고 싶으냐고 물었다."
"네."
"그럼 준비해라. 나도 비가에 볼 일이 있으니 같이 가자꾸
나."
유소청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장문인이 비가를 방문하겠다니? 그건 그렇고 정말로 해남파
에서 물러난다는데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단 말인가? 가
벼운 징계도?
"네. 준비할 것도 없어요. 바로 출발하면……"
유소청은 너무 기뻐 조금하게 서둘다가 장문인의 웃는 얼굴
을 보고서야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기쁜 마음은 어디 견줄
데가 없었다.
장문인은 한 시진 후에 전용마차를 함께 타고 가자는 말을
남기고 돌아간 뒤, 유소청은 마음이 들떠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리아를 불러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힌 다음, 자신의 손때가
묻은 물건들을 하나씩 차곡차곡 챙기기 시작했다.
이제 해남파 본문에는 들어올 일이 없으리라.
수련총도 마찬가지다. 다시는 집무실을 기웃거릴 일이 없
다. 수련총 통령은 향후 사 년 간 공석이 될 것이고, 사 년이
지나면 범위나 한광, 석불 중에 한 사람이 임명되리라.
손때가 묻은 물건을 깨끗이 치워주는 것이 다음 통령을 위
한 예의일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물건을 치우기 시작하자 장문인이 말한 한
시진은 너무 빨리 지나가 버렸다.
수건을 꺼내 땀을 닦았다.
장마라서 뜨거운 햇볕은 들지 않았지만 워낙 더운 지방인지
라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이제 다 됐다. 가자."
그녀는 리아를 보며 방긋 웃었다.
"집에 가는 거야?"
"그럼."
"집에 가도 돼?"
"그래. 요 꼬맹이야."
"집에 가도 아저씨를 괴롭히지 않아?"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인 줄 알았는데 모든 걸 다 알고 있
나 보다.
유소청은 몹시 걱정스러운 듯 쳐다보고 있는 리아의 머리에
알밤을 먹였다.
"괜찮다니까. 여기서 제일 높은 사람이 괜찮다고 했는걸."
"장문인께서?"
"그래."
"히히! 그럼 빨리 가, 언니."
리아는 비로소 어린아이다운 모습을 찾았다.
그러고 보니 해남파에 들어온 다음 리아는 무척 위축되었
다. 비가보에서 같으면 밤에 측간 가는 것도 무서워했는데,
여기서는 무섭다거나 엄마가 보고 싶다는 말 같은 것은 일절
하지 않았다.
영특하고 눈치가 빠른 아이. 거기에 글까지 익혔으니……
마구간에서 장문인과 만나기로 한 정오가 되었는데도 유소
청은 수련총 집무실을 나서지 못했다. 리아도 명랑하게 활짝
웃던 모습을 지우고 감정 없는 얼굴로 돌아가 집무실 한 구석
에 쭈그리고 앉아있다.
유가주 유질과 금잔서생 유광이 방문한 것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문이었다.
유소청은 차 대신 다과를 내왔지만 아버지와 사촌오빠는 손
도 대지 않았다.
그렇게 어색한 침묵이 흐른 지도 벌써 일다경이 지나간다.
유가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비가보로 간다고 들었다."
"……네."
"우리 가문에 어떻게 너 같은 아이가 태어났는지."
"죄송해요. 아버지."
유소청은 또 설움이 북받쳐 눈물이 방울졌다.
"죄송할 것 없다. 나쁜 뜻으로 한 말이 아니니. 하나만 약
속해라."
"……?"
"너는 이미 피로 얼룩졌다. 휴우! 너뿐 아니라 유가 전체가
피로 얼룩지겠지. 집안이야 나도 있고, 네 오라비도 있다
만…… 이번 일이 끝나면 살인을 하지 마라. 어떠한 경우라
도. 약속할 수 있겠니?"
"네, 약속드릴게요."
유소청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러나 유가주의 얼굴은 그
리 밝지 않았다.
"적엽명에게 살인을 못하게 할 자신이 있단 말이냐?"
"……"
유소청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살인이라면 아버지가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두 번 다시 할
생각이 없다. 적엽명이 제일급관찰대상자로 선정되지만 않았
더라도 살인을 하지 않았을 게다. 하기는 그 덕분에 적엽명과
다시 사랑을 맺을 수 있었지만.
적엽명까지…… 라면 문제가 다르다.
그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끝없는 도전을 받게 될 게다. 좋
다. 모든 일이 완결되고 해남도를 벗어났다고 하자. 그는 사
람을 죽이는 것이 직업인 군인이다. 더욱이 운남도사라면 남
만을 장악하고 있는 묘족(苗族)들과의 분쟁이 끊이지 않는 곳
이다. 어떻게 살인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답을 못하는구나."
