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글거리는 역사의 밭이여.
꽃불 튀기는 내 젊은 피의 잔치여.
내 여기 왔노라. 이제야 처음 내 여기 왔노라.
내 여기서 불타며 승리 했노라.
살덩이를 여기 찢어 던지며 내 영혼을 여기 내어 놓으리니....
만세. 만세를 불렀노라
노래를 했노라.
다음날 백화요란한 하늘밭을 위해
목숨을 거름밭에 던졌노라. 용감히 노래하며 던졌노라.
알맹이르 발라서 던졌노라.
어둠에 빠져 헤매이다가 지쳐버린 모습으로 못 견디는 아픔 속에서
그렇게 쓰러졌을때,
아무도 오는 사람이 없어 정말 난 외로웠네.
너의 아픔가 고독을 내게 줄 때 나는 너의 참 위로가 되고
너의 슬픔과 정말을 내게 줄 때 나는 너의 참 기쁨이 되리니...
이제 기나긴 이 질곡의 터널을 빠져 나가자구나
음울한 너와 나의 삶을 이제는 털어 버리자구나.
"나야. 틀키지 않게 조심해서 나와야 돼. 아이들이 보고 싶어서 그래...... 내가 나타나지 않으면 오래 기다리지 말고 그냥 돌아가도록해"
공중전화 부스를 나와 주머니를 뒤져본 仁平(인평)은 긴 한숨을 내 쉬었다.
집을 나올때 가져온 얼마되지 않은 돈이 이제는 동전으로 바뀌어 주머니 속에서 달그락 소리를 내고 있었다. 집을 나온지 벌써 일주일 째이다.
이제 무엇을 해야할까.
한낮의 뜨거운 뙤약 볕이 대지를 달궈놓고 있지만 인평은 움직이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집으로 돌아 갈수도 없고 그렇다고 달리 오늘을 넘길 준비가 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인평은 역광장을 둘러 보았다.
여기저기 멍하니 앉아 있는 사람들의 힘없는 모습.
서울의 관문이라는 서울역 광장이 언제부터 갈 곳 없는 사람들의 노숙지로 변해 버렸는가.
분며외 며칠전과는 다른 새로운 얼굴이 제법 많이 보인다.
밤이 되면 이슬을 피해 지하도에 몸을 눕히고 사람들의 발걸음이 분주해 질 무렵 슬며시 일어나 흐릿한 아침을 맞이하는 사람들.
저들도 나처럼 가장의 길을 잃은 것인가.
인평은 긴 한숨을 내 쉬었다.
역무원들의 눈치를 보아가며 청사의 화장실에서 게 눈 감추듯 머리까지 감았지만 벌써부터 부랑자 냄새가 나는 것은 멀쩡한 와이셔츠에 땟국물이 그득하고 폐병환자를 닮아가는 검은 얼굴때문이리라.
그는 이제 두개비가 남은 찌그러진 담뱃갑을 꺼내 들고서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아직까지는 구걸을 하지 않았구나하는 생각이 들어서 였다.
'제기랄, 이 연기처럼 흐느적 거리다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군.'
인평의 핏빛을 띤 마른 미소와 함께 내뿜는 연기는 미련이라도 있는 양 한참동안 주위를 맴돌다 사라져 갔다.
바람 한 점 없는 6월의 찌는 듯한 날씨는 그렇잖아도 허기에 지쳐 있는 그에게 독기가 묻어 있는 송곳으로 다가왔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의 연속
희망은 이미 주위를 떠나 버렸고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초라한 도망자의 모습뿐이다.
그는 광장의 시계탑을 힐끔 쳐다보고나서 몸을 일으켰다.
때를 맞춰 열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바쁜 걸음으로 대합실을 벗어나 역 광장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는 그늘을 차지한 채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낙이 없는 사람들 틈으로 끼어 들었다.
거기에는 불과 얼마전까지만해도 정상적인 생활을 했을 사람들이 지금은 허기에 지친 모습으로 퀭한눈을 하고 있다가 인평을 위해 한쪽 자리를 비켜 주었다.
단지 어려운 현실에서 잠시 도피했을 뿐 아직은 자신이 부랑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리를 내주는 것을 동료애로 생각한 것일까?
