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심덕(尹心悳) 평전
근대 예술의 여명기에 연극과 음악에서 빛나는 존재로 부상.
암울했던 시절 민중의 가슴에 예술의 꽃을 심어 주었다.
신 여성들 의 삶의 구도는 전통사회가 요구하는 가치 체계 와 달랐다.
그런 가치 갈등에서 20-30년대 여성들은 어떤 형태로든 피해자 였다.
그 피해 증후군 가운데 하나가 그런 갈등을 겪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한 情死였다.
死의 讚美(사의 찬미)/작사와 음악 : 윤심덕
이바노비치 /도나우강의 잔물결의 곡에 맞추어 불렀다.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메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고만 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건 허무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도다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 들아 너 찾는 것 허무
허영에 빠져 날뛰는 인생아
너 속였음을 너 아느냐
세상에 것은 너에게 허무니
너 죽은 후는 모두 다 없도다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
윤심덕(尹心悳)
1897 평양출생 - 1926 현해탄 (29세)
본관 / 파평
호 / 수선(水仙) / 미혼
1918 경성고등보통 사범학교 졸업
조선통독부 관비 유학생으로 선발(최초 관비유학생)
일본 우에노 음악학교 성악과 입학
1922 우에노 음악학교졸업
한국 최초 소프라노 가수 배우
1923 귀국 경성사범 부속 음악선생
집안이 가난하여 성악으로는 생계가 어려워
대중가요를 부르고 연극 무대에도 등장함
귀국 3년후 동생의 미국 유학 전송차 일본에 갔다가
사의 찬미 녹음을 마치고 김우진과 귀국도중
현해탄에서 동반투신 자살.
영화 / 死의 讚美 (Death Song, 1991)
한국 최초의 여성 성악가(소프라노) 윤심덕과 애인 김우진의
정사(情死) 사건을 그린 영화.
감독 김호선
제작 김승
각본 임유순
주연 장미희, 임성민, 이경영
상영시간 160분
제작사 극동스크린
출시연월 1991년 9월 21일
줄거리
1991년 극동스크린이 제작하였다. 김호선이 감독하고 장미희와 임성민이 주연을 맡았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성악가 였던 윤심덕(尹心悳)과 애인 김우진(金祐鎭)의 정사 사건을
영화화 하였다. 1926년 여름 경성. 윤심덕의 자살을 알리는 호외에 윤심덕과 김우진의
가장 가까운 사람 이었던 홍난파는 절망적인 기분에 사로잡히며 그들의 진실을 알고 있는
친구로서 윤심덕의 과거를 회상한다.
1920년 봄 동경. 관비 장학시험을 치르고 온 가난한 유학생으로 동경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있는 윤심덕은 당당하고 밝은 성격으로
뭇 유학생들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거침없이 자유 분방한 생활을 한다.
1919년 최초의 관비 유학생 윤심덕(장미희)은 도쿄[東京]음악대학에 다니면서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순회극단 토월회에 가담, 와세다대학교 영문과에 재학 중이던
김우진(임성민)과 음악을 전공하던 홍난파(이경영)를 만난다.
윤심덕은 호남 대부호의 아들이자 아내와 딸을 둔 유부남인 김우진과 사랑에 빠지고,
홍난파는 윤심덕을 사랑하면서도 깊은 우정으로 두 사람을 대한다.
조선에 돌아온 윤심덕은 성악가로서 명성을 얻지만 일본인 파티의 초청을 거절한 뒤 무대를
잃어버리고 대중가수로 전락한다. 경성에서 연극활동을 하던 김우진은 연극에 대한 사회의
이해 부족으로 낙향하고, 가문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도피하듯 일본으로 떠난다.
그들은 북해도의 여관에서 다시 만나 현해탄 선상에서 동반자살을 한다.
