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검영마
유현강은 흠칫 놀라 본능적으로 적혈검을 쳐들어 상대방의 초식을
막아 내려 하였으나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절반 가량 들어 올렸
던 것을 다시 내려뜨렸다.
만검국 왕자의 공력이 이 얼마나 심후한가! 그는 이미 질투심이 한으
로 변하여 나를 죽일 결심을 하고 있으니 어찌 손을 쓰는 데 사정을
둘 리 있겠는가!
만검국 왕자는 유현강을 향해 삼타릉을 펼쳤다. 이때 악봉령이 깜짝
놀라 소리를 내질렀다. 그녀의 외침소리에 중인들이 모두 그녀 쪽으로
눈길을 모았건만 그녀는 눈을 크게 禎뜬 채 싸움판을 주시하고 있었다.
번갯불이 뿌려지는 것처럼 눈앞이 번쩍하더니 세 폭의 기이한 검광이
이미 유현강의 가슴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 찰나적인 순간에 유현강
의 몸이 오른쪽으로 약간 움직이는 것 같았으나 곧 이어 찌익 찍, 하고
비단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세 줄기 핏줄기가 뿜어져 나와 유현강
의 백의를 절반 가량이나 붉게 물들였다. 만검국 왕자는 득의에 찬 냉
소를 머금은 채 여덟 자나 뒤로 물러났다. 그때였다. 만검국 왕자가
막 후퇴함과 동시에 창백하게 변한 유현강 앞에 악봉령이 몸을 날려 내
려섰다. 그녀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유현강의 가슴에 난 상처를 바라
보더니 자기가 여자라는 것도 잊고 매우 자연스럽게 손을 대기 시작했
다. 유현강은 자기가 상처를 입었음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갑자기 왼
손을 들어 악봉령의 손을 밀쳐 냈다.
[악낭자, 당신들의 적을 위해 상세를 보살피는 것은 대역부도한 짓
이니 어서 물러가시오!]
하지만 지나친 긴장이 그녀의 이성마저 빼앗아 간 듯 악봉령은 거침
없이 말을 받았다.
[나는 그런 것 몰라요. 나는 당신榧의 상세만 보살피겠어요.]
[흐흐흐......]
냉혹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더니 만검국 왕자의 눈 언저리엔 이미 살
기가 어렸다. 악봉웅이 웃음소리에 놀라 만검국 왕자를 돌아보더니 금
세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돌연 악봉웅은 몸을 솟구쳐 싸움판으로
내려서더니 등 뒤에서 악봉령의 묵첨혈(?甛穴)을 찍었다. 그리고 그
녀를 안아 옆으로 옮겨 갔다. 유현강의 가슴에선 다시 선혈이 흘러내
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지혈시키려 하지 않고 왼손을 품 속에 넣
어 점점이 피가 묻은 흰 비단 조각을 꺼냈다. 흰 비단에는 세 폭의 능
화(菱花)가 핏물로 새겨져 있었다. 유현강은 고개를 숙인 채 피에 젖은
비단을 한동안 내려다보다가 돌연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그리고는 살
기 어린 눈빛으로 만검국 왕자의 얼굴을 응시한 채 냉랭하게 웃었다.
[왕자, 나는 너를 통해 만검국에 한 가지 소식을 전해야겠다.]
만검국 왕자는 상대방의 눈길을 마주 대하게 되자 저절로 소름이 오
싹 끼쳐 와 헛기침을 한 번 했다.
[유가야, 너는 유언이나 빨리 해보아라. 본 왕자가 전해 주지 않더
라도 이곳에는 대신 전해 줄 사람이 e�있�?]
[나는 오직 네 자신의 입을 빌어 전하고 싶을 뿐이다. 자, 그럼 준비
나 해라.]
만검국 왕자는 일순 어리둥절하다가 조금 후에야 무슨 뜻인지 알아차
리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유가야! 너는 한 번 더 그 세 폭의 능화를 구경하고 싶
단 말이냐?]
그러면서 전신의 공력을 모아 장검을 든 오른손에 집중시켰다.
유현강은 별안간 앙천대소를 했다.