인평은 씁쓸한 미소로 고마움을 나타낸 다음 역 청사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아내인 해경을 만난다는 사실이 처음 전화를 할 때와는 달리 기쁘기는 커녕 무거운 집이 되어 가슴을 짓눌러 온다.
결혼생활으 시작한지 십 수년이 지났고 언제나 곁에 있어준 아내가 아니던가.
그런데도 그녀를 본다는 것이 부담스럽고 괜히 전화를 했다는 후회가 이는 것은 또 무슨 이유인가?
그는 입술을 비틀며 마지막 담배를 입에 물었다.
비스듬이 누워 바닥에 떨어진 빈 담뱃갑을 쳐다보는 오십대 중반의 대머리의 눈에 아쉬워하는 빛이 흐른다
그래도 마지막 남은 작은 자존심 때문에 기존의 부랑인들과는 달리 대낮에는 쓰레기통의 장초를 뒤지지 않는 사람들이 신 부랑인들이었다.
그들은 머지않은 장래에 집으로 돌아가리라는 희망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다.
지금은 사는 것이 지겹고 더러는 가장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탓에 가족의 얼굴을 보기가 민망스러워 어둡고 침침한 곳으로 잠시 스며들었을 뿐,
인평은 쓴 웃음을 지으며 불이 붙은 담배를 대머리에게 건네 주었다.
행색을 보아 집을 나온지가 최소한 보름은 넘은 듯 했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담배를 받아드는 대머리의 눈속에 아련한 아픔이 흐른다.
인평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해경을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것인가
아이들을 데리고 넉넉치 못한 친정집에서 눈칫밥을 먹고 있는 아내에게,
약속시간이 다가올수록 설레임보다는 더욱더 비참한 기분이 느껴졌다.
해경 역시 기쁨보다는 돌아서는 순간에 눈물을 보이고 말텐데...
더구나 아빠가 출장을 간 것으로 알고 있는 아이들에게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참으로 빌어먹을 세상이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인가
그는 참담한 얼굴로 약속장소인 시계탑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이 번뜩였다.
오가는 사람들 틈사이로 아이들의 어깨를 잡고 서 있는 해경의 모습이 보였다.
화장을 하지 않은 핼쑥한 얼굴에 아무렇게나 질끈 동여맨 머리.
하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이다.
그 옆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이제 열 한 살인 은지와 여덟살 난 동혁이가 아이스크림을 손에 들고 장난을 하고 있었다.
인평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행여나 해경을 미행해 온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였다.
다행히 눈에 띠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거머리처럼 쫓아 다니던 그들도 이제 지쳐버린 것일까
하지만 마음을 놓을 수는 없다.
들리는 말로는 인정사정 없는 그들에게 걸리면 뼈도 추리지 못한다고 하던데...
실제로 집을 나오기 전 그자들에게 얼마나 당했던가.
돈을 내 놓으라며 아이들이나 해경이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완전한 나체로 안방에 드러눕기도 하고 징그러운 문신을 한 몸으로 은지가 애지중지하는 탁구공만한 햄스터를 토막내 죽이기도 한 자들이었다.
인평은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몸을 팔아서라도 빌린 돈을 갚고 싶었다.
어린 자식들에게 아버지로서의 무능력이나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가 아니라 공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겁에 질린 얼굴로 숨을 죽이던 아이들.
인평에게 그것은 견딜 수 없는 고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모든 것들보다 지금의 그를 못견디게 만드는 것은 가족을 내팽개치고 비겁하게 혼자서만 도망쳐 나왔다는 데 있었다.
물론 잠시 피해 있으라고 말한 사람은 해경이다.
해경은 은지와 동혁이가 더 큰 충격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랬을 것이지만 인평은 해경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소의 해방감을 느끼며 집을 나와 버렸다.
우선 조금이라도 그들의 시야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의 짐은 점점 더 무거워지고 결국 거리의 부랑아 신세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인평은 심호흡을 한 다음 몸을 일으켰다.
언제나 모든 것을 함께 했던 가족을 만나는 것인데도 불안하기 짝이 없다.
그는 시선을 시계탑에 둔채 광장을 한바퀴 돌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그들이 지켜볼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아무도 지켜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마른 침을 삼키며 해경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해경은 손수건으로 연신 이마의 땀을 닦아 내리고 있었다.