토월회
극작가 박승희(朴勝喜 /일본 메이지대학 영문과 졸업/1901-1964)가 설립한 연극조직
대한제국시대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의 3째 아들이다. 한국 신파극의 발전에 이바지 하였으며
막대한 재산을 투입 토월회를 조직 연극발전에 기여했다. 1926년4월 자금난으로 56회
공연을 끝으로 해산 하였다. 그후 1928년 10월 우미관에서 재기공연을 갖고 김우진과
윤심덕의 사랑을 그린연극 <死 의 승리>를 공연하였다. 윤심덕과 김우진은 연극조직
토월회에서 서로 만나서 사랑을 하게됐다.
운명을 예감하는 폐부를 찌르는 가사내용
윤심덕의 자작시에 이비노비치의 "다뉴브강의 잔물결" 멜로디를 얹어 동생 윤성덕의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부른 것이다. 마치 윤심덕 자신의 운명을 예감 하기나 한 것같은
가사와 폐부를 찌르듯한 날카롭고도 절망적인 창법이 어울려 "사의 찬미"가 대유행을
하게된 것이었다. 허무와 염세적인 비극적인 가사는 이렇게하여 우리 유행가의 기폭제가 되었다
신여성으로 자유연애의 선구자
일제하 가부장제가 철저하던 1920년대의 신여성으로 자유연애의 선구자였으나
끝내 현해탄에 투신해야 했던 비련의 여가수 윤심덕의 일대기를 조명한 시대성 멜로 영화.
1919년 우리나라 최초의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간 윤심덕은 동경 음악 대학에
적을 두고 야망을 불태운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자유 분방함과 넘치는 매력으로,
그녀 주위에는 항상 연모의 눈길을 보내는 남학생들이 있다. 그러던 중 윤심덕은
유학생들이 결성한 극예술협회의 중심 인물인 김우진과 만난다. 와세다 대학에서 연극을
공부하던 그는 고향에 아내와 딸을 둔 유부남이었다.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져들고,
홍난파는 윤심덕을 사랑하지만 깊은 우정으로 두 사람을 대한다.
갑부 아들 이영문의 유혹의 덪에 걸린 철부지 새 한마리
이영문은 재벌의 아들로서 조선악단을 증흥시키는것이 여생의 꿈인데 윤심덕의 노래를 듣고
후원할 생각이 들었다하며 요구한데로 뒷받침 하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그리고 조선호텔
식당에서 만나 위장된 유혹의 망에 철부지 새 한 마리는 걸려들고 말았다.
윤심덕에게는 도쿄 유학시절에 사랑을 맹세한 애인이 있었으며 그 애인 김우진(金祐鎭)에게
사연을 말해 동의까지 얻었다. 음악 증흥사업을 위해 학교를 그만두게하고 우선 살집을
마련해 주었으며 음악학교 용지를 물색하는등 사업이 진행되어 나갔다.
이렇게 진행 시키면서 집밖에서 만나던것을 자기 양옥으로 불러 만나고 낮에 만나던것을
시간이 안난다는 핑계로 밤에 만나고 응접실에서 만나던것을 병을 핑계로 침실로 까지 불러들였다.
그러는 사이에 항간에 소문이 나돌았다. 李가의 양옥방 침실에서 비명소리가 났느니
여자 울음 소리가 났느니 윤심덕이가 李가의 첩으로 들었느니 윤심덕(尹心悳)이 돈에 환장했느니
하는 와중에 그 소문을 들은 도쿄의 연인 김우진(金祐鎭)으로부터 절연장까지 날아들었다.
윤심덕(尹心悳)의 만주 유랑 1년
갑부에 농락 당하고 연인 김우진(金祐鎭)으로부터의 절연장은 커다란 충격이였다.
만주의 장기유랑은 이영문과의 소문을 잠재우고 김우진과의 사랑도 회생시키는데 필요했던
진통의 세월이였다.
만주에서 귀국 첫무대 동도(東道)에서 자신을 닮은 배역에 눈물
만주에서 1년만에 귀국 심기 일전 코자 성악가에서 연극배우로 변신 그가 선 첫무대는
토월회 연극 주제인 여 주인공으로 나오는 동도(東道)였다.1925년 초가을 을지로3가에
있었던 광무대(光武臺)의 배우 화장실에서 선배인 석금성(石金星)이 신출내기 윤심덕의
얼굴화장을 손질해 주고있었다. “어떤 잠재 심리의 표출 인지는 알수없으나 윤심덕은 별나게 붉고
진하게 입술을 칠했으며 여러번 충고했으나 들어먹은 적이 없었다“고 석금성은 회고했다.
