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게와 나무꾼
정성영
예전 농촌에서 공부하기 싫어하고 놀기만 좋아하는 아이들에게 농담처럼 “너 이 녀석아 그러다간 땔나무꾼이나 된다.” 하거나 그도 아니면 “정 공부하기 싫으면 농사나 지어라” 했다. 공부 가르칠 형편이 안되면 일찌감치 나이와 키에 맞는 지게를 만들어 주고 지게질부터 배우게 했다. 지게는 농촌에서 들이나 산에 갈 때 의관처럼 농부의 몸과 함께 항상 동행하는 그만큼 중요한 도구였다. 농부의 길에 첫걸음인 셈이다.
힘만 있으면 쉬울 것 같지만 지게질도 배워서 몸에 익어야 한다. 가벼운 짐부터 무거운 짐까지 각가지 많은 짐이 있지만 크기도 다양해서 바윗돌이나 쌀가마처럼 덩치가 작으면서도 무게가 많이 나가는 짐이 있는가 하면 나뭇짐이나 보릿짚, 볏짚같이 덩치가 큰 짐도 있어서 지게질하는 느낌이 서로 다르게 마련이다. 무겁고 작은 짐을 처음에 짊어지면 지게 진 몸이 뒤뚱거리고 좌우로 마구 흔들려 중심 잡고 앞으로 나아가기도 힘들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이다. 한동안 이런 짐 질을 하면서 몸이 익숙하게 받아들여야 비로소 똑 바로 잘 걷게 되니 세상에 쉬운 일은 없지 싶다.
아이들은 우선 지게질을 배우면 낫 갈아 지게에 꽂고 산으로 나무부터 하러 간다. 도시고 농촌이고 모두 나무를 때서 취사와 난방을 하던 시절에 목구멍에 풀칠하는 식량과 더불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정에 제일 중요한 게 땔감이었다. 등 따습고 배부르면 최고라는 말도 있듯이 식량 걱정 없고 땔나무 즉 연료가 넉넉하다면 부자였다.
실제로 농촌에서 나무할 남자들이 없는 집에서는 땔나무 걱정이 크나큰 문제였다. 그렇다고 농촌에서 나무를 일일이 사서 땔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나뭇값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땔나무 할 남정네가 없는 집에서는 어쩔 수 없이 아녀자들이 나무를 하기도 했다. 지게질보다 여성들은 머리에 이고 다니던 시절이라 나뭇짐도 둥글게 베개처럼 묶어서 머리에 이고 날랐다.
여자들의 운반 수단은 물동이처럼 머리에 이는 것이 편했던가 보다.
우리 집에서도 6,25 한국전쟁 이전에는 부친이 공무원이라 땔나무 할 사람이 없는 데다가 몇 마지기의 농토가 있어 나무하는 머슴을 두고 땔나무와 농사에 도움을 받기도 했다. 전쟁통에는 할머니가 가까운 뒷동산이나 마을 근처에 우리가 소유하고 있던 임야에서 나무를 해 놓으면 중학생이던 내가 지게질을 배워 하교 후에 집으로 저 날랐다.
땔나무는 순전히 실속이 있어야 한다. 즉 검불처럼 덩치만 큰 것보다는 마들 가지나 마른 솔가지처럼 화력이 좋고 오래 타서 느루 가는 땔나무가 실속있는 땔나무다.
여름과 달리 겨울에는 취사도 물론 하지만 외풍이 심한 방안에 화롯불이 필요했다. 화롯불을 담아 방안 난방을 오래 하려면 마들 가지나 장작불을 담아 놓아야 훈기도 돌고 오래간다. 화롯불에 찌개와 국도 끓인다. 방안 화롯불에서 식지 않게 바로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상업이 발달한 도시에서도 나무를 때야 했으나 생업 때문에 나무는 할 수 없는 상황이라 농촌이나 산골에 사는 사람들이 해오는 나무를 사서 땔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대도시는 물론 지방에서도 군청소재지 읍내에 새벽이면 나무 시장이 섰다. 나무 시장은 매일 아침 새벽 일과 시작 전에 잠깐씩 서는 장이었다. 주변 이 삼십 리 시골에서 동트기 전에 일찍 출발하여 읍내 시장터에 도착하면 시장 주변 상인이나 공무원 등 땔 나무를 할 수 없는 주민들이 나와서 자기들이 필요한 나무들을 사 갔다.