불과 며칠 사이에 눈에 띄게 야윈 어깨가 인평의 가슴을 무너지게 만들었다.
해경은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계석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인평의 모습을 찾는 것이 분명했다.
"나, 여기 있어."
인평은 해경의 등뒤로 다가가 그녀의 어깨 위에 손을 갖다 댔다.
무너질듯 비틀거린 해경이 몸을 돌렸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소리를 내지른 쪽은 아이들이었다.
"아빠!"
입술 주위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혀로 핥아내리던 은지가 팔을 벌리며 먼저 달려들었고 미국에서 활약하고 있는 유명 야구선수의 사진이 박혀 있는 티셔츠를 입은 동혁이 그 뒤를 따랐다.
인평은 무릎을 꿇는 자세로 아이들을 품에 안았다.
울지 않겠다고 수도 없이 다짐을 했지만 아이들을 안는 순간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슬픔 때문인지 코끝이 아려온다.
해경은 그런 남편과 아이들을 내려다보며 눈물을 찍어내고 있었다.
결코 아름답지 않은 해후였다.
아버지와 가족의 만남인데도.................
"아빠! 왜 이렇게 더러운 옷을 입고 다니는 거야?일이 많아?"
지저분한 아빠의 옷을 본 동혁이 품을 벗어나며 말했다.
말을 하지는 않지만 은지 역시 초라한 아빠의 차림새에 저으기 놀라는 얼굴이었다.
인평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빠가 일을 많이 하다보니까 옷을 갈아 입을 시간이 없었구나. 빨아 입으면 금방 깨끗해 질거야"
"아빠! 수엽도 깍아! 난 수염이 싫어"
초등학교 1학년인 동혁은 인평이 안을라치면 까칠까칠한 수염이 얼굴을 찌른다며 언제나 먼저 확인을 하고 난 후에 안기곤 했었다.
인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철이 없는 아들이어도 좋았다.
지금 눈앞에서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4학년인 은지는 무엇을 느꼈는지 자신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이따금씩 엄마인 해경의 얼굴을 힐끔거리기도 했다.
동혁과는 달리 성장이 빨라 벌써 가슴이 불룩해지고 제법 처녀티가 나는 은지는 인평이 집을 나오기 전부터 아빠가 처한 상황이 어떤지를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늘 댕기머리를 나풀거리며 재롱을 떨던 아이가 지금은 사슴의 눈을 한채 쭈뼛대는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인평은 딸의 눈에 대롱거리는 눈물을 보는 순간 가슴이 터질것만 같은 통증을 느꼈다.
그의 딸의 얼굴을 가슴에 끌어 안았다.
이제는 어느새 다 커버린 듯한 딸.
집을 나온후 가장 그리웁고 가슴을 미어지게 만드는 아이 였다.
은지는 가느다란 신음소리를 내며 어깨를 들썩인다.
"이제 그만 다른데로 가요"
은지의 어깨를 돌려세우며 해경이 처음으로 입을 열였다.
해경은 인평과는 달리 언제나 냉정을 유지하는 여자다
약간은 차갑게 느껴지는 얼굴에 적당한 사치를 즐기고 자신의 약한 모습을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는 보여주지 않는 철저한 개인 중심의 사고를 지닌 여자였다.
그런 해경이 지금 어려움을 견디고 있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신기하기도 했다.
인평은 어쩌면 아내가 자신을 그리워 했다기 보다는 지금의 초라한 모습을 부끄러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아들의 손을 잡고 앞장서 걷고 있는 해경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자신과는 달리 서른 일곱의 나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잘 가꾸어진 몸매와 늘씬한 키는 처음 겪어보는 어려움 속에서도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들은 광장을 벗어나 이른바 먹자 골목으로 들어섰다.
경제한파를 맞고 있다고는 하지만 토요일 오후라서 인지 간단한 여행복 차림의 사람들이 제법 눈에 띄었다.
그들은 인평의 애타는 심정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알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인평은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며 해경이 이끄는 대로 돼지 갈비라는 큼지막한 간판이 걸려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상호같은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구석진 방에 자리를 잡은 해경은 갈비를 주문했다.
해경은 원래부터 돼지갈비는 아예 먹지도 않았고 은지 역시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지라 갈비는 의당 인평과 동혁의 차지가 될 것이다.