[핫하하...... 바로 그 세 폭의 검화가 너희들의 만검국에 멸망의 화
를 초래하게 되었다. 너는 돌아가서 영마가 다시 칠해에 출현하였으니
백검이 곧 천하를 섬멸하게 될 거라는 말을 전하면 된다.]
만검국 왕자는 이 말을 듣자 오만했던 태도가 싹 변하여 약간 놀라는
소리로 물었다.
[백검영마는 너와 어떤 관계가 있는 사람이냐?]
[바로 나 유현강이다.]
말소리와 함께 유현강은 만검국 왕자를 덮쳐 갔다. 만검국 왕자는
이미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 대뜸 만검귀해(萬劍歸海) 초식으로 맞받아 &
나왔다. 유현강은 이제 상대방에게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고 과거에 금
벽궁주가 천하를 종횡무진할 때 사용했던 백검기초(白劍基招)를 숨김
없이 펼쳐 냈다. 만검국은 이름 자체부터 검(劍)자가 들어가니 만큼
검술에 대한 연구가 상당히 깊었고, 따라서 만검국에는 독특한 검법도
많았다. 만검국 왕자는 비록 만검국의 일류 고수는 되지 못하였지만,
그의 공력은 그래도 젊은층에서 으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검법으로
논한다면 기실 중원 무림에선 적수가 드물 정도의 고수라고도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다 같이 전력을 다해 초식을 펼쳐 내고 있었다. 한
명은 전대의 궁주를 살해한 원흉을 유인하기 위함이었고 다른 한 명은
연정의 적을 제거하기 위함인지라, 그들은 싸움을 벌이자마자 독초만
펼쳐 냈다.
싸움은 점점 치열해지기 시작했다. 동생을 안은 채 싸움의 광경을
응시하고 있던 악봉웅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유현강이 패한다면 할 말이 없겠지만 만약 그가 이긴다면 어떻게 되
지? 그를 놓아 주면 만검국의 미움을 사게 된다. 만검국의 사람들에겐
이미 작고하신 은사까지도 감히 죄��를 범하지 못할 정도인데 우리 남매
둘이...... 그러나 내가 만약 유현강과 적대관계를 맺게 된다면 동생에
대한 그 동안의 고심은 모두 물거품이 되어 버린다. 아버님께선 임종
직전에 동생을 잘 돌보라고 재삼 나에게 당부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자신에게 물어보는 물음이었으나 해답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 무렵 두 사람은 이미 이십여 초를 주고받고 있었다. 만검국 왕자
가 맹렬한 공세를 가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의 얼굴에 흘러내리는 땀
방울로 보아 싸움의 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가 하는 것이 쉽게 짐작이
갔다. 승리는 누구의 것이겠는가?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침착하게 손
을 쓰고 있는 유현강에게 돌아갈 것이리라. 두 호위동자는 만검국 왕자
가 열세에 처하여 있음을 알았으나 여러 사람이 보는 앞이라 감히 합세
할 수가 없었다. 만검국 왕자는 최후의 발악을 하듯 맹공을 가하며 마
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녀석의 초식은 점점 더 기이해지는 것 같군! 보아하니 그는 나
를 죽일 생각은 없는 것 같구나. 그렇지 않다면 나는 벌써 상처를 입었
어도 여러 군데 입었을 터인데. 그d 렇지! 아까 보니 저자는 삼타릉의
초식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자칫하다가 크게 다칠지도 모르니 일찍
그 초식을 펼쳐 내야겠구나!
이렇게 생각이 미치자 그는 즉시 뒤로 후퇴했다. 그러고는 유현강을
향하여 날카롭게 외쳤다.
[유가야, 죽음을 각오해라!]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대뜸 세 폭의 검화를 일으켜 유현강의 가슴을
향해 공격해 갔다. 유현강은 경멸의 웃음을 머금은 채 갑자기 몸을 좌우
로 휘청거리더니 검망을 거두어들였다.
[왕자, 이제 너는 돌아갈 때가 되었는데......]
만검국 왕자는 눈에서 광채를 발하며 몸을 오른쪽으로 옮기면서 검
을 앞으로 찔러 댔다.
[흐하하......]
