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장소 : 광주시 북구 일곡동 <한새봉 맨발길>
일 시 : 2024.05.02(목)
참 가 : 강공수 김영부 나종만 박남용 양수랑 윤상윤 윤정남 장휘부 등 8명
불 참 : 김상문(서울행) 김재일(신병) 이용환(집안 일) 정원길(지병) 등 4명
회 비 : (80,000원)
식 대 : 신철남 협찬(추어탕세트 12,000원*9=108,000원)
금일 잔액 : (오늘 회비는 회장이 80,000원 보관 중)
이월 잔액 : 719,000원
총 잔 액 : 719,000원
윤정남과 나는 동구문화센터 앞에서 강공수의 차를 타고 <일곡중앙교회> 제2주차장 노변에 주차한 다음 <일곡중앙교회>로 들어갔다. 5층으로 지어진 두 동의 웅장한 건물이 눈앞에 우뚝 서 있었다. 밝은 적 벽돌로 지어진 두 건물 중 하나는 예배를 보는 교회였고, 또 하나는 청소년들의 심신(心身)을 단련하는 교육시설인 듯하였다. 십여 분을 기다리는 동안 김영부에 이어서 나종만이 그리고 윤상윤과 장휘부가 도착하였다. 마지막으로 뜻하지 않는 낙상사고로 병원에 입원해 있는 부인 때문에 10분쯤 늦겠다던 박남용이 약속한 10시 이전에 승용차를 타고 도착하였다. 합창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부인이 방금 일어났으니 으레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더니, 누군가 의자를 빼버려서 그만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는 것이다. 다행히 골절은 아니었지만 충격으로 뼈도 놀라고 근육도 놀라서 1주일 넘게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고 하였다.
일곡동은 한두 번 와 본 적이 있지만 <한새봉>은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는 매우 생소한 곳이었다. 그래서 박남용이 와서야 한새봉으로 발길을 잡을 수 있었다. 우리 산우회원 8명은 박남용의 안내에 따라 한새봉으로 향하였다. 한새봉은 도시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성벽처럼 <한새봉농업생태공원>이라 새겨진 구조물이 있어서 그 안으로 들어갔다.
다랭이 논처럼 생긴 텃밭의 맨 아래에는 습지인데, 전라도 방언으로 말하면 둠벙(웅덩이)이 있었다. 이 다랭이 텃밭은 주민들에게 돈을 받고 분양해 주어서 3무(三無, 무 멀칭, 무 농약, 무 화학비료) 농법으로 작물을 가꾸고 있다고 한다.
다랭이 텃밭의 왼쪽 산기슭에서 능선으로 올라가는 길이 시작하는 지점에 <한새봉맨발길)이 조성되어 있었다. 세족장(洗足場)과 등산객의 먼지를 떨어 낼 수 있는 공기청소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거기에서부터 신발을 신고 다닐 수 있는 등산로와 신발을 벗고 다닐 수 있는 맨발길이 조성되어 있었다. 어떤 남자가 대빗자루로 맨발 길을 쓸고 있었다. 그 분의 안내로 우리 일행 8명 중 7명이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걸어 올라갔다. 약 300m쯤 올라갔더니 정자(亭子) 옆에 3평방미터쯤 되는 사각형의 <황토 반죽 탕>이 있었다. 맨발 걷기를 즐기는 사람들은 그 황토 반죽 탕 속에서 어싱(EARTHING)을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정자에는 물이 든 패트 병이 많이 놓여 있었다. 이 황토 반죽 탕에서 어싱을 마치게 되면 발에 묻은 황토가 아까워 패트 병의 물로 황토반죽을 씻어내어 황토의 유실을 막기 위한 고육책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여기에서 맨발 걷기를 하고자 한 사람들은 올라 올 때, 누구든지 아래에서 패트 병에 담긴 물을 하나씩 가지고 올라오는 것이 불문율이라고 하였다. 한참을 황토 반죽 탕에서 어싱을 하다가 우리도 발에 묻은 황토 반죽을 패트 병의 물로 씻어낸 다음 맨발로 한새봉을 향하여 걸어 올라갔다. 한새봉으로 올라가는데 능선 너머 북(北)쪽에서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학교가 있어서 학생들이 떠드는 소리 같았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소리는 <살레시오 중·고등학교>의 학생들이 낸 소리였다.
한새봉에 도착하였다. 한새봉은 왜 한새봉이라 부르게 되었을까? 이 봉우리의 형국이 황소가 누워있는 모습이라 하여 ‘황소봉’이라 하였고, ‘황소봉’을 점차 사람들이 ‘한새봉’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한새봉 정상에서 서쪽 인듯한 능선으로 더 내려갔다가 되돌아 왔다. 그리고 세족장(洗足場)에서 발을 씻은 다음 <일곡(日谷)에 자리 잡은 광산(光山) 이씨(李氏) 내력>이란 비(碑)를 읽어 보았다. 내용은 조선시대 임진왜란 이후, 광산이씨의 11세(世) 일곡(逸谷) 이남(李楠, 1603~1653)이라는 사람이 이곳 일곡(日谷)이란 마을로 이주해 오면서 이곳에 광산이씨가 세거(世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광산이씨의 입향조(入鄕祖) 이남(李楠)이라는 사람의 호(號) 일곡(逸谷)과 한자(漢字)는 다르지만 이 마을의 이름 일곡(日谷)과 연관이 있어 보였다.