그런데도 평소보다 더 많은 고기를 주문하는 것은 남편이 도피 생활을 하는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리라.
인평은 시간이 지날수록 해경이 마치 먼 발치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전혀생소한 여자 같은 느낌이 들었다.
"술 한잔 할래요?"
먹음직스러운 고기를 접시에 담아 인평의 앞에 내려 놓으며 해경이 말했다.
처음 만났을 때와 별반 다름이 없는 무표정한 얼굴이다.
인평은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집을 나온 후 거의 매일 안주 없는 깡술에 취해 지냈지만 아이들이 있는 오늘 만큼은 술을 마시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푼돈에 지나지 않는 돈을 갖고 친정으로 몸을 피한 해경이 아니던가
지금의 돈도 아마 상당한 출혈이 될 것이다.
그래서 억지로 우겨넣는 고기는 질긴 헝겊을 씹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해경은 술을 주문했다.
다른 특별한 취미나 특기가 없는 인편은 술을 즐기는 편이었다.
그렇다고 술에 취해 실수를 하거나 주정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모든 것을 술 한잔에 털어버릴 수 있는 애주가라고 할 수 있었다.
누가 켜 놓았는 지 방 구석에는 십년은 됐을 법한 TV가 켜져 있었고 거기에는 젊은 신세대 가수들이 나와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현란한 춤을 추고 있었다.
동혁과 은지의 눈은 처음부터 그곳을 향해 있었다.
해경은 소리를 줄이고 가까이 가서 보라는 말로 두 아이를 상머리에서 떼어냈다.
분명 무슨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이들이 구석으로 몰려가자 해경은 친히 술을 따라 인평의 앞으로 내밀었다.
시커멓게 때가 낀 선풍기의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흐트려 놓았다.
인평은 문득 화장을 하지 않은 아내의 얼굴이 더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결벽증이 있는 해경은 언제나 자신의 몸을 가꾸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했고 심지어 집앞의 수퍼에 갈때도 거울을 몇 번쯤은 들여다 보아야 했다.
"당신........고생이 심하지?"
해경의 얼굴을 본지 한 시간이 가까워 오는 지금 인평이 처음으로 한 말 이었다.
그만큼 그는 죄책감과 함께 아내를 어려워 하는 중이었다.
"나는 괜찮아요. 당신이 걱정이지......몸은 어때요?"
해경은 짐짓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하긴 제 아무리 어렵더라도 내색을 할 여자가 아니다.
"잘 지내고 있어. 차림새는 이래도 힘이 드는 것은 아니니까"
인평의 말에 해경의 눈이 재빠르게 옷차림새를 훑고 지나갔다.
그녀의 눈에 진한 아픔의 흔적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동안.......어디에서 지냈어요?"
"그냥 아무곳에서나...친구집에서 자기도 하고....."
해경은 남편의 말이 자신을 안심 시키기 위해서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남편은 다른 사람과는 달리 친하게 지내는 친구도 없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지금까지 가족과 집 그리고 그가 모든 것을 걸었던 자동차용 전구공장이 전부라고 할수 있었다.
남편은 얼마전까지만해도 어엿한 사장님이었다.
비록 몇 안되는 종업원을 두고 자동차용 전구를 만들어 납품을 하는 영세업체였지만 평소 성실하고 몸에 베인 근검절약으로 몇번의 어려움을 별 탈없이 넘기기도 했었다.
적어도 지금의 어려운 시기를 맞기 전에는 그랬다.
하지만 갑자기 찾아온 경제불황은 자동차 산업의 위축을 불러왔고 그 여파는 밑바닥의 영세 납품업체에도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거대 왕국의 기침에 주변 소국은 몸살을 앓는다는 말처럼 현실은 남편을 절망으로 몰아세웠다
납품가격의 흥정이나 불량품으로 생긴 균열이 아니라 생사를 건 자금 확보전쟁에서 눈에 띄지도 않는 남편의 공장은 그야 말로 비명한마디 지를 틈도 없이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그 어디에 대고 하소연 할 수도 없는 처지의 남편은 어떻게든 공장을 살려보려고 사채를 끌어 썼다가 결국 빌린 돈도 갚지 못하고 빈털털이가 된 것이었다.