동시에 냉혹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웃음소리와 함께 유현강의
몸은 유령처럼 사라졌다. 별안간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고, 세 폭의
검화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두 사람 중 누가 쓰러졌을까? 중인들은 모두
만면에 희색을 띠고 있었는데, 우뚝 선 유현강을 발견한 순간 얼굴빛이
크게 변하고 말았다. 만검국 왕자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
가린 두 손가락 사이로는 선혈이 줄줄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때 좌동
이 정신을 번쩍 차리고 아무 기척도 없이 유현강의 배심혈(背心穴)을 향
해 검을 찔러 갔다. 유현강은 천천히 눈길을 돌려 중인들의 얼굴을 쳐
다보고 있었다. 날카로운 검끝이 등 뒤 배심혈의 약 다섯 치 밖으로 다
가왔을 때였다. 그 위기일발의 순간에 유현강은 별안간 등 뒤로 검풍이
밀려 옴을 느끼고 오른손을 번쩍 쳐들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몸을 홱
돌렸다. 한 줄기 은광이 좌동의 검망을 뚫고, 처절한 비명소리와 함께
좌동은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좌동의 손에 들려져 있던 보검은 어느
새 이 척 밖에 떨어져 있었다. 좌동은 유현강에게 일검을 찔리고 목에
서 피를 흘리며 죽어 버렸다. 악봉웅이 경악에 찬 표정을 지으며 외쳤
다.
[영혈환(映血環)이다!]
곧 이어 중인들도 놀라움에 차서 같은 소리를 되풀이했다. 바로 이
때, 만검국 왕자가 얼굴을 가렸던 손을 내리며 음독한 음성으로 말하
였다.
[유현강! 넌 내 얼굴에 난 상처가 얼마나 큰지 똑똑히 보아라. 나는
이 이자를 열 배로 갚아 주겠다.!]
상처는 왼쪽 이마에서 미간을 지나 오른쪽 뺨까지 그어졌는데 길이
가 다섯 치는 되었다. 만검국 왕자가 공력을 운용하여 흘러내리는 피
를 지혈시켰다고는 하나 영준하던 얼굴은 징그럽기 짝이 없는 모습으
로 변해 있었다.
[흐허헛......]
냉랭하게 웃으며 유현강은 잔혹한 음성으로 말하였다.
[보지 않아도 알고 있지. 하지만 다음에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그때
는 넌 소식을 전할 목적으로조차 이용할 가치가 없게 된다. 허허, 너는
내 말을 알아듣겠느냐?]
눈에서 살기를 발산하며 그는 한 마디 덧붙였다.
[돌아가거든 이 유현강이 너희들의 만검국을 멸망시키겠다고 하더라
고 전하거라!]
만검국 왕자는 땅 위에 쓰러져 있는 좌동의 시체를 돌아보다가 겁이
났는지 이번에는 악가 남매에게로 눈길을 옮겼다.
[악봉웅, 본 왕자는 이제 흉악하게 변하였다.]
악봉웅은 가슴이 섬뜩하여 급히 말을 받았다.
[사...... 사숙......]
만검국 왕자는 그의 말을 가로챘다.
[또 만날 것이다. 우동, 가자!]
그러고는 그는 가려고 하였다. 이때 유현강의 입에서 다시 냉소소리
가 터져 나왔다.
[중원의 깨끗한 땅에 해외 지방의 귀신을 둘 수 없으니 시체를 가져가
도록 해라! 그리고 만검국의 보검도 가져가라!]
만검국 왕자는 자기가 너무 긴장한 나머지 이성을 잃어 검조차 버려
두고 그냥 가려 했던 것을 느끼고 얼굴을 붉혔다. 다행히 얼굴에 핏자
국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자신의 창피한 면목을
그대로 드러내고야 말았으리라.
[가서 검을 줍고 좌동을 어깨에 메라!]
우동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검을 검집에 꽂고 좌동을 어깨에 메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 일행은 송림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유현강은 말
등에 오른 후 갑자기 악봉웅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당신과 나 사이에 적아(敵我)의 관계는 분명하나, 나는 여전히 결심
한 대로 하겠소. 아마 우리는 머지 않아 다시 만나게 될 거요.]
악봉웅은 아직도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e
방의 말을 듣는 순간 얼굴에 가벼운 경련을 일으켰다.