한새봉농업생태공원 입구의 둠벙 옆에 있는 정자에 자리를 잡고 ‘금주의 노래’를 불렀다. 지난번에 불렀던 정훈희가 부른 가곡 <꽃밭에서>와 <과수원길>을 불러 보았다. 우리가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 박남용이 옆에서 스마트폰을 만지고 있더니 나중에 동영상을 보여 주었다. 둠벙에서 물오리가 교미를 하는 순간을 동영상으로 포착한 것이다.
우리는 <한새봉농업생태공원>을 뒤로 하고 점심을 먹기 위해 박남용이 추천한 <대박추어탕>으로 향하였다. 우리가 처음 집결지로 잡았던 일곡중앙교회 제2주차장 건너편에 그 식당이 있었다. 그런데 막 점심때인지라 그 식당으로 갔더니, 손님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일반인과 향토예비군복을 입은 사람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그 큰 식당을 꽉 매우고 있었다. 먼저 온 손님들이 식사를 하고 나간 다음에야 우리가 들어갈 자리가 겨우 마련되었다.
‘양 많은 추어탕’은 1만원이고, ‘추어탕 세트’는 1만 2천원이었다. 박남용이 30번은 더 왔다면서 추천하였으니 우리들은 기대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강공수가 아침부터 이 지역에 살고 신철남을 초청하였더니, 오늘 일이 있어서 우리와 합류하지 못한다던 신철남이 지금 오기로 하였다고 하여, 우리는 먼저 회비를 1만원씩 거두었다. 그때 강공수가 철남이 식비로 1만원을 더 내려하였다. 우리가 그 동안 모아 놓은 돈이 충분히 있으니까 걱정 말라면서 그 돈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신철남이 온 뒤에 그가 보고 있는 자리에서 식비를 거두면 마음에 부담이 될까봐 그냥 우리가 신철남의 마음을 가볍게 하려고 미리 거둔 것이다. 그런데 신철남이 식당으로 들어오면서 주인과 대화를 나누더니 자기의 신용카드로 먼저 식비를 계산해 버리는 것이었다. 우리가 그를 막을 틈을 주지 않고 잽싸게 행동해 버린 것이다. 그는 색소폰 연주 시늉을 하면서 오늘 행사가 있어서 돈이 조금 생겼으니 걱정 말라 하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은혜를 되로 주려던 것이 오히려 말로 받게 되고 만 것이다. 우리는 꼼짝없이 친구의 배려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먹은 1만 2천 원짜리 ‘추어탕세트’는, 여러 가지 반찬이 나왔다. 그 중에서도 특이한 것은, 돼지고기 수육 한 접시와 홍어 한 접시 그리고 신 김치 한 접시로 삼합(三合)을 하여 무 잎에 싸서 먹게 한 다음에, 밥과 푹 삶은 시래기가 든 구수한 맛의 추어탕이 나왔다. 그런데 밥이 무슨 쫄깃한 과자처럼 만나게 씹혔다. 그것을 다 먹은 다음에는 또 작은 솥단지에 담긴 누룽지가 나왔다. 모든 음식이 너무 맛이 있어서 배가 불렀지만 다 맛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박남용이 마음먹고 추천할 만한 ‘맛집’이었다. 벽에 붙어 있는 기록들을 보니까 유명인사들의 방문기가 적혀 있었다. 우리는 신철남 친구에게 맛있는 점심을 얻어먹은 답례 인사를 하고 식당을 나왔다.
오후에는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인근에 있는 31사단에서 대민행사가 있다는데 각자 오후 일정이 있어서 그냥 각자 집으로 돌아가기로 하였다.
첫댓글 역시 아석의 등산 후기는 함께 하지만 보지 못한 이야기들이 많다.
고은 시인의 내려가는 축복 : '내려갈 때 보았네 /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생각이 났다.
목요산우회 산책 장소를 바꾸니 더 새롭고 또다른 감동을 자아내는 듯 했다.
이 다음에는 동작골, 깃대봉, 편백나무숲, 제2수원지.너릿재, 원효사길 등등도 좋은 목적지라 생각이 되었다.
박교수!
자네들의 한새봉 탐방기 잘 읽었네. 모시고 싶어도 모시기 어려운 친구들이 오셔서 반가운 마음에 점심 한그릇 대접한 것인데, 과분한 치사를 듣게되어 되레 민망한 마음이네.
여기 살고있는 나도 모르는 내용들이 들어있어서 재미있게 읽었네.
목요산우회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네.
기회되면 또 만나요.
늘 건강하게나.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