동도(東道)라는 작품은 그녀가 맡은 안나 역(役)은 사나이 거짓사랑에 속아서 신명을 바친
순박한 여인이다. 한데 윤심덕은 대사마다 흐느낌과 울음 때문에 대사를 알아들을수가 없었다.
잠시 무대 뒤에 나와있는 윤심덕을 보고 연출자인 박승희(朴勝喜)가 충고했다.
“배우는 관중을 울려야지 자신이 울어서는 안된다 배우가 울면 관중의 마음속에서 슬픔이
증발해 법이다“고 말했다. 다음 공연부터는 미리 실컨 울어 눈물을 말리고 나오라는
말을 듣고 극장문을 나오려하는데 꽃집에서 장미 꽃다발 하나가 윤심덕에게 전달이 되었다.
꽃속에 꽂힌 명함을 본 윤심덕은 그 꽃다발을 땅에 던져 짓밟아버렸다 그리고 현기증 때문에
몸을 가누지 못해 누군가가 부축을 해야만 했다. 윤심덕이 무대에서 운것은 실은 자신의
처지를 운것이며 그토록 자기를 울린자가 바로 그 장미 꽃다발을 보낸 이영문이였기 때문이었다.
다시 도쿄행 김우진과 재회(再會)
잠시 연극 무대에 있다가 자신을 망친 이영무의 마의 새장을 피해 도쿄로 건너가
절연장을 보낸 김우진이 지신의 진정을 실감 할때까지 침묵의 데이트를 했다.
그들 사이에 앙금이 가시고 사랑이 재연 되었으나 그것이 기구한 숙명을 극복하기에는 한계를 느꼈다.
사(死)의 찬미(讚美) 녹음뒤 자살
도쿄에서의 김우진과의 다시 조우하던 무렵 일본 오사카에 있는 레코드 회사에서
녹음 교섭이 들어왔다. 그녀는 이화전문의 교비생으로 미국으로 떠나는 동생 윤성덕(尹聖悳)을
전송할겸 만나서 윤성덕의 피아노 반주로 레코드 회사의 녹음을 하고 예정에 없던 곡 하나를
추가하고 싶다고 했다. 그 노래가 자신이 작사하고 이바노비치의 ‘도나우강의 잔물결’의 곡에
맞추어 부를 사(死)의 찬미(讚美) 다. 사흘동안 취입을 하고 윤심덕과 김우진은 관부연락선을 타고
돌아오는길에 두사람은 현해탄에서 투신정사를 하게된다. 이 정사 사건은 각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사(死)의 찬미(讚美) 발표이후
사의 찬미가 발표된후 식민지 조선의 대중가요 음반시장이 활짝 열렸다.
암울했던 민중들의 가슴을 울렸다. 일본 에서는 식민지 음악 시장을 확보하는
교두보 역할을 하였으며 음반 산업자본이 식민지에 본격 진출하게되었다. 또한 축음기와 음반시장이
활성화 되고 일거에 대중 음반시장이 활짝 열였다. 이듬해 경성 라디오방송이 출범 하기도 했다.
이처럼 사의 찬미는 폭팔적인 인기였다.
투신정사 순간과 유류품 신극 연극의 유명한 연예사건
지난 3일 오후 11시에 시모노세키(下關)를 떠나 부산(釜山)으로 향한 관부 연락선 덕수환(德壽丸)이
4일 오전 4시경에 대마도 옆을 지날 즈음에 양장을 한 여자 한명과 중년신사 한명이 서로 껴안고
갑판에서 돌연히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을 하였는데, 즉시 배를 멈추고 부근을 수색하였으나
그 종적을 찾지 못하였다. 승객 명부에서 사라진 남자는 전남 목포부(府) 수교(水橋)
김수산(金水山, 30), 여자는 경성부 서대문정 2정목 173 번지 윤수선(尹水仙, 30)이라 하였으나
그것은 본명이 아니고 필명이요, 남자는 극작가 김우진(金祐鎭) 여자는 음악가 윤심덕(尹心悳)이였다.