"아버지……"
'그 사람은 장군이에요. 그런데 어떻게.'라는 말이 입 밖으
로 튀어나올 뻔했다. 그것만은 발설해서는 안 된다. 적엽명이
장군이라는 사실은 오직 자신과 황함사귀 밖에 모른다.
그녀는 적엽명이 일을 빨리 매듭짓기 위해 사귀들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화문과 한백이 공격당한 사
실도. 만약 그런 사실을 알았다면 마음이 조급해서 가만히 앉
아있지도 못했으리라.
"가주, 조금만 더 물러서시지요."
유광이 웃으면서 끼여들었다.
유소청은 비로소 사태가 돌아가는 것을 눈치챘다.
아버지는…… 아버지는 자신을 용서하려고 찾아온 것이다.
아버지가 마음을 돌리시다니. 그렇게 법도에 엄격하신 아버지
가. 가문의 최대금기인 살인을 저질렀는데. 아버지는 날고환
을 거두어 가고 소도로 당신의 배를 찌르기까지 하셨는데.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는 법이다. 기다리다 보면 좋은
소식이 있을 거야.'
장문인은 아버지의 마음을 이미 알았던 것일까. 그래서 그
런 말씀을 남기신 것일까.
"음……! 좋다. 네 오라비가 이렇게 말하니…… 네 자식들
은 살인을 못하게 할 자신이 있느냐?"
유소청은 글썽이던 눈물을 기어이 떨구고 말았다.
"네. 자신 있고 말고요. 못하게 하겠어요. 죽어도 못하게
하겠어요. 아버지."
유가주는 품에서 주머니 한 개를 꺼내 유소청의 손에 쥐어
주었다.
"날고환이다."
"아버지. 흑!"
유소청은 기어이 유가주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트
렸다.
"날고환을 주는 이유는…… 의미를 잘 새겨들어라."
"네."
유가주는 유소청을 감싸안고 등을 토닥거렸다.
"세상에는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 너무 많단다. 어떤 때는
차라리 죽는 게 속 편하겠다 싶을 때도 있지. 그럴 때마다 날
고환을 입에 물어라. 이 아비가 한 말을 기억하고, 날고환을
입에 물고 무공에 전념했던 때를 생각해라."
"아버지…… 흑!"
"어렵게 맺은 인연이니,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유소청은 설움이 더욱 치받쳐 올랐다.
장문인은 퉁퉁 부은 얼굴로 나타난 유소청에게 충격적인 한
마디를 던졌다.
"유가주는 큰 결단을 내렸어. 옛날…… 해적을 소탕했을 때
보다 더 많은 피를 봐야 할거야. 힘든 싸움이 될 지도 모르
지."
유소청은 당장 마차에서 내려 아버지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어쩐지 불안한 말씀만 하셨다.
아버지의 안위가 걱정스러운 것은 아니다. 아버지의 무공은
장문인과 버금간다고 할 수 있다. 검에 살기만 곁들인다면 남
해제일검이 되고도 남을 분이다.
유소청이 정작 걱정스러운 것은 아버지의 심기(心氣)였다.
그토록 살인을 만류하신 당신께서 살인을 하시게 되었으니
마음이 오죽 불편하실까.
그래서 용서하신 게다.
당신조차 살인을 하게 되었는데 무슨 면목으로 딸을 구박하
랴 싶은 심정에서.
유소청은 집무실에서 곧바로 유가로 떠난 아버지를 떠올렸
다.
제발 마음을 편히 잡수셔야 할 텐데.
무사하시겠지. 그럴 거야.
3
청심전(淸心殿).
유가 무인들 중 득검(得劍)했다는 무인들이 모여 검담(劍
談)을 주고받는 곳이다.
청심전은 몇 백년을 이어온 듯 고색이 창연했다. 서른 명이
동시에 무예를 수련할 만큼 큰 전각이지만 여타의 전각들처럼
화려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초라하다 싶을 만큼 검박했다.
단청(丹靑)도 되어 있지 않았다.
색칠되지 않은 굵은 기둥만이 오랜 세월을 굳건히 버텨왔다
는 듯 낡은 색조를 드러냈다.
안으로 들어가면 이곳이 정말 전각인가 싶을 만큼 텅 빈 공
간이 나타난다.
벽을 따라 각종 병장기가 놓여있는 점도 다른 전각들과 다
르다.
검(劍), 도(刀), 창(槍), 편(鞭), 과(戈), 궁(弓), 련(鍊:
쇠사슬), 부(斧), 월(鉞:큰도끼), 극(戟), 파(爬:갈고리)……
사방에 빙 둘러져 있는 병장기의 종류만 해도 오십여 종은
넘을 것 같았다. 거기에 크기와 무게가 다른 것까지 셈한다면
능히 이백여 종이 넘어 보인다.
