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철학-사진의 철학을 위하여
사진의 본질, 암시 그리고 환유적 세부-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
The Photograph's Eidos, Noeme and Metonymic Punctum-Roland Barthes [Camera Lucida]
* 롤랑 바르트(1915-1980): 20세기 후반 프랑스가 낳은 가장 탁월한 문학이론가이자 기호학자이다. 프랑스 신비평의 기수로서, 후기구조주의자로서 현대문화비평과 기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모든 글쓰기에서 독창적인 문체와 세계를 내보인 이미지와 텍스트의 적절한 활용을 통해서 언어의 의미와 그 의미 뒤에 감춰진 또 다른 의미의 메시지를 읽어낸 사람이다. 그는 또 발터 벤야민과 더불어 문예학과 매체미학의 관점에서 사진에 대한 가장 뛰어난 분석력과 이미지 해독의 능력을 보여준 철학자로서 문화와 예술에 대한 방대한 탐구 능력과 역작을 남겼다. 그의 대표작 <글쓰기의 영도>(1953), <신화학>(1957), <기호의 제국>(1970), <텍스트의 즐거움>(1973), <사랑의 단상>(1977), <밝은 방>(1980) 중에서 <밝은 방Camera Lucida>이 그의 독특한 사진 시선과 사진 읽기를 보여준 대표작으로서 오늘날까지 사진철학서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 카메라 루시다(Camera Lucida): 롤랑 바르트의 사진에 대한 관점과 철학적 사유를 집대성한 책으로서 1980년 그의 죽음과 더불어 세상에 나타난 사진철학서이다. 짧은 단문으로 두개의 파트로 나눠져 있으며, 총 48개(1부 24개, 2부 24개)의 사진과 철학적 주제와 테제로 구성되어 있다. 바르트가 카메라 루시다에서 말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크게 3가지로 말해질 수 있다. 첫째는 사진의 본질(Eidos), 둘째는 사진이 드러내는 암시(Noeme), 셋째는 사진이 찌르는 푼크툼이다. 이것들을 말하기 위해 바르트는 여러 작가들의 사진 이미지를 빌려와서 사진이 매개하는, 사진을 둘러쌓고 있는, 그리고 사진이 스스로 안고 가는 지시, 상처, 죽음에 대해서 말하려 한다. 바르트는 책의 마지막에서 “사진은 대상이 존재했음에 대한 인증작용인데 비해, 스스로의 존재를 인증하지 못하는 언어적 불행의 관능성”이라고 결론맺음으로써 사진을 불완전한 현상학으로 규정한다.
* 본질(Eidos), 암시(Noeme), 세부(Punctum) 그리고 환유(Metonymy): 롤랑 바르트는 <카메라 루시다>에서 다양한 사진적 혹은 철학적 용어들을 생산해 낸다. 그 가운데서 주요한 개념들은 에이도스, 노에마, 푼크툼이며, 이것들을 문학적 환유로 치환하여 설명한다. 먼저 바르트는 사진의 본질을 “에이도스(Eidos)”라고 표현하고 사진의 본질을 “죽음”으로 규정한다. 사진이 안고 있는 것, 사진을 겨냥하는 것, 사진이 말하는 것은 바로 죽음이며, 죽음이야말로 사진의 본질이라고 말한다.(Camera Lucida, p.15) 그런 다음 바르트는 이제 사진의 안쪽과 바깥쪽을 아우르는 사진의 암시에 대해서 말하는데 사진이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는 사유의 잠재태(connotation)를 “노에마(Noeme)”로 확대 정의하고, 노에마를 “그것이-이미-존재했음”을 말하는 사유작용의 대상, 혹은 “그것이 어디에 있었다”라고 하는 무한한 저편과 주체 사이에 펼쳐진 사유의 암시라고 말한다.(Camera Lucida, p. 76) 바르트는 이제 관객이 사진에 던지는 시선으로 옮겨가는데 사진이 날아와 관객의 눈을 끄는, 즉 무엇인가 날아와 관심을 갖게 하는 하나의 “상처”로서 작은 세부, 즉 “푼크툼(Punctum)”이라고 정의하고, 푼크툼이야말로 “사진이 스스로 화살이 되어 장면을 떠나, 우연하게 나를 꿰뚫기 위해서 날아온 화살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Camera Lucida, p. 26) 마지막으로 바르트는 사진의 힘에 대해 말하는데 사진이 다른 매체와 구별되는 힘은 “환유적(Metonymic)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Camera Lucida, p. 45) 바르트가 말한 환유적 힘이란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치환가능한 지각의 힘을 말한다. 즉 사진이 인증하는 지각 가능하고, 인식 가능한 사물의 구체성의 표지가 인덱스적인 환유이며, 이는 스스로 사물 그 자체가 되는 물질적 지시체로서 기호를 말하는데, 사진은 손의 지문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환유일 수밖에 없고, 또 그렇기 때문에 영원히 존재론적 질감이며, 또 그렇기 때문에 사진의 힘으로 작용한다고 말한다.