유류품 으로는 윤심덕의 돈지갑에 현금 1백 40원과 장식품이 있었고 김우진의 것으로는 현금 20원과
금시계가 들어 있었다. 연락선에서 조선 사람이 정사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 이라더라.
(조선일보 사회면 -부산발-) 정사(情死)부인설에서는 유류품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했다.
자살 결심의 시점
두사람은 먼동이 터오는 새벽 4시에 투신 자살을 했다. 한 심리학자는 인간이 자살하는 빈도가
가장높은 시간이 먼동이 터오는 시점 이라고한다. 심리적으로 밤새도록 삶과 죽음의 갈등 속에서
번민 하다가 또 하루가 닥아오는 밝음이 오면서 문제를 해결 하지못한 두려움 때문에 이라고 한다.
투신(投身)정사(情死) 부인설
<사(死)의 찬미(讚美)> 가 공전의 베스트 셀러로 대중의 심금을 울릴때
정사한 윤심덕(尹心悳)과 김우진(金祐鎭)이 이딸리아에 살고있다는 풍설이 나돌았다.
정사 후 5년이 지난 어느날 김우진의 아우인 김익진(金益鎭)이 총독부
외사과에 출두하여 이 두사람을 찿아달라는 수색원을 제출했다.
정사 설을 부인하는 사람의 말을 듣고 아우가 제출한 수색원의 근거는
尹心悳과 金祐鎭이 바다에 뛰어드는 현장을 목격한 사람이 없다는것이다.
尹과 金이 일등실 선원을 돈으로 매수해 정사 한것처럼 소문을 내고
이들은 나가사끼를 통해 중국 이름으로 상하이로 갔다가 이딸리아 로마로
가서 악기점을 경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후꾸오까의 한 신문사 사장이 로마에서 윤심덕(尹心悳)과 김우진(金祐鎭)으로 보이는
한쌍의 부부가 악기점을 경영하며 남편은 극문학을 부인은 성악공부를 하고
있음을 보았다는 기행문이 동기가 되었다. 또한 그 방증으로 <사(死)의 찬미(讚美)>를 취입할 때
반주하는 동생 윤성덕(尹聖悳)에게 “내가 성공하기 전에는 절대로 세상에 나타나지
않을테니 나를 찿지말라“ 고 했다는 점과 거부인 金祐鎭의 부모가 엄청난
현상금을 걸고 시신이나 유류품을 찿았으나 나타나지 않은점 그리고
尹心悳의 집에서 일절 尹의 상을 치르지 않은점등을 들었다.
심지어는 <사(死)의 찬미(讚美)>가 때돈을 벌수있는것 이라는 레코드사로부터 3만원이라는
거금을 미리받고 사랑의 도피를 했을것이라는 추측도 나돌았다.
동생 윤성덕은 “언니(윤심덕)는 만인의 호기심 속에서 익사했거나 호기심이
살해 한것일뿐 죽지 않았음을 확신한다“ 하고 영원히 그 사실여부가 밝혀지지
않더라도 그의 죽음을 믿지는 않겠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총독부의 수색원에 대한
이딸리아 영사관측의 회답은 레코드 가게를 하는 한국인 부부를 찿을수없다는 보고가 있었다.
또다른 情死 부인설
한편으론 닛토 축음기 주식회사의 상술에 의한 인기로 가장된 타살 이라는 설도 있고
윤심덕이 정부와의 둘만의 꿈을 위해서 아무도 모르게 닛토 축음회사 와 결탁 하고
해외로 도피 했다는 설도 있고 한국 어디선가 창씨 개명하여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느니
분분 하지만 윤심덕은 현해탄의 수중 고혼이 된것은 틀림없는 사실로 결론 지어진다.
윤심덕(尹心悳) 성장배경과 성격
(1897∼1926) 평양출생. 29세에 요절. 개화기 기독교를 신봉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평양 남산현 교회 권사인 윤호병 와 전도 부인사이에 4형제중 2째딸로 태어났다.