병장기 밑에는 조그만 목패(木牌)가 세워져 있었다.
가장 오래된 목패는 태초(太初) 일년(一年) 흑살신검(黑殺
神劍) 공노지(孔露蜘)라 적힌 목패고, 가장 근래에 만든 듯한
목패도 지원(至元) 십육년(十六年) 섭심마도(攝心魔刀) 구철
보(具徹甫)라고 적힌 목패다.
태초 일 년이라면 한(漢) 무제(武帝) 때이다. 지금으로부터
물경 천 오백년 전. 지원 십육 년도 송(宋)이 멸망할 무렵이
다.
대단히 오래된 목패들은 무슨 사연을 간직하고 있을까?
그렇다. 청심전에 진열된 병장기는 유가무인들이 상대를 제
압하고 빼앗은 병장기다. 전리품인 것이다.
조상들은 이 병기들과 어떻게 싸웠을까?
이 병기를 사용한 흑살신검이나 섭심마도는 누구이며 병기
를 빼앗긴 다음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청심전에 있는 사람은 병장기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병장기를 호기심에 들떠서 쳐다보는 사람은 이제 갓 청심전
의 출입을 허가받은 무인들뿐이다.
그들은 누구나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그들도 기회만 주어
진다면 병장기를 빼앗아 이곳에 진열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
지고 있다.
유가 사람들은 청심전을 다른 말로 부르기도 한다.
적림(赤林).
그들은 싸우기를 원한다.
그들은 자신이 익힌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입증하고 싶어한
다.
강한 자가 등장하면 밤을 새워가며 투지를 불사르는 사람들
이기도 하다.
청심전 사람들이 모여 앉았다.
근 삼십여 명에 이르는 사람이 마루바닥에 빙 둘러앉아 있
다.
모두 날카로운 기세가 역력했다. 눈빛이 날카롭고 몸이 강
건해서 범상치 않은 검공을 지녔다는 것쯤은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유생차림을 하고 있으되 유생이 아니라는 것도.
몇 사람이 두드러지게 눈에 띄었다.
그들은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았다. 무인들 속에 섞여있는
유생이라니. 정말 그래 보였다. 그들은 어디를 가던 간에 무
인이라기보다는 유생 쪽에 가까웠다.
정중앙 앉아 있는 유가주 유질이 그렇다. 그 오른쪽에 앉
아있는 금잔서생 유광도 검을 익힌 사람 같지 않다. 유가주의
왼쪽에 앉아 있는 사람도 그렇다. 눈을 반개(半開)하고 몸가
짐이 조심스러워 보이는 사람. 귀영검(鬼影劍) 유화(劉華)다.
유가주, 유광, 유소청과 함께 남해삼십육검에 거론된 사람.
그들은 유가주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자로(子路)가 성인(聖人)에 대하여 묻자 공자께서 견리사
의(見利思義)하며 견위수명(見危授命)이라고 말씀하셨다. 누
가 뜻을 설명해 봐라."
그러자 모인 사람들 중 한 명이 대답했다,.
"논어(論語) 헌문편(憲問編)에 나오는 말로 이익이 있으면
의로움인가 생각을 하고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이라도 내놓아
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럼 자(子) 위정(爲政)에 언용살(焉用殺)이리오. 자(子)
욕선(欲善)이면 이민(而民)이 선의(善矣)리니 군자지덕(君子
之德)은 풍(風)이오 소인지덕(小人之德)은 초(草)라. 초상지
풍(草尙之風)이면 필언(必偃)하오 라는 말이 있다. 그 뜻은?"
이번에는 다른 무인이 대답했다.
"논어 안연편(顔淵編)에 나오는 말입니다. 계강자가 공자님
께 악인을 죽여서 기강을 바로잡는 것이 어떠냐고 묻자 공자
께서 '그대가 정치를 한다고 사람을 함부로 죽이려고 하느냐.
그대가 선을 추구하면 백성도 따를 것이다. 군자의 덕은 바람
과 같고 소인의 덕은 풀과 같으니, 풀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
드시 바람을 따르기 마련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인(仁)의 중
요함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그렇다. 우리 유가는 인을 중요시 해왔다."
청심전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조용했다.
모두 당금의 사태를 잘 알고 있었다. 우화가 살해당한 것은
그들도 긴장할 만큼 중요한 사건이니까. 굳이 그런 사실을 모
르고 있다 하더라도 요즘 한참 술렁이고 있는 여족인들의 동
태를 지켜보면 이건 뭐가 잘못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될
정도로 반감이 두드러졌다.
유가주가 하려는 말은 중요한 것임이 틀림없다.