[내가 마음의 결단을 내리기 전까지는 구중천에 오지 말게.]
[만검국의 사람이 가지 않는 한 나는 물론 가지 않겠소! 왜냐하면
당신들 남매는 과거에 태산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오.]
말을 마친 후 그가 두 다리에 힘을 가하자 백마는 목을 길게 빼고
울어젖혔다. 말발굽소리가 났다. 말은 걸음을 옮겨 멀리 사라져 갔다.
유현강은 악가 남매와 작별을 한 후 왔던 길을 되돌아 송림 밖으로
나왔는데, 송림 밖 일 장 떨어진 곳에 있는 거송의 나뭇가지에 큰 옷
자락이 하나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옷자락에는 선혈로 이런 글씨가
씌어 있었다.
유현강 보시오. 구중천을 침공하는 일은 정오로 앞당겼소. 이곳의
일을 끝낸 후 속히 만유보로 가서 당신의 규수감을 구출하도록 하시
오.
끝에는 서명 대신 선혈로 한 마리의 봉이 그려져 있었다. 유현강은
남에게 희롱당했다는 느낌이 들어 언짢은 마음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
글을 누가 남겼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홍의인이 떠올랐다. `
이 사람의 지략과 재능은 몹시 놀랍구나. 내가 이 길로 돌아갈 줄
어떻게 알았을까? 흥! 그러나 언젠가는 내가 너를 꼭 잡고야 말 것이
다! 그는 내 힘을 빌어 또 누구를 죽이려 하는 것인가? 그렇지, 그의
말이 진짜인지도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어찌 되었든 이곳의 일을 끝낸
후 나는 만유보에 한번 가 보아야겠구나.
그는 생각하면서 계속 말을 몰아 가고 있었는데 땅 위에는 취리건곤
과 수개의 시체가 여전히 나뒹굴고 있었다. 취리건곤의 상의는 벗겨져
있었다. 이 무렵 태양은 이미 중천에 떠올라 있었다. 유현강은 망설이
는 듯하다가 다시 중얼거렸다.
[구중천이 어느 곳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음, 그렇지! 높
은 곳으로 올라가 보면 혹시 보일는지도 모르지.]
그러면서 그는 말을 몰아 높은 언덕 위로 향하였다. 이 언덕은 크고
작은 괴석이 어지럽게 난립해 있는 조그마한 산이었다. 삼면은 초원이
고 뒷면은 높은 산봉우리가 하늘을 찌를 듯 가로막고 솟아 있었다.
혹시 구중천은 이 괴이한 산봉우리에 있는 게 아닐까?
유현강은 괴이한 산봉우리를 보고 庶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바로 이때
였다. 언덕 밑 송림에서 세차게 달리는 말발굽소리와 사람의 음성이
함께 어우러져 들려 왔다.
[정말 화가 연이어 밀려 오고 있군! 어째서 염양칠환장이 나타남과
동시에 백검영마까지 출현하였을까? 한보주, 당신의 수하가 말한 백마
탄 청년이 혹시 귀보에 출현했던 유현강이 아닐는지?]
그 사람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한수동이 말을 받았다.
[아니오, 절대 그는 아니오. 그 청년은 무공의 무자도 모르는 서생
이었소.]
[한보주, 그러나 그건 너무 우연의 일치가 아니오. 어찌 그 녀석도
백마를 타고 백의를 입고 있지요?]
[우형!]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한수동은 약간 신경질적으로 반박했다.
[나는 보내에서 아들을 잃었는데 만약 그 서생 차림의 청년이 원흉이
었다면 어찌 그렇게 쉽게 내 주었을 것 같소? 큰소리 치는 게 아니라 칠
룡보는 그래도......]
돌연 또 하나의 우렁찬 음성이 말을 받았다.
[나무아미타불...... 두 분께서는 그런 무의미한 말다툼을 하지 마십孔
시오. 언젠가는 주범이 누군지 밝혀질 것이오. 그리고 그가 태산 부근
에 있다면 우리들 스물여섯 명의 힘으로 잡아 내지 못할 것 같소?]
여기까지 엿듣다 말고 유현강은 입가에 냉혹한 웃음을 띠고 혼잣말
로 중얼거렸다.
