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관한 시모음 62)
봄 /원영애
그대 소식이 궁금할 때
색 고운 옷 다 꺼내놓고
걸쳐 볼까나
그대 우리 곁으로 오실 때
무슨 꽃잎부터 그려 넣을까
민들레 꽃다지 그려 보았소
그대 가까이 왔을 때
이 마음 무엇을 보여 드릴까
설레는 가슴
꽃을 담고 나비를 날리고
흔들려 볼까나
그대 오신다는 길 몫에
동백 머리 풀면
붉게 피어난 두견
으스러지게 껴안아
두 가슴 붉은 물 드려볼거나.
봄이 울고 있어요 /최해춘
황사바람이
하늘을 덮던 사월에
봄은
젖몸살 같은 가슴앓이에
소리죽여 눈물을 뿌렸다.
수줍게 깨어나던
새싹들이
산불속으로 사라져 가던 날
봄을 시샘하는
서풍은
광란의 춤을 추고 있었다.
벚꽃잎이
봄의 절정을 휘젓고
꽃비로 흩어질때
아직 틔우지 못한 싹들이 애처러워
봄은
또 한번 눈물을 뿌렸다.
아지랑이 가물거리다
봄의 커튼이 닫히는 순간까지
그렇게 아픈 사랑은
대지에 배어들고 있었다.
봄의 내음 /이시형
'진도 봄동' 하면 '구례 오이'라고 했을 때처럼 차고 뜨거운 것이 목젖을 타고
넘어온다. 진도 봄동, 저것들을 길러냈을 저 전라도라 진도의 강인한 겨울벌판
과 하루에도 수없이 오갔을 허리 굽은 할니들의 부지런한 발걸음이 생각났기 때
문이다. 진도 봄동, 좀 된발음으로 표기하면 마당가에 방금 눈 아기 봄똥처럼 더
욱 파릇해지고 상큼하고 아삭거리는 진도 봄동.
봄날 /靑山 손병흥
꽃도 피기 전 그리움 하날 남기고 가버린
아직 몹시 여리고도 아린 기억 떠올리며
새삼스레 깨닫게 되는 내 마음속 언저리
마치 묵은 일기장 펼쳐보는 듯한 추억들
다시금 되살아나는 너의 감미로운 목소리
소리 없는 산들바람 되어 스쳐 가는 계절
잃어버린 편린 좋았던 순간조차 희미하게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선율로 다가설 즈음
더욱 화사한 햇살만큼 움츠려드는 이 가슴
밀려오는 그때 그 시절 서글픈 사랑의 단상
저 푸르른 하늘처럼 멀어져버린 그대 모습
그토록 짓이겨지고 볼품없던 그 무렵 회상
왠지 모르는 그냥 아쉬움 가득한 미련들이
문득 가끔씩 피어나는 그 사람 자취 향기.
오래된 봄 /이승호
이상한 일이지
잔당을 이끌고 패주하듯 헛간 곁에 움츠린 낙엽들
쓸쓸하게 팔을 내젓는 빈 나뭇가지
그 시절에는 나도 없는 세월이
쉬지 않고 중얼거리는 취객처럼
아무 데나 나뒹굴다
단지 하룻밤 잠자리를 걱정했을 뿐인데
그토록 잔인한 세월은 내버려두고
이 봄에 이르러서야
세월이 흐른다는 말은
시간이 흐른다는 말보다 참담하지 않아서 좋다고
너스레를 떨고 있으니
참 이상한 일이다
살아서 셀 수 없이 수많은 봄을 탕진했고
죽어서는 이 봄이 안타까워서일까
생이란?
뒤미처 겨울이 닥치고
앞서 봄날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더라도
후회와 안타까움이 뒤섞여
저 패잔의 꽃잎들을 마구 날리는
이 봄에 머뭇거리며 이르러서야.
새봄 /박얼서
전원(田園)교향악으로
새봄맞이 깜짝쇼 펼치려던
화단 속 꽃망울들이
무대 밖
슬그머니 훔쳐보려다
문득 마주친
눈빛에 화들짝 놀라
초경(初經)을 터트렸다.
냇가의 새봄 /정심 김덕성
강물은 추워 떨면서도
사랑을 찾아 꿈을 안고 유유히
긴 여행을 떠난다
따사한 햇살의 세례를 받으며
반짝이는 물결위에 풍경화를 수놓으면서
꾸며 놓은 봄의 아름다움을
토해 내는 새봄
백지처럼
하얗게 칠을 해 놓은 강기슭에는
겨울을 걷어 내기에
한창인데
겨울 끝자락에 서서
긴 겨울 여행에서 봄을 만난
추위에 떨며 인내해 온
냇가에 선 앙상한 나뭇가지에서
사랑의 새봄을 담는다
봄 오는 소리 2 /정태중
봄 볕 머무는 오후
길어진 햇살
그것만이 봄 일리 만무하다
겨울 그리움이 꽃으로 피려는 듯
허한 가슴에도 몽실몽실
각질 벗겨지는 소리 들린다
실개천 소리에 밭고랑 초록이 움트고
잠자던 누렁이 황소가 뒤뚱이며
한나절 부산 떠는 몸 놀림
새벽안개에 젖은 버들이 바람과 연애하고
아지랑이 스멀거리며 꽃 망울을 애무하는
힘 있는 햇살이 발정 난 하루
봄은 화사한 꽃향기 안고서
여인의 나풀거리는 몸짓과 같이
내 가슴으로 두근거리며 온다
겨울과 봄 사이 /조남명
겨울은 장독대 위에
흰 케이크 지어 놓고
나뭇가지 벌거벗고 안무로
긴 겨울이기를 치성 드린다
모든 죄 하얗게 덮어
고른 세상 만들기도 한다
먼발치 미리 와 기다리는 봄
움트는 푸른 새싹
팡 터질 꽃 몽우리 앞세워
맡은 기침소리 내며 재촉한다
그렇다고 물러 갈 겨울이던가
샘추위라도 미적대보는 거였지
밀려나는 겨울을 옆에 두고
마냥 좋아는 말 일이다
또 한해가 가기 때문이다
이 계절 끝내 어우러지다
새 봄을 맞이하는 거다
못 잡은 행복을 가슴에 안고
봄의 나그네 /배종대
짧았던 봄이여!