"맹자(孟子)께서는 불기살인자능일지(不嗜殺人者能一之)라
하여 사람 죽이기를 즐겨 하지 않는 자가 천하를 통일 할 것
이라고 하셨다. 나는 지금도 사람은 제 아무리 악인이라 할지
라도 죽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더욱 조용해졌다. 그리고 긴장했다. 모여 앉은 사람들은 가
주의 말에서 진한 피비린내를 맡았다.
"그러나 인과 더불어 중요시 해야할 덕목이 의(義)다. 정의
(正義). 너희는 검을 뽑아라. 정의를 위해서."
대답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는 것은 짐작하지만 막상 검을 뽑으
라는 말을 듣자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남들은 우리 유가의 검에 살심이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해남제일검이 되지 못한다고. 살심이 없는 것과 억누른 것은
다르다. 모두 똑같은 검이거늘 살심이 없을 수가……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것은…… 살아 돌아와라."
말을 마친 장문인은 주담자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적림무인들에게 손수 차를 따라주었다.
열 다섯 명은 금잔서생 유광이, 다른 열 다섯 명은 귀영검
유화가 이끌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누구를 죽여야 하는 지 알게 되었다.
비파.
장문인의 눈과 귀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
그들을 왜 죽여야 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죽이러 간다.
가주가 장문인에게 반기를 든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검을 뽑았
으리라. 적림 무인들에게 가주의 명은 장문인의 명에 우선한
다.
비파는 장문인 곁을 떠났다. 그리고 죽이라는 명령이 내려
졌다. 그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을까? 본문에서 무슨 일이 벌
어진 것일까. 하파가 죽고, 비피가 떠나가고…… 불필요하다.
불필요한 것은 돌아볼 필요가 없다. 죽이면 그만인 것이다.
그들은 한시도 쉬지 않고 길을 재촉했다.
앵가해와 해구소는 극과 극에 위치한다.
서남부 최남단인 앵가해와 최북단인 해구소.
보통 사람이라면 나흘은 족히 걸릴 거리를 그들은 하루 반
만에 질러왔다.
유광은 유화의 손을 잡았다.
유화는 씩 웃는다.
그 외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같이 검을 익
혀왔기에 서로의 마음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유화가 먼저 손을 놓고 적림을 이끌었다.
이에 뒤질세라 유광도 적림을 이끌고 해안을 향해 치달렸
다.
해남도를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배를 타야 한다. 그럼 어디
서 배를 타는 것이 가장 빠를까. 물을 것도 없이 해구소다.
해구소에서 뇌주반도 해안소로 가는 길이 가장 빠르다.
그러나 도주하는 인간들이 낯내놓고 해구소에서 배를 탈 리
는 만무하다.
그렇게 보면 해남도 해안 어디 곳이나 배를 댈 수 있다.
만약 다른 때 같았으면 그들은 충분히 배를 얻어타고 해남
도를 빠져나갔으리라. 이런 경우, 범가의 손을 빌리지 않고
해안을 봉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허나 지금은 장마철이
다. 폭우가 쏟아지지는 앉지만 바다 물결을 키를 넘고 있으리
라.
이런 날씨에 해남도를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큰배가 필요하
다. 해구소를 이용하지 않는다면…… 남은 곳을 두 곳뿐이다.
유광과 적림무인들은 해안가 바위 뒤에 몸을 숨기고 기다렸
다.
그들은 억세게도 운이 없다.
장마만 들지 않았어도…… 그렇게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하
더라도 요 며칠 사이에 폭우만 쏟아지지 않았어도.
비파는 해남도를 빠져나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잃었다.
지금쯤 그들도 그런 사실을 눈치채고 있으리라. 그럼 다음
은 어떤 행동을 취할까.
유광은 자신이 비파를 이끌고 있다면 정면승부에 운을 걸어
보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최선이다.
해남파 무인이 모두 나서서 천라지망을 구축한다면 빠져나
갈 기회는 전혀 없다고 봐야 한다. 그러면 사냥개에 쫓기는
맹수처럼 이리저리 쫓기다가 결국은 몰살당하는 수밖에 없다.
유광은 비가 참 구질구질하게 온다고 생각했다.
옷 속으로 촉촉이 젖어드는 빗물이 기분을 께름칙하게 만들
었다.
유광이 적림 무인들을 이끌고 비파원이 나타나기를 기다리
고 있는 시각, 유화는 다른 해안 송림(松林)에 몸을 은신하고
희뿌연 바닷가를 노려보았다.
바다에는 커다란 범선이 떠있다.
해안에는 범선까지 사람을 실어갈 소선 네 척이 정박해 있
다.
파도가 높은 날인데…… 배는 당연히 해구소에 있어야 한
다.