그런데 담보가 변변치 못해 은행의 문턱을 넘지 못한 남편이 정상적인 자금을 빌려 쓴 것이 아니라 이른바 뒷골목의 자금을 갖다 쓴 것이 문제 였다.
거기다 영업을 담당했던 총무가 재고품을 덤핑으로 팔아 넘기고 그 대금과 함께 행방을 감춰 버린것도 비틀거리는 그에게 엎친데 덮친 격이었다.
결국 돈을 갚지 못한 남편은 공장은 물론 모든 것을 날리고서도 쫓기는 몸이 되고 말앗다.
공장과 집이 이미 은행으로 넘어갔다는 것을 확인한 주먹들이 갖은 협박과 폭행을 가해 할 수 없이 몸을 피할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차라리 은행의 돈을 떼어먹고 법적인 처벌을 받는 것이 뒷골목의 돈을 떼어먹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아무런 제지도 없이 들어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안방을 활보하기도 하고 섬뜩한 칼을 자신들의 혀로 핥는 모습은 차라리 지옥의 악마보다 더 무섭다는 것을,
신고를 하면 또다른 사람들이 찾아와 더 지독한 공포를 느끼게 만든다는 것을.
거기다 여기저기 거미줄처럼 엉겨 있는 또다른 채권자들의 집요한 빚독촉도 벼랑에 처한 그를 천길 낭떠러지로 밀어 넣었다.
인평은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해경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본다는 것이 마치 커다란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이것이 실패자의 모습인가.
이유야 어찌됐든 가장 사랑하는 여자의 얼굴조차 마음대로 쳐다보지 못하는 남자는 분명 처절한 패배자이다.
"뭐라고 할 말이 없군. 그저 미안하다는 말밖에.... 그자들이 지금도 찾아 다니지?"
"해꼬지 하는 것은 좀 뜸해진 것 같지만 여전히 지키고 있어요. 오빠가 경찰이라는 것을 알아서 인지 집안까지는 들어오지 않지만요.........다행히 오늘은 보이지 않던데...."
"처남이 여러가지로 불편이 많겠군. 없는 살림에 군식구까지 들어와 앉아 있으니...."
"그런 걱적은 하지 말아요. 올케가 착해서 은지와 동혁이까지 챙져주니까요"
인평은 입술을 뒤틀며 다시 술을 들이켰다.
차가운 성격의 해경은 올케와도 그다지 좋게 지내온 사이는 아니었다.
더구나 일이 꼬일려고 그랬는지 해경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오빠인 종철은 보증이 금지되어 있는 현직 경찰의 몸으로 처갓집의 보증을 섰다가 어렵게 장만한 집을 압류당하고 지금은 월급의 얼마를 차압당하는 신세였다.
거기다 규약을 어겼다는 이유로 징계를 당해 마흔이 넘은 지금까지도 경장의 계급에 묶여 있는 한마디로 동생인 해경과는 판이하게 다른 유순한 사람이었다.
"당신이 힘들겠지. 당신은 다른 사람한테 신세 지는 것을 싫어하잖아"
"지금은 안그래요. 더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서인지 저도 잘 견디고 있어요. 그런데...."
"!"
"이제 어떻게 할거예요? 언제까지 이렇게 피해 있을 수는 없잖아요"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어..... 집이 있어서 들어가 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모습을 보이면 당신이나 아이들에게 금방 피해가 갈텐데.."
"그러지 말고 그 사람들에게 사정하면 어때요? 그들도 사람인 이상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요? 자기들도 돈을 받을려면 사람을 살려 놓아야 할테니까요"
"그렇게 당하고서도 놈들의 무서움을 모르겠어? 아이들이 귀여워하는 애완동물까지 목을 졸라 죽인 놈들이야. 무엇보다 내가 모습을 보이면 은지나 동혁이 그리고 당신이 힘들어져 나는.... 이런 모습으로는 당신 곁으로 갈 수 없어"
"그럼..............? 아무런 대책도 없이 계속 이렇게 숨어 지낼 거예요?"
"어떻게 되겠지. 지금 알아보고 있어?
"무엇을 알아보고 있다는 거예요? 설마 공장을 다시 가동하자는 것은 아닐테구요"
"그런것이 아니라...... 아는 사람이 있는데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아"
"누군데요?"