세월의 침묵 속에
봄은 정녕 시들어 가는가?
못내 아쉬워
떠나지 못하는 가녀린 벗 꽃 잎
내님 기다리는 커피숍 차창 밖
하얀 눈물 되어 심연으로 가고
아무도 없다는 외로움 속
님의 얼굴 커피 잔에 머물러
눈가에 젖은 눈물 마르면
다시 오리라는 해후를 기다리다
황사 씻기는 봄비 내리는 날
하늘 받쳐 들면
누군가 날 부르고 있는 것 같아
망각의 착각이
빗속 대화 마련하는 봄의 나그네.
봄이여 봄날이여 /신성호
그렇게
또 그렇게 기다리던 봄이여
이제사 옆집 금순이처럼
기웃거리다가 얼굴을 보이니
진즉 꽃도 피고
따뜻한 햇살이 넘나들고
두툼한 외투도
벗어 버리고
너를 만나 반기려 했더니
개눈 감은 듯 있다가
놀랜 듯 너를 보니 정말로 반갑구나
그저 반갑고 기뻐할 뿐이라
이제는 꽃도 활짝 피워 향기도 날리며
네가 지닌 멋진 추임새까지도
죄다 보여준다면 나는 너로 인해
행복한 날들로 삼아
너를 노래하며 춤추어도 좋으리라 싶다.
봄은 겨울의 /박창기
마음을 열면 눈물이 나는가
마르지 않는
뜨거운 눈물이 절로 나는가
옥죈 손을 놓게 하고
봄은, 변덕스런 봄은
기어이 겨울을 닥달하여
세상 밖으로 밀어내고선
저 혼자 찬란하게 날개를 단다
그러나 봄은 승천하지 못한다
겨울의 가슴을 빌려 화려해진
자신을 잊고 있기 때문이다
그토록 오랜 시간
겨울은 봄의 외출을 준비하면서
봄보다 더 뜨거운 가슴으로
꽃씨를 다듬고, 꽃잎을 손질하고
긴긴 겨울 이야기까지 뿌리에 담는다
짧은 봄 한 순간에
나를 죽여 너를 살리는
탄생의 신비를 꿈꾸면서
민들레 같은 봄날의 투정을 받으려
빈 가슴으로 심호흡을 준비하면서
겨울은 봄의 무지를 묻지 않는다
봄 편지 /해암 주선옥
긴 겨울 밤 시린 별빛이
그대 창가에 다소곳 내려
두근 거리는 가슴
거친 숨결로 기다립니다.
더러는 부풀고
더러는 두꺼운 껍질 속
기어이 깨어나지 않을 듯
그 숨소리마저 깊이 재웠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대 안에서
연두빛 휘파람 소리
연분홍 꽃 내음으로
눈 뜨고나서 흔들리고 있습니다.
작은 샘처럼 솟은 그리움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오직 그대를 향해
두려움없이 흐르는 강물 인것을
그대는 아시나요?
봄을 만나다 /구분옥
연둣빛 설렘 가득 안고서
애마에 몸을 싣고 그대와
무작정 길을 나섰다
차창밖에 펼쳐진 풍경
힘없는 겨울
눈보라 칼바람 앞세우고
대관령을 넘고 있었다
해 뜨는 동해
솔향 바다 내음
허기진 봄을 채우며
덩실덩실 춤을 춘다
분홍색 저고리 붉은 치마 입고
마중 나온 매화 동백 아가씨
젖가슴 속으로 파고든다
아! 봄이다 봄이 왔다
겨우내 움츠렸던 마음
흔들렸던 영혼
연둣빛 사랑 입맞춤으로
봄날 그리움 /이상호3
돌아서 우는 강물의 안타까움도
이제는 한조각 그리움으로 남고
되돌아 갈 수 없는 철없던 봄날은
구름처럼 흘렀다.
누구를 위한 봄이었던가
무얼 찾던 청춘이었나
다시 만난들 다시 만난들
흘러 흘러 만난 우리는
그날의 우리는 아니겠지만
여린 속 못내 숨긴
어리석은 강물은 가없이 흐른다.
아!
봄처럼 꽃처럼
다시 볼 수 있다면
꽃처럼 봄처럼
다시 필 수 있다면...
어김없이 오는 봄 /동호 조남명
짙어진 봄볕
대지는 연초록 옷을 입는다
봄은 평등하다
비탈진 언덕에도 산속 개울에도
돌 틈새 숨어 피는 작은 꽃에도
싹을 틔운다
제 몸 하나 제대로
세우기 어려운
길섶 이름 모를 들풀에도
꽃대를 세워준다
어김없이 빈 손으로 오는 봄을
반기고 기다리는 것은
새 생명을 낳아
온 누리에 생기 가득한 때문이다
봄의 유혹 /박정재
생동이
다시 시작되는
새로운 생명들이
고개 내밀어
그 무엇을 찾듯
초봄의
포근함 속에서
그대 생각 겹겹이
마음에 포갠다
내 마음에
찾아드는 그리움
주체할 수 없어
먼 산만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