[흥! 너희는 곧 주범이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다. 흐흐...... 너희가
이곳으로 지나갈 줄은 정말 생각지 못했는걸!]
별안간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글을 남긴 사람이 나를 속이지는 않았구나. 그렇다면 어서 이곳의 일
을 끝낸 후 서하로 가서 초가 부녀를 구출해야지!
이때 송림 속에서는 다시 어떤 노파의 음성이 들려 왔다.
[괴석이 난립해 있는 언덕만 넘으면 구중천의 범위이니 모두들 조심
하시오.]
언덕만 넘으면 구중천의 범위라니! 유현강은 깜짝 놀라며 갑자기
말등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곧장 몸을 날려 칠 장 밖에 있는 높은 암
석 위로 뛰어올랐다.
[천경, 네가 영마라는 것을 저자들에게 실제로 보여 주어라.]
말 머리를 어루만지며 유현강은 ]?나직이 말하였다. 과연 영마는 사람
의 말까지도 알아듣는 신령한 동물이었다. 유현강의 말이 떨어지자마
자 백마는 마치 주인의 분부에 응답하는 듯 목을 빼고 흔들어 서너 차
례 맑은 방울소리를 냈다. 짤랑, 짤랑, 짤랑...... 그러자 송림 속에서
돌연 놀란 외침소리가 들려 왔다.
[엇! 이건 어디서 들려 오는 말방울소리지?]
[설마 영마는 아니겠지요?]
그와 동시에 송림 속에선 말발굽소리와 말소리가 모두 정지되었다.
유현강은 입가에 냉혹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때 노파의 앙칼지고 냉혹
한 음성이 다시 들려 왔다.
[백검영마라면 더욱 잘 되었지요. 우리가 이곳에 온 목적은 바로 그자
를 잡아 죽이자는 게 아닌가요? 어서 모두들 나를 따라와요.]
이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송림 속에서 이십여 명의 사람들이 나오더
니 일제히 석산 위로 뛰어올라 왔다. 가볍게 몸을 날리는 것만 보아
도 그자들의 무공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유현강이 아
래를 내려다보고 자세히 살펴보니 그들 일행은 모두 스물두 명이었는
데, 나이는 마흔에서 일흔까지 골고루 섞였으며 차림새도 승려도인
속인 등이 모두 섞여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중인들은 석산 위로 올
라왔다. 바로 이때 백마가 또 맑은 말방울소리를 냈다. 중인들은 모두
들 걸음을 멈추고 앞에 있는 말을 주시했다. 그런데 그들은 목에 방울
을 달고 있는 백마에 시선을 집중시키느라 칠 장 밖 암석 위에 서 있는
유현강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이 말은 분명 유현강이 타고 다니던 말인데 어찌 주인도 없이 이곳
에 혼자 있지? 아마 누구에게 암살이라도 당한 게 아닐까?]
한수동이 탐욕스런 눈빛을 번쩍이며 말 앞으로 두어 걸음 다가왔다.
그러자 군중들 사이에서 한 백발노파가 나오며 날카롭게 외쳤다.
[내가 보건대 이 말은 보통 말이 아닌 것 같아요. 자세히 보세요. 말
의 목에 아홉 개의 은방울이 달려 있지 않아요?]
이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군중들 중에서 누군가가 크게 말을 받았다.
[백검영마 중의 영마도 목에 아홉 개의 은방울을 달고 있소.]
[영마가 나타나면 백검이 출현하는데, 이...... 이건 영마가 먼저 나
타난 것이구려.]
한수동이 흠칫 놀라 앞으로 다가서던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나 탐욕庶
에 젖은 그의 눈빛은 여전히 백마에 집중되어 있었다. 백발노파가 고함
을 지른 목적도 실은 한수동에게 말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
나 뭇 사람들이 백검영마 운운하자 돌연, 전해지는 말에서 백검영마가
출현할 때는 언제나 영마가 먼저 출현하고 다음에 백검이 나타난다는
말이 생각났다. 그러자 지금까지 그녀의 가슴속에 들끓고 있던 욕심은
일순간에 사라지고 대신 흉악하고 독한 마음이 일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백마의 목덜미를 응시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말의 키가 팔 척 이상이나 되면 용마(龍馬)라고 하는데 이 말은 정
말 팔 척이 넘겠군요. 그리고 빳빳한 꼬리가 땅에까지 닿아 있는 것을
보아 힘도 보통 센 정도가 아니겠군요. 아마 유현강이 암살을 당한 것
은 필시 이 말 때문일 것이니, 우리는 이 기회에 합세하여 이 말을 때
려잡읍시다.]