나뭇값은 외상이 없는 소위 말해서 현찰박치기였으니 아주 쏠쏠해서 호기심과 구미가 당기는 일이었지만 막상 해 보자 하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5,6십 년대에도 시골에서는 조선 시대 반상(班常)의 의식구조가 엄연히 살아 있었다.
직업이나 신분도 사농공상(士農工商)이었으니 장사꾼은 제일 천직이었다. 그러니 점잖은 양반이 겻불도 안 쬐는데 하물며 뱃속에서 쪼르륵 소리가 난다 한들 어찌 나무장사를 한단 말인가. 체면이 밥 먹여주냐 그러지만 꼬장꼬장한 양반은 목숨보다 귀한 것이 체면이라 생각했다. 그런 낡은 구시대적 유물이 조금은 남아있던 시절이었다.
그렇지만 어설프게 양반 상놈 따지기에 앞서 실속있는 나무장사에 뛰어든 젊은이도 있었다. 그들은 전쟁통에 북쪽에서 피란 나와 정착한 삼부자(三父子)였다. 땔나무 시장은 겨울철이 절정이었다. 아무래도 추우니 난방용 땔감의 수요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여름철이라고 수요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기본적인 취사는 해야 했으니 다만 수요가 적을 뿐이었다. 찾는 이가 적으니 팔러 나오는 나무 장사꾼도 적었다.
상품의 가격은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른다. 여름에는 농사일 등으로 농촌에서 나무를 팔러 나오는 나무 장사꾼도 적으니 값은 떨어지지 않는다. 농토가 없는 이들 삼부자는 여름이고 겨울이고 사시장철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이면 나무를 팔러 나갔다. 나무장사의 매력은 외상없는 현금이 들어온다는 것도 있지만 그보다도 자본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만리 타향 피란 생활에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험한 세상을 살아나가는 호구지책이 나무장사였던 셈이다. 적은 농토나마 소유하고 있던 마을의 여러 집이 춘궁기에 나라에서 빌려주는 대여곡(貸與穀)을 먹던 시절이었지만 이들은 먹고 살아가는데 아무런 걱정이 없을 정도로 삶의 여유가 있었다. 튼튼한 몸과 건전한 정신과 부지런한 노력, 그리고 지게만 가지고도 살아가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우리 속담에 <지악(至惡)이 반(半) 재산이다> 라는 말처럼, 나무장사일망정 천하다 창피하다 생각하지 않고 억척스럽게 그 냉엄한 피란 생활에서 가정을 지키고 식구들을 굶기지 않으며 온전히 돈을 모아 후일에 농촌을 떠나 인근 도시로 이사 가서 잘살고 있다. 수십 년 전에 다 지나간 옛날이야기지만 이처럼 가난하고 암울했던 시절에 지게 하나가 많은 사람을 굶주림의 질곡에서 벗어나게 한 일등공신이던 시절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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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1950년 동란 이후부터 60년대 초까지 당시 농촌에서 내가 보고 느낀 체험이며 숨김없는 실정이었다.
첫댓글 정성영선생님 연륜이 느껴지는 글 잘 읽었습니다.저도 지게에 얽힌 추억이 많습니다.문득 돌아가신 아버님이 그립습니다.힘든 농사일에 한몫했던 지게와 리어카.어쩌다 보게되면 울컥합니다.꽃비에 꽃바람 부는 날.인천송도 북카페에서 몇자 적어봅니다.
* 김유선생님,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따뜻한 눈길 한번 주시니, 오랫만에 오늘 내리는 반가운 비만큼이나 감사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좋은 글 카페에 많이 쓰시고, 늘 부럽습니다.
졸작인줄 알면서도 긴장(?)과 리듬(?)을 잃지 않으려고 카페에 올리는데 너무 튀는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