논점 1. 사진의 본질은 왜 죽음인가? 죽음의 출현 방식은 왜 우연적인가?
롤랑 바르트는 사진을 성찰하기에 앞서 삶을 성찰한다.“삶이란 작은 고독의 상처들로 이루어져 있고, 사람들은 그것들을 망각하고 있다”고 말하는데 우리의 삶이 작은 상처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존재론적이고 현상학적 관점이 곧 바르트의 사진읽기, 해석, 사유의 틀거리가 되고 있다.(p.3) 따라서 바르트가 바라본 사진은 삶의 환유로서 작은 고독의 상처들로 이루어진 것임을 확증하는데 있다. 그래서 내 세운 것이 바로 “죽음(Eidos)”이다. 여기서의 죽음은 시간의 죽음, 주체의 죽음을 동시에 아우른 것으로서 사진의 고유한 본질은 “시간의 죽음”으로부터 생성되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이렇듯 사진은 단 한번밖에 일어나지 않았던 현상으로서 죽음이기에 결국 사진이 시간이 갈수록 의미작용을 새롭게 하는 것은“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그 무엇”때문이고, 또 다시는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훗날 상처가 되고, 그리움이 되는 “존재증명”, “부재증명”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바르트가 사진을 죽음과 결부시킨 “에이도스”라고 말함으로써 사진은 필연적으로 죽음에 대한 인증으로 자리하게 된다. 죽음의 인증 역할은 이미지 본질에 대한 탐색, 분위기, 시선으로 이끌어 간다. 그리하여 사진은 수많은 죽음들의 구체화이며, 한 장이 사진에는 죽음의 이미지를 내재하는 '아니뮬라(animula, 영혼 혹은 마음을 뜻하는 라틴어)', 즉 육체로부터 영혼을 이끌어 내고 죽음의 의미의 부활시키는 작용을 한다. 바르트가 사진을 죽음으로 규정하고 존재론적으로 사진의 죽음을 말함으로써 철학적 관점에서 사진은 미래에 있어 죽음, 한 장의 사진에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그때 거기(과거), 그러나 지금 여기(현재)에 없는 존재와 부재를 환기하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를 이끌어 낸다.
한편, 바르트는 사진의 죽음을“우연성”과 동시성으로 바라본다. 그는 사진의 출현방식이 우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사진이 재현하는 것은 단 한번밖에 일어나지 않았던 현상이며, 사진은 늘 실존적으로 다시는 되풀이 될 수 없는 어떤 것을 기계적으로 재생하는 무디고 바보 같은, 더할 나위 없는 ‘우연성’의 산물이며, 또 끈질기게 표현을 통해 나타나는“투케(Tuche, 그리스어로 우연)”, “기회”, “만남”, “현실”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Camera Lucida, p.4) 확실히 사진의 우연성은 사진만의 특징이다. 물론 바르트가 강조하는 우연성은 어쩌다 만난 시간, 장소, 대상의 우연성이 아니라 사진의 출현방식이 우연성, 혹은 존재방식의 우연성을 말한다. 예기치 않게 다가오고, 예기치 않게 다가서는 투명하고 가벼운 포장지 같은, 그러나 숙명적으로 그 우연성 속에서 숨쉬는 사진에 대한 것이다. 바르트는 사진의 죽음과 출현방식 앞에서“단 한사람을 위한 불안전한 과학”으로 정의하고, 그리고, 홀연히 깨달음의 감각, 즉 “누군가의, 혹은 무엇인가의 사진”이 되는 개인적인 삶의 소여로 인식한다.