해경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남편이 다른 것은 몰라도 거짓말 만큼은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되지도 않을 일을 함부로 말하지 않는 다는 것도.
하지만 남편의 차림새나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얼굴은 뭔가 희망을 찾아 다니는 사람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그만큼 남편의 모습은 비렁뱅이에 다름아니었다
"당신은 잘 모르는 사람이야."
인평은 아이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대답했다.
"당신 주변에 지금의 당신에게 도움을 줄 만한 사람이 있어요?"
"더이상 묻지마.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니까"
인평은 해경의 말을 막고서는 쇼 프로그램을 즐기고 있는 아이들을 불러 무릎 위에 앉혔다.
유난히도 아이들을 아끼는 그였다.
형제라고는 배다른 두 형이 있지만 그들이 지방에 살고 있어 서로 자주 볼 기회도 없을 뿐더러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나마 이어지던 혈연관계도 지금은 단지 서류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해경은 아픈 눈으로 남편과 아이들을 쳐다보았다.
왜 전에는 이런 모습이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을까.
그는 단순히 아이들의 아빠였고 가장인 까닭에 언제나 곁에 있었을 뿐이다.
아니 해경 자신이 그렇게 생각해 왔다.
죽도록 그를 사랑한다는 생각을 해 본적도 없고 그의 사랑을 목마르게 기다리지도 않았다.
그래서 파타에 이른 지금도 겉으로 드러난 것과는 달리 그녀는 별다른 절망을 느끼지도 않았고 그를 위해 기도를 울리지도 않았다.
그런데 아이들을 안고서 쓸쓸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가 처음으로 가엾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아빠! 오늘도 집에 안들어 오는 거야?"
동혁이 인평의 목을 휘어 감으며 불만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아들은 아버지의 희망이라는데 너무 어려서인지 비참한 현실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은 말이었다.
하긴 이제 여덟살 아이가 무엇을 알겠는ㄷ가
그저 아버지의 존재가 필요한 것뿐이이라
인평은 아들의 볼에 얼굴을 갖다댔다.
"동혁아! 아빠는 아직..... 집에 들어갈 수가 없어"
"왜? 또 일하려 가야 돼?"
아빠가 집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 일이 바빠서라고 알고 있는 아잉였다.
물론 아이도 아빠의 사업이 잘못되어 공장과 집이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 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 당분간 힘들더라도 엄마 말씀 잘 듣고 있어. 아빠가 일이 끝나는 대로 데리러 갈게"
"언제 오는데? 나는 외삼촌 집이 싫어"
"왜? 외삼촌이 우리 동혁이를 아주 귀여워 하잖아"
"외삼촌은 날마다 술만 마시는데 뭘, 그리고 집이 너무 좁아서 뛰어 놀 수도 없고"
"조금만 참아. 아빠가 곧바로 우리 아들이 맘껏 뛰어 놀수 있는 집을 마련할께"
"정말이지?"
"그래, 약속한다."
"알았어............"
인평은 마지못해 대답하는 동혁을 다시 무릎 위에 앉히며 말없이 앉아 있는 은지를 쳐다보았다.
아들과는 달리 아빠의 처지를 이해하는 표정의 딸이 가슴에 와 닿는다.
좀전 동생과 함께 TV를 지켜보며 깔깔대던 아이가 아니었다.
인평은 주먹들의 험악한 모습에 파랗게 질려가던 딸의 얼굴이 생각났다.
아직 세상을 알지도 못하는 어린아에게 놈들의 행동은 악마의 모습이었으리라.
그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은 다음 가슴에 안았다.
"은지야!"단지 이름을 부르는 것 외에는 딱히 할 말이 없다.
목이 메어온다
이제 겨우 제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부모의 품에서 벗어나지 못한 아이가 아니던가
이윽고 은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자세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내막을 알고 있는 듯 했다.
인평은 자신의 몸이 불에 타 재가 되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랑하는 가족을 지켜내지 못한 가장의 비애
그것은 살에 에이는 아픔보다 더 큰 절망을 가져다 준다.
세상에 가족보다 구귀한 존재가 어디 있겠는가
"이제 어디로 갈 거예요?"
인평의 아픈 마음을 헤아린 듯 해경이 힘들게 물었다.
남편에게 집이 아닌 다른 행선지를 묻는 여자....