이곳이다. 비파원은 이곳에서 배를 타려고 한다.
날이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해변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
거리지 않았다.
밤이 소리 없이 찾아온다.
유화는 적림 무인들을 걱정했다.
그들은 흔히 하는 말로 '검 쓰는 법'을 깨달은 무인들이다.
그러나 초식보다는 마음 수련을 더 깊게 하는, 심검(心劍)이
일체가 되는 목검(牧劍) 경지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도 많이
있다. 더군다나 아직 살인을 해본 적이 없다.
이들이 과연 비파원을 만나서 잘 싸울 수 있을까?
초식은 걱정하지 않는다. 무공의 수위만 가르는 비무라면
마음 편하게 지켜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생사(生死)를 가
르는 자리. 한 점 흐트러짐도 용서하지 않을 게다.
슈각……!
등골을 쭈빗 울리는 검음(劍音)은 등뒤에서 들렸다.
'기습! 당했다!'
"뒤닷! 뒤를 조심햇!"
소리를 버럭 지른 유화는 번개같이 몸을 날려 뒤쪽으로 쳐
갔다.
"허억!"
짧은 단발마가 터져 나왔다.
눈을 부릅뜨고 죽는 자…… 사촌동생이다. 숙부의 아들. 숙
부에게는 아들이 하나밖에 없는데…… 청심전 출입을 허가받
았을 때 무인다운 무인이 탄생했다고 기뻐하시던 숙부님의 얼
굴이 선연한데.
"타앗!"
허공에서 펼치는 공(空)의 무학!
유화의 검은 커다란 방갓을 반으로 갈라버렸다. 그러자 드
러나는 얼굴. 낯선 자다. 그 자는 얼굴 한 가운데 붉은 혈선
을 그린 채 놀란 얼굴로 쳐다보고 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처음으로 한 살인.
머리뼈를 가르는 손맛이 이럴 줄은 미처 몰랐다. 손목을 묵
직하게 저려오는 맛.
유화는 털썩 무너지는 비파원을 쳐다보고 있을 겨를이 없었
다. 착잡한 감상에 젖어있을 수도 없었다. 그는 검은 박쥐처
럼 전신을 온통 검은색으로 둘러싸고 있는 다음 비파원을 향
해 검을 쳐가야 했다.
얼굴을 완전히 가린 검은 방갓, 전신을 휘감고 있는 검은
피풍의.
써걱……!
이번 감촉은 더욱 안 좋았다.
단숨에 허리를 갈라버리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검에 묻어나
는 감촉이 생각 밖으로 징그러웠다. 물컹하고 연한 육질을 베
는 느낌이라니.
다행스럽게도 내장이 쏟아지는 모습은 보지 않아도 되었다.
비파원들이 걸치고 있는 피풍의가 역겨운 광경을 막아주었다.
그는 허리를 낮게 하고 다음 상대를 골랐다.
낮과 밤이 교차하는 시간이다.
이런 시간은 오히려 완전히 어두운 것만 못하다.
상대가 보이지 않았다.
유화는 재빨리 주변을 돌아보았다.
적림 무인들이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다.
하나, 둘, 셋……
대충 훑어본 바로는 네 명이 보이지 않는다.
네 명…… 네 명이 죽었단 말인가.
자세히 세어 볼 시간은 없었다. 아직 싸움이 끝난 것이 아
니기 때문에 의미도 없을 뿐 아니라, 수나 세고 있다가는 언
제 기습을 받을 지 모른다.
대신 그는 귀를 기울였다.
제발 신음소리라도 들렸으면…… 들리지 않는다. 아무리 귀
를 기울여도 숨 넘어가는 소리나 고통에 시달리는 소리는 들
리지 않는다.
이쪽이고 저쪽이고 모두 즉사다.
적림무인들은 늘 일격필살(一擊必殺)을 논의했고, 수련했
다.
'누구든 내 검을 대하면 가장 고통 없이 죽을 거야.'
'빠르게 베는 것만으로는 고통 없이 죽일 수 없어. 사혈(死
穴)을 정확히 베어야지.'
'후후! 그건 내 검을 맞대보면 알게 돼.'
'한 번 시험해 볼까?'
'아서. 누구 쫓겨나는 것 보려고 그래?'
'쳇! 내 검이 빠르다는 건 아예 무시하고 있네.'
'내 검에 비하면 넌 굼벵이라니까.'
'하하하! 그래, 굼벵이다. 굼벵이. 하하하!'
그들은 잠깐동안의 겨룸에 혼신을 다했다.
유화가 겪어본 바로는 초식을 전개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
다. 그만한 무공을 지닌 사람들이니 베는 것까지는 평소 익힌
대로 진행됐을 터였다. 약간의 시간이라도 있었다면 검을 제
대로 뻗어내지 못했을 지 모르지만 비파원들은 다행스럽게도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일격필살 대 일격필살.