논점 2. 사진이 다른 이미지와 구별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롤랑 바르트는 사진을 매우 특별한 이미지로 보았다. 그는 사진이 특별한 이유를 세 가지 들었는데‘말하는 방식’,‘지시하는 방식’,‘사유하는 방식’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존재양식 때문에 사진이 특별할 수 있으며, 또 독특한 세계표현의 양식으로 자리한다고 말한다. 사진이 다른 시각매체와 다르게 말하는 방식은 “왜 사진은 다른 대상이 아닌 바로 그 대상, 다른 순간이 아닌 바로 그 순간을 선택했는가?”를 이해하는 방식이다.(p.6) 즉 사진은 보여주되, 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른 이미지와 다른 특별함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진은 근본적으로 “사진에 대한 ‘앎’의 척도는 주체(관객)일 수밖에 없으며, 주체가 ”사진에 관해서 무엇을 알고 있는가?“에 의해서 사진이 해석되는, 내가 바라보는 것에 대한 경험과, 사진이 바라보게 하는 경험의 두 가지 사실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p.10)
사진이 다른 이미지와 구별되는 두 번째 이유는 “지시하는 방식”의 고유함이라고 바르트는 말한다. 사진은 색인(index), 혹은 흔적, 지문(trace)과 같은 지시 방식이다. 바르트는 이를 사진의“인증작용”의 힘이라고 말한다. 바르트가 사진을 환유적이라고 말한 것도 지시하는 방식 때문이다. “환유적”이라는 것은 가령 사진이 삶으로부터 무언가가 베껴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어떤 형상의 흔적이라는 사실, 그리고 어떤 것들이 있음으로서 생성되는 암시와 누설의 지시형상이라는 사실을 예컨대 굴뚝의 연기, 모래 위의 발자국과 같은 지시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p. 84)
사진이 다른 이미지와 구별되는 세 번째 이유로서 바르트는“사유하는 방식”의 고유함으로 이해한다. 바르트가 사진의 말하는 방식, 지시하는 방식은 이제 사유하는 방식으로 이끌어진다. 그는 사진의 사유 방식을 “노에마(Noeme)”에서 찾는다. 노에마는 철학적 사유의 대상성이다. 그가 사진을 노에마와 연계했던 것은 사진이야말로 “영상이나 기호가 지시하는 임의적인 현실적 사물이 아니라, 렌즈 앞에 놓인, 그리고 그것이 없다면 사진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을, 필연적으로 현실적인 사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사진이 철학적 사유의 대상물로서 노에마일 수 있는 것은 그림은 현실을 보지 않고도 현실을 가장할 수 있고, 또 대개 상상이고 모방인데 반해 사진은 그 사물이 “거기에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는 유일하게 “현실 및 과거시제의 결합”으로서 간주되는 존재이기 때문에 사진에 대한 사유는 곧 노에마(현상학에서 사유 작용의 대상)로 간주된다는 것이다.(카메라 루시다, 열화당, p.87)
바르트는 이렇듯 사진을 다른 이미지(혹은 시각매체)에서 찾아볼 수 없는 노에마로 압축한다. 그리하여 노에마는 “그것이-이미-존재했음”으로 치환되며, 또 과거(발생)와 현재(누설, 암시)의 압축으로서 사진의 환유, 이른바 인덱스 개념으로 수용된다고 말한다. 사진이 진실일 수 있는 것도, 사진에 신뢰를 보내는 것도 바로 이 철학적 노에마 때문이라는 것이 바르트의 생각이다. 그가 사진의 현전성을 결코 은유가 아니라 환유라고 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며, 사진이 과거를 회상시키는 것도 아니고, 사진의 효과 역시 사라진 것(시간에 의해, 거리에 의해)을 되돌려 주는 것이 아니라,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참으로 존재했다는 것을 증언하는 증거적 사유방식에서 찾았던 것도 여기에 있었다.(p. 82)
논점 3. 사진의 푼크툼은 무엇이며, 왜 단 한사람만을 위한 것인가?
바르트의 이미지 기호학의 요체는 이미지 속에 있는 비록 세부이긴 하지만 관객 각자를 찌르는 새로운 의미작용으로서 푼크툼(Punctum)의 강조였다. 따라서 바르트의 사진 읽기에서 가장 중요한 요체는 바로 이 푼크툼의 출현 방식과 동시에 사진의 죽음을 인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 장의 사진에서 관객들이 저마다 경험하고 인식하는 홀연한 상처(기억 혹은 트라우마)는 관객에 의해 새롭게 환기되는 사진의 이해, 해석의 모습이다. 바르트가 푼크툼의 우월성을 확증하는 철학적 사유의 모습이다. 바르트는 사진의 이것, 즉 하찮은 세부 이미지에 불과하지만 관객 저마다를 찌르고, 상처 입히고, 압도하여 하나의 격렬한 섬광과 같은 푼크툼을 이미지 기호학의 요체로 삼는다.(p. 26) 그래서 사진을 지각한다는 것은 사진 속의 이미지에 대한 경험, 앎 그리고 성찰에 의존하기 때문에 한 장의 사진을 본다는 것은 제2의 인식 행위로서 새로운 기호학의 출현으로 받아들인다.