말의 키가 팔 척 정도 된다면 그 위세나 힘에 눌려서 맹호도 감히 접
근을 못한다. 그리고 백마라면 보통 흑마보다 희귀하고 영리하다 하여
세상 사람들은 영물이라고 하지 않던가! 이십여 명의 중인들은 모두
무림의 일류 고수들이었지만 영마를 ]�보�A 순간 겁을 먹고 있었다. 그들
의 두려움은 백마의 위세 때문이 아니라 그 백마 다음에 출현할 백검을
가진 인물에 있었다. 그러나 군중의 심리란 때로 한 사람의 말이나 행동
에 의해서 전연 뜻밖으로 변할 수도 있다. 영마라는 말을 듣고, 또 노파
가 말을 때려잡자고 하자 중인들은 즉시 무기를 뽑아 들어 행동에 옮길
준비를 했다. 바로 이때였다. 중인들이 막 백마를 노리고 덮치려고 할
찰나, 돌연 근처의 바위 위에서 산천을 쩌렁쩌렁 울리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핫하하......]
웃음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싸늘한 음성도 곁들여 들려 왔다.
[여러분께서 나의 말에 그토록 효심을 지니셨으니 내가 무엇으로 보
답하리오! 하하하...... 승려는 극락으로 가시고, 도인은 승천하시고,
속인은 염라대왕 앞으로, 핫하하......]
음성은 음산하고 말투는 풍자적이었다. 중인들은 안색이 크게 변하여
소리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수동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너...... 너는 유현강이 아니냐?]
유현강은 얼음장같이 차가운 음성으로 대꾸했다.
[그렇소. 나는 바로 유현강이오. 지금 당신은 미약한 자식 한 놈만
을 내보내어 나를 대응케 하였음을 몹시 후회하고 있겠구려?]
한수동은 그 말을 듣자 흠칫 놀랐으나 다음 순간 눈에서 독살스런 광
채를 쏟아 내며 고함을 질렀다.
[유현강...... 너...... 솔직히 말해 봐라! 한옥호는 정말 네가 죽였느
냐?]
[암, 그야 여부가 있겠소.]
유현강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경멸의 웃음을 띤 채 암석 위에서 뛰
어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한수동에게로 다가왔다. 유현강의 가볍고 절
묘한 신법과 그의 얼굴에 떠오른 냉혹한 표정을 보자 중인들은 잔뜩 긴
장했다. 왜냐하면 이 순간 유현강의 얼굴에선 조금도 동정의 빛과 온화
한 기운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수동은 아들을 죽인 원흉을
만났기 때문에 두려운 줄도 모르고 눈에 핏발을 세운 채 유현강을 쏘아
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도 잔뜩 살기를 품은 얼굴로 유현강에게로
다가갔다.
[유...... 유현강! 너...... 너는 노부의 질문에 숨김 없이 대답해라.]
한수동은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유현강은 냉혹하게 웃었다.
[한수동, 당신은 눈 먼 봉사도 아니고 또한 귀머거리도 아니지 않소?
나는 늑대보다도 못한 도적놈의 자식을 한 명 죽였을 뿐인데, 흐흐흐
......]
진상은 이미 밝혀졌다. 한수동의 아들 한옥호는 분명 유현강이 죽인
것이었다. 한수동은 마침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여
미친 호랑이처럼 부르짖으며 유현강에게로 덮쳐 갔다. 하지만 유현강은
마치 닥쳐오는 위세를 영접하려는 듯이 이 순간 빙긋이 웃으며 갑자기
행동을 멈추었다.
[유가야! 받아랏......]