당한 자는 깨끗하게 죽었다.
유화는 부르르 치를 떨었다.
비파원들의 무공이 예상외로 강하다. 유가의 정예라고 할
수 있는 적림 무인과 맞겨룰 정도라니.
"있닷!"
적림 무린 중 한 명이 대갈을 터트리며 소나무를 헤쳐갔다.
파앗! 파아앗!
종적이 발각된 비파원은 소나무 뒤에서 튀어나왔고, 쳐오는
검에 맞서 검을 휘둘렀다.
"커억!"
"흑!"
두 사람은 소리 없는 검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똑같이 무너
졌다.
유화는 그제야 앞으로 쳐나간 무인이 누구라는 것을 알았
다.
유의(劉宜), 촌수를 알 수 없을 만큼 먼 친척이다. 검에 대
해서라면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나서 남들은 족히 십 년이 걸
려야 이룬다는 심검(尋劍:검을 찾는다)의 경지를 단 육 년 만
에 이룩한 기재다.
현재 검의 경지는 목검(牧劍).
대단한 자부심을 가질만한 경지이건만 비파원들과의 싸움에
서는 무력했다.
"흩어지지마! 천천히 나간다!"
유화는 일갈을 내지르고 적과 마주선 듯 조심스럽게 발뿌리
를 옮기기 시작했다.
그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오로지 소나무 사이에서 튀
어나오는 적을 죽여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 그를 두고
누가 평소의 유화를 떠올릴 것인가.
적림무인들도 상황이 비슷했다.
모두들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마귀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그 동안 익혀온 학문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피를 보면 모
두 악귀처럼 변하고 마는 것일까.
쉬릭……!
옆에서 불쑥 검이 튀어나왔다.
유화는 밀어버리듯이 검을 제쳐냈다.
차앙!
검과 검이 마주치며 날카로운 금속음을 냈다. 순간, 유화의
검은 상대의 검을 그대로 밀치고 들어갔다.
검날이 방갓을 가르고 들어가 상대의 이마에 닿았다.
피가 흘러내린다.
상대는 밀쳐오는 검을 밀어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
다. 몸을 옆으로 튼다거나 피하는 행위는 꿈도 꾸지 못한다.
그가 손에 들고 있는 검에서 약간이라도 힘을 빼는 순간 이마
에 닿은 검날은 머리 속을 후벼팔 것이다.
"끄응!"
상대는 힘겨워한다.
이마로 점점 파고드는 검.
상대가 머리를 뒤로 젖혔다. 본능적인 행동이리라. 검날이
이마를 파고드는 대야. 하지만 그것으로 승부는 끝났다. 아무
래도 전신의 모든 힘을 검에 집중하지 못해서는 곤란하다.
퍼억!
상대의 머리가 잘 익은 수박처럼 갈라졌다.
유화는 진기를 일주천(一周天)했다.
그는 상대의 눈을 보았다.
공포에 질린 눈, 죽음을 두려워하는 눈.
그 눈은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그런데도 그는 죽였다. 만약
검을 거뒀다면…… 반대로 죽은 자는 자신이었으리라. 그런
것을 잘 알면서도…… 그는 마음이 무거웠다.
나약하다면 나약하다고 할 수 있는 감정도 일순간일 뿐이었
다.
유화는 쓰러지는 적림무인들을 보자 무서운 적개심에 사로
잡혔다.
자신이 적 한 명을 죽이는 사이에 적림 무인 절반이 쓰러졌
다.
먼저가 제일선(第一線)이라면, 이곳은 제이선(第二線)인 셈
이다.
적은 단계적으로 공격계획을 세운 듯 하다.
해남무인들이 달려드리라는 것을 예측한 계획이다. 먼저 공
격을 가하여 주의를 환기시킨 다음, 물러서면서 매복공격을
가한다. 그렇게 되면 언제나 선공(先攻)을 취할 수 있다.
불행히도 유화는 말려들었다.
죽어가는 친척들을 보는 순간, 냉철하던 그의 이성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오직 적을 모두 죽이고야
말겠다는 적개심만 활활 불태웠다.
"커억!"
짧은 단발마를 남기고 마지막 한 명이 쓰러졌다.
유화가 이끌고 왔던 적림 무인 중 마지막으로 남았던 유조
(劉措)가 마침내 쓰러지고 말았다.
유화는 검을 들어보았다.
검에 피가 묻지 않는다는 소성검(素星劍)이다. 헌데 지금은
진득한 피가 가득 묻어있다.
"��!"