바르트가 사진을 “단 한 사람만을 위한 불완전한 과학”이라고 말했던 것도 푼크툼의 주관성, 개인성 혹은 의존적인 개인의 기억과 경험 때문에 불완전한 매체의 특징(과학)때문이다. 바르트는 사진이 “비어 있는 의미 공간”임을 분명히 한다. 그래서 그는 이 점을 철학적 테제로 삼았다. (창작)사진에서 이미지는 단순한 코드나 상징 관계가 아니라 규명할 수 없는 어떤 심층적 실체의 지표로서 나타난다고 말한다. 이것이 그 예의 존재론적 환유, 즉 푼크툼이 환기되는 부분이다. 사진이 비어 있는 의미공간이라는 사실에서 바르트가 내세운 것이 바로 “단 한사람만을 위한”것이고, 그 푼크툼의 출현방식은 독특한 포즈, 얼굴, 몸짓, 배경,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렇듯 사진은 비어 있는 의미공간 속에서 미끄러지듯 어떤 특정 세부들로 관객을 일깨우고, 시선의 변화를 느끼게 하고, 그리하여 한 개인에게 가치로 인식되는 새로운 사진임을 느끼게 한다. 바로 그 세부가 (나를 찌르는) 푼크툼이다.(카메라 루시다, 열화당, p. 51)
[사진설명]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종점, 1893, 뉴욕>, 스티글리츠 사진 중에서 나를 가장 매혹시키는 것은 그의 가장 유명한 사진 바로 이 한 장뿐이다.
코엔 베싱, <도로를 순찰하는 군일들>, 1979, 니카라과>, 나는 이 사진의 존재가 두 요소의 이질적인 공존에 기인함을 깨달았다.
코엔 베싱, <아이의 시체를 발견한 부모, 1979, 니카라과>, 흐느끼는 어머니가 들고 있는 훝이불(왜 홑이불을 들고 있을까?)
윌리엄 클라인, <모스크바에서의 5월 1일, 1959>, 사진은 러시아 사람들이 어떤 옷차림을 하고 잇는가를 내게 가르쳐준다. 나는 한 소년의 커다란 모자, 다른 소년의 넥타이, 멀 위에 쓴 노파의 스카프, 한 청년의 머리 따위를 유심히 본다.
리처드 아베돈, <노예출신 윌리엄 케스비, 1963>, 가면은, 절대적으로 순수하다는 점에서 의미이다.
찰스 클리포드, <알함브라, 그라나다, 1854-1856>, 내가 살고 싶은 바로 ‘그곳’이다.
제임스 반 데 지, <가족의 초상, 1926>, 끈달린 구두
윌리엄 클라인, <이탈리아인 거주지구, 1954, 뉴욕>, 내가 끈덕지게 바라보는 것은 어린 소년이 썩은 이빨이다.
앙드레 케르테츠, <바이올리니스트이 발라드, 1921, 헝가리>, 예전에 헝가리와 루마니아를 여행했을 때 지나갔던 작은 마을들을 나의 온 육체로 인식한다.
루이스 하인, <어느 학교의 허약한 아이들, 1924, 뉴저지>, 나는 모든 지식, 모든 교양을 추방한다. 소년이 입고 있는 커다란 당통식 칼라, 소녀의 손가락에 감긴 붕대만을 본다.
나다르, <사보르냥 드 브라차, 1882>, 이 사진의 푼크툼은 내가 보기에 견습수부의 팔짱낀 팔이다.
로버트 메이플소프, <필 글라스와 밥 윌슨>, 밥 윌슨이 나의 시선을 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이유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앙드레 케르테츠, <에르네스트, 1931, 파리>, 에르네스트는 아직도 살아 있을지 모른다.
알렉산더 가드너, <루이스 패인이 초상, 1865>, 그는 죽었다. 그리고 그는 죽을 것이다.
앙드레 케르테츠, <강아지, 1928, 파리>, 그는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는다. 내면을 향해, 자신의 사랑과 두려움을 붙잡고 있다. 이것이 바로‘시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