위로는 언니 윤심성은 안동으로 시집을 가고 아래 여동생 윤성덕(이화여전졸 미유학)과
남동생 윤기성(유학)이 있다. 부모가 늙고 가정이 어려웠고 동생들이 어려서 윤심덕은
가장 역활을 하며 가정을 돌봐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숭의 여학교를 졸업 1918년 경성여고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총독부 관비생으로
일본에 가서 유학, 성악을 전공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관비유학생. 일본 도쿄 우에노 음악학교를
나와 서울 여자 고보에서 성악을 가르쳤던 최초의 성악가인 엘리트 신여성이다.
귀국후 경성 사범 부속학교 음악 선생으로 근무하면서 성악가로서 명성을 떨쳤다.
그후 토월회 배우로 활약 하다가 유행가 가수로 전향, 특히 "사의 찬미" 라는 노래로 인기가 높았다.
윤심덕은 밝고 쾌활한 성격으로 거침없이 자유 분방 했다. 불같은 성격으로 거침없이 당당했다.
자존심이 강하고 돈이 떨어져도 남에게 구차한 소리를 하지않은 콧대높은 여인이였다.
동양 여성으로 보기드문 몸맵씨와 어지간히 존대를 아끼던 왈패(?) 였으며 넘치는 매력과
용모와 사교성으로 숱한 염문에 시달렸다
김우진(金祐鎭) 성장배경과 성격
1897호남의 대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7세때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의 품에서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의 엄격한 유교적 법도에 가르침을 받았다. 16세때 단편 <공상문학>을
발표 문학 재질을 보였다. 구마모토 농업학교와 와세다 대학 영문과(희곡전공)를 졸업했다.
연극 창작과 연출에 남다른 정열을 보였으며 토월회에서 동갑내기 윤심덕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성격은 윤심덕과 달리 나약하고 섬세하고 지적 이였다. 고향에 아내와 딸이 있는 유부남이다.
김우진은 1924년 졸업과 동시에 고향에 돌아와 토지관리를 하며 창작을 계속했으나 토지에 묶인
자신의 신세를 비탄하는 나날 이였다. 니체와 마르크스의 사상에 심취했고 스웨덴 극작가
스트린드베리 의 표현주의의 기법을 도입했다. 우리 연극은 비로소 ‘낡은 신파’를 털어낼수 있었다.
그는 사회 비평을 통해 식민지 지식인의 울혈(鬱血)을 거침없이 뱉어냈다 “이광수 류(類)의 문학을 매장하라”
김우진(金祐鎭)의 부인 정점효
김우진의 처 정점효는 윤심덕과는 달리 신식교육을 받지못하고 오직 전통적인 가정교육에
얽메어 살아왔다. 처 정점효는 남편 김우진 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으며 만석꾼의 지주집
맏 며느리로서 전형적인 가정 주부로 묵묵히 시집살이를 했다. 신 사상에 물들은 남편의 얼굴보기가
힘들었다. 일부 종사을 해야하는 숙명적인 기질을 가진 가부장제도의 전형적인 여인 상이다.
유부남 김우진(金祐鎭)의 사랑의 고뇌
미혼도 아니고 유부남 으로서 김우진은 미혼인 윤심덕과의 사랑의 고뇌를 다음과같이 표현하고있다.
“나는 깊이 나의 운명에 대한 저주를 들었다. 그것은 끊임없이 나를 협박하는 악마이다.
이 악마의 포위 속에서 한시 라도 마음의 안식을 준것은 그녀 였다. 아아 나는 자기만을
위한 사람일까? 자기 충만을 위해서만 사랑을 하는자인가? 그리고 이 자기를 위한 자와
자기 만족을 충족 시킨 뒤에는 다시 그녀에게 무관심한 태도를 취한것인가 나의 변덕스러운
마음이 변하여 바뀜이 왔을때 나는 그녀에게 등을 돌렸다. 과연 옳은 일이었는가 도덕적
양심은 나를 구속하나 그 보다도 나를 괴롭히는것은 자기의 약함이다. 자기의 운명적
견인이다. 아아 나는 힘이 필요하다. 눈과 살과 피가 넘치는 비장한 힘이 필요하다“
라고 말했다. 내용으로 보아 부친의 엄명으로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했지만 정은 없어도
자식은 낳는다는 말처럼 목포에 본처와 자녀를 둔 김우진이 윤심덕과의 만남을
몹시 괴로워하고 있는점이 유부남인 그의 심정속에 잘 나타나고있다.