실실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런 결과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비파 무인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적림 무인이라면 충분
할 줄 알았다. 자신들이 그 동안 익혀온 검공이라면 하늘도
두 쪽으로 갈라버릴 줄 알았다.
조가의 전대가주인 조곡노인으로 직접 받은 소성검.
'이 검에 피를 묻히지 말았으면 하네. 그런 날이 온다면 아
마도 자네에게는 가장 불행한 날이 될 거야. 유가의 훌륭한
가법, 영원히 지켜주기 바라네.'
그랬다. 그 말대로 오늘은 유화 일생에서 가장 불행한 날이
다.
검이 너무 빨라 귀신의 그림자 같다는 귀영검 유화.
그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다섯 명의 검은 그림자를 노려
보았다.
"후후! 다 나오지 그래."
"우리…… 뿐이다. 유가에 적림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만…… 솔직히 이렇게 강할 줄은 몰랐다."
"죽은 것도 강한 것인가?"
"우리를 얕보지 마라. 적림이 자부심을 가지고 있듯이 우리
도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허울좋은 남해삼십육검. 우리들
중 두 명이면 삼십육검 한 명쯤은 죽일 수 있다고 믿었다."
유화에게 말을 하는 비파원은 비파에서 거둬들인 정보를 장
문인에게 직접 보고하던 바로 그 무인이었다. 해남오지로 이
십여 년간을 본문에 있었던 유광 같았으면 한 눈에 알아보았
으리라. 하지만 유화는 본문에 거의 드나드는 일이 없었기 때
문에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너희들은…… 누구냐?"
"후후후!"
"너희들의 무공은 해남무공이 아냐."
"무군(武軍)."
"뭣?"
"무군이라고 들어봤나?"
"……"
"못 들어봤군. 후후후!"
"……"
"두 가지 실수를 인정한다. 하파라는 인간을 너무 과대평가
한 점. 그리고 적림을 과소평가한 점. 그래도 우리는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적림을 없애는 것이 우리 목적이었으니까."
"뭣!"
유화는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방금 무엇이라고 했나? 적림을 없애는 것이 목적이라고?
"하파가 뛰어나긴 뛰어난 놈이지. 그 놈은 자신이 뒈진 후
에 장문인이 어떻게 하리라는 것을 예상했다. 다른 곳은 상관
없는데 유가가 문제였어. 너희들은 워낙 폐쇄적이라 뚫고 들
어갈 틈이 없었지. 후후! 하파의 생각대로 장문인은 너희를
불렀고, 우리는 너희를 기다렸다."
"뇌주반도로 건너가려던 것이 아닌가?"
"우리가? 하하하! 왜? 우리가 무엇 때문에 건너가지? 하하
하!"
유화는 소성검을 들어올렸다.
말을 나누는 사이에 자리를 잡은 적들은 한 치 한 치 다가
섰다.
"좋아. 해보지. 누구 검이 빠른가."
"검은 네가 빨라. 하지만 너는 죽어."
"누가 죽는지는 검이 말해주겠지. 타앗!"
유화는 처음으로 선공을 취했다.
이렇게 검을 마주하고 있다면 상대가 그 누구라도 자신이
있다.
'환!'
검이 너울거렸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수천 가닥의 빗물처럼 파상적으로 퍼부
어지는 검날.
비천검법 환(幻)의 정수(精髓)다.
써…… 걱!
섬뜩한 기음이 터져나왔다.
그가 목표로 했던 자는 맥없이 쓰러졌다. 그 자는 검을 쳐
냈지만 유화의 검은 손을 베어버리고 복부를 갈라버렸다. 헌
데,
'응?'
유화는 웃는 얼굴을 보았다.
오른 손이 잘리고 복부를 베인 사람이 웃는다?
이유는 곧 나타났다. 검이 빠지지 않는다. 이 자는 피풍의
속에 지갑(紙鉀)을 받쳐입었다. 복부는 비록 갈라버렸지만 왼
쪽 손으로 지갑 한 귀퉁이를 움켜쥐는 것으로 검을 묶어 놓기
는 충분했다.
파르륵……!
검의 떨림이 느껴진다. 옆이다!
�o욱!
유화는 검을 밀어 넣었다. 상대는 밀어올 줄은 예상하지 못
한 듯 두어 걸음 뒤로 밀려나고 말았다. 그 사이 옆에서 다가
온 검날은 등뒤를 스쳐지나갔다.
"잘 가."
유화는 검을 비틀어 뽑아냈다.
잔인한 광경이다. 상대의 손가락이 마디마디 잘라졌다. 동
시에 내장이 검을 따라 뽑혀 나왔다.
"커억!"
상대는 처참한 비명을 토해내며 뒤로 넘어갔다.
'강!'
상대의 수법을 알게 되자 평범한 초식을 전개할 수 없었다.