부르짓음 속에 한수동은 허공에 뜬 채 쌍장을 뻗어 냈다. 한수동이
뻗어 낸 쌍장에선 노도와 같은 장풍이 뿜어져 나와 곧장 유현강의 가슴
앞으로 엄습해 갔다. 그때 돌연 유현강의 냉혹한 웃음소리가 울려퍼졌
다. 동시에 백영이 번쩍하더니 한수동의 장세 속에서 빠져 나와 옆으로
돌아갔다. 다음 순간, 일개 지역을 지휘하던 한수동의 한쪽 팔목은 어
느 새 선비 차림의 한 청년의 손에 잡혀 있었다.
[흐흐...... 흠......]
한수동의 입에선 괴로운 신음이 터져 나오고 또 이마에선 땀방울이 &
비 오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한수동, 네가 감히 영마에 욕심을 품은 죄를 이제야 응징받는 것이
다.]
유현강은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한수동을 노려보며 이렇게 말하
였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홍색 광채가 번쩍하더니, 한수동이 처참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다. 그의 이마에는 홍색 손바닥 자국이 나
있었다.
[앗, 염양칠환장이다!]
누군가가 공포에 찬 외침을 내질렀다.
[소화단 사람도 그가 죽였다!]
[그자가 바로 흉수다!]
눈앞에 나타난 백의서생은 바로 그들이 찾고 있는 원흉이었다. 그러
나 중인들은 외침만 지를 뿐 조금도 기쁜 표정을 짓지 못했다. 아마 그
들은 담소를 나누는 가운데 살인을 하는 유현강의 수단에 용기를 잃은
모양이었다.
[으하하......]
유현강의 웃음이 다시 터져 나왔다. 그리고 유현강의 말소리가 이어
졌다.
[친구들, 당신들이 찾을 사람은 본인이지 구중천의 사람이 아니라
구. 하하하, 나도 당신들을 잘 대접} 해 줄 수가 있소. 해지만 제외하고
는 모두 머리를 수습해 주리다.]
그의 음성의 차갑기가 마치 뼈라도 응결시킬 것 같았다. 중인들은
가슴이 굳어져 있어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다. 돌연 중인들을 헤치고 머
리와 눈썹이 백설같이 흰 한 노화상이 걸어나왔다. 그는 유현강 앞으로
걸어나왔다.
[유시주, 시주는 어찌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의 목숨을 수습하기로
했다면서 유독 빈승만을 제외하는 거요? 가능하다면 모두 수습하도록
하오.]
유현강은 해지의 얼굴을 노려보며 냉소를 쳤다.
[만약 해혜대사만 아니었다면 당신은 꿇어엎드려 큰절을 한다 하더
라도 목숨을 건지지 못할 것이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중인들은 산란해진 마음을 진정시켰
다. 백발노파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돌연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유현강,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 하고 자신의 내력이나 밝혀 보아
라.]
유현강은 눈에 살기를 뗬다.
[나는 백검영마의 유현강이다. 칠교요호(七巧妖狐), 네가 건망증이
없다면 십삼 년 전 소화단에서 있었; 던 일막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흐흐흐...... 나는 바로 네게 벌을 내려 주러 온 유가의 유일한 생존자
다.]
칠교요호는 어리둥절하더니 돌연 고개를 젖히고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과연 네가 주범이구나. 우리 모두 함께 덤빕시다!]
그녀는 대담하게도 중인들에게 이렇게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중인들
은 다만 칠교요호가 십삼 년간 강호에 나타나지 않다가 다시 출현하였
고 무공이 전보다 훨씬 고강해졌다는 것만 알 뿐, 십삼 년간 어디를
가서 무엇을 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런데 그녀의 명령이 떨어지자
중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고함을 지르며 유현강을 포위해 갔다. 유현강
은 이미 가슴속에서 살기가 들끓고 있었기 때문에 냉혹하게 웃었다.
[흐하하...... 덤비시오!]
[빈승이 먼저 실례하겠소!]