동반 투신 자살후 기성 세대의 비평
그들의 투신은 일대 센세이션을 이르켰으며 일대 사건이고 대 지진이였다.
기성세대의 눈길은 곱지않았다. 언론들은 하나같이 “전도 다망(多望)한 청춘남녀의
경솔한 최후“라고 점잖게 나무랐다. 당시 언론들은 명사들이 총 출동하여
신세대의 인권에 대한 구세대의 살인이라고 비난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세정(世情)은 무심 했다.
1920년 조선사회를 휘감았던 자유연예 풍조에 대한 반감도 있을 터였다.
두사람은 이 나라 근대 예술의 여명기에 연극과 음악에서 빛나는 존재였다.
시대를 치열하게 고뇌하던 선각자였다. 그러나 이들은 그저 ‘비련의 주인공’으로
묻히고 말았다. 김우진은 우리나라 근대 공연예술의 터를 닦았다.
윤심덕(尹心悳) 평전을 끝맺음 하면서
신 여성이 살고 싶고 살아갈 삶의 구도는 전통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고
부여하는 가치 체계 와 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그 가치 갈등에서 20-30년대의
한국 신여성들은 어떤 형태로든지 피해자였다. 그 피해 증후군 가운데 하나가
그 갈등을 겪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는 정사(情死)였다.
기재된 평전이 윤심덕 님의 아름다운 모습에 누를 끼칠까 두렵다.
김우진(金祐鎭) 윤심덕(尹心悳) 두분의 명복을 빈다. -끝- 2008/6/3 솔잎새
(참고문헌 : 이규태 역사 엣세이)
저녁때에는 가끔 재생이 안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낮 시간때에는 잘 나옵니다
첫댓글 죽지 말아유 죽으면 남는게 없다니 깨유 윤심덕을 그 시절 잘 나가는 남자들이 얼마나 부러워 했는지 쬐끔 들었구만유 근디 그 때 일본에서는 한창 삶을 초개 같다며 회의 하다가 마침내 자살하는게 극심했던 아니 대단했던 유행이라고 들었구만유 한국 최초의 신여성 남자라면 모두가 부러워 했던 그도 그 유행병에 걸리었나 보구랴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갔는가 김어수 시인의 수필에 보면 그분도 년상의 윤심덕을 흠모한 구절이 있을 정도이니 동년배의 남자 들에게야 았찔 하구만유 ㅠㅠㅠㅠ
김어수 시인에 대해 연구를 많이 하셨으니 수필명을 알려 주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궁금합니다.
두분의 행적에 대해서 일방적 칭송이나 폄하는 맞지 않아 보입니다. 당시 세계는 가치관의 혼란 속에 특히 아시아의 여성들의 시대적 위상은 보잘 것 없었다고 보이고 식민지 조선의 피끓는 지성과 젊음들의 고뇌는 저로서는 다만 유추해 볼 뿐이지요 . 선천적으로 진취적 기상이 월등한 분이었을 것 같고 뜨거운 가슴을 가진 조선의 여류 선각자 였다고 봅니다. 허무하게도 시대의 파고를 넘지 못해 현해탄 수중 고혼으로 스러졌지만 짧은 생을 미련없이 살다간 분이라고 생각하니 비감이 차오르는군요.
선각자는 외롭지요. 그렇지만 허무주의는 권장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김초리 시인님께::: "차라리 사랑하는 사람과"----------->를 "차라리 사랑하는 이 있어" 로 고쳐 주세요.
원작자가 수정을 원하면 고쳐드리는 것이 예의일 것 같네요.