다소 진기가 이어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강의 초식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퍼억!
찍어 치듯 옆구리를 쳐버린 검이 탄력을 받고 퉁겨 올랐다.
빠악……!
또 한 명이 머리 윗부분을 드러내며 넘어갔다.
유화의 신형을 제비처럼 부드럽게 날아올랐다.
슈욱!
검이 발 밑으로 스쳐 지나는 것을 느끼며 상대의 등뒤로 날
아 내렸다. 그리고 상대의 척추를 향해 일 검을 내리그었다.
완벽하게 걸려들었다. 공의 초식에.
이제는 살을 가르는 촉감이 부드럽게 느껴진다.
뼈를 가르는 묵직함이 야릇한 쾌감을 일으킨다.
유화는 땅바닥을 한 바퀴 구른 다음 몸을 일으켰다.
하늘에서 번개가 내리꽂히듯 검날 하나가 다가온다.
이래서 공의 초식은 일대일의 상황에서만 펼쳐야 한다. 상
대의 척추를 노리는 것은 좋으나 머리부터 떨어지기 때문에
땅바닥을 구르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런 틈을 놓치는 무인이
있다면 그는 검을 들 자격도 없다.
쩌엉!
유화는 검이 밀리는 충격을 손목에 느꼈다. 상대는 내리꽂
는 검, 자신은 아래에서 받아 올리는 검. 충격이 전해질 수밖
에 없다.
검과 검을 맞대놓고 힘 겨루기를 할 틈이 없다. 상대는 이
자 외에도 한 명이 더 남아있다.
한 명이 더? 어디?
써걱……!
허리가 반으로 꺾어지는 아픔이 뼈마디를 울렸다.
등에서부터 시작된 아픔은 반으로 나뉘어 하나는 등을 타고
머리로 솟구쳤고, 또 다른 하나는 엉덩이로 해서 다리를 마비
시켜갔다.
'당했다!'
순간적인 판단이었다.
유화는 망설임 없이 검을 비틀어 빼냈다. 순간,
퍼억!
쏜살같이 내리꽂힌 검이 유화의 머리를 정확히 반으로 갈라
버렸다. 그러나 이 순간 유화의 검도 상대의 배를 꿰뚫고 있
었다. 자루까지 깊이 꼽히는 마지막 일격이었다.
"제길! 더럽게 강하군."
살아남은 마지막 한 명, 비파원이 중얼거렸다. 허나 유화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이미 땅바닥에 엎어진 후였으니까.
땅에 엎어진 그의 머리에서는 붉은 피와 누런 뇌수(腦髓)가
섞여 흘렀다.
하루를 아무도 찾지 않는 바닷가에서 허비한 유광은 불길한
예감에 적림 무인들을 이끌고 유화를 찾았다.
그들이 송림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세상에서 다시없는 참
혹한 광경을 목격해야만 했다.
널브러진 시신, 시신, 시신……
어느 새 시체 냄새를 맡고 찾아온 까마귀가 소나무 위에 가
득히 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놀랐고, 다음에는 울분이 솟았다.
소리 없는 눈물도 흘렀다.
나중에는 기가 막혀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유광은 시신들이 죽어있는 모습을 살폈다.
그가 남다르게 무정해서는 아니다. 해남오지로 있으면서 자
신도 모르게 몸에 베인 경륜이 그런 행동을 불러 일으켰을 뿐
이다.
그는 곧 사태를 파악했다.
유화는 함정에 말려들었다.
싸움을 할 때는 공격만이 능사는 아니다. 이렇듯 매복한 적
들을 밀고 올라간다면 막대한 피해를 당한 것은 당연하다. 그
런 면에서 본다면 적이 오히려 뛰어나다. 역시 비파……
유화가 죽은 모습도 그렇다.
유화는 본신 무공만으로 상대했으되, 적은 치밀한 계획아래
연수합격했다.
유화는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알았다.
비파원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 죽음을 많이
본 사람들이라는 사실.
적림 무인의 시신 열 다섯 구를 모두 찾아냈다.
그들은 무섭게 싸웠다. 그들이 죽인 비파원은 모두 아흔 아
홉 명.
살인은 마음껏 해보고 죽었으니 여한은 없을 게다.
적림 무인들은 땅을 파기 시작했다.
여족인들은 야만스럽게 풍장을 지내지만 한인들은 매장(埋
葬) 풍습을 유지하고 있다. 죽은 무인들을 유가에 데려가야
옳겠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다. 우선 가매장이라도 해야
한다. 피가 같은 사람들인데 까마귀에게 뜯어 먹히도록 내버
려 둘 수야 없지 않은가.
그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땅을 팠다.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즐감.
진정한 무인... 유가 적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