남달리 성격이 급한 해지가 먼저 외치며 나섰다. 그는 금강조불(金剛
朝佛) 초식을 펼쳐 유현강의 가슴을 공격했는데, 그의 초식은 워낙 날카
로워 손 씀씀이가 칼날을 휘두르는 것보다 매서웠다. 칠교요호도 운비
주인의 명령을 받은 바가 있으므로 해지대사가 출수하자마자 야마분종 ]
초식으로 그의 옆구리를 낚아 갔다. 그녀의 초식은 신속하기 그지없어
해지보다 늦게 출수했으나 먼저 도착했다. 이로 본다면 그녀의 무공이
한 수 위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유현강은 약간 놀라 속으로 중
얼거렸다.
소화단 사람들의 실력은 과연 대단하구나! 사부에게 전수받지도 않
은 일개 할망구의 무공이 이렇게 고강하니 조심해서 상대해야겠는데.
해지대사와 칠교요호가 출수하자 중인들도 따라서 초식을 펼쳐 냈다.
유현강은 순식간에 사면팔방에서 그런 엄청난 공격을 받으면서도 여전
히 자만심을 버리지 않고 얼굴에 냉혹한 웃음을 떠올리고 있었다. 별안
간 그의 몸이 위로 솟아올랐다. 그러자 칠교요호가 날카롭게 고함을
질렀다.
[흐흐흐...... 공중에 뜬 호박이다!]
이 말뜻은 유현강이 공중에 떠 있는 틈을 타서 합세해 죽여 버리자는
것이었다. 하기야 중인들도 모두 일류 고수들인 만큼 그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 만무했다. 유현강의 몸이 이 장 가량 솟아올랐을 때 중인들은
모두 허공을 향해 쌍장을 쳐올렸다. 그런데 이때 유현강의 입에선 커다禎
란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는 게 아닌가.
[흐하핫...... 좋은 기회지, 좋은 기회! 한데 내가 너희들을 단번에
죽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유현강의 몸은 허공에 뜬 채로 원을 그리며 선회했는데 갑자기 거꾸
로 뒤집혀 다리는 위로 머리는 아래로 향하였다. 그러자 허공에 붉은
동그라미가 생기더니 동시에 중인들이 쏟아 낸 장풍은 붉은 동그라미가
회전하는 방향을 따라 이끌리듯 빨려들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이십여
명이 한꺼번에 쏟아 낸 장풍의 기류는 그 붉은 동그라미에 닿자 순식간
에 위력을 잃고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염양칠환장이다!]
칠교요호가 경악에 찬 소리를 내질렀다.
[앗! 이게 바로 염양......]
중인들의 외침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홍색의 동그라미는 황색으로 변
하였고 차츰 아래로 내려와 곧 중인들의 머리를 눌러 버렸다.
[악!]
[으악!]
[......]
천지를 진동하는 비명소리가 연이어 울려퍼졌다. 이십여 명 중에 십狀
여 명은 밖으로 탈출하였으나 여덟 명은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로서, 쓰러진 여덟 명은 이미 저세상으로 가
버렸다. 땅에 내려선 유현강의 얼굴에는 더욱 살기가 충만해 있었다.
그는 땅에 쓰러져 있는 시체들을 한 차례 둘러보더니 다시 무표정한 얼
굴로 중인들에게로 눈길을 옮겼다.
[여덟 놈을 황천으로 보냈으니 자, 죽고 싶은 자 또 덤벼라!]
해지대사가 차가운 음성으로 외쳤다.
[시주의 수단은 너무 잔인하구나! 자, 빈승은 기꺼이 목숨을 너에게
바치겠다!]
그러고는 그는 재차 맨 먼저 유현강을 덮쳐 갔다. 죽음이란 사람들에
게 공포를 안겨다 주지만 강한 저항력을 유발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해
지대사의 지금 같은 행동도 물론 그런 마음 상태에서 일어난 반발심에
기인된 것이었거니와, 뒤이어 중인들의 입에서도 반발심에서 우러난
외침소리가 터져 나왔다.
[유가야! 좋다, 목숨을 바치겠다!]
[너도 살아 남지 못하리라!]
그와 동시에 십여 개의 그림자는 또 유현강을 덮쳐 왔다. 바로 이때, d
석산 아래서 돌연 고막을 찢는 듯한 말소리가 들려 왔다.
[영마가 세상에 나타나면......]
곧 이어 사방에서 동조하는 음성이 들렸다.
[백검이 천하를 휩쓴다......]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