더구나 평범한 생활이 아닌 도망자의 생활이 아닌가.
해경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있었다.
"내 걱정은 하지마. 아무려면 아이들을 데리고 있는 당신보다 못하겠어?"
"그래도........... 그런데 왜 그렇게 연락도 안하는 거예요? 최소한 살아 있다는 소식이라도 자주 전해줘야 하는 것 아니예요?"
"미안해. 차라리 연락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더 좋을 거라고 생각했어. 당신의 목소리를 듣게되면 견디지 못할 것 같았거든."
인평의 얼굴에 자조의 웃음이 떠 오른다.
허무가 묻어 있는 미소였다.
해경은 고개를 돌려 버렸다.
남편의 마음을 이해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투정이라도 하지 않으면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사랑과는 상관이 없다 하더라도 그는 아이들의 아버지 였다.
어떠한 경우에도 정해진 틀 안에서 가족을 지켜야 하는,
두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렸다.
이제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 또다시 헤어져야 한다.
해경은 손지갑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 남편의 손에 쥐어 주었다.
인평은 그것이 돈이라는 것을 알았다.
"사정이 좋지 않아서 조금 밖에 준비하지 못했어요. 그렇게 다니지 말고 목욕이라도 하세요."
해경의 말에 인평은 지페 두장을 꺼내 주머니에 집어 넣고서는 나머지는 그대로 돌려 주었다.
"나는 괜찮아. 그리고 며칠만 기다려봐. 어쩌면 길이 열릴지도 모르니까"
"너무 힘들어 하지 말아요. 설마 지금보다 나빠지기야 하겠어요?"
"아니, 나는 이대로 쓰러질 수는 없어. 나는 잘못한 것이 없거든, 어떻게든.......다시 일어서서 당신한테 안겨준 상처를 치료해주겠어""그렇다면 우리 약속해요"
"약속?"
"그래요. 당신의 지금 모습은 남자로서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예요. 당신이 너무 힘들어 하기 때문에 저도 당분간 집을 나가 있겠다는 당신의 말에 동의 했지만 확실한 보장도 없이 이렇게 떠도는 것은 우리 모두를 위해 옳은 행동이 아니니까요""나도 알아. 그래서 더 힘이 들고....."
"그러니까 이렇게 피해 다니지만 말고 그 사람들과 담판을 해서라도 정상적인 생활을 하도록해요. 때리면 맞고.....고소를 하면 법의 심판을 받고.... 그것이 옳은 방법이지 지금처럼 숨어 지내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고통일 뿐이예요. 별다른 길이 보이지 않는 지금 차라리 빌어먹더라도 우리 가족끼리 함께 지내도록 해요"
물론 그가 돌아온다고 해서 특별히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빚쟁이들이 몰려들고 아이들에게 두려움나 안겨주게 될 것이고,
하지만 도망자의 생활을 하는 남편을 언제까지나 두고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인평은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해경의 말은 뜻밖이었다.
그는 아직까지 그녀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다.
해경은 언제나 고상했고 기름냄새가 나는 남편보다는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커피를 마시고 대학로에 가서 연극을 관람하기를 좋아했다.
물론 취미가 다른 인평은 그 옆에 있지 않았다.
인평은 처음으로 해경이 자신의 아내일지도 모른다는 다소 어이 없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를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사랑했지만 자신의 입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해 본적이 없었고 해경에게서 사랑이라는 말을 들어 본적도 없다.
그저 한 가정을 이루었고 아이를 낳아 부부로 불리웠을 뿐이다
그런데 오늘에서야 자신이 아내를 사랑하는 만큼 그녀도 자신을 사랑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경을 쳐다보는 인평의 눈자위가 조금씩 씰룩이기 시작했다.
사랑과는 상관없이 자신이 지켜야 할 여자이다.
그리고 조금씩 가슴에 와닿는 해경의 훈김은 그를 절마의 나락에서 건져내 줄지도 모른다.
세상을 사랑만 갖고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오래전에 깨달은 그 였지만 해경의 사랑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견딜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줄 것이다.
인평은 잃어버렸던 미소를 떠 올렸다.
그런 만큼 어떻게 해서든지 다시 재기를 해야한 한다.
"약속하지 신이 도와준다면 우리는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인평은 슬며시 